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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독서]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JC페니 백화점의 할인 없는, 투명한 가격정책은 왜 실패했을까?
GM의 금리할인 혜택과 행동 경제학이 만난 결과는?
그 이야기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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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을 연구한 공학자, 길브레스 부부 (3)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면 캐릭터들의 움직임이 눈에 띕니다. 각 캐릭터는 마치 살아있는 양 생생하게 움직이지만, 그런 동작 속에서도 확실하게 캐릭터 개개인의 성격이나 특성이 드러나도록 하죠. 애니메이터들의 갖은 연구와 아낌없이 들인 노고가 아니라면 분명 그같은 결실을 보기란 어려울 겁니다. 디즈니 스튜디오가 배우들의 실사 동작을 연구 분석한 사실을 아시나요? 첫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던 백설 공주에서 일곱 난장이 중 하나인 도피란 캐릭터는 코미디언 에디 콜린스의 연기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디즈니 애니메이터들은 도피의 이미지에 가장 흡사한 에디 콜린스를 초청해 그에게 도피의 연기를 하게 하고, 이를 촬영해 프레임 단위로 분석하고 연구했습니다. 이를 통해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가 정말 살아있는 사람처럼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알아냈죠. 비록 지향점은 다르지만, 디즈니 애니메이터들도 길브레스 부부처럼 무척 세심하게 인간 동작을 연구하고 각자 자신들 목적에 맞는 최적의 동작을 도출해 낸 셈입니다. 서로 다른 분야라도 방법론에선 일견 비슷해 보일 수 있단 사실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에디 콜린스와 도피. 1934년작 백설공주를 제작하면서 디즈니는 다양한 기술과 역량을 활용했습니다. 세트장에서 실제 연기하는 배우들의 움직임을 따서 캐릭터에 입히는가 하면, 멀티플레인이란 기술로 배경에 깊이감과 입체감을 줬죠. 1924년 프랭크 길브레스가 급사합니다. 동작 연구를 시작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으로 작업자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를 통해 회사와 노동자 양측 모두 윈윈할 수 있다고 믿은 인물이었죠. 자연히 그의 컨설팅 회사엔 그의 명성을 듣고 온 전미 유수의 기업들이 고객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으면서, 이들 회사와 맺은 컨설팅 계약도 날아가 버립니다. 어쩌면 프랭크가 평생 세워 올린 업적은 이 때에 사라지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부인 릴리언 길브레스는 결코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었죠. 그녀는 남편을 대신해 그가 참석하려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제 1회 국제 경영 컨퍼런스>에 참석해 논문을 발표합니다. 참석자들 중 유일한 여성이었죠. 또 때마침 출범한 영국 여성공학협회에도 <산업공학에서 여성을 위한 기회>라는 글을 기고합니다. 여기서 릴리언은 산업공학이 신생 분야이기에 기존 공학보다 여성 참여가 수월하며, 여성 노동자와 가사노동 분야를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고, 여성이 접근하기 쉬운 연구 방법을 활용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여성 공학도들의 참가를 촉구했죠. 1925년에는 퍼듀 대학 기계공학과에 동작연구 강의를 맡아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을 개별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직접 기업체에 방문해 현장 실습을 해보는 기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이렇듯 릴리언은 왕성한 활동으로 남편 못지 않은 업적들을 쌓아 올렸습니다. 