오늘은 현대미술에 대해 좀 딱딱한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제가 할수 있는 한 편안하게 얘기를 할 건데요..
물론 이런 내용 몰라도 되지만.. 나중에 다른 카드에서 가끔은 이런 얘기를 머리 속에 기본적으로 두고 있으면 길게 얘기 안해도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넘어가는 편리함이 생기기에..
레퍼런스 삼아 하나 깔아두렵니다.
제목부터 좀 딱딱하죠?
일단 시작해 볼께요~
한 명의 재기발랄한 천재가 예술의 외연을 확장하고 예술가의 지위를 크게 격상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선각자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증명하는 좋은 예가 되는 것 같아요. 마르셀 뒤샹은 19세기 후반(1887년)에 태어나 20세기 후반(1968년)에 사망할 때까지 '뒤상스러운' 삶을 살다 떠나갔습니다. '뒤상스러움'이 어떤 것인지 한번 살펴볼까요?
현대미술을 얘기하려고 하면 빠지지 않은 마르셀 뒤샹. 그런데 막상 이분의 작품을 찾아보면 그가 직접 '손으로' 만든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에 당황하게 되죠.
20세기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선정된 화장실 변기를 그대로 가져다 전시한 '샘(Fountain)'을 비롯해서 자전거 바퀴, 안장, 병 건조기와 같은 공산품이 그의 주요 작품이다보니
"아따~ 그까이꺼 예술... 나도 할수 있겄네... 그까이꺼 대충 마트에 가서 이것 저것 골라서 전시하면 되는거 아녀?" 라는 말이 절로 나오죠. "그게 예술이면 날파리도 새겠다"라는 말도 할수 있을 것 같고, "음.. 이 참에 나도 예술 좀 해볼까?" 하는 막연한 자신감(?)도 생길 것 같네요. 이런 질문에 대한 제가 생각하는 답은 이 포스팅의 말미에 적도록 할께요.
뒤샹이 현대미술에 첫 파문을 던진 것은 '샘'과 같은 레디메이드(ready-made) 예술이 아닌 독특한 누드 작품을 선보이면서 시작되요. 그 작품은 바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1912)인데요..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R.2>, 마르셀 뒤샹, 1912
기존의 누드 관념을 전복시키는 현대 미술의 신호탄이 된 이 작품은 그동안의 누드,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작품들을 상상한 사람들을 당혹시켰죠.

Ema (Nude on a Staircase)>, 게르하트 리히터, 1966
당시의 사람들은 '움직이는 누드'를 그것도 회화로 표현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죠. "누드는 계단을 내려오지 않는다. 누드는 누워있거나 어딘가에 기대있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없는 개념을 갑자기 들이밀면 인간은 당황하기 마련이죠. 자기 머리 속에 있는 기존 지식과 인지능력을 총동원해서 기존의 체계에 맞춰 재해석하려는 '방어기제'가 작동합니다. 이런 인지적 방어기제라는 일종의 AT필드가 뚫리고 새로운 개념을 인정하려면 소위 '멘붕'이 오게 되는거구요.
우리는 세상에 남성과 여성만이 존재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갑자기 신성(新性)이라는 제3의 성의 개념을 설득력있게 주장했다고 해보죠. 당연히 혼란스럽고 기존 우리 상식을 전복시켜야 하니 쉽지 않은 일이겠죠?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는 원래 입체파 전시회에 출품하려던 작품인데, 주최측에서 작품이 너무 미래파(Futurism)적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맙니다. 지금 제가 봐도 입체파보다는 미래파 작품에 가깝게 느껴지는게 사실이에요. 미래파는 속도와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화폭에 나타낼수 있을까를 많이 고민했거든요. 그러다보니 마치 노출시간을 길게한 사진과 같은 이미지들이 등장하게 되었죠. 이 작품도 같은 맥락으로 볼수 있잖아요?
결국 뒤샹의 작품은 엉뚱하게 고국 프랑스보다는 당시 예술에 있어서도 구대륙에 맞설 뭔가가 필요했던 신대륙에 자극을 던져 미국에서 먼저 유명세를 타게 됩니다. 실제 그는 50년대 중반에 미국 국적을 취득하게 되고요.
20세기 예술의 개념을 흔든 사건은 이제 이어지는 화장실 변기 '샘' 사건이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뒤샹의 본격적인 행보의 신호탄을 올리는 사건인데요.

