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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의 탄생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생각해 보자. 거기에 나오는, 존재하지 않은 책이 나온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희극에 대하여”이다. 제1권은 당연히 모두들 읽어 보셨을(…) “비극에 대하여”이다. 소설 속에서 호르헤 수도사는 어째서 “희극”에 대해 적대적이었는지, 역시 알고 계실 것이다.
저 시나리오는 소설적인 장치가 아니다. 실제로 큰 웃음은 감정의 과도한(혹은 “사악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그러니까 가령 기사에 나온 것처럼 데모크리투스의 웃음을 표현하는 정도의 예외가 아닌 한, 18세기 중반까지 웃음을 그리는 것은 죄악이었다.
막말로, 모나지라의 입술이 조금 더 치켜 올라갔더라면, 당시대인들은 모나리자를 미친년 정도로 간주했다는 얘기다.
물론 철학적인 이유만 있지는 않았다. 당시 치위생 수준이 너무나 처절했기 때문에 이빨을 일부러 안 보인 이유가 있었다(이제 모나리자의 표정이 이해 가시는가?). 당시 유럽은 40세 정도가 되면 이빨을 거의 잃었고, 의사들의 처방 역시 이빨 뽑기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루이 14세가 이빨을 다 잃었다는 사실을 비웃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바로 그 시기. 그러니까 18세기 중반의 프랑스에서는 “치과의사”라는 직업이 생겨났다. 무조건 이빨을 뽑지 않고, 치과 치료의 개념이 생겼다는 얘기다. 게다가 그시기에 칫솔도 생겼다. 게다가 바로 이 시기, 예전에 얘기한 바 있는(참조 1) 엘리자베뜨 루이즈 비제 르브룅의 그림들이 등장한다. 그때 졸려서(?!) “미소”를 그림에 도입한 혁신가였던 르브룅을 소개하지 않았었다.
치과의사의 등장 덕택에, 사람들은 드디어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면서 포즈를 취할 수 있게 됐고, 르브룅은 바로 그런 “웃는 사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었다. 시대가 바뀐 것이다. 하지만 초상화라는 개념 자체가 제왕이나 사대부(참조 2)를 위한 것이었고 서양도 마찬가지. 얼굴 드러나는 초상화를 그리도록 시킬 수 있는 계층은 금수저 귀부인들이었다(당장, 르브룅이 누구의 전속화가였는지 생각해 보시라).
누구나 이빨을 드러내고 웃을 수 있게 된 연원은, 아무래도 1920-30년대, “치즈!”하면서 사진을 찍을 때부터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안 웃는 표정이 쿨한 시대가 된 듯 하다(패션 모델들 생각해 보시라). 역시 세상은 돌고 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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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르브룅 전시회(2015년 8월 13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3464646009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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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재밌는 얘긴데요~! 한번도 생각해 보지못했던 테마여서 넘 흥미롭습니다. 르뷔벵 이전의 미소가 그려진 회화가 없는 것은 아닌 것이 프란스 할스(1580~1666)의 작품에는 파안대소부터 미소까지 넘쳐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예외가 있다해도 흥미로운 주제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HyeyeonNa 사실 기사 보면 렘브란트 등의 네덜란드파가 미소를 종종 그렸다는 말이 나오긴 합니다 ㅋ 그게 바로 위에 쓴 데모크리투스인데, 이 부분은 그리스 철학을 몰라서 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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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을 연구한 공학자, 길브레스 부부 (3)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면 캐릭터들의 움직임이 눈에 띕니다. 각 캐릭터는 마치 살아있는 양 생생하게 움직이지만, 그런 동작 속에서도 확실하게 캐릭터 개개인의 성격이나 특성이 드러나도록 하죠. 애니메이터들의 갖은 연구와 아낌없이 들인 노고가 아니라면 분명 그같은 결실을 보기란 어려울 겁니다. 디즈니 스튜디오가 배우들의 실사 동작을 연구 분석한 사실을 아시나요? 첫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던 백설 공주에서 일곱 난장이 중 하나인 도피란 캐릭터는 코미디언 에디 콜린스의 연기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디즈니 애니메이터들은 도피의 이미지에 가장 흡사한 에디 콜린스를 초청해 그에게 도피의 연기를 하게 하고, 이를 촬영해 프레임 단위로 분석하고 연구했습니다. 이를 통해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가 정말 살아있는 사람처럼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알아냈죠. 비록 지향점은 다르지만, 디즈니 애니메이터들도 길브레스 부부처럼 무척 세심하게 인간 동작을 연구하고 각자 자신들 목적에 맞는 최적의 동작을 도출해 낸 셈입니다. 서로 다른 분야라도 방법론에선 일견 비슷해 보일 수 있단 사실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에디 콜린스와 도피. 1934년작 백설공주를 제작하면서 디즈니는 다양한 기술과 역량을 활용했습니다. 세트장에서 실제 연기하는 배우들의 움직임을 따서 캐릭터에 입히는가 하면, 멀티플레인이란 기술로 배경에 깊이감과 입체감을 줬죠. 1924년 프랭크 길브레스가 급사합니다. 