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liepark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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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 혐오'에 맞서는 인도의 여성들

생리, 혹은 월경은 문화적으로 '나쁜 것'으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월경은 숨겨야 할 것으로 간주되었고, 많은 종교에서는 이 기간동안 여성의 활동을 제한해 왔습니다. 일례로 힌두교는 생리중인 여성이 크게 말하거나, 다른 사람과 접촉하거나, 심지어 사원에 들어가는 것을 제한해 왔죠. 이 같은 관습은 최근 인도에서 흥미로운 운동을 촉발시켰습니다.
이 캠페인은 인도의 힌두교 수장인 고팔라크리샨의 발언에 대응하며 나타났습니다. 그는 생리가 가능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인도의 유명한 사원에 들어갈 수 없는 정책을 옹호했죠. 심지어 그는 여성이 사원에 들어오려면, 여성이 생리 중인지 검사하는 기계가 필요하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는 지속적으로 생리는 불순하고 더럽고, 숨겨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죠.
대학생인 니키타 아자드는 이에 맞선 캠페인을 조직합니다. 바로 '#HappyToBleed', '#피를 흘릴 수 있어서 행복하다' 캠페인입니다. 이 캠페인은 월경을 하고 피가 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금기시 되어야 할 일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힌두교 수장의 발언에 대한 대응만은 아닙니다. 아자드는 말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모든 종류의 가부장제를 규명하는 것이고, 우리가 헤쳐나갈 난관을 대비하는 것이다'
캠페인은 인도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생리를 불순하게 여기는 문화는, 한 사람의 몸을 혐오에 노출시킬 뿐만 아니라 건강상의 문제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66%에 이르는 학교들이 제대로 된 화장실을 갖추지 않고 있으며, 이 때문에 소녀들은 월경 기간동안 학교를 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또한 월경 금기는 제대로 된 생리 용품의 보급을 막고, 이 때문에 종이, 심지어 나무 이파리를 생리대 대용으로 사용하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자드의 말을 마지막으로 전합니다.
'이 운동의 목표는 월경은 그저 신체 현상이며, 커튼 뒤에 숨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님을 알리는 것이다.'
31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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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을 통해서 지가 태어났고 지 자식이 생긴다는 것을 아냐 모르냐
왜 나쁜거야??? 이상한 놈들일세
처음한사람에게 용기와박수를,,,좋은 아이디어이심!!
종교 시설까지 못들어가게 하다니;; 저긴 좀 심하네요;;
건강 문제 공감.. 좀 쉬려고 해도 갖은 이유를 다 갖다 붙여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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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하여 알아보자
기본 흐름은 공식위키나 나무위키가 아닌 디시위키에서 포크해 왔습니다. 웬 디시위키냐고 하실수도 있지만, 디시위키의 몇 안되는 유명한 문서이고, 타 유명 위키는 보수, 진보 성향에 의하여 문서 훼손 및 수정 전쟁이 자주 일어나는 관계로, 오히려 작성 금지로 제한시킨 디시위키의 문서가 균형있게 잡혀있다고 정평이 나있습니다. (제 2단락) 제 2단락부터는 작성자가 문단 구분을 해놓은 관계로 가독성도 나쁜 편이 아니라서 읽다보면 술술 읽히는 편이고 집중하시게 될겁니다. 보수, 진보를 떠나서 가급적 객관적인 시선으로 읽어주시면 좋고, 그 후의 빙글러분들의 판단과 해석은 자유입니다:)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잘 모르셨거나 관심이 있던 분들은 이번 기회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 개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이자 4.19 혁명, 부마 민주항쟁등과 함께 오늘날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민주화 운동 중 하나. 대한민국의 독재 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무고한 시민에 대한 학살범죄로,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구성된 신군부에 의해 군부가 장악되었고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 열기가 거세어지자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일으킨다. 12.12 군사반란이 만들어낸 계엄령과 대학들의 겨울방학, 연말이라는 점이 맞물려 이에 대한 대처는 뒤늦게 나타났으며, 대학들이 개학을 맞이한 3월 이후 안개정국에 대한 사항이 알려졌고 1980년 4월부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끊이지 않았으며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대한민국의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대규모의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사건 당시의 군부의 통제로 인해 언론매체는 '광주 사태'로 칭했으나 군부 정권이 끝난 이후 진상 조사가 이루어져, 광주사태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일부 민간인들을 중심으로 국민의 기본권과 민주주의가 군부에 의해 유린당했다는 것에서 따와 광주사태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미디어에 따라 광주민중항쟁, 광주학살, 광주사태 등으로 부르며 보통 일어난 날짜만을 줄여서 5.18로 부르기도 한다. 전두환의 군사독재에 대항해서 일어난 시위가 진압군과의 격한 대립 끝에 광주에 진입하려는 진압군과 광주 시민들의 총격전으로 발전, 결국 진압되지만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군사정권에 의한 인권탄압과 민간인 살해 사례로서 많이 알려진다. 이 정도로 설명하기에는 당시 상황과 이후 여파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이 일련의 사태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의 일부로서,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희생으로 의미가 재부상했다.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된 특전사 대원들에게도 당시 사건은 지우고 싶은 암울한 기억이다. 이들은 그 당시 시대사적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채, 상부로부터 빨갱이를 때려잡으러 간다는 대의명분을 갖고 이를 수행하였으며 진압당시 학생과 시민들을 진압하다 점점 폭력의 수위가 상승, 같은 나라 국민을 상대로 총구를 겨누는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을 다수 겪었다. 진압작전에 참가했던 계엄군들이 갖고 있던 "빨갱이로부터 나라를 지켰다는 긍지와 자부심"은 나중에 진실이 하나 둘 씩 밝혀지면서 "군사독재 정권의 앞잡이" 내지는 "잔인한 학살자"라는 불명예로 돌아왔다. 실제로 당시 계엄군의 상당수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등 다양한 정신적 문제를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결국 계엄군과 시민 양측 모두에게 심각한 상처로 남게 되었다. 계엄군이 시민을 사살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만 지워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행동한 것이 아니며, 어떠한 진실도 알지 못했던 시대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1차적인 책임은 계엄군이 아닌 최종 결정권자이자, 명령권자인 전두환과 군정에게 있다. 계엄군에게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시민 학살을 지시한 장본인의 중죄를 어물쩡 넘어가려는 행위가 절대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당장 /학살 문서를 들어가 보면 나오지만, 수하도 없는 사살, 어린아이에게 총격 행위 등등 계엄군의 만행은 그야말로 단순 "명령대로 따랐다" 라는 수위를 한참 전에 넘어섰기에 말단 계엄군도 잘한 건 하나도 없다. 과장 좀 보태면 1980년 5월 광주의 계엄군은 그 때 광주 사람들 입장에선 가히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세르비아군 이나 벨라루스 초토화작전의 독일 국방군과 같은 막장 전쟁범죄자 집단이었다. 이러한 잔혹한 만행들은 계엄군의 피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일본군이나 나치와 동급이라고 보면서 그럴거면 저 두 집단의 말단 병사들도 피해자냐고 하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 또한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유혈진압한 군부의 행동을 묵인, 사실상 전두환 군사정권의 편에 섰다고 여겨진 미국에 실망한 운동권과 지식층 중 일부가 공개적으로 반미를 주장할 명분을 제공하였고, 과격파 운동권에 의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핑계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대표되는 폭력을 동반한 반미주의 운동이 200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발단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을 맞고 죽었다. 1979년 10월 27일 국무총리였던 최규하는 대통령 암살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만일의 변고를 대비하기 위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1972년 유신헌법이 제정된 이후 지속되었던 장기집권의 끝으로 정부에 끊임없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항하던 야권은 요동쳤다. 김대중과 김영삼 등 야권 인사들은 최규하, 신현확을 비롯한 인사들에게 내각의 총사퇴를 요구했다. '현 정부는 박정희의 꼭두각시인 유신잔당이며 그 우두머리가 죽었으니 사퇴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18년간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나라를 다시 일어설 수 있게끔 하고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우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리더가 급작스레 역사속의 뒤안길로 사라지자한국 사회는 큰 변혁을 겪게 된다. <박정희 사망 당시의 사회상> 1978년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호메이니를 주축으로 하는 혁명이 발생한다. 호메이니는 정권을 획득하였으나 혁명 직후의 이란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친미 정권인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반미로 돌아서자 미국과의 관계는 냉각되었고 그는 이란 사회의 혼란을 이유 삼아 팔레비 정권 당시 하루 6백만 배럴씩 생산하던 석유의 양을 하루 아침에 2백만 배럴로 줄여버림과 동시에 석유의 수출을 금지한다. 유신헌법 제정 후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초기 집권 당시 시행하였던 이른바 '수출 주도형 경제 체제'에서 '중화학 공업 체제'로 경제 체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1차 석유 위기 당시에는 위기에 굴복하지 않고 국내 기업들이 중동으로 진출하여 이 위기를 극복하였으나 다시 찾아온 석유 위기는 한국 사회와 경제에 크나큰 타격을 입히게 된다. 또한, 한국의 가발수출업체였던 YH무역이 폐업을 선언하며 YH무역에서 근로하던 여공들이 폐업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게 되는데, 당시 야당인 신민당 대표이자 박정희에게 대항하던 유력한 야권 정치인 김영삼이 YH무역 여공들에게 시위를 할 수 있게끔 신민당 당사에 자리를 마련해준다. 그러나 여공들의 시위는 경찰들에 의해 진압되는데, 불행히도 여공 중 한 명인 김경숙이 진압과정에서 신민당사에서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1979년 9월 16일 YH무역 사건 이후 김영삼은 미국의 뉴욕타임스에 인터뷰를 받게 되는데 이 인터뷰에서 김영삼은 미국이 독재정권(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끝내야하며 카터 행정부가 박정희 정권에 직접적인 압력을 행사해야한다고 주장했다. 1979년 10월 4일 위의 인터뷰 사건을 계기로 하여 김영삼은 국회에서 제명되었으며 가택연금 조치에 취해지게 된다. 그를 제명하기 위한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의 징계동의안에 내용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김영삼은 국회법 제26조에 의한 국회의원으로서의 신분을 일탈하여 "국헌을 위배하고 국가안위와 국리민복(國利民福)을 현저히 저해하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등 반국가적 언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주권을 모독하여 국회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국회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으므로 국회법 제157조에 의해 징계를 요구한다. 김영삼의 국회 제명 소식이 알려지자 부산과 마산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게 되고 부산과 마산에서의 시위가 진행되는 도중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사망하게 된다. <최규하의 등장>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당시 국무총리는 최규하였다. 그는 독립 이후 미 군정에서 공무를 보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 정부에서 줄곧 근무하였던 착실한 공무원이었다. 김종필은 5.16군사정변 이전부터 박정희와 인연을 맺고 있었으며 5.16군사정변에 참여함은 물론이거니와 공화당의 창당을 주도하였고 박정희 정부 초기, 요직인 중앙정보부장을 맡는 등 정권의 2인자로 군림해왔다. 김종필은 박정희가 대통령 임기를 끝마친 후 다음 대통령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가 삼선개헌은 물론, 유신헌법을 통해 장기 집권의 틀을 만들어내자 반발했다. 1971년 6월 4일 박정희는 유신헌법 제정 이후 대통령에 선출되자 김종필을 국무총리에 발탁했다. 김종필은 절대 권력의 대통령 휘하의 국무총리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으며 이는 끊임없이 그가 박정희와 반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박정희는 1975년 12월 18일 부로 김종필을 국무총리직에서 경질한다. 1975년 12월 18일 박정희는 김종필의 후임으로 유능한 외교관이었던 최규하를 국무총리에 임명한다. 최규하는 김종필과 같은 '정치인'이 아닌 '외교관'이었다. 김종필과의 갈등으로 박정희는 자신을 견제하는 국무총리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YWCA위장결혼식 사건과 최규하의 대통령 취임> 이제 다시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의 내용을 전개해보자.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1979년 11월 10일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는 아래와 같은 내용의 담화를 발표한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세계적 경제불황과 석유를 포함한 자원문제는 우리 국내경제에도 무거운 짐이 되고 있습니다. …본인은 대통령권한대행으로서 헌법에 규정된 시일내에 국법이 정하는 절차에 따라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여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한다는 것을 정부방침으로 하였으며 그리고 이 기회를 빌어 헌법문제에 관한 한 본인의 의견을 개진한다면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현행헌법에 규정된 잔여임기를 채우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빠른 기간내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하게 들어서 헌법을 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안정을 바라라는 국민의 염원에 부응하면서 헌정질서를 유지하는 이 나라 민주주의를 착실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슬기로운 길이며 또한 순리라고 믿습니다. ◇ 이 말을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1. 