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ee
10,000+ Views

소소한 만남의 기록 #1. 소개팅 후기

"너한테 소개 시켜주고 싶은 애가 있어."
친한 친구가 갑자기 소개팅을 시켜준다고 했다. 보통 친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믿을 만하다. 난 뭐하는 분인지, 어떤 스타일인지, 성격은 어떤지, 이런 저런 것들을 물어보았고, 그 친구는 나에게 괜찮은 애인거 같다며 사진도 보내줬다.
너무 내 스타일이잖아!!!!!!!!
키 큼이 사진에서도 느껴졌고, 속쌍에, 웃는게 귀여운, 그냥 완전 내 스타일이었다. 평소 셀카를 별로 안찍는 나는 최대한 예쁘면서 분위기는 있지만, 실제 만났을 때 실망할거 같이 너무 과장되게 예쁘지 않은 사진들을 골라서 보내주었다. 보내주면서도, 얘가 나랑 소개팅을 하겠어? 라고 생각했다.
너무 솔직한 사진은 친구에게 검열당했고, 친구는 사진 몇 개를 더 추가해 그에게 보냈다.
"한대. 얘가 너한테 곧 연락할거야."
헐. 안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기분은 좋았지만 사진이 너무 잘 나온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카톡 프사는 연락이 오기 전에 얼른 (얼굴이 잘 나오지 않은) 멀리서 찍은 사진으로 바꿨다. 나에겐 카메라를 너무 잘 받는 것도 걱정이라면 걱정이다.
"안녕하세요. ㅇㅇ한테 소개받은 ㅇㅇㅇ입니다" 라는 정석적인 첫 카톡이 왔다. 난 어색했지만, 어색하지 않은 척 온갖 이모티콘을 동원해 시시콜콜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우린 카톡을 주고 받다가 말을 놓자고 했고, 연하였던 그는 조금 뻘쭘하게 "그럼 누나라고 부를게"라고 했다. (심멎)
2시, 강남역. 애매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점심은 먹고 나오라는 거고, 카페에 있다가 집에 간다는 건가, 저녁을 먹자는건가... 아, 설마 저녁을 함께 할지는 보고 판단하겠단 건가? 라는 쓸데 없는 생각을 했다.
첫 인상은 조금 달랐다. 키가 컸고 외모도 준수했다. 근데 얘기하다보니 그는 너무 단정했다. 난 좀 더 장난기 많고 활발한게 좋은데... 라는 찰나의 아쉬운 생각을 내가 먼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배가 불렀다.
어색할 수록 웃음이 더 많은 나는 정말 많이 말했다. 이렇게 많이 말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많이 말했다. 끊임없이 말했다. 4시쯤 애매하게 밥을 먹었고 (밥이 정말 맛있었다! 센스 인정) 그러고도 5시었기 떄문에, 우린 또 카페에 갔다. 그래도 꽤 재미있고, 볼수록 매력있다는 생각이 들 때 쯤, 그는 8시에 약속이 있어서 가야한다고 했다.
아 끝났구나.
20대 중반이 되면서 알게 된 것은, 첫 소개팅 때 너무 건전한 시간에 집에 들어가고 있으면 기대를 갖지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꼬꼬마 시절, 정말 바쁠거야 라면서 정당화하던 내 생각을 처참히 깨준 영화가 있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참 간사하다. 처음엔 내 스타일이라고 좋아하더니, 만나고 내가 상상했던 성격과 다르다고 실망을 하지 않나. 실망 해놓고 잘 안된 거 같으니 아쉽다, 뭐가 잘못됐을까를 고민하고 있다니!!
말을 너무 많이했나.
소개팅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입고가다니 좀 예쁜척좀 해볼걸 그랬나.
아님 그냥 맘에 안 드나.
하면서 터덜터덜 집에 가는데, 카톡이 왔다.
"다음 주 언제 시간돼?"
다행이다!!!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가 좋아서인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 회복 때문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내 모습을 보고 다 시 한번 내가 간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너무 늦지 않지만 너무 조급하지 않게, 수요일에 다시 보기로 했다!
cuee
49 Likes
15 Shares
24 Comments
Suggested
Recent
전 남자가 연하라도 바로 '누나'라고 하는 남자는 만나기 싫더라구요~ 여자로 안보는거 같아서 ㅠㅠ 님 후기보니 누나라고 하는 남자도 만나봐야 하는건가....잠시 고민을 ^^
글 넘 좋아요
일기같은 글 좋아요
현실감이 흐르지만 지루하지 않고 우울한 느낌 뒤에 설렘이 피어나는 글이다
많은 여성분들이 지금 이 분처럼 복잡하게 생각하시는데, 사실 남자들은 단순해요. 2시에 만나자고 한 이유는 아마 8시에 미리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럼 2시에 이 누나보고 약속가야지. 이런 사고과정이에요. 막 보고 맘에 안들면 저녁 안먹고 가야지 뭐 이런저런걸 전제로 생각해서 2시라고 하기보단 진짜 그 시간이 괜찮은거 같아서 그걸로 한거일거에요ㅎㅎㅎ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혼자는 외롭지만, 둘은 괴로운 사람들
혼자는 외롭지만, 둘은 괴로운 사람들 누군가와의 관계가 힘들고 버거워 차라리 아무와도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열 일 제쳐두고 무인도에 가서 한 세월 살아보고픈 충동이 생길 때가 있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그럴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강은호, 김종철, 나는 아직도 사람이 어렵다 中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세상은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을까요?" 캉디드가 물었다 "우리를 화나게 하려고요" 마르틴이 대답했다 /볼테르,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죽고 싶다 말하지만 정말로 죽고 싶지는 않고, 살고 싶다 말하지만 정말로 살았던 적 없고, 죽고 싶은데 누가 자꾸 살려놓는 거니 살고 싶은데 왜 목을 조르는 거야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아니,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는 거 맞잖아 /김박은경, 오늘의 일기 솔직하게 인정하자 현실은 언제나 당신이 기대하는 것보다 엉망이고 당신의 생은 여전히 고달프고 나아질 기미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그래도 그럭저럭 이 지난 한 생을 견뎌내고, 살아내는 까닭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식 하나쯤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최갑수, 잘 지내나요 내 인생 새벽에 누가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인생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나쁜 꿈에서 깨어나면 또 한 겹 나쁜 꿈이 기다리던 시절 /한강, 거울 저편의 겨울2 우리는 시시각각 이별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시시각각 자신과도 이별하며 살아간다 /박경리, 매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서 울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신철규, 눈물의 중력 나는 친절해진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슬프게 할까봐 조금 조심스러워졌을 뿐이다 /은희경, 그것은 꿈이었을까 우는 것은 마음을 청소하는 일이다 봄날이 가는 것이 못 견디겠는 날이 있는가 하면 기다림의 힘으로 살아봐야지 하는 날도 있더라 /박연준, 소란 우리는 아플 때 더 분명하게 존재하는 경향이 있다 /이현승, 빗방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텍스트 출처ㅣ쭉빵, 별 하나 없다고 절망하지 마 이미지 ㅣ 영화 <봄날은 간다>, 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