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imanistars
10,000+ Views

하란사 그리고 김활란 조선의 처음 여성 이야기 NO.1

++이 글은 예전에 빙글에 올렸던 글을 수정하여 다시 올린 것 입니다.++
이름 조차 가질 수 없었던 조선의 여인들이 규방을 나와 스스로를 찾기 시작했던 그때,
처음으로 한국 여성 최초의 문학사(B.A) 학위를 받으면서 미국 오하이오의 웨슬리언(Wesleyan) 대학을 졸업한 "하란사"란 여인이 있었다. 하란사는 한국 여성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었고, 조선의 엘리트 국비 유학생들과 함께 게이오 의숙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한국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진 그녀는 당시의 금수저라 할 수 있는 친일파의 자녀도 아니었고, 오히려 어린 나이에 하상기의 후처로 들어가서 '하씨 부인'이라 불리던 기혼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의 인생을 바꾸었다. 누군가의 아내인 '하씨 부인'의 삶을 벗어나 스스로의 가능성을 향해 용감하게 도전했다. 그녀가 한 첫 번째 일은 이화학당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출발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이화학당이 여성을 위한 신교육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하란사가 입학을 신청했지만 기혼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입학을 거절당했다. 하란사는 학교의 거절에 포기하지 않았고, 어느 날 밤 학당장이었던 룰루 프라이(1868-1921)를 찾아갔다.(당시 조선의 여인들은, 특히 양반가의 여인들은 새벽과 밤늦게만 외출할 수 있었다)
또다시 몇 차례의 거절 끝에 하란사는 갑자기 하인이 들고 있던 불을 불어 꺼버렸다.
"나의 인생이 이렇게 캄캄한 어둠 속에 있습니다. 나에게 밝은 학문의 빛을 열어주시겠습니까?"
라고 간곡하게 청했다.
결국 프라이 교장은 그녀의 입학을 허가했고, 하란사는 1894년을 전후로 1년여간 이화학당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양반 여성들도 이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기에 하씨 부인으로 불렸던 그녀는 공부하는 동안 신앙을 갖게 되었고, 낸시(Nancy)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그리고 이를 한자로 바꿔 란사(蘭史)라 했다.
하란사는 이화학당 재학 중에 딸을 낳았는데, 남편의 전처의 아들 하구룡의 아내인, 즉 며느리에게 아기를 맡기고 학업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인 하상기는 저녁 시간이 지나면 하녀에게 마님의 진지를 가져다 드리라 하여 하녀가 소반에 식사를 담아 학교까지 날라다 주었을 정도로 지극 정성이었다. 하상기의 정성 어린 외조는 이화학당의 졸업 후 하란사가 일본으로 유학을 갈 수 있도록 도왔고, 일본에서의 공부를 마친 후 1900년 미국 웨슬리안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했다. 하란사와 하상기는 일반 평민이나 천민보다 훨씬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기에 박에스더나 오긍선과는 다르게 자비로 유학을 갈 수 있었지만, 남아있는 자료들로 볼 때 어렵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씨 부인이 룰루 프라이 교장을 찾아갔던 그 밤 이후로 10여 년이 지난 1906년, 하란사는 한국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귀국 후 궁중에 자주 드나들며 엄비(고종의 비 순헌황귀비)에게 “사숙을 폐지하고 근대적인 학교를 많이 세워야 한다”권하였고, 엄비가 숙명여학교와 진명여학교를 창설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녀는 메리 스크랜튼 여선교사와 함께 달성이궁(達城離宮)에 거주하며 상동 예배당에서 여성들에게 영어와 성경을 가르쳤다. 또 학생들의 어머니들로 자모회를 구성하고 가정의학을 가르치는 등 여성의 계몽을 위해 노력했다. 이 학교는 전도부인을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후에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가 되었다가 남자 협성 신학교와 합동하여 오늘의 <감리교 신학대학>이 되었다.
