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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판매하는 디즈니 컬렉션 반지들

다이뿌네용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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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반지라 근가 엄첨이뿌넹ㅋ
와.. 진짜 이쁘다
인어공주랑 미니마우스 두번째 세번째 넘 예쁘네요
나두 나두갖고파요-~~ 다욕심나용~~~~
인어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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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재정운용에 ‘호네부타’(骨太)란 말이 왜?
호네부타(骨太) 방침은 2001년 고이즈미 내각 때 시행된 경제운용을 말한다. 2001년 고이즈미 정부의 경제운용 방침 ‘성역없는 구조 개혁’ 차원에서 시작 매년 6월 정부가 발표하는 정책의 뼈대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이 6월 21일 “일본 정부가 경제재정운영의 기본 방침(骨太の方針)과 성장전략을 각의결정 했다”고 보도했다. 각의결정의 핵심은 ᐅ10월 소비세율 인상(8%⤍10%) ᐅ30대 중반~40대 중반 취직빙하기 세대 3년간 집중지원 ᐅ최저임금 전국 평균 1000엔 조기 실현 등을 담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은 ‘경제재정운영의 기본 방침’의 정의다. 이는 ‘성역없는 구조개혁’(聖域なき構造改革)을 실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으로, ‘호네부타의 방침’(骨太の方針)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그럼, 경제정책에 왜 ‘호네부타’라는 이상한 단어가 붙었을까. 호네부타는 한자 그대로 ‘뼈대가 굵다’는 뜻이다. 이 단어가 경제적 의미로 쓰인 것은 2001년 무렵이다. 그해 1월 자민당 내각 산하에 경제재정자문회의(経済財政諮問会議)가 설치되었다. 발족 초기는 모리 요시로(森喜朗) 정권 말기로, 자문회의는 거의 개점 휴업 상태였다. 당시 재무상은 오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재무성이 독점하던 예산편성권한에 내각이 관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뼈대 굵은 논의’(骨太な議論)라도 해보자”는 느긋한 자세였다. 그러다 3개월 뒤인 2001년 4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정권이 출범했다. 경제재정장관이 된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蔵)는 “뼈대 굵은 논의 즉, 호네부타 논의(骨太な議論)를 호네부타 방침(骨太の方針)으로 바꿔놓았다. 논의(議論)보다는 방침(方針)이라는 단어에 힘이 실린 셈이다. 그러면서 자문회의는 총리 주도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자문회의는 고이즈미의 노련한 정치수법과 맞아 떨어지면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총리가 의장을 맡고 각료와 민간인들이 참여했다. 경제재정자문회의에서는 매년 6월, 경제 정책과 재정 정책의 기둥이 되는 기본방침을 최종적으로 정했다. 이는 이듬해 정부의 예산 등 각종 정책에 반영됐다. 고이즈미 내각에서 비서관을 지낸 이이지마 오사오(飯島勲)는 ‘고이즈미 관저 비록’(小泉官邸秘録, 2006)이라는 책에서 고이즈미를 인용해 호네부타(骨太)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호네부타 방침’이라는 건 큰 우산과도 같다. 총론을 확실히 억제하여 그 아래에 각 부처의 개혁 프로그램을 통합한다. 그러면 모두 싫어도 개혁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骨太の方針というのは大きな傘みたいなもんだ。総論をしっかり抑えてその下に各省の改革プログラムを組み込んでいく。そうすればみんないやでも改革案を考えざるを得なくなる) 고이즈미 정부에서 자리잡은 '호네부타'는 아베 정부에서도 여전히 경제운용의 굵은 축을 담당하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은 6월 22일 사설에서 “‘개혁 없이는 성장도 없다’라는 기치를 내건 고이즈미 정권 시절에는 매년 ‘호네부타 방침’에 포함시키는 시책과 관련해 각료와 민간 멤버들이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改革なくして成長なし」を掲げた小泉政権時代には、毎年度の「骨太の方針」に盛り込む施策について、閣僚や民間メンバーが激しい議論を闘わせた)고 했다. <김재현 기자>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11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해외 패피들이 오렌지색 티셔츠 소화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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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 군국주의 시대
재팬올에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을 연재 중인 이훈구 시나리오 작가의 거주지는 미국입니다. 그동안 한국에서 활동 중이었던 작가는 최근 미국(LA)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훈구 작가는 “미국에서도 연재는 계속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군국주의 시대’ 이야기는 그가 미국에서 보내온 첫 글입니다. <편집자주> 일본이 1931년 중국 동북부를 침략(만주사변)하면서 1932년 만주국이 세워지고 1937년부터 중국과 전면전에 들어가게 된다.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의 경계에서 일본의 지식인들은 협소해져 간다. 영화인들에게는 더욱 그 입지가 좁아지는 계기가 되는데 군국주의적 성격을 지닌 정부는 문부성을 통해 ‘새 민족적 천황정치’를 확립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윽고 1939년 10월, 영화산업은 직접적인 정부 통제를 받게 되고 정부 입장에서는 원활한 통제를 위해 영화사의 수를 축소하자는 의견이 대두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통제가 어떤 영화인들에게는 기회가 되는 역설을 낳는다. 쇼치쿠의 전성기도 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이기 때문이다. 쇼치쿠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 가운데 기도 시로(城戶四郞)라는 제작자가 있는데, 그는 이 암흑기에도 수많은 영화인들을 발굴해 냈다. 오시마 나기사(大島渚)의 재능을 알아보고 파격적으로 감독 데뷔를 시켜놓는가 하면 나루세 미키오를 “쇼치쿠에 2명의 오즈는 필요 없다”며 방출한 이도 그다. 역설적으로 그는 20∼30년대 쇼치쿠를 지휘하면서 감독 중심의 스튜디오를 확립하는가 하면 정부의 통제에 유연하게 대처한다. 신파극과 가부키의 묵은 유산을 털고 내용과 스타일 양면에서 ‘모던한’ 영화들을 제작하고자 했으며 쇼치쿠의 감독들과 조감독들은 기도 앞에서 토론할 기회를 가졌고 외국영화들을 보면서 콘티를 그려가며 연구를 했다. 1941년부터 1945년 사이, 4년간의 상황을 제외하고는 쇼치쿠는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영화제작을 했다. 