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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천국"이었던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여행의 의미-순례 NO.1

여행은 갑작스러울수록 즐겁다.
아침에 출발을 결정하고 숙소를 알아보고 짐을 챙겼다. 아이들은 하루 결석하는 것으로 신이 났고, 이리저리 갈 곳을 찾을 필요가 없어 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는 여수에 있는 애양원에 가서 자료조사를 해야 한다는 한 가지의 확실한 목적이 있었다. 아마 나는 여행이란 기분이 덜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도 작업도 잘 안돼서 쫓기는 마당에 이틀을 빼먹는다는 건 조금 나를 불안하게 했기 때문이다.
올 여름에 다닌 짧은 여행들은 늘 목적이 있었다. 선교사들의 자취가 남은 곳과 기념관이나 사택, 교회를 다녀오고 사진을 찍고 시간 순으로 정리해야 한다는 목표 때문에 여름 내내 다닌 여행은 늘 빠듯한 스케줄로 한 번에 최대한 많은 곳을 다녔었다. 목표가 있는 여행은 자칫 행군이 되고 여행의 여유를 잊게 만들며, 같이 다니는 아이들은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배웠다. 반면에 목적이 있는 여행의 또 다른 좋은 점은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해 준 다는 것이다. 선교사분들의 지나간 삶을 보면서 그 작은 몸짓들이, 사랑방에서 시작한 작은 교실이, 지금의 대학교가 되고 학교 법인이 되어 셀 수 없이 많은 배움을 낳았으며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 "나비효과"라는 영화를 보았다. 주인공의 작은 선택들의 결과에 따라 삶의 방향이 바귀고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기도, 나쁜 결과를 만들기도 했다.
영화를 보고 즐거움을 얻었다면, 목적이 있는 여행에서는 '선한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여수로 가는 길에 처음으로 든 생각은 늘 타고 다니는 차였다. 우린 우리가 누리는 것 들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차를 타고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스마트폰을 들고 어디에서나 원할 때, 전화를 할 수 있다. 우리가 늘 그런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90년대만 해도 삐삐를 쓰던 시절이 있었고, 초등학생 시절만 해도 당연히 우표를 붙여 편지를 보냈다. 그 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딱 130년만 거슬러 올라가면 아무것도 없던 시절이 있다. 아니 90년만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지금 차를 타고 달리는 이 길 위를 어둠을 타고 걸어가던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가고 있는 애양원은 광주 봉선동에 있던 광주 나병원이 옮겨간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라 불리던 포사이트 선교사가 오웬 선교사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광주로 오는 길에 한센병에 걸인 여인을 만났다. 가족도 버린 한센병 여인을 포사이트 선교사는 자신의 말에 태워 광주로 왔다. 포사이트 선교사가 한센병 여인을 부축하고 말에서 내리는 모습을 본 최흥종 목사(이때는 목사가 아니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주님 같은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는 깊은 감화를 받고 한센병 환자들을 돕게 되고 후일 목사가 되었다. 하지만 포사이트 선교사가 광주에 왔을 때는 이미 오웬 선교사가 숨을 거둔 뒤였다. 포사이트 선교사가 데려온 여인은 처음에 닥터 윌슨의 진료소에 머물렀지만 환자들의 거센 항의로 사용되지 않는 벽돌 가마에 옮겨졌다. 그녀는 결국 회복되지 못하고 죽었다.
오웬 선교사는 구하지 못했지만 이 한센병 여인이 시작이 되어, 광주의 의료 선교사였던 윌슨과 선교부는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이 작은 움직임은 광주에 나병원을 만들었고 애양원까지 이어졌다.
고속도로를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길을 걸어서 갔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길도 아닌 곳으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피해 어두울 때만 길을 갔고, 한센병 환자들이었다. 지금처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음식을 사 먹을 수도 없었을 것이고, 가로등도 없고, 길도 포장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며, 손에 가진 것 하나 없이 낮에는 길에서 떨어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쉬어야 했다. 게다가 처음으로 나환자들을 더럽다 하지 않고 사람으로 대해 주었던 포사이트 선교사의 죽음을 기린 비석까지 메고 걸어갔다. 가진 것 없는 환자들의 몸으로 정말 힘겨운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광주에서 지금의 여수 율촌면 신풍리로 이주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기록이 남아 있다. 그 힘겨움이 얼마만큼 이었을 지 우리는 알 수 있을까?