앨벗슨 교장은 '학생들이 하란사와 열네 차례 시골로 나가 전도행사를 가졌고, 9개의 교회를 돌며 예배를 드렸고 1,426회 가정방문을 했다'고 기록했다. 그녀는 단순한 교사로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거리에 나가 전도하는 전도자였다. 그 후 이화학당의 기숙사 사감으로 부임한 하란사는 호랑이 사감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학생들의 건강을 늘 걱정하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화 학생의 자치모임인 이문회도 이끌었는데 바로 "유관순 열사"가 이문회 출신이었다.
1910년 이화학당에 대학부가 생긴 뒤, 1911년에는 최초의 한국인 교수로 부임하여 영어와 성경을 가르쳤으나, 1915년 이화 고등 보통학교 졸업반이었던 딸 자옥을 갑자기 잃게 되었다. 유일한 딸을 잃고 슬픔에 빠졌던 하란사는 한국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로 이듬해 미국 감리교회 총회에 참석하면서 미주지역 순회강연을 하고 모금한 돈으로 1918년 정동 제일교회에 우리나라 최초의 파이프 오르갠을 기증하기도 했다.
그후 하란사는 미국을 오가며 조선의 처지를 미국 등 각 나라와 각계에 알리는 등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썼다. 고종과 엄비는 하란사에게 궁중의 예물을 군자금으로 쓰라고 내어 줄 정도로 그녀를 신임했다.
그리고 1919년 고종은 파리 강화회담에 한일의정서 등 굴욕적인 외교문서를 보내 일제의 만행과 조선의 상황을 알리려는 계획을 세우고, 의친왕과 친분이 있던 하란사를 불러 밀지를 전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고종이 승하면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하란사는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만찬장에서 먹은 음식이 잘못되어 쓰러지자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바로 숨을 거두게 된다. 장례식에 참석하고 온 선교사 벡커(A.L.Becker)는 그녀의 시체가 검게 변해 있다고 기록했다. 이로 인해 스파이였던 배정자가 일본의 사주를 받아 하란사를 독살하였다는 등의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타국에서 죽은 힘없는 나라 조선의 여인 "하란사"의 죽음을 밝혀 줄 사람은 없었고, 소문만 남았다.
갑작스러운 고종의 죽음은 많은 의심을 남겼고, 후에 이어진 하란사의 갑작스러운 죽음 또한 의문을 남겼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인 1995년 하란사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 되지만,
슬프게도 받을 가족이 없었다.
고종의 승하에 이은 하란사의 의문스러운 죽음,
받을 유족이 없는 훈장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김활란의 동상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며,
김활란을 기념해 헬렌관이라 명명한 이름은 정말 얼굴을 들 수 없게 한다.
하란사와 김활란!!
너무나 비교되는 삶을 산 이 두 여성은 역사에 남아있지만, 우리는 하란사라는 사람을 잘 모른다.
어떤 사람은 기생 출신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평양 출신이라고도 하는 기록의 진위도 가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하란사"에 대해 잘 모른다.그렇지만 우리는 김활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2015년에도 이화여대에 있는 김활란의 동상에 포스트 잇을 붙이는 플래시몹이 있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사진출처:연합뉴스)
"학생인 K씨가 '김활란 동상 철거 요구 포스트잇 붙이기'라는 익명의 글을 올렸고, 300여 명의 학생들이 철거를 요구하는 포스트 잇을 붙였다. 이 포스트 잇은 저녁 6시경 "제거"되었다."
고 한다.
2015년은 광복 70주년이었다.
광복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정부는 임시공휴일까지 지정했다.
우리는 늘 일본에 사과를 요구해왔으나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김활란이
신여성으로서
친일과 항일의 경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여자의 몸으로 살아내기 어려운 시대였다고 이해하려고 해도
"우리나라 최초"의 고등교육을 받은,
배운 여성으로서,
가르치는 자로서

한 어머니로서

어린 학생들을 학도병으로,

같은 여자로서

많은 조선 여성들을

종군위안부로 내보내는 것을 독려한 김활란을

우리는 동상까지 세워 추모하고 있다.
