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nch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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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셀프디스였어

당시 쪽바리를 향한 강한 외침이었지. 그런데 2015년 저 현수막은 결국 헬조선에게 보내는 셀프디스가 되어버렸어. 어떤 미친녀놈들 때문에... 박그네 윤병세 역사를 잊은 헬조선에게 독립이란 없다. 껍데기만 남은 역사를 남겨주게 될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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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들이 유구한 역사를 지닌 대한민국을 집어삼킬줄이야
ㅠㅠ 슬프다.에잇 소주나 한잔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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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어떻게 500년이나 갔을까? (길지만 재밌는 글)
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중에 일부분인데요..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대략 우리가 좀 비루하게 인식하기도 하는 조선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가 하는 부분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한국역사의 특수성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그것 입니다. -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 미국, 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됩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금년이 2010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습니다. 에스파냐왕국입니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입니다. -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기록의 정신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 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습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닙니까?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습니다. 이걸 사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합니다. 4부를 출판했습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쓰는 게 경제적이지요.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6,400만자 하면 좀 적어 보이지요?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입니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납니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입니다. ○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러한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력발전소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 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 동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 이순지가 이것을 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랬어요. 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 옛날에도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 ‘서운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분, 20분,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한 100년, 200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출처 : http://dotty.org/2699099
최초로 미국을 방문한 일본인 존 만지로 이야기
1827년, 만지로는 일본 도사시미즈 시에서 (당시 도사 번 카카하마무라) 가난한 농민 집안의 둘째로 태어난다 만지로의 형이자 장남인 토키초는 병약해 별 보탬이 되지못하고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된다 돈이 없어 데라코야(서당)에도 다니지 못하고 9살 때 아버지가 죽어 10살 때부터 가족의 생계를 위해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어업을 하러 바다에 나가게 된다 14살이던 정월 5일 새벽, 고등어와 전갱이를 잡으러 다른 형제들과 같이 7.5미터의 배를 타고 나왔다가 폭풍우를 만나 10일 간 망망대해에 표류하게 된다 배에 실려있던 건 쌀 두 말과 약간의 물과 장작 뿐. 급작스런 북서풍을 만나 흘러서 도착하게 된 곳은 일본에서 남쪽으로 760km 떨어진 둘레 8km의 작은 무인도 도리시마 섬 만지로와 동료들은 해초와 물고기, 알바트로스, 오줌물을 먹으며 이 섬에서 143일을 연명했다 그러다 1841년 6월 27일, 만지로 일행은 동남쪽 근방을 지나던 미국의 포경선 존 하울랜드(John Howland) 호에 의해 구출된다 "다섯 명의 초라한 피곤한 인간을 발견. 데려오지만 그들이 배고프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 항해 일지 만지로 일행은 처음 보는 범선에서 흑인 선원도 처음 보고 각종 항해 도구, 세계 지도, 서양 가구도 처음 보고 놀라게 된다 만지로는 구조되었지만 엄한 쇄국 체제인 일본으로 돌아가면 중죄 처벌을 받을 것이었기에 존 하울랜드호의 다음 기항지인 하와이로 따라가게 된다 /당시 일본은 귀찮게 굴던 포경선 때문에 1825년 발효된 이국선 타격령(異国船打払令)때문에 접근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배의 선장 윌리엄 윗필드와 선원들은 낯선 동양인 무리에 우호적이어서 소년 만지로는 갑판 청소, 가축 돌보기 등을 하고 고래잡이 일도 배우며 영어도 조금씩 배운다 반년 만에 하와이 호눌룰루 항에 도착해 만지로의 동료들은 하와이의 선교사에게 맡겨졌는데 지식욕이 높은 만지로는 세계지도의 작은 일본을 보고 놀란 후 포경선의 선원이 되고싶다고해 모험을 계속하게 된다 선장 왓필드는 배의 이름을 따 그에게 John이란 이름을 지어준다 그때부터 만지로는 알파벳을 배우기 시작하는데 일본어도 못 쓰던 그가 일본어-영어 학습자가 전무하던 시절 글을 익히는 것은 최초인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만지로의 머리가 좋은 걸 눈치 챈 선장은 미국에 가서 교육을 받는게 어떠냐 권유했고 만지로는 꼭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존 하울랜드호는 괌 섬, 대만 근해에서 포경을 마치고 남미의 드레이크 해협을 거쳐 미국(13개 주 시절) 메사추세츠 주 뉴 베드포드 항에 도착한다 1843년 5월, 당시 이곳은 세계 최대의 고래잡이 기지였고 윗필드 선장은 만지로를 모두에게 소개했다 만지로는 윗필드 선장의 고향 페어헤븐에서 양자처럼 같이 살며 영어, 수학, 측량, 항해술을 배운다 최초의 일>영 학습 교재가 된 '영미대화첩경'을 저술하기도 하고 고등 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할 만큼 낯선 땅에서 만지로의 학습욕은 불타올랐다 포경업 및 귀국 편에서 계속... 일본여행-관동이외갤러리 비기뇽님 펌
자식농사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한 선조.jpg
