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lover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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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진 10장 (5탄!)

오늘은 일요일
이 시간 쯤 엠비씨에서 서프라이즈 방송하나용?
왠지 이 글 좋아하시는 분들 서프라이즈도 좋아하실거같아용ㅋㅋㅋㅋ
4탄도 반응 좋았어서 또 글 쓸게용ㅋㅋㅋㅋㅋ

비니치에 마지막으로 남은 유대인, 1941

미국 금주법이 해제된 날, 1933년 12월 5일

방탄조끼 시험 중, 1923

Walter Yeo, 공식적으로 기록 된 최초의 성형수술한 사람, 1917

1차대전 당시 참전 군인으로 미사일 공격으로 인해 눈 주위 피부를 잃어버리는 큰 부상을 얻었다고해요.
괴로워하는 그를 위해 성형수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해롤드 길리스 박사에게 피부이식을 받은거라고...

8살의 전설의 체스 신동 Samuel Reshevsky,

프랑스에서 여러 체스 마스터들을 이기는 중, 1920


2800년 된 키스

사람을 끄는 서커스 하마, 1924

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충분한 햇빛과 상쾌한 공기를 마실 수 있게 만든

베이비 케이지, 1937

집 앞 마당에 불에 탄 십자가를 치우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불경기에 4명의 아이들을 파는 문구를 세운 엄마,

부끄러워 얼굴을 숨기는 중

댓글을 달아주시면 6탄 갑니당!