조속한 시일 내에 유신헌법에 의거하여 대통령 선거를 치루겠다. 2. 새로 선출된 대통령은 헌법을 개정하는 것을 정부 방침으로 한다. 3. 최대한 빨리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가져오게 하겠다. 김대중과 김영삼을 비롯한 야권 인사들은 최규하의 담화에 반발했다. 이들이 최규하의 민주화 약속 담화에도 불구하고 반발한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유신헌법에 의거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에 반대한다. 2. 유신잔당이 헌법 개정을 하겠다는 것인가? 즉각 사퇴하라. 1979년 11월 24일 야권의 이같은 요구에 정부가 대응하지 않자 야권이 먼저 움직인다. 전 대통령 윤보선을 주축으로 하여 재야 인사 400여 명이 서울 YWCA회관에서 위장 결혼식 사건을 계획하고 이곳에 참석하였다. 그 후 그들은 결혼식을 올리는 척 하면서 일제히 정부를 규탄하고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 등을 반대하는 시위를 개최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재야 인사들을 미행하던 경찰들에 의해 금세 진압되었다. 1979년 12월 6일 최규하가 담화에서 밝혔듯이 대통령 선거가 시행되었고 최규하가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대통령에 피선되자 하루 뒤인 1979년 12월 7일, 1975년 2월 13일 부로 대한민국에 적용되고 있던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의결한다. 긴급조치 9호에는 개헌 논의에 대한 언급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최규하가 이 조치를 해제하여 개헌에 대한 논의가 합법이 되었으며 활발하게 진행되게 된다. <하나회 세력의 군권 장악>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주축으로 하는 하나회 세력에 의해 12.12사태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가 연행되고 국방부 장관이었던 노재현이 물러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노태우, 정호용, 백운택, 조홍 등 12.12사태에 참여한 하나회 인사들은 하루 뒤인 12월 13일, 일제히 직책이 변경되어 요직을 맡게 된다. 김재규가 맡고 있던 중앙정보부장직 서리를 하던 이희성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고 노재현이 물러난 국방부장관 직은 前 공군참모총장인 주영복이 맡았다. 이 두 사람은 군권의 책임자로 광주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된 5.17비상계엄확대조치에 관여하여 훗날 광주 민주화 운동 청문회 등에 출석하여 당시 상황에 대해 증언하게 된다. ※12.12사태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이 글에 담으면 내용이 너무 장대하게 되어 요약함 <서울의 봄>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됨과 동시에 김대중과 김영삼에게 적용되던 가택연금 조치도 해제된다. 즉, 야권의 유력 정치인들에 의한 정치 활동이 해제된 것으로 야권 지지자들은 환호했다. 1979년 12월 21일 최규하가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는 취임사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여 개헌 의지를 내보인다. "국가의 최고기본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본인은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기 떄문에, 이미 천명한 바와 같이 정부로서도 앞으로 전국의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들어가면서 적절한 시기에 구체적인 연구와 검토를 시작할 것입니다." 1980년 2월 29일 최규하는 사회안정의 바탕 위에서 착실한 정치발전을 추진한다는 이유를 들어 전 대통령 윤보선, 김대중 등 긴급조치위반자 687명에 대한 사면 조치를 시행했다. 김영삼은 김대중에게 자신이 당권을 잡고 있던 신민당에 입당하라고 하였으나 김대중은 차기 대통령 선거를 의식하여 김영삼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결국 야권은 김대중을 주축으로 하는 동교동계, 재야 인사들과 김영삼을 주축으로 하는 신민당계로 분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국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학생들의 시국성토와 노사분규> 1980년 4월 박정희 정권이 붕괴하고 학생회가 부활된 각 대학에서는 4월에 들어서자 이른바 '학원민주화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때 주된 이슈는 병영집체훈련 거부 문제였는데, 당시는 대학교 2학년까지 군사교육(교련)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 주제를 가지고 일부 학생들이 대학교의 학장실 점거, 기물 파괴, 화형식, 교수 폭행 등 처음 시위가 발생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리 과격화 조짐을 보이는 등 문제가 발생하였다. 1980년 4월 14일 최규하는 특별담화를 통하여 학원 소란 사태와 사회 일부의 국민 단합 저해 언동에 우려를 표하였고 모두가 협력하여 국가적 시련을 극복하자고 호소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에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했다. 이는 12.12사태 이후 군을 장악한 전두환에게 정부 내 요직에 겸직시킨 것이었다. 1980년 5월 1일 서울대 총학생회는 애초에 병영집체훈련의 거부로 발생한 시위를 철회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의 정치 개입이 민주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아래와 같은 조건을 걸며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한다. 1. 계엄령 즉각 해제할 것 2. 유신잔당은 즉각 퇴진할 것 3. 전두환, 신현확 사퇴할 것 4. 정부 주도 개헌중단할 것 5. 노동3권 보장할 것 1980년 5월 7일 김대중을 주축으로 하는 국민연합 또한 정부에 아래와 같은 사항을 요구한다. 1. 계엄령 해제할 것 2. 정부주도 개헌 포기할 것 3. 전두환, 신현확 퇴진할 것 이와 동시에 그는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유신잔당의 음모를 단호히 분쇄하는 민주화운동을 과감히 전개할 것" 1980년 4월 21일 노동계 또한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일제히 일어났다. 강원도 사북읍의 탄광 근로자 3500여 명이 사북 경찰서, 사북역 등을 점거한 사북사태가 발생하였고 이 사건 이후로 전국에 90여 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하였다. 결국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대학가의 시위가 확산되어 학생들이 경찰과 충돌하는 일까지 발생하였고, 노동계의 시위 또한 끊임없이 발생하여 한국 사회는 혼란으로 빠져 들었다. <서울역 회군> 1980년 5월 9일 김대중이 이틀 전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나갔다는 선언을 하자 김영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김영삼 또한 계엄령의 해제, 정부의 개헌 작업 중지를 요구하였다. 이에 김종필을 주축으로 하는 공화당은 김영삼의 요구에 반응하였고 계엄 해제 문제를 거론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1980년 5월 10일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 최규하는 7박 8일 일정으로 중동 순방을 위해 출국한다. 석유파동의 여파로 경제 위기가 찾아오자 이를 타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중동으로 간 것이었다. 최규하는 출국할 때에도 공공질서의 유지와 사회 안정을 위해 국민들이 노력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위 양상은 더욱 과격해지는 움직임을 보였다. 1980년 5월 14일 서울 지역 27개 대학의 7만여 명이 서울 중심가를 메우며 야간까지 가두 시위를 벌였다. 날이 갈수록 학생운동이 더욱 심해지자 내무부장관 김종환은 국무총리 신현확에게 말했다. 경찰력만으로는 학생시위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군의 투입이 필요합니다. 그만큼 학생 시위는 격렬하였으며 경찰력은 이를 통제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대학생 10만여 명이 모여 시위를 개최한다. 같은 날,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등 지방의 24개 대학 대학생들도 가두시위를 감행했다. 이 날의 시위 중 경찰 가스차 3대가 불에 탔으며 버스 1대가 시위진압 경찰 배치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한다. 유래없는 유혈 사태에 신현확 국무총리는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1. 늦어도 연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겠다. 2. 정부는 정권 이양 약속을 지켜가고 있다. 3. 사회가 안정되면 계엄령 해제할 것이다. 이와 함께 학생들은 정부의 약속을 믿고 자숙,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와 같은 정부의 발표에 학생 시위대 대표들은 의견이 엇갈렸다. 서울대 학생회 회장 심재철은 신현확의 말을 믿고 해산할 것을 주장하였고 같은 학교 학생회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은 정부의 발표를 믿을 수 없으니 계속 시위를 하자고 하였다. 심재철은 시위를 계속하게 된다면 결국 정부는 군을 투입시킬 것이며 이는 전두환을 필두로 하는 신군부에게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반대측을 설득하였고 결국 심재철의 주장이 채택되어 학생 시위는 해산되어 정부는 한 숨을 돌리게 된다. 이 사건은 훗날 '서울역 회군'으로 불리게 된다. <5.17비상계엄확대조치> 1980년 5월 16일 김대중과 김영삼은 아래의 사항을 정부에 요구한다. 1. 비상계엄 즉시 해제할 것 2. 정부주도 개헌 작업 포기할 것 더 나아가 김대중은 자신이 5월 7일 발표한 선언문에 정부가 답변하지 않을 시, 5월 22일 전국적으로 민주화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나가겠다고 발표했다. 최규하는 한국의 급박한 정치 상황과 혼란을 타개하기 위하여 같은 날인 5월 16일, 중동 순방의 일정을 하루 앞당겨 귀국한다. 최규하는 귀국 직후 곧바로 청와대에서 국무총리 신현확, 내무부장관 김종환, 국방부장관 주영복, 계엄사령관 이희성, 전두환 등에게 자신이 중동 순방 중일 때 일어난 한국에서의 상황을 보고 받았다. 이 자리에서 국방부장관 주영복은 북괴 침공설 관련 첩보를 입수하였다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으며, 다음날 전군 지휘관 회의를 개최하여 대책을 논의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다음 날 개최된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에는 비상계엄령을 해제시키지 않고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시키는 것이 현 상황을 수습하는 길이라는 의견이 나왔고 그 자리에 참석해있던 하나회 소속 노태우, 박희도 등이 이에 동조하는 발언을 했다. 전두환,이희성,주영복 이 세 사람은 전군 지휘관 회의가 끝난 후 최규하 대통령에게 찾아가서 위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보고하였다. 전두환은 여기서 추가적으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과 '국회를 대신할 비상기구의 설치'를 요청하지만,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의 요구는 거절하고 비상계엄령 확대에 동의하게 된다. 결국 야권과 학생들이 요구하던 계엄령 해제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0.26사태 이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선포된 계엄령은 오히려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 적용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김대중은 여태까지 진행되었던 학생 시위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5.17비상계엄확대조치 선포 직후 체포되어 보안사령부로 연행되었으며 공화당 총재인 김종필 또한, 박정희 정권 당시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를 적용받아 5.17비상계엄확대조치 선포 직후 체포되어 보안사령부로 연행되었다.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은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자 연행자를 즉시 석방하고 계엄군을 철수 등을 요구하였으나 5월 20일부로 가택연금 조치에 처해지게 된다.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그리고 그 후 ◇ 1980년 5월 18일 정부의 계엄령 확대조치에 반발한 광주 시내에서 시위가 발생하게 되고 이것은 곧 우리가 알고 있는 5.18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5.17비상계엄확대조치> 1980년 5월 17일 5.17비상계엄확대조치로 야권 및 재야세력이 주장하던 계엄령 해제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10.26사태 이후 제주도에 적용되지 아니하던 계엄령이 제주도까지 확산되기에 이른다. 학생들을 조종하여 사회의 혼란을 야기하였다는 이유로 김대중을 비롯한 야권 인사들이 체포되어 연행됨과 함께 김종필을 비롯한 박정희 정권 인사들 또한 부정 축재 혐의로 체포되어 연행된다. 계엄령에 의해 전국 각지 대학교에 계엄군이 진주하였고 전남대학교의 계엄군은 학교에 남아 시위를 주동하던 8명을 체포한다. <5월 18일 - 최초 사망자의 발생과 유언비어> 계엄령 확대 조치와 함께 전국 주요 대학교에 진주한 계엄군은 학생들에 의한 소요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들의 등교를 제지했다. 그런데, 전남대 앞에서는 등교를 요구하는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계엄군은 이를 제지하며 등교를 할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발표한다. 이에 학생들은 계엄군을 향해 돌을 던지며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고 학생들의 투석 공격으로 분노한 공수부대원들은 진압봉을 들고 고함을 지르며 돌진 공격을 감행하여 학생들을 진압하기에 이른다. 전남대에서의 충돌로 공수부대원 7명과 학생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전남대 등교를 거부당한 학생들은 계엄군을 피해 금남로로 일제히 모여들었고 여기서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를 구호로 외치며 시위를 벌이게 된다. 경찰은 이들을 해산하는데 실패하였고,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을 실패했으니 군 병력을 투입시켜달라"고 요청한다. 공수부대는 시위대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진압봉을 이용하여 시위대를 가격하고 구타를 하였는데 이를 지켜보던 광주시민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지시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시위가 없는데 광주에서만 시위가 발생했으니 서둘러 진압할 것" 이때 광주에는 2개 대대의 600여 명의 병력이 계엄군으로 파견되어 있었는데, 이희성은 사태의 조기 진압을 위하여 광주로 1개 공수 여단의 증파할 것을 결정한다. 이 날, 광주시민 김경철(28세)이 사망하였다.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 최초 사망자이며 원인은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이었다. 같은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유방을 칼로 도려내어 죽였다. 2. 임산부를 대검으로 찔러 태아를 꺼내서 길바닥에 버렸다. 3.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러 왔다. <5월 19일 - 최초 사격과 과격해지는 시위 양상>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지시했다. 호남지역은 일반적으로 김대중을 우상시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계엄군은 시민을 자극하지 않도록 특별히 유념하고 광주 소요사태는 배후 조종세력이 지역 감정을 자극, 유발시키는 유언비어를 날조 및 유포하고 있으니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할 것 공수부대의 강경 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은 시위대에 하나 둘씩 참여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공수부대에게 화염병과 돌을 투척하며 대항했고 공수부대는 시위대를 검거하고 진압봉으로 가격, 군화로 차는 등 시위와 진압 강도가 5월 18일보다 한층 더 과격해지고 있었다. 