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ggy8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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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Viewing] DAY+DREAMER

1. 이 곳은 끊임 없이 펼쳐진 넓은 들판이야. 나는 맘만 먹으면 이 들판을 순식간에 사막으로 바꾸거나, 늪지대가 가득한 밀림으로 바꾸어버릴 수도 있어. 심지어 들판의 색을 어제 부러트려버린 립스틱의 빛깔로도 조절할 수 있지. 들판뿐만이 아니야. 나는 내 머리 위로 펼쳐져 있는 하늘에, 내가 원하는 모양의 별을 박을 수 있어. 목성만한 달을 띄우거나 폭죽처럼 터지는 별똥별을 날릴 수도 있지. 물론, 꼭 밤이 아니어도 괜찮아.
2. 하늘이나 땅 뿐만이 아니야. 나는 이 곳에서 유일해. 그러니까 전지전능하지. 그래서 난 내가 있는 곳의 온도와 습도, 바람의 냄새, 빗방울의 소리까지도 내 맘대로 바꿀 수 있어. 추운 겨울밤 포장마차에 머물렀던 아빠의 냄새. 부엌에서 된장찌개에 넣을 감자를 써는 엄마의 칼질 소리. 나를 처음 안아주던 너의 체온. 나를 위해 울어주던 그 날의 저녁. 이렇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리도록. 내가 듣고 싶을 때, 그 그리운 소리와 공기를 느낄 수 있도록.
3. 이 곳에는 8층짜리 건물만한 나무들이 있어. 선풍기만한 꽃들도 심어져있지. 향기는 나지 않아. 내가 없애버렸어. 너무 진해서 머리가 아플 것 같았거든. 물론 나무들의 키 조절도 가능해. 그런 건 정말이지 일도 아니야. 아! 언젠가 한 선술집에서 네가 술에 잔뜩 취한 채로 내게 꺾어주었던-먼지 가득 쌓인-그 플라스틱 꽃 말이야, 그 꽃도 심어놓았어. 아마 내년에는 씨앗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때는 다른 꽃들은 다 없애버리고, 그것만 주렁주렁 피워 볼 예정이야. 아마 꽃이 피는 데는 30분도 걸리지 않겠지? 나 성질 급한 거, 네가 잘 알잖아.
4. 집을 지을 수도 있어. 통유리로 된 최첨단의 집이든,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집이든, 아니면 별모양의 무덤이든 그 어느 것도 상관없어. 언제든지 헐었다 지었다 할 수 있어. 나는 그 안에 들어가서 눈이 오는 여름이나, 벚꽃이 피는 가을의 풍경들을 바라봐. 가끔 너무 외로울 땐, 내가 파 놓은 무덤으로 들어가 다섯 시간 동안 죽어있기도 해. 죽어있을 땐 네 꿈을 꾸지 않지. (그래서 말인데, 요즘엔 점점 죽어있는 시간이 늘어나 조금은 걱정이야. 죽음에도 중독성이 있는 건가 보더라구.) - 사실 나는 이 곳에서 늘 혼자야. 하지만 가끔 심심할 뿐, 외롭진 않아. 너무 권태로울 때면 종종 천둥을 틀어놓고 번개를 켜놓은 채로 신나게 춤을 춰. 춤추기 전에 쌀 한 됫박으로 막걸리를 담아놓은 그릇에는, 내일 아침에 맥주가 담겨 있을 거야. 그러면 나는 오이 크기의 치즈 스틱을 내 멋대로 썰어서 대충 아침을 때우겠지. 아침부터 술 먹어 본 적 있어? 아침이 될 때까지 술을 먹은 적은 있어도, 일어나자마자 마셔본 적은 없을 걸? 조만간 invitation을 보낼게. 그런데 난, 네가 있는 곳의 주소를 알 수가 없구나.
노을 질 녘의 무지개 빛 시냇물 -나는 그 속에서 척추로 숨을 쉬지- 잠들기 직전 희미하게 멀어져가던 시계의 초침 소리 -그걸 들으며, 나는 달팽이관처럼 둘둘 말려가- 갓 끓인 우동국물처럼 따듯한 햇살 -때론 그 면발을 후루룩 거리며 살이 찌기도하고- 승객은커녕 기장도 없이 날아가는 비행기 -나는 고래와 일광욕을 즐기며 그것의 비행을 구경하곤 해. 가끔은 구름을 끌어다가 이불로 만들어 놓고는 그 위에서 방방 뛰기도 하는데, 너무 신이 날 때면 하늘에 내 정수리를 찧기도 하지. 이 느낌은, 사실 설명하기가 좀 어려운데... 곤약을 엄지손가락으로 푹,하고 찌르는 느낌이라고나 해야 할까 싶어. 말랑,하면서도 엄마에게 혼날까봐 두려운 느낌이지. (사실, 그래서 더 좋아) 같이 킥킥대고 싶은데. 너도 이 느낌을 알면, 엄마의 잔소리 따위는 두렵지 않을 텐데.
5. 그러니까, 이 곳에서 나는 너를 기다려. 이렇게 멋진 곳에서, 내 맘대로, 내 공상대로 모든 게 이루어지는 곳에서. 하지만 결국 여기에서도, 너만은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아. 아무리 기다려도 너는 내게 오지 않아. 마지막 남은 시리얼 박스를 탈탈 털 듯, 내 모든 시간들을 쏟아 부어도 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 그런데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일거야. 너는 애초에 이 곳을 모를 테니, 이런 곳이 존재하는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 할 테지. 그러니 네가 이 곳에 올 수 있을 리가 없지. 애초에 네가 지금도 내 곁에 있었더라면, 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세계를 상상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 결국 그렇게 매일을 너만 꿈꾸고도, 나는 몽상가 밖에 될 수가 없었던 거야. 참, 바보 같은 일이지.
piggy8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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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ggy8894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씀은 너무 자신을 겸손으로 몰아가시는 것 이구요~ 작가의 의도를 알아가는 것 또한 독자의 커다란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태도는 겸손하시더라도 작품은 겸손하시면 안됩니다.자칫 겸손을 눈치채지 못하고 폄하되는 폐단이 나올 수 있어요.
@piggy8894 이 글읽고 우동 생각안나면 사람 아니죠..
그림같은 글 잘 읽고 갑니다. 피기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kshm96 오...!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id4hero4 어린왕자의 느낌은 8층짜리 나무와 선풍기만한 꽃들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어요ㅋㅋㅋ B612가 아기자기하다면 이 쪽은 대륙의 스케일급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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