(많은 공유도 부탁드려용 > <, 불펌은 슬퍼용 ㅠㅠ 해석하느라 힘들었어요유ㅠㅠ)
51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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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애들을 파는 거지 결국은 먹고 살게 없어서 입양 보내는 겁니다. 우리나라 6.25 이후에 해외로 입양아들이 대거 빠져나간 것과 같은 상황이라면 부모들을 욕하기 보다는(물론 그 상황에서도 아이들과 가난함을 같이 이고 산 경우도 많으니 욕할 수는 있지요.) 입양이라는 방법 외에는 생각 할 수 없는 그 때 그 비참한 상황을 같이 통탄해보는게 맞지 않을까요...?
베이비 케이지 넘 불안해요ㅠ
귀한사진이네요 또보여주실꺼죠
2800년된 키스...무슨 사연일까요...맨 처음 사진도...얼마나 무서웠을런지...느껴지네요 사진 잘봤어요
체스신동보니까 울 택이생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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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진 10장 (4탄!)
1탄 2탄 3탄 댓글 반응이 좋아서 또 씁니당!!! ㅋㅋㅋㅋㅋㅋㅋㅋ (1탄: https://www.vingle.net/posts/1253920 2탄: https://www.vingle.net/posts/1254954 3탄: https://www.vingle.net/posts/1260828 ) (출처: http://coviral.com/historys-powerful-photos) 여러분의 반응은 제가 계속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당! 뮌헨의 공산주의자를 처형하는 독일 군인들, 1919 간디가 히틀러에게 쓴 편지, 1939 @eheocp: 간디가 히틀러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간디의 주위사람들이 히틀러가지금전쟁계획이 있는데 당신(간디)이 막을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주위에서 얘기해서 보낸거라하네여 그리고얼마안있어서 폴란드침공했다고 인터넷에서봤어요 @pk12man: 1939년 7월 23일 인도에서 친애하는 친구에게, 친구들이 내게 인류의 대의를 위해서 당신에게 편지하라고 재촉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편지가 무례함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떤 친구들은 내가 계산적이되면 안된다고 충고했고, 나는 그것이 어떤 감정을 유발하든지간에 나의 호소를 전달해야만 합니다. 현재 당신만이 인류를 야만상태로 전락시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임이 매우 분명합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가치있는 것으로 보이기만 한다면 어떠한 대가라도 치러야만 직성이 풀리시 겠습니까? 아니면 큰 성공을 거둘 수 없는 전쟁이라는 수단을 신중하게 회피하자는 호소에 귀를 기울이시 겠습니까? 아무튼, 만약 내가 당신에게 편지쓰면서 실수한 것이 있다면,용서를 구하는 바 입니다. 나는 당신의 진정한 친구로 남겠습니다. 마하트마 간디 - 간디가 히틀러를 친구라 부른것은 예의적 표현일 수도 있지만, 나치 독일과 간디의 인도 민족주의는 대영제국의 약화 및 해체로부터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전간기 영국의 힘이 약화된 것은 인도와 같은 식민지에서 제국주의 지배와 수탈에 대한 저항운동 때문이기도 했다. 알카트라즈의 마지막 죄수들이 떠나는 모습, 1963 *알카트라즈: 예전에 교도소가 있었던, 샌프란시스코 연안의 작은 섬 런던의 마담 투소 밀랍인형박물관에 불이 나 녹고 상한 마네킹들, 1930 라스베가스에서 원자핵폭탄 시험을 지켜보고있는 모자. 75km 멀리서 지켜봤다고 하네용.. 1900년대에 묘지에서 찍힌 어린 여자 아이 사진.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사진에 이상한 점이 발견됬다고... 폭탄에 터진 집 앞에서 인형을 들고 있는 어린 아이, 1940 우주에 최초로 간 개, Laika, 1957 개가 돌아오는데에는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고 한다. (우주에서 죽음...) 캐넌 시티 카니발에서의 KKK단, 1925 * KKK단 : 백인우월주의를 내세우는 미국의 극우비밀결사. 익명의 베트남 군인, 1965 댓글 반응이 또 좋다면 5탄도 쓸게용!! 반응 좋아서 5탄도 썼습니당! : https://www.vingle.net/posts/1272445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진 10장 (6탄!)
여러분! 또 왔어용! ㅋㅋㅋㅋ 5탄 반응 진짜 좋아서 ㅠㅠ 기쁜 마음으로 6탄도 가져왔습니당!!! 기다려주시는 분들 감사해용! 1탄: https://www.vingle.net/posts/1253920 2탄: https://www.vingle.net/posts/1254954 3탄: https://www.vingle.net/posts/1260828 4탄: https://www.vingle.net/posts/1266369 5탄: https://www.vingle.net/posts/1272445 (출처: http://coviral.com/historys-powerful-photos) 맥주 금지령 이후 버려지는 맥주 아름다운 자살 23살의 Evelyn McHale,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83가에서 리무진으로 떨어짐.1947년 스티븐 호킹과 그의 첫 아내 히틀러의 마지막 사진, 1945년 4월 30일 플로리다의 마지막 미국 남북전쟁 베테랑, Bill Lundy. 제트 전투기 앞에서, 1955 18살 프랑스 레지스탕스 Simone Segouin (가명 Nicole Minet) 그녀는 샤르트르에서 수도를 해방시키기 위해 참전했다. 8월 19일, 1944 *레지스탕스란 프랑스어로 ‘저항’이라는 뜻이다. 점령군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행위를 일컫는데, 보통 레지스탕스라 하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대한 프랑스 시민들의 저항운동을 의미한다. 한국전쟁 때 서로를 안고 있는 군인들 수영복 길이를 재는 중, 너무 짧으면 벌금 부과, 1920년대 자유의 여신상 머리 부분을 꺼내는 중, 1885 군대에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 1962 반응 좋으면 7탄!!! 럭키 7 갑니당!!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진 10장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진들이 있다길래 그 중에서 10장 가져와봤습니당 *0* 사진에 대한 자세한 이유 이런걸 적어드리고싶은데 사진들에 별다른 설명 없이 제목만 있었다는 점 참고 부탁드려용 ㅠㅠ (출처: http://coviral.com/author/corazon/) +@minbxminb 님께서 댓글에 설명을 추가해주셔서! 글에도 추가합니당 > < 불에 타는 스님 (1963년) @minbxminb: 불에 타는 스님 베트남전쟁 때 남베트남 정권의 불교탄압과 독재에 항거하기 위해서 틱광둑 스님이 소신공양을 했는데 그 고통속에서 전혀 신음소리나 몸부림 조차 없이 버틴 모습의 사진입니다. 후에 시신에서는 손상되지 않은 스님의 심장이 나와서 현재 하노이 국립은행에 보관중이라고 합니다. 구글링 하시면 심장 사진도 찾아 볼 수 있어요. https://youtu.be/Mo_iV7kOGe4 <- 소신공양 때 영상입니다. 이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 모습은 Rage Against The Machine 의 1집 앨범에서 자켓 사진으로 사용되기도 했었습니다. 나치의 경례를 하지 않고 있는 유일한 한 사람 (1936년) 배우 소피아 로렌과 제인 맨스필드 잌ㅋㅋㅋㅋ @minbxminb: 배우 소피아 로렌과 제인 맨스필드 1958년 미국 베벌리힐스에서 육체파배우 소피아 로렌이 거대한 가슴으로 유명세를 탄 제인 맨스필드를 만나자 곁눈질로 가슴부위을 보고있는 사진입니다. 