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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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가까이 대형서점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와 200만권의 장서량, '미국식'을 표방해 의자까지 갖춘 최첨단 시설로 화려하게 출판-서점계에 입성한 곳이었다. '스카웃' 비슷한 형식으로, 전에 비해 대단히 좋은 대우를 받고 그곳에 입사했었다. 막상 하는 일은 그 전이나 별다른 것이 없었으나 내가 다른 곳이 아닌, '서점'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기쁨과 자부심은 작지 않았다. 2000년 가을부터 2002년 봄까지, 또,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나는 그곳에서 '직장인'이라기보다는 '독서인'으로서 그곳에 있었다. 긴 노동시간과 자의적인 업무체계로 자주 힘들어했지만 어쨌든 내가, 서점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는 것엔
변함이 없었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주로 긴장이 늘어지는 오후 4시에서 5시 사이, 나는 거의 매일 서점 안을 돌아다녔다. 이번주는 A5 서가, 다음주는 D3 서가 하는 식으로... 읽고 싶은 책들을 뒤졌고, 새 책을 넘겨보았다. 간혹 그곳에서 책 관련 인터뷰를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고, 내 마음대로 이미 배치되어 있는 책들의 순서를 바꿔놓기도 했다. 서점에 거닐고 있을 때, 나는 사실 '제왕'이었다. 그 누구도, 내 신성한 책 행차를 방해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철없던 시절이었다. 그때 내가 맡고 있던 부분은 심히 어려운 지경에 있었다. 마케팅이나 전략기획, 업무 효율화...해야할 일들이 끝도 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에게 그 순례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다. 매출은 부침을 겪었고 한 때는 심하게 추락해 내 동료들 상당수를 떠나보내야 했지만 그 슬픔과는 무관하게, '서가 산책'은 내 행복의 든든한, 변하지 않는 기둥이었다.
2년이 채 못되어, 회사를 나가기로 결정했을 때는 잘 몰랐다. 출판사 담당자들에게 선물로 받거나 구입하거나 마일리지로 바꾼 책들이 이미 내 책장을 넘어 책상과 바닥에까지 쌓여있을 무렵이었다. '책과의 나날'들은 이제 다 끝났거니 했다. 새 직장도 알아보지 않고 사표를 던졌다.
그 뒤로 4개월 정도 놀다가 한 포털사이트에 들어갔다. 포털사이트는 정말 바빴다. 출근하자마자부터 시작해서 근 1년여간, 나는 저녁 6~7시가 되어도 내가 몇 시에 퇴근할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라크전쟁이 터졌고, 새벽까지 일하고 아침 일찍 나오는 일이 한달여간 이어졌다. 내지는 않았지만 사표를 쓰기도 했다. 사람들과 친해지고 업무에 익숙해졌으며, 인원이 추가되면서 조금 여유를 되찾았지만 포털에서의 첫 6개월은 새책 한 권을 주문할 수 없을만큼 육체적으로 피곤한 시간들이었다.
새 기획을 내놓게 되면서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책'이었다. 쇼핑이 아니라 책을 말하고 보고 토론할 수 있는 북 섹션을 만들자... 팀장이 호의를 표시했고, 자료수집차 퇴직 1년여만에 그 서점에 들렀다. 익숙하게 새책 코너를 뒤지고, 서가 사이를 헤집으면서 30분쯤 구석구석을 훑었다. 그러다 문득, 서점 정중앙에 섰다. 목을 돌리면 전체가 다 보이는, 조명이 특별히 환한 그 자리에.
그리고 알았다. 내가 서점에 있으면서 행복해 한다는 것을. 여기가 서점이라는 사실만으로, 책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더없이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그 어떤 피로감도 없었다. 새로 산 신발이 불편했지만 금새 잊혀졌다. 이곳에 가면, '몰래' 외국잡지를 뜯어볼 수 있고, 저곳에 가면 사각지대에 숨어 책을 읽을 수 있고...예술 서가 어딘가에는 내가 완전히 재배치한 한 분야가 있고.... 포털에 다니면서 나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없는 그 무엇이 서점에는 있었다. 마치 책들은 페이지를 팔랑거리며 내게 얘기를 거는 듯이 보였다. 왜 이제 왔냐고. 돌아올 거냐고.
다음날 다시 회사(포털)로 돌아갔다. 언제나처럼 맡은 일을 해 갔지만 마음 속에 분명한 일렁거림이 있었다. 1년 정도 지났을 때, 그 서점에서 다시 제의를 받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까, 다시 일할 생각이 있느냐고. 여러가지 계산을 했을 때, 내 서점복귀는 선택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끝내 그 서점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서점 한가운데 우연히 섰을 때, 책들 전체가 나를 바라보던 그 웅장한 감동을 나는 잊지 못한다. 심장이 뛰었고, 피가 끓었다. 어지러운 듯 했고, 무언가 벅차왔다. 체온이 높아졌다.
그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글과 책으로 상징되는, 내 어린시절 뿌리깊은 천착이 잠시 착란을 불렀던 것일까.
그때 나는 내가 책의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됐다. 결국 책 근처 어딘가에서 삶을 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운영자로든, 판매자로든, 저자로든, 기생자로든,
옛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서점이 그립다. 오늘 저녁 다시 그곳을 찾아야겠다.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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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anggd1260 잡념이 많은 타입이에요. 칭찬해주신 만큼 실상도 그렇다면 좋을텐데. 공상하고 끄적이는 게 즐거울 뿐이죠.
책을 많이 읽으셔서 그런지 글을 잘 쓰시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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