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sbsb
5,000+ Views

애니속 교실풍경

이상의 교실풍경들...
그러고보니 암살교실 최신화보니까 학생들 엄청성장했더라고요 용병들을 휩쓸어버리던데...
3 Comments
Suggested
Recent
역시 암살교실이 짱이야
2번 여기 식사 언제 나와요?
암살이랑 원피스 빼고 모르겠ㄷ......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진수 승조 (陳壽 承祚) A.D.233 ~ 297
어찌보면... 이 칼럼을 시작하며 가장 먼저 다뤘어야 할 사실상 삼국지의 가장 중요인물을 이제서야 다루게 되니,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삼국지정사(三國志正史)의 저자 "진수"다. 사실, 수천 여 년 이상을 자랑하는 유구한 중국문명.. 심지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와 함께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인 중국의 역사는 여간 장대한게 아니며 그 중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후한 말 ~ 삼국시대는 고작 한 세기 밖에 안되는.. 이리 말하면 좀 뭐하지만, 말 그대로 "찰나" 에 불과하다. 그런 찰나의 순간(...)을 중국 본토는 물론 타이완과 동남아시아 및 중화권을 넘어 여기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길고 긴 중국역사 중 가장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는 시기이자 큰 인기와 관심을 얻게 된 시대로 만들어 낸 것의 시작은 바로 진수의 공적인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토 다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 뭔 개소리여, 삼국지는 나관중이지! ' ' 난 이문열꺼만 봤구만 뭔 소리? ' ' 오레노산코쿠지와요코야마미쓰테루상노산코쿠지데스 ' 다 맞다. 모두 옳다. 무엇보다 오늘날 대인기의 삼국지가 있게 된 가장 큰 공은 누가 뭐래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저자인 "나관중(羅貫中)" 및 나관중 이전에 삼국지정사의 부족하거나 아쉬운 부분들을 연구하여 주석을 달았던 "배송지(裴松之)", 그 밖에도 현대에 와서 이를 바탕으로 한중일 삼국에서 평역본과 흥미로운 미디어믹스들을 양산해낸 많은 이들이 오늘의 삼국지가 누리는 인기와 명성을 있게 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연계물들 역시 애초에 진수가 삼국지를 집필하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였다. 참고로 삼국지정사는 나관중의 연의가 창작되고 이게 또 인기대폭발하며 아주아주 근래에 그리 일컫는거지, 지금도 중국에 가서 '삼국지'라 하면 그냥 정사를 말하며 삼국지연의만 따로 연의라고 한다. 이는 마치 짜장면과 짜파게티를 구분할 때 짜장면을 가리켜 굳이 '정통짜장면'이라 안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정사는 말 그대로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엮은 거라 제법 많은 편수로 이루어져 있고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에 각 서들은 여러 인물들 위주의 열전들로 구성되어 있다. 연의만 줄기차게 읽다 환상을 품고 접하면 그야말로 모든 불면증을 치료할만큼 노잼.. 아니, 핵노잼이다. (일단 구해보기조차 버겁다..,) 다시 진수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그는 당시로는 파서군(巴西郡) 안한면(安漢縣) 출신이며 오늘날 중국 쓰촨성의 난충 시에서 북쪽으로 50~60km가량 더 가면 그쯤이 대략 진수의 고향 위치다. 참고로 이 동네는 중국내에서 일조량이 매우 적은 곳 중 하나인데, 여름 기준으로 오전 8시쯤 일출, 오후 5시쯤이면 일몰로 어둑어둑하다고 한다. 구글링 해보니 이 동네 5성급 호텔 일반객실의 평균가가 우리돈 ₩ 50,000. 쯤이라는데 매우 싸다! 내가 예전 여친과 자주 가던 캘리포니아모텔의 1박이 ₩ 40,000. 주말 피크타임에 가서 일반실 없다고하면 어쩔 수 없이 가는 디럭스룸이 ₩ 50,000.이였는데... 대신 디럭스룸은 일회용품을 그냥 줘서 실제로는 ₩ 9,000. 더 비싼 셈이다. 여튼 진수의 고향을 보면 알겠지만 촉한(蜀漢)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제법 학문에 밝았다고 하며 그 덕에 초주의 휘하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렇다고 초주가 1:1 과외를 해준 건 아닐거고 당시 트렌드상, 아마 초주가 가르치는 여러 문하생들 중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지연의나 코에이의 게임에서 잉여노쓸모로 나와 그렇지, 초주는 촉한의 당대최고의 학자들 중 한 명이였고 명성이 대단했기에 그런 초주의 문하생은 아무나 될 수 없었다. 참고로 초주는 "도참설(圖讖說)" 이라는 일종의 예언과 관련된 이론의 신봉자인 촉한판 노스트라다무스였다..;;; 본인도 똘망진데다 스승인 초주빨이 겹쳐 꽤 일찍 벼슬에 나섰지만 원래 책만 후비는 애들이 대개 그렇듯, 사회생활은 잘 못 했는지... 당시 실세였던 환관 황호를 비방하는 상소를 올리다 좌천 세 번에 파면 한 번을 먹었다. 보드게임 하다 주사위 잘못 던지면 "처음으로 돌아가시오" 이런거 여러 번 걸리는거랑 비슷한 사회생활을 했다..... 내내 이렇듯 정권실세에게 개김질 하다 파면크리 먹고 백수생활 하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한량처럼 살 때 촉한은 위나라가 낳은 클리프행어 등애의 손에 멸국을 맞고 검각에서 버티던 강유마저 종회에게 항복하며 진수는 집에서 노는 사이, 국적이 촉한에서 위로 바뀐다. 그리고 여전히 노는 동안 사마염이 위를 멸망시키고 진을 건국하며 백수진수의 국적은 위에서 진으로 또 한 번 바뀐다. 이런 복잡한 귀화사를 가진 진수는 진사람이 되서야 장화라는 한 문관이 한 때 꽤 날렸던 그의 학문을 아까워해 천거해주며 다시 벼슬아치로 재취업에 성공한다. 솔직히... 인성 자체는 그닥이였던 듯 싶다. 촉한시절 임관동기였던 자와 술자리 계산문제로 다툰 후 원수지간 되었는데 진수가 재임관 후 마침 그 자도 다른 이의 천거로 다시 벼슬에 나오려는걸 진수가 혼신의 뒤끝으로 막았고... 당시 촉한출신 벼슬아치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들 모두 진수와 사이가 다들 별로였다. 꼭 그렇다고 어디 나와 있는건 아니지만.. 아마도 진수는 저런 직장내 왕따도 당하고, 별 다른 공적이 없으니 인사고과가 별로라 승진도 잘 안되어 그랬는지... 그 후부터 촉한의 이런저런 자료와 기록들을 모으고 엮어서 역사서 저술이라는 히키코모리나 해낼 법한 일을 해내고 이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오늘날... 여러분과 내가 좋아하는 삼국지가 된다! T-T 진수가 만약 직장동료들과 막 사이 원만하고 일도 열라 잘 해서 제갈량처럼 온갖 거 다 떠맡고 그랬으면 그렇게 한가롭게 자료 모아서 역사서 만들 생각도 안했을거고 여유도 없었을거다. 물론 진수 본인의 삶이야 한결 업그레이드 되었겠지만 그야 내알바 아니고, 따당하는 일못인 덕에 우리가 오늘도 삼국지를 볼 수 있는 것. 물론, 내가 반 년이나 쉬다 이제 와서 다시 이 칼럼을 연재하는 이유가 결코 직장내 왕따 및 인사고과 하위자여서가 아님을 명시한다. 이렇듯, 인성이 별로인 진수의 삼국지는 그야말로 대박을 친다. 한창 위와 촉의 기록을 모으던 터에 마지막으로 발악하던 오나라까지 망하며, 거기서 유입된 오출신 학자들과 공동으로 오의 역사기록들까지 합쳐 엮으며 삼국지는 완전체가 되었고 보통 당시에는 인정 못 받는 경우가 많음에도 진수의 삼국지는 이미 당대에도 여러 학자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본인도 내 길은 이거다 싶었는지 더욱 삼국지 편찬에 집중... 심지어 본인을 재임관 하도록 추천해준 장화가 다시 더 높은 직위에 천거하자 장화의 반대파에서 태클이 들어왔는데, 진수는 그걸 핑계 삼아 승진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실 무렵 반대파의 집요한 태클에 또 다시 파면 당하여 백수가 되고 만다. 