장형태 전남도지사를 비롯한 기관단체장들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면담을 요청하였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계엄군의 진압 행동이 과격하고 어느 나라 군대인지 모르겠으며 고교생들 또한 동용하기 시작했으니 연행자를 전원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계엄군이 시위대를 잔혹 진압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 시위의 주동자를 제외한 모든 이는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일부 시위대는 기름통에 불을 붙여 경찰 저지선으로 굴려 보내 폭발시켰으며 광주 민주화 운동 발생을 방송하지 않는 MBC 건물에 돌을 던지고 취재 차량 1대를 불태웠다. ◇ 5월 19일에는 최초 사격도 발생했다. 익명의 제보자가 "사직공원에 공수부대원 시체가 있다"고 계엄분소에 허위 신고를 하였고 이에 공수부대가 사직공원을 수색하였으나 이는 거짓이었고, 그들은 복귀하기 시작했다. 그때 시위대가 기습적으로 그들을 공격하였고 불붙은 짚단을 장갑차 안으로 던져 넣으려 했다. 이에 장갑차 내부에 있던 장교가 M16소총으로 장갑차 뚜껑을 열던 시민에게 공포탄 사격을 했는데 이때의 사격으로 공포탄에 맞은 김영찬(19세)이 대퇴부에 부상을 입었다. 같은 날, 광주시민 김안부(36세)가 전두부 열상 등으로 사망했다. <5월 20일 - MBC 방송국 방화와 경찰관 사망 사건> 5월 20일이 되자 아래의 유언비어가 적힌 유인물이 나돌았다. 1. 죽은 인원이 수십명이다 2. 공산당도 이렇게 무자비하지 않았다 3. 계엄군이 경상도 출신이다 시위대는 MBC 방송사에 광주에서의 사태를 방송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이날 뉴스에서도 역시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사가 방영되지 않자 분노하여 방송국에 화염병을 투척하여 방송사가 화염에 휩싸였다. 한편, 노동청 앞에서는 시위대와 경찰들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고속버스 1대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파할 목적으로 돌진하여 경찰관 4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버스를 몰았던 김갑진, 배용주는 군중들이 버스를 탈취, 몰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여 버스를 몰았는데 운전 도중 연기 등으로 앞이 보이지 않아 버스를 멈췄더니 사고가 났다고 진술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광주 소요 사태가 격화되자 20사단의 증파를 결정했다. <5월 21일 - 계엄군의 실탄 사격과 시위대의 광주 장악> 20사단의 광주 증파가 결정되자 20사단은 부대이동을 하여 광주에 도착하였는데 사단 지휘차량 인솔대가 광주공단 입구에서 시위대의 화염병 공격을 받게 된다. 여기서 그들은 시위대에게 사단장 지프차 등 지휘차량 14대를 탈취당한다. 그동안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함구하던 정부는 이 날 최초로 광주 민주화 운동 발생에 대해 발표한다. 지난 18일 오후부터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았다 20일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각종 유언비어가 유포되어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가세함으로써 사태가 악화되었다 21일 오전 7시 현재 군경 5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하였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 또한, 사태의 조기 진압에 실패한 책임을 들어 윤흥정 전교사령관이 해임되고 후임에 소준열 전교사령관이 임명되었다. 한편, 시위대는 사체 2구가 실린 수레를 앞세우고 공수부대의 만행을 규탄하며 계엄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사태 해결을 위해 장형태 전라남도 도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였는데 장형태 도지사가 시위대 앞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마이크를 설치하는 도중 도지사가 광주시장인 구용상에게 "먼저 나가서 시위대를 진정시켜달라"고 하였다. 시위대는 도지사가 아닌 광주시장이 나타나자 "도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며 흥분하여 화염병과 각목을 던졌고 결국 전남도지사는 시위대 앞에 서 연설을 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대신 장형태 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직접 방송을 하기에 이른다. "계엄군이 철수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으니 시민 여러분은 해산하고 생업에 종사해달라" 이에 시위대는 오전 12시가 될 때까지 계엄군이 광주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은 철수하지 않았고, 이에 시위대는 계엄군의 저지선을 돌파할 목적으로 버스를 몰아 계엄군 저지선으로 돌진을 감행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최초 실탄 사격이 발생한다. 사격 명령자는 없었으며 이들은 시위대의 버스 돌진 공격으로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었다. 이 사격으로 버스 운전사가 사망하였고 시위대는 "계엄군이 총격을 가했다"고 주장하며 전남 도처에 위치한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 무장하였고 무기 사용 교육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시민군'이라 불리우는 무장시위대의 출범이었다. 시민군은 계엄군과 총격전을 시작하였으며 LMG기관총을 이용하여 전남도청과 해산을 종용하는 군 헬기 등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시위대가 무장을 하고 계엄군과의 총격전까지 벌어지자 전교사는 계엄군을 전남도청에서 철수시켜 광주 외곽으로 이동시켰으며 시위대가 전남도청을 장악한다. 계엄군이 철수하는 도중 시위대가 총격과 차량 돌진 공격을 감행하여 군 차량 3대가 전복하였고 군인 2명이 사망, 6명이 부상을 당했다. 국무총리인 신현확은 사태의 책임을 지고 국무총리직에서 사임했다. <5월 22일 - 시민수습위원회의 출범과 시민군 내부의 갈등> 이날, 전남도청에서는 사태의 해결을 위하여 시민수습위원회가 출범하였다. 그들은 광주 시내에서 철수한 계엄군 본부에 찾아가 사태 해결을 위해 협상을 한다. 요구사항은 "군의 과잉 진압을 인정하고 사후 보복하지 않으면 무장 해제 하겠다"는 것이었다. 군은 "모든 문제는 무기를 반납한 후에 논의될 수 있다"고 하였고 연행하였던 848명을 석방했다. 수습위원회는 협상 결과를 전남도청의 시위대에게 보고하면서 "무기는 무조건 반납할 수 밖에 없다"고 하자, 시위대는 반발하며 이들의 협상 결과가 미온적이고 굴욕적이라며 야유를 보내며 무기 반납을 거부했다. 정부측에서는 사태의 해결을 위해 신현확의 사퇴로 국무총리 서리를 하게 된 박충훈이 광주에 방문하여 특별담화를 녹음한 후 상경했다. <5월 23일 - 계엄사의 진압 작전 논의와 총기 반납 논쟁>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진압 작전을 논의하면서 북괴 개입설을 제기했다. "광주 소요 사태에는 가발 사용자와 복면한 자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북괴의 침투를 의심케 하는 상태" 시민군은 시위 도중 사망한 시위대 사체 58구를 전남도청에 전시하였고 시민군 사이에서는 무기 반납 문제를 두고 논쟁이 오고 갔다. 온건파는 여태껏 회수한 총기 3,000여 정 중 200정을 우선적으로 계엄군 본부에 방문하여 반납하였으나 그 후에는 강경파의 제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5월 24일 - 계엄군 간의 오인사격과 간첩 이창용> 이 날,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들 간에 오인사격이 다수 발생하였다. 매복하고 있던 계엄군들이 아군을 시민군으로 오인하여 사격하고, 공격받은 계엄군은 이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교전이 발생한 것인데 아군 간의 오인사격으로 인해 군인 12명이 사망하였다. 오인사격으로 격분한 공수부대는 체포한 시민군 1명과 시민군으로 오인된 마을 청년 3명, 하수구에 숨어있던 50세 여성에게 총격을 감행하여 사망하게 하였다. 한편, 전남도청의 온건파는 계엄군 본부에 방문하여 협상을 벌였고 계엄군 시내 진입 금지, 과잉 진압 인정, 연행자 석방, 사태 후 처벌 금지 등을 약속받고 시민군에게 결과 보고를 하며 무기를 반납하라고 호소하였으나... 강경파는 온건파의 요구를 묵살하고 오히려 자유성토대회를 열어 전두환 화형식을 개최하고 가두행진을 하며 무기를 반납하지 않았다. 한편, 서울에서 북괴 간첩 이창용이 검거되었는데 경찰은 아래와 같이 발표했다. 간첩 이창용이 남해안에 침투, 광주에 들어가 선동 및 분란 행위를 하려 하였으나 계엄군의 검문 검색으로 포기하고 특급열차로 서울역에 도착하여 배회하다 검거되었다 ※훗날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이창용이 첩보 행위의 목적으로 침투한 북괴 간첩이 맞지만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선동 행위'라는 침투 목적은 신군부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한다. <5월 25일 - 전남도청 독침사건과 최규하 대통령의 광주 방문> 전남도청의 시민군 중에 장계범과 정향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은 시민군에 의해 북괴 간첩으로 오인받게 되었다. 이에 장계범은 "독침에 맞았다"고 주장하며 쓰러졌고 정향규는 장계범을 차량에 태워 전남도청을 빠져 나간다. 그들은 후일, 유언비어 날조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2년형에 처해진다. 최규하 대통령은 사태의 수습을 위해 광주로 향했다. 광주에 도착한 최규하는 "내가 직접 전남도청으로 가 시민들을 만나보겠다"고 하였으나 소준열 전교사령관을 비롯한 관료들이 이를 극구 만류하여 호소문을 녹음 한 뒤 상경한다. 다 같은 국민 사이에 대화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으며 최대한 관용을 베풀고 불문에 부칠 것이니 냉정과 이성을 되찾아 사태를 수습합시다. <5월 26일 - 전남도청 TNT 제거와 온건파의 도주> 이 날, 전교사 교관 4명이 전남도청에 잠입하여 TNT와 수류탄 496발의 뇌관을 제거했다. 사진에 나와있는 배승일 씨는 이 날의 공로로 훈장을 받게 되지만 훗날 박탈당했다. 그러나 소송을 통해 훈장을 되찾아 명예를 회복했다. 전남도청에서는 온건파가 아래와 같이 주장하며 무기를 반납하자고 주장했다. "진압작전시 대항하는 것은 엄청난 피해만을 야기할 뿐이므로 무기를 반납하고 의연히 처벌받자" 그러나 강경파인 윤상원과 박남선 등이 최후 항전을 주장하였고 무기 반납을 주장하는 온건파를 총으로 위협하였으며 온건파는 전남도청에서 빠져나와 도주한다. 시민군은 계엄군의 공격이 임박한 것을 알고 각지에 배치되었고 전남도청의 민주시민투쟁위원회 홍보부 소속 박영순, 이경희가 광주시내를 돌며 시민군에게 전남도청으로 와 시민군에 합류하는 방송을 하였다. <5월 27일 -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압> 계엄군은 새벽에 전남도청을 기습 공격하여 저항하는 시민군과의 교전을 벌였으나 쏜살같이 진압에 완료하고 전남도청을 점령함으로써 광주에서의 작전을 종료한다. 이 날, 진압작전으로 인해 시위대 17명이 사망하였고 시위대 295명이 체포되었으며 계엄군 3명이 사망하였다. <그 후> 광주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6명 등 모두 193명이 사망했다. 훗날 최규하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전두환이 대통령에 선출되는데 레이건의 당선으로 공산주의의 소멸을 주장하고 있던 미국은 한국에서의 혼란을 원치 않았기에 전두환 정부를 인정하고 협력관계를 결성한다. 5.17비상계엄확대조치로 인해 체포되어 연행된 김대중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배후 조종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요청으로 형 집행 정지 처분을 받았으며 1982년 12월, 석방 후 미국으로 망명한다. 박정희 정권의 2인자이자 박정희 사후 유력한 대선 후보였던 김종필은 부정 축재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6월민주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될 때까지 그는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다. 김영삼은 신군부에 의해 정계 은퇴 선언을 강요받아 은퇴 선언을 하였으나 김대중이 체포되었다가 미국으로 망명하고, 정부의 일부 인사의 정치 활동 금지가 일부 완화되자 정계에 복귀하여 6월민주항쟁 발생 이전까지 야당 활동을 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1985년 5월 23일, 서울에 위치한 미국 문화원을 기습으로 점거하여 "광주 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사과하라"며 농성을 벌였다가 26일 자진해산,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들은 "5.18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을 미국이 인정한 것"을 이유로 들어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이 날의 농성 사건에는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청래도 참여했었다. 한국의 민주화를 주장하며 미국을 동반자로 생각했던 일부 학생들은 미국이 전두환 정부를 인정하자 반미(反美)성향을 띠게 되었고 한국의 민주화에 필요한 동반자를 '북한'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NL이라고 분류되는 주체사상파가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6월민주항쟁의 결과로 직선제가 부활하고 노태우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곧 치루어진 총선에서 패배하여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고, 결국 노태우는 야권의 압력에 굴복하여 5공청문회를 개최하게 되는데 전두환이 국회에 출석하였다가 초선 의원이었던 노무현이 명패를 던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노태우 대통령을 거쳐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군부 인사들의 정치가 끝나고 민주화 인사가 정권을 잡게 된다. 이에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에 체포되었던 정동년은 전두환, 노태우 등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을 검찰에 고소하였는데 검찰은 12.12사태와 5.18광주 민주화 운동, 5공화국 인사들을 소환하여 조사한 결과 전두환, 노태우 등에게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려 처벌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의 바탕이 되는 수사보고서는 이 때 작성되었으며 계엄군의 최초 실탄 발포 당시 사격 명령자는 없었던 것으로 발표되었고 광주 민주화 운동 초기 유포된 유언비어의 출처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검찰의 발표에 여론은 들끓어 올랐고 때마침 발생한 노태우의 비자금 사건이 화제가 되자 그 사건에 연루되어있던 김영삼은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 수감하여 처벌하기에 이른다. 전두환은 사형선고, 노태우는 징역 17년에 처해졌으나 제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당선되자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이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특별사면을 시행하여 두 사람은 석방되었다. 최규하는 훗날 정부기관에서 12.12사태와 5.18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조사를 할 때 증인으로 출석받을 것을 요구받았으나 조사가 끝날 때까지 끝내 출석하지 않았으며 그는 사망할 때까지 위 사건들에 대한 증언을 하지 않았다.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주영복 국방부장관은 5.18 재판 당시 5.17비상계엄확대조치에 깊게 관여한 것이 인정되어 징역 7년형에 처해졌으나 역시 사면됐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의 31사단장이었던 정웅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무력진압을 막으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김대중의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을 지냈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사망한 시민들은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계엄군 및 경찰들은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 28묘역에 안장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계엄군과 경찰, 시민들 모두에게 가슴 아픈 상처를 남겼다. 다시는 이러한 불미스러운 역사가 되풀이되지를 않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작성자 참고한 자료> 1. 1997년 서울지방검찰청, 군 검찰부 5.18 수사보고서 2.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5.18 수사보고서 이 글은 수사보고서의 원문을 근거로 하였으나 가독성을 위하여 계엄군의 배치도와 각 날짜마다의 사망자 명단을 요약하였음 "정치성향을 배제해 최대한 중립적으로 작성" 여기까지입니다. 다시 봐도 어떻게 표현이 안될 정도로.. 당시의 처참한 상황이 그저 막막하고 슬플 따름이네요.
