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 : 이중섭, "서귀포의 환상", 1951. 나무판에 유채.
세로 56cm, 가로 92cm,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그는 평생 바닷가를 떠돌아 다녔다. 통영, 서귀포, 부산...평남 평원에서 태어나 일본 동경문화학원에서 유학하고 일본 여자 山本方子(한국명 이남덕)와 결혼했다. 일제말 징용포스터를 그려 사후 친일행적 논란이 일기도 했다. 1945년에 귀국, 원산에서 대학교원을 맡다가 6.25 중 월남한 그는 남한에서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생활고가 심해졌고, 그림재료를 살 돈이 없어 담뱃갑 은박지에다 그림을 그렸다(이 그림은 상감기법에 유래한 듯 하다 하여 표현의 새로운 영역을 탐구한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1952년, 가난을 견디다 못한 부인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고, 그는 부두노동자로 입에 풀칠한다. 그림에서 보듯 풍부한 또는 나약한 감성의 소유자였고 이때부터 차츰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곤궁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정신분열증을 앓는다. 1956년 서민병원이었던 적십자병원에서 간염으로 삶을 끝마친다.
그의 그림 중에서는 '소' 연작이 잘 알려져 있고, 한국을 대표하는 몇 안되는 서양화가로 꼽히면서 작품에 대한 부자들의 소장열풍은 맹신에 가깝다. 지난 시대의 신화이기도 한, 가난이 예술혼을 밝혔던 아름다운 사례다. 그가 1951년 제주 서귀포에 살면서 '서귀포의 추억',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 여러 작품을 남긴 것을 기념하여 2002년 서귀포 그의 생가 바로 위에 이중섭미술관이 지어졌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값이 비쌌고, 따라서 아무도 미술관에 그의 그림를 빌려준 이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미술관은 그의 그림 복사본만 전시하는 희귀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지금은 여러 노력에 힘입어 여러 작품이 원화로 전시되고 있다. 그의 가난은 죽어서도 떨칠 수 없는 것이었던가.
그의 생가에서 바라보면 서귀포 바다의 풍경이 훤히 펼쳐진다. 거기서 그는 사실화를 그리기도 했고, 윗 그림 같은 몽환적인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나무판에 유채로 그린 '서귀포의 환상'은 그가 얼마나 따뜻하고 풍요로운 공동체를 열망했는가에 대한 뚜렷한 반증이다. 이룰 수 없는 환상을 표현하면서도 사실적인 필체를 남긴 것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영향이라 평가받기도 한다. 무엇이 어쨌든, 그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그렸고, 그것은 현실이 아니었다. 그는 당대에 인정받은 천재도 아니었으며, 그가 바란 것은 소박했지만 꿈은커녕 생활마저 꾸려갈 수 없었다. 그 간극이 바로 이 그림에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쓸쓸한 환상인가.
매년 10월말, 그의 사망주기에 맞춰 서귀포 이중섭거리(박물관이 있는 곳)에서 이중섭 예술제가 열린다. 올해는 한번 가 보려 한다. 지독한 빈궁 속에서 그가 그리고 또 그렸던 작은 은박지 그림들을 보고 또 볼 것이다. 그러다 지치면 그가 했듯, 넘실대는 푸른 바다를 돌아보면서.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친다"
- 이중섭 詩, "소의 말" 全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