신풍리로의 이주는 점점 모여드는 한센병 환자들과 한 곳에 살수 없다는 주민들의 항의로 시작되어, 일제의 "선의"라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의도로 마무리되었다. 내가 그때의 사람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나는 다를 수 있었을까?
여수 시내에서 저녁을 먹고 야경을 보았다.
여수의 야경은 언제나 아름답다. 부산과는 다른 느낌이다.
왠지 아늑하고 따듯하다. 밤바다도 그렇다.
나에게 여수 밤바다는 늘 따뜻함이었고 아늑함이었다. 그들에게도 그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시내에서 나와 한참을 외곽으로 달렸고, 공항 담벼락을 따라 어두운 길을 지나 숙소로 예약한 애양원에 있는 치유의 숲으로 도착했다. 토플 선교사의 이름을 따라 지은 토플하우스에서 열쇠를 받아 방갈로처럼 따로 떨어져 있는 숙소에 가서 짐을 풀었다. 생각보다 예쁘고 깨끗한 숙소에서 하룻밤을 편안하게 보냈다.
밤에 도착해서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이 아침이 되자 보였다. 예전의 병사 중 잘 보전되어 온 15개의 병사를 개조한 치유의 숲은 휴양림의 펜션같이 보였지만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외진 곳으로 걸어서 이주해 와야 했고, 그저 피난처를 얻은 것만으로도 살아갈 소망을 얻었던 사람들에게 이 곳은 세상 전부였을 것이기에 나에게는 그저 방갈로가 아니라 다르게 느껴졌다.
애양원 역사 박물관과 성산교회로 걸어가는 산책로 사이로 물이 빠진 갯벌이 보였다.
푸르른 이슬로 촉촉해진 우거진 풀과 나무들 사이로 민들레들이 한가득 날아갈 준비를 마치고 있고, 아침 햇살은 너무도 따뜻했다. 따뜻한 아침, 박물관 올라가는 길은 빛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박물관은 새로 지어진 한센인 기념관과 애양원역사박물관 두 군데였다.
그동안 책에서 보아 오던 것들과 남아있는 자료들을 보았다.
천형이라 불리는 한센병을 앓았던 사람들의 고통이 보였다.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아무 데도 있을 곳이 없었던, 구걸조차 힘들었던 길에서 떠돌아야 했던 그들의 삶에서 유일한 희망이 되어줬던 선교사들의 몸짓을 보았다.
병원 문 앞에서 별과 달과 함께 지내며 병원에 들어가게 될 날만을 기다리던 한센병 환자들에게는 애양원이 천국이었고, 애양원의 문은 천국의 문이었다.
애양원의 초대 원장이고 광주 나병원의 원장이었던 윌슨 선교사는 외국에서 방문객이 오면 일부러 병원 문 앞을 지나고 병원 안의 환자들을 만나게 했다. 문 앞에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들의 처참한 모습과 안에 있는 환자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 어느 누구라도 돕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적은 예산으로 더 많은 환자들을 받고 자립하기 위해 밭을 만들고 스스로 먹을 채소를 키우고 돼지와 토끼를 키웠다. 한 가지 변칙적인 방법은 혹자는 안 좋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환차익이었다. 당시 중국에 있는 미국 은행들은 시장거래율로 중국 돈을 환전해 주었고, 같은 어음이라도 북경으로 가서 환전을 해오면 두세 배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병원의 재정을 확보하고 더 많은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었고,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될 때까지도 애양원이 운영될 수 있었다고 탈마지 선교사는 기록했다. 윌슨 선교사는 1908년에 조선에 와서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다가 광복 후에 다시 돌아와 소록도와 애양원의 환자들을 돌보았고, 그의 나이 68 세일 때 고향에 돌아갔다.

누군가에게 "천국"이었던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로버트 맨튼 윌슨과 여러 선교사들이 함께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보았고,
버림받았던 사람들이 살아낸 시간과 버텨낸 힘을 보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음이 몹시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한 소녀가 문밖에 서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너무나 어린 나이였는데
그 작은 문둥 소녀는 홀로 내버려져 있었습니다.