소주병뚜껑 뻘짓 튜토리얼!@
안녕하세요 고기쟁이입니다 많은(?!)분들의 성원으로 어찌어찌 소주병뚜껑 클로버만들기 튜토리얼을 만들게 되엇네요 ㅎㅎ 어머 나 이런거 처음이야(두근두근 수줍수줍) 사진도 개판이고 하지만 처음이니까 봐주세요.... ...사랑하니까요...☞☜ 자 오늘 주된 준비물인 소주병뚜껑입니다 ㅎㅎ 처음이 둘과 이슬이 하나가 있네요 ㅎㅎ 또다른 준비물 볼펜심 입니다 뭐 볼펜심이 아니라 다른거라도 상관없지만 집에서 만드려니 사이즈맞는게 이거라 준비해봣네요...ㅎ 술자리나 고기집에서 바로 만들때는 "이쑤시개"(녹말이쑤시개 ㄴㄴ)나 여성분들은 가방에 많이 들고다니시리라 믿는 "면봉"정도가 딱 좋습니다. 하트나 별을만드시려면 "젓가락"(납작한 젓가락 ㄴㄴ해) 을 이용하시면 되겠습니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1.일단 병뚜껑 꼭지(..?!)를 살살 늘려줍니다 2.여기선 볼펜이지만 라이타 젓가락 기타등등 눌러줄수있을만한물건을 준비해주세요 그리고... 3.병뚜껑을잡고 쭉 밀어서 절반가량을 펴줍니다. 4.나머지 반을 펴주세요 5.누른채로 왔다갔다 골고루 눌러주시면.... 이렇게됩니다 ㅎㅎ 핀것과 안핀것 구분 잘 가시나요???이러면 준비과정 끝입니다...(아따길다...미안해요 여러분) 1~2.약 손톱의 절반길이정도 지점에 이쑤시개(면봉)를 지지시켜주시고 구부려주세요 3.그리고 하트모양을 만들기위해 골 을 만들어주세요 손톱으로 꼭눌러 구부려야 깔끔하게 구부려집니다 4.반대편도 마찬가지로 길이잡으셔서 1~2 와 동일하게 구부려줍니다 5. ♡가 요기잉네 뀨잉♥ 6.하트끝부분을 바깥으로 접어서 위 과정을 반복해줍니다. 7.아 씨 손아퍼.... 8.거의 다 됫네요...여기가 중요한데요 이미만들어진 부분과 접어야 할 부분이 간섭이 생겨서 저대로는 마감이안된단 말이죠... 9.여러분의 눈을 믿으세요......길이를 최대한 정확히 가늠하여 미리 접어줍니다 10.다시 마지막 부분에 이쑤시개(면봉)를 지지시켜 구부려주면... 끝.♧♧♧♧♧♧♧♧♧♧♧♧♧♧♧♧ 미안해요 여러분 이게 이렇게 어려운게아닌데 하나하나 해보려니 별거아닌게 무지 길어졋네요....(이건마치 엄마의 잔소리같아...짧다면서 끝이없지...) 그래도 해보니 재미지다!!!! 여기까지 긴글 봐주신분들 감사드려요ㅜㅜ ...그리고 저도 댓글!=_= @9cld
그녀는 왜 3년간 노인 분장을 했을까?
배려와 공감이 있는 디자인 출처: allets.com 출처: allets.com, 옥소, 이온 1979년부터 1982년까지, 약 3년 동안 미국과 캐나다의 크고 작은 도시를 돌아다닌 80대 노인이 있었어요. 그녀는 어느 날은 아주 건강하고 활동적인 노인, 어느 날은 지팡이와 보행기에 의존한 노인, 그리고 어느 날은 부랑자 노인으로 모습을 바꿨어요. 이 수상한 노인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출처: allets.com, 위키피디아, sgiquaterly.org 그녀는 바로 당시 26세의 디자이너, 패트리샤 무어였어요. 그녀는 직장에서 겪은 일을 계기로 직접 노인이 되어 보기로 했답니다. 어느 날 사내 미팅에서 노인을 위한 디자인에 대해 주장하다 상사에게 꾸지람을 들은 것이죠. 출처: allets.com, Youtube / RIT Production Services 상사의 말에 충격을 받은 패트리샤 무어는 노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편안한 디자인을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녀는 노인의 불편함을 체험하기 위해 본인이 스스로 노인이 되어보기로 했는데요. 인터뷰를 통한 연구만으로는 잘못된 디자인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출처: allets.com, Youtube / RIT Production Services 그녀는 당시 TV 프로그램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던 바바라 캘리의 도움을 받아 80대 노인으로 분장했어요. 또한 눈에는 도수가 안 맞는 안경을 쓰고 귀에는 솜을 넣었으며 철제 보조기를 이용해 걸음걸이도 불편하게 만들었어요. 출처: allets.com, Youtube / RIT Production Services 3년간 노인으로 변장한 채 생활한 패트리샤 무어는 평소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던 곳이 노인의 걸음으로는 1시간 이상 소요되는 등의 불편함을 몸소 체험했어요. 덕분에 소리가 나는 주전자, 저상버스 등을 발명할 수 있었죠. 당시 그 물건들은 그야말로 혁신 그 자체였답니다. 출처: cordis.europa.eu, 옥소 그녀의 디자인이 바로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랍니다. 그녀는 노인이 겪는 불편함에서 디자인을 착안했지만, 그녀가 디자인한 제품들은 결코 '노인만'을 위한 것은 아니에요. 노인뿐만 아니라 모두의 편리함을 위한 것이죠. 그래서 착한 디자인으로 불리기도 해요. 그럼 다양한 유니버설 디자인 사례를 살펴볼까요? 출처: allets.com, Youtube / National Disability Authority 브래들리 타임피스 먼저 손으로 만져서 시간을 알 수 있는 손목시계를 소개할게요. 보지 않고도 시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제품명도 'Watch'가 아니라 'Timepiece'랍니다. 티타늄 소재의 시계판에는 구슬 두 개가 있는데요. 다이얼의 구슬은 분을, 배젤 쪽의 구슬은 시간을 가리키죠. 내부의 자기장에 의해서 구슬이 고정되는 원래예요. 구슬은 힘을 세게 주면 움직이지만, 이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요. 출처: allets.com, Youtube / Eone Time 모노라이트 장시간 컴퓨터와 휴대폰을 사용하면서 현대인의 시력은 저하되고 있는 추세예요. 나이가 듦에 따라 시력이 떨어지는 노안의 연령도 낮아지고 있죠. 모노라이트라는 이름의 이 탁상 조명은 확대경 기능을 장착해 어두운 곳에서 책을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바늘에 실을 꿰는 일도 어렵지 않게 해줘요. 또한 각진 지지대는 다양한 각도로 쉽게 움직이고 고정할 수 있게 하죠. 출처: allets.com, Ianzavecchia-wai.com 틸팅 싱크 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디자인의 싱크대는 프랑스 디자이너의 작품이에요. 사용자의 키에 상관없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인데요. 몸통의 한 면이 각진 형태로 서 있는 사람은 수평으로 놓고, 휠체어에 앉아 있거나 키가 작은 어린이의 경우에는 기울여 사용할 수 있답니다. 세면대의 높낮이를 조절한 것이 아니라 세면대 자체의 형태에 약간의 변화를 줘 모두를 위한 세면대를 만들었어요. 출처: allets.com, gwenoleganier.fr 싱글 핸드 쿡 트랜스포머를 닮은 이 제품은 이름 그대로 한 손으로도 요리할 수 있는 도마죠. 한쪽 손을 다쳤거나 불편한 사람은 사과 하나를 자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거예요. 이 도마는 재료를 단단히 지지해줘 한쪽 손만으로도 과일 썰기부터 치즈 채썰기까지 뭐든 할수 있어요. 도마에는 과일을 고정할 수 있는 핀, 버터를 바르는 동안 빵을 잡아주는 핀도 있거든요. 아, 왼손잡이여도 상관없답니다. 출처: allets.com, 얀코 디자인 지금까지 디자이너 패트리샤 무어의 스토리부터 다양한 유니버셜 디자인 제품들을 알아봤어요.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쉽게 해내는 어떤 일이 몸이 다소 불편한 누군가에게는 하루 종일 걸리는 버거운 일일 수 있어요. 이때 필요한 것이 오늘 알아본 유니버설 디자인이죠. 혹 주변에서 찾은 유니버설 디자인 사례가 있나요? 그렇다면 댓글로 서로 나눠 보세요~ 출처: allets.com, Youtube / National Disability Authority 출처: allets.com
재벌3세, 게이, 예일대 그리고 세상의 끝엔 항상 이 남자가 있다.
오늘은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어머니의 이름은 글로리아 밴더빌트, 네 미국의 유명한 대학교엔 밴더빌트 대학교의 바로 그 철도 가문입니다. 그는 예일대 정치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스스로 게이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끝에는 항상 그가 있습니다. 이 남자의 이름은 CNN의 유명 앵커이자 방송기자인 앤더슨 쿠퍼(Anderson Cooper)입니다. 부유함과 명문대 학벌 그리고 외모까지 갖춘 이 완벽해보이는 남자는, 언제나 세상을 끝에서 그들을 알리기 위해 생과사를 넘나들며 뛰어다닙니다. 어린 시절 형의 자살과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며, 상실감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고 합니다. 아이티 지진을 보도하며, 당시 날아오는 콘크리트 조각들을 피해가며 아이를 구출하고 죽음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직접 찾아갑니다. 자신의 보도로 인해 세상이 조금은 더 나은 사회가 되길 바라며, 세상의 끝에는 항상 그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그 동안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게이라는 소문이 무성해지자 스스로 선언을 해버립니다. "공적과 사적인 부분에서 같은 수준의 사적 자유를 누리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침묵으로 일관하는 모습은 동성애자임을 부끄러워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기에, 이렇게 밝힙니다. 저는 동성애자입니다." 정말 멋있는 말입니다. 많은 것을 가진 그가 이렇게까지 하기엔 수많은 힘든 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동성애에 대한 편견에 맞서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기 위해 스스로 커밍아웃을 하게 됩니다. 그는 언제나 세상의 끝으로 주저하지 않고 달려갑니다. 앤더슨 쿠퍼.