길브레스 사 사장에 취임한 후 그녀는 '여성지향적 컨설팅'을 내세웠고, 여성들을 고객으로 한 기업들을 신규 고객으로 유치했죠. 한 예로, 1926년 존슨&존슨 사를 컨설팅할 때는 생리가 여성노동자 피로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 생리 기간 중 여성 노동자의 작업 시간을 융통성있게 조절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과학적 관리를 가정에 접목시키는 시도 또한 이루어졌습니다. 릴리언은 1927년 <가정주부와 그의 일>을, 1928년 <아이들과의 생활>을 출간했고, 가정학, 공학, 경영학 전공의 여자 대학원생들을 모아 가사 노동 분야에 대한 공동 연구를 했습니다. GE 사의 프로젝트에선 4천 명 이상의 여성을 인터뷰해 스토브, 싱크대, 주방 설비 등의 적정 높이를 설계하고 부엌 디자인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죠. 이전까지 부엌은 비효율적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음식 저장고는 집 어딘가에 따로 두고, 각종 가구들도 아무렇게나 집 여기저기에 연관성 없이 놓여 있었죠. 릴리언은 이것들을 한데 모아 현재도 쓰는 L자형 배열을 만들었습니다. 또 쓰레기통에 페달을 달아 밟으면 뚜껑이 열리게 했고, 냉장고 문 안쪽에 계란이나 버터를 보관할 선반을 추가했죠. 당대 남성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생활 속 불편한 부분들을 릴리언은 효율적으로 개선해 나갔습니다. 릴리언 길브레스의 연구에서 영감을 받은 부엌 디자인. 1930년대 후반이면 냉장고를 제외한 모든 주방 가구들이 마치 하나의 유닛처럼 통합되었다고 합니다. 해럴드 트리뷴에서 예전 주방과 길브레스가 고안한 주방을 비교한 결과, 이전보다 새 주방에서 걷는 거리가 1/6까지도 줄었다네요. 과거 주방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구조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페달식 쓰레기통의 유래엔 다른 설이 하나 더 있습니다. 1939년 스웨덴의 홀거 닐슨이란 사람이 아내의 미용실을 위해 발명한 Vipp pedal bin이 시초라는 설인데요.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따져봐야 의미없을지도 모르죠. 1929년 후버 대통령 영부인인 루 헨리 후버가 릴리언에게 걸스카우트의 컨설팅을 요청합니다. 이걸 계기로 릴리언은 행정부에도 발을 들이밀게 되죠. 1930년 대통령 직속 고용위원회에서 일자리 나누기 사업 여성 분과를 담당해 운영하는 등, 공공 분야에도 공헌을 합니다. 2차 대전 시기엔 정부 조직, 위원회, 군에서 조직 내 교육 및 노동 문제를 자문하는가 하면, 트루먼 행정부에선 민방위 자문 역을 맡기도 했죠. 한국전쟁 때도 그녀는 여군 국방 자문위에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1940년 퍼듀 대학은 릴리언을 정교수로 임용합니다. 이로써 그녀는 미 공과대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되었습니다. 릴리언은 퍼듀 대학에 산업공학 교육이 정착되는 데 공헌함은 물론, 공학을 전공하는 여학생들을 상담해 진로 지도에도 힘씁니다. 1948년에는 위스콘신 대, MIT 등 미국 내 여러 대학에서 산업공학 교수로 그녀를 초빙하죠. 처음엔 남편 그늘에 가려졌을지라도, 릴리언은 끝내 세상에 자신만의 업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릴리언이 없었다면, 오늘날 남편 프랭크 길브레스의 업적도 잊혀지지 않고 지금과 같이 남을 수 있었을까요? 릴리언 길브레스는 93세까지 장수합니다. 공학의 퍼스트 레이디란 별명에 어울리게, 1968년 은퇴하기까지 왕성한 활동을 했죠. 은퇴 후 요양원에 들어간 그녀는, 1972년 뇌졸증으로 사망합니다. 그녀가 죽은 후, 사회 각계에서 그녀와 그녀 남편을 기려 젊은 엔지니어와 여성 엔지니어를 표창하고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기념 사업이 지속되었습니다. 평생 자신들 분야를 개척하고 후학 양성에 힘쓴 부부에겐 아마도 기쁠 일이겠죠. 오늘날 미국과 세계의 모습을 만든 데에는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길브레스 부부 역시 그들만의 괴짜같은 방법론으로 현대 문명에 기여했죠. 지금 자연스럽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보는 건 항상 흥미진진합니다.