그러나 1939년 10월, 일본의 영화산업은 직접적인 정부 통제를 받게 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되는데 ‘대형 영화사’의 수를 2개로 축소하기로 하는가 하면 영화검열을 강화해 나갔다. 1934년에 제정된 영화법은 영화제작을 완전히 국가의 관리와 통제 아래 두기로 하는데 예전의 검열보다 더 혹독했으며 감독과 배우는 모두 면허 등록제가 되고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검열을 받았다. 물론 독창적 발상은 아니었다. 나치독일의 영화통제정책을 역시 ‘일본화’하였다. 이와사키 아키라(岩崎昶)같은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영화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 확보와 새로운 경쟁자 제거를 위해 오히려 찬성하는 경향을 보였다. 심지어 1936년에는 나치 독일의 산악영화 감독인 아놀드 팽크(Arnold Fank)가 방일, 일본의 산악 풍경을 중심으로 한 ‘사무라이의 딸’을 제작하여 독일에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는데 이 때도 일본은 ‘일본화’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공동감독으로 선발된 이타미 만사쿠(伊丹万作)의 경우, 아놀드 팽크가 설명하는 낭만파적 숭고미학을 이해하기 보다는 자신의 특기인 풍자적 유머의 영화를 만들고야 말았다. 바로 ‘새로운 땅’이 그것인데 이 스토리는 문화 내셔널리즘 성격이 매우 강한 영화였다. 고스기 이사무(小杉勇)가 연기하는 주인공 야마토 테루오는 6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독일인 약혼자 게르다 슈톰을 데려오는데 이미 일본인 약혼자가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독일인 여성과 결혼하겠다는 말에 야마토의 가정은 뒤집어지지만 게르다 슈톰은 오히려 “일본인의 전통과 가치를 지켜야 한다”며 “가족의 말을 들으라”고 야마토를 설득한다. 게르다 슈톰 역시 일본 여성의 아름다움과 총명함에 이끌려 약혼자 미치코와 화해하고 결혼을 하게 되는데 만주국에 정착하여 일본 병사의 보호를 받으며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데 정열을 불태운다는 이야기이다. 다분히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영화이지만 독일과 일본 양국에서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였다. 독일 관객에게는 일본인의 문화적 순수성, 인종적 순수성을 본받으라고 선전하고, 일본 관객들에게는 ‘신천지’만주로 떠나라는 선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놀드 팽크가 선택한 하라 세쓰코(原節子)는 서양인의 체구와 용모의 여배우이자 동양인으로서 그의 의도에 맞게 ‘전형적인 일본 여성’을 연기한다. 그녀는 전쟁 기간 내내 활약을 했으며 이후에도 일본의 대표적인 여배우가 되는 모순을 낳기도 하였다. 그녀는 오즈 야스지로(小津 安二郎) 감독이 연출한 영화 ‘만춘’, ‘동경 이야기’ 등에 출연했는데 그녀의 경력이 오즈 감독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로 나눌 만큼 큰 영향을 줬다. 그는 오즈 감독 영화에서 착한 딸과 며느리 같은 이미지 덕분에 ‘영원한 처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라는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감독과 나루세 미키오(成瀬巳喜男) 감독 영화에도 출연해 ‘일본 영화의 황금시대’를 이끈 배우로 평가받았지만 한편에서는 국민여배우 이전에 ‘파시스트 미소녀’로 불리기도 했음을 상기시킨다. 형부인 구마가이 히사토라(熊谷久虎) 감독의 권유로 배우가 되었고 그의 영향에 의해 흥행 여배우가 될 수 있었다. 반면 이타미 만사쿠는 일생동안 ‘새로운 땅’의 실패와 좌절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고 반전영화를 통해 참회하였고 아들 이타미 주조(伊丹 十三)를 통해 블랙코미디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 나가게 된다. 영화계는 국가의 에누리 없는 통제에 질식하기 시작하고 쇼치쿠, 도호, 닛카쓰 등 대형영화사의 수를 2개로 축소하기로 결정하지만 당시 신코(新興)키네마의 사장이었던 나가타 마사이치(永田雅一)는 오히려 정부를 설득하여 ‘민족(民族)’이라는 제3의 영화사를 설립하는데 성공한다. 이 영화사는 훗날 전후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일본 최초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 기누가사 데이노스케의 ‘지고쿠몬’(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등을 제작해 나가타 마사이치를 ‘영화계의 아버지’로 불리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전후 연합군 최고사령부로부터 공직 추방 조치를 받기까지 하는데 막강한 정계 인맥 덕분에 일명 ‘픽서(fixer·해결사)’로 불리며 심지어 일본 프로야구단 ‘도쿄 오리온스(현 지바 롯데 마린스)’의 구단주가 되기도 한다. 이 영화사는 다시 ‘다이니혼에이가(大日本映畵)’로 개명하게 되었고 오늘날 ‘다이에이(大映)’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불행하게도 전시영화가 제작되던 시절 재정난에 시달리던 닛카쓰는 다이에이에 흡수되게 된다. 1937년 중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사사키 야스씨(佐々木康), 구마가이 히사토라(熊谷久虎), 야마모토 가지로(山本嘉次郞), 아베 유타카(阿部豊), 다자카 도모타카(田坂具隆)등의 감독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다른 영화인들이 저항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아베 유타카는 남방으로, 우치다 도무(內田吐夢)는 협조 대신에 만주로 떠났다. 오즈 야스지로는 군복무를 두 번이나 했으며 미조구치 겐지는 외지로 파견 되었는데 장교 대우를 해주지 않자 국가주의에 호응하는 영화를 제작하려고 했다. 이마이 다다시(今井正)와 도요타 시로(豊田四郞)는 조선으로 건너와 영화제작을 이어갔으며 그 제작 기반은 조선영화인과 일본영화인의 협업으로 영화를 만들던 경성촬영소였다. 당시 경성촬영소에는 일본 쇼치쿠 출신의 야마자키 후지에가 감독으로 입사해 조선 이름 김소봉(金蘇峰)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중 가장 주목 받는 이는 다자카 도모타카로 ‘5인의 척후병’(1938)에서 호전적 영웅주의를 부정하고 전장에서의 고생과 신뢰 그리고 전우애를 그려내 베니스 영화제에 입상한데 이어 1939년에는 ‘땅과 병사’를 연출하는데 이 작품은 낙오자가 속출함에도 아무런 이유 없이 행군하는 병사들을 그려낸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적군이 등장하지 않는다. 고통을 참고 자기 희생을 피할 수 없는 무영의 일본인들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다만 이 작품적 경향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덩케르크 (Dunkirk, 2017)’에서도 재현되는데 역시 적은 등장하지 않고 고통을 참으며 자기 희생을 피할 수 없지만 묵묵히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는 무명의 영웅들을 그려낸다. 도덕주의를 강조한 일본의 전시 하의 영화들은 따라서 전투의 비참함과 병사들의 고통을 강조하게 되면서 오히려 반전영화로 받아들여지는 역설을 낳게 된다. <미국 LA=이훈구 시나리오 작가>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08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시크한 패션으로 엣지있게 여름나기!