선조 아들들 중에서 그나마 정상이라고 쳐줄만한 아들은 둘이 있음. 신성군 - 워낙 어려서 요절해서 병크 터트리고 말고도 없음 선조가 물고 빨고 예뻐죽던 아들이라 전쟁 안터지고 명줄 길었으면 얘가 세자 했을지도 모름 광해군 -군왕자 시절에도 클린했고 세자로 빛나는 업적을 남겼지만 애비의 땡조급 갈굼으로 인해 흑화 빼고는 하나같이 가관이었음 그 중 3대장이 1. 임해군 이진 공빈 김씨 소생, 선조 서장자. 광해군 형임에도 인성이 가관이라 그 누구도 세자 후보로 생각 안함, 얘라면 물고 빨고 했던 선조도 세자는 쫌하면서 신성군과 광해군 사이에서 저울질;;; 확인되는 범죄 행위들만 따져도 구타, 강도, 권력을 이용한 재산 강탈은 기본에 공물 약탈, 기록에 의하면 임해군은 궁노를 풀어 토지를 멋대로 차지하고 궁노의 입을 막기위해 남의 지아비를 죽이고 그의 처를 궁노에게 짝지어줬다함. 심지어는 첩실을 빼앗기 위해 강도로 위장해 도승지 유희서를 살해하기 까지 함. 이때 선조는 크게 질책했다고 하지만 지 아들새끼라고 싸고 돌아서 처벌은 안 받음 사람을 죽였는데 참고로 세종대왕때는 공주의 남편인 부마가 종을 때려죽였다가 귀양까지 갔음 임진왜란때도 동생 광해군이 피땀흘려 의병들 독려하고 전투할때, 기생끼고 놀고 갑질해대다가 참다참다 백성들이 얘랑 얘 이복 동생 세트로다가 왜한테 넘겨버림. 광해군은 이런 형을 극도로 증오했다고 함, 기록상 신하들이, 서인,동인 할것 없이 당파를 조월해서 쟤 죽이라고 상소를 올려댔는데 광해군이 상당히 미온적으고 동정적인 태도로 나왔음, 그러나 이런 광해군의 행동이 그냥 동복형제를 죽이기에는 쫌 그러니까 못이기는 척 하려고 했다는게 학계의 정설 (태종이 잘했던 짓 분위기 만들어 놓고 빼는 척 하다가 킬) 심지어 반정이후에도 영창대군 죽인 것만 문제삼고 얘 죽인건 아무도 문제 안 삼음. 2.정원군 인조 애비, 얘도 임해군이랑 하는 행동거지가 똑같았음. 후술할 순화군의 졸기에 정원군이나 임해군보다는 행동거지가 나았다고 서술했을 정도로 개 막장.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과거 시험에 처남을 합격시켜 사헌부에 탄핵당하거나 군적 회피자를 돈 받고 자기 집에 숨겨주거나 하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정도고.. 선조 35년 9월 13일조를 보면 정원군의 가노들이 선조의 형수이자 덕흥대원군 봉사손이었던 하원군의 부인을 납치하는 강력 범죄도 저질렀다고 함. 노복들과 창기(娼妓) 대여섯명이 하원군 집 앞을 지나다가 하원군의 노비와 싸우게 되었는데 하원군 부인이 나와서 말리려다가 도리어 집이 습격당하고 노비들한테 끌려가 감금된거임 하원군의 부인은 참고로 큰어머니뻘인데ㅋㅋ 유교의 나라에서 참ㅋㅋㅋ가지 가지 이새끼 아들이 인조임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원종으로 추존됨...... 콩콩 팥팥ㅋㅋㅋㅋ 3. 순화군 역대 최고의 사이코패스 사이코들이 늘상 그렇듯 동물을 잔혹히 죽이는 걸 꼬꼬마 시절부터 즐겼다는 기록이 있음. 포로 생활 1년만에 안그래도 개 막장이었던 인성이 완전 찌그러져버려서는 ㅋㅋㅋ 인성자체가 소멸되서 사람들 막 죽이고 댕김. 저 임해군이 야..나도 나지만 너 쫌 심하다..했을 정도. 어러서부터 쌩트집을 잡아서 자기한테 인사할때 허리를 너무 조금 굽혔다거나 덜 굽혔다거나 등 말도 안되는 진짜 말그래도 쌩트집 잡아서 잔혹하게 형장을 치는걸 즐겨했다고 함ㅋㅋㅋ 참고로 이때 대략 14~15살ㅋㅋㅋ중2병 개 지랄 맞게 왔음ㅋㅋ 참다 못한 신하들이 처벌을 주청해서 삭탈관직 몇년 받고 끝ㅋㅋ 그러다 10대 후반에는 이미 얘 손에 죽은 피해자만 양손에는 꼽지도 못할만큼ㅋㅋ 쌓이고 완벽한 사이코패스겸 연쇄살인마가 됨. 1년에 10명씩은 죽이고 다닌다는 소리가 돌았고. 백성들은 호환마마보다 순화군을 더 무서워했음. 그러거나 말거나 선조새끼는 어화둥둥 내 새끼 ^^ 처벌도 조또 안하고 사람만 계속 죽어감ㅋ 그러다가 법모이자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를 모시던 궁녀를 강간하는 일이 생김, 심지어 왕후의 관이 모셔진 곳 앞에서 벌어진 범죄임. 이는 아부지인 선조도 절대 쉴드 못쳐주는 극대죄였음. 효를 버린 폐륜적 행동이었기 때문임. 드디어 귀양길에 오르는데 귀양지 가서도 지 왕자라고 고개 쳐 들고 갑질하고 사람 죽이고 다님ㅋㅋㅋㅋ 그래서 다시 서울로 잡혀 올라오는데 다시 그지랄하고 다님 그래도 꿋꿋하게 자가 아들 부둥부둥하는 선조.. 