동작 연구를 시작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으로 작업자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를 통해 회사와 노동자 양측 모두 윈윈할 수 있다고 믿은 인물이었죠. 자연히 그의 컨설팅 회사엔 그의 명성을 듣고 온 전미 유수의 기업들이 고객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으면서, 이들 회사와 맺은 컨설팅 계약도 날아가 버립니다. 어쩌면 프랭크가 평생 세워 올린 업적은 이 때에 사라지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부인 릴리언 길브레스는 결코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었죠. 그녀는 남편을 대신해 그가 참석하려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제 1회 국제 경영 컨퍼런스>에 참석해 논문을 발표합니다. 참석자들 중 유일한 여성이었죠. 또 때마침 출범한 영국 여성공학협회에도 <산업공학에서 여성을 위한 기회>라는 글을 기고합니다. 여기서 릴리언은 산업공학이 신생 분야이기에 기존 공학보다 여성 참여가 수월하며, 여성 노동자와 가사노동 분야를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고, 여성이 접근하기 쉬운 연구 방법을 활용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여성 공학도들의 참가를 촉구했죠. 1925년에는 퍼듀 대학 기계공학과에 동작연구 강의를 맡아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을 개별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직접 기업체에 방문해 현장 실습을 해보는 기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이렇듯 릴리언은 왕성한 활동으로 남편 못지 않은 업적들을 쌓아 올렸습니다. 길브레스 사 사장에 취임한 후 그녀는 '여성지향적 컨설팅'을 내세웠고, 여성들을 고객으로 한 기업들을 신규 고객으로 유치했죠. 한 예로, 1926년 존슨&존슨 사를 컨설팅할 때는 생리가 여성노동자 피로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 생리 기간 중 여성 노동자의 작업 시간을 융통성있게 조절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과학적 관리를 가정에 접목시키는 시도 또한 이루어졌습니다. 릴리언은 1927년 <가정주부와 그의 일>을, 1928년 <아이들과의 생활>을 출간했고, 가정학, 공학, 경영학 전공의 여자 대학원생들을 모아 가사 노동 분야에 대한 공동 연구를 했습니다. GE 사의 프로젝트에선 4천 명 이상의 여성을 인터뷰해 스토브, 싱크대, 주방 설비 등의 적정 높이를 설계하고 부엌 디자인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죠. 이전까지 부엌은 비효율적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음식 저장고는 집 어딘가에 따로 두고, 각종 가구들도 아무렇게나 집 여기저기에 연관성 없이 놓여 있었죠. 릴리언은 이것들을 한데 모아 현재도 쓰는 L자형 배열을 만들었습니다. 또 쓰레기통에 페달을 달아 밟으면 뚜껑이 열리게 했고, 냉장고 문 안쪽에 계란이나 버터를 보관할 선반을 추가했죠. 당대 남성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생활 속 불편한 부분들을 릴리언은 효율적으로 개선해 나갔습니다. 릴리언 길브레스의 연구에서 영감을 받은 부엌 디자인. 1930년대 후반이면 냉장고를 제외한 모든 주방 가구들이 마치 하나의 유닛처럼 통합되었다고 합니다. 해럴드 트리뷴에서 예전 주방과 길브레스가 고안한 주방을 비교한 결과, 이전보다 새 주방에서 걷는 거리가 1/6까지도 줄었다네요. 과거 주방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구조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페달식 쓰레기통의 유래엔 다른 설이 하나 더 있습니다. 1939년 스웨덴의 홀거 닐슨이란 사람이 아내의 미용실을 위해 발명한 Vipp pedal bin이 시초라는 설인데요.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따져봐야 의미없을지도 모르죠. 1929년 후버 대통령 영부인인 루 헨리 후버가 릴리언에게 걸스카우트의 컨설팅을 요청합니다. 이걸 계기로 릴리언은 행정부에도 발을 들이밀게 되죠. 1930년 대통령 직속 고용위원회에서 일자리 나누기 사업 여성 분과를 담당해 운영하는 등, 공공 분야에도 공헌을 합니다. 2차 대전 시기엔 정부 조직, 위원회, 군에서 조직 내 교육 및 노동 문제를 자문하는가 하면, 트루먼 행정부에선 민방위 자문 역을 맡기도 했죠. 한국전쟁 때도 그녀는 여군 국방 자문위에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1940년 퍼듀 대학은 릴리언을 정교수로 임용합니다. 이로써 그녀는 미 공과대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되었습니다. 릴리언은 퍼듀 대학에 산업공학 교육이 정착되는 데 공헌함은 물론, 공학을 전공하는 여학생들을 상담해 진로 지도에도 힘씁니다. 1948년에는 위스콘신 대, MIT 등 미국 내 여러 대학에서 산업공학 교수로 그녀를 초빙하죠. 처음엔 남편 그늘에 가려졌을지라도, 릴리언은 끝내 세상에 자신만의 업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릴리언이 없었다면, 오늘날 남편 프랭크 길브레스의 업적도 잊혀지지 않고 지금과 같이 남을 수 있었을까요? 릴리언 길브레스는 93세까지 장수합니다. 공학의 퍼스트 레이디란 별명에 어울리게, 1968년 은퇴하기까지 왕성한 활동을 했죠. 은퇴 후 요양원에 들어간 그녀는, 1972년 뇌졸증으로 사망합니다. 그녀가 죽은 후, 사회 각계에서 그녀와 그녀 남편을 기려 젊은 엔지니어와 여성 엔지니어를 표창하고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기념 사업이 지속되었습니다. 평생 자신들 분야를 개척하고 후학 양성에 힘쓴 부부에겐 아마도 기쁠 일이겠죠. 오늘날 미국과 세계의 모습을 만든 데에는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길브레스 부부 역시 그들만의 괴짜같은 방법론으로 현대 문명에 기여했죠. 지금 자연스럽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보는 건 항상 흥미진진합니다.
