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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이 있는 이야기 다섯번째 조선에 남은 것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은 일본이었다

#1895년 기억해야 할 우리의 시간

NO.1 스케이트와 콜레라

짙게 쌓인 눈길 위를 뛰어다니던 개들은 장대에서 떨어진 동학농민군의 머리를 찾아내어 물어뜯고 있었다.
저만치서 겁 없는 동네 조무래기들이 달려들어 개들을 쫒아 버리고는 길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 뒤통수가 사라진 머리의 입을 찾아 쑤셔 넣었다.
어둠이 내리도록 눈은 계속 내렸다.
을미년이다.
그해, 1895년 새해에는 수은주가 두 번이나 영하 25도 밑으로 내려갈 만큼 추웠다.
청일전쟁의 끝에 조선에 남은 좋지 않은 것들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은 일본이었다.
1월 5일 제물포에 내린 이사벨라는 제물포의 공기부터 6월에 떠날 때와 달라졌음을 느꼈다. 항상 들뜬 아이 같던 제물포는 어둠이 깊이 깔린 중국인 거리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활기로 넘쳐나는 일본인 거리로 갈라져 있었다. 황폐해진 중국인 거리와 달리 일본인 거리는 등짐을 지는 막일꾼들과 짐을 나르는 황소들로 지나 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서울까지 말을 타고 눈길을 가는 동안 이사벨라는 수도에 주둔한 대규모의 일본군 부대를 보았고, 일본군 장교들이 조선군을 훈련시키는 모습도 보았다. 성문을 지나 힐리어 총영사의 집으로 가는 길은 계속 내리는 눈발 사이로 일본인 측량기사들이 기찻길을 내기 위해 박아 놓은 말뚝들과 짐꾼들, 그리고 짐을 실은 황소들이 길 여기저기를 덮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1월 8일 이사벨라는 더 "특별한" 예식의 현장의 목격자가 되었다.
1894년 여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뒤로 "봉급 받는 인형"이라 불린 이름뿐인 왕은 이런저런 병을 핑계로 일본의 요구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일본이 원했던 '특별한 예식'을 진정 원하지 않았던 왕은 일본의 압박에 못 이겨 을미년을 일주일 넘기고는 궁 밖으로 밀려나왔다. 왕은 덕수궁의 문 앞에서 오랫동안 멈추어 섰다. 언덕 위에서 덕수궁을 내려다보던 흰옷을 입고 검은 갓을 쓴 백성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종묘사직으로 향하는 왕의 행차는 빛을 잃었다. 일본 경찰대를 거느린 "박영효"의 위엄만이 이름뿐인 왕을 더욱 초라해 보이게 했을 뿐이다.
고대로부터 이어진 일본의 끈질긴 한반도 침략은 900여 회에 이르러 결국 그들의 야욕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날 고종은 종묘사직 앞에서 청국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조선의 독립을 고했다. 원하지 않았던 서약서에 조인하고 원하지 않는 행렬과 예식을 치루어야 했다. 하늘조차 어두웠고 혹독한 칼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왕과 왕비와 백성들은 무력하기만 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한강은 꽁꽁 얼었다.
청일 전쟁으로 서울에 모여있던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은 왕과 왕비의 초대를 받았다. 스케이트를 타려면 한강까지 나가거나 논밭에서 탈 수밖에 없던 선교사들에게는 향원정의 고른 얼음과 외빈 접대 담당인 미스 손탁의 따뜻한 차와 다과는 심심한 겨울의 즐거움이었다. 남부에서 태어나 자라 스케이트를 타본 경험이 없었던 매티 테이트 선교사는 늘 스케이트를 배우고 싶어 했었다. 반면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레이놀즈 선교사는 대학의 스케이트 대표 선수 출신이었다. 레이놀즈 선교사의 지도에도 불구하고, 매티 테이트 선교사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얼음 위에는 하얀 별자리가 생겨났다. 매티는 스케이트를 배우려는 것을 포기하고 정자에서 쉬는 것을 선택했다. 왕은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날아다니는 외국인들을 바라보다가 누가 엉덩방아라도 찧으면 너무나도 즐거워했고, 왕비는 커튼 사이로 바라보았다.