호갱탈출! 당신에게만 알려드리는 다운점퍼 구매 팁
추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한 필수 아이템, 다운 점퍼를 구매하기 전 반드시 알아야 하는 꿀팁들을 준비했습니다 :) 가을이 왔었나? 싶을 정도로 날이 추워지니 저절로 손이 가는 옷이 있다. 투박한 ‘오리털 파카’로 여겨지던 다운점퍼다. 과거 미쉐린 타이어 마스코트 같은 근육-다운점퍼가 요즘은 가볍고 더 따뜻해졌을 뿐 아니라 스타일까지 놓치지 않는다. ▲이러려고 ‘근육잠바’샀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하지만 막상 다운점퍼나 재킷을 구입하려고 보니 대충 봐선 얼마나 따뜻한지 알 수 없다. ‘왜 다운점퍼인지?’, ‘필파워는 무슨 소리야?’, ‘왜 얇은데 더 비싸지?’ 이쯤 되면 차라리 다운점퍼를 입고 고산 정복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 디자인 예쁜 제품을 골라서 돈만 내면 끝날 것 같지만, 막상 사려고 보면 의외로 어려운 다운점퍼 고르기. 같은 이름의 다운점퍼나 재킷이라도 충전재와 함유량에 따라 가격과 품질은 천차만별 달라지니 더 헷갈린다. 덕분에 매번 살 때마다 우리 등골을 휘청이게 만드는 다운점퍼. ‘더 이상의 호갱은 사양이다!’ 를 외치는 그대에게 다운점퍼 구매할 때 꼭 알아야 하는 알짜 정보를 준비했다. 제대로 알아보고 알뜰하게 월동을 준비하자. 속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운점퍼의 보온력을 좌우하는 것은 대부분 겉감 속에 있다.(이미지출처 : 컬럼비아스포츠웨어코리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대로 된 ‘다운’ 제품을 고르기 위해서는 충전재, 우모량, 필파워(Fill-Power), 겉감, 이 네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우선 다운 제품의 ‘다운’이 뭘 의미하는 걸까? 여기서 말하는 ‘다운(down)’의 사전적 의미는 새의 솜털. 그중에서도 특히 보온 역할을 하는 가슴 부위의 솜털을 주로 지칭한다. 거기서 의미가 확장된 것이 바로 ‘다운=솜털로 만든 겨울 점퍼나 재킷’이다. 그래서 오리털을 충전재로 사용하면 덕다운(Duck down), 거위 털을 충전재로 사용하면 구스다운(Goose down)으로 불린다. 한마디로 우리가 흔히 덕다운, 구스다운으로 부르던 것은 다운 제품들의 속을 메우고 있는 충전재의 종류를 일컫는 말이다. 최근에는 오리털보다 거위 털이 인기를 끌고 있다. 거위 털은 오리털보다 가격이 비싸지만, 솜털이 길고 숱이 풍성해 보온성이 우수하고 가볍다. 게다가 비틀거나 구겨져도 우수한 복원력을 자랑하기 때문. ▲ 충전재는 오리 솜털(덕다운)보다 거위 솜털(구스다운)을 더 상급으로 친다. 사진은 거위. ■ 솜털 90%? 깃털 10%? 다운 제품의 보온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충전재의 중량(우모량)이다. 충전재가 많을수록 따뜻한데, 보통 300g 이상이면 ‘헤비다운’으로 분류된다. 300g 미만이면 ‘중량다운’, ‘경량다운’ 순으로 나뉜다. 우모량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충전재의 비율이다. 보통 충전재는 솜털(down)과 깃털(Feather)로 이뤄지며 최고급 충전재일수록 솜털의 비율이 높다. 만약 충전재의 다운 함량이 90%라면 솜털이 90%, 깃털이 10% 사용됐다는 뜻이다. 그런데, 솜털 함유량이 많을수록 보온력이 상승하지만 그렇다고 깃털 함유량이 없으면 안된다. 깃털은 솜털이 한 곳에 뭉치는 것을 막아주고 지탱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솜털 100% 제품이 없는 이유다. 솜털과 깃털의 비율은 대개 제품 택(Tag)의 섬유혼용률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택을 쳐다보지 않고 알아내는 방법은 제품을 만져봤을 때 깃대가 많이 만져진다면 깃털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제품이다. ■ 700? 800? 소매에 쓰여 있는 숫자의 정체는? 정확한 보온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충전재의 비율과 함께 필파워도 확인해야 한다. 요즘은 필파워 지수를 마케팅에 활용하는 추세여서 주로 눈에 잘 보이는 다운점퍼 소맷자락에 이 필파워 지수가 표시돼 있다. 필파워(Fill-Power)는 다운이 눌렸다 다시 살아나려는 복원력을 나타내며 주로 숫자로 표시된다. 일반적으로 필파워 600 이상을 고급 다운으로 치며 800 이상은 최고급 다운으로 분류한다. 최근 출시되는 구스다운은 1000까지 나오는 추세지만 600 이상만 돼도 충분히 높은 복원력을 자랑한다. 필파워가 높으면 그만큼 제품의 모양도 잘 유지되고 보온력도 좋지만, 헤비다운 제품의 경우 필파워가 높으면 팔이 안으로 잘 안 굽혀지는 등 일상적인 용도에선 불편할 때도 있으니 이를 감안해야 한다. 또 보온성능은 필파워보다는 우모량에 더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다운점퍼를 구매할 때 필파워는 구매에 결정적인 요인이라기보다는 부가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 필파워가 높으면 복원력이 우수하지만 그만큼 부피가 커진다.(이미지출처 : www.downandfeathercompany.com) 마지막으로 충전재를 감싸고 있는 겉감을 살피자. 보통 겉감의 원단은 실의 굵기를 표시하는 데니어(denier)를 표시한다. 데니어가 낮을수록 실이 가늘고 밀도가 높아 원단의 촉감이 부드럽고 다운이 밖으로 새는 것을 막아준다. 데니어를 확인하면서 원단의 소재를 함께 살피면 되는데 아웃도어용 고급 다운점퍼에는 주로 윈드스토퍼, 퍼텍스(Pertex)가 사용된다. 윈드스토퍼는 보온과 방풍 기능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도록 개발한 기능성 원단이다. 퍼텍스는 다른 직물에 비해 매우 조밀한 밀도와 초발수 가공능력을 갖고 있다. 여기에 다운프루프(Down-Proof)가공 등이 되어있어 봉제선 사이로 털이 새는 것을 방지해 보온력을 더욱 높이는 게 특징이다. 주로 헤비다운이나 고가의 다운점퍼에 이 소재들이 사용된다. ■ 다운점퍼 구매할 때 가장 중요한 스펙 : 우모량 ▲ 큰맘 먹고 다운점퍼를 지를 계획이라면 이 이미지를 인쇄해서 들고 가자. 위에서 살펴본 내용을 종합해 보면, 다운점퍼를 구매할 때 가장 중요한 스펙은 역시 보온력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우모량이다. 충전재(털)가 많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제품이 따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다음은 충전재의 종류. 덕다운과 구스다운 중 대체로 구스다운의 보온성능이 더 우수하다는 평가다. 때문에 고가의 제품군은 주로 구스다운이 충전재로 들어가 있지만, 간혹 높은 가격대에도 불구하고 충전재를 제대로 밝히지 않고 덕다운 등을 사용하는 제품이 있으므로 주의를 요한다. 다만 덕다운 제품이라고 하더라도 보온력이 확연히 낮은 건 아니므로 무조건 덕다운 제품을 피하기보다는 가격, 기타 편의성, 디자인 등 다른 요소들과 함께 비교하는 것이 좋다. 필파워는 최근 다운점퍼 제조사들이 앞다퉈 마케팅에 활용하는 수치이지만, 헤비 다운의 경우 필파워 600~700 이상이면 보온력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다만 필파워가 높은 제품은 그만큼 우모량이 낮아도 보온성능이 보장되고 빵빵하기 때문에 제품이 가볍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다. 헤비 다운을 구매할 때는 보온력보다는 고급 제품과 보급형 제품을 나누는 기준으로 보면 된다. 반면 충전재가 많이 들어가지 않는 경량~초경량 제품의 경우에는 필파워가 높으면 한정된 충전재로 더 많은 공기를 머금을 수 있는 제품이기 때문에 그만큼 보온력이 우수하다고 볼 수 있다. ■ 초경량? 헤비? ‘몸무게 몇이야?’(이미지출처 : 네파) 일반적으로 우리가 입는 다운점퍼는 크게 초경량 다운과 좀 더 두꺼운 중량, 헤비 다운으로 나눌 수 있다. 초경량 다운 제품은 가벼운 무게와 우수한 편의성에 힘입어 초겨울 야외 활동이나 나들이용으로 사랑 받는다. 대신 강추위에는 보온능력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으므로 레이어드해서 입으면 보온성을 높일 수 있다. (이미지출처 : 디스커버리) 헤비 다운점퍼는 가볍고 따뜻한 다운 충전재의 양을 대폭 늘려 보온성을 한층 강화한 제품이다. 방풍 및 방수성이 탁월한 윈드스토퍼 같은 소재를 적용해 겨울철 칼바람이나 폭설 가운데에서도 따뜻하게 착용할 수 있다. 초경량 다운재킷이 우모량 100g 선이라면 중량이나 헤비다운의 무게는 그 2배 이상에 달하는 300~500g 정도로 그 무게만큼 가격도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 추운 겨울 다운점퍼나 재킷으로 시린 옆구리라도 데우자■ 고가의 다운점퍼 저렴하게 구입하는 법 다운점퍼는 주로 아웃도어 브랜드가 꽉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아웃도어 브랜드는 차별화된 기술력으로 기능성은 기본으로 갖추 돼 다양한 패션 영역을 넘나들 수 있는 스타일로 탈바꿈하고 있다. 등산복 이미지를 벗고 회춘을 꾀하고 있는 셈. 한때 학생들 사이에서 ‘대장 잠바’로 명성을 날렸던 것처럼 이제 다운점퍼는 캐주얼은 물론 오피스룩까지 다양한 스타일로 소화할 수 있는 제품들이 사랑받고 있다. 이처럼 다운점퍼는 겨울철 교복처럼 매일 입을 수 있는 효자 아이템이지만 구매를 앞두고 보면 대개 가격대가 사악(?)하다. 특히 올해 출시된 신상 다운점퍼들은 수십만 원은 기본이어서, 이런 신제품의 가격대가 부담스럽다면 지난 시즌 사랑받았던 다운점퍼를 살펴보면 할인 폭이 크므로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기존 인기제품이 스테디셀러로 매년 업그레이드되는 수준으로 나오기도 하니 잘 고르면 신상 부럽지 않은 다운점퍼가 많다. 라푸마 헤링본 라쿤퍼 구스다운 아웃도어 브랜드 제품이지만 일반 남성 브랜드 다운재킷과 견줘도 손색이 없다. 보카시 컬러의 배색으로 어떤 옷이든 캐주얼하게 매치할 수 있는 제품이다. 라푸마의 고밀도 경량 소재인 에어제닌을 사용해 따뜻하지만 가볍게 착용할 수 있다. 거위 솜털을 80% 함유하고 있으며 700필파워의 높은 복원력을 자랑한다. 밀레 엠리밋 플레인 다운 2015년 겨울 상품으로 사파리 형태의 구스다운이다. 오리 솜털 90%를 360g 충전재를 함유했다. 지퍼와 벨크로 처리해 이중 여밈 구조와 이중 소매로 보온성과 방풍성을 강화했다. 허리 부분에 스트링이 있어 핏 조절이 가능하며 탈착이 가능한 라쿤퍼 후드로 다양하게 스타일을 연출 할 수 있다. 머렐 블레이즈 사파리 구스다운 프리미엄 헝가리산 구스 다운을 사용해 거위 솜털 90% 충전량 340g을 함유했으며 800필파워로 높은 보온성을 자랑한다. 윈드스토퍼 다운 소재를 사용해 발수 및 방풍은 물론 투습기능까지 높였으며 배색 디자인으로 아웃도어 활동은 물론 일상에서도 스타일까지 한 몫 더할 수 있는 제품. K2 플레임 구스다운 몸의 실루엣을 부드럽게 살린 슬림한 디자인과 내추럴한 컬러의 여성용 다운점퍼. 허리벨트로 보다 날씬하게 입을 수 있다. 거위 솜털 90%, 200g 충전재를 함유했다. 탈부착 가능한 후드에 천연 여우털로 보다 따뜻하고 스타일리시하게 입을 수 있다. ■ 다운재킷 오래 오래 새것처럼 겨우내 다운재킷을 입고 나면 더러워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큰맘 먹고 장만한 다운재킷을 ‘대접’한다며 세탁소에 가서 드라이클리닝을 맡기는 것은 오히려 다운재킷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이다. 드라이클리닝에 사용되는 석유계 솔벤트는 다운 재킷 속 거위 털의 유지분까지 함께 세탁시켜 털을 수축시키고 꽉 뭉치게 하여 보온력을 잃는다. 다운재킷 세탁은 집에서 미지근한 물에 중성세제를 사용해 가볍게 손세탁한다. 강하게 비벼서 빠는 건 금물. 부득이하게 세탁기에 돌린다면 중성세제를 넣고 강도를 약하게 세탁한다. 이때 모자는 따로 분리하고 지퍼는 끝까지 채운 후 단독 세탁한다. 테니스공을 함께 넣고 빨면 다운이 한쪽으로 뭉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세탁한 다운재킷은 통풍이 잘되는 그늘에 뒤집은 후 완전히 말리는 것이 좋다. 완전히 건조되지 않으면 자칫 다운이 부패할 수 있으니 말리는 것도 꼼꼼히 할 것. 마른 다운재킷은 살살 두들겨주면 세탁 후 뭉친 털이 되살아나 처음 같은 형태와 풍성함을 느낄 수 있다. 다운재킷 보관은 옷걸이 걸어두게 되면 다운이 밑으로 처질 수 있으니 부직포 백이나 종이 백에 싸서 통풍이 잘되는 곳에 돌돌 말아 보관한다.