유관순 열사 고화질 복원 사진
1. 이화학당 보통과 입학 직후 1915~1916년 추정, 13세 2. 이화학당 고등과 졸업사진 1918년 추정, 16세 3. 1920년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18세 (고문으로 인해 얼굴이 부은거 감안하고 봐주세요.) 아래는 연필스케치 버전 유관순 출생: 1902년 12월 16일(음력 11월 17일)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옛 지명은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아버지 유중권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소제 여사이다.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유열사는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영양실조와 고문 후유증으로 18세에 순국했습니다. 1. 전세계 17살 소녀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은 잔다르크와 유관순 열사 뿐임.(3.1운동 당시 만16세 3개월) 2. 이화학당의 동기들과 5인 결사대 조직하여 만세운동하다가 경찰서 끌려간 후 온갖 협박과 고문 당하심. 학교장인 외국인 '프라이'의 간곡한 부탁으로 석방되어 집으로 내려감. 3. 천안으로 내려가서 부모님과 동네 유지 4분이랑 만세운동 계획 4.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하다 현장에서 부모님 두분이 즉사. 5. 유관순 열사는 옆구리에 칼로 찔린채로 머리채를 잡힌채 일본 순사에게 끌려감. 6. 1심에서 일본시민으로 충성하면 석방해주겠다는 재판장에게 의자 집어던져 법정 모독죄 추가. 7. 1심애서 7년형 인도 받음.(33인보다 더 많은 형을 언도받음) 8. 2심에서 3년형으로 감형 9. 상고하지않음 '나라가 없으니 어딜가도 갇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상고하지 않겠다' 10. 악명 높은 서대문 형무서로 이감 11. 칼에 찔렸던 옆구리에서 계속 피고름이 나고 썩어감. 12. 감옥에서도 여전한 항일 정신으로 모진 고문이 계속됨. 13 고문 : 손톱을 다 뺀지로 뺌, 고추가루 탄 물을 코에 붓고, 17살 소녀를 발가벗겨 매달아 때림. 옆구리 칼에 의한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았음 14. 3.1절 1주년에 서대문형무소에서 다시 만세운동 주동함 15. 감형 받고 출소 2일전 모진 고문에 방광이 터져 사망. 16. 아무도 시체를 안찾아감. 17. 부모님이 다 돌아가신 집안은 풍비박산나서 거두어 갈 사람이 없었음. 주변 지인들도 일제의 협박에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 않음. 18. 이화학당에서 시신을 인도함. 19. 출소할거라 믿었던 이화학당 동기들과 선후배들이 새옷과 머리 핀을 준비했었음. 20. 그러나 죽은지 10여일이 지나 시신으로 돌아옴. 21. 그날 이화학당 교정이 썩은 내로 진동했다고 함.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IpQgS6u6W5A, https://theqoo.net/133636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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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옹 꼬띠아르 1975년생 현재 나이 40살 프랑스 배우 중 현재 가장 잘 나가는 여배우가 아닐까 싶음. 마흔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예쁘죠? 걍 예쁨. 이거 보니 러블리까지 함. 이 세상 혼자 살아라. 소피 마르소 1966년생 현재 나이 49살 80년대 우리나라 책받침 사랑을 독차지 했던 소피 마르소 언니. 예쁜것뿐만 아니라 분위기도 후덜덜하쟈냐 심지어 초딩때도 분위기 쩔었쟈냐 멜라니 로랑 1983년생 현재 나이 32살 '잘 있으니 걱정 말아요' 라는 영화에서 보고 천사 강림한 줄 알았음. 나도 다음 생애엔 이런 얼굴로.. 아멘 언니 나도 알라뷰 레아 세이두 1985년생 현재 나이 30살 최강 동안을 자랑하는 레아햏. 굳이 말하지 않고 눈빛 만으로 사람을 제압할 것 같쉬먀. 헉 소리 나네예. 남자친구한테 이렇게 쳐다보면 미..미안해 소리 바로 나올듯ㅋㅋㅋㅋㅋㅋㅋ 록산느 메스퀴다 1981년생 현재 나이 34살 뭐야 이 새로운 언니는.. 세상은 넓고 미인은 많다. 그지같은 세상. 스테이시 마틴 1991년생 현재 나이 24살 우리나라에는 많이 알려져있지 않은데 프랑스의 떠오르는 신예 배우에요. 아 깜놀 님 인형인줄. 좋겠슈 예뻐서. 샤를로뜨 갱스부르 1971년생 현재 나이 44살 저한테는 이 언니가 프랑스 분위기 미인 1등이긔. 이 언니의 포스는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긔. 정석 미녀는 아니지만 제 눈엔 최곱디다.