정작 맨스필드는 가슴에 묻혀 연기력을 인정받지 못했다네요. 고등학교 농구부 시절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혼자 유일한 흑인인게 더 놀랍네용; @minbxminb: 고등학교 농구부 시절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오마바 대통령은 고등학교 시절에 아버지가 하와이에 왔을때 선물한 농구공으로 매일 맹연습을 했고 푸나호우 농구부 선수로 활동했습니다. 농구는 농구선수급으로 잘 했고 팀의 에이스였지만 흑인이라서 주전은 될 수 없었다네요. 그 당시에는 몰랐다고해요 왜 자신이 주전이 될 수 없었는지. 백만개의 동물 해골 (1870) 우주인 Michael Collins가 찍은 사진 (1969년) 불이 난 건물에서 살기 위해 떨어지는 엄마와 딸 (1975년) 한명만 살아남았다고 하네용 ㅠㅠ 베트콩을 사살하는 사이공 경찰 (1968년) @minbxminb: 베트콩을 사살하는 사이공 경찰 이 사진을 촬영한 것은 미국 기자 에디 아담스입니다. 1969년 2월 1일 실제로 총을 겨누는 사람은 경찰서장이고 사살당한 사람은 사이공 도처를 찌르고 다녀던 베트콩 일원이었고 현장에서 즉결처형으로 사살당했지만 우선 사진상으론 사복을 입고있는 남자가 공포에 질린 (엄청난 공포로 얼굴이 구겨질대로 구겨져 그의 아내가 얼굴을 못알아볼 정도였다고하네요) 민간인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이 야만스러워 엄청난 사건이 되어버린 사진입니다. 이 후 경찰서장은 미국의 압력에 의하여 직을 박탈당하고 미국으로 넘어가 피자집을 운영하다가 사람들에게 정체가 알려져 식당에 욕 낙서가 난무했다고 하네요. 기자 에디 아담스는 이 경찰서장에게 사과했다고 해요. 장군은 총으로 베트콩을 죽였고 자기는 사진으로 장군을 죽였다고.. 우주에서 떨어진 우주인 Vladimir Komarov 의 잔해 (1967년) 인형극에서 악당을 밝힐 때의 아이들의 반응 (1944년) ㅋㅋㅋㅋㅋ애들 너무 귀여워용 ㅠㅠ 재밌게 보셨나용? 댓글 달아주시면 2탄 올려드릴게용 > <! 댓글 많이 달아주셔서 https://www.vingle.net/posts/1254954 2탄도 올렸어용!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진 10장 (7탄!)
꺄ㅑㅑㅑ 여러분 반응 진짜 잘해주셔서 ㅠㅠ 감동 한아름들고 다시 돌아왔어용ㅋㅋㅋㅋ 오늘도 즐감해쥬세용 > < 1탄: https://www.vingle.net/posts/1253920 2탄: https://www.vingle.net/posts/1254954 3탄: https://www.vingle.net/posts/1260828 4탄: https://www.vingle.net/posts/1266369 5탄: https://www.vingle.net/posts/1272445 6탄: https://www.vingle.net/posts/1278638 (출처: http://coviral.com/historys-powerful-photos) 공원에서 여성들에게 근육을 자랑하는 아널드 슈워제네거 * 아널드 슈워제네거 전 캘리포니아 주의 주지사 아널드 알로이스 슈워제네거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배우, 보디빌더, 정치인이다. 배우가 되기 전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보디빌더로 활동했으며, 38대 캘리포니아 주지사이기도하다. 케네디 대통령의 조카인 마리아 슈라이버와 결혼하여, 4명의 아이를 두고 있다. 보디빌더로서는 전설적인 존재이며 그의 이름 자체가 근육질의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러시아 주부에게 배급량을 나눠주는 독일 군인, 1941 착한 마음씨를 갖고있네용 ㅠㅠ 디즈니 형제와 그들의 아내들, 스튜디오 오픈한 날, 1923 일본이 항복한다는 서류를 싸인하고 있는 더글라스 맥아더, 1945 *더글라스 맥아더 태평양전쟁 미군 최고사령관 독일 전투기 조종사,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와 그의 개, 1916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은 "붉은 남작"으로도 불리며, 1차 세계 대전중 독일 제국군 비행부대의 전투기 조종사였다. 그는 다른 어떤 전투기 조종사 보다도 많은, 80번의 항공전 승리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최고의 에이스"였다. 처음에는 그는 기병대원이었으나, 1915년 비행부대로 전근하였고, 1916년 독일제국 비행단(Jasta 2)의 첫 멤버중의 한명이 되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당, 베니토 무솔리니의 본부, 1934 *베니토 무솔리니 베니토 안드레아 아밀카레 무솔리니는 파시즘을 주도한 이탈리아의 정치인이다. 국가 파시스트당을 창당하였고 1922년 이후 이탈리아 왕국의 국무총리였다. 1925년부터 무솔리니는 최고통치자를 뜻하는 두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1936년 이후 무솔리니의 공식칭호는 "정부 수반이자 파시즘의 두체이며 제국의 설립자이신 불세출의 베니토 무솔리니" 였다. 히로시마 원폭 전과 후, 1945 타이타닉호의 마지막 모습, 1912 니콜라 테슬라 연구실에 있는 마크 트웨인, 1894 *니콜라 테슬라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출신 미국의 발명가, 물리학자, 기계공학자이자 전기공학자이다. 그는 상업 전기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전자기학의 혁명적인 발전을 가능케 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테슬라의 특허와 이론적 연구는 전기 배전의 다상시스템과 교류 모터를 포함한 현대적 교류 시스템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그의 이러한 연구는 2차 산업 혁명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는 마크 트웨인이라는 필명으로 더욱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미시시피 강 유역을 배경으로 개구쟁이 소년인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그린 동화 《톰소여의 모험》이 있다. 투탕카멘의 관을 여는 모습, 1924 반응 좋으면 8탄 갑니당!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진 10장 (8탄!)
뜨거운 반응을 이어가기위해!8탄 가져왔습니당 ㅋㅋㅋ 아마 9탄이 마지막 회가 될거같아용! (만약 이번것도 반응이 좋다면 ㅠㅠ ) 1탄: https://www.vingle.net/posts/1253920 2탄: https://www.vingle.net/posts/1254954 3탄: https://www.vingle.net/posts/1260828 4탄: https://www.vingle.net/posts/1266369 5탄: https://www.vingle.net/posts/1272445 6탄: https://www.vingle.net/posts/1278638 7탄: https://www.vingle.net/posts/1283228 (출처: http://coviral.com/historys-powerful-photos) 미국 남부에 백인 학교를 처음으로 간 흑인, Ruby Bridges 1960년 11월 14일 조지 S. 패튼의 사망 당일 그의 개의 모습, 1945 * 조지 스미스 패튼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 1945년, 북아프리카, 시실리, 프랑스, 독일에서의 전투를 지휘한 미국의 육군 장군이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북프랑스에서 하루에 110km를 진격하기도 하였다. 프랑스와 나치 독일에 걸친 7 군을 지휘하였다. 1945년 12월 9일 자동차 사고로 독일 하이델베르크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죽음의 문"이라 불리는 아우 슈비츠 II-버케나우의 정문, 1944 테러범에게 잡힌 인질을 구하기위해 런던에 있는 이란 대사관을 들어가는 SAS, 1980 *SAS : Special Air Service. 영국 특수부대. 