이동진 평론가가 강동원 볼 때마다 하는 말
"저는 사실 직업적으로 배우들을 많이 만나 볼 수 밖에 없는 직업을 지난 20년간 했는데.. 이게 한국 사람인가? 외계에서 오신 분인가? 이런 느낌이 든 배우가 둘 있었어요" "한 명이 강동원씨... 또 한 명이 정우성씨... 둘은 질투도 안나. 보면 그냥 아름다워요" 그리고 다른 인터뷰에서 또..!!! "강동원씨는 평상시에 봐도 외계에서 온 사람 같거든요? 전형적인 미남이라기 보다는 한국에 없는 스타일의 기럭지와 얼굴표정 이런 걸 갖고 있는 미남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강동원 간증하는 이동진! "배우를 만나는 게 제 직업의 일부이지 않습니까? 여태까지 수많은 배우들을 봤는데 강동원씨처럼 비현실적인 배우는 없었어요" "실제로 강동원씨를 만나게 되면 비율이나 분위기나.. 이런것들이 뭐라고 그럴까 이걸..." "외계에서 온 것 같은 분위기가 있어요 확실히" "강동원씨가 연기 바깥에서도 굉장히 두드러지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신인감독과 가장 많이 작업하는 배우 중에 한 명입니다. "감독의 어떤것에 얹혀가는 스타일이 아닌거죠" "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강동원씨를 직접 만나보면 굉장히 단단한 사람입니다." 지선: 보이는 이미지는 어떤데요? "보이는 이미지는 순정만화잖아요" "콜록 콜록하면 흰무명천에 피묻고 그럴 거 같잖아요 그런 느낌 안듭니까?" "실제로는 안그래요.. 실제는 굉장히 남자다운 성격이고.. 그렇다고 해서 막 터프한 사람은 아니고, 굉장히 의지가 굳고 굉장히 주체적인 스타일의 사람입니다" 이동원이 느낀 강동원의 이미지 → 외계에서 온 폐병 걸린 병약 미소년ㅠㅠ "저는 강동원씨가 출연한 영화는 다 보지 않았나 싶은데요" 이동진이 뽑은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 : '그녀를 믿지 마세요' 최희철 베스트 비쥬얼 : '군도' 조윤 가장 두드러진 감성 연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정윤수 강동원 미모를 착취한 영화 : '늑대의 유혹' 강태성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드로메다에서 백마를 타고 온 외계인 강동원이 좋다면 하트뿅뿅♥ x 1000
90년대한정 세상에서 젤 예뻤던 여자, 위노나 라이더 패션
세기말의 우중충함과 호황기의 낙관론이 혼재했던 아름다운 ~* 90 년대 *~ 아직 철부지아이였던 제 눈에 세젤예였던 언니한분을 소개하려합니다 80~90년대의 청춘스타 위노나 라이더 언니.... 지금은 락세의 아이콘이 돼버렸지만 당시에는 정말 핫핫핫한 잇걸이었죠. 요새 90년대 빈티지붐이 일면서 이분의 스타일도 많이 재조명받는 것..같은건 저만의 착각? 하여간 지금봐도 예쁜옷들이 많아서 모아봤습니다. 그렇죠..90년대의 상징, 루즈핏 다들 포대자루마냥 큰옷을 뒤집어쓰고다녔던 기억이 나는데 이 언니가 입으니까 마냥 여리여리하고 러블리해보이네요. 나도 분홍색니트있는데 왜 저 느낌안남? 이건 진짜 카메라 화질만 아니면 어저께 찍힌 파파라치라고 해도 믿을듯 하이웨이스트 진 + 라이더 자켓 + 밴드 티셔츠 흠잡을게 없는 그런지 스타일 코디. 팀버튼의 뮤즈라서 그런지 다크다크한 옷을 많이 입으셨더라구요. 올블랙으로 입을 때도 많고. 엄마 나 리얼 이렇게 옷입은 사람 어제 에이랜드에서도 본거같애.jpg 이 언니는 딱히 잇템은 없고 잇보이는 있습니다(부럽다ㄷㄷㄷ) 바로 이사람. 역시 90년대를 청춘스타이자 팀버튼이 사랑하는 배우 조니뎁 옵빠 둘이 진짜 한시대를 풍미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이 분들, 불같은 연애를 하는 동안 정말 까리한 커플패션 많이 남기고 가셨습니다. 다크다크함 낭낭하시다 까리녀와 까리남이 만나니 까리함이라는 것이 폭발하는구나.... 옵바..어딜봐요... 물론 가끔 조니뎁의 패션감각은 오락가락하긴햇음 옵바 영화세트장에서 바로 나오셨세여? 둘이 헤어지고 수십년이 흘러 이제 각자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래도 두 사람의 까리함과 미모만은 오래오래 기억되리.... - Fin -
[네이트판] 시어머니의 이상한 축의금 계산법
오늘도 네이트판에서 인기많은 글들 보다가 재밌어서 퍼옵니다. 물론 글올리신 분은 열불나는 사연이었겠고 자작아니냐는 글도 많기는 하던데 그래도 소설본다치고 재미로 보시면 재밌어요 ㅋㅋㅋㅋㅋㅋ 1편있고 후기있고 2편있고 추가글있던데 저는 퍼오는 입장이니까 보기 편하시게 시간순으로 올릴게요 본문) 결혼한지 3년됐습니다. 12일 우리 아들 돌잔치를 했는데 시어머니의 말도안되는 축의금 계산법에 지금 환장할지경입니다. 결혼 한 그 해에 시아버지가 오랫동안 투병하던 병으로 돌아가셨고 남편이 3남매 중 막내입니다. 첫째형, 둘째누나 모두 결혼했으나 경제적 사정은 여의치않습니다. 그 흔한 상조하나 들어놓은것도없고, 형제들이 모두 회사도 변변찮아 회사에서도 장례도움주는거 없더군요. 처녀때부터 제기 저희부모님 돌아가실때 쓰고자 들어놨던 상조 11년납입 6년납입하고 잔금 반정도 남은거 연락해 상치뤘습니다. 잔금이요? 당연히 제가 냈죠. 게다가 제손님 정말 많이왔습니다. 회사동료며 친구. 가족. 친척들까지 모두 한걸음에 달려와주셨죠. 제가 이 얘기 왜하냐면 그때 저는 시아버님 돌아가셔서 슬픈거외엔 없었습니다. 그저 어머님이 빨리 회복하셨으면 좋겠다싶었죠. 그렇게 일년지나고 아이 임신했고 시어머님도 참 좋아해주셨습니다. 아이키우면서 서운한일 한두가지아니었지만 각설하고. 돌잔치 당일날. 시어머니 한분 오셨네요. 아주버님 형님네 식구 코빼기도 안보이더라구요. 기가찼습니다. 인원보증 60명했는데, 신랑측 손님이라곤 시어머니 신랑친구 8명 회사동료 11명해서 총 20명. 그외에 모두 제 손님이었습니다. 총 오셨던분들은 84분이셨구요. 저희 친정엄마는 손주 돌이라고 돌반지한돈, 현금100만원주셨고. 그외의 친인척들도 30만.50만. 많은액수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돌잔치 계산하고나서도 꽤많이 남았구요. 돌잔치 끝나고 집에와서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지요. 잘들어왔다고.. 대뜸 돈 얼마 벌었냐? 대요 ㅋㅋ 어이가없어서 잘못들었나? 싶어 네? 어머니 뭐라고하셨어요? 그랬더니 얼마나 남겼냐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아직 계산안해봐서 모르겠다. 그게 왜 궁금하시냐고했더니 남편 손님들이 얼마했는지 알아야 자기가 나중에 그사람들 잔치할때 신경쓸거아니냐고 하대요. 시어머님 돌반지 한돈 해주신거말곤 없었구요. 신랑친구들도 다들 10만원씩했고 회사사람들은 5만원 10만원 했더라구요. 더군다나 형제들 먹고살기바쁘다고 안오셨고 봉투도 안들려보냈네요. 울 신랑 돌잔치 내내 표정관리가 안되더라구요. 아무튼 어머님께 대략 200만원정도 남편손님들 쪽에서 들어온것같다. 얘기했지요. 저보구 이름이랑 얼마했는지 적어서 문자로보내라대요? 그게 왜 궁금한지 도무지 이해는 안됐지만 시키는대로 적어서 보냈지요. 총 175만원이더라구요. 문자받고는 다시전화와서는 왜 이것밖에 안되냐 봉투 이름 다 확인했냐. 내가 본 아는 얼굴만 40-50명은 되더라. 하시더라구요? 신랑쪽으로 들어온건 그게 다라고 그랬더니 한숨 한번 푹 쉬시고는 알겠다고 계좌번호 보낼테니 월요일날 송금하라고.. 전 진짜 제가 헛소리 들은줄알고. 네? 뭘 송금해요? 했더니 그때부터 다다다다 쏴붙이시더라구요. 당연한거 아니냐고. 내아들 손님이고 내손주땜에 들어온돈인데 니가 가지려고했냐고. 사람이 양심좀 있으라고. 내가먼저 전화하기전에 전화해서 얼마들어왔다 이돈 어떻게할까요? 물었으면 좋은게 좋은거라고 니들 쓰라고 했을텐데. 지금 너 하는 꼬라지보니 주고싶지않다고. 그돈 다 내놓으라고. 빡치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쏴붙였어요. 그럼 어머니도 아버님 장례식때 제 손님 앞으로 들어온 돈 정산해주시라고. 그거 어차피 제가 그분들 경조사에 갚아야되는 돈인데 어머님이 갖는건 말도안되지않냐고. 대성통곡을하고 우시네요... 나참. 시애미 돈없다고 무시한다느니. 시댁을 우습게 알아서 막나간다느니. 지네 친정에 돈 조금있다고 사람을 깔본다느니.. 별소리를 다하시더니 돌반지 내놓으래요. 알겠다고 월요일날 택배로 보낸다고하니 지금 당장 들고오라 난리가나서 신랑보고 가져다드리고오라고 옷입혀서 반지들려 보냈습니다. 남편 시댁 도착하자마자 와서 잘못했다고 빌어야지 어디서 버르장머리없이 반지 갖다주라고 남편보냈냐고 욕을욕을. 어머님께 신랑 바꿔달라고해서 신랑 받자마자 어머님도 들으라고 아주 큰소리로 이혼하자고. 너같은 놈이랑 못살겠다고. 어디서 그지근성이냐고. 소리지르고 전화 끊었네요. 남편놈 세시간있다 기어들어와서는 아무말없이 옷갈아입고 자네요. 안그래도 형제들 돌잔치 코빼기도안뵈고 친구 동료들 많이 안와서 속상할텐데. 애꿎은 신랑이 다 뒤집어쓰고 병신되어버렸네요. 젠장. 그냥 175만원 먹고 떨어지라고 줘버릴껄 했단 생각이 드는 짜증나는 밤입니다.. 후기?) (쓰다보니 길어졌네요. 새글에 쓸까하다 그마저도 귀찮아서.. 죄송합니다.) 많은분들이 봐주셨네요. 새벽에 울컥하는 마음에 주절대고 닫아버린건데 톡선에 올라갈줄이야.. 다들 공감해주시고 편들어주셔서 마음이 많이 진정되었습니다^^ 어떻게됐나.. 궁금해하시는분이 계실수도있다고(?) 생각되서 뒷이야기를 좀 써볼께요. 글써놓고 침대에누워 눈만감았는데 잠이 오겠습니까. 그래도 낼부터 다시 돌쟁이 아기랑 전쟁을 치를려면 자야된다고 최면을걸고있었는데 제가 잔다고 생각했는지 신랑이 스윽 일어나 거실로 나가더라구요. 지지리궁상 맞게 새벽 4시에 소주꺼내 식탁에 앉아 울더이다. 누가뭐래도 내신랑인지라 쫓아나가서 손을잡았지요. 하고싶은얘기있음 하라고. 겁나 쪽팔린대요. 벙어리된것처럼 한마디도 못하겠다고 미안하단말도 안나온대요. 엄마가 돈 욕심 남다르다는건 알고있었지만 이정도일줄은 몰랐다고.. 시댁가서 엄마한테 왜그러냐고 화내자 엄마가 별의별 불만을 다 쏟아 내시더래요. 그 불만이 뭐인지 한번 들어나보자니까 신랑이 얘기를 하더라구요. 시아버지 돌아가시고나서 매월용돈 보내지않은것. 추석.설날에 용돈만 주고 음식값은 따로 챙기지않은것. 애기낳고 산후조리해준댔는데 기어코 산후조리원 들어간것. 친인척 경조사 얘기해도 돈 보낸단소리 없었던것등. 모두 돈에 관련된것이더라구요. 용돈부분.. 참 ㅋㅋ 이래서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고하나봐요. 시아버지 돌아가실때 신랑이 시아버지 보험 들어놓은거에서 (이것도 제가 신랑이랑 연애할때 닥달해서 들어놓은것) 사망보험금 5천만원이 나왔거든요. 수익자가 신랑이었지만 시어머니가 살아계시고 아버님이 생전에 투병하시느라 살던집도 팔고 전세로 살고계신게 안쓰럽고해서 그돈 다 갖다드리라고 아버지 목숨값 당신이 갖는거 아니라고 했거든요. 어머니 드렸는데 그때 형과 누나랑 틀어졌어요. 왜 자기네들이랑 상의한마디없이 어머니 다줬냐고.. 우리신랑 저랑 7년연애하고 결혼해서 3년째살고있으니 저 이사람 10년봤거든요. 착해서 삽니다. 병신 쪼다같이 착해서요. 지가손해봤음 봤지 남들한테 싫은소리 못해요. 안해요. 그래서 악역은 모두 제몫이네요. 빙신이 형, 누나들한테 한마디도못하고 사과하고 왔다길래 불같이 화가나서 제가 뒤집었습니다. 