안녕~ 패션 픽! 해주는 픽클이야. 오늘은 시크하고! 엣지있는! 그런 샤프한 느낌의 코디를 좋아하는 패피들을 위해 여름철 시크하게 보낼 수 있는 시크한 패피들의 코디를 가져왔어. 그럼 어떻게들 코디했는지 구경하러 가보자구~ 블랙 민소매 바디수트 + 카키 하이웨스트 와이드 팬츠 + 스틸레토 힐 + 블랙 선글라스 스터드 디테일의 블랙 셔츠 + 버클 벨트 + 데님 핫팬츠 + 샌들 힐 + 스팽글 리스틀렛 블랙 니트 탑 + 아이보리 팬츠 + 오픈 토 힐 + 아이보리 숄더백 블랙 파게티 스트랩 캐미솔 + 블랙 스키니진 + 브라운 가죽 슬립온 + 메신저 백 흰색 브이넥 티 + 블랙 스키니진 + 레드 프린지 디테일의 샌들 힐 + 메신저 백 + 선글라스 스파게티 스트랩 실크 원피스 + 버클 벨트 + 실버 목걸이 + 가죽 부츠 + 클러치 화이트 캐미솔 블라우스 탑 + 하이웨스트 스키니진 + 앵클 스트랩, 파이썬 샌들 힐 + 가죽 자켓 베이지 민소매 블라우스 + 리본 디테일의 하이웨스트 팬츠 + 누드 앵클 스트랩 힐 + 클러치 루즈한 블랙 반팔티 + 찢어진 블랙 스키니진 + 블랙 첼시부츠 + 누드 크로스바디 백 루즈한 화이트 컬러 민소매 블라우스 + 스키니진 + 앵클 스트랩 오픈 토 힐 그래픽 티 + 플리츠 스커트 + 누드 플랫 슈즈 + 펜던트 목걸이 누드 핑크 티셔츠 + 하이웨스트 아이보리 팬츠 + 아이보리 스틸레토 힐 + 선글라스 시크한 코디 조합들,  어땠어? 참고해서 이번 여름은 더 시크하게 나보자! 다음엔 더 시크하고 멋진 코디로 돌아올게 안녕~!
천재연구가 조성관 “도쿄는 '하루키'다”
천재연구가 조성관 작가가 인터뷰를 마치고 포즈를 취했다. photo=김재현 기자 조성관 작가 '도쿄가 사랑한 천재들' 펴내 무라카미 하루키 등 일본천재 5명 이야기 15년 동안 전 세계 49명 천재 취재, 연구 #하루키가 즐겨 찾은 재즈바 “더그는 유명세에 비해 몹시 비좁았다. 듣던 대로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계단을 내려오자 담배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진토닉을 시켰다. 하루키가 더그에 오면 즐겨 마신 칵테일이다.”(‘도쿄가 사랑한 천재들’ p116~117)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골 재즈 바인 더그(DUG)에 들른 저자는 현장을 이렇게 묘사했다. 더그는 도쿄의 대표적인 유흥가인 가부키초에 있다. 저자는 “대로변에는 양판점 ‘돈키호테’가 있는데 돈키호테를 등지고 10시 방향, 야쿠스니 대로가 시작하는 지점에 더그가 있다”고 썼다. 하루키 팬들이라면 저자의 이런 세심한 배려에 공감할 만하다. 하루키가 좋아했던 진토닉을 함께 마시고, 하루키가 좋아했던 프로야구 구단(야쿠르트 스왈로스)을 함께 응원하고, 하루키가 좋아했던 달리기(마라톤)를 함께 하는 기분. 이 책이 주는 디테일한 묘미다. #5가지 재미...‘도쿄가 사랑한 천재들’ 하루키 단행본? 아니다. ‘도쿄가 사랑한 천재들’(열대림)이라는 책 내용의 일부다. 책은 나쓰메 소세키(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작가), 구로사와 아키라(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애니메이션 거장), 토요다 기이치로(자동차왕) 등 일본의 다섯 천재들의 삶을 다뤘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저자의 방식이 이럴진대, 독자들은 마치 다섯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저자는 천재들의 생가~활동 무대~묘지까지 찾아다니며 때론 길 안내자, 때론 맛칼럼니스트, 때론 인문학 여행가 등 각기 다른 잔재미를 전해준다. 조성관. 일간지에서 30년 기자로 일했던 저자는 이제 전업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도시가 사랑한 천재 시리즈’ 책들을 15년 째 쓰고 있는 그는 빈, 프라하, 런던, 뉴욕, 페테르부르크, 파리(문인, 예술인편), 독일 편에 이어 최근 도쿄 편인 ‘도쿄가 사랑한 천재들’을 내놓았다. 도쿄 신주쿠 '소세키산방 기념관' 앞에 선 조성관 작가. photo=작가 제공. #‘천재연구가’라는 직업 그런 조성관 작가를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안국동 근처의 한 커피전문점(코피발리)에서 만났다. 무릎이 트인 청바지와 청자켓 차림의 작가는 아담한 규모의 커피가게를 둘러보며 “이런 곳이 있었느냐”며 반가워했다. 시원한 아이스커피 한 잔을 시킨 저자에게 ‘천재연구가’라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먼저 물었다. “(웃음) 직업이라고 하니까 좀 그러네요. 자랑 같아서, 좀 그렇습니다만.(조금 머뭇거리다) 이렇게 천재를 연구해 책을 쓴 사람은 우리나라엔 없습니다. 영국의 앤드루 로빈슨이라는 작가가 천재 연구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앤드루 로빈슨의 천재 연구와 조성관의 천재 연구는 결이 다릅니다. 나는 생애사의 관점에서 천재를 연구했습니다.” 조성관 작가가 천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뭘까. 2005년 겨울, ‘모차르트 탄생 250년’ 특집기사를 쓰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당시 ‘뭔가’를 느꼈다고 했다. “그때 모차르트 전문 가이드와 함께 교향곡(39~41번)을 작곡한 집을 찾아가는데 교향곡 40번이 귀에 들렸습니다. 일부러 생각한 게 아닙니다. 그 집 앞에 가니 교향곡이 더 크게 들렸습니다. 모차르트는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때 분명 모차르트를 느꼈습니다. 그때 천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 가면 천재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 천재들과의 지적 교감 저자는 지금까지 책에서 49명의 천재를 다뤘다. 그는 “한 평생의 성취로 인류사회를 윤택하게 만든 사람을 천재라고 정의한다”며 “범위를 좁히면, 어떤 국가에서 국민의 삶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풍요롭게 만든 사람을 말한다”고 했다. 작가의 말대로라면, 천재가 많은 사회는 분명 뭔가가 다를 것이다. 작가에게 “천재가 많은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는 어떤 차이점을 보이느냐”고 물었다. “좋은 질문입니다.(웃음) 간단한 척도가 있습니다. 평화상을 제외한 노벨상 수상자는 모두 천재입니다. 그러니까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한 나라는 천재를 많이 배출한 사회라고 보면 됩니다. 