우리는 정말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리가 김활란의 업적을 동상까지 세워 추모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일본의 사과를 요구할 수 있을까?
생명 없는 쇳덩어리 하나 철거하지 못하는 우리는 정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인가?
우리는 피로 얼룩진 우리의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걸까?
우리가 어떻게 위안부 할머니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2015년처럼 광복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임시공휴일을 지정할 것이 아니라

"경술국치"를 우리는 반드시 기억하고 잊지 않고 전해야 한다.

또다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의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
++친일파 김활란의 친일행적
++경술 국치일 :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영구히 가진다"를 첫 번째로 한 한일병합조약을 발표합니다. 나라를 잃은 치욕을 겪은 그 날 '경술국치' 이후, 조선은 멸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민족의 치욕이지만 절대로 잊지 않아야 하는 날이 바로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입니다
+++이 글은 하란사에 대해 "김성은"님이 발표한 <신여성 하란사의 해외유학과 사회활동>이라는 논문을 기준으로 연도를 기록했습니다.
++하란사와 유관순 열사 등 자료를 볼 수 있는 곳
1) 국립여성사전시관 : 동작구 대방동 345-1 서울여성프라자 2층 (1호선 대방역 3번 출구)
2)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 서울 중구 정동길 76
2 Comments
Suggested
Recent
김활란 친일파로 승승장구 하셨네요
원조국썅이라죠?큭~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회개에 대한 개신교적 교리.banbak
"예수를 믿고 회개하면 천국간다." 아주 간단한 명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이 명제만큼 어려운 명제도 없으며, 이 단순한 명제를 연구하는데 평생을 바쳐온 신학자들이 몇인지는 샐 수 조차 없을 것이다 단순한 명제에는 그에 따르는 수많은 대전제가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하나를 산다고 가정해보자. "삼각김밥 하나에 1000원입니다."라는 단순한 명제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도 수많은 대전제가 있다 '삼각김밥'이라는 물질적 개념 '하나'라는 수치적 개념 '1000원'이라는 경재적 개념 등 심지어 거래라는 방법적 개념까지 너무나 많은 대전제가 서로 합의를 이루어야만 이 단순한 명제는 효력을 얻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예수를 믿고 회개하면 천국에 간다."를 생각해보자 이 명제는 예수, 믿음, 회개, 천국이라는 개념이 대전재가 되어야만 성립이 된다 기본적인 대전제인만큼 기본적인 개신교적 개념으로만 살펴본다면, 예수는 곧 신 그 자체이며 믿음은 인간의 의지가 아닌 신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고 회개는 믿음에 대한 신자의 결과적 행위이며 천국은 신자가 신과 함께 할 수 있는 신의 나라이다 즉, 이 대전제를 가져와 명제를 보충해보면 이러하다 "예수라는 신을 신적 의지에 의해 인간이 믿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밖에 없게 되며 회개한 신자는 죄로부터 자유한 신의 나라에 입성한다." 