<샘(Fountain)>, 마르셀 뒤샹, 1917/1964
지금 뉴욕은 현대미술의 메카로 당당히 인정받고 있지만 20세기초 미국은 예술의 변방,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일천한 역사를 가진 미개한(?) 곳이었죠. 역사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생각인지.. 일군의 인물들이 새로운 전시회를 기획합니다. 유럽의 살롱전의 보수성을 타파한 완전 개방형 전시회로 사전심사없이 누구나 참가비만 내면 작품을 전시할 수 있게 한거죠. 뒤샹도 그때 이 전시회의 기획을 맡은 위원 중의 한명이었구요.
뒤샹은 문제작 '샘'을 마트에서 사다가 R.Mutt 라는 가명의 작가의 사인을 적어 제출합니다. 물론 참가비를 내고요. 그리고는 뒷짐지고 상황을 지켜보죠. 아니나 다를까... 기획위원들의 심기가 불편합니다. 이걸 어쩌지? 다 받아주겠노라 했는데.. 사전 심사 안한다고 했는데.. 이거 전시해야해 말아야해? 고민하다 결국 대놓고 전시는 포기하고 전시장 뒤편에 안 보이게 보관해 둡니다. 전시장 밖으로 내치지는 않았지만 내보이긴 싫었다는 거죠.
중간에 긴 과정스토리가 있지만 중간 생략하고 ^^ 결론만 말씀드리면 결국 이 사건은 뒤샹이 스스로 벌인 일이라는 것이 알려지고 일약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이제 생각해보죠. 마트에 널려있는 수많은 기성품 중의 하나인 변기를 뒤샹이 사다가 사인을 하고 전시장에 놓으면 그게 예술이 될수 있을까? 이 질문은 굉장히 폭넓은 질문으로 예술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담고 있죠. 현재 기준으로 판단할때조차도 기성품을 예술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분명 있으니, 당시에는 오죽했을까요?
소위 이런 물음은 일상적인 사물이 어떻게 예술로 변용되는가. <일상적인 것의 변용>이라는 철학적 테마로까지 이어집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평론가인 아서 단토(Arthur Danto)의 "The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place"라는 저서가 있기도 하구요. 지금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서 단토의 견해를 쉽게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크게 창작자, 비평가, 수용자, 그리고 맥락 정도로 나눌수 있었던 것 같네요.
당연히 창작자가 일상품을 이것은 예술이라는 선언을 해야 하고, 그것을 일상의 가능태에서 꺼내 예술의 현실태로 만들어주는 선언적 작업이 필요한거죠. 근데 어느날 제가 마시던 머그컵에 제 사인을 하고 '뜨거운 일상'이라는 제목을 붙여 예술품 선언을 했다고 가정해 보죠. 나혼자 주관적으로 선언했다고 예술이 되는 건 아닙니다. 이 주관적인 의도가 객관적인 맥락 안에서 공감을 받고 시대에 포용이 될때 비로소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죠. 객관적 맥락이라는 것이 바로 예술사/미학적 이론이 되고요.. 이런 지적인 맥락안에 수용될수 있을때 보다 예술 인증에 한발자욱 다가설수 있는거죠. 저의 '뜨거운 일상'이라는 작품(?)이 예술로 인정을 받으려면 이 고비를 넘어야 하죠.
뒤샹이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입을 통해서라기 보다 이제 비평가들의 몫으로 돌아갑니다. 그의 이 '돌출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예술가의 선택활동이나 생각 자체가 예술이 될수 있다는 이론적인 틀을 구축해 주기 시작합니다. 뒤샹 스스로는 돌을 던져놓고 모든 긍정적 해석과 비판적 해석에 대해 모두 침묵하는..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취했어요. 뒤샹은 돌을 던졌고 그 파문은 자가발전을 해서 커져갔다고 볼수 있는거죠. 일상적인 것을 예술로 변용시키는 마지막 주체는 결국 수용자가 되겠죠. 예술가가 던진 화두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 것인가 하는 매우 주관적인 해석행위를 통해 예술로서의 인정이 완성된다고 할수 있겠네요.
제일 앞에서 꺼냈던 뒤샹의 업적이 예술의 외연을 확장하고 예술가의 지위를 격상시켰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외연의 확장은 앞서 설명한 일상적인 것들, 기성품마저 단지 예술가의 선택행위를 통해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을 시발점으로 다양한 설치예술과 퍼포먼스, 관념미술을 탄생시킨 공적을 말씀드린거구요.. 예술가의 지위를 격상시켰다는 것은 적어도 예술품에 있어서만큼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말로써 지명함으로써 예술품을 탄생시킬수 있는 창조주의 지위까지 극단적으로 끌어올렸다는 의미에요.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와 같이 '예술품이 되어라 하매 예술품이 되었다'는 거죠.
뒤샹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분분합니다. 천재성은 인정하지만 시대적 흐름에 절묘히 편승한 입만 가지고 예술한다고 현혹하는 사기꾼이라는 평가와 20세기의 가장 비밀스러운 예술가이며, 4천년 미술사에 가장 파괴적인(disruptive) 작가라는 평이 공존합니다. 물론 현대미술이 꽃피게 된 도화선이 된 공적을 생각할때도 그렇고.. 실제 평가도 후자의 긍정적인 평가가 압도적이죠. 더구나 창조적 파괴와 혁신이 강조되고 있는 오늘날에 뒤샹과 같은 재기발랄함과 엉뚱함이야말로 예술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경쟁력에 있어서도, 조직의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닐까 생각해요.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을 보면서 '나도 예술해 볼까?' 하는 마음에 대한 해답이 되셨나요? ^^