김수로왕 부인과 바보 온달은 외국인이다.
가야는 신라보다 99년 늦은 AD 42년에 건국되었습니다. 당시 김해 지역은 9명의 촌장(九干)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내가 있는 곳은 어디냐?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 임금을 얻으리라.” 이에 촌장과 주민들이 구지봉에 모여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는 ‘구지가’ 노래를 부르며 한나절 내내 춤을 추자 하늘에서 자줏빛 줄에 붉은 궤짝이 내려왔고 상자를 열어보니 6개의 황금알이 나왔다네요. 그중 가장 먼저 깨어 난 이가 김수로왕이 되어 금관가야를 건국했고, 나머지 5알에서 태어난 동생들이 각각 나머지 5개 가야국의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6년 뒤 김수로왕은 결혼하라고 성화를 부리는 아홉 촌장 들에게 “귀인이 바다 건너올 것이다.”라며 맞으러 나가게 합니다. 그러자 정말 붉은 돛을 단 배가 나타났 는데, 왕이 직접 데리러 오지 않으면 내리지 않겠다고 버티자, 수로왕이 그 말이 일리가 있다며 직접 맞이하러 가니 허황옥이 “저는 인도 아유타국 공주로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 입니다.”라고 밝혔다지요. 이에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임시 궁궐을 마련하고 2박 3일간 지낸 후 김해로 되돌아와 알콩달콩 살며 무려 10명의 아들을 두었다는데, 태자 거등왕은 김해 김씨로서 후계를 잇게 되니 현재 대한민국 최대 가문 400만 명의 조상님이 되셨고, 두 아들은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김해 허씨가 되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스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같은 허황후의 인도 공주 기록에 대해 오랫동안 학계는 불교가 도래한 뒤 가문의 신성함을 강조하고자 인도에서 왔다고 윤색한 것으로 추정했는데, 2009년 서울대 의대팀이 김해 이안리 고분 인골을 분석해보니 인도 남부인과 유사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준 바 있고,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고려대학교 조호영 교수팀에 의뢰해 김해에 있는 파사석탑 재질을 분석해보니 우리나라 돌이 아니라는 것도 밝혀진 상황입니다. 따라서 허황옥 공주가 인도에서 온 것은 거의 확실해지고 있습니다. 이미 《삼국유사》에서 일연 스님이 김해 호계사 파사석탑의 유래를 설명하는 내용에 “허황옥 공주가 중국 동한 건무 24년(AD 48년) 서역 아유타국에서 싣고 왔다. 부모의 명을 받고 바다를 건너 가야로 오려고 했는데 풍랑이 심해 되돌아오자 아버지가 석탑을 싣고 가라고 명령해 배에 실으니 곧 바다가 잔잔해져 두 달여 만에 가야까지 왔다. 탑은 모가 4면에 5층이고 돌에는 미세한 붉은 반점 색이 있는데, 그 질이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돌이 아니다.”라고 적었습니다. 그 사실을 700여 년 뒤 다시금 현대 과학으로 입증한 것이죠. 또한 인도인인데 왜 성이 허(許)씨냐고 반박하는 경우도 있는데 ……, 같은 시대 이스라엘 땅에 살던 귀족 가문 도 허(Hur)씨였어요. 말도 안 된다고요? 아뇨, 진짜에요. 영화 ‘벤허(Ben Hur)’ 보셨을텐데요. 주인공의 이름이 ‘벤’이고 성이 ‘허’씨에요. 유태인 중 ‘허’라고 불리는 가문이 있으니 한국과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인도에 허씨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같은 기록을 재해석해보면, 신라 혁거세와 마찬가지로김해 지역에 나타난 북방 철기 세력이 기존 토착 세력을 아울러 금관가야를 세웠으며, 뒤이어 인도에서 유래한 남방계 해양 세력이 도착해 두 세력이 권력을 나눠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삼국사기 열전》에 실려 있는 ‘바보 온달’ 이야기에는 당시 고구려의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고구려가 내분으로 약화되던 25대 평강왕 시절에 그의 