습관을 연구한 공학자, 길브레스 부부 (1)
1904년 10월 19일, 미 오클랜드. 막 결혼식을 마치고 나온 신혼부부가 기차에 올라 몇 마디 대화를 나눴습니다. '아이는 몇이나 낳았으면 좋겠어?' '글쎄, 한 다스만 낳지. 기왕이면 남녀 각각 여섯 명씩.' 대화 내용이 살짝 소름끼치긴 합니다만, 결과적으로 이 말은 실제로 실현됩니다. 평생 길브레스 부부는 여섯 명의 아들과 여섯 명의 딸을 가졌고, 개중 다섯째 아들과 일곱째 딸에게 자신들 이름을 각각 붙여줬죠(프랭크 2세, 릴리언 2세). 비록 둘째는 1912년 디프테리아로 사망하지만, 나머지 형제자매들은 모두 잘 성장해 주었습니다. 길브레스 부부와 11명의 자식들. 자녀들은 부부의 실험 연구 대상이자 참가자였습니다. 부부는 여러 번 자녀들이 접시를 닦는 동작을 촬영해 분석하거나, 그들이 개발한 방식으로 타자기 사용을 보름 만에 숙지하게 교육하는 등 일상 생활에 그들의 연구를 접목했습니다. 그렇지만 자녀들이 기억하는 부모는 유머러스하고 자상한 사람들이었다고 하네요. 어째서 남편, 프랭크 길브레스가 열두 명 자식을 원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프랭크 길브레스는 매번 가족들을 데리고 국립공원이나 영화관에 입장할 때, 혹은 기차나 차편을 타야 할 때면 항상 단체 할인을 받아냈다고 하네요. 나중에 프랭크는 아이들 중에 쌍둥이나 세쌍둥이가 없어서 섭섭해했답니다. 여러 명 아이들을 한 번에 낳아 한 번에 기르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나요? 뉴저지 몽클레어에 집을 한 채 마련해 두고, '과학적 관리법과 낭비의 동작을 없애는 학교'라고 이름붙인 집에서 길브레스 부부는 평생 자신들의 연구를 그 자신과 자기 자식들에게 적용했습니다. 나중에 셋째 어네스틴과 다섯째 프랭크 2세는 자기 가족들이 그 집에서 살았던 경험담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는데요. 이 책이 어찌나 유행했던지 속편에 영화, 뮤지컬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기억하는 프랭크 길브레스는 자상하고 유쾌한 가장이었던 모양이지요.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혁신주의 운동이 미국 사회 전체에 영향을 떨칠 때가 1900년대 초 일입니다. 최초의 경영 컨설턴트 프레데릭 테일러가 활발하게 강연, 저술 활동을 하며 자신의 소위 과학적 관리론을 설파하고 다닌 때도 이 즈음이죠. 1904년 결혼한 길브레스 부부가 어떻게 평생에 걸쳐 공동연구를 수행했는지는 잠시 미뤄 두고, 먼저 프랭크 길브레스에 대해 잠깐 조명을 해보겠습니다. 프랭크는 메인 주 페어필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아났습니다.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결과 MIT에 입학 허가를 획득하지만 가정 형편상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하기를 선택했죠. 17세이던 그가 선택한 첫 직업은 벽돌공 수습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차차 능력을 인정받아 현장감독으로 승진했고, 나중엔 아예 독립해 건축회사를 차리게 됩니다. 이때 프랭크 나이가 34세였습니다. 사장이 된 프랭크가 집요하게 파고든 건, 바로 벽돌쌓기의 효율을 높이는 일이었습니다. 다양한 수단으로 현장 연구를 실시한 후, 그가 내린 결론은 바로 불필요한 작업 동작을 선별해내 제거하거나 교정하는 동작 연구였죠. 프랭크는 자기 연구를 바탕으로 건설업계의 작업 방식을 합리적으로 개선하는 여러 방안을 줄줄이 내놓았습니다. <현장 시스템(1901)>, <콘크리트 시스템(1908)>, <벽돌쌓기(1909)> 3부작 저서가 바로 그 방안이었죠. 운명적인 만남은 정말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1903년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한 부유한 집안 여성이 미 동부로 여행을 옵니다. 그녀 응접을 맡은 안내원 미니 번커는 프랭크의 친척이었죠. 결국 미니 번커의 소개로 여성은 프랭크 길브레스와 만남을 갖게 됩니다. 그 뒤 약 1년간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서로 마음이 맞음을 확인한 두 남녀는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되는데요. 이 여성이 바로 프랭크의 영원한 반려, 릴리언 길브레스였죠. 릴리언의 아버지는 독일 태생의 미국인으로 설탕 정제업으로 나름대로 부를 쌓은 인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몸이 약해 집안일에서 자주 릴리언의 도움을 받았죠. 릴리언은 학업 성적이 뛰어났는데, 부모는 대학 진학을 반대했습니다. 자기 딸이 형편 넉넉한 집 자녀와 결혼해 행복하게 사는 게 두 사람의 바람이었죠. 릴리언은 그런 부모를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그렇지만 전 너무 평범해서, 부자들은 아무도 저와 선뜻 결혼하려 하지 않을 거에요.' 설득이 먹힌 건지, 아니면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는 건지, 릴리언은 소원대로 근처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당시 캘리포니아 대학은 주 시민은 누구든지 무료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대형 강의가 많아서 심지어 건물 밖에 텐트를 치고 진행하는 수업도 있었다고 하네요. 