이제는 보너스 짤들입니다.
마르셀 뒤샹 선생님.. 노년기의 모습이네요.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참고 계신 분같은 느낌이에요.

앞서 예로든 게르하르 리히터의 작품은 원래 사이즈가 이렇게 큽니다.
뒤샹의 1931년 작품 <자전거 바퀴> ㅡ.,ㅡa

1914년 작품 <병걸이> 그럴듯한 타이틀조차 안 걸어줍니다.
왜냐구요? 의미가 없으니깐요...

<미혼의 친구들에게 발가벗겨진 신부, 심지어 (큰 유리)>, 1913~23
이 작품에 대해서는 당대에도 의견이 분분했고 해석에 대한 정설은 없습니다.
철저히 수용자의 주관에 맡겨지죠.
재밌는 해석 중의 하나는 여성 아트 에세이스트인 조이한 씨의 의견인데요..
간단히 요약하면
둘로 나뉜 틀의 위쪽의 신부는 예술가들이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목표
틀 아래의 아홉 미혼의 친구들은 그 이상에 도달하려는 예술가들
항상 예술적 욕망에 불타오르는 아홉 친구들은 결코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없다.
그 욕망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자위를 통해서다.
미혼자들의 옷과 연결된 물레방아와 초콜릿 가는 기계는 자위를 상징한다.
초콜릿의 감각적인 쾌락의 특성이 이를 뒷받침한다.
미적의 절대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모든 예술가의 시도는 결국 흥분한 자위행위에 불과하다.
요약하면 이 정도인데요.. 저는 공감했어요 ^^
받아들이거나 아니거나는 각자의 몫이죠.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수염을 그려넣고 아래에 L.H.O.O.Q. 라 써놓은 작품
불어로 읽으면 그녀의 엉덩이가 뜨겁다는 뜻이 된다네요.
과거 예술가의 천재성이나 신비감에 대한 우상숭배를 과감히 파괴하려는 도전으로 간주되죠.

뒤샹은 여장을 하고 로즈 세라비(Rrose Selavy)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이 사진은 유명 작가인 만 레이가 찍은 작품입니다.
(은근 매력적이당.... 데헷)