영국의 육군공수특전단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인 41년 데이비드 스털링(David Stirling)에 의해 창설된 SAS는 현대적 의미의 특수부대의 원조다. [네이버 지식백과] SAS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일본의 궁수들, 1870-1880 1969년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 주의 (아래 사진은 조금 징그러우므로 심장 약하신 분들 및 노약자분들은 빠르게 패스해주세용!) 전쟁 중에 팔을 잃은 독일 군인 헉.... 무슨 영화 촬영 세트장같은데 ㅠㅠㅠㅠ 흐어 1차 세계대전 때 십자가상 밑에서 죽은 군인, 1917 Reichserntedankfest rally (Thanksgiving Celebration of the Reich), 1934 70만명이 참여한 행사라고 합니다만 괄호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직역하면 독일의 추수감사절 인데... 찾아보면 나치 정권때에 있었던 일인거같아서 ㅠㅠ 해석이 분명치 않네용 Reichserntedankfest rally 가 뭔지 아시는 분 계시면 댓글로 달아주세용! @HyeyeonNa님의 추가설명 본문에도 추가합니당 :) 혜연님 감사합니당! Reichserntedankfest에 대해 찾아보니 독일의 추수감사절이고, 1934년 행사는 독특했던 것이 나찌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도 집단적으로 모인 축제의 장에서 성스러움과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변화라는 감정적인 고양상태를 맛보았다고 하네요. 나찌의 대중 선전술은 어찌되었던 무섭군요. (참고 : http://rarehistoricalphotos.com/reichserntedankfest-rally-thanksgiving-celebration-reich-1934/) 건축가 Albert Speer 가 만든 Cathedral of Light에서 열린 나치 집회의 모습, 1937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진 (마지막)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진 시리즈 마지막탄이 되겠네용 ㅠㅠ 제가 퍼오는 곳에서도 이게 마지막 사진들이라서용 ㅠㅠ 그동안 댓글달아주시고 좋아해주셨던 분들 감사해용! 정주행 하실 분들을 위해 1탄부터 리스트 적어놓을게용!! 1탄: https://www.vingle.net/posts/1253920 2탄: https://www.vingle.net/posts/1254954 3탄: https://www.vingle.net/posts/1260828 4탄: https://www.vingle.net/posts/1266369 5탄: https://www.vingle.net/posts/1272445 6탄: https://www.vingle.net/posts/1278638 7탄: https://www.vingle.net/posts/1283228 8탄: https://www.vingle.net/posts/1296753 (출처: http://coviral.com/historys-powerful-photos) 성공적인 오스트리아 합병 선언에 독일 의회에서 히틀러에게 경례를 하는 모습, 1938 두명의 소련 보병들이 참호에서 얼어 죽은 모습, 핀란드, 1940 흐엉 ㅠㅠㅠㅠ 처형 당하는 중에 웃고있는 러시아 스파이, 핀란드, 1942 소름이네용;;; 25,000피트 상공에서 무중력 상태를 실험 중, 1958 잌ㅋㅋㅋ ㅠㅠ 고양이는 무슨 죄 ㅠㅠ 마추피추 발견 후 첫 사진, 1912 아인슈타인이 죽은 다음 날 그의 책상 인형을 든 버려진 아이, 독일이 런던에 공중 투하 폭탄을 하고 난 뒤라고.. 1940 그동안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진 시리즈를 좋아해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당!!! 앞으로도 좋은 사진들 시리즈로 많이 올릴게용 > <
악마의 재능 끝판왕, 레니 리펜슈탈
이 사람 이름은 레니 리펜슈탈. 무용가이자 배우, 영화 감독이자 사진 작가, 스쿠버 다이버 겸 나치 부역자임. 레니는 1902년에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남. 아버지는 사업가였고, 레니가 경제학을 전공하길 원했지만 레니는 무용을 배우고 싶어했음. 부모님은 레니의 뜻을 꺾기 위해 산 속 기숙학교에 보내는 등 온갖 수단을 썼지만 레니의 뜻은 확고했고, 결국 아버지는 레니를 무용 학교에 보내 표현주의 무용을 배우게 해줌. 늦은 나이에 무용을 배웠지만 레니는 재능이 있었고, 유럽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순회 공연을 했음. 그러던 중 1924년, 프라하 공연에서 발목 부상을 당함. 무용가의 수명이 끝날 만큼 심한 부상이었음. 이렇게 무용가로서 대성하기 전에 꿈이 꺾인 레니는 베를린으로 돌아왔고, '운명의 산'이라는 영화 포스터를 보고 영화 배우의 꿈을 키우게 됨. 영화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레니는 당대 유명 감독이었던 아놀드 펑크를 찾아가고, 레니에게서 배우의 재능을 본 아놀드 펑크는 레니를 위한 대본을 씀. 이때 레니는 테니스 챔피언인 오토 프로이츠하임과 약혼 중이었는데 오토가 결혼을 재촉하자 영화에 전념하기 위해 단호하게 파혼을 통보할 정도로 강렬한 열정을 드러냄. 그렇게 레니는 '성스러운 산' & '위대한 도약' 두 편을 연달아 찍으며 배우로서 성공을 거둠. 이후로도 계속 펑크의 영화에 참여하던 레니는 할리우드 진출 제안을 받지만 거절함 오른쪽이 레니, 왼쪽이 마를레네 디트리히임. 둘은 당대 최고의 라이벌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할리우드 진출 제안을 받았지만 이후 정반대의 행보를 걸었음.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할리우드 제안을 받아들여 미국으로 떠났고, 나치당의 협력 제안을 거절한 후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완전히 망명함. 이후 마를레네는 가수로서도 탄탄한 커리어를 쌓으면서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배우로 남음. 한편 레니는 배우를 넘어 감독의 꿈을 꾸고 있었음. 레니는 자기가 오래 전부터 구상하던 '푸른 빛'이라는 작품을 펑크와 상의하는데, 펑크와 레니는 관점이 달랐음. 펑크는 자연의 장엄한 분위기와 극한의 환경을 묘사하고 싶어했고, 레니는 예술적인 분위기에 중점을 두고 싶어했음. 결국 레니는 하얀 열정을 마지막으로 펑크의 뮤즈 생활을 끝내고 1931년 푸른 빛을 제작하게 됨 1931년의 레니는 당연하게도 돈이 없었음. 레니는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자기가 감독, 편집, 대본, 주연을 전부 맡았고 펑크를 포함해 8명의 팀원들은 반 년간 무급으로 일하며 영화를 만들었음. 이렇게 탄생한 레니의 첫 장편 연출작은 베니스 영화제 은상을 타며 대성공했고, 흥행도 잘 됨. 그리고 푸른 빛은 레니의 인생을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밀어넣게 됨 ㅇㅇ...히틀러임... 푸른 빛을 보고 레니에게 빠져든 히틀러는 1933년 레니에게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촬영해달라고 요구함. 차기작을 위해 그린란드로 떠날 예정이었던 레니는 거절하지만, 히틀러는 계속해서 러브콜을 보냄. 결국 레니는 1934년 히틀러의 요청을 수락함. 레니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촬영해 '의지의 승리'라는 다큐 형식 영화를 만드는데, 가히 혁명에 가까운 연출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다시 한 번 성공을 거둠. 나치를 미화하는 선전 영화가 아니었다면 역사에 남을 만큼 웅장한 영상미를 뽐냄. 그도 그럴 게... 히틀러는 레니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레니는 42M짜리 기둥에 승강기를 설치해서 승강기를 타고 오르내리며 광장 전체를 촬영함;;; 나치와 히틀러의 권력이 아니었다면 꿈도 못 꿀 사치였음. 어쨌든 의지의 승리는 대성공했고, 히틀러는 앞으로 자기 선전 영화는 이거만 쓰라고 명령할 정도로 흡족해함. 