또 학교에 기숙사가 따로 없어서 릴리언은 매번 집에서 통학을 해야 했습니다. 전공은 영문학이었는데, 심리학 등에도 관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릴리언은 대학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올려, 졸업식 연사로 연단에 올랐죠. 캘리포니아 대학에선 처음으로 여성이 졸업 연사를 맡은 사례였습니다. 1900년 릴리언은 콜롬비아 대학의 대학원에 지원하는데요. 본인은 영문학 전공을 희망했지만, 지도 교수 소개를 받아 찾아간 영문학 교수는 여학생을 제자로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는 대신, 그녀는 전공을 심리학으로 바꾸어 진학하는데요. 도중에 건강 문제로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1902년 모교인 캘리포니아 대학으로 돌아와 기어이 석사 학위를 마친 후, 릴리언은 바로 박사 과정을 지원합니다. 이때 지원한 전공은 영문학, 부전공으로 심리학을 선택했죠. 이후 1903년 동부 여행 도중 소개받은 프랭크와 1904년 결혼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앞서 적은 그대로입니다. 결혼 이후 프랭크의 연구는 부부 공동의 연구가 되었습니다. 프랭크는 릴리언에게 산업심리학 분야를 공부해 보라고 권유하죠. 릴리언 역시 그 편이 프랭크의 일을 도울 수 있겠다고 생각해 동의합니다. 결혼 당시 이미 프랭크는 길브레스 사Gilbreth inc.라는 컨설팅 업체를 운영하고 있었거든요. 이후 두 사람이 꾸리는 가정 생활은 여러모로 독특했습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1. 그 집에선 항상 심부름거리가 판에 적혀 있었습니다. 용돈이 추가로 필요한 아이들은 자신이 할 심부름거리를 골라 길브레스 부부에게만 자신이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와 입찰액을 적어 제시했는데요. 부부는 이중에 최저입찰액을 제시한 사람에게 응찰해 심부름을 맡기고 용돈을 주었다네요. 2. 프랭크는 매번 조끼를 입을 때면 아래부터 위로 올라가며 단추를 채웠다고 합니다. 그에 따르면, 위에서 아래로 끼우면 7초가 허비되지만, 아래서부터 채워 올라가면 고작 3초밖에 안 걸린다나요? 3. 한번은 면도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면도솔 두 개로 거품을 낸 후, 면도칼 두 자루로 한꺼번에 면도를 하는 편이 효율적이라는 걸 확인하려고 직접 실행에 옮겼다고 합니다. 당연히 면도칼에 목이 베여서 피가 났는데, 자녀들 증언에 따르면 프랭크는 베인 것 자체보다 그걸로 인해 목에 붕대를 감느라 2분이 오히려 허비된 것에 실망한 듯 보였다네요. 4. 평소에 프랭크는 가족 집합 신호로 휘파람을 정해 놓고 스톱워치까지 동원해서 신호 즉시 모든 가족이 무슨 일이 있어도 모이도록 훈련했다고 합니다. 가족들 전체가 모여야 할 일이 있거나 손님이 와서 가족을 소개시킬 때 등 여러 상황에서 휘파람 신호를 이용했다는데요. 어느날 이들 가족이 길가에서 낙엽을 태우던 중, 그만 불이 나무 벽에 옮겨 붙었다고 합니다. 프랭크가 즉시 휘파람을 불자, 불과 14초만에 온 가족이 밖으로 뛰쳐나왔죠. 불은 소방수에게 채 연락할 틈도 없이 꺼졌답니다. 5. 프랭크 길브레스가 가족 중에서도 유난히 특이한 성격이 아니었냐고요? 화장실에는 가족들이 매일 할 일과 공정표가 붙어 있었는데요. 이건 부부가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각종 가사일을 해낼 수 있을지 연구한 결과였습니다. 아이들은 밤에 자기 전 체중을 달아 그래프에 적고, 숙제를 마무리하고 손과 얼굴을 씻고 이를 닦으면 또 도표에 표시를 했습니다. 이때 아내 릴리언 길브레스는 스케줄에 기도하는 것도 표시하고 싶다고 제안했는데요. 프랭크는 심사숙고 끝에 각자 자유로 두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을 내렸다네요. 특이한 성격은 부부 양쪽 모두였던 모양입니다. 1924년 프랭크 길브레스는 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제 1회 국제경영컨퍼런스에 참석하려고 여행길에 오릅니다. 도중에 그는 무언가를 문득 떠올리고 근처 공중전화로 아내이자 파트너인 릴리언에게 전화하죠. '오는 도중에 가루비누 담는 동작을 생략할 좋은 생각이 났는데 어떻게 생각해?' 믿기지 않지만, 그게 프랭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되었습니다. 슬로바키아에 가기도 전에 프랭크 길브레스는 심장병으로 사망합니다. 홀로 남은 릴리언 길브레스에겐 11명의 자녀와 집, 남편이 남긴 사업체와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맡은 일이 남아 있었죠. 프랭크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돌자, 심지어 그동안 길브레스 사와 거래해 온 업체들이 컨설팅 계약 중지를 통보했습니다. 릴리언 길브레스에겐 두 선택지가 있었죠. 모든 일을 접고 고향에 가서 남편 잃은 미망인으로 평생 가족을 돌보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남편의 업무 파트너로서 그의 연구와 일을 이어갈 것인가. 릴리언 길브레스는 남편의 모든 것을 자신이 잇기로 결심했습니다. 산업 공학의 퍼스트 레이디는 그렇게 탄생한 겁니다.