그돈 우리신랑앞으로 나온돈이다. 당신들이 누굴주던 무슨상관이냐고. 그런데요. 어머님이 그돈 5천 첫째 아들 사업자금 대셨더라구요. 목숨걸고 나쁜년 될 각오하고 뒤집었는데 어머니가 홀랑 돈 갖다줘버리니 제가 열이 받겠습니까 안받겠습니까. 그뒤로 용돈 끊었고. 그 밑으로 줄줄이 있는 개소리도 씨부리던지 말던지 한귀로 쭉쭉 빼면서 살았어요. 아무튼 이번에도 병신된 울 쪼다신랑 불쌍하고 짠해서 꼭 안아주고. 천륜을 어떻게 내손으로 끊겠냐만은 당신이 천륜을 끊겠다는 생각을 하게되면 내가 아주 다시는 돌아오지못할 무지개다리를 놔준다고 하고 퐈이팅있게 잤습니다. 아침 8시에 시어머니 전화 오더라구요. 할 얘기있다고 집으로 오신다고. 건너오시라고 했고 신랑 회사 보낼까 했지만 무슨 사단이 어떻게 나든 결말은 함께 보는게 좋을것같아 반차내고 같이 기다렸습니다. 9시 반되니 어머니 집에 도착하셨는데 손에 뭘 들고오셨더라구요. 앉지도 않고 저한테 시아버지 장례식 조의금장부 툭 던지시더니 니 손님 체크해라 오늘중으로 정산해주마 하시대요? 어머님은 그렇게 하면 제가 잘못했다고 빌줄알았나봐요. 식탁에 앉아 이름보면서 체크하고 빈종이 가져와 따로 리스트 적고있으니 기가차고 코가막힌다는 표정으로 혀를 끌끌차면서 어이없어하시더라구요. 그러든지말든지 다 체크하고 전부 계산해보니 825만원이 제 앞으로 들어왔네요. 몰랐는데 저희 친정엄마 이모 삼촌 외갓집식구들이 다들 50만원씩 크게하셨더라구요. 딸년 시집가서 시댁에 밉보이지말라고 그러신것같아 리스트 작성하면서 울컥해 울었네요. 리스트 다 적어서 드리자 생각보다 큰금액에 놀라셨는지 한참 말없이 계시더니 넌 나한테 더 할얘기없니? 그러시더라구요. 할얘기있다고. 리스트에적은 825만원에 시아버지 상조해드린 490만원도 더해서 주시면 된다고. 어처구니없단 얼굴로 저 보시더라구요. 어머니께 할만큼했고. 돈 드릴만큼 드렸고. 며느리도리 운운하시는거 다해드렸다. 용돈은 왜 못받고계시는지 스스로 아실테니 얘기더이상 안하겠다. 설, 추석때마다 30만원씩 드리는거 적은금액 아니며 제사를 지내는집도 아니고 그렇다고 장 크게봐서 음식 하는집도아니고. 명절전날 마트가서 같이 장보고 계산 아범카드로 하는데 음식값 따로 챙겨달라는거 웃기고 억지다. 산후조리원 350만원에 했다하니 그돈 탐나 들고내려오면 조리해주신다는거 아니었냐. 산후조리원이랑 똑같이 해주시는것도아닌데 왜 그돈 어머니께드리고 조리제대로 못해 앞으로 아파야되는건 내몫인지 이해안되서 산후조리원들어갔다. 친인척경조사 얘기하셔서 어디서 언제하냐 가까운데면 가겠다는데도 오지말라 돈만보내라 하시는데 그것도 한두번이지 경조사 있었던 친인척한테 축의해줘서 조의해줘서 고맙다는 말한마디 못들었다. 어머니 얼굴에 똥칠하는걸까봐 거기다전화해서 내가보낸 축의금 잘 받으셨냐 얘기안했다. 한 30분을 저혼자 연설을 했네요. 막장드라마의 결말처럼 시어머니는 저년땜에 내가 나가죽어야지 못살겠다고 가슴을 탕탕 치시며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서 나가셨습니다. 신랑 안따라가더라구요. 그냥 제손 잡고.. 점심먹으러가자. 한마디하네요. 애기 업고 설렁탕 한그릇 진하게 먹고 푹자고 일어났습니다. 진상진상 개진상 시어머니 또 연락하겠지만. 늘 그랬듯이 앞으로도 제가 이구역의 미친.년. 되어볼랍니다. 2편) 안녕하세요? 글쓴이입니다. 많은 관심을 보내주셔서 매우 감사드립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분들이 제 얘기에 관심을 가져주시고,같이 공감해주시고 상처 입은 제게 따뜻한 말, 시원한 웃음 보내주셔서,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으로 모든 일을 잘 끝냈습니다. 더이상 글을 올리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따뜻한 지원 보내주신 분들께 이렇게 끝났다정도는 알려드리는게 예의인것 같아 오늘도 오늘만 살고 내일 죽을것 같이 사력을 다해 노는 우리 아들을 재우고, 신랑까지 재워놓고 커피한잔들고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글이 꽤 길어지더라도, 그래서 다소 지루하더라도 무한 양해부탁드립니다. 글 재주가 없어요.. ㅎㅎ 월요일, 저녁 7시쯤..신랑이 퇴근하고 집으로 귀가했을즈음.. 제 친동생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 저희집은 1남 2녀로 제가 장녀, 둘째 여동생, 막내 남동생이 있습니다.) 언니 도대체 무슨일이냐고, 사돈댁에서 전화가 왔다고 하더라구요. 차분히 얘기를 들어보니, 상황은 이랬습니다. 시어머님께서 저희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 딸이 시아버지 장례비용을 이제와 토해내라고 한다.난 이렇게 무서운 며느리 진절머리가 나니 애들 이혼시키자고. 저, 이번 일 저희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말씀드릴 이유도 없었구요. 그치만 시어머니 간과하신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진절머리 나는 무서운 며느리 키운 우리 엄마에게 무슨 좋은 소릴 듣겠다고 전화를 하셨나.. 싶네요. 울 친정엄마의 매서운 양육 스토리를 풀자면 2박 3일 걸리니 그부분은 고이접어 넣어두고. 친정엄마가 그러셨답니다. 사돈, 무슨일이신진 모르겠지만 저한테 전화하셔서 큰 소리 낼 정도의 일이라면, 애들 앉혀놓고 어른으로써 혼낼건 혼내고 하시는게 맞지 않겠냐. 사리분별 못하는 유치원생들도 아니고, 말귀 못알아듣는 동물도 아닌데. 갑자기 전화하셔서 애들 이혼시키자고 얘기하시는 연유가 뭐냐. 지들 좋다고 결혼했지, 내가 결혼하라고 등 떠민거 아니다. 내 딸이 천사같이 마냥 착하고 고분고분한 아이는 아닌건 알지만..그렇다고 어디가서 막되먹은 아이라고 욕먹을 애도 아니다. 무슨일인진 모르겠지만 시가에서 벌어진 일은 시가에서 해결하셔라. 제가 도와드릴수 있는 일도 아니고, 갑자기 껴들어 해결 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전화 끊으셨답니다. 궁금한 동생이 엄마 붙들고 늘어져 무슨일이냐 뭐라 그러시더냐 계속 보채봤지만.엄마한테 돌아온 답변은. 딱 하나. 니가 알아서 뭐하게 이년아. 밥이나 먹어. 동생의 전화를 시작으로 제 핸드폰은 콜센터가 되어버렸네요. 우선 신랑의 첫째 형, 그러니까 저한테 시아주버님이 전화를 먼저 하셨더군요. 제수씨 사람 그렇게 안봤는데 너무하는거 아니냐. 잘못했든 잘했든 어른이신데 잘못했다고 하면 끝날일을 왜 크게 만드냐.우리 돈없다고 무시하는거냐. 어머니가 나한테 와서 돈 천만원만 빌려달라고 우시더라.노인네가 돈이 어딨어서 당장 그 큰돈을 주겠냐. 더군다나 그 돈 우리 아버지 장례 조의금이였다. 세상에 어떤 며느리가 그 돈달라고 하냐. 기가 차더군요. 전화가 득달같이 달려올거라 생각한 리스트에 전혀 없던 인물 1인이었습니다. 왜냐, 시아주버님은 저랑 절대 마주치면 안되는 인물이시니까요. 시아주버님이요. 우리 신랑은 당신 지갑으로 알던 인간 말종입니다. 군 제대 하고 서울올라와 직장잡고 원룸으로 이사온 다음 날, 옷 한보따리 싸들고 신랑집에 얹혀 살기 시작했거든요. 그뿐인줄 아세요? 생각해놓은 사업아이템은 디지게 많아요. 돈이 없는게 문제죠. 남의 돈으로 사업하려고 드는 천하의 몹쓸인간인데요. 우리 신랑 착실하게 직장들어가서 200만원 250만원 월급 받아오면, 최저생계비만 제외하고 그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다 빼앗아 갔습니다. 저랑 연애 시작하고, 6개월쯤 지났을때 그 사실 알고나서,저랑 같이 적금 붓게 하고 보험들게하고 청약들게하고 이래저래 돈 묶어버리면서, 돈줄이 끊겨 버리자 그동안 먹여주고 재워줘서 고맙다는 소리 한마디 없이, 짐 싸들고 튀어 3년간 연락 없었던 개차반이시고요. 그 3년동안 더 악착같이 모아 전세 6천짜리 투룸으로 이사갔단 소리 듣고, 다시 기어들어와 빌붙어 빌빌대며 10만원만 20만원만 하다가, 서울에서 직장다니던 신랑이 갑자기 경기도권으로 발령 나면서, 계약기간은 남아있어 바로 방 못빼고 경기도권에 다시 원룸 월세로 방 잡고, 형한테 계약기간까지만 살다가 형도 나가야 될것 같다고 하니 알겠다고 어쩔수 없지 뭐.. 하시더니 계약기간 만료 되기 전, 방 빠진거 말 안하고 집주인한테 보증금 지가 받아서,전세금 6천 들고 나른 또라이중에 상 또라이입니다. 털털 빈털털이 된 우리 신랑 진짜 힘들어했고, 그렇게 '내년에 결혼하자'가.. '언제 결혼할수 있을지 모르겠어 미안해..' 로 바뀌었지요. 세상에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다독이며 다시 돈 모아서, 저랑 결혼할때 3천 겨우겨우 모았습니다. 울 부모님 그런 신랑 더 끌어안으셨고, 우리도 결혼해서 단칸방에서 연탄 때면서 시작했다. 월세로 시작하는거 흉 아니다. 월세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매매로 차근차근 밟아나가면된다. 하시면서 제가 모은 8천만원중에 난데없이 대학교 등록금, 어학연수 보내준 비용, 그동안 키워주고 매겨준 값으로 5천만원 갚으라고 닥달하시더니 저랑 신랑 둘다 딱 3천만원씩 들고 결혼하게 하셨고 신혼집에 청소기 하나 안놔주셨습니다. 형이 6천만원 들고 튀지만 않았어도, 신랑 1억 저 8천해서 어디 전세집에서라도 시작했을텐데.. ㅎ 진짜 생각하면 할수록 빡치네. 아오. 아무튼 저에게는 진짜 살면서 마주치지 말아야 할 인물이기에. 거침없는 막말이 나갔지요. 돈이나 갚고 그런소리 하시라고. 어디서 형 노릇이냐고. 아주버님 하는 짓 보면 가족이라는것만 빼면 사기꾼이나 다름없다고. 나보다 나이 많다고 다 어른은 아니라고. 앞으로도 나한테 아주버님이라는 단어로 불리고 싶으면, 이만 전화 끊으시라고. 네, 전화는 끊겼습니다. 그분 제 눈치 엄청 보시거든요. 그럼요 당연히 보셔야지요. 동생 돈을 지금까지 1억을 해 쳐드셨을텐데. 가족이라는 미친이름을 내세워서, 갚지도 미안해하지도 않는데, 눈치라도 봐야지 당연한거 아니겠습니까. 저에겐 전화해서 좋을거 없다고 판단했는지 신랑 전화가 울리기 시작하더라구요. 제가 잽싸게 빼앗아 전원을 꺼버렸습니다. 안봐도 비디오로 "아.. 응.. 뭐.. 그래.. 응.." 할거 뻔하니까요. 신랑에게 선전포고를 했지요. 나 당신 10년봤다. 10년 본 동안 오늘이 진짜 최악이다.지금까지 당신 식구들한테 지갑취급당하면서 돈 빼앗기고 산거 당신 인생이니 뭐라 안한다. 그치만 이젠 다르다. 나랑 아들내미 생각해서라도 그따위로 살지 말자. 남한테 피해 주지 말고, 피해 받지도 말고 살자. 알겠냐. 고개를 끄덕끄덕. 눈물이 한바가지 고였더라구요. 신랑 전화기가 꺼져서 인지, 제 전화로 전화가 걸려오는데..와.. 둘째 아주버님이더라구요. 처남댁.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불쌍한 어머니 생각해서 그냥 넘어가라. 지금까지 많이 참아온거 아는데, 이번 한번만 더 참고 넘어가면 안되겠냐. 어머니가 집에오셔서 한참 울다가 지금 가셨다. 이건 아닌것 같다. 저도 말씀드렸네요. 아주버님, 아주버님도 저한테 이러시는거 아닌것 같다. 이렇게 쉽게 전화하실수 있는거였으면 돌잔치 당일날 축하한다고 한마디라도 하시지 그랬냐. 연락도 없고 얼굴도 안비추셔서 전 한국에 안계신줄 알았다. 신랑이 아주버님 애들 돌잔치때 어떻게 했냐. 애들 둘 돌잔치 다 쫓아다니고, 돌반지에 돈 20만원씩 넣어서 두번 똑같이 하지 않았냐. 그것만해도 돈 백이다. 