이후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IOC는 레니에게 올림픽 촬영을 부탁함. 고민하던 레니는 스승이자 친구인 펑크가 동계올림픽 촬영을 했던 걸 떠올리고, 최고의 작품을 만들겠다는 결심과 함께 IOC의 제안을 수락함. 히틀러는 이번에도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며 당대 최고의 촬영 기사들로 팀을 꾸려주고... 레니 악마의 재능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올림피아가 탄생하게 됨. 올림피아는 클로즈업, 역동적인 촬영 각도 등 당대에는 없던 기술을 동원해가며 만들어짐. 필름 길이만 40만미터였고 편집에 18개월이 걸림. 여담으로 당시 레니가 괴벨스랑 존나 싸웠다고 함. 괴벨스가 올림픽 담당자였는데 레니가 극적인 촬영을 위해 경기장 여기저기 땅굴을 파고, 미흡한 부분이 있으면 선수를 찾아가서 재촬영을 요구해서 존나게 싸움..;; 올림피아 역시 나치의 선전 영화인데, 아리아인의 우월함이 메인 주제이기 때문. 참고로 올림피아에 여시들이 아주 잘 아는 사람이 큰 비중으로 나오기도 함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ㅇㅇ 레니는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에 심취했기 때문에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에게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음. 참고로 손기정 선수도 평소에 정치와 스포츠는 별개라고 생각해서 레니는 무고하다고 생각하셨다구 함. (이 사진도 년도를 보면 알겠지만 전쟁 후임. 전범 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풀려난 레니가 초대했을 때 그에 응한 손기정 선수가 독일에 가서 레니 집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 어쨌든 이렇게 나치의 그림자 아래서 마음껏 영화를 찍던 레니는 나치와 함께 몰락하고, 수용소에 수감됨. 레니가 히틀러와 연인이었다는 의혹이 많이 제기됐지만 레니는 죽을 때까지 부인했고, 여러 번의 재판 끝에 무죄로 풀려남. 선전 영화를 여러 번 촬영한 것과 별개로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았고 나치의 수용소나 그들의 학살 작전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는 게 확인 돼서 무죄를 받았다고 함. 하지만 어쨌든 레니는 나치의 부역자였고, 더는 영화를 촬영할 수 없었음. 작품이 엎어지고 엎어지길 반복하며 정신병원까지 입원하는 등 우울한 시기를 보내던 레니는 우연히 헤밍웨이의 소설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을 읽고, 아프리카에 매료됨. 마침 압류 당했던 재산을 돌려받은 레니는 전쟁 전에 빌려줬던 돈까지 받아 경비를 만든 다음 카메라를 들고 아프리카로 떠남. 이렇게 사진 작가의 삶을 시작하게 됨. 이게 1956년임. 사실 레니는 아프리카를 주제로 한 영화를 찍고 싶어했음. 하지만 세상은 나치의 부역자였던 레니를 용서해주지 않았고, 영화는 번번이 무산됨. 그러던 중 1963년, 아프리카의 부족 중 하나인 누바족을 연구하러 가던 인류학자 탐험대가 레니한테 '님 같이 가실? ㄱㄱ?' 하게 됨. 'ㅇㅋㅇㅋ ㄱㄱ' 하고 떠난 레니는 누바족의 아름다움에 매료됐고, 탐험대가 돌아간 후에도 누바족 마을에 살며 누바족과 친구가 되어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이후 10년간 꾸준히 누바족을 방문함. 중간에 수단에 내전이 터졌는데 계속 신청해서 수단 정부가 레니한테는 출입증을 내줌ㅎ... 여담으로 레니의 아버지와 동생은 세계 2차 대전 중 사망했고, 레니는 1945년 후로 쭉 어머니와 지냈음. (동생은 독일군으로 전쟁에 참여하던 중 전사함.) 1960년대에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어머니가 사망하고 극심하게 좌절한 레니에게 동기 부여가 됐던 게 아프리카와 누바 족 누바족과 함께하던 시기의 레니. 1973년, 레니는 누바족을 주인공으로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첫 사진집을 출간하고 동시에 스쿠버다이빙에 도전함. 이 당시 이미 70대였던 레니는 나이 땜에 허가 안 해줄 거 같으니까 출생연도를 1922로 속여서 함;;...여러모로 특이한 인간인듯.... 이리하여 레니는 최고령 스쿠버 다이버로서 1990년 수중 사진집을 발표함. 레니는 그 후로도 계속 사진을 찍다가 2000년, 아프리카에서 헬기를 타고 촬영하던 중 헬리콥터가 추락해 갈비뼈와 폐가 나가는 큰 부상을 당함. 병상에 누운 레니는 1976년부터 2000년까지 3천번이 넘는 잠수 기록을 모아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고 2002년, <물 아래의 인상>을 발표함. 49년 만에 영화를 만든 레니는 103살 생일에 35년간 동거하던 남자친구와 혼인 신고를 하고, 2주 후 조용히 사망함. 레니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리는데, 영화사에 길이 남을 시도를 한 천재적 감독이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나치의 헤드 치어리더라는 평가도 있음. 전쟁 후 영화, 특히 독일의 전후 영화는 레니의 파시즘적 유산을 거부하고 레니가 신화화한 히틀러를 해체하고 비판하기 위한 예술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큰 영향을 끼친 건 분명함. 참고로 레니는 죽기 직전 '히틀러를 만난 게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 라고 말했다고 함. 위에 말했다시피 레니의 라이벌이었던 마를레네는 나치당의 요구를 피해 망명한 후 독일에 남은 유태인 영화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노력했고, 미군을 위해 순회공연도 돌았음. 이 때문에 전쟁 후 독일에 갔을 때 환호와 야유를 동시에 받았지만 전설적인 배우로 남음. 레니는 분명히 다재다능했지만 레니의 예술은 나치의 권력에 의존한 부분이 없지 않았고, 레니는 그 대가로 죽은 후까지 나치의 부역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음.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나치의 그림자 속에 있었기에 저 시대에 자기가 하고 싶은 예술을 거침없이 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름. 푸른 빛을 찍을 때만 해도 예산이 부족해서 혼자 모든 걸 도맡아하며 팀원들에게 월급도 줄 수 없었던 레니인데, 히틀러를 만난 후로는 당대 최고의 촬영 기술자들을 지휘하고 올림픽 선수들을 배우로 쓰며 자신이 원하던 대로 인간의 육체를 탐구하는 '작품'을 찍었으니까. 올림피아 이후로 올림픽 기록 영화가 잘 나오지 않는데 레니의 위상이 한몫 하는데, 과연 레니가 나치의 부역자가 아니었어도 괴벨스한테 빅엿을 먹이고 올림픽 선수들을 배우로 활용하며 올림피아를 찍을 수 있었을까? 올림피아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건 분명히 레니의 재능이지만 히틀러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원이 없었다면 절대 세상에 나오지 못할 작품인건 확실함. 개인적으로 이런 걸 보면 사람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됨. 삶 동안의 욕망인지, 삶 이후의 명예인지... 출처 마지막말 좋네요 삶 동안의 욕망인가 삶 이후의 명예인가..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jpg