풀어쓴 명제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위 사람들의 고백은 이상해진다 회개란 믿음으로부터 발산하는 결과적 행위인데 죄를 즐기는 행위는 예수를 믿는 신자의 행위일 수 없다 다시 말해, 죄를 즐기는 자는 회개할 수 없다 회개는 전적으로 믿는 자가 도달하는 결론이지 본인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행위이다 즉, 그들의 회개는 개신교에서 이야기하는 회개와 다르다 마치 같은 숫자가 쓰여있다고 한국 화폐를 미국 달러로 쓸 수 없듯이 그들의 회개는 개신교에서 절대 사용될 수 없는 개념이다 회개란 신앙의 결과이지 신앙의 방법이 될 수 없다 예수가 이야기한 "내 명령을 듣고"는  신자가 지켜야 할 덕목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신자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 설교이다 신자니 죄를 짓지말고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닌 착한 사람이야말로 신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신자만이 회개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 주어진다 화자는 교리를 정확하게 가르치지 않는 한국 교회를 비판할 생각도, 종교적 진리를 정확무오한 진리라고 수호할 생각도 없다 단지, 잘못된 대전제를 가져와 명제를 설명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자 설명이다 요약하지 못한 긴글을 써 미안하게 생각한다 3줄 요약 1. 기독교적 개념으로 회개는 신자에게만 허락된 특권이다 2. 신자란 죄로부터 멀어지려 노력하는 존재이지 회개할 수 있다며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3. 그러니 죄를 짓고 회개하면 천국이다라는 말은 교리적 대전제를 무시한 잡소리에 불과하다 (출처) 재밌는 글이라 퍼옴.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나도 같은 생각 ㅋㅋ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전, 조선시대 궁궐 모습.jpg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전의 조선시대 궁궐 모습이 담긴 미공개 유리건판(유리에 감광유제(感光乳劑)를 칠한 사진용 감광판) 사진들이 처음으로 선보인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1927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을 때 건춘문 동쪽으로 이건되기 전 모습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식민지시대 유리건판 사진으로 이를 확대하면 '光化門'이란 현액 글씨가 뚜렷하다. 나아가 그 전면 월대를 포함한 광화문 전경이 비교적 잘 드러난다. 열린 우협문 안으로 보이는 흰색 가건물 지붕 일부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건물로 추정된다. 이로써 보건대 조선총독부 청사 착공 직후에 촬영했다고 판단된다. 조선총독부서 찍은 경복궁 근정전 주변 사진. 전각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원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1867년 조대비(趙大妃)를 위해 지은 경복궁 자경전. 이곳은 이후 두 차례 화재를 만났다가 1888년(고종 15) 재건됐다. 꽃담으로 유명한 이곳 서측 담장에는 꽃 문양이 베풀어져 있다. 문양은 꽃 아홉 개와 문자 아홉 개가 서로 짝을 이루고, 나머지 한 개는 꽃과 나비 등을 조합한 것이다. 현재의 자경전 꽃담에는 아홉 개가 아닌 여덟 개 꽃 문양이 남아 있다. 윗쪽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식민지시대 유리건판 사진이며 아래쪽은 그 현재 모습. 경복궁 자경전 꽃문양 앙부일구는 조선 1434년(세종 16)에 장영실이 만든 해시계로 창덕궁 소장품으로 현재 여주영릉전시관과 창덕궁에 전시 중이다. 현재 이 앙부일구는 다리를 포함한 몸체가 받침돌 위에 노출돼 있으나 (오른쪽) 일제강점기 때 유리건판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는 받침돌에 몸체가 감입돼 앉힌 모습이다. 나아가 대석 옆쪽으로 빗물이 빠져나오게 하는 구멍이 뚫려 있음이 확인된다.(왼쪽과 가운데) 앙부일구 원래 모습을 고증할 수 있는 사진이다. 