허나 그간 정력을 다해 삼국지를 짓고 또 어머니도 여의고 게다가 정치적인 태클도 워낙 심히 받다 기어이 파면까지 되며 그가 받은 스트레스도 적잖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결국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안되어 본인도 병을 얻고 사망하고 만다..... 그가 죽자, 그가 지은 삼국지를 읽었던 학자와 고위관리들은 그와 그 책을 잊지 못하여 당시 천자에게 상서를 올려 진수가 지은 삼국지가 겁나 명작이니 그냥 저렇게 없어지는건 아니될 말이라며 애원했고 이에 천자도 사람들을 진수의 집으로 보내 이들로 하여금 인간복사기가 되라는 어명을 내려 이렇게 수작업으로 베껴진 삼국지는 세상의 빛을 본다. 위에서 말했듯 그 분량이 대단하지만.... 근 100년의 역사를 엮은 것치고는 간소한 부분도 많았다. 그런 아쉬움에 훗날 송나라의 3대 황제인 유의륭이 부족한 부분을 좀 더 기록과 자료 및 민담 등을 걸러 주석을 달게 하였으니 이 때 주석을 달았던 것이 배송지다. 일부 떠도는 소문에... 제갈량에게 처형 당한 촉한의 장수인 진식이 진수의 부친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픽션! 그냥 픽션도 아니고 개픽션!! 저 진수가 지은 삼국지정사에 의하면 진식은 3차 북벌 당시 참전했다는 기록 이후로는 등장이 없다. 그리고 연의에서 진식이 처형되는 4차 북벌 자체가 나관중이 지어낸 뻥인데다, 그 연의가 맞다셈쳐도 연의 속 진식의 사망시점이 230년이니... 233년생인 진수가 3년 전 사망한 진식의 아들이 되는 방법은 현대에서나 가능한 냉동정자보관 기술만이 정답이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그 긴 시간 피나는 노력과 정성으로 온갖 자료들을 끌어모아 역사서를 저술하는데 자기 부친의 기록만 하필 부실한 것도 말이 안된다. 여튼 그가 촉한출신에 위를 거쳐 진의 신하가 된 관계로 당시부터도 명서라는 호평과는 별개로 기록의 공정성에 대한 논란 및 이에 대한 가십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역사서에 좋은 기록으로 넣어줄테니 뇌물을 요구했다던가 (그런데 이건 나였으면 진짜 이랬을 듯.ㅎㅎㅎ) 사마가문에 대한 비판이 유독 없다거나 등등... 특히 이 사마가문의 비판관련 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애초에 진수도 결국 사람인지라 현 정권의 시초 및 그 가문 사람을 객관성있게 표현할 깡은 없었다는 주장과 또 하나는 위에 진수 사망 후 인간복사기들이 가서 진수가 쓴 삼국지를 베끼는 과정에서 누락 시켰다는 주장이다. 뭐 그런데 이건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이니.. 혹여 독자분들 중 근시일내로 안타깝게 운명하시는 분이 저승가서 진수를 만나거든 물어본 후 내 꿈에 나타나서 알려 주시기로 하자. 여튼 당시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의 출신이나 정치성향에 따라 어땠는지는 모르나 현대에 와서는 그의 저술방향에 있어 두드러지는 편향성은 거의 없다고 평가 받고 있다. . . . 가장 마지막이 7월 2일에 올린 노숙편이니 그날부터 거의 만 반 년만에 올리네요...ㅎㅎ (하필 컴백편 주인공이 노잼 진수...;;;) 제가 4월에 이직을 했는데, 새 회사가 제가 지금껏 살며 다닌 그 어떤 회사들보다 일이 더 많고 어렵네요.. 맨날 일에 치이다 집 와서도 일하고 새벽 3~4시에 자고 제가 사이버대학에 등록해 공부 중인데 그것도 벅차고 가장 큰 이유는 빙글의 인터페이스가 제 입장에서는 좀 직관적이지 않고 불편하더라구요.,.. 사실 여러 번 썼다 말았다를 반복 했었어요. 그렇게 저도 삶에 치여 잊고 살았는데, 간간히 뜨는 알림에 들여다 보면 꽤 긴 시간 놓고 있음에도 저와 제 글을 잊지 않아 주시고 돌아오라는 기다린다는 댓글 남겨 주시는 분들의 댓글을 보며 완전 진짜 마음 울컥 했습니다....T-T 제 바쁜 삶이 달라지진 않다보니 꾸준한 연재는 약속 드릴 수 없지만(뭐 이건 전에도 그러긴 했죠ㅋ) 그래도 텀이 길지언정, 예전처럼 많은 분들이 봐주시지 않는다해도 연재는 계속 해나가겠습니다. 사실 이 6개월도 제가 글을 안쓰겠다 마음 먹은 건 아니였고 어쩌다 저쩌다보니 진짜 시간이 쏜살처럼 간거예요ㅋ 아무튼 이제 솔크도 지났고 곧 새해니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날 추우니 감기들 조심하세요! 그리고 본의 아니게 긴 휴재에 대해 사과 드리며 그럼에도 여태 기다려 주신, 그리고 다시 돌아와 읽어 주신 분들께 깊은 고마움을 표합니다. 제 글 때문에 빙글 안지운다는 분들과 돌아오라고 언제까지고 기다리겠다는 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어차피 노총각이라 주말에 시간이 남으니 최대한 빨리 연재 해보려 노력할께요!
장합 준애 (張郃 儁乂) A.D.?~231
누차 말했듯... 픽션(허구)이 가미된 "소설"인 삼국지연의는 여러 인물들을 영웅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반면 그네들의 영웅화 ~ 신격화를 위해 숱한 이들을 엿 먹이기도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오늘도 역사범죄자 나관중에 의해 너프 당한 또 한 명의 피해자, "장합"에 대해 다뤄 보기로..! 장합은 삼국지정사, 위의 역사록인 위지, 후한의 역사록인 후한서, 본인의 열전인 위서의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에도 생년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사망 당시의 연령을 알 수는 없지만 원소에게서 조조 휘하로 들어갈 당시 대략... 40대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저 '장악우장서전'은 조조가 자신이 공을 이루는데 그 기여가 으뜸이라며 추켜세운 다섯 장수인,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을 묶어 편찬된 열전이다. 저 다섯을 일컬어 당시에 "오자양장(五子良将)"이라 불렀고, 촉한의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과 살짝 비슷한 뉘앙스인데, 오호대장군이란 별칭은 그 때는 없었고 후대 사람들이 붙인데 비해 저 오자양장은 당시 사람들이 붙인 것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 오호대장군같은 저 시절의 '드림팀' 또는 '어벤져스' 느낌의 패키징은 위의 다섯 장수가 원조다. 고향은 당시로는 기주의 하간군 막현(오늘날 중국 허베이성 중남부 인근)이라는 그때 치고도 꽤나 궁한 시골 작은 마을 출신이였다. 참고로 진짜 중국이 겁나 드넓긴 드넓은게... 삼국지 게임 내의 맵에서 기주는 작은 주로 나오나, 조운의 고향인 기주 상산군과 장합의 고향인 기주 하간군의 거리는 무려 166km고, 이 거리는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거리보다 멀다..ㅎㄷㄷ 만화, 게임, 책, 기타 여러 미디어물들을 봐도 다른 네임드급 인물들과는 달리, 외형 이미지가 일관적이지 못한 편인데... 이는 사료 어디에도 장합의 외모 묘사가 일언반구도 없고 그를 그린 그림조차 몇 없는데다, 그것들 마저 묘사가 모두 중구난방이다보니 도무지 이미지 통일이 안된 것. 다만, 장합의 리즈시절이 펼쳐지는 것이 조조에게 투항 이후인데 그 당시의 추정 연령이 위의 언급처럼 40대로 보고, 조조세력 합류 후부터도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을 활약하다 전장에서 전사한만큼, 사실상 각종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젊은'느낌의 장수로 표현하는 것은 어색한 감이 없지 않다. 장합은 조조 휘하 장수들 중 가장 많은 전장에 참전했고, 위의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전공이 많은 장수였으며, 주/부장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여러 숱한 전투에서 닳고 닳은 백전노장이였다. 그러다보니 큰 전장의 주요한 임무는 물론, 작은 전장의 자잘한 임무까지 가림없이 두루 맡았고 야구로 치면 4~5선발과 롱릴리프, 경우에 따라 급하면 불펜으로까지 던지면서 하루 걸러 등판하며 혹사 당하는 노예투수 비슷한 포지션의 장수였다. 그 깐깐한 조조가, 또 당시 휘하에 숱한 명장, 용장, 맹장들이 수두룩 빽빽 채이고 밟히고 널렸던 위에서 저토록이나 빈번히 굴렸다는건 그만큼 능력 있기에 믿고 쓸만큼 훌륭한 장수였다는 증거다. 