무거운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는 꿈과 같은 시간이었다.
개혁의 이름 아래 일본은 점점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담배대의 길이까지 제한하는 일본의 치밀한 계획은 사람들의 숨통을 죄기 시작했다. 조선보다 서구 문물에 호의적이었던 일본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중립을 지키던 외국인 선교사들조차, 무력을 앞세워 궁궐을 점령하고, 왕실에 대한 모욕과 강압적인 행동들을 서슴지 않는 일본을 다시 보게 하고 있었다.
어느 시대에서나 똑같이 시간은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
조선에서 보낸 첫여름 첫아기를 잃었던 레이놀즈 선교사처럼 겨울을 지나는 사이에 전킨도 18개월 만에 첫 아이 조지를 보내야 했다. 무심한 시간처럼 모두들 상처를 뒤로 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레이놀즈와 테이트는 동학으로 급히 떠나 왔던 전주로 향했다. 도성 안팎의 마을들은 관군과 동학농민군의 싸움으로 불타 버렸고, 전란으로 잡힌 사람들은 여전히 장터에서 공개 처형되고 있었다. 두 선교사는 새로 집을 짓고 다시 시작할 준비를 했다. 전킨과 드루 선교사는 군산을 살피고 돌아왔고, 전킨의 서소문 집에서 시작된 사역은 드루의 환자 진료와 매티 테이트의 여인들을 위한 별도의 예배를 시작되면서 공동체로 발전하고 있었다. 조금씩 사람들이 모이고 변화가 서서히 일고 있었다. 새로운 선교사들이 속속 도착하고, 전란이 지나간 자리를 수습하기 위해 모두 애를 썼다.
모든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해 여름 또다시 콜레라가 돌기 시작했다. 에비슨과 언더우드, 전킨과 드루 등 모든 의사들이 콜레라 환자를 격리하고 진료소에서 환자들을 치료했다. 콜레라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과일이나 날 채소를 먹는 것을 금하는 금지령이 내려졌고, 이런 음식을 사거나 파는 사람은 엄벌에 처한다는 포고문이 붙었다. 하지만 포고문 앞에서는 좌판이 벌어졌고, 단속을 해야 할 순검은 뻔뻔스럽게 서서 먹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콜레라를 막기 위해 2만원(만달러 정도)을 기부했으나 사라져 버렸다. 언더우드 부인의 회고록을 인용하면 "그 돈을 탐욕스런 아랫것들이 먹어치웠다"고 했다. 검역관과, 의사 간호사들은 조선의 국기(박영효가 1882년에 고안한 태극기를 1883년에 정식으로 국기로 채택했다) 위에 적십자가 그려진 배지를 달았다. 언더우드는 젊은 기독교인 몇 사람을 훈련시키고, 병이 퍼진 마을을 찾아내고 마을 사람들에게 소독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기독교 병원에 가면 살 수 있다는 선전문을 붙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콜레라를 "쥐병"이라고 불렀는데, 콜레라에 걸리면 쥐가 다리 안쪽을 콕콕 깨물며 기어 다니다가 가슴까지 올라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고양이 그림을 걸어놓기도 하고, 고양이 가죽으로 쥐가 난 곳을 문지르기도 했다. 온갖 부적과 제물이 난무했다.
한참 콜레라가 기승을 부리던 8월 초에는 하루에 300명 이상이 송장이 되어 실려 나갔다.
콜레라의 맹렬한 기세가 주춤하고 사망자 수가 줄어들 무렵, (기록에는 8월 22일이다)
조선의 외무대신이었던 김윤식은 미국 공사였던 실에게 감사편지를 보냈고, 병원에서 일했던 선교사들은 많은 선물을 받았다. 바로 내부대신의 이름과 받는 사람의 이름이 쓰인 비단 두루마기, 부채, 은제 잉크 스탠드 등이었으며, 왕골로 짠 강화의 화문석이었다(전킨 선교사의 후손은 이때 받은 은제 스탠드를 가보로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진료소와 검역소에서 간호를 한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생각지도 않았던 거액의 보수를 받았지만,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놀랍게도 받은 보수를 교회를 짓는 기금으로 내놓았다.

선교사들에게 가장 기뻤던 일은

조선 사람들이 선교사들을 자신들의 친구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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