미국이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가장 많죠. 일본도 24명이나 됩니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왜 미국 뉴욕이나 실리콘밸리로 갑니까? 미국 사회가 어느 나라보다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뉴욕이나 실리콘밸리에는 자극을 주고 배울만한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천재는 그런 환경에서 꽃을 피웁니다.” 조성관 작가는 천재들의 삶을 찾아 15년 동안 외국 현지를 취재하고 연구했다. 그런 노력은 1~2년마다 책으로 묶여져 나왔다. 쉽지 않은 일이다. 조 작가만의 힘은 어디에 있을까. 그는 “천재와 나눈 교감을 잊지 못해서”라며 이렇게 말했다. “성적 쾌락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지적 쾌락, 지적 희열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미적 쾌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천재와의 교감은 지적 쾌락의 엑스터시입니다. 이것을 한번 맛보면 다른 건 시시해집니다.” # ‘조성관 작가 스타일’ 이번에 나온 ‘도쿄가 사랑한 천재들’은 작가에겐 의미가 남다르다. 저널리스트 30년을 마치고 나와 전업작가로 쓴 책이기 때문이다. 과거 현직에 있을 때 쓴 책들과는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오로지 연구하고 취재하고 쓰는 데만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니 독자 입장에서 좀 더 읽기가 편하고 재미있지 않을까요.(웃음) 유럽과 미주를 돌아 처음 아시아권 도시로 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책 내용을 다시 들여다보자. 작가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묘지가 있는 가마쿠라에 가서 멸치덮밥을 먹으며 ‘아리가토 구로사와’라고 외친다. 무척 인상적인 대목이다. 작가는 천재들과 관련된 장소를 찾아가며 설명하는 부분이 ‘꽤나’ 친절하다. 저자는 “현장성을 가장 중요시한다”고 했다. 그에게 “이것이 ‘조성관 작가 스타일’이냐”고 물었다. 조 작가는 웃으면서 “그렇게 보셨다면 성공이다. 그게 ‘조성관 스타일’”이라고 했다. “여행을 하면서, 식도락을 즐기면서 그 길 위에서 천재를 보고 느끼게 하자는 게 집필 동기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한국인들이 세계를 여행하고 있지만 사람을 만나는 여행이 가장 오래 남습니다. 그 사람이 나의 문화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천재들이라면 금상첨화구요. 성이나 궁전 같은 건물만 보는 여행은 조금 시간이 흐르면 남는 게 없어요. 아마 이 말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 일본의 천재들과 풍토 이웃나라 일본에는 수많은 천재들이 나고 죽었다. 저자는 이이토코토리(좋은 것을 가져다 배우기), 모노즈쿠리(장인 정신), 잇쇼겐메이(목숨을 다해 일하는 것), 오타쿠(마니아 기질) 등 일본을 정의할 수 있는 여러 표현들을 예로 들며 천재에 대해 설명했다. 기자가 가장 궁금했던 질문은 바로 이거다. “일본의 경우, 천재들이 지금의 일본을 만든 걸까요? 아니면 일본의 이런 풍토가 천재를 만든 걸까요?” 조성관 작가의 얘기를 들어보자. “일본의 풍토가 천재를 키웠고, 그 천재들이 일본을 만들었다고 봐요. 며칠 전 조선 도공(陶工)의 후예 14대 심수관이 별세했습니다. 여러 신문에 그의 부음기사가 실린 걸 보셨을 겁니다. 1980년대 중반, 14대 심수관이 주일한국대사관이 마련한 기자간담회에 나왔습니다. 그때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질문 앞에는 (1598년 14대조를 조선에서 강제로 끌고 온)이 빠져있었지요. 그때 14대 심수관이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일본이란 나라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우리 가문이 400년 가까이 이런 자부심을 갖고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 말은 현장에 있던 외교관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이 말에 모든 게 들어있다고 봅니다.” # 일본을 배워야 하는 이유 일본에 대한 고민과 생각도 많아 보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선진국입니다. 국가의 역량은 결국 개개인 역량의 총합이라고 봅니다. 일본인이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얼마나 하는지 알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일본인에게 배울 게 많습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커피가게의 대표가 특별한 커피 한 잔을 내왔다. 맛을 본 조성관 작가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별로인가요?”(대표) “아닙니다. 단맛이 나는데, 깊은 단맛이 있군요.”(작가) 조 작가의 이런 품평 덕에 기자도 새로운 커피 맛을 보게 되는 ‘작은 즐거움’을 누렸다. 작가는 ‘도쿄가 사랑한 천재들’에 저자 사인을 해주면서 ‘도쿄는 하루키다’라고 적었다. <이재우 기자, 재팬올 발행인>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①천재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 주세요. “2005년 겨울, ‘모차르트 탄생 250년’ 특집기사를 쓰려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모차르트 전문 가이드와 함께 교향곡(39~41번)을 작곡한 집을 찾아가는데 교향곡 40번이 귀에 들렸습니다. 일부러 생각한 게 아닙니다. 그 집 앞에 가니 교향곡이 더 크게 들렸습니다. 모차르트는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때 분명 모차르트를 느꼈습니다. 그때 천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 가면 천재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②지금까지 49명의 천재를 다뤘는데, 천재를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한 평생의 성취로 인류사회를 윤택하게 만든 사람을 천재라고 정의합니다. 