그러다가 더는 지도 안되겠다 했던지 가택연금시켰는데 그러다 풍 맞아 뒤짐ㅋㅋㅋ 선조-정원군-인조는 조선왕조에서 다른 의미로 역대급 3대임 출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쓴 문지원 작가가 18살 때 고등학교를 자퇴하면서 썼던 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쓴 문지원 작가가 18살 때 고등학교를 자퇴하면서 <당대비평>에 썼던 글. 지금 - 학교는 반드시 붕괴되어야 한다. 자퇴한지 넉 달이 지난 지금, 나는 영등포에 있는 하자센터(서울특별시립 청소년 직업체험센터) 영상 디자인 작업장에서 공부하고 있다. 하자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배우는 동안 내가 얻은 것은 '세상을 낯설게 볼 줄 아는 힘'과 '혐오할 것을 혐오할 줄 아는 예민함', 그리고 '나의 언어'이다. 십 년이 넘는 학교생활 동안 내 몸은 온통 싫다고, 여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나의 교육 받은 이성은 그걸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표현하지도 못했다. 언론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떠들어대고 있는 제도교육의 모순에 관한 이야기는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다 죽은 말이다. 학교 안에 있는 학생들의 입에서 학교의 역겨움과 남성주의와 안이함과 무지에 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올 때,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언론과 학교에 의해 세뇌된 죽은 언어가 아니라 스스로의 가슴으로 느끼고 찾아낸 자신만의 언어일 때 학교는 쓸모 있는 배움의 공간으로 남을 수 있다. 이제, 힘겹게 찾은 내 언어로 말한다 - "학교는 늙은 아버지 같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순간 세상의 모든 늙은 아버지들이 당대비평을 내던지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 자체가 이미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나는 왜 아버지를 비판할 수 없나? 나는 왜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야만 하나? 나는 왜 아직도 아버지의 인생경험에 근거한 삶을 살아야만 하나? 아버지와 다른 꿈을 꾼다는 이유로, 아버지와는 다른 생각을 한다는 이유로, 나는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의 이해와 동의를 빌어야만 하며, 그 모든 짐을 혼자 져야만 하나? 아버지는 세상을 잘 알아서? 아버지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겨서? 이유는 하나뿐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라는 이름 뒤에 쌓인 권위의 무게와 전통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그 내용이야 어떠했든 나는 존경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내가 학교에 안 가려고 발버둥쳤던 건 거창한 명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학교가 너무너무 싫고 내가 더 이상 적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다만 인정하지 못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나로 하여금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 그것은 바로 학교의 권위다. 그것도 현실을 편견 없이 볼 줄 아는 능력 따윈 잊어버린, 다양한 생각과 언어를 길러내는 힘 같은 건 알지도 못하는, 무능하고 늙은 권위다. 그리고 아직도 학교 안에 있는 수많은 '나'들은 권위의 족쇄에 온 몸과 마음과 정신을 사로잡힌 채 괴로워하고 있다. 또는 착각하고 있다. 