조선 역사를 통틀어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람은 영조단 한 명 뿐임 영조가 얼마나 지독한 아버지였는지는 차치하고 (내가 사도세자였어도 온전히 버티지 못할법 한..) 정치적으로 임금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그렇게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려고 함 먼저 영조는 여시들도 잘 알다시피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이고 형인 경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음 그리고 즉위 기간 내내 숙종의 씨가 아니다, 경종을 죽였다는 왕위 정통성을 건드리는 헛소문의 주인공임 이런 루머에 시달린 왕은 조선 내내 더 찾아봐도 없음... 다만 이런 정통성의 취약성과는 별개로 영조는 탕평책을 통해 훌륭하게 정권을 장악한 강한 왕권의 소유자임 이건 즉위 후반부, 사도세자가 죽었을 쯤엔 너무나도 당연한 명제였음 영조에겐 아들이 둘 있었는데 큰아들은 바로 영조가 연잉군 시절에 얻은 효장세자 '이행'임 효장세자는 숙종이 생전에 본 유일한 손자 영조가 스물 다섯에 본 아들이므로 그 때 당시 빠른 건 아니지만 적당한 나이에 얻은 아들이었음 하지만 이 아들은 영조가 즉위한 후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10살의 나이에 병으로 죽음 근데 이 죽음이야말로 몇 안되게 조선왕실에 찐 독살로 의심되는 죽음임 당시 대비 어씨를 중심으로 한 남은 경종 지지세력이 영조에게 한 짓일 수도 있다는 추측이 가능함 (사족으로 영조가 그 당시 무려 81세까지 살았기 때문에 효장세자가 살아있었어도 당시 평균수명을 웃도는 50대 중반이라 아버지보다 먼저 자연사했거나...몇 년 왕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높을 듯...) 그 이후로 7년간 영조는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총애하던 궁인 출신 후궁 이씨에게서 드디어 둘째 아들 사도세자를 얻음 세상에 귀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있겠냐만은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유일한 후계자임과 동시에 그보다 더한 정치적 가치가 있었음 바로삼종의 혈맥이라는 것 ㅇㅇ 삼종의 혈맥이 뭐냐면 바로 영조의 아빠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3대를 말하는데 효종 현종 숙종임 즉 소현세자 사망 후 형 대신 세자가 되고 왕이 된 효종의 후손이라는 것 현종 숙종 대에 불거진 예송논쟁을 정말로 러프하게 요약하자면 왕위 정통성이 효종의 후손에게 있느냐, 소현세자에게 있느냐고 묻는 논쟁이기도 했음 그렇기에 효종의 후손들에게 이 삼종의 혈맥으로 왕위를 잇는 건 너무도 중요한 가치이고 이건 영조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단서이기도 함 영조는 세제이던 시절 역모에 연루되어 죽을 뻔 한 적 있음 이 때 영조를 구해준게 당시 대비이던 인원왕후인데 영조가 자신을 구해달라며 그 명분으로 내세운게 바로 제가 죽으면 삼종의 혈맥은 어찌 잇겠습니까? 였음 ㅇㅇ 맞음 영조는 경종을 제외하면 당시 유일하게 살아있던 효종의 직계였음 효종은 아들이 현종 하나뿐이었고 현종은 아들이 숙종 하나뿐이었음 숙종도 아들이 여럿 있었으나 장성한 건 경종, 영조 둘 뿐 경종의 왕비 선의왕후가 소현세자의 후손이 되는 왕손을 자기 양자로 들여 세자로 삼으려 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실제 실행되지 못했던 건 삼종의 혈맥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함 ㅇㅇ 그만큼 당시 왕실 직계에게 효종/소현세자 정통성 문제는 중요했음 당시 사도세자가 없었더라면 왕족 누군가를 입적해서 왕위를 잇게 했을텐데 가장 가까운 왕족이 바로 소현세자의 후손들이었고 이로 인해 나중에 정치적 대혼란이 올게 당연했던 상황 그런데 사도세자가 태어나 드디어 삼종의 혈맥을 이을 수 있었음 하지만 어린시절 영특했던 사도세자는 영조의 바람만큼은 자라나지 못했고 이로인한 아버지의 미움에 압박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어떤 기질이 있어서인지, 혹은 둘 다인지 사도세자는 역대 세자들 가운데 있었던 적 없는 잔인무도한 짓을 저지름 내관의 목을 잘라 들고 다니며 궁인들을 겁주고 후궁을 때려죽였으며(이 때 자기 자식도 죽일 뻔함)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이 백여명에 달했음 문제는 당시 영조가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고령이었다는 것 (물론 수 년 후에 죽지만...) 내일 왕이 될지도 모르는 세자의 눈치를 보느라 누구도 제대로 영조에게 세자가 저지른 짓을 알리지 않았음 나경언의 고변 등을 통해 결국 영조가 알게 되긴 함 내가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상태에, 광인이자 살인을 저지르는 세자를 후계로 놔둘 수 있었을까? 사도세자에겐 당시 네명의 아들이 있었음 그 중 적자이자 차남인(장남은 요절) 세손은 매우 영특했고 따라서 이제 더이상 사도세자는 유일한 삼종의 혈맥을 가진 후계가 아님 다만 문제는 세자를 살려둘 경우, 세자의 아들 중 하나가 왕이 되었을 때 그를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것 임금도 불효를 해선 안되는게 조선의 성리학 질서였고 세자의 광증이 끝나지 않는다면 이를 세자의 아들이 컨트롤 할 수는 없게 되어 버리기에 결국 죽일 결심을 했다고 봄 그리고 아무리 세자가 광인이라고 한들 세자의 아들들이 나중에 그의 죽음에 일조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고자 들 가능성이 있음 이러면 연산군 때처럼 풍비박산 날 수도 있는 것.. 그래서 영조는 사도세자의 죄를 고한 사람으로 두 명을 내세움 바로 사도의 두 명의 어머니 첫번째는 바로 죽은 정성왕후 서씨 세자의 법모임 영조는 정성왕후가 꿈에서 나타나 세자의 죄를 알려줬다고 함 두번째는 세자의 생모영빈 이씨 세자가 왕을 시해하려 했다는 것을 고변함 즉,아버지를 죽게한 사람을 자신의 할아버지/할머니로 둠으로써 추후 새로운 왕의 즉위로 인해 다가올 정치적 파장을 줄이려 한 것 뒤주라는 그로테스크한 방식을 쓴 것도최대한 남의 손이 개입되지 않게 하려한 것으로 추측됨... 이상.... 출처
기록에 이름이 남아있는 조선시대 중전과 후궁들.jpg
여시들도 알다시피 조선시대 여자들의 이름은 잘 남아있지 않음 당시 사회 계급상 최고위층이었을 왕실의 여자들도 마찬가지.. 그래도 간혹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도 있으니 함 봅시당 태종 이방원의 후궁 신순궁주 이정민 이방원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일 때 후궁이 되었는데 이 때 과부였다고 함 조선 극초기에는 과부가 후궁이 된 경우가 종종 있었음 태종과 원경왕후가 죽은 후 명복을 빌기 위해 절에 시주를 하고 기록을 남겼는데 여기에 자기 이름이 남음 세조(수양대군)의 후궁 소용 박덕중 여긴 죄를 지어서 이름이 기록에 남은 케이스 세조가 수양대군이던 시절에 들인 첩인데 세조가 왕이 되며 후궁이 됨 왕자도 낳았으나 4살 무렵 죽었고 이후 세조의 총애가 끊어짐 이로인해 외롭던 상태에서 덕중은 환관과 바람이 나게 되고...이것 때문에 후궁에서 일반 궁녀로 강등 당함 그리고 궁녀 일을 하며 다시 세조의 조카에게 반해서 러브레터를 보냈다가 들킴 이후 사형당함...ㅠ 성종의 후비 정현왕후 윤창년.... 진짜임 실록에 나옴 아버지 윤호가 신창이라는 고을 수령으로 있을 때 태어나서 신'창'에서 태어나 창년이라고 지었다고함.... 연산군 후궁 숙의 이정이 연산군에게 꽤 총애를 받은 후궁 중 한 명인데 중종반정 이후 궁 밖에서 조용히 살다 죽음 중종 즉위 후 처분 논의할 때 이름이 거론됨 연산군 후궁 숙용 장녹수 장녹수는 워낙 유명하니까 일단 패스 연산군 후궁 숙용 전비 전비도 연산군의 총애를 엄청 받았고 장녹수와 함께 부와 권세를 누리던 후궁이었는데 지명도가 약함...장녹수와 함께 죽었음 광해군 후궁 귀인 윤영신 상당한 명문가 출신 후궁으로 광해군과의 사이에서 딸도 하나 있었음 인조반정 후 광해군 시대 간신 중 하나랑 불륜을 저질렀다는 명목으로 사형 당하는데 과연 진실일지... 광해군의 후궁 소용 임애영 여기도 역적죄인이 되어 이름이 남음 미색이 뛰어나고 똑똑해서 광해군이 마지막까지 총애한 후궁이었음 광해군이 폐위 당한 후 원래라면 사형 당했어야 하지만 인조 반정을 일으킨 신하들과 연줄이 있어서 살아남아 유배지의 광해군과 함께 지냄 나중에 조정 신하들과 내통해서 종친을 왕위로 추대하려는 반란을 도모한게 발각되어서 사형 당함 숙종 후궁 희빈 장옥정 여기도 너무나 유명하니까 패스 정조 후궁 의빈 성덕임 여기도 유명해서 패스 고종 왕비 명성황후 민아영 보통 민자영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는데 자영은 소설 운현궁의 봄에 처음 등장한 이름이고 이후 발견된 사료 열성왕후세보에는 아영이라고 기록되어있음 고종 후궁 순헌황귀비 엄선영 이 이름은 좀 특이한게 고종이 내려준 이름으로 알려져 있음 진짜 이름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는데 아마 시대상과 출신을 고려했을 때(한미한 가문 출신 궁녀) 성의 있는 이름이 아니라 다시 지어주지 않았을까... 출처