범위를 좁히면, 어떤 국가에서 국민의 삶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풍요롭게 만든 사람을 말합니다.” ③천재가 많은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는 어떤 차이점을 보일까요. 그런 케이스가 있다면 좀 설명해주세요. “좋은 질문입니다.(웃음) 간단한 척도가 있습니다. 평화상을 제외한 노벨상 수상자는 모두 천재입니다. 그러니까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한 나라는 천재를 많이 배출한 사회라고 보면 됩니다. 미국이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가장 많죠. 일본도 24명이나 됩니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왜 미국 뉴욕이나 실리콘밸리로 갑니까? 미국 사회가 어느 나라보다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뉴욕이나 실리콘밸리에는 자극을 주고 배울만한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천재는 그런 환경에서 꽃을 피웁니다.” ④‘천재연구가’ 타이틀로 살고 계신데, 천재연구가라는 직업에 대해 좀 설명 부탁드립니다. “(웃음) 직업이라고 하니까 좀 그러네요. 자랑 같아서, 좀 그렇습니다만.(조금 머뭇거리다) 이렇게 천재를 연구해 책을 쓴 사람은 우리나라엔 없습니다. 영국의 앤드루 로빈슨이라는 작가가 천재 연구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앤드루 로빈슨의 천재 연구와 조성관의 천재 연구는 결이 다릅니다. 나는 생애사의 관점에서 천재를 연구했습니다.” ⑤천재연구가로서 강연에서는 무엇을 강조하고 계십니까. “강연에서는 관심 분야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을 잡아 그들의 습관과 노력을 따라하라고 강조합니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자주 보는데, 거기 보면 식당해서 돈 벌겠다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잘 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우겠다는 자세가 없어요.” ⑥천재들의 삶을 찾아 15년 동안 외국 현지를 취재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거라 봅니다. 1~2년마다 책을 낼 수 있는 작가만의 힘은 어디에 있습니까. “천재와 나눈 교감을 잊지 못해서입니다.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는 동물입니다. 성적 쾌락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지적 쾌락, 지적 희열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미적 쾌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천재와의 교감은 지적 쾌락의 엑스터시입니다. 이것을 한번 맛보면 다른 건 시시해집니다.” ⑦가장 인상적이었던 방문지는 어디입니까. “오스트리아 빈입니다. 손바닥만한 작은 도시에 천재들이 우글거렸으니까요. 조금 과장하면, 한 집 건너씩 천재의 흔적이 있었으니까요. 도시가 작으니까 다니기도 편하구요.” ⑧그렇다면 가장 다루기 힘들었던 천재는 누구입니까. “(웃음) 지금까지 강연과 인터뷰에서 많은 질문을 받아봤지만 이 질문은 처음입니다. (조금생각하다가) 니체였습니다. 니체는 정신질환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스위스 알프스 산중으로 들어가 자연에 안겨 치유를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상 알프스의 니체 흔적을 좇지 못한 채 책을 써야 했습니다.” ⑨<도쿄가 사랑한 천재들>은 의미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과거 현직에 있을 때 쓴 책들과는 느낌이 어떻게 다릅니까. “이번 ‘도쿄가 사랑한 천재들’은 저널리스트 30년을 마치고 나와 전업작가로 쓴 책입니다. 오로지 연구하고 취재하고 쓰는 데만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니 독자 입장에서 좀 더 읽기가 편하고 재미있지 않을까요.(웃음) 유럽과 미주를 돌아 처음 아시아권 도시로 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⑩기자를 그만두고 1년 넘게 전업작가를 하고 있습니다. 전업작가의 삶은 어떤 겁니까. “전업작가는 연예인과 같습니다. 가수는 음반이 팔리고 공연을 계속 해야 살아남습니다. 전업작가 역시 꾸준히 글과 작품을 발표해야 합니다. 그래야 미디어가 주목하고 책도 팔립니다. 정해진 건 하나도 없습니다.” ⑪내년에 제10권 ‘서울편’을 펴내는 것으로 천재 시리즈 대장정을 마무리하실 것 같은데. 어떤 작가로 남고 싶습니까.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우리와 전혀 다른 인간으로 여겨졌던 천재들도 우리와 똑같은 흠결 많은 사람이었다, 다만 그들은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어마어마한 노력과 집중을 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대중독자에게 알려준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⑫70세쯤에는 어떤 글을 쓰고 있을까요. “(웃음) 글쎄요. 나는 15년간 세계를 떠돌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천재를 연구했습니다. 앤드루 로빈슨도 나처럼 천재를 연구하지 못했습니다. 49명의 천재는 내 인생의 스승입니다. 아마도 또다른 각도에서 천재 이야기를 쓰고 있지 않을까요?” ⑬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묘지가 있는 가마쿠라에 가서 멸치덮밥을 먹으며 ‘아리가토 구로사와’라고 한 부분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천재들과 관련된 장소를 찾아가며 설명하는 부분이 꽤나 친절합니다. ‘조성관 작가 스타일’이라고 봐야 할까요? “(웃음) 그렇게 보셨다면 성공입니다. 그게 ‘조성관 스타일’입니다. 여행을 하면서, 식도락을 즐기면서 그 길 위에서 천재를 보고 느끼게 하자는 게 집필 동기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한국인들이 세계를 여행하고 있지만 사람을 만나는 여행이 가장 오래 남습니다. 