이제, '나'들의 언어를 찾기 위해 말한다. '나'들은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나'들은 스스로의 몸으로 삶을 알 수 있어야 한다. '나'들은 스스로의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나'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우리는 '나'들의 이야기를 인정해야 한다. '나'들이 숨쉴 수 없는 사회, '나'들이 깨달을 수 없고 성장할 수 없는 사회, '우리'가 아닌 '당신'이 지배하는 사회... 이런 사회가 학교라면, 학교는 반드시 붕괴되어야 한다. 전문은 여기에서 와 18살에 이런 생각을 글로 . . *_* 우영우 속 방구뽕이 자캐였다니 !
시즈오카현의 흥미로운 이야기 (feat.녹차)
전근대 일본의 고속도로, 도카이도는 1601년 마련된 에도와 간사이 지방을 잇는 약 500km의 길 이 길을 따라 53개의 역참(휴게소)가 세워졌고 수도를 향한 행렬이 통하며 역참 근처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게 되는데 현재의 도카이도 신칸센과 1번 국도도 거의 이 길과 비슷한 경로를 따라간다 참근교대(参勤交代)를 위해 가는 다이묘 행렬이 도카이도를 따라가다보면 여러 고개들도 난관이지만 가장 큰 장애물이 가로막는데.. (참근교대 : 각 번의 다이묘를 정기적으로 에도에 볼모로 잡아두고 다이묘가 없을 때는 아내나 자식 등 친족을 에도에 보내 견제하는 제도, 에도까지 가는데도 돈이 많이 들어서 재정적 부담도 듦) 바로 시즈오카현 시마다시의 오오이 강이다 이 강을 기준으로 당시 지명 상 도토미국과 스루가국이 나뉘었다 미나미알프스에서 발원해 스루가 만으로 빠지는 이 강을 건너기 위해선 인부들을 이용해 도하해야했다 이 강을 사이에 두고 에도 방향으로는 시마다(島田)쥬쿠 쿄토 방향으로는 카나야(金谷)쥬쿠라는 역참이 있었다 이 강을 건너고 23개의 역참을 지나면 에도 니혼바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동 인구가 많았지만 오오이 강에 다리가 생기진 않았고 천 명이 넘는 인부가 강을 건너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고 이 산업이 막부에 바치는 세금도 쏠쏠했다 에도 시대 중기 이후에는 일반 여행객들의 수요도 늘어 서민들은 가마가 아닌 인부에게 목마를 타고 가기도 했다 오오이 강은 수심이 깊진 않지만 물살이 빨라 강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가면 위험했다 강의 수심에 따라 도하 비용은 달라졌는데 (위험 수당) 강의 수심이 136cm가 넘으면 '가와도메'라는 도하 금지령이 떨어졌다 1년 중 50일 정도는 도하가 금지되었고 최장 28일 간 도하가 금지된 기록이 있다 오오이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카와카이쇼라는 티켓 오피스에서 티켓을 사야했다 1인 가마는 네명, 2인 가마는 여섯 명, 다이묘들이 쓰는 렌다이 가마는 스물네명의 인부가 필요했다 시마다의 인부들은 1번부터 10번까지의 쉼터에 모여 대기하며 얘기를 하곤 했다 인부들은 수요가 많아지자 힘들어져서 인부 개인이 하루 최대 3번 도하하게 제한을 두었다 오오이 강의 도하 제도는 메이지 정부 출범 후 3년 뒤인 1870년에 강에 배를 띄울 수 있게하며 인부들은 졸지에 다 실업자가 되었다 배로 강을 건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1879년엔 강에 목조 다리가 건설되는데, 이 다리가 바로 897m 길이의 '호라이바시' 기네스북에 등재된 가장 긴 목재 다리이다 한편 근대 일본에 처음 해군을 만든 카츠 카이슈는 1860년 서양을 돌아보고 일본의 차가 상품 가치를 갖겠구나 생각해 1869년 시즈오카 마키노하라 일대에 1,425ha의 녹차밭을 개간하게 명령한다 도하 산업을 잃은 시마다의 인부들도 1873년부터 이 녹차 산업에 뛰어들어 30ha의 녹차밭을 개간하며 지금의 시즈오카 일대는 녹차로 유명한 지역이 되었다. 일본여행-관동이외갤러리 비기뇽님 펌
왕초보영어회화, How are you?에 대답할 수 있는 다양한 표현