창덕궁 원래 위치 보루각에 있을 당시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다. 이들 유리건판 사진에서 자격루는 청동으로 만든 파수호 하나, 수수호 둘, 그리고 수수통 둘만 남아 있으며 부표는 없어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수수통 양 옆에는 측우기와 석조대와 위치한다. 자동 시보장치 물시계인 자격루는 현존품은 1536년(중종 31)에 제작품으로 현재 덕수궁에 옮겨져 있다. 조선국왕 용상 뒤에 설치한 그림병풍인 일월오봉병으로 식민지시대 유리건판에 촬영된 경복궁 근정전(윗쪽)과 덕수궁 중화전(가운데) 작품. 이에는 한결같이 해와 달 부분에 금속판이 붙어 있으나 현재의 일월오봉병(아래쪽)에는 이 금속판이 없다. 1935년 경복궁 건청궁 터에 조선총독부종합박물관을 짓기 위한 지진제를 지내고 있다. 일본 신도(神道) 방식으로 식장이 차려지고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조선총독이 절하고 있다. 건청궁은 명성황후 민비가 시해당한 현장으로 총독부가 이를 모두 철거하고 종합박물관을 지으려고 했다가 전시체제가 확산됨에 따라 총독부미술관을 짓는 데 그쳤다. 1929년 지금의 경복궁 건춘문 일대로 옮긴 광화문 문루에서 본 경복궁 동쪽 궁성과 건춘문, 동십자각 일대 전경. 왼편에 중학천이 흐르고 그 동편에는 민가들이 밀집해 있다. 1929년 박람회로 궁성이 파괴되기 직전의 모습이다.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 붕괴사고 현장. 궁장 대부분은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지만 그 바로 옆은 무너져 있다. 이 붕괴사고는 1926년 4월27일 오전 10시에 일어났으며 그 원인은 영추문 바로 옆을 종점으로 해서 운행된 전차의 진동 때문이라고 매일신문 4월29일자 기사에서 확인된다. 동경에 거주하던 이왕세자와 그 왕비 등 일행이 1922년 일시 귀국했을 때 희정당에 도착하는 장면. 자동차에서 내리는 여인은 이왕세자비 이방자 여사 1922년에 고국을 방문한 이왕세자 일행이 동경으로 돌아가기 전 어느 날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기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첫줄 왼쪽부터 정무총감 부인, 사이토 총독 부인, 의친왕비, 이방자 여사, 순정효황후, 순종, 이왕세자, 의친왕, 사이토 총독, 정무총감 등의 순서다. 1922년 이왕세자 내외의 창덕궁 체류 중 후원 나들이를 촬영한 장면으로 보인다. 건물은 영화당이며, 맨 앞부터 뒤로 순정효황후, 이왕세자, 이방자, 덕혜옹주 등이 보인다. 일제 강점기 창덕궁 인정전 앞 마당의 박석을 없애고 화초를 심고있다. 조선의 문무고관들이 왕에게 하례하던 상장적인 공간을 일제가 훼손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1902년의 경복궁 경복궁은 그 창건 초기부터 조선조 멸망까지 (1394~1910년) 조선의 정궁으로서 제 구실을 못한 불운의 궁이었으며, 조선조 500년동안에 사람이 산 기간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긴 세월 동안 폐허로 방치될 수 밖에 없었던 슬픈 운명을 타고난 비운의 궁이다. 경복궁은 1592년 부터 1868년 까지 276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폐궁이었다. 또한 순종을 심심하지 않게 위로한다는 구실로 1908년 일본은 창경궁에 동물을 끌어들여 동물원을 만들어서 조선의 오대왕궁중에 하나인 창경궁을 하루아침에 동물원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출처 그대로 남았다면 얼마나 더 멋졌을까요.. 사진으로 보니 위용이 더 실감나네요
너넨 사실 현대미술을 좋아한다