그 사람이 나의 문화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천재들이라면 금상첨화구요. 성이나 궁전 같은 건물만 보는 여행은 조금 시간이 흐르면 남는 게 없어요. 아마 이 말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⑭<도쿄가 사랑한 천재들>에서 “천재들의 공통점은 자기 일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충실함과 집중력을 보인다는 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책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가장 특별한 천재’라고 표현했던데요. “책에도 썼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만화를 좋아해 만화를 그렸고, 처음에는 데즈카 오사무와 같은 만화가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애니메이터의 꿈을 키웠고 대학에 가서도 그쪽으로 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토에이 애니메이션에서 들어가 뛰어난 선배들을 만나 조금씩 성장해갑니다. 그들은 나이 어리다고 하야오를 무시하지 않았고, 그의 재능을 이끌어내려 선배들이 기회를 주었습니다. 선배들이 하야오를 시기질투하지 않았습니다.” ⑮이이토코토리(좋은 것을 가져다 배우기), 모노즈쿠리(장인 정신), 잇쇼겐메이(목숨을 다해 일하기), 오타쿠(마니아 기질) 등 일본을 정의할 수 있는 여러 표현들을 예로 드셨습니다. 일본의 경우, 천재들이 지금의 일본을 만든 걸까요? 아니면 일본의 이런 풍토가 천재를 만든 걸까요. “일본의 풍토가 천재를 키웠고, 그 천재들이 일본을 만들었다고 봐요. 며칠 전 조선 도공(陶工)의 후예 14대 심수관이 별세했습니다. 여러 신문에 그의 부음기사가 실린 걸 보셨을 겁니다. 1980년대 중반, 14대 심수관이 주일한국대사관이 마련한 기자간담회에 나왔습니다. 그때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질문 앞에는 (1598년 14대조를 조선에서 강제로 끌고 온)이 빠져있었지요. 그때 14대 심수관이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일본이란 나라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우리 가문이 400년 가까이 이런 자부심을 갖고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 말은 현장에 있던 외교관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이 말에 모든 게 들어있다고 봅니다.” ⑯대중적인 예술가(나쓰메 소세끼, 무라카미 하루키, 구로사와 아키라, 미야자키 하야오) 네 명과 대중적이지 않는 기업천재(토요다 기이치로) 한 명을 다뤘습니다. 너무 ‘인문계 예술가’에만 집중한 느낌도 듭니다만. “좋은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서문에 썼지만 마지막 한 자리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너무 문(文)으로 치우친다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토요다 기이치로를 추천받았습니다. 그를 연구하면서 우리말로 번역된 자료가 없어 애를 먹었습니다. 현지 취재를 통해 힘들게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기이치로를 선택한 건 ‘신의 한 수’ 였다고 생각합니다. 토요다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토요타자동차가 세계 초일류가 된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생전에 자신의 롤 모델을 토요다 사키치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⑰<도쿄가 사랑하는 천재들>이 한국 독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갔으면 하는지요.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선진국입니다. 국가의 역량은 결국 개개인 역량의 총합이라고 봅니다. 일본인이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얼마나 하는지 알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일본인에게 배울 게 많습니다.” ⑱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여전히 일본을 이중잣대로 바라보고 판단합니다. 이런 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14대 심수관이 1974년 서울대 강연에서 한 말은 지금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14대 심수관은, “일제 식민지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일본이 저지른 죄가 큰 것이기는 하나) 거기에만 얽매일 경우 한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여러분이 36년을 말한다면 나는 370년을 말해야 하지 않겠나.”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10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중국파’가 득세하는 혼다의 속사정
하치고 사장과 부사장 쿠라이시는 입사동기 중국시장 총괄했던 '중국파'...인사권 장악 주류였던 북미시장파의 불만 표출 등 위기 # 창업가문이 경영하지 않는 혼다 일본 자동차 메이커 혼다(혼다기연공업:本田技研工業)는 창업 가문이 경영을 하지 않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그게 전통이었다.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는 비교적 이른 나이인 65세(1973년)에 용퇴했다. 그는 회사에 혼다(本田) 성을 가진 친인척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했다. 혼다 소이치로가 후계자로 뽑은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45세에 불과한 가와시마 기요시(河島清好)라는 사람이 경영을 이어 받았던 것.