도기로 만들어진 뒤샹의 샘을 본따 금으로 만든 세리 레빈의 1991년 작품입니다.
현대 예술에서는 기성품을 예술로 간주하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다시 모방한 작품도 예술로 인정받네요.
모방과 재현.. 시뮬라크르 세계에서의 예술에 대한 견해들도 재밌는 주제들인데
이 또한 언젠가 다룰 기회가 있겠죠.. ^^
이 카드를 읽으시고 하늘에 계신 뒤샹 선생님께서 제게 편지를 보내오셨는데요..
한번 읽어보세요~
친애하는 혜연님께~~~
바야흐로 1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추워지는 날씨에 너무 움츠리지 마시고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이승에 있을 때는 과묵한 컨셉으로 있으나 힘들었는데, 이곳에 와서나마 편지로 수다를 좀 떨어볼까 합니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는 1912년에 제작할 때, 저는 앙데팡당 전시를 위해 작업을 했지만 왠지 정숙하지 못한 그림이고, 누가 보더라도 아주 우스꽝스런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전시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하고 말았답니다. 그러나 저의 작품들이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해외전시에 이어 다음 해에는 뉴욕 아모리쇼에도 출품도 해봤지만, 작품들의 소재부터가 움직임이 해체돼 있는 누드화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다시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선 명화로 부각되어갔었죠. 나름 미래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그림은 제가 훗날 미래주의 화풍과 무관하게 제작한 작품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또 다른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답니다. 공간과 시간의 표현이 주된 관심이 되었던 작가들이 많기도 했지요. 특히 피카소와 브라크가 입체주의 작품을 발표한 이후라 많은 작가들도 그 영향을 받게 되었고요.
당시 25세인 제가 분석적 입체파 풍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넘버 2’ ‘처녀에서 신부가 되는 과정’ ‘신부’와 같은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고, 이 작품들에서 사람은 모두 조립된 기계와 같이 그려봤죠. 저의 작품을 보면 완전 추상에 가까우면서도 입체파임을 그대로 보여주는 저만의 획기적인 소재를 찾아낸 것이고요. 사람 형태인 듯 보이나, 거기에 그어진 선들이나 점들은 어떤 도표를 암시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해독해 보려 해도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드러내지는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에서는 무엇인가가 분명하게 벌어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으시겠죠. 이는 미래파를 비롯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추앙해 마지않던 인간의 과학화, 기계 기술의 진보에 대한 비판과 자조를 담아낸 것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이 작품들을 마지막으로 제가 그리기로서의 그림을 완전히 그만두고선 미술계를 떠나게 되고요. 이후 수년간 도서관 사서 일을 하며 수학과 물리, 특히 푸앵카레의 책들을 읽으며 ‘미술을 한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미술(美術)이 가지는 사전적 의미를 간단히 설명하면요~~‘인간이 의도를 가지고 어떤 활동을 통해 아름다운 것(美)을 만들어내기 위한 재현 또는 표현의 재주(術)’로 압축할 수 있기에, 이러한 예술적 창작활동에 가장 큰 변화와 영향력을 발휘한 20세기 예술가를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제가 아닐 런지요.... 20세기 현대미술의 혁명가이자 선구자이며, 돌발적인 행위와 기발한 아이디어의 소유자라는 극찬과 전통미술의 개념은 물론 예술품 자체의 개념을 파괴해버린 불경스런 인물이라는 악평을 동시에 받고 있는 제가 세계 미술사에 있어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될 주요작가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자아자찬이죠? ㅎㅎ
시대와 장르, 형식과 내용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 저의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정신은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을 여는 새로움의 시작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고요. 저에 대해 이렇게 감사히 피력하며 하나 추가로도 그냥 댓글 대신 편지로 보내 봅니다... 지나가다가 누가 보더라도 참고하는 기분으로다가... 기존 입체파 화가들과 노선을 달리하는 퓌토 그룹(Puteaux Group)의 입체파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파리의 섹시옹 도르(Section d'Or) 전시회에 참여하면서 변화를 갖기도 했지요. 퓌토 그룹은 비록 정통 입체주의는 거부했지만 이들의 활발한 활동에 힘입어 전위성으로 인해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답니다. 그러나 입체파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창구 역할을 담당했던 모임이었기에 저는 이 모임을 통해 입체주의에 비유클리드 기하학 및 상대성 원리, 4차원 개념 등의 이론적 토대를 부여하고자 했다고 자부합니다.
PS
그리고요. 저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모델'의 모델이 몇 명이냐고 묻던 사람들에겐 넌 몇 명인데 물어봐 주세요. 저도 모르거든요... 그럼 이만 저는 또 체스나 두러 가렵니다.. 베드로 선생께서 요즘 실력이 일취월장하셔서.. 허허~
마르셀 뒤샹 拜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