딸,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溫達)에게 시집간 뒤 남편을 훌륭히 교육시켜 결국 온달을 장군으로 만들었고, 그후 침략한 중국 후주(後周)군과 맞서 싸워 이기고는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 출정했다가 결국 전사했다는데, 최근 일부에서는 온달이 이란 북쪽 사마르칸트에 살던 스키타이계 유목민인 소그드(Sogd)인으로서, 당시 중국을 거쳐 고구려로 귀화한 세력이 아닐까 하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인들이 보기엔 아리아계 백인에다가 고구려 말도 못하는 그들이 추하고 바보스러워 보였을 거라는 거지요.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당시 중국에 피난 온 소그드 왕족이 쓴 성씨가 온(溫)씨였다고 하고, 고구려 각저총 벽화 ‘씨름도’에서도 확연히 우리와 다른 서역인이 등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신라 원성왕릉으로 알려진 괘릉의 무인상에도 서역인 모습을 한 조각상이 남아 있기에 그럴 가능성도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즉,당시 평강왕으로선 귀족들의 병력 동원이 여의치 않아 왕실 직할 병력이 작다 보니 이주민 세력인 소그드인의 우두머리인 온달을 사위로 맞아 이주민 소그드인들을 직할 군사로 편입해 과감히 영토 회복 전쟁을 벌였을 거란 거지요. 그러니 평강공주는 울다가 바보 온달에게 시집간 게 아니라 이주 외국인 온달에게 시집가라고 하니 싫어서 울었던 것은 아닐까요?
세계 식사 예절
프랑스 X : 손을 무릎에 두기 O : 두 손을 테이블 위에 두고 먹기 ▷ 포크나 칼 같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손목과 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자. 독일 X : 칼로 감자 자르기 O : 포크로 감자 으깨기 ▷ 칼로 감자를 자른다는 건, 감자가 덜 익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크로 감자를 으깨자. 그레이비 소스를 끼얹어 먹기에도 편하다. 스페인 X : 밥 먹자마자 자리 뜨기 O : '소브레메사(sobremesa, 저녁 식사 후 차를 마시며 이야기 하는 시간)'을 즐기자 ▷ '소브레메사'는 음식을 먹고 소화하는 시간이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도 하고 편히 쉬기도 한다. 영국 X : 아스파라거스를 도구로 먹기 O : 손으로 아스파라거스 먹기 ▷ 아스파라거스가 드레싱 혹은 디핑 소스와 함께 나올 땐 손가락을 사용한다. 줄기 끝을 잡고, 소스에 찍어서 한입 베어 문다. 딱딱한 부분은 접시 가장자리에 놓자. 헝가리 X : 맥주 마시면서 '치어스'라고 하기 O : 술이 담긴 잔이라면 서로 부딪쳐서 땡그랑 소리내기 ▷ 1848년 헝가리 혁명이 있었을 때, 헝가리를 이긴 오스트리아 군인들이 맥주잔으로 건배를 했다. 헝가리 사람들은 150년간 맥주로는 건배를 하지 않는다. 그 전통은 아직 남아 있다. 멕시코 X : 타코를 칼, 포크를 사용해 먹기 O : 손으로 먹기 ▷ 현지인처럼 먹기 : 엄지, 검지, 중지를 사용해 타코를 집어 먹자. 조지아 X : '수프라(supra, 덕담을 나누며 술을 마시는 것)' 도중에는 와인을 홀짝이지 말자 O : 건배할 때는 한 번에 마시기 ▷ 수프라는 축하할 일들이 많을 때 열리는 저녁파티다. 연회를 집행하는 사람을 일컫는 '타마다(tamada)'는 축하할 일들의 숫자를 알려준다. 다행히도 술잔은 작은 편이다. 일본 X : 젓가락을 밥공기에 꽂아두기 O : 가로로 놓기 ▷밥공기에 젓가락을 꽂는 것은 일본 불교에서 봤을 때 죽은 사람에게나 하는 의식이다. 젓가락은 접시 옆 혹은 그릇 위에 가로로 두자. 한국 X : O : ▷ 다 아시죠?^^ 태국 X : 포크를 사용해서 음식을 먹기 O : 포크는 숟가락에 음식을 옮기는 용도로 쓰자 ▷ 태국에서 포크는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포크와 숟가락은 쭐랄롱꼰 왕이 1897년 유럽을 방문하고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그 전까지 타이 사람들은 손으로 밥을 먹었다. 또한 중국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면 젓가락은 사용하지 말길.
프랑스는 어째서 알제리를…?