심지어 백발노인 되어 집에서 손주들 재롱이나 보고 탑골공원가서 장기두며 야쿠르트나 얻어 마실 나이에 전장에서 한창 싸우다 전사하니... 죽어 눈감는 그 순간까지 위의 군밀레에 갈려나간 군돌이였다. 삼국지연의나, 연의를 바탕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각종 미디어물들을 보면 장합은 그냥 본인의 무예와 전장에서 구르며 익힌 짬밥으로 밀어붙이는 단순한 장수로 그려지나... 위에서 언급하듯, 저렇게 숱한 전장을 누볐고 또 깐깐깐돌 조조에게 신임받으며 주장으로도 쓰인만큼 사실 전략적 대국안도 상당히 뛰어난 "지략을 갖춘" 장수였다. 본래 기주의 군소 군주인 한복 휘하에 있다가 한복이 패망하자 원소의 세력에 속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전장의 시국을 살핀 후 원소나 원소의 책사들에게 여러 전략들을 입안 했으나 거의 다 씹혔다.... 원소는 사람 자체가 선입견, 편견 이런 게 가득한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데다 또 고집은 있는 전형적 꼰대인 우리 회사 김대현 이사님같은 스타일이라 그저 야전에서 뒹구는 장수인 장합의 계책을 귀 담아 들어주질 않았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 정상에 올라 야호를 외치는 전형적 예였던 당시 원소의 책사들 역시, 지들끼리도 서로 내가 옳네, 내가 맞네 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장합까지 거기 껴서 자기 의견을 제출하니 고스란히 즈려밟아 무시했다. 이렇듯, 자기 아이디어와 의견이 매번 밟히던 끝에, 원소 VS 조조의 관도대전에서도 자기가 낸 계책이 원소의 책사 중 한 명인 곽도에게 씹혔고... 그 전투에서 결국 패하며 장합이 옳았음이 드러나자 곽도가 원소에게 장합을 모함하였으며, 이에 겁 먹은 장합은 결국 원소군 내에서 베프면서 역시 원소의 아쉬운 대우에 불만가득하던 '고람'과 함께 원소군의 망루에 불을 지르고 투항한다. 역사기록에는 이 "방화 후 이적"이 관도대전에서 원소의 패배 전인지, 후인지가 안나와 있으나 어쨌건 장합과 고람이 불 싸지른 망루는 당시로는 적군의 동태를 살피는 '레이더'역할을 하는 중요한 군사시설이였기에 이를 없앤 것 자체는 어쨌건 원소군에게 치명적이긴 했다. 삼국 정립 이후에는 주로 대촉전선에 투입되었고 이유는 조조가 양쯔강을 끼고 있던데다 북진의사가 거의 없는 손권에 비해, 명목상 "한실부흥" 내세워 줄기차게 자신들에 덤벼 오는 유비세력을 훨씬 더 위협적으로 여겼기 때문. 그때 손권과 대립하는 동부전선은 장료와 악진으로 묶어 두고 가용 가능한 네임드 장수들은 대부분 대촉전선에 투입되던 시기였다. 장합은 유비도, 유비 사후의 제갈량도 상당히 껄끄러워 하던 장수였다. 대촉전선의 총사령관 역할을 하던 하후연과 조홍보다 장합의 위치는 아래였으나 이는 위에서의 커리어, 또 하후, 조 두 장수는 조조와의 친인척 관계인지라 그럴 뿐... 장수로서의 자질은 저 둘을 뛰어넘던 장합이였으며 그래서인지 조홍과 하후연은 장합을 꽤나 견제했다. 아무리 자신들의 커리어가 앞서고 조조와 혈족이긴 하다지만 철저히 능력 위주로 사람을 쓰던 조조는 언제던 장합이 더 유능하다 드러나면 속절없이 자기들보다 장합이 더 상전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이를 막아낸 위방어군의 총사령관은 연의와 달리 사마의가 아닌 장합이였고, 4차 북벌 때, 목문도에서 유인책 쓰며 거짓 후퇴하는 촉군을 사마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뒤쫓자며 바득바득 우기고 쫓아가다 기어이 전사하는 연의와 역시 또 달리... 당시 제갈량의 흉계가 의심된다며 추격을 만류하던건 오히려 장합이요, 이에 대해 군령까지 내세워 제갈량을 추격할 것을 밀어붙여 장합을 사지로 내몬게 사마의였다. 이에 대해서도 또 제기되는 설이.... 당시 장합과 사마의는 위의 대촉전선에서 은연중에 경쟁관계였었다. 쟁쟁한 커리어의 백전노장 장합, 그리고 위 군부 신진세력의 주축이던 사마의는 서로 견제하던 관계였으며 당시 직급상 사마의가 높았지만 그렇다해도 사마의에게 장합은 결코 직위로 쉽게 누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였고.... 그런 장합을 이이제이 방식으로 간접 제거 하고자 제갈량의 계책을 눈치채고도 등 떠밀었다는 설이다. 연의에서의 묘사처럼 빗발치는 화살에 벌집이 되어 바로 죽기보다 화살을 여기저기 맞고 후퇴하던 중 과다출혈에 의한 쇼크사였다. 기록에는 허벅지에 맞은 화살로 인한 과다출혈이 결정적 사인이라 나와 있다. 참고로 허벅지는 대동맥을 비롯 여러 혈관 뭉치들이 지나는 곳이라 흉기에 잘못 찔리면 지혈도 힘들만큼 과다출혈이 발생하여, 옛날 야쿠자나 조폭들도 서로 칼부림 당시 오히려 방어하기 좋아 찌르기 여의치 않은 복부나 흉부보다 허벅지를 많이 노렸다고 한다. 동물을 좋아했는지, 직접 먹이를 주며 키우던 개가 있었다는 설이 있고 자신이 타던 말이 힘들까봐 행군하는 경우에는 중간중간 말에서 내려 걷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사료기록은 아니다.) 원소 휘하에서는 고람과만 거의 이야기를 나눴으나 조조에게 투항 후 각기 다른 부대에 배치되며 연이 끊어진 듯... 여러 장수들과 열전이 묶음으로 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신상과 일상에 대한 기록이 그닥 없다. 쉽게 말해 위의 장수로서의 공적인 기록은 좀 있지만 인간 장합으로서의 사적인 기록이 많지 않다.. 장합이 커리어나 능력에 비해 그닥 인기 많은 인물은 아니다보니 왠지 이번편은 반응이 별로일거 같은 좀 불길한 예감이... T-T 그래도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 드린다는 ;;;
공손찬 백규 (公孫瓚 伯圭) A.D.? ~ 199
삼국지를 워낙에 좋아해서 여기다 시간 들여가며 이런 글까지 쓸 정도다보니 나름 삼국지에 대해 좀 아는 편이라 할 수 있는 내가 여러 자료들을 지금까지 보고 듣고 하다보면 그 인물에 대한 호감도를 떠나 참 안타까운 이들이 많다. '이 사람은 왜 이럴 수 밖에 없었을까' '왜 이 인물은 이런 선택을 해야만 한걸까' '그는 결국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건가' 그 중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오늘 다룰 인물 "공손찬"이다. 아마 게임이건 만화건 애니매이션이건 책이건... 소설인 연의를 읽었건, 정사를 읽었건.. 공손찬을 좋아하거나 궁금해 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특히 삼국지연의를 읽은 분들은 더더욱 공손찬을 좋아하거나 궁금해하지 않는데, 일단 연의에서의 그는 워낙 초반부에 등장하고 별 다른 임팩트도 없는, 드래곤볼을 예로 들자면 손오공이 어린 시절에 등장해서 잠깐 오공을 애먹이지만 얼마 못 가서 즈려밟히는 '타오파이파이' 정도의 취급... (혹시 누군지 모르면 포털사이트 검색 Go) 그나마 코에이의 삼국지시리즈를 즐기는 분들이 보다 고난도의 천하통일에 도전할 때나 선택할 인물. 하지만 역사 속에서의 그는 결코 그런 대접을 받을 엑스트라급은 아니였음을 오늘 글을 통해 밝혀 보겠다. 삼국지연의에서도 나오듯 실제로도 당대의 이름 높던 학자인 '노식'의 문하에서 유비와 함께 공부한 동문이고 그 때의 인연으로 유비가 공손찬이 막장테크 타기 전까지 공손찬의 객장으로 있기도 했다. 이쪽도 생전의 라이벌이던 원소처럼 적자가 아니지만 얼자였던 원소보다는 사알짝 나은 '서자'였는데 뭐 우리가 보기에는 도찐개찐... 어쨌건 집안도 원소의 원가에는 댈 바 아니긴 해도 나름 괜찮은 집안의 은수저출신. 공손찬의 집안은 대대로 유주일대의 태수를 지내던 가문이였는데, 원소네가 일전 원소칼럼에서 소개했듯 중앙정부 고위관직자 집안이라면 공손가문은 군수집안쯤? 이걸 보고 혹자는 'ㅋㅋㅋ군수 나부랭ㅋㅋ' 할 수도 있지만 이건 여러분들이 군수를 몰라 하는 소리다. 군수는 3급 공무원이며 군으로 치면 준장(★)에 준하는 정말 높은 자리다. 아무튼 저런 집안 출신이지만 서자인 관계로 지분을 이어받지 못한 Mr.공손은 첫 사회생활을 유주의 말단관리로 시작하는데, 이 때 맡은 업무는 각종 공문서를 필사, 즉 베껴 쓰는 일이였다. 당시는 복사기도 없고 이메일, 팩스 뭐 그런거 다 없으니 공무에 있어 이리저리 나가고 들어오는 문서들을 누군가 직접 보고 필사를 했는데, 그 일을 했다. 인간복사기로서 공손찬은 꽤 유능하여 문서들을 취합 후 요점을 추려 알아보기 쉽게 잘 정리하여, 그가 정리한 문서는 누가 봐도 업무현안이 눈에 잘 들어왔는데, 게다가 공손찬은 말도 조리있게 잘 했고 인물도 좋은데다 "목소리도 좋았다"고 한다. 