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를 포함한 혼다의 사장 계보는 아래와 같다. ᐅ초대 사장 (한자명과 재직 기간)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郎:1948~1973) ᐅ2대 사장 가와시마 기요시(河島清好:1973~1983) ᐅ3대 사장 구메 타다시(久米是志:1983~1990) ᐅ4대사장 카와모토 노부히코(川本信彦:1990~1998) ᐅ5대 사장 요시노 히로유키(吉野浩行:1998~2003) ᐅ6대 사장 후쿠이 다케오(福井威夫:2003~2009) ᐅ7대 사장 이토 다카노부(伊東孝紳:2009~2015) ᐅ8대 사장 하치고 다카히로(八郷隆弘:2015~현재) 오너 자녀들이 회사에 발을 못 붙이는 전통을 이어온 혼다는 그동안 별다른 잡음 없이 경영이 유지돼 왔다. 하지만 8대 사장 하치고 다카히로가 취임하고부터는 내부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과거 혼다는 주력차 피트의 대규모 리콜 사태를 겪었다. 당시 경영자가 7대 사장인 이토 다카노부(伊東孝紳)다. 이토 사장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바통을 이어받은 이가 현재 사장인 하치고 다카히로다. <혼다 사장 하치고 다카히로(八郷隆弘)와 부사장 쿠라이시 세이지(倉石誠司). 두 사람은 혼다의 중국시장을 총괄한 '중국파'다. photo=혼다 홈페이지> # 입사동기가 나란히 사장, 부사장 혼다는 현재 입사 동기가 나란히 사장, 부사장을 맡고 있다. 전 세계 글로벌기업 어디를 봐도 찾기 어려운 희귀한 케이스다. 현사장 하치고 다카히로(八郷隆弘)와 부사장 쿠라이시 세이지(倉石誠司)는 1982년 혼다에 함께 입사했다. 하치고가 1959년생, 쿠라이시는 1958년생이다. 둘은 혼다의 중국시장을 총괄했던 대표적인 ‘중국파’다. 승진은 ‘앞서거니 뒤서거니’했다. 2013년엔 쿠라이시가 하치고의 상사였다. 쿠라이시가 중국 총괄 사장(유한공사총경리), 하치고가 총괄 부사장(유한공사부총경리)을 맡았다. 그러다 2014년엔 똑같이 상무로 승진했다. 이후엔 상황이 역전됐다. 하치고는 2015년 전무에 이어 같은 해 사장에 올랐다. 쿠라이시도 2016년 전무로 승진, 곧바로 부사장 자리에 오르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하치고 사장은 2017년 4월, 최고경영책임자(CEO)까지 맡게 됐다. 쿠라이시 부사장 역시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취임해 2인자 지위를 굳혔다. 입사 동기생에다 ‘중국파’인 두 사람이 인사권을 장악하게 된 셈이다. # 전무가 회장으로 기용 재밌는 인사 올해 2월엔 혼다에 재미있는 인사가 났다. 전무가 회장으로 승진 기용된 것. 미코시바 도시아키(神子柴寿昭) 전무는 2016년부터 공석이었던 회장을 맡게 되었다. 미코시바는 1957년생으로, 사장과 부사장보다 연장자다. 입사(1980년)도 두 해 더 빠르다. 미코시바 회장 역시 중국파로 분류된다. 2014년 6월까지 중국 합자회사의 총경리(사장)를 맡았다. 이후 그는 북미혼다와 아메리칸혼다 사장 겸 CEO를 지냈다. 사실 하치고 사장 이전까지 혼다 경영진의 주축은 북미담당 출신자들이었다. 그런데 하치고가 사장에 오르면서 무게중심이 중국파로 기울었다. 미코시바의 회장 기용을 두고 이런 목소리(혼다 전직 임원)도 있다. “(실은 부사장인) 쿠라이시가 회장이 되는 안도 있었지만, 이러면 점점 더 미국파의 불만이 심해지기 때문에 그 절충안으로 미국과 중국 모두를 경험한 미코시바 도시아키가 회장에 선임된 것이 아니겠느냐.” # 혼다 최초의 여성 임원도 ‘중국파’ 하치고 사장 체제에서는 2016년 혼다 최초의 여성 임원도 탄생했다. 주인공은 스즈키 아사코(鈴木麻子, 55)로, 그 역시 ‘중국파’로 통한다. 1987년 혼다에 입사한 스즈키 아사코는 해외 영업을 오래 했다. 2014년부터는 동풍혼다자동차유한공사(東風本田汽車有限公司) 총경리(사장)을 맡았다. 동풍혼다는 중국 동풍자동차그룹과의 합자회시다. 이처럼 중국 시장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출세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주류였던 ‘미국파’와의 대립과 갈등이 깊어졌다. 게다가 실적이 떨어지고 평균 연령이 높다는 점도 혼다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 “'기술 혼다'에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혼다가 5월 8일 발표한 2019년 3월기 결산 매출액은 전분기 대비 3.4% 증가한 15조 8886 억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영업 이익은 12.9% 감소한 7263억 엔으로 집계됐다. 영업 이익률은 4.6%로, 도요타(8.2%)나 경차 중심인 스즈키(8.4 %)보다 훨씬 낮았다. 혼다의 평균 연령은 45세로, 39세인 토요타보다 고령화 집단이다. 아사히신문 기자 출신인 경제저널리스트 이노우에 히사오(井上久男)는 혼다의 이런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일본 시사매체 주간현대 6월 20일)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가 구축한 ‘기술의 혼다’에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本田宗一郎が築き上げた「技術のホンダ」に危機が忍び寄っている) <이재우 기자, 재팬올 발행인>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12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절대 틀릴 수 없는 블랙 티+ 미니스커트 조합!
안녕 여러분~ 코디 픽! 해주는 픽클이야. 오늘은 절대 틀릴 수 없는 여름 필수 조합! 그중에서도 블랙 티셔츠와 미니스커트 코디를 가져왔어. 같은 아이템들이라도 좀 특별하게 입어야 하지 않겠어? 그럼 패피들이 어떻게 입는지 확인하러 가보자구~ 고고!! 스웨이트 재질의 버튼다운 스커트에 블랙 컬러의 부츠와 스터드 디자인이 있는 백을 시크하게 매치! 심플한 블랙 티에 카키빛의 그레이 랩 스커트로 섹시하게 매치! 플로럴 프린트의 플리츠 스커트로 러블리하게 완성. 프린트가 있는 힙한 티셔츠에 깅엄체크 프릴 스커트로 큐티섹시한 코디 완성. 섹시한 블랙 데님 미니스커트에 허리선을 강조한 벨트 악세서리로 섹시함을 더욱 강조했어. 넥라인과 소매 디테일이 있는 심플한 블랙 티에 깔끔한 미니스커트로 미니멀하게! 모던한 플로럴 프린트가 인상적인 랩 스커트로 심플하고 모던한 코디! 컬러풀하고 유니크한 스커트와 핫핑크 클러치, 매칭되는 컬러의 디테일의 블랙 티로 유니크하고 화려한 코디! 시크한 블랙 크롭 티에 몸매를 강조하는 깅엄체크 미니 스커트로 캐주얼하게! 플로럴 프린트가 살짝 들어간 블랙 티에 로즈 프린트가 들어간 반바지로 러블리하고 시크한 느낌을 동시에! 어떤 느낌의 스커트라도 시크한 느낌을 얹어주는 블랙 티! 내일은 블랙 티에 예쁜 미니스커트로 느낌내는거 어떨까? 다음에 더 예쁜 코디로 돌아올때까지 안녕~