월요일은 역시 역사지. 사실 어제, 7월 5일은 알제리의 독립기념일이었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19세기 초중반, 굳이 왜 알제리를 식민지로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프랑스의 19세기 초중반이면 나폴레옹 전쟁 이후 왕정이던 시절이며 본격적인 강대국으로의 재진입은 아마도 크림 전쟁 이후였었다. 알제리는 왜? 당연한 얘기겠지만 불어권 게시판(가령 Quora?)에서 이 주제가 올라오면 단번에 화약고로 변한다. 우리랑 똑같이 식민지 근대화론자와 수탈론자의 논쟁은 물론이거니와 불어권 특유의, 그러니까 구 프랑스 식민지들이 네이티브로 불어를 쓰기 때문에, 서로들 프랑스 옛날 자료를 근거로 불어로 키배를 벌이는 광경은 상당히 흥미롭기 짝이 없다. 우리는 일본과 우선 언어 때문에 키배하기가 쉽지 않다. 자, 일단 북아프리카의 노예 시장부터 알아봅시다.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 이후 북아프리카로 물러난 무어인들은 형식적으로 오토만투르크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지만 워낙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거의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느낌으로는 조선의 사대관계보다 아주 약간 더 종속적인 정도? 지도자를 “국왕(ملك)”이라 부르지 않고 “총독(داي)”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총독을 주민투표로 뽑았다는 점이 더 신기한데, 이들의 주된 먹거리는 농업 외에 노예 무역이었다. 그리고 그 노예화 대상은 주로 남유럽에 살고 있는 크리스트교 신자들이었다. --------- 여기까지 보면, 노예 무역 막다보니 어느새 식민지를? 하는 잘못된 인식을 가질 수 있다. 노예 무역을 언급한 이유는 당시 유럽인들의 의식 속에 북아프리카가 해적 소굴로 비쳐졌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프랑스가 식민화에 나서는 19세기 초중반은 영국이 대양을 재패한 시기이기 때문에 해적 노릇하기가 영 쉽지 않았었다. 영국만이 아니라 더 이상의 전쟁을 중단한 프랑스와 미국 해군도 해적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그 시기에는 해적질/노예 사냥으로 밥벌이를 못 했다는 얘기다. 이는 자연스럽게 북아프리카 내의 내분으로 이어졌고, 이 틈을 타서 프랑스가 진출/침략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리고 이때 부채가 등장한다. 부채? 빚의 의미도 있고 선풍기의 의미도 있는데 둘 다 맞다. 프랑스 대혁명이 나면서 프랑스는 유럽에서 고립됐고, 부족한 밀을 알제리 지역으로부터 수입했는데 대금을 내 줄 형편이 못 됐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전 유럽 국가들과 전쟁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절반만 상환하고 전쟁이 끝나면 다 갚겠다며 사절을 보냈는데… 그 말에 화가 난 알제리 지역의 총독이 프랑스 사절을 부채로 때렸다. 짤방의 이 사건(Le coup d'éventail, 1827, 출처는 위키피디어)이 프랑스 국내에 일으킨 반향이 매우 컸다. 모욕적이라 느낀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는 알제리 침략을 기획하기 시작한다… --------- 여기까지 보면, 사소한(?) 사건 하나로 인해, 부채를 탕감하려고 나라를 접수한(…) 이야기가 된다. 물론 시발점이 맞기야 하지만 고작 부채 때문에 알제리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크게 세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영국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이미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결과로 지브롤터를 점령(1714)한 영국에 대해 프랑스도 아프리카 해안 어디엔가 거점을 마련해야 했다. 이미 나폴레옹이 계획을 세웠으며 측량도 다 해놓았지만 유럽 내 전쟁이 더 급했었다. 한편으로는 무하마드 알리 치하의 이집트를 동원하여 알제리 지역을 점령하는 구상도 있었다고 한다. 재주는 이집트가, 돈은 프랑스 걷어가자는 계획이었으나 종주국인 오토만투르크가 이 계획을 좋아하지 않았다. 안그래도 혼자 설치려는 이집트가 더더욱 커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통적인 오토만투르크의 친구(…) 프랑스로서도 오토만투르크의 지원이 없다면 실행이 불가능한 구상이었다. 두 번째. 프랑스 국내 사정이다. 워털루 전투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뒤를 이은 왕정으로서는 국내 지지율 상승을 위해 “뭔가 확실한 건수”가 필요했다. 게다가 가난한 국내 농부들(특히 코르시카 지역)의 진출을 도울 수 있었다. 세 번째. 프랑스 국외 사정이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글로벌 파워”로서 다시금 내세울 만한 “건수”가 필요했다. 게다가 위치상 서아프리카 식민지역들과 연결도 가능했다. --------- 그런데 말입니다. 