[책추천] 예민한 성격이라고 자타가 인정할 때 읽으면 좋은 책
안녕하세요! 책과 더 가까워지는 곳 플라이북입니다. 상대에게 '예민하네'라는 말을 듣거나 '내가 너무 예민한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요? 남들보다 조금 더 섬세한 성격일 뿐인 여러분을 위해, 섬세한 성격의 친구를 둔 여러분을 위해 5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있는 그대로 존중받고 싶은 '예민이'들에게 쿨하게 동지가 되어 줄, 당차고 재치 있는 에세이 네, 저 예민한 남자입니다 박오하 지음 ㅣ밝은세상 펴냄 책 정보 보러가기👉 https://bit.ly/2Z3avZm 때로는 예민해서 힘들었던 이들에게 그 감각을 어떻게 살리면 좋은지 알려 주는 책 예민함이라는 무기 롤프 젤린 지음 ㅣ나무생각 펴냄 책 정보 보러가기👉 https://bit.ly/38w5dIX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적당히 예민할 수 있을까? 기복이 심해 힘들었던 일상이 곧 평온해질 책 민감한 사람을 위한 감정 수업 캐린 홀 지음 ㅣ빌리버튼 펴냄 책 정보 보러가기👉 https://bit.ly/2Z1io13 예민하단 소리만 들으면 스트레스받을 때 나에 관해 똑똑히 알려줘서 자존감이 생기는 책 예민한 게 아니라 섬세한 겁니다 다카다 아키카즈 지음 ㅣ매일경제신문사 펴냄 책 정보 보러가기👉 https://bit.ly/3e73r1L 지친 내면을 찬찬히 살피고 안정을 취하고 싶을 때 정신과 전문의에게 심도 깊이 받는 상담 같은 책 예민함 내려놓기 오카다 다카시 지음 ㅣ어크로스 펴냄 책 정보 보러가기👉 https://bit.ly/2O1ZBfK 책과 더 가까워지는 곳, 플라이북👉 https://bit.ly/3f2yOff
김연수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에서 메모
"그 도시는 그들의 것이고, 그들이 청춘과 꿈을 묻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 청춘과 꿈의 이야기가 있기에 어떤 폐허도 가뭇없이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15쪽) "혼잣말처럼 기행이 말했다. 그건 어쩌면 불행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언제나 불행에 끌렸다. 벌써 오래전부터, 어쩌면 어린 시절의 놀라웠던 산천과 여우들과 붕어곰과 가즈랑집 할머니가 겨우 몇 편의 시로 남게 되면서, 혹은 통영까지 내려가서는 한 여인의 마음 하나 얻지 못하고 또 몇 편의 시만 건져온 뒤로는 줄곧. 기행을 매혹시킨 불행이란 흥성하고 눈부셨던 시절,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의 결과물이었다. 다시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아서." (32쪽) "인생의 질문이란 대답하지 않으면 그만인 그런 질문이 아니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적극적으로 대답해야 했다 어쩔 수 없어 대답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었다. 세상에 태어날 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그러므로 그건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리고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만 했다. 설사 그게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일지라도." (38쪽)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는 것, 어떤 시를 쓰지 않을 수 있는 것,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 상허의 말처럼 들리는 대로 듣고 보이는 대로 볼 뿐 거기에 뭔가를 더 덧붙이지 않을 수 있을 때,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85쪽) "바람이 불면 빛과 그늘의 경계가 흔들렸다. 그늘은, 빛이 있어 그늘이었다. 지금 그늘 속에 있다는 건, 어딘가에 빛이 있다는 뜻이었다. 다만 그에게 그 빛이 아직 도달하지 않았을 뿐." (112쪽)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에서, 문학동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