이런 점들이 소문나며 어느 태수가 그를 점 찍어 사위삼고, 그 후 그를 노식에게 유학시키는 등 이때부터 공손찬의 포텐이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헌데 어느 날 저 공손찬의 장인되는 태수가 비리죄목으로 파직당해 유배를 가게 되었다. 저 당시가 워낙 나라꼴 개판이라 털어 먼지 안나는 태수가 몇이나 있겠냐만... 저 때는 매관매직도 흔했는데 이를테면 A : 저 이거 받으시고 저 벼슬 좀 ㅎㅎ 고위관리 : 오~ 1억전?!! 뭐 하고 싶은데? A : 영릉태수요! >_< 고위관리 : 콜! 조또마떼! (영릉태수 공석 시 발탁, 헌데 기존 태수 재직인 경우...) 고위관리 : 영릉태수 이놈개새끼, 2억전 세금 바쳐. 영릉태수 : 아.... (2억전 입금 시 유임 및 A에게는 다른 자리 물색! 미입금시....) 영릉태수 : 제가 2억전이 어디 있어요... 고위관리 : 넌 디졌어 (뭐가 되건 털어 난 먼지로 파직 또는 처벌, 그 자리에 A) 저런 경우가 적잖았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당시 이런저런 지방의 한 자리를 했던 이들은 위로 올려 보낼 세금(명목의 뇌물)을 채우고자, 또 저런 썩은 정부 휘하에서 일하다보니 본인도 썩어 대체로 백성들을 심하게 수탈하는 일이 다반사. 아무튼, 공손찬의 장인인 태수 '유기'(유표아들 아님)가 당시 일남으로 유배를 가게 되자, 본인 또한 자기를 알아보고 키워준 은혜를 갚고자 유배가는 장인을 따라가기로 하고 살아 돌아오진 못할거란 생각에 본인의 "셀프 장례식"을 올리고 유배길을 따라나서는데... 위의 저 유배지 일남, 바로 지금의 베트남이다... 지금 아무 세계지도나 펴고 당시의 유주라 불리던 중국의 베이징 동북부 아무곳이나 찍고 거기서 베트남까지의 거리를 찍어보면 ㅎㄷㄷ... 심지어 그 당시의 베트남은 '오지 Of The 오지'였으며 사실상의 사형선고였던 유배령이였거늘, 공손찬은 은혜와 의리로 그곳을 죽는 각오로 따랐던 것. 다행히 유배 가는 도중 뭔 일인지 또 사면이 되는 덕에 공손찬은 고향에 돌아왔지만, 사면되지 못했다면 대단한 의리남아인 공손찬을 삼국지 게임에서 선택 못할 뻔.-_-;; 고향으로 돌아와 그전의 평판 덕에 다시 벼슬길에 오른 공손찬은 그때부터 포텐이 만개하며 당시 유주 인근의 소수민족들 중 가장 세력 크던 "오환족"의 학살자로 이름 얻기 시작하는데...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오환족들의 분노와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그 과정이 실로 잔인했는데, 공손찬은 단순히 '접경지역의 이민족을 축출한다' 이상의.. 몹시 뒤틀린 인종관을 갖고 오환족은 모조리 박멸하여 그 씨를 말려야 한다는 한족중심의 인종차별론자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오환족의 투항은 결코 용납되지 않았으며, 애어른이나 남녀노소없이 오환은 물론, 그 2세나 3세의 혼혈에게조차 가차 없었고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반 후한 백성들의 원성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오환 및 그 일대 소수민족에 대한 홀로코스트는 중화사상에서 비롯된 한족 우월주의가 당연시되던 여타 한족의 입장에서조차 이해를 얻기 힘들만큼 극심했다. 강족들을 토벌하기도 했으나, 그들과 결탁하기도 했던 동탁, 마등, 한수, 마초 등등이나 흑산적 및 오환족들과는 밀당을 통해 견제와 화친을 번갈던 원소나 조조, 무릉만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했던 훗날의 유비 등 아무리 소수민족을 오랑캐 취급하며 천대했던 당시라도 무조건 다 싸잡아 죽인다기보다는 필요시에는 협력대상으로 봤던 경우도 많았거늘... 공손찬은 이들에 대해 철저한 배척 및 멸종을 도모했고 당연히 오환들도 공손찬에 대한 항복 역시 항전의 끝과 다름없는 죽음뿐이란 것을 알고는 최소한 싸우다 죽자는 결론을 택하며 후한 백성들 역시 오환족들의 침략 또는 병사로 차출되는 등의 피해가 나날이 늘어갔다. 심지어 공손찬은 소수민족들과의 전투에서는 앞장서서 무쌍난무를 찍었고 결국 그의 군사적 재능과 이 오환족 제노사이드가 결합하여 후한의 동북부지역은 어쨌건 가장 소수민족의 평탄화가 잘 된 지역이 된다... 종종 연의 내에 등장하던 공손찬의 "백마장사"라는 닉네임과 그에 따른 업적이 이 소수민족 학살로 얻어진 것이다. 결국 어찌보면 단순히 치안을 위해서가 아닌 본인의 가치관에 따른 삐뚤어진 행태의 결과. 이러던 어느 날, 유주자사(쉽게 말해 우리의 도지사 개념)로 한실종친이자 인망 높고 덕이 있기로 소문난 "유우"가 부임해오며 공손찬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지는데... 유우는 군사일변도의 공손찬 플랜에 대해 상당한 회의감을 표출하며 막대한 군비지출을 최소화하고 그 여유분 + 중앙 재정지원을 그간 숱한 전투에 황폐화된 농지개간 및 유랑민들의 정착지원 등의 복지와 지하자원 개발로 인한 산업다각화 및 재정확대, 오환과의 화친 및 교류와 교역의 증대를 통한 경제구조 변혁 등 다분야에 걸쳐 진짜 유주를 위한 각종 계획들을 내세워 추진했는데.. 공손찬은 위에 언급한 자신의 뒤틀린 인종관 + 그런 위기감 조성을 통한 군비확장 및 국방비 사유로 자신의 세력과 야망을 키우던 터에 유우의 저런 정책들은 일절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고 유우와 공손찬은 극심한 갈등을 겪었으며, 공손찬이라면 치를 떨던 오환들도 유우측으로 투항 및 교섭을 시도했다. 이미 드높던 덕망이 이 때 더 높아지며 백성들의 칭송이 줄 이어, 후에 반동탁 전선 측의 맹주인 원소가 그를 새 천자로 추대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던 것이다. 그 결과 그런 원소가 주도하던 '반동탁 연합에도 불참'한다. 하여간 이때부터 유우와 공손찬은 거의 각자노선을 걸으며 갈라선다. 이후 공손찬은 잠시 오환족 박멸을 미뤄두고 하북을 휘젓기 시작하는데, 삼국지연의에는 묘사가 안되나 공손찬의 용병술, 군지휘능력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 많은 이들 중 가히 TOP10에 들만한 수준이다. 일단 먼저 말한 오환족 박멸 역시 마찬가지로, 원소나 조조같은 강자들이 오환이나 선비족, 흉노같은 북방 소수민족들을 괜히 회유하고 화친하려 든 게 아니다. 그만큼 버거웠던 부분이 크게 작용했다. 허나 공손찬은 이런 이들을 거의 지워버리다시피 했으며, 191년에는 비록 훈련없는 오합지졸이라고는 하나 무려 30만(삼국지 특유의 뻥이 아닌 역사기록에 의함)의 황건적 잔당이... 현 대한국군의 절반 가량의 저 대병력이 유주에 침공하자, 겨우 고작 2만의 병력만으로 저들을 궤멸에 가깝게 타격한다. 솔직히 저 열 다섯 배의 전력차는 진짜 황건적이 모두 맨손이였어도 버거울 지경이거늘.. 공손찬은 해냈다. 심지어 유우와의 대립이 극에 달에 결국 공손찬의 군사행동에 수시로 겐세이 놓던 유우와 공손찬은 다이를 붙게 되며 이때도 무려 10만이나 되는 병력을 고작 겨우 "100명"만 선발해 지휘부까지 뛰쳐 들어가 와해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렇듯 당시의 공손찬은 원소가 제대로 득세 전까지는 당시 전 중국을 통틀어도 맞상대로 당해낼 재간이 없던 최강의 세력이였다. 공손찬군은 병력 수는 물론, 각종 장비와 물자도 상당히 최신이였으며 유독 기병대에 집착을 했던 공손찬의 고집 때문에 전 중국에서 가장 많고 잘 훈련된 기마군단을 거느리고 있기도 했다. 비록 우리가 알만한 네임드 장수나 모사는 없었으나 공손찬은 오로지 자신의 무력과 지휘력 및 전술능력으로 커버업 하고도 남았으며 기마군단 특유의 기동력을 바탕으로 평야지역이 넓던 유주와 요동 일대의 정복자가 되어 심지어 당시의 원소조차 공손찬의 이름을 들으면 쫄지 않을 수가 없던 상황. 하지만 이렇게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갖고 서출의 그가 오로지 맨주먹으로 하북을 주름잡으며 소수민족과 한족 통틀어 무적으로 이름을 날려가고 있는 와중에도 서서히 그에게는 그림자가 들고 있었으니...... 1. 과격함. 그의 정복 및 전투방식은 심히 거칠고 잔인했다. 소수민족들 상대로는 항복 or 항전 여부 무관하게 모조리 죽였으며 사로 잡힌 이들은 곱게 죽이지도 않고 온갖 모질고 잔인한 방법을 통해 죽였으며, 그렇다고 관할지내의 백성들에게 선심을 베푼 것도 아니다. 공손찬의 병사들은 유주일대의 그 어떤 도적떼보다 약탈과 겁탈이 잦다고 악명이 떨쳐져 있었다. 2. 