역사만 얼핏 보면 1830년에 알제리 전역을 프랑스가 식민화 시킨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19세기 말까지도 알제리 전역을 프랑스가 점령하지는 못 했었다. 매우 긴 시간동안 군사 작전을 실행해야 했다는 의미다. 저항이 거센 것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진행시키지 않은 탓이 컸다. 위의 부채 사건으로 프랑스가 군대를 보낸 것은 맞지만 처음에는 알제 항구만 폭격했었고, 더 이상 들어가려 하지 않았었다. 처음부터의 계획은 아니었던 셈이다. 하다보니까 끝까지 들어가고, 해안가 반란도 막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게 부드럽게 진행되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학살과 방화는 도처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키배가 일어나는 겁니다. 알제리라는 독립된 나라가 그당시에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인들 입장에서 알제리 지역은 “발견됐다”거나, 알제리라는 나라를 프랑스가 130년 동안 세웠다고 볼 여지가 있지만, 알제리인들 입장에서는 프랑스인들 기록을 보더라도 너무나 가혹하게 점령하고 지배한 증거가 많은 것이다. 결론은 영원한 키배… 1960년대 알제리와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의 동성애 합법화
뭔가 아쉬워서 또 쓰는 주말 특집, 유럽, 특히 프랑스의 동성애 합법화 연도다. 이런 그래프(참조 1)를 보면 프랑스가 참 쿨하다고 느껴지는데, 합법화된 연도를 보시라. 1792년이다. 당연히 뭔가 좀 이상하다 생각하실 수 있을 텐데, 1789년 대혁명 직후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겠다. 대혁명 직후, 모든 적폐를 없애는 과정에서 과거 왕정 하에서 단죄(처벌은 화형이었다, 참조 2)됐던 범죄들을 몽테스키외의 죄형법정주의 정신에 따라 법률(형법)에 적시하기 시작했을 때가 바로 저때부터였다. 이게 무슨 말이냐, 대혁명 직후 제헌의회는 왕정 시절의 형법을 완전히 바꾸기로 한다. 보통은 “르 플르티에(Le Peletier)”로 알려진 Saint-Fargeau 후작, Louis-Michel le Peletier(참조 3)가 형법을 재작성했는데, 그는 “진정한 범죄(vrais crimes)”만을 법에 따른 범죄로 규정했다. 즉, 앙시앙 레짐에서 범죄로 간주했던, 전제왕권이나 조세, 봉건제, 미신에 따른 “모조 범죄(délits factices)”를 형법에서 제외시켰다. 자세히 보셔야 할 것이, “미신”은 프랑스 대혁명에서 곧 종교를 뜻하며, 신성모독을 형법상 범죄에서 뺀 것과 동일했다. 그러므로 동성애도 이제 처벌 근거가 사라진 것이다. 다만 첫 번째 영웅인 “르 플르티에”는 루이16세 사형에 찬성표를 던진 후, 바로 그날 저녁 전-근위대원에세 암살당한다. 그렇다면 1791년 완성되고 1792년 공표된 이 형법이 그대로 이어졌을까? 여기서 두 번째 영웅(?)이 등장한다. 다름 아닌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이 유럽에, 아니 전세계에 미친 영향은 바로 법전이었는데, 나폴레옹 법전의 형법은 1792년의 형법에 손대지 않고, 그 대신 죄형법정주의(Nulla poena sine lege)를 더 강화시킨다. 원래는 1789년 대혁명 직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에 반영(제5조 및 제8조)되어 있던 것을, 1810년 나폴레옹 형법(code pénal) 제4조에 명문화시킨 것이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나폴레옹 법전도 퍼졌고, 그에 따라 베네룩스 3국과 모나코 등이 동성애를 형법에서 지웠으며, 그 형법이 계속 유지된다. 여기까지 보면 굉장히 프랑스가 진일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뿌리 깊은 혐오가 법으로 없어진다면 오산이다. 경찰은 공공질서 확립이라는 목표로, 동성애자들을 파일로 만들어서 관리했었다. 법도 교묘해진다. 비시 정부는 합의연령을 집어넣어서 이성간에는 13세, 동성간에는 21세로 조건을 붙인다. 이걸 어기면 범죄였다. 얼핏 봐도 두 연령을 좀 조정해야 하잖나 싶은 생각이 드실 텐데, 비시 정부의 이 형법 조항은 꽤 오랫동안 유지된다. 바로 이 논란에 불을 붙인 장본인이 미셸 푸코다. 모두들 판옵티콘만 기억하시겠지만(…) 그 자신이 동성애자였던 미셸 푸코가 이 동성애와 이성애 사이에서의 의제강간연령(Majorité sexuelle)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바로 “수치심의 법(La Loi de la pudeur, 1978)” 논쟁이다. 그러나 지식인이 뭔가를 주장한들 그 실행은 정치인이 한다. 여기서 세 번째 영웅, 프랑수아 미테랑이 등장한다. 미테랑은 1981년 대선 유세를 하면서, “동성애 처벌이 이성애 처벌보다 과하다, 이건 이상한 일”이라 선언한다. 미테랑은 당선 이후, 형법 수정을 위해 법무부장관(Robert Badinter)을 의회로 내보낸다. “영국 법정은 더글라스 경을 유혹했다 하여 오스카 와일드에게 유죄를 선고했었다. 프랑스 법정은 17세의 랭보를 유혹했다 하여 베를렌을 처벌할 수 없었음을 안다. 더군다나 실제로는 랭보가 베를렌을 유혹했었다."(참조 4) 이 연설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표결 끝에 이성이든 동성이든 의제강간연령이 15세로 조정된다. 