인도보다 심하다는 영국 계급 사회 ㄷㄷ
많은 영국인 출신 배우들이 영국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헐리우드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음 그 대표적인 이유로 제임스 맥어보이 영국국적이지만 할리우드에서 입지를 쌓은 배우 맥어보이가 영국에서 연기하며 귀족 연기를 했을때 엄청나게 지탄을 받음 영국의 사회 계급은 대충 세가지로 나뉘는데  맥어보이는 영국에서 워킹 클래쓰, 즉 노동자 계층에 속함 따라서 말투나 사용하는 억양에서 위의 두 계급과 큰 격차가 있고 어렸을 때서부터 소위 말하는 연예인 교육을 받지 못했고 학력도 낮음 그래서 영국에서 연예계 진입은 극소수의 사례를 제외하고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할리우드로 건너간 케이스 (이 둘 말고도 더 있지만 성공한 사례가 많이 없음..) 잘 생각해보면 유명한 영국 배우 중에 왜 귀족, 엄청난 금수저 출신이 유독 많은건지 의심해 볼 수 있음 +제임스가 로미오 역할 맡았을 때 한 평론가의 평 "제임스 맥어보이의 로미오는 무식하다.  문제는 스코틀랜드 억양이다" 또한 신사의 대명사 콜린퍼스 또한 미들클래스(중산층)으로  킹스 스피치에서 조지6세 왕 역할을 했을때 엄청난 지탄을 받음 마찬가지로 국민아빠 리암니슨 또한 워킹클래스로 영국에서 교사와 복서 생활 및 연기활동을 하면서 빛을 못보다가 헐리우드 진출 후 쉰들러리스트로 이름을 알렸음  반대로 영국 출신 귀족연기자로는  베데딕트 컴버배치가 대표적이라고.. 어퍼클래스로 태생부터 귀족 집안 출신 영국의 명문학교 해로우 스쿨 출신으로 영국의 대표 고급 자동차 브랜드 재규어의 모델도 함 2015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훈장 3등급에 해당하는 CBE 작위를 받기도 함 연기도 혈통이 있어야 인정받을 수 있는 나라 ㄷㄷㄷ 이종격투기카페 펌
오징어게임 '영희'의 원래 이름은 '영이'다!
우리는 오징어게임에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 등장한 거대한 인형 캐릭터의 이름을 영희라고 알고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하던 같은 이름의 놀이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당시 교과서의 영희 일러스트를 참고하여 인형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원래 이 캐릭터의 이름은 영희가 아니다.  모두들 ‘철수와 영희’의 영희라고 알고 있는데 실제 그 여학생 캐릭터 이름은 ‘영이’ 다. ‘철수와 영이’라는 캐릭터는 일제 강점기 시절이 끝나고 대한민국이 탄생하자 마자 ‘한글학회’ 선생님들이 고심 끝에 만들어낸 우리 나라 남녀 어린이 대표 이름인데, 무심한 후손들이 이걸 어느 순간 스리슬쩍 일본식 명칭인 영희로 잘못 부르고 있는 것이다. 1945년 해방 당시 수년간 일본어만 사용하게 했던 터라 한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성인이나 학생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해방된 새 나라에서 자라날 어린이들에게 우리의 민족 혼을 심어주려던 한글학회 분들은, 우리말 사전 발간과 동시에 한글 교과서 발간 작업에도 박차를 가하게 된다. 당시 최현배 선생이 주도한 교과서 편찬위원회는 기본 방향으로 ‘모든 교과서는 한글로 하며, 한자는 필요한 경우에만 괄호 속에 넣으며 가로쓰기를 원칙으로 한다’ 고 정한다. 이에 1948년 《한글 첫 걸음》 등, 초·중등 교과서 50여 종을 집필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나라 대표 어린이 이름을 고심한 끝에 남자 아이는 ‘철수’, 여자 아이는 ‘영이’, 강아지는 ‘바둑이’를 선택하니, 첫 국민학교 1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 이름을 《바둑이와 철수 [국어 1-1]》로 정하여 반려 동물을 사랑하는 어린이들로 꾸민 것이다.  이후 1970년대까지 대한민국 대표 학생 캐릭터로 국어 교과서에 계속 등장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철수와 영희’로 잘못 알려지고 있으니 잊힌 여학생 ‘영이’가 실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원래 우리 조상님들은 여성 이름 끝자로 순이, 영이, 분이, 동이, 향이, 덕이 등‘이(伊)’를 많이 썼다. 요즘은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집안 족보에 딸 이름 대신 사위의 이름을 기재했고, 역사서에도 본명 대신 아무개의 부인이라거나 어머니로만 기록 되었기에 여성 이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여러 기록에 남은 여성 이름 끝자에 ‘희(姬)’를 넣은 경우는 드물었다. 실제로 현재 우리나라 여성 이름 끝자로 여전히 쓰이는 계집 희(姬)와 아들 자(子)는 일제강점기 때의 산물이다. 제국주의가 막바지로 치달아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둔 일본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강제로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게 하는 창씨개명과 더불어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말, 우리글의 사용까지 금지하는 등,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들었다. 이는 전쟁에 동원할 일본의 청년들이 부족하다 보니 식민지 조선인들까지 전쟁으로 내몰기 위한 사전 준 비 작업이었다.이 당시 조선인들은 딸의 이름을 등록하면서 과거 조상님들이 쓰시던 ‘이(伊)’가 그저 춘향이, 향단이 등 이름 뒤에 붙이던 호칭형 조사라고 착각해서 비슷한 발음을 가진 ‘계집 희(姬)’ 자를 많이 썼다. 원래 희(姬)라는 글자를 그저 ‘계집’이라고 훈독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희(姬)는 중국 주(周)나라 황제 가문의 성씨였고, 그후 ‘지체 높은 아가씨’라는 의미로 황제의 딸을 제희(帝姬), 왕의 딸을 왕희(王姬)라고 쓰다가 한(漢)나라 시절부터 공주(公主)가 ‘황제의 딸’을 의미하는 존칭으로 자리잡게 된다. 한나라로부터 한자를 전래받은 일본은 자기네 토착 존칭어인 ‘히메(ひめ)’에 원래 공주에 대한 존칭어인 ‘희(姬)’를 대응하여 쇼군이나 귀족 딸에게 쓰는 존칭어로 사용하게 된다. 다만 일왕의 딸은 히메라고 하지 않고 ‘내친왕(內親王)’ 또는 ‘여왕(女王)’이라고 불렀다. 그후 19세기 메이지유신 이후 전 일본인들의 호적을 정리하면서 평민들도 당당히 딸 이름에 이 글자를 넣었던 것이고, 서양 동화 ‘Snow White’를 ‘백설희(白雪姬)’로 번역하는 등, 공주(princess)라는 의미로도 확장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방 이후 ‘백설희’를 ‘백설공주’로 다시 바꿨는 데, 당시에는 한자어가 많이 쓰이던 때라 ‘백설(白雪)’이 ‘흰눈’이라는 것을 알았겠지만, 요즘 감각으로는 ‘흰눈 공주’로 번역했어야 하지 않나 싶다. 또한 ‘아들 자(子)’를 넣은 순자, 영자 등이 한동안 유행했는데, 다음번에는 아들을 낳자는 의미로 아들 자(子)를 썼다는 속설이 있지만 실은 딸을 지극히 사랑해서 넣은 것이다. 이 역시 일제강점기 때 시작되었다. 원래 자(子)는 중국에서 위인들에게 붙이던 존칭이었다. 그래서 공구(孔丘)가 본명이지만 공자(孔子)라 존칭으로 부르고, 맹자(孟子), 노자(老子), 장자(莊子) 등 여러 제자백가(諸子百家)사상가들을 우러러 모셨다. 그러던 중 춘추전국시대 송나라 무공(武公)이 딸에게 중자(仲子)라고 이름 지으며 금기를 깨자 중국에서 딸 이름으로 유행했다. 이 풍속이 일본 헤이안시대에 전래되는데, 왕족이거나 유력 귀족 가문이 아닌 다음에야 감히 ‘희(姬)’ 자를 쓰기는 어려웠기에 중견 귀족들이 딸 이름에 ‘자(子)’를 넣은 것이 천년 넘게 이어져왔다. 이 역시 1890년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호적을 정리하면서 평민들도 딸에게 자(子)를 넣기 시작했고, 1930년대에는 무려 여성 이름의 85%가 자(子) 자 돌림이었을 정도로 유행했고 이것이 우리나라에도 전파된 것이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잘못된 명칭 ‘영희’가 널리 알려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제의 탄압을 극복하고 우리나라 대표 어린이 이름을 ‘영이’로 지으셨던 한글학회 분들의 노고를 생각 한다면, 늦었지만 이제라도 국가 차원에서 마땅히 본래 이름을 되찾아주었으면 한다. 출처. <알아두면 쓸데 있는 유쾌한 상식사전> -우리말 우리글 편-