[홋카이도-도쿄 12] 모리오카(盛岡) 산책 – 모리오카 성, 다쿠보쿠・겐지 청춘관, 모리오카 덴만구(盛岡天満宮)
(701계 701系) 모리오카(盛岡) 역 앞에서 관광 순환버스인 덴덴무시 호(でんでんむし号. 달팽이)를 타고 모리오카 산책을 나갔습니다. 모리오카는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 1886-1912)와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 1896-1933)의 고장입니다. 먼저 모리오카 성(盛岡城)에 갔습니다. 모리오카 성은 옛 지명의 이름을 따서 고즈카타(不来方) 성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에도 시대 모리오카 번주였던 난부(南部) 가문의 성(城)이었습니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성터만 남아있으며, 이와테 공원(岩手公園)이라고도 합니다. 성벽은 도호쿠(東北) 지방에서는 드물게 화강암으로 지어졌고 도호쿠 3대 명성으로 꼽힙니다. 혼마루(本丸)와 니노마루(二の丸) 사이에는 가라보리(空堀. 물이 없는 해자)가 있고 주홍색 다리가 연결하고 있습니다. 혼마루 한쪽에 동상 받침대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난부(南部) 가문 제42대 당주(当主)인 난부 도시나가(南部利祥)의 기마상이 있던 자리입니다. 난부 도시나가는 육군 기병 중위로 러일 전쟁에 참전 중 1905년 23세 나이로 전사하였고, 이를 기리고자 1908년 기마상이 세워졌지만 태평양 전쟁 중인 1944년에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한 금속 공출로 철거되어 받침대만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니노마루 한쪽에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비(石川啄木歌碑)가 있습니다. 不来方のお城の草に寝ころびて 空に吸はれし 十五の心 고즈카타의 성터 자리 풀밭에 누워 뒹굴며 하늘에 빨려 들던 열다섯 살의 마음 다쿠보쿠는 모리오카 중학교 시절에 창문을 넘어 도망쳐서 200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니노마루에 와서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잤다고 합니다. 모리오카 성을 빠져나오는 길의 작은 해자 옆에 미야자와 겐지의 ‘이와테 공원(岩手公園)’이란 시비가 있습니다. 모리오카 성을 나와서 나카쓰가와(中津川)를 가로지르는 나카노하시(中の橋)를 건너면 붉은 벽돌의 이와테은행 구 본점 건물(岩手銀行赤レンガ館)이 보입니다. 도쿄역과 한국은행 본점을 설계한 다쓰노 긴고(辰野金吾)가 설계한 건축물로 1911년에 준공되었습니다. 바로 근처에 있는 모리오카 다쿠보쿠・겐지 청춘관(もりおか啄木・賢治青春館)에 갔습니다. 이곳은 이와테 현(岩手県) 출신의 두 위대한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주제로 한 문학관입니다. 둘 다 모리오카 중학교를 다녔는데, 다쿠보쿠는 졸업을 못하고 중퇴하였습니다. 다쿠보쿠 자신은 소설가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불운한 자신의 처지와 어려운 생활고를 3행 단가라는 새로운 형식의 단가로 표현하게 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재시인, 국민시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쿠보쿠의 대표적인 작품집으로는 처녀시집 <동경(あこがれ)>, 처녀가집 <한 줌의 모래(一握の砂)>, 유고가집 <슬픈 장난감(悲しき玩具)> 등이 있습니다. いのちなき砂のかなしさよ さらさらと 握れば指のあひだより落つ 생명이 없는 모래의 슬픔이여 사르르 사락 주먹을 쥐면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네 [‘한 줌의 모래(一握の砂)’ 제1장 ‘나를 사랑하는 노래(我を愛する歌)’ 중에서] 미야자와 겐지는 시인, 동화작가이자 농민교육자였습니다. 겐지는 생전에 주류 문단과 전혀 교류하지 않고 고향인 이와테 현에서만 창작활동과 농민계몽활동을 했습니다. 겐지의 대표작으로는 ‘주문이 많은 요리점(注文の多い料理店)’, ‘은하철도의 밤(銀河鉄道の夜)’, ‘포라노 광장(ポラーノの広場)’ 등이 있습니다. ‘은하철도의 밤(銀河鉄道の夜)’은 겐지의 미완성 유고작으로 인기 애니메이션 ‘은하철도999(銀河鉄道999)’의 원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청춘관 내 카페 ‘동경(あこがれ)’에서 잠시 쉬면서 다쿠보쿠와 겐지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다시 덴덴무시 호(でんでんむし号)를 타고 모리오카 덴만구(盛岡天満宮) 신사에 갔습니다. 이곳도 다쿠보쿠가 모리오카 중학교 시절에 학교를 도망쳐 나와 자주 놀러왔던 곳입니다. 본전 앞에는 한 쌍의 고마이누(狛犬)가 있습니다. 고마이누는 신사나 절에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사자를 닮은 상상의 동물 형상으로 이름이 고려견(高麗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우측의 고마이누는 입을 벌린 형태인 ‘아형(阿形)’이고, 좌측의 고마이누는 입을 닫은 형태인 ‘훔형(吽形)’입니다. 아훔(ahum. 阿吽)은 산스크리트에서 왔습니다. ‘아(阿)’는 입을 벌릴 때 나는 소리로 ‘처음’을 의미하고, ‘훔(吽)’은 입을 다물 때의 소리로 ‘끝’을 의미합니다. 신사 옆으로 조금 내려가면 언덕에 다쿠보쿠 시비가 있습니다. 病のごと 思郷のこころ湧く日なり 目にあをぞらの煙かなしも 마치 병인 양 고향 그리는 마음 솟구치는 날 눈에 푸른 하늘의 연기 서글프구나 [‘한 줌의 모래(一握の砂)’ 제2장 ‘연기(煙) 하나(一)’ 중에서] 다쿠보쿠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시부타미(渋民)에 가기 위해서 모리오카 역으로 갔습니다. (계속) [오늘 탄 열차] 13:12 모리오카(盛岡) - 13:31 시부타미(渋民) (IGR이와테 은하철도 IGR7000계) 16:06 시부타미(渋民) - 16:27 모리오카(盛岡) (JR하나와센 JR花輪線 키하110계 キハ110系) 16:36 모리오카(盛岡) - 17:08 이치노세키(一ノ関) (E5계 신칸센 하야테 新幹線はやて) 17:26 이치노세키(一ノ関) - 17:34 히라이즈미(平泉) (JR도호쿠혼센 JR東北本線 701계 701系) (여행일 2017.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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