How to answer "How are you?" 가장 대표적인 표현 I'm fine 외에도 fine 자리에 good, well 등을 넣어 잘 지낸다는 것을 표현할 수 있겠죠^^ "I'm good." "I'm fine." "I'm well." "Very well, thanks." 정말 잘 지내, 고마워~ 뒤에 thanks를 덧붙여 조금 더 성의있는 대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Yeah, all right." "I'm ok." Pretty 는 예쁘다, 예쁜의 뜻도 가지고 있지만 부사로 쓰게 되면 '어느정도', '꽤'의 의미를 가집니다! "Pretty good." "Just the same old same old." 'same old same old' 항상 똑같다, 다를 바 없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표현이에요! 조금 지루하고 재미 없다는 듯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어요. +원어민들은 발음을 빠르게 하다보니 same ol', same ol' 이렇게 쓸 때도 있답니다^^ 비슷한 표현으로 "Just the usual."도 쓸 수 있답니다. 별 일 없어. "Not a lot." "Nothing." "Nothing much." 아이고, 별 일이 다 있었어! "Oh gosh, all kinds of stuff!" 여기서 'stuff' 살펴볼게요 ! 것[것들], 물건, 물질 (가리키는 사물(들)물질 등의 이름을 모르거나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 때, 또는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분명할 때 씀) 일[것]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행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것을 통칭함) ex. This wine is good stuff. 이 포도주는 좋은 것이다. I like reading and stuff. 나는 독서나 뭐 그런 것을 좋아한다. I’ve got loads of stuff to do today. 난 오늘 할 일이 아주 많아. 예문으로 익혀보세요^^ 오늘은 왕초보영어회화, How are you?에 대답할 수 있는 다양한 표현에 대해 공부해 보았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와 댓글 부탁드립니다:) 좋은하루 보내세요 🥰
조선 임금들의 사망 원인
초대: 태조 이성계 향년 72세 재위 기간: 6년 2개월 사인: 중풍 자식들이 내란 벌여서 스트레스 쌓이고 이로 인해 중풍에 걸렸는데 악화 되어 붕어 2대: 정종 이경 향년 62세 재위 기간: 2년 1개월 사인: 노환 꼭두각시 노릇하다 동생한테 왕위 주고 천수를 누리다 자연사함 3대: 태종 이방원 향년 54세 재위 기간: 17년 9개월 사인: 폐렴 사냥 갔다가 열이랑 혼수 상태에 빠졌는데 이때 급성 감염성 폐렴으로 붕어함 4대: 세종 이도 향년 52세 재위 기간: 31년 6개월 사인: 당뇨, 풍질, 부종, 임질 , 허리 디스크, 비뇨 장애 등등 복합적인 합병증 원래부터 온갖 병을 달고 있었음 시력 저하나 편식으로부터 온 비만, 하루종일 앉아서 책만 읽다 온 성인병 때문에 붕어함 5대: 문종 이향 향년 37세 재위 기간: 2년 사인: 등창 어머니 죽어서 3년상 치뤘는데 곧바로 세종이 죽어서 같은 짓을 또함 이로 인해 약해진 몸 등에 난 종기로 붕어함 세자 노릇 35년 왕 노릇 2년 6대: 단종 이홍위 향년 16세 제위 기간 3년 사인 독살 or 타살 왕위에 오를 때 주변의 어른이 없었던 탓에 종친을 제어 할 존재가 전무했음 곧바로 세조의 쿠데타로 이어지고 복위운동까지 실패하자 영월로 유배 보내져 독약을 받음 7대: 세조 이유 향년 50세 재위 기간: 13년 2개월 사인: 문둥병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이후 정신 질환과 불면증 갖가지 피부병에 걸림 죽을 때까지 시달리다가 붕어함 8대: 예종 이황 향년 19세 재위 기간: 1년 3개월 사인: 급사 급사하기 전날 ''이제 좀 종기 나아진 것 같다'' 이러다가 다음날 바로 급사함 9대: 성종 이혈 향년 37세 재위 기간: 25년 사인: 폐결핵, 합병증 조선 최고 성군이지만 세종과 유사하게 종기, 설사, 두통, 요통 등등의 질병괴 씨름하다 폐결핵과 합병증으로 붕어함 10대: 연산군 이융 향년 29세 재위 기간: 11년 사인: 역질, 화병 조선 최고 폭군이지만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을 알게 되자 미쳐 날뛰며 신하들을 죽여댔음 이어서 전국에서 미녀들을 모아 합방만 