나는 병원 수위를 찾아 그다지 많지 않은 돈을 치러주었습니다.
액수는 너무 적었지만 그 아이에겐 천국을 선물한 돈이었습니다.
나에게는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문을 지나 들어가면서 그 소녀는 내게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그 조그마한 소녀가
나에게 천국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습니다.
-아더 한센-
<여수 여행 정보>
여수 여행정보 사이트 주소입니다.
여수를 여러 번 갔었는데, 숙소가 굉장히 많습니다. 한옥 민박도 있고, 디오션 리조트같이 워터파크가 있는 곳도 있습니다. 게스트하우스도 혼자 가신다면 추천합니다. 제가 가본 곳은 "터틀빈"입니다. 다시 게스트하우스를 간다면? 갈 것 같습니다.
여수의 유명 맛집은 블로그들에 많이 올려져 있습니다. 만두집은 생각보다 맛있었고요. 유명한 로타리 식당도 게가 싱싱해서 맛있었습니다. 양이 많으니 참고하시고, 지나치게 깔끔한 여성분들은 안 좋아하실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블로그들에 올려진 간장게장 집도 맛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행의 즐거움은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것도 저는 좋은 듯합니다.
+빅오쇼 061-659-2046
빅오쇼는 소셜에서 미리 예매하시면 조금 저렴하지만, 당일 구입한 것은 다음날 사용이 가능하니 미리 예매하셔야 합니다. 빅오쇼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저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았고, 갑자기 가서 예매를 못해서 스카이타워와 엑스포 공원에서 보았습니다. 멀리서 보는 것도 저는 나쁘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서운해했습니다. 표를 구입하고 정면에서 보아야 문어랑.. 쇼가 다 보입니다.
+여수 스카이타워
전라남도 여수시 박람회길 1
061- 659 -2064
엑스포 공원 안에 있는 스카이 타워는 입장료만 내면 입장할 수 있습니다. 20층 높이의 전망대라서 여수의 야경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빅오쇼와 시간을 맞추어 가시면 빅오쇼를 내려다 보실 수 있고, 꼭 음료를 주문하지 않아도 나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른은 입장료 2,000원이고 아이들은 1,000이었습니다.
주의하실 점은 스카이타워 입구에서 현찰로 주차 요금을 2,000원 받는 것과, 스카이타워는 오후 8:00까지라서 7:50분이 되면 내려와야 합니다. 저희는 스카이타워에서 빅오쇼를 50분까지 보고, 공원을 걸으며 남은 빅오쇼를 멀리서 보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 운영시간 : 주중 10:00~20:00(입장 마감 19:30)
주말 09:00~22:00(입장 마감 21:30)
※ 매주 월요일은 연주 없음
※ 현장 매표만 가능
+애양원역사박물관과 한센 기념관
전남 여수시 율촌면 산돌길 31(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도성길 30-15 )
061-682-9808~9
○ 운영시간 : 09:00~18:00
휴관일은 공휴일과 월요일입니다.
+애양원 펜션 치유의 숲
전남 여수시 율촌면 산돌길 31
010-3621-0865
숙소는 치유의 숲과 토플하우스 두 가지입니다. 치유의 숲은 방갈로 형식의 독채입니다. 공동 취사장은 따로 있습니다. 드라이기는 없으니까 필요하신 분은 가져가셔야 합니다. 토플하우스의 숙소는 독채가 아닙니다.
근처에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이 있어 같이 관람하시면 좋습니다.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
여수시 율촌면 산돌길 148
061-682-9534
○ 운영시간 : 월~토 : 09:3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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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실수는?