예전에 현대미술이 사기냐 아니냐 이런 얘기로 글을 썼는데 열심히 썼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새끼들이 추상화 조또 예쁘지도 않은데 미술로서 가치가 있냐 없냐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 내가 봐도 추상화나 미니멀리즘 계열 미술이 보기에 안예쁜건 맞음 근데 우리는 이미 추상, 미니멀 계열의 미술이 예쁜걸 알고 있음 심지어 니들도 그게 이쁘다고 생각함 이게 뭔소리냐고? 원래 미술이라는건 동시대 디자인과도 연관이 밀접한데 니들이 극혐하는 추상화 미니멀리즘 아트들이 디자인에 영향을 줘서 추상 디자인, 미니멀리즘 디자인이 나오게 됐고 너네들은 그 추상 디자인을 좋아한다는 말임 그리고 요즘 디자인은 어지간하면 다 추상주의, 미니멀리즘 디자인이라서 이 글을 읽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눈에는 이미 추상미술의 미적 기준이 알게 모르게 굉장히 익숙해져 있다는게 조난 중요한거다 일단 추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디자인 제품들을 볼까 이 의자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들까? 뭐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현대적이다, 깔끔하다, 세련됐다 이런 생각을 대부분 하지 않을까? 바로 이게 추상미술, 너네들이 비아냥대는 현대미술의 영향을 직빵으로 받은 디자인임 형태적으로 군더더기가 없이 딱 필요한 형태만을 하고 있고 나머지 조형요소가 싹 빠지고 배색도 다양하지 않고 깔끔하게 흰색 혹은 검은색으로 배치 너네가 극혐하는 화면에 줄 하나 그어놓고 10억짜리 그림들 특징이 조형요소를 뺄 수 있을만큼 다 빼버려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라는걸 보여준다는건데 위 의자 디자인이 그 맥락이라 볼 수 있음 참고로 점하나 찍고 10억짜리 그림들이 나오기 전까지 저런식의 디자인은 상상할 수도 없었고 누가 만들었다면 걍 좆병신 취급 받았을거다 왜냐면 그 이전 디자인은 이랬기 때문임 이게 로코코 스타일 디자인인데 추상표현이 등장하기 전 디자인이 다 이랬다 이때 당시의 '좋은 디자인' 이라 하면 저렇게 장식적인 요소가 덕지덕지 붙은거였다 그래서 막 의자다리도 사자 발 같은거로 장식해서 깎고 암튼 최대한 저런식으로 만들었음 그야말로 지금에 와서 보면 필요없는 조형요소가 많이 껴있는 상태인데 그게 추상표현이 대중화되면서 바뀌면서 필요 없어보이는 장식적 요소를 뺼 수 있을만큼 최대한 빼버리는 양식이 유행하게 되고 그게 계속 지금까지 내려와서 이런 세련되고 엣지있는 디자인이 완성된다 지금이야 사람들이 이런 의자를 보고 사고 싶다 어쩌구 하지만 로코코 시대 사람들이 봤을땐 이건 뭐 시발 저게 의자냐 싶을거다 참고로 로코코 시대의 그림은 이랬다 이랬는데 여하튼간 미술이라는게 항상 디자인에 영향을 주는거다보니까 이렇게 화려하고 장식적인 그림 양식이 등장하자 디자인도 이렇게 가게 된거임 그래서 로코코 스타일의 디자인은 이랬다는거임 아래 사진은 인테리어 디자인 사진인데 님들 저런 집에서 살 수 있음? 나는 눈이 아파가지고 저런 집에서 3일도 못 살거 같음 이게 님들이 극혐하는 몬드리안인데 여기서부터 디자인이 많이 변하게 되는거다 이게 몬드리안의 스튜디오였다는데 참고로 이 사람이 1872년에 태어났다는걸 생각해보자 지금봐도 조낸 세련됐는데 1900년대 초에는 어떘겠나 그렇게 추상표현주의도 발전을 하면서 그것에 영향을 받는 디자인들도 계속 발전하게 되고 그래서 이런 세련된 디자인들이 속속들이 출현하게 되는거다 이 글을 보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런 집에서 살고 싶지 않을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인테리어일 것이다 우리 눈이 이런 추상적인 미를 선호한다는거다 이 점에 있어서 점하나 찍고 10억인 미술이 중요하다는거임 니들은 존나 병신 같다고 욕하지만 사실 니들 미적기준도 바꿔놓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던거다 옛날 같앴으면 막 금박 입히고 천장에는 그림이 그려져있고 막 그래야 아름다운거였는데 지금은 저런 매끈한 디자인이 먹히니까 그래서 니들이 욕하는 점하나 찍고 10억짜리 미술이 가치가 있다는거다 그림을 잘그려서 10억이 아니라 새로운 미적기준을 제시했다는거다 우리가 저런 쌔하얀 디자인을 좋아한다는건 그 미적기준을 인정했다는거고 그래서 그 그림들이 10억짜리인거다 마치 이론물리학에서 이론이 튀어나오면 공학은 그걸 응용해서 물건을 만들듯 미술이 미적기준을 제시하면 디자인이 그 미적기준으로 물건을 만든거다 그리고 니들이 저런 엣지있는 디자인을 좋아하니까 그 점하나 찍고 10억 그림들은 성공한 그림인 셈임 몬드리안보다 사람들이 더 극혐하는 미니멀리즘 