몰인정. 그는 부하들에게도, 병사들에게도,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들에게도, 다른 군주들에게도, 당연히 적세력에게도... 오직 자기자신의 욕심과 야망의 성취에 소모되는 도구 또는 그에 방해되는 장애물로만 여겼다. 응당 그런 사람냄새 나지 않는 그에게 인재가 몰릴 리 없고 있는 인재조차 떠나는 경우가 잦았다. 당장 공손찬은 그 부덕함으로 조운, 전예 및 유비 등의 특급인재들을 얻고도 놓친다. 그가 성공가도를 달릴 때야 그렇다셈쳐도 그가 위기를 맞자, 그의 휘하세력들은 이탈에 가속이 붙어 더욱 비참한 몰락을 부채질 하는 계기가 된다. 3. 고집. 그는 말 했듯이 '서자'였고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실력, 운으로 성공을 쟁취했는데, 동서고금 막론하고 이런 이들은 자신이 옳고 맞다 여기는 고집이 보통이 아니다. 게다가 그도 모자라 남을 무시하는 경향도 강하고 이런 부류들이 대개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독단적인 아집부리기다. 공손찬 역시 이를 극복하지 못한체, 오로지 모든 부분에 있어서 자신의 고집대로만 처리했다. 역시 이런 이들 아래로는 자신의 뜻과 재주를 펼칠 수 없기에 인재가 모이거나 성장할 수 없다... 4. 별종. 공손찬은 각종 다양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평범한 사람은 아니였음이 여기저기 나타난다. 물론, 삼국지속 영웅들이 응당 평범한 이들이 아님은 맞으나, 공손찬은 좀 희한한 면이 많은 이였다. 유별나던 인종차별적 면모도 그렇거니와, 장인어른의 유배지를 따라가며 굳이 자신의 장례를 스스로 치른 점, 게다가 공손찬은 놀랍게도 참모나 책사에 점술인, 상인, 건축가 등등.. 일절 군사, 행정과 무관해 보이는 이들을 단지 자신과 코드 맞고 복종하며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채용했다.... 저런 여러 큰 결점들 탓에... 그 놀랍고 빛나는 군사적 재능을 토대로 후한의 동북일대를 독차지 하고도 결국 당시로서 자신보다 모로 보나 뒤쳐지고 모자르던 원소와의 대결에서 패하고 만다. 당시 원소는 객관적 전력으로는 공손찬에 댈 바가 아닌 걸 파악했기에 정면승부를 피하고 공손찬의 전력을 싸우지 않고 약화시키는 전법을 쓰는데, 예전 원소의 칼럼에서 말했듯 원소는 정치정략의 고수였는데 이를 십분 활용! 인심을 잃은 공손찬의 영지였던 유주일대를 비롯, 여기저기 사람을 보내 공손찬의 직간접적 세력권이던 요동, 기주 북부일대, 청주와 병주 등에 공손찬에 대한 네거티브적 프로파간다를 퍼뜨린다. 공손찬을 적대시하는 이들 및 세력들을 적극 포섭했으며, 공손찬에게서 전향해 오는 인재들은 더욱 크게 포상했다. 시간이 지나자 공손찬의 세력권에는 그간 공손찬의 폭정 탓에 더욱 그에 대한 비방과 괴담이 날개를 달고 퍼졌으며 공손찬을 따르던 적잖은 이들이 타세력으로 전향 및 하야하는 등 이탈자들이 줄을 이었다. 공손찬세력의 레임덕은 곧 군기강해이로도 이어져 군자금 및 관련 장비나 물자의 횡령도 횡행했으며 일부 장수들은 군마를 빼돌려 파는 일도 생겨났고 병사들도 더욱 백성들을 심히 약탈하게 되었으며 나날이 공손찬의 세력은 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저물어가던 공손찬... 이런 와해작업이 무르익었다 판단한 원소군의 총공세에 공손찬세력은 언제 그리 강했냐는 듯 무너져 내렸으며, 그 강하다는 공손찬군의 기마군단 역시 이에 대한 자부심에 변화없던 전술 탓에.. 대기마군단용 요격전술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 원소군에 의해 박살나고 만다. 세가 기울자 공손찬은 수 많은 백성들을 착취하고 노역에 동원해 지은 최강의 방어요새인 "역경"으로 피신.. 여기에서 짱 박힌 체, 히키코모리처럼 허송세월을 보낸다. 이 부분 또한 실로 안타까운게, 이 역경은 당시의 냉병기로만 무장된 재래전력으로는 사실상 수년 이상의 시간으로도 함락이 쉽지 않은 요새였고, 기세가 꺾여 그럴 뿐 적잖은 병력과 그 병력들이 수 년간 먹을 식량도 비축되어 있었으며 내부에 둔전이 가능할 정도의 농토도 있는 등. 거의 이 역경이란 요새는 당시의 건축토목술의 정점을 찍는 요새로 만화 진격의 거인에 나오는 월마리아같은 거대장벽에 둘러쌓인 궁극의 방어요새였던 것. 아무튼 공손찬은 이 요새에 거북이처럼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않았다. 원소군의 입장에서도 공손찬의 장기전은 반갑지 않았다. 어쨌건 자신의 본거지를 비우고 나온 원정이 길어지면 자신의 거점을 호시탐탐 노리던 조조나 흑산적들의 공격에 취약할 수 밖에 없으며 병참에도 한계가 있고 그렇다고 섣불리 퇴각하다 역경내에서 별 다른 손실없이 진치던 공손찬군이 쏟아져 나오면 그야말로 낭패기 때문. 그런 이유들로 심지어 원소는 오히려 공손찬에게 먼저 화친을 제의하기도 했으나, 싸울 생각도 없었으면서도 공손찬은 제 고집에 화친에는 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대치가 계속 된 와중... 안그래도 희한한 괴짜 공손찬은 정신이상에 가까운 기행을 보이는데, 역경루라는 역경내에서 가장 높은 누각에서 지내던 공손찬은 그 누각에 두터운 철문을 달아 안에서 잠그고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7세 이하의 아이만을 드나들게 하였으며 각종 서류와 공문서들과 식료품과 생필품도 이런 아이들이 셔틀을 맡았고 급한 보고사항은 밖에서 누각으로 소리치면 공손찬의 대답을 다시 누각내의 시종들이 소리쳐 대답하는 심히 박ㄹ혜스러운 행태를 보이기 시작.... 게다가 잠깐 밖으로 군사를 출격시켜 긴 대치에 루즈해있던 원소군을 기습하다 포위 당하자, 어서 구원병을 보내자는 부하들의 요청에, '저들을 구하면 모두 구원병을 믿고 열심히 싸우지 않을거다'라며 그들의 전멸을 방관한다... 이를 계기로 안그래도 저물어 가던 공손찬의 세력은 급속도로 와해되며 탈영병과 이탈자들이 늘어갔고 제 아무리 우주방어요새라도 농성병력이 없다면 함락은 시간문제.... 끝내 원소군이 방어를 뚫고 내부로 진입하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효웅 중의 하나던 공손찬은 가족들을 모두 죽인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원소는 조정에 보고를 올린다는 표면적 이유, 조조에게 경고를 보내려는 내면적 이유로 공손찬의 참수된 머리를 보내는데, 당시의 조조와 조정 대신들 모두 공손찬의 패전을 믿지 못하다 그 잘려진 머리를 보고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훗날, 그런 공손찬을 무찌르고 그의 세력을 흡수하여 하북최강의 대세력으로 거듭난 원소가 훨씬 작고 약한 조조에 의해 몰락을 맞을 때 못지 않게 이 때의 원소가 공손찬을 상대로 승리했음은 전중국 최고의 이슈였다. 이렇듯, 아무리 자신이 뛰어나도 주변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집으로 가득차 왜곡된 가치관을 가진 불통의 인재는 어떤 끝을 보는지를 공손찬의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실무에 밝고 행정에 뛰어나며 바른 말이나 쓴소리 하는 전문가들을 배제한 체, 그저 자신과 맞는다는 이유만으로 비전문가들을 비선실세로 삼았던 점. 오로지 자신의 의견과 생각만을 일방통보하며 고집과 불통으로 귀를 닫았던 점. 당시 비록 인구가 많진 않았어도 비교적 타지역에 비해 이른 개발덕에 꽤나 자리 잡히고 안정된 터전을 차지하고도 자신의 부덕으로 이를 황폐화시킨 점. 화친과 교류를 했더라면 충분히 윈윈하고 자신의 세를 더욱 키울 수 있던 상대를 오로지 적으로만 삼아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대립을 했던 점. 자신의 병사들이 적들 틈에 죽어가고 있음에 이를 충분히 구할 수 있었음에도 말같잖은 이유로 방관하여 모두 죽도록 방치한 점. 왜곡된 가치관 탓에 주변의 인심을 잃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그로 인해 적잖이 떠나간 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 사태를 수습해야 할 위기에 홀로 외부와 단절하여 틀어박혀 골든타임을 놓친 점. 수 많은 그의 문제점들이 마치 우리나라의 누군가와 놀랄만치 닮았다. 이렇듯, 자신의 역량과 장점들이 충분히 세상을 자기것으로 만들만 했음에도 이들을 잘못쓰게 되면 그 끝은 비참한 말로뿐이라는 것도.... 누군가와 닮았던 안타까운 영웅 공손찬편을 마친다.
허저 중강 (許褚 仲康) A.D.? ~ ?