미국의 38대 부통령을 지낸 휴버트 험프리는 오로지 인생을 정치계에서 보냈습니다. 그의 정치 인생은 국민들의 존엄성과 인류애를 존중했다고 평가받습니다. 험프리는 16년이라는 세월 동안 상원의원으로 선출되며 정치계를 누볐고 쾌활하고 옹호적인 태도는 그를 존경받는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 그는 많은 이들의 추천을 받아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재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권위자인 ‘대통령’직에는 도전하지만, 리처드 닉슨에게 패하며 쓴맛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상원의원으로 복귀하며 정치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 말년에 말기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험프리는 정치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병상에 눕기까지 열심을 다해 국민들을 위해 일하였습니다. ​ 그는 병상에서 세계적인 월간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기고한 글 가운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 “인간의 최대 실수는 포기하는 것입니다. 역경이란 하나의 경험이고 결코 종말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 번의 선거를 치렀는데 내 임기가 끝날 때 한 번도 고별 연설은 해본 일이 없습니다. 다만 나는 새로운 선거전을 위한 선언문을 고별식 때 낭독하곤 했습니다.” 미국의 폴 스톨츠 박사는 역경에 대처하는 세 가지 타입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포기하는 사람’ ‘안주하는 사람’ ‘정복하는 사람’ ​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포기를 쉽게 하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한 순간 이미 스스로가 그것을 단점이라고 인지한 것입니다. ​ 그럼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해보세요. 그렇게 ‘최선’을 다한 후, 돌아본 모습이 진정한 ‘당신 모습’입니다. ​ ​ # 오늘의 명언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내가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다. – 데일 카네기 – ​ =Naver "따뜻한 하루"에서 이식해옴.... #역경#포기#극복#최선#인생#삶#명언#영감을주는이야기#교훈#따뜻한하루
너넨 사실 현대미술을 좋아한다
예전에 현대미술이 사기냐 아니냐 이런 얘기로 글을 썼는데 열심히 썼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새끼들이 추상화 조또 예쁘지도 않은데 미술로서 가치가 있냐 없냐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 내가 봐도 추상화나 미니멀리즘 계열 미술이 보기에 안예쁜건 맞음 근데 우리는 이미 추상, 미니멀 계열의 미술이 예쁜걸 알고 있음 심지어 니들도 그게 이쁘다고 생각함 이게 뭔소리냐고? 원래 미술이라는건 동시대 디자인과도 연관이 밀접한데 니들이 극혐하는 추상화 미니멀리즘 아트들이 디자인에 영향을 줘서 추상 디자인, 미니멀리즘 디자인이 나오게 됐고 너네들은 그 추상 디자인을 좋아한다는 말임 그리고 요즘 디자인은 어지간하면 다 추상주의, 미니멀리즘 디자인이라서 이 글을 읽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눈에는 이미 추상미술의 미적 기준이 알게 모르게 굉장히 익숙해져 있다는게 조난 중요한거다 일단 추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디자인 제품들을 볼까 이 의자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들까? 뭐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현대적이다, 깔끔하다, 세련됐다 이런 생각을 대부분 하지 않을까? 바로 이게 추상미술, 너네들이 비아냥대는 현대미술의 영향을 직빵으로 받은 디자인임 형태적으로 군더더기가 없이 딱 필요한 형태만을 하고 있고 나머지 조형요소가 싹 빠지고 배색도 다양하지 않고 깔끔하게 흰색 혹은 검은색으로 배치 너네가 극혐하는 화면에 줄 하나 그어놓고 10억짜리 그림들 특징이 조형요소를 뺄 수 있을만큼 다 빼버려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라는걸 보여준다는건데 위 의자 디자인이 그 맥락이라 볼 수 있음 참고로 점하나 찍고 10억짜리 그림들이 나오기 전까지 저런식의 디자인은 상상할 수도 없었고 누가 만들었다면 걍 좆병신 취급 받았을거다 왜냐면 그 이전 디자인은 이랬기 때문임 이게 로코코 스타일 디자인인데 추상표현이 등장하기 전 디자인이 다 이랬다 이때 당시의 '좋은 디자인' 이라 하면 저렇게 장식적인 요소가 덕지덕지 붙은거였다 그래서 막 의자다리도 사자 발 같은거로 장식해서 깎고 암튼 최대한 저런식으로 만들었음 그야말로 지금에 와서 보면 필요없는 조형요소가 많이 껴있는 상태인데 그게 추상표현이 대중화되면서 바뀌면서 필요 없어보이는 장식적 요소를 뺼 수 있을만큼 최대한 빼버리는 양식이 유행하게 되고 그게 계속 지금까지 내려와서 이런 세련되고 엣지있는 디자인이 완성된다 지금이야 사람들이 이런 의자를 보고 사고 싶다 어쩌구 하지만 로코코 시대 사람들이 봤을땐 이건 뭐 시발 저게 의자냐 싶을거다 참고로 로코코 시대의 그림은 이랬다 이랬는데 여하튼간 미술이라는게 항상 디자인에 영향을 주는거다보니까 이렇게 화려하고 장식적인 그림 양식이 등장하자 디자인도 이렇게 가게 된거임 그래서 로코코 스타일의 디자인은 이랬다는거임 아래 사진은 인테리어 디자인 사진인데 님들 저런 집에서 살 수 있음? 나는 눈이 아파가지고 저런 집에서 3일도 못 살거 같음 이게 님들이 극혐하는 몬드리안인데 여기서부터 디자인이 많이 변하게 되는거다 이게 몬드리안의 스튜디오였다는데 참고로 이 사람이 1872년에 태어났다는걸 생각해보자 지금봐도 조낸 세련됐는데 1900년대 초에는 어떘겠나 그렇게 추상표현주의도 발전을 하면서 그것에 영향을 받는 디자인들도 계속 발전하게 되고 그래서 이런 세련된 디자인들이 속속들이 출현하게 되는거다 이 글을 보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런 집에서 살고 싶지 않을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인테리어일 것이다 우리 눈이 이런 추상적인 미를 선호한다는거다 이 점에 있어서 점하나 찍고 10억인 미술이 중요하다는거임 니들은 존나 병신 같다고 욕하지만 사실 니들 미적기준도 바꿔놓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던거다 옛날 같앴으면 막 금박 입히고 천장에는 그림이 그려져있고 막 그래야 아름다운거였는데 지금은 저런 매끈한 디자인이 먹히니까 그래서 니들이 욕하는 점하나 찍고 10억짜리 미술이 가치가 있다는거다 그림을 잘그려서 10억이 아니라 새로운 미적기준을 제시했다는거다 우리가 저런 쌔하얀 디자인을 좋아한다는건 그 미적기준을 인정했다는거고 그래서 그 그림들이 10억짜리인거다 마치 이론물리학에서 이론이 튀어나오면 공학은 그걸 응용해서 물건을 만들듯 미술이 미적기준을 제시하면 디자인이 그 미적기준으로 물건을 만든거다 그리고 니들이 저런 엣지있는 디자인을 좋아하니까 그 점하나 찍고 10억 그림들은 성공한 그림인 셈임 몬드리안보다 사람들이 더 극혐하는 미니멀리즘 근데 이거도 디자인으로 환원되면 요렇게 됨 나는 이런 집에서 살면 존나 평온하니 좋을거 같다 아마 요즘 사람들에게 저런 집 공짜로 준다고 하면 100이면 100이 다 여기서 살고 싶다 하지 않을까 싶음 이게 근대식 천장 인테리어인데 물론 멋진데 집을 저런식으로 인테리어 했다면 난 못살거 같다 뭐 박물관이 저렇다면야 이해를 하겠지만 집은 노노해 우리 미적 기준에서 이런 스타일이 이미 구닥다리라서 그렇다 요즘 까페에서 많이 하는 식의 인테리어인데 구성요소가 빠져서 천장도 프레임만 띡 하고 남아있고 벽도 벽지 없이 걍 벽돌인 상태로 남겨두는 미니멀한 디자인이 돋보인다 옛날 같앴으면 상상도 못할 방식의 인테리어인데 지금 사람들은 이런 인테리어가 분위기 있다고 좋아하자늠 이거도 다 점하나 찍고 10억 받아먹는 현대미술의 공임 출처 https://m.blog.naver.com/vpaula/220697512564
[토박이말 살리기]-살얼음 살얼음길
[토박이말 살리기]-살얼음 살얼음길 지난 이렛날(7일)이 눈이 많이 내린다는 한눈(대설)이었습니다만 제가 있는 곳에서는 눈은커녕 한낮에는 봄 날씨라고 해도 될 만큼 포근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높은 고장에는 올해에도 몇 차례 눈이 내렸다고 하지요. 날씨가 추운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듣는 기별이 있습니다. 지난 이레에도 다른 고장에서 이것 때문에 수레가 부서지고 사람도 다쳤다는 기별을 봤습니다. 그 기별 속에 나온 말은 다름 아닌 ‘블랙 아이스’였습니다. 우리가 신문이나 방송에서 자주 보고 듣기 때문에 수레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낯익은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블랙 아이스’라는 말이 우리말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말은 ‘검다’는 뜻의 영어 ‘black’에 ‘얼음’이라는 뜻의 ‘ice’를 더한 말입니다. 이 말을 우리말로 곧바로 뒤쳐 직역하면 ‘검은 얼음’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블랙 아이스’를 ‘검은 얼음’으로 뒤쳐 쓰자는 사람도 없고 그렇게 말하면 좋다고 할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 말과 비슷한 토박이말이 있으니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을 좀 해 보자는 것입니다. ‘블랙 아이스’를 흔히 ‘겨울철 비가 온 뒤 빗물이나 녹은 눈이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면서 길 위에 얇게 얼어붙은 현상’이라고 풀이하곤 합니다. 