근데 이거도 디자인으로 환원되면 요렇게 됨 나는 이런 집에서 살면 존나 평온하니 좋을거 같다 아마 요즘 사람들에게 저런 집 공짜로 준다고 하면 100이면 100이 다 여기서 살고 싶다 하지 않을까 싶음 이게 근대식 천장 인테리어인데 물론 멋진데 집을 저런식으로 인테리어 했다면 난 못살거 같다 뭐 박물관이 저렇다면야 이해를 하겠지만 집은 노노해 우리 미적 기준에서 이런 스타일이 이미 구닥다리라서 그렇다 요즘 까페에서 많이 하는 식의 인테리어인데 구성요소가 빠져서 천장도 프레임만 띡 하고 남아있고 벽도 벽지 없이 걍 벽돌인 상태로 남겨두는 미니멀한 디자인이 돋보인다 옛날 같앴으면 상상도 못할 방식의 인테리어인데 지금 사람들은 이런 인테리어가 분위기 있다고 좋아하자늠 이거도 다 점하나 찍고 10억 받아먹는 현대미술의 공임 출처 https://m.blog.naver.com/vpaula/220697512564
기적이란 걸 팔지 않는단다
세 식구가 사는 가정에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다섯 살 막내가 가난한 형편으로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병이 깊어져 가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아무런 도리가 없어 앓는 아이의 머리만 쓸어 줄 뿐이었습니다. ​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기적만이 동생을 살릴 수 있다는 엄마의 간절한 기도를 듣게 되었습니다. ​ “우리에게 기적이라도 있었으면…” ​ 다음 날 아침 소년은 엄마 몰래 자신의 작은 저금통을 가지고 나왔는데 저금통에는 동전만 가득했습니다. ​ 소년은 저금통을 들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약국으로 찾아갔습니다. ​ “어떻게 왔니, 무슨 약이 필요한 거지?” ​ 소년은 뛰어서 왔는지 가쁜 숨을 쉬면서 약사에게 말했습니다. ​ “저, 저기 도~동생이 아픈데 엄마가 기적이 있어야 낫는데요.” ​ “이걸 어쩌나, 여기는 기적이란 걸 팔지 않는단다.” ​ 그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옆의 신사가 물었습니다. ​ “꼬마야, 네 동생한테 어떤 기적이 필요하지?” ​ “어,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동생이 수술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엄마가 기적이 있으면 살릴 수 있대요. 그래서 기적을 사러 왔는데…” ​ 신사는 저금통을 받고는 기적을 사겠다며 소년의 집으로 함께 갔습니다. ​ 그리고 소년의 동생을 진찰한 뒤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수술까지 해 주었습니다. 약사의 동생인 그는 큰 병원의 유명한 의사였습니다. ​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소년의 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수술비용을 물었을 때 그 의사가 말했습니다. ​ “수술비용은 이미 다 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 생기거나, 간절히 원하는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기적을 빕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적을 빌면서도 기적이 정말 나에게 일어날 것이란 생각은 많이 하지 않습니다. ​ 기적은 바라고, 믿고, 행동하고, 노력하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 지금부터 그렇게 믿고 빌고 싶은 기적이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노력하세요. ​ ​ # 오늘의 명언 세상을 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적이란 없다고 믿고 사는 것과, 또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믿고 사는 것이다. 나는 후자의 삶을 선택하기로 했다. – 아인슈타인 – ​ =Naver "따뜻한 하루"에서 이식해옴..... #기적#인생#삶#명언#영감을주는이야기#교훈#따뜻한하루
중국 현지 사례로 보는 미세먼지의 위험성.jpg