우리는 땅파면 돈 나오고, 돈 쓸때없어서 전전긍긍하다 조카들 돌 챙긴줄 아냐. 여기서 돌잔치 얘기가 왜 나오냐고 하시더라구요. 왜 상황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졌는지, 왜 내가 이렇게 광분해 미친년 널 뛰듯 뛰어대는지, 당신들이 나한테 전화하면 안되는 이유가 뭐였는지에 대해 차분히 얘기해드렸습니다. 미안하다. 돌잔치에 일부러 참석 안한건 아니다. 처남댁한테 얘기 안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해야될것 같다. 실은 지난 6일 일요일에 어머니 모시고 저녁식사를 하는데, 형님네(첫째네) 연락이 와서, 같이 저녁을 먹고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 지난번 어머니 생신때 얘기가 나왔다. 그때 형님과 형수님이 마음이 많이 상하셨다고 얘기를 꺼내셨고, 내 와이프도 넌지시 지금까지 있었던 불만을 얘기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그러면서 여자들끼리, 잔치에 형제들이 안가면 창피할것이다 본때를 보여줘야 된다. 뭐 이러면서 같이 가지 않기로 약속이 된 모양이더라. 그래서 못가게 된거다. 라고 하더라구요. 참 지금 생각해도 기가 차네요. 지난 어머니 생신때 일이 뭐냐면요. 결혼한지 3년됐고 어머니 생신이 10월달입니다. 안타깝게도 저희가 결혼을 5월에 하는 바람에 꼬박 3년 모두 어머니 생신을 챙기게 되었지요. 첫번째 해는 아버님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 맞는 어머니 생신이라, 마음도 울적하실것 같고 이래저래 기분 전환이 필요할것 같아, 제주도 여행을 갔다왔습니다. 물론 경비는 80% 저희가 냈지요. 어머니와 저희부부만 가자니 좀 마음에 걸려서, 비행기값과 숙박비만 저희가 내기로 하고 첫째형네, 둘째누나네를 모두 불렀는데. 렌트, 기름, 식사비용.. 대부분이 저희몫이었습니다. 뭐 불만 없습니다. 저희 신랑도 월급이 400가까이 되고, 저도 그때는 임신전이여서,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대기업 5년차 대리였기때문에, 월급이 400가까이 됐으니까요. 둘이 합쳐 800 벌어대는데 그깟 가족행사 한번 못쏘냐 하는 심정으로 베풀었습니다. 두번째 해, 어머니 생신 한달 앞 둔 추석 모임자리에서 첫째 형님이 물어보시더라구요. 이번엔 우리 어디로 여행가? 라고요. 석달 뒤 출산을 앞두고 있었고, 여행은 무슨.. 이라는 생각에 그냥 밥이나 먹자고. 치웠습니다. 물론 어머니껜 현금 100만원 따로 드리면서 출산 앞둬 생신때 같이 어디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야 되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하게 됐다며, 애기 낳고 또 놀러가자고 살랑 걸렸지요. 저희가 100만원을 드리면서, 어머니가 내심 첫째와 둘째에게 너희는 뭐 없냐 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셨고, 그 부분때문에 내년엔 따로하지 말고 돈 모아 하자고 들들 볶더라구요. 어려운거 아니였고, 알겠다고 내년부턴 같이하자고 넘어갔습니다. 세번째 해, 올 해 생신이네요. 첫째 아주버님이 어머님께 생신선물로 뭘 드렸으면 좋겠냐고 물어보자, 안마기가 갖고 싶다고 하셨다고 카톡으로 모두를 소환을 하시더라구요. 자기가 알아봤는데, 바디***에서 나온 안마기가 200만원 정도 하더라. 이게 제일 좋다는데 기왕 사드리는거 이거 사드리면 어떻겠냐. 뭐, 따로 알아보는것도 귀찮았고 알겠다고 그걸로 하자고. 모두 동의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 질문이 참 어처구니 없더군요. 막내야, 너네집에서 얼마할꺼야? 라고 묻더라구요. 제가 지금 무슨말씀하시는거예요? 아주버님? 얼마를 하다니요. 200만원 N분의 1 해서 내는거 아니었나요? 라고 물었습니다. 아주버님이 그러시더군요. 막내네 집은 경제적 사정이 괜찮으니 조금 더 부담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그러면서 아주 재빠르게 둘째네는 얼마 할수 있냐고 하더라구요. 한참뒤 둘째누나.. [30만원] 이라고 하대요. 그러더니 첫째형님이 [우리집도 여유가 별로 안되서 30만원 똑같이 맞출께] 라고 하시더라구요. 나참.. 이게 무슨 말이야 방구야 싶더라구요. 그럼 200만원대 안마기에서 60만원 제외하면 140만원인데, 그걸 우리집에서 다 부담하라는 소리냐. 라고 했더니. 묵묵부답. 됐다고 장난들 그만하시라고. 우리도 돈없다. 애 낳고, 현재 신랑 외벌이로 산다. 월세로 시작해서 2년 지나 애기 낳고 겨우 전세집으로 이사왔다. 탈탈 털어야 십원한장 없으니, 똑같이 N분의 1 할거 아니면 안마기는 사지말자. 그냥 똑같이 30만원씩 어머님께 현금으로 드리던가, 아니면 90만원대 안마기로 알아보는게 좋겠다.얘기하고 전 카톡 단체방을 나왔습니다. 더 볼것도 없었고 알고싶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런 제 행동이 첫째 형님, 둘째 형님에게는 아주 싸가지가 지천으로 없는 올케였나봅니다. 아무튼 시어머니의 생신은 그냥 30만원씩 각자 드리는걸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때의 앙금을 돌잔치로 되받아치셨다는 얘기였지요. 둘째 아주버님께 다시 전화드린다고 말씀드리고, 우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신랑을 앉혀놓고 얘기했죠. 난 계속 이렇게 병신처럼 못살겠다. 니네집 식구들 그지근성 정말 지긋지긋 하다. 베풀어주면 고마운줄 모르고, 더달라 더달라, 나는 돈 찍어내는 기계를 집에 놔두고 사냐. 당신과 나의 노동의 댓가는 당신네 식구들 배불리 먹이고 입히는거냐. 당신이랑 나 3천에 월 40만원 월세로 시작했다. 2년 월세로 사는동안, 우리 얼마나 힘들고 이를 악물고 살았냐. 둘이 마트에 가서 스팸 3개짜리 묶음 살까말까 10분 고민했던거 기억 안나냐. 우린 그지같이 살아도 공경할건 하고, 베풀건 베풀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시댁에 할만큼 했다. 그렇다고 받았냐. 시어머니 손주새끼 태어났다고 돈 10만원 안줬다. 시댁에서 받은거라곤 둘째 형님네가 사가지고 온 배넷저고리 두개였다. 난 그래도 감사했다. 비록 내가 지금까지 형제들은 돈때문에 눈 흘기며 살아도, 애들이 무슨죄냐 싶어 첫째, 둘째 조카새끼들 어린이집가고 유치원가고 초등학교 들어간다고 때때마다 10만원씩 20만원씩 책가방 사주라고 드렸던 돈, 명절때마다 쥐어줬던 용돈, 잔치때마다 쫓아다니면서 부었던 돈. 나한테 고이 되돌아올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그 사람들이 고마워 하면서 살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이게 뭐냐. 대체 어디까지 해야되는거냐. 다다다다 떠들던 내 얘기 단 한마디 반박없이 듣던 신랑이 아무말 없이 핸드폰 전원을 키더라구요. 그때 신랑 눈빛을 보고 알아챘습니다. 아, 이제 내가 할 몫은 다 했구나. 마무리는 신랑이 알아서 하겠구나. 시어머니께 전화를 건 신랑이 딱 한마디 하더라구요. 어머니, 그동안 키워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건강하시고 이제 막내 아들은 없다고 생각하고 사세요. 그리고 전화를 다시 끄더라구요. 물론 곧 바로 저한테 시어머니 전화가 왔죠. 신랑이 제 핸드폰 가져가 전원을 꺼버렸습니다. 신랑 회사 월차내고 오늘 하루 쉬었습니다. 전쟁같은 월요일을 보내고, 오늘은 아침일찍 세식구 옷 챙겨입고 차 끌고 나와 드라이브도 하고 외식도 하고 춥지만 동물원 돌아다니면서 사진도 찍었네요. 그치만 느낀점은 돌쟁이 애 데리고 밖에 돌아다니는건 할 짓이 아니라는거.. ㅠㅠ 집주인에게 연락 했습니다. 죄송하지만 계약기간 다 못채우고 이사가야 할것 같다고.부동산에 집 내놔달라고 말이죠. 오늘 전화번호를 둘다 바꿨습니다. 그리고 당분간 저랑 아기는 친정에서 지내기로 했습니다. 다시는 되돌아오지못할 무지개다리를 건너버린거죠.. 참 끝이 허무하죠? ㅎㅎ 그리고 제 글도 끝이랍니다. 30년 넘게 같이 살아온 식구들의 손을 놓는다는거, 그거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질질 끌고 또 끌고 아프고 상처받고 패인 상처가 또 패이고 그게 흉이되고.. 그간 많이 힘들고 또 처절했네요. 앞으로도 전 애 키우다 심심하거나 세상사람들 사는 이야기가 궁금해지면, 판에 들어와 글도 읽고 댓글도 남기고 할겁니다. 자작이나 뭐다 말도 많고 못된 댓글쓰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래도 가끔 눈물이 찐하게 나올만한 글도, 울컥하며 같이 성질내줄만한 글도,따뜻하게 위로해주고 싶은 글도 있으니까요. 2015년 액땜한번 진하게 한 우리 세식구. 2016년에는 행복만 깃들라고. 다들 축복해주세요. ^^ 글 읽으시는 분들 모두 행복 하시구요. ㅎ 추가) 아침에 일어나 댓글보고 깜짝놀랐네요. 자작이라는 댓글들.. ㅎ 상처가되네요. 몇가지만 반박하겠습니다. 우선 컴퓨터앞에 앉아 글 썼다는데 왜 마지막에 모바일에서 작성되었다고 나오냐는 글. -> 글 써놓고나니 제가 올해랑 작년해를 착각해서 2015년을 2014년으로 써놔 급히 수정했습니다. 님이야말로 모바일에서 쓰면 글 이어쓰기 하는 기능이 없다는걸 모르시네요. 둘째 아주버님이 왜 나를 처남댁이라고 부르냐. 자작이라는 글들. -> 첫째형(나에겐 시아주버님/ 나를부를땐 제수씨) 첫째형의 부인(큰형님/ 나를부를땐 동서) 둘째누나(둘째형님/ 나를 부를땐 올케) 둘째누나남편(아주버님/ 나를 부를땐 처남댁) 이 맞습니다. 호칭공부 좀 하세요. 그리고 베플. 형이 6천만원들고날랐는데 얼굴보고사냐. ->네, 삽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신랑과 연애할때 벌어진일이고 내돈아니고 신랑돈이었고. 그가용서했으니 제가 왈가왈부할문제 아니니까요. 보험금 5천때문에 형제들이랑 틀어졌다면서 제주도여행간게 이해안된다. -> 저희가 결혼한게 5월. 아버님 소천하신게 7월. 사망신고 8월 중순. 보험금신청 9월 중순. 보험금 신청해서 받은게 10월 중순. 어머님 생일 10월 초. 어머님이 큰형 사업자금으로 보험금 주신건 12월. 용돈 끊은건 다음해 2월부터. 형제들과 여행다녀와서 틀어진거예요. 내상식에선 저런일들이 있었는데 얼굴보고사는게 말도안된다는 분들. 글쎄요. 제속을 누가알고 여러분들 가정사를 세상사람들 다 이해하진 못하겠죠. 각자의 사정이 있기에 그게맞다 다르다 얘기할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이치와 맞지않는다고, 내 상식에서 벗어났다고 무조건 거짓이다 생각하시는 오류는 그만범하세요. 드라마는 100프로 거짓임을 알고도 울고웃는 분들이 남의 가정사에 자작이라느니 속았다느니 참 짜증나는 얘기네요. 이래서 사람들이 글을 지워버리는군요. 막상 제가 당하고보니 글 지운사람들 마음이 이해가네요. 글은 오늘까지만 두고 삭제하겠습니다. 자작이라고 생각하시든 아니든 궁금해서 클릭하셨을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