하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이후 강화도로 유배가서  아들의 시사 소식을 듣고 식음 전폐 하다가 죽음 11대: 중종 이역 향년 56세 재위 기간: 38년 사인: 노환 신하들에게 휘둘리다 노환으로 붕어함 12대: 인종 이호 향년 30세 재위 기간: 9개월 사인: 거식증, 합병증 즉위 부터 병약했고 문정왕후의 도를 넘은 압박에서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음 여기에 세자시절 중종이 앓아 눕자 5개월 동안 예법을 행하다 거식증까지 걸려 붕어함 13대: 명종 이호 향년 33세 재위 기간: 21년 사인: 울화병, 급사 문정왕후 치맛폭에서 20년간 살다가 문정왕후가 죽자 드디어 기 펴고 윤원형등 일파를 대거 숙청했으나 급사함 기록에는 울화병도 있다고 되어있음 (선조 추정 어진) 14대: 선조 이연 향년 55세 재위 기간: 40년 사인: 울화병, 자연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기존의 울화병이 악화되고 실어증까지 걸려서 허약해진 몸 이끌고 가다가 붕어함 15대: 광해군 이혼 향년 66세 재위 기간: 15년 사인: 노환 왕세자 시절엔 명군의 자질이 있었지만 막상 왕위에 오르고 보니 무리한 토목 공사로 민심을 잃고 적장자였던 이복 동생 죽이고 대비까지 감금 시키며 패륜을 함 이때 제주도로 유배 보내져 병자호란 터진 줄도 모르면서 살다가 사망 16대: 인조, 이종 향년 53세 재위 기간: 26년 사인: 화병, 노환 삼전도 굴욕으로 유명한데 실제로는 여러 미디어에 나오는 것처럼 삼배구고두래가 머리를 땅에 힘껏 빻는게 아니므로 피가 났다는 기록은 없음 이후 소현세자에게 열등감 느끼고 스트레스와 홧병에 시달리다 붕어함 17대: 효종 이호 향년 39세 재위 기간: 10년 사인: 어의의 실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의 치료를 두고 침을 놓자와 놓지 말자라는 의견이 대립하던 와중 어의인 신가귀가 침을 놓았는데 수전증 때문에 혈관을 잘못 찔러 과다 출혈로 붕어 18대: 현종 이현 향년 33세 재위 기간: 15년 사인: 등창 및 합병증 안질과 피부병이 고질병이었는데 재위 기간 내내 온천을 달고 살았다함 호전 되지도 않았고 폐혈증으로 붕어함 (숙종 추정 어진) 19대: 숙종 이순 향년 58세 재위 기간: 45년 사인: 심화증, 등창, 안질 등등 강한 왕권과 더불어 성격도 강해서 심화증 안증 포만증 노인병 등등에 걸리며 붕어함 20대: 경종 이문 향년 35세 재위 기간: 4년 사인: 급사 날 때부터 쇠약한 몸과 심한 우울증을 앓았는데 이후 영조가 올린 생감과 게장을 먹고 급사함 이때문에 영조는 선왕의 독살이라는 의혹에 시달리게 됨 21대: 영조 이금 향년: 81세 재위 기간: 51년 사인: 자연사 조선 왕조에서 가장 오래산 인물로 소식을 하고 잡곡밥을 즐겼으며 영약식을 했다고 함 1년에 먹은 인삼 수만해도 20개가 넘는다고 ㄷㄷ 22대: 정조 이산 향년 47세 재위 기간: 24년 사인: 등창, 홧병 실록에는 공식적으로 등창이라 적혀있지만 사망 사인이 독살이냐 등창이냐 왈가왈부가 굉장히 많음 (순조 익선관 추정 어진) 23대: 순조 이공 향년 44세 재위 기간: 34년 사인: 폐혈증, 변비 소화 기관이 불량이라 고생 꽤나 한 왕임 순조 34년에 두통과 변비가 찾아오자 그대로 붕어함 (헌종 추정 어진) 24대: 헌종 이환 향년 21세 재위 기간: 14년 사인: 폐결핵 역대 왕들 중에서 미남이라고 손꼽히는 왕으로 어려서부터 궁녀들과 합방으로 폐결핵을 얻었음 그렇게 붕어함 25대: 철종 이변 향년 32세 재위 기간: 14년 사인: 폐결핵 안동 김씨의 훼방질에 말려들어 술과 여자를 탐하다 폐결핵에 걸려 붕어함 26대: 고종 이희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이희 향년 67세 재위 기간: 43년 사인: 뇌일혈 고종의 붕어는 독살설이 가장 많이 제기됨 이완용의 명령으로 식혜를 전달했던 나인이 의문사 했고 그 식혜를 받아 마신 고종도 돌연 붕어하였음 당시 고종은 비밀리에 독립 운동을 위해 해외 망명을 준비 중이어서 독살설에 힘이 실림 아직까지도 정확한 경위는 불명임 27대: 순종 이척 2대 황제: 순종 이척 향년 52세 재위 기간: 3년 사인: 심장병 일제의 탄압 속에서 허수아비로 앉게된 군주인지라 무기력 속에서 살다 말년에 심장병을 얻고 붕어함 지구촌갤러리 ㅇㅇ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