중국 威海(웨이하이)에 살고 있는 36세의 자우타우. 자우타우는 지난해 베이징을 떠나서 고향인 웨이하이로 돌아왔습니다. 베이징은 대기오염으로 인해 매년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연 평균 미세먼지농도는 100마이크로그램을 넘나듭니다. 고향에 온 자우타우는 마스크를 필수로 착용하고 다닙니다. 베이징에 비해 웨이하이의 미세먼지농도가 절반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늘 잊지 않습니다. 폐에 좋다는 약을 음료수처럼 마십니다. 챙겨온 약들도 가득입니다. 왜 이렇게 자우타우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을까요. 오른쪽 폐는 정상이지만, 왼쪽 폐가 1/6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2년 전에 폐암말기를 진단 받고 폐의 대부분을 수술로 잘라내야 했거든요. 그는 촉망받는 소아과의사였습니다. 건강했고, 운동을 즐겼죠. 신부와 결혼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암에 대한 가족력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폐암에 걸렸습니다. 자우타우는 미세먼지가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자신이 수술했던 어린아이들의 폐에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허베이난, 산시처럼 공기오염이 심한 곳에서 온 아이들은 폐가 검은색이나 회색이었다는데요. 공기가 맑은 곳에서 온 아이들의 폐는 선홍빛으로 건강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전문의들도 "미세먼지가 유발하는 질병은 폐암이다. 미세먼지를 들이마셨을 때 가장 직접적으로 닿는 곳이 폐이기에 그렇다."고 설명합니다. 기침, 가래, 재채기 등 호흡기 증상으로 시작해 폐암까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미세먼지가 '매우나쁨'일 때 1시간 외출한다면 밀폐공간에서 담배연기를 1시간 24분 흡입하거나 2000cc 디젤차에서 나오는 매연을 3시간 40분 들이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출처 : 엽혹진 중국이 정말 우리의 모든 자유를 뺏어가는 기분이네요.... 코로나도 그렇고 숨 쉴 권리도 그렇고......
[책 추천] 새로운 트렌드를 미리 알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은 책5
안녕하세요! 책과 더 가까워지는 곳 플라이북 입니다. 오늘은 내년 트렌드를 한 걸음더 빨리 알아볼 수 있는 트렌드 관련 책 5권을 소개합니다. 늘 이맘때쯤이면 다가오는 트렌드를 미리 예측하고 준비하게 되는데요. 이 책들을 통해 내년에도 한 발짝 더 빠르게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01 내년을 주도할 트렌드가 궁금해질 때 빅데이터가 그려내는 우리 사회의 변화와 트렌드 2022 트렌드 노트 신수정 외 6명 지음 | 북스톤 펴냄 이 책이 궁금하다면? 클릭!> 02 빠르게 변하고 있는 사회 변화를 읽고 싶을 때 팬데믹 이후의 변화된 세상의 패러다임을 담은 책 거대한 가속 스콧 갤러웨이 지음 | 리더스북 펴냄 이 책이 궁금하다면? 클릭!> 03 내년 글로벌 트렌드가 궁금하다면? 위드 코로나 시대에 주목받는 세계 트렌드를 담은 책 2022 한국이 열광할 세계 트렌드 KOTRA 지음 | 알키 펴냄 이 책이 궁금하다면? 클릭!> 04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트렌드와 기술이 궁금할 때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것에 대한 미래 전망을 담은 책 NFT 레볼루션 성소라 외 2명 지음 | 더퀘스트 펴냄 이 책이 궁금하다면? 클릭!> 05 발 빠르게 내년 트렌드를 읽고 움직이고 싶다면? 빅데이터로 읽은 사회문화 트렌드를 알려주는 책 뉴미디어 트렌드 2022 샌드박스네트워크 데이터랩 외 3명 지음 | 샌드박스스토리 펴냄 이 책이 궁금하다면? 클릭!> 지금 플라이북 앱에서 이 책 편하게 빌려보고 싶다면?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