한마디로 ‘얇게 살짝 언 얼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얇게 살짝 언 얼음’을 가리키는 토박이말이 바로 ‘살얼음’입니다. 말집 사전에도 2014년 5월 7일 열린 국립국어원 말다듬기위원회 회의에서 ‘블랙 아이스’를 ‘노면살얼음’ 또는 ‘살얼음’으로 다듬었다는 풀이가 나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제까지 모르고 있을까요? 저는 신문, 방송에서 이 말을 써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드려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블랙 아이스’라는 말이 익어서 어렵게 느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는 ‘살얼음’과 ‘블랙 아이스’라는 말이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도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살얼음길’을 썼으면 합니다. 길 위에 살얼음이 얼어 있으니 말입니다. 알고 있던 말을 바탕으로 새로운 말을 만드는 일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오늘날 우리가 하지 않을 수 없는 일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이렇게 들온말을 그대로 쓰는 때가 많고 새로운 말을 만드는 데 힘을 쓰지 않다 보니 우리 토박이말이 갈수록 더 설 자리를 잃고 우리 삶과 멀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범칙금을 매기고 그런 사람들을 좋지 않게 보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서 갈수록 교통법규를 어기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처럼 우리말이 있는데도 우리말을 쓰지 않는 사람들을 좋지 않게 보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고 하면 훨씬 좋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토박이말을 넉넉하게 가르치고 배우며 널리 알려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알고 쓰게 되면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질 날도 언젠가는 올 거라 믿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함께 힘과 슬기를 모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오늘도 토박이말에 마음을 써 봐 주시고 좋아해 주시며 둘레 사람들에게 나눠 주시는 여러분 모두 고맙습니다. 4354해 온겨울달 여드레 삿날(2021년 12월 8일 수요일) 바람 바람 #토박이말바라기 #이창수 #토박이말 #살리기 #블랙아이스 #살얼음 #살얼음길 #숫우리말 #순우리말 #고유어 *이 글은 경남일보에도 보냈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위해 필요한 것
태아는 어머니의 배 속에서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시간을 보내면서 춥지도 뜨겁지도 않은 알맞은 온도에서 포근히 떠 있습니다. 게다가 먹을 것도 걱정 없습니다. 어머니의 탯줄을 통하여 알맞게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태아는 아마도 그곳에서 오래오래 살기를 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연의 순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열 달이 채워지고 태아는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 드디어 그 시간이 찾아오고, 태아는 죽을 각오를 하고 온 힘을 다해 어둠의 터널을 지납니다. ​ 그렇게 모든 것이 낯선 세상 밖으로 나왔는데 이번에는 또다시 유일한 영양공급원이던 탯줄마저 끊겨버립니다. ​ 뱃속에서 누리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뒤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더 넓고,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 이 구절은 새로운 변화를 원한다면 스스로 안락하게 만들어 놓은 생각과 고집을 깨트려야 함을 말합니다. ​ ​ # 오늘의 명언 자신에게 물어보라. 난 지금 무엇을 변화시킬 준비가 되었는가를. – 잭 캔필드 – ​ =Naver "따뜻한 하루"에서 이식해옴....... ​ ​ #변화#인생#삶#명언#영감을주는이야기#교훈#따뜻한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