BBC 선정 꼭 봐야할 2000년대 영화 101선
우리나라 영화는 '올드보이(박찬욱, 2003)'와 '봄 여름 가을 겨을 그리고 봄(김기덕, 2003)'이 있네요 - 1. 멀홀랜드 드라이브 (데이빗 린치, 2001) 2. 화양연화 (왕가위, 2000) 3. 데어 윌 비 블러드 (폴 토머스 앤더슨, 2007) 4.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하야오, 2001) 5. 보이후드 (리처드 링클레이터, 2014) 6. 이터널 선샤인 (미셸 공드리, 2004) 7. 트리 오브 라이프 (테런스 맬릭, 2011) 8. 하나 그리고 둘 (에드워드 양, 2000) 9.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아쉬가르 파라디 , 2011) 10.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에단 코엔, 조엘 코엔, 2007) 11. 인사이드 르윈 (에단 코엔, 조엘 코엔, 2013) 12. 조디악 (데이빗 핀처, 2007) 13. 칠드런 오브 맨 (알폰소 쿠아론, 2006) 14. 액트 오브 킬링 (조슈아 오펜하이머, 2012) 15. 4개월, 3주 그리고 2일 (크리스티안 문쥬, 2007) 16. 홀리 모터스 (레오 까락스, 2012) 17. 판의 미로 (길레르모 델 토로, 2006) 18. 하얀 리본 (마이클 하네케, 2009) 19.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조지 밀러, 2015) 20. 시네도키 뉴욕 (찰리 코프먼, 2008) 21.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웨스 앤더슨, 2014) 22.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소피아 코폴라, 2003) 23. 캐시 (마하엘 하네케, 2005) 24. 마스터 (폴 토마스 앤더슨, 2012) 25. 메멘토 (크리스토퍼 놀란, 2000) 26. 25시 (스파이크 리, 2002) 27. 소셜네트워크 (데이빗 핀처, 2010) 28. 그녀에게 (페드로 알모도바르, 2002) 29. 월-E (앤드류 스탠튼, 2008) 30. 올드보이 (박찬욱, 2003) 31. 마가렛 (케네스 로너건, 2011) 32. 타인의 삶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2006) 33. 다크나이트 (크리스토퍼 놀란, 2008) 34. 사울의 아들 (라즐로 네메스, 2015) 35. 와호장룡 (이안, 2000) 36. 팀북투 (압델라만 시사코, 2014) 37. 엉클 분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2010) 38. 시티 오브 갓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카티아 룬드, 2002) 39. 뉴 월드 (테런스 맬릭 , 2005) 40. 브로크백 마운틴 (이안, 2005) 41. 인사이드 아웃 (피트 닥터, 2015) 42. 아무르(마하엘 하네케, 2012) 43. 멜랑콜리아 (라스 폰 트리에, 2011) 44. 노예 12년 (스티브 맥퀸, 2013) 45.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압둘라티프 케시시, 2013) 46. 사랑을 카피하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2010) 47. 리바이어던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2014) 48. 브루클린 (존 크로울리, 2015) 49. 언어와의 작별 (장 뤼크 고다르, 2014) 50. 섭은낭 (허우샤오셴, 2015) 51. 인셉션 (크리스토퍼 놀란, 2010) 52. 열대병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2004) 53. 물랑루즈 (배즈 루어먼, 2001) 54.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나톨리아 (누리 빌게 제일란, 2011) 55. 이다 (파벨 파블리코프스키, 2013) 56.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 (벨라 타르, 2000) 57. 제로 다크 서티 (캐스린 비글로, 2012) 58. 물라데 (우스만 셈벤, 2004) 59. 폭력의 역사 (데이비드 크로넌버그, 2005) 60. 징후와 세기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 2006) 61. 언더 더 스킨 (조너선 글레이저, 2013) 62.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쿠엔틴 타란티노, 2009) 63. 토리노의 말 (벨라 타르 , 2011) 64. 더 그레이트 뷰티 (파올로 소렌티노, 2013) 65. 피쉬 탱크 (안드리아 아놀드, 2009) 66. 봄 여름 가을 겨을 그리고 봄 (김기덕, 2003) 67. 허트 로커 (캐스린 비글로, 2008) 68. 로얄 테넌바움 (웨스 앤더슨, 2001) 69. 캐롤 (토드 헤인스, 2015) 70.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 (세라 폴리, 2012) 71. 타부 (미겔 고메스, 2012) 72.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짐 자머시, 2013) 73. 비포 선셋 (리처드 링클레이터, 2004) 74. 스프링 브레이커스 (하모니 코린, 2012) 75. 인히어런트 바이스 (폴 토머스 앤더슨, 2014) 76. 도그빌 (라스 폰 트리에, 2003) 77. 잠수종과 나비 (줄리언 슈나벨, 2007) 78.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마틴 스콜세지, 2013) 79. 올모스트 페이머스 (캐머런 크로, 2000) 80. 리턴 (안드레이즈 즈비아긴체프, 2003) 81. 셰임 (스티브 매퀸, 2011) 82. 시리어스 맨 (에단 코엔, 조엘 코엔, 2009) 83. A.I. (스티븐 스필버그, 2001) 84. 그녀 (스파이크 존즈, 2013) 85. 예언자 (자크 오디아르, 2009) 86. 파 프롬 헤븐 (토드 헤인스, 2002) 87. 아멜리에 (장피에르 죄네, 2001) 88. 스포트라이트 (톰 매카시, 2015) 89. 머리 없는 여인 (루크레시아 마르텔, 2008) 90. 피아니스트 (로만 폴란스키, 2002) 91. 엘 시크레토 비밀의 눈동자 (후안 J 캄파넬라, 2009) 92.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 (앤드류 도미니크, 2007) 93. 라따뚜이 (브래드 버드, 2007) 94. 렛 미 인 (토마스 알프레드슨, 2008) 95. 문라이즈 킹덤 (웨스 앤더슨, 2012) 96. 니모를 찾아서 (앤드류 스탠튼, 2003) 97. 백인의 것 (클레어 드니, 2009) 98. 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2002) 99.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아그네스 바르다, 2000) 100. 레퀴엠 (대런 아로노프스키, 2000) 101. 카를로스 (올리비에 아사야스, 2010) 출처 클립해두고 꺼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