사람 보는 안목도 훌륭했고 용인술도 뛰어났으며 철저한 능력 위주의 인재기용 방식을 추구한 실리주의자 "조조"의 휘하에는 모두가 알다시피 삼국시대 당시 가장 많고 두터운 인재풀을 자랑한 삼국시대의 레알 마드리드 라고 할 수 있었고 응당 그런 조조 아래에는 뛰어난 무장들도 참 많았다. 여러모로 뛰어나거나 조조와 코드가 맞아 신임을 얻은 장수들도 여럿 있었지만, 사료를 살피고 그 모든 것들을 토대로 볼 때 조조에게 '인간적인 애정'을 가장 많이 받았다 느껴지는 장수가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허저"였다. 오늘의 주인공은 이 진짜 "스트롱맨"인 이 인물로 간다. 오늘 날, 중국 안후이성 보저우시 출신인 허저는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며 당시 온갖 히어로들.. 그중에도 특히 범인을 훌쩍 초월하는 피지컬과 신체능력을 자랑하는 차이니즈 슈퍼히어로들 중에서도 가히 압도적인 진짜 '스트롱맨'이였음이 기록에 나온다.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하는 허저 관련 에피소드들 중 허저가 조조 휘하로 임관 전... 고향에 살 당시 1만 여명 이상의 대규모 도적떼가 허저의 고향에 침공했고 대치에 지친 양측이 휴전을 합의하며 도적들의 곡식과 허저측의 소를 물물교환 하는 와중, 소가 놀라 달아나자 그 소의 꼬리를 한 손(!?!)으로 잡고 백여 걸음을 끌고 갔다는 이 말같잖고 믿기지 않는 스토리가 엄연하게도 위서의 허저전에 실려있다.... 당시 후한말에 일반적으로 사육하던 소의 품종, 암수(♂♀)여부, 소의 연령, 소의 영양상태 등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품종여부 떠나 소라는 동물 자체가 원체 크고 암수의 무게차도 상당하지만 암컷인들 일반인에게 끌어 당겨질 무게는 아니며 어린 송아지 또한 지금 이 글 쓰는 나, 읽는 댁들이 힘으로 해볼 수준을 가뿐히 넘어서고 당시 허저측이 처한 환경이 열악해 사람도 제대로 못 먹어 오죽하면 도적떼에게 고기를 주고 곡식을 받아오려는 시도까지 한 점등 비추면 소인들 제대로 먹어 평소의 몸상태는 아니였겠으나 그렇다한들 소는 소인지라 어쨌건 사람이 일신의 용력만으로 한 손끌이를 할 생물이 절대 결코 아님은 명백하다. 게다가 소의 꼬리를 잡아끌었다는건 소 또한 순순히 끌려가지 않고 그러지 않으려 끌려가는 반대방향으로 가려고 용을 썼다는 이야기인데... 전 중국 및 전인류사에서 최강의 파워맨이라 일컬어지는 항우가 이런 허저보다 힘 좋았을까 싶을만큼 여간 대단한 힘이 아니다. 위서에 의하면 신장도 "여덟 자 남짓" 이라 하는데, 당시 후한 말 기준의 여덟 자가 현대 기준의 거의 190cm에 가깝고 '남짓'이라는 표현은 여덟 자를 좀 넘는다는 뜻. 게다가 후한 말 관련 모든 역사서들 중 유일하게 허저는 허리둘레에 대한 언급이 있다. 당시 단위로 "10위"나 되는 허리둘레를 지녔다고 나오며 이 역시 현대기준 무려 115cm(45inch가 넘는다!!)라는... 당장 이 수치는 체격이 작은 편은 아닌 내 가슴둘레를 넘어선다.. 아마도 위에 언급된 인간계 끝자락급의 파워를 볼 때 엄청난 근육질이였을 것으로 보이며 저런 피지컬까지 지닌 것으로 보아, 대략 상상해보면 '브록 레스너'나 '밥 샙' 정도 되는 체구를 가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런 거구들은 지금도 길에 지나가면 사람들이 다들 쳐다볼만큼 눈에 띄는 엄청난 거한들인데, 성인남성의 평균신장이 146cm 가량 정도였을 후한 말의 중국에서는 그야말로 단순 거인을 넘어서, 방금 화장실 다녀왔더라도 마주하면 소변을 지릴 괴물이였음이 분명하다. 이런 엄청난 신체조건 + 신체능력을 지닌 초인 허저는 조조가 허저의 고향 일대를 점령하자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을 이끌고 조조휘하로 가는데, 당시의 조조 또한 허저의 체구를 보고 심히 놀랐다는 기록이 있고 이 당시 "실로 나의 번쾌가 될만하다!!" 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조조는 허저와 그가 이끌고 온 장정들을 고스란히 자신의 근위대 즉, 최측 호위대로 임명했다고 하는데 당시같은 난세에 당시 조조가 듣보잡이 아니였음에도 그런 새로 갓 합류한 이들에게 자신의 신변경호를 맡긴 것을 보면 허저를 굉장히 좋게 보고 신뢰했던 모양인데, 이때부터 조조는 허저에게 반한 듯 싶고 조조의 알음알음 허저 챙기기가 시작되었던거 같다.ㅎㅎ 허저는 생김이나 체구, 그 압도적인 신체능력 등을 갖추고도 전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샤이가이였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눈에 띄는 것도 싫어해서 조조가 장수들을 집결하면 가장 구석이나 뒷편에 숨겨지지도 않는 체구를 한껏 움츠려 섰다고 한다. 조조는 장수들이 군공을 세우면 많은 이들 앞에서 당사자를 불러내 크게 칭찬하는 방법으로 당사자를 띄워주고 다른이들도 분발을 유도했는데, 부끄럼쟁이 허저는 간혹 공을 세우고도 이런 수 많은 사람들 앞에 불려나가 주목을 받고 추켜지는 것에 상당히 큰 부담을 갖고 있었고... 조조가 그를 앞으로 호명해도 못 들은체 딴청을 부리고 밍기적대다 거듭 그를 불러도 쌩까는 허저를 조조가 호통을 쳐 부른 후에야 마지못해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성격이 저런 사람이다보니 말도 거의 없었던 듯. 그러나 할 말은 하는 편이였던거 같고 하루는 형주방면 총사령관이던 조인이 급한 보고를 위해 허창으로 갔는데 당시 조조가 바쁜 정무 중이였고 조인은 맡은 중책이 중책인지라 조조를 기다릴 겨를은 없어 허저에게라도 메모를 전달하려 허저를 불렀다. 허저는 조조의 인척이자 최측근이고 방면군 사령관인 조인의 부름을 거절할 수는 없어 조인에게 갔는데.. 조인 : 아, 허중강! 나 지금 쫌 급한데 말 좀 전해줘! 허저 : 기다리시면 전하 곧 나오십니다.. 이러고는 조인의 대꾸도 듣지 않고 바로 휭~ 조조에게 돌아갔고 이날 이후 조인은 허저를 벼르기 시작한다. 조인은 다시 정욱을 불러 이 일을 이야기했고 정욱이 듣고 놀라 허저에게 가서 물었다. 정욱 : 중강! 사회생활 참 못하네.. 조장군 성격 몰라? 전하의 친척에 측근에 개국공신인데 왜 그러셨대? 허저 : 암만 그래봐야 저 사람은 방면 맡는 바깥사람이고 난 전하의 신변경호를 맡았는데 내가 왜 전하의 허락없이 외부인을 만납니까... 이 에피소드가 조조의 귀에 들어가자 안그래도 이쁨받던 허저는 더욱 조조의 사랑을 받았다. 허저와 조조는 아무래도 주군과 호위관이다보니 서로 붙어있는 시간이 길었는데, 허저는 종종 옷매무새가 허술하거나 한 경우 조조가 이를 먼저 보면 직접 옷매를 다시 챙겨주기도 했고, 조조가 식사시에 조조곁에 서서 조조의 식사를 지켜보는 허저에게 같이 식사를 권해서 허저가 응하면 함께 먹기도 했다. 허저는 자신이 좋아하는 찬이 있으면 응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며 응하지 않았다.... 허저가 체격이 체격인지라 허저가 타는 말은 금새 지쳐 여러 마리를 번갈며 탔는데, 허저가 탈 말은 조조가 직접 선별해 골라줬고 경우에 따라 자신이 타고 있는 말과 바꿔타기도 했는데, 주군이 신하와 말을 바꿔 타는 것은 당시 "말"이라는 동물의 군사적, 물질적 가치를 고려하면 대단한 호의를 베푸는 것이였다. 게다가 당시의 조조가 타는 말이 예삿말들도 아니였고.. 이는 마치 내가 새로 간 회사 사장님이 외근 나가며 업무용 레이를 타는 내게 자신의 아우디 Q7을 타고 가라며 바꿔 주는 것이나 진배 없는 것이다. 조조의 경호실장이면 거의 대부분 조조의 가장 근처에 있다보니 전장에 나가 지휘를 맡은 적이 드물지만 없진 않다. 양에서의 장수와 전투 당시 돌격대를 맡아 돌진하여 적의 기세를 꺾었던 적도 있고, 관도대전과 원소 사후, 원소의 잔당들을 정벌하는 중 업군 포위전 당시에도 소수나마 병력을 이끌고 나선 적 있다. 하지만 사람을 적재적소에 잘 쓰는 조조가 그를 호위관으로만 거의 중용하고 전장에 내보낸 횟수가 다섯 손에 꼽히는 걸 보면 통솔능력은 별 볼일 없었던 것 같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종종 허저의 일기토 내용들이 나오던데 올뻥이다. 허저는 누군가와 1vs1로 전투에서 맞붙은 적이 없다. 전위와 조조의 경호패키지로 묶음처리 되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둘은 연의에서처럼 서로 맞붙은 적도 없고 심지어 둘이 얼굴을 마주한 적조차 없다. 왜냐 하면 실제 역사에서는 전위가 이미 사망한 후에 허저가 조조휘하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삼국지연의의 내용 및 이를 토대로 캐릭터들의 능력치를 데이터화시킨 코에이의 삼국지 게임 내의 허저 어빌리티만 보면, 왠지 자기 이름이나 쓸 수 있을지.. 1부터 10까지 숫자는 셀 수나 있을런지 싶을 힘 쎈 바보로 그려지지만 절대 그런 사람은 아니였다. 조조에게 임관 전에도 고향에서 도적떼를 상대로, 또 조조에게 임관 하면서도 자신을 따르던 적잖은 무리들이 있었던 점 등으로 봐서 아주 근본도 없는 사람이 아니였고 정사나 위서, 그의 열전 등 어딜 봐도 '허저는 빠가였다'는 식의 언급은 진짜 1도 없다. 다만... 워낙 별 말이 없고, 게다가 이게 좀 치명적인데 허저는 평상시에 입을 약간 벌린 눈도 촛점없는 멍한 어딜 보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이 표정 탓에 그의 별명은 "호치(虎癡)"가 된 것.. 저 허저의 유명한 닉네임 호치의 호는 범 호, 다시 말해 전장이나 임무수행 및 조조곁을 지킬 때의 그의 호랑이같은 무시무시한 기세를 뜻하는 것이지만 문제는 뒤에 붙은 저 '어리석을 치(癡)' 인데... 저 치가 바로 허저의 그런 평상시 표정 탓에 붙은 것이였다. 그치만 허저입장에서 이것도 좀 억울한게, 조조곁에 있거나 전장이거나 뭐 그러면 모르지만 진짜 아무일없는 평상시에 조조가 내전에서 업무 보거나 천자를 알현, 또는 자거나 등등 그럴 때의 허저는 혼자 긴 시간을 문앞에 서 있어야 하는데 이 당시에 무슨 스마트폰이 있어서 허저가 유튜브나 빙글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쨌건 근무시간인데 이어폰끼고 음악 들을 것도 아니고, 진짜 할 수 있는거 없이 서 있는데 누군들 표정이 저리 멍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고 영국 왕실근위병들처럼 뭐 교대를 하는 것도 아니였을 것이고.... 당연히 허저는 본인의 저 별명을 싫어했고 위나라 내부에도 감히 허저앞에서 저 별명을 입에 담을 수 있을 힘과 용기를 지닌 자도 없었지만 어쨌건 허저가 기피하던 저 닉네임은 훗날... 동관에서 마초, 한수와 마주할 때 마초가 바로 달려가 조조를 개 때려잡듯 하려다 조조가 데려간 허저의 비쥬얼을 보고 짐짓 쫄은 마초가 "조공에게는 호후(虎侯)가 있다는데,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말해준 후부터 "호후(虎侯)"로 격상된다. 삼국지연의에서 업을 함락 후, 깐죽대는 허유를 빡친 허저가 죽이는 씬이 나오지만 허구다. 저런 일 자체가 없었고, 허저의 성격상 단지 저렇게 깝친다고 하여 아무나 썽큼썽큼 죽이는 스타일이 아니였다. 일에 있어서는 더할나위없이 용맹무쌍했지만 평상시도 거칠고 격한 그런 사람이 아니였다. 평소에는 온순하니 풀 뜯지만 맹수가 다가오면 날뛰는 아프리카 물소같은 타입이였던듯 싶다. 조조가 죽자 탈진하여 쓰러질만큼 울부짖었으며 어찌나 심신이 상할만큼 슬퍼했는지 각혈까지 했다고 한다... 조비 또한 허저를 근위로 삼았는데, 조조가 허저를 자신의 최측에서 경호하는 소수의 경호대를 이끄는 경호실장역을 시켰다면, 조비는 황실전체를 경호하는 황실근위대를 이끄는 근위대장같은 직책을 맡겼다. 허저는 생몰연대가 명확히 사료에 나와있진 않지만 조조의 죽음에 이어 그 아들 조비의 죽음도 봤다. 물론, 조비가 그리 오래 못산 탓도 있으나 아무튼 주군부자의 죽음을 모두 겪고 조조의 손자인 조예대에 사망한다. 여러 정황들 볼 때, 조예재위기에는 사실상 은퇴상태로서 원로예우를 받았던거 같고, 조예 재위 후 그리 오래지 않아서 사망한 듯. 사인에 대한 별 다른 언급도 없고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사망당시의 허저나이가 상당한 고령이였음으로 추정되기에 그냥 노환에 의한 병사였을 듯 싶다. 사실... 주군의 최측근 경호는 그리 공을 세우기가 쉽지 않은 자리다. 그럼에도 허저를 아끼던 조조는 그런 허저가 혹여라도 기가 죽을까, 늘 그가 있음에 자신이 마음 편할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큰 공이라며 그를 치켰고. 가끔은 허저를 전장에도 내보냈다. 허저가 근위대장임에도 몇 차례 전투에 나섰고 비록 몇 차례 안된다고는 해도 어쨌건 모두 승리했는데 추측해 보건데 이는 조조가 허저를 장수로서의 공을 세울 수 있도록 별 다른 지휘통솔능력이 없어 대병을 이끌기는 무리인 그가 소수병력을 이끌고나마 충분히 승리할 법한 전투에 가려 보내 허저로 하여금 주워 먹게끔 했던 배려로 보여진다. 허저 또한 박식똘똘이까진 아니여도 자신을 아끼는 그런 조조의 마음씀씀이를 캐치할 정도는 충분히 되었고 조조를 깊게 공경해 따랐으며 심지어 조조가 그에게 휴식을 명해도 허저는 이를 따르지 않고 거의 자는 시간을 제하면 조조의 지근거리에서 머물렀다. 삼국지 등장인물들 중 통틀어도 손 꼽힐만한 막강한 피지컬과 그에 따른 용맹과 괴력을 겸한 그가 전장을 휘젓고 싶지 않았을리가 없다. 하루종일 자신의 엄청난 신체를 서 있는데 써야함이 실로 괴로웠거나 자괴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책임감과 충성으로 묵묵히 해냈다. 비록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부여받더라도 이를 최선 다해 충실히 해내는 프로패셔널. 그렇기에 조조는 늘 자신 곁에 시립해 서 있는 그를 대함에 있어, 외지의 수만 병력을 이끌고 요충지를 지키는 사령관, 전장에서 대규모 전투를 승리한 개선장군들에 못지 않게 대했던 것이다. 어찌보면 허저 본인도 그런 자신의 성품 덕에 그 험한 난세에서 난전이나 내부적 정치싸움에 휘말림없이 내내 인정받다 천수를 누렸는지도 모르겠다. 다들 즐거운 주말 잘 보내시고 사전투표 안하신 분들은 돌아오는 화요일에 꼭! 잊지 마시고 투표 하시길 바랍니다ㅎ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대의명분에 입각해 각자가 생각하는 최선의 후보분께 소중한 한 표를 반드시 행사하세요! 사려깊은 문후보님, 구여우신 홍후보님, 총명하신 안후보님, 기개있는 유후보님, 혁신적인 심후보님 모두 화이팅 하시길. 그리고 누가 대권 잡건 부디 국가와 국민을 진정으로 위하는 참지도자 되길 기원합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ㅎ 무슨업적도 필요없이, 앞 둘이 워낙 10년 깽판이라 평타만 쳐도 성군소리 들을 각인데...
제갈량 공명 (諸葛亮 孔明) AD.181~234
"삼국지"가 큰 영향력 갖는 동아시아 3개국인 한국, 중국,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인물 꼽으라면 중국은 관우, 일본은 조운, 한국은 바로 "제갈량"이다. (예로부터 문을 숭상한 전통기조 탓인지...) 이 칼럼의 첫 포문도 그래서 제갈량으로 준비했다.. 여러분이 읽었던 삼국지에는 잘 나오지 않은 소제들 위주로 갈테니 다들 Focus! 고향은 서주 낭야현.(지금의 장쑤성 쉬저우) 조조가 부친 잃은 빡침으로 서주 제노사이드 자행 시 부친 제갈규가 형주로 거처 옮길 때 함께 이주. 부친 사후 숙부 제갈현 슬하에서 자란다. 3남2녀 중 넷째였고 당시 기준으로 신장이 무려 189cm가량으로 전란과 기근 탓에 성인남성의 평균신장이 140cm중후반이던 3세기 중국 기준 가히 거인이나 진배없던 장신에 용모도 잘 생겼단 기록이 남아있고 마른 체형이였다고 한다. 당시의 선비들의 주류 학업스타일은 토시 하나까지 달달달 외우던 방식이였는데, 제갈량은 그런 암기 위주가 아닌 요약정리 방식으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후한 마지막 천자인 헌제와 동갑인데다 사망한 해도 같았다. 그 유명한 유비와의 "삼고초려"는 나관중의 각색이 들어가긴 했으나, 실제로 사료에도 유비가 세 번 찾아간 끝에 제갈량을 만났다고 남아있다. 연의에서처럼 제갈량이 유비를 피한건 아니였고 정말 서로 타이밍이 안맞았으며, 휴대폰도 없던 시절 이다보니 당시로서는 어찌보면 다짜고짜 찾아가서 마침 딱 만나는것도 쉽진 않았기에 그랬던듯 싶다. 그는 딱히 유비를 따를 마음은 없었으나, 임관하여 모실 마땅한 군주가 없던데다 당시 절친이던 서서의 권유도 있고 해서 유비를 모신다. 대기업 서류전형에서 컷트되던 유망주가 입사제의 하는 중소기업 들어간 꼴. 연의내용과 달리 모친이 인질 잡혀 서서가 조조에게 가기 전까지 한 동안 제갈량과 서서는 유비 휘하에 있었고 방통과도 인척 관계였는데, 제갈량의 누나 중 한 명이 방통의 숙부의 아내.. 즉 숙모였다. 유비에게 임관 후부터 관우, 장비 형제의 그에 대한 텃새는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였다. 장비는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재사를 공경하는 편이라 제갈량이 일정 수준 능력을 보인 후로는 그닥 태클이 없었으나, 유비 다음은 자신이라 자부하던 관우의 견제와 경계는 제갈량으로서도 관우 사망시까지 참 벅찬 일이였다. 상명하복이 투철한 전형적인 군인이라 제갈량의 지시도 잘 이행하여 케미가 잘 맞은 덕에 제갈량이 가장 의지하던 무관은 "조운"이였다. "마량"과도 코드가 맞았는지, 사석에서는 호형호제 하던 사이였다고 한다. 촉빠에 제갈량빠던 나관중에 의해 가장 주인공버프 크게 받은 인물 중 하나인 제갈량이였기에 소설 속 모습은 거의 닥터 스트레인지에 가깝게 묘사되나 그도 사람인지라 완벽의 면모만 있던건 아니고...ㅋ 분명 단점도 있었고 매사에 뛰어난건 아니였다. 우리에게 그는 탁월한 전략가의 이미지가 강한데, 실제로 전장에서의 전략과 전술, 병법에 능했던건 맞으나 당시 그 분야의 최강자는 사실 아니였다. 당대의 평가 등과 커리어들을 볼 때, 그는 전략가보다는 오히려 정치가로서의 실적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업적도 그쪽이 훨씬 많았다. 전체적 판세를 파악하는 전략적 면모는 오히려 주유, 조조가 앞섰고.. 전투에서의 전술적 재량은 방통, 법정에 뒤졌으며.. 후방보급에서는 순욱도 결코 제갈량 못지 않았고 심리전에 있어서는 가후나 정욱이 더 나았고 방어전술은 사마의가 우위였다는 평가가 지배적. 특히 중국에서의 책략,전략가로서의 자질을 따질 때 큰 척도로 삼는 것은 기책.. 쉽게 말해 창의적이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임기응변 더 쉽게 풀어 전술적 "에드립"여부였는데, 제갈량은 앞서 말한 책사들에 비해 이 부분이 특히 좀 빠지는 편이였다. (중국 역사상 이 분야의 갑은 바로 "한신") 역사기록에서나, 소설에서나 제갈량 전술의 주요패턴은 지형 및 기후 등의 사전정보 철저 숙지를 베이스로 한 정석 응용이였던 범생 스타일. 그의 임기응변 부족론에는 반론도 있었는데, 사실 유비를 처음 섬기는 순간부터 오장원에서 숨 거둘 때까지 그는 남만정벌같은 일부를 제하면 대부분 조조~위를 상대하며 늘 열악한 자원과 인력으로 압도적인 적을 맞이했고.... 그가 이끄는 것은 유비세력 & 촉의 거의 전부였기에, 성공하면 대박이지만 실패시의 리스크가 큰 기책을 선뜻 쓰기는 무리였다는 반론이 그것. 정치적인 치적은 소설에는 잘 안나오는데, 그는 촉의 경제발전 및 과학기술 개발과 심지어 사법제도 개편 및 군의 현대화 등 여러 분야의 내정에서 눈부신 업적들을 이뤄냈다. 당시 서천지방의 대표적 특산물은 "비단"이였는데 이 비단의 생산량과 퀄리티를 높이고자 다양한 개량을 시도했고, 이 비단사업의 대성공 덕에 촉한의 비단재벌들은 중원의 어지간한 부호들 싸닥션을 날릴 수준의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농지개간과 경작법도 많이 손봤고 천연가스 시추에 성공했으며, 내륙이라 소금이 금값이던 그때에 암염이라는 바위에서 소금을 추출하는 방법도 개발, 놀라운 건 당시로는 의심만 받아도 목이 날아가고 삼족 멸하는건 우습던 위나 오와 달리 전문 수사관 시스템을 도입하여 증거와 증인심문 등 통한 체계적 수사시스템을 구축했던 것도 제갈량이였다. "인간" 제갈량은 친절하고 예의바른 성격이였고, 상당히 도덕적이였으며 청렴했음은 물론, 매사에 꼼꼼을 넘어 깐깐한 완벽주의자로 자신이 직접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심 못 하는 스타일로서... 지금으로치면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비서실장, 외교부장관, 행정부장관, 산업경제부장관, 감사원장, 국정원장, 경찰청장, 대법원장, 검찰총장을 합친 것보다 많고 다양한 업무들을 일일히 서류 뒤적이며 직접 처리했다. 이런 사람이 부하라면 더할 나위 없지만 직위가 황제 바로 아래인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승상이였기에 이런 사람이 상관이면 아랫것들 여럿 죽어나가는거 일도 아니였다... 제갈량 본인도 끝내 과로사했지만, 위, 촉, 오 통틀어 촉의 고위관료 과로사 비율이 가장 높은건 결코 우연이 아니였다. 참고로 그는 유비 사후 그냥 승상이 아닌, 황태자와 동급에 왕보다 높은 "상국"의 지위였으며, 그의 사후 승상직 자체가 영구 결석 처리되어... 촉한 역사상 유일한 승상이였다. 어벙띠리하기 그지 없던 유선도, 부친 유비의 유조도 있었고 제갈량의 영향력과 충심이 워낙에 굉장했던터라 제갈량을 부친처럼 대했고 꼬박꼬박 경어를 썼으며 제갈량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 및 토를 달지 않았다고 한다. 거의 입헌군주제 수준이였으며, 오너는 따로 있으나 전반적 경영은 제갈량이 일임하는 전문 경연인체제의 C.E.O.나 다름 없었다. 지금까지만 보면 퍼펙트같은 제갈량의 단점은 사람 보는 "안목"이 그닥이였다는거다... 촉에서 사람 잘 보는 분야의 최고수는 "유비"였는데, 이에 반해 제갈량은 그 뛰어난 여러 분야에도 불구.. 사람 보는 안목은 별로였다. 그가 발탁한 이들의 대표적인 케이스를 보자면.. 장완 - 결과적으로 훌륭했으나 대체로 직무태만인 스타일로서 제갈량이 뒤봐주지 않았다면 유비에게 밉보인 그로서는 진즉 Fired... 마속 - "읍참마속"이란 고사를 만들어 낸 대표적인 실패작으로서 전투경험 전무에 글로 전투 배우고 나대다 끝내.....-_-;; 이엄 - 제갈량이 평하길, "육손에 견줄만 하다!"라고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육손 근처도 못 감. 양의 - 업무능력에 대해 제갈량이 치켜세웠으나 인성 쓰레기에, 제갈량 사후 위연과의 불화로 위연의 사망을 초래. 위연 - 제갈량이 발탁하진 않았으나, 유비는 잘만 활용한 최고의 맹장이건만 제갈량은 내내 겐세이만 줬고 결국 위연과 양의의 불화의 단초를 제공하는 계기를 줌. 강유 - 능력과 인성은 좋았으나, 근자감에 휩싸여 끝없는 북벌시도로 촉한을 멸망으로 가는 특급열차에 태운 일등공신. 마량 & 비위 - 능력 자체는 대단들 했으나 단명. 오에서 마지막에 대장군 직위까지 오른 친형, "제갈근"과는 서로 모시는 주인이 달랐고 둘 다 각자의 소속집단의 중역이였기에 볼 일이 거의 없어 주로 편지를 주고 받았고 막상 만나도 비즈니스적인 이야기만 했다고 한다. 마흔 후반대에 들어 유일무이한 자식(제갈첨)을 하나 얻었고 꽤나 예뻐했는지, 제갈근에게 어린 첨의 자랑으로 가득 채운 편지를 보낸 기록이 있다. 위, 촉, 오는 모두 이민족(그들 기준 오랑캐) 문제가 난제였는데 무력으로 굴복 시키거나 축출 일변도였던 위나 오에 비해 제갈량의 남만정벌은 비록 무력으로 제압은 했으나 이후 먼저 교섭 시도 후, 이민족들로 하여금 지금으로보면 "자치구"개념의 자율통치권을 인정하여 삼국 중 가장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대이민족 대응법을 보여줬다. 고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맵고 짠 음식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편식이 좀 있었던거 같다. 그리고 식사도 정해진 때에, 정해진 장소에서 먹기 보다 대강대강 챙겨서 이런저런 일들을 보며 아무곳에서나 먹었다고 한다.(가정교육이...ㅋ) 이건 정확한 건 아니지만, 무릎이나 고관절 쪽이 좋지 않아서 장년 이후 휠체어 비슷한 작은 의자형 수레를 타고 다녔다는 설이 있다. 적벽대전 앞두고 오에 가서 그곳의 재사들의 다구리를 말발로 역관광 시킨 이야기는 허구다. 짚단을 실은 배를 타고 노숙과 함께 조조군 진영으로 가서 화살 10만 개를 슈킹해온 일화도 허구다. 과로사는 분명해 보이지만, 정확한 사인으로는 "폐결핵"설과 "위암"설이 팽팽하다. 워낙 불규칙한 식습관과 수면부족 및 극도의 스트레스, 과로 등 암 발병에는 최적이긴 했다. 첫 칼럼인데, 두서도 없거니와 일단 너무 양 많고 내가 봐도 지루하다.... 그래도 뭐 읽을 사람들은 읽겠지 T-T 피드백 괜찮으면 앞으로도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해 위와 같은 방식으로 대중적이지 않은 스토리 위주로 갈 예정. 삼국지 관련 궁금증에 대한 질문이나 다뤄줬으면 하는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신청도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