물론 더 자세한 이야깃거리들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 관점에서 15살이 낮아보이기는 한데 이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참조 5). -------------- 참조 1. 레딧에서 가져왔지만, 대체로 사실에 맞다고 판단된다. https://www.reddit.com/r/europe/comments/hhub6i/legalization_of_homosexuality_in_europe/ 2. 칙령에 따른 처벌이기는 했는데 정말로 화형당한 인물은 별로 없어서, 18세기 전체에 걸쳐 5명이 안 된다고 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베르사이유”에서 동성애자로 나오는 루이 14세의 친동생이 양성애자였으니… 3. 나폴레옹 법전 작성에 참여한 Parme 공작, Jean-Jacques-Régis de Cambacérès가 동성애를 합법화시킨 인물로 오해받을 때가 있는데, 그 개인이 동성애자였고 그 성향을 숨기지도 않아서, 항상 나폴레옹의 놀림감이 됐던 사실은 맞다. 하지만 그는 민법 작성자이지 형법 작성자가 아니었다. 4. DÉPÉNALISATION DE L'HOMOSEXUALITÉ : ROBERT BADINTER, INTERVENTION À L'ASSEMBLÉE NATIONALE LE 20 DÉCEMBRE 1981(2018년 5월 24일): http://culture-et-debats.over-blog.com/article-511880.html 5. «LA MAJORITÉ SEXUELLE À 15 ANS, UNE SPÉCIFICITÉ EN DROIT FRANÇAIS»(2014년 11월 25일): https://next.liberation.fr/sexe/2014/11/25/la-majorite-sexuelle-a-15-ans-une-specificite-en-droit-francais_1150503 PS 1. 1858년의 터키가 튀어보일 수 있는데 탄지마트 개혁(1839-1876) 당시의 오토만 투르크제국은 프랑스 법을 들여왔었다. 그래서 동성애가 처벌 대상 범죄에서 사라진 것. 참조: http://faith-matters.org/images/stories/fm-publications/the-tanzimat-final-web.pdf PS 2. 의외로 1890년의 바티칸도 튀어보이실 수 있다. 비밀은 생각보다 단순한데, 바티칸이 이탈리아 형법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도 오토만투르크처럼 나폴레옹 형법을 그대로 들여왔었으나 시칠리아와 이탈리아왕국의 형법을 통일시켰던 때가 1890년(Zanardelli 형법)이다.
습관을 연구한 공학자, 길브레스 부부 (2)
지난 글에 예상보다 반응이 좋아서 놀랐습니다. 괴짜 부부에 얽힌 일화를 나열했을 뿐이고, 어쩌면 지루할 법한 얘기인데도 말예요. 하지만 저도 그렇습니다. 처음엔 프랭크 길브레스와 동작 연구에 대해 알아보다가, 우연히 이들 부부의 가정사 얘기를 보게 되었죠.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어' 싶은 뜨악함과 함께, 이들 가족에 대한 흥미도 자연스럽게 생겼습니다. 지난 글을 적은 이유도 그런 감상을 다른 분들과 공유하고 싶어서였지만, 과연 얼마나 의도가 통했을까요? 각설하고 다시 길브레스 부부 얘기입니다. 흐름대로라면 릴리언 길브레스의 삶에 대해 얘기해야겠지만, 우선은 프랭크 길브레스 얘기부터 하죠. 한 가지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올바른 습관을 익히면, 다른 작업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 일하는 데 도움이 되는 습관은 하는 일의 종류와 상관없이 중요하다. 한 가지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습관을 익히는 방법을 알게 된 사람은 당연히 다른 일에도 같은 방법으로 좋은 습관을 지니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상은 헨리 간트의 책, <일과 임금 그리고 이익>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합니다. 헨리 간트는 오늘날 간트 차트로 알려진 일정 관리 도표를 창안한 인물인데, 세계 최초의 컨설턴트이자 과학적 관리론을 창시한 프레데릭 테일러의 제자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테일러나 길브레스 부부와도 생각이 통하는 부분이 있었겠죠. 때는 1907년, 아직 프랭크 길브레스가 살아 있을 때 얘기입니다. 길브레스 부부는 무언가를 계기로 프레데릭 테일러와 만날 기회를 얻습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두 거장은 이내 서로가 하는 연구가 거의 유사하단 걸 눈치채죠. 테일러의 <시간 연구>와 길브레스 부부의 <동작 연구>는 다소 차이점이 있었지만 노동자의 능력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작업 방식을 개선한다는 발상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프레데릭 테일러 개인적으로도 살면서 지금껏 걸어온 길이 프랭크와 유사했습니다. 우수한 성적을 올린 학생이었지만, 개인 사정으로 진학을 포기하고 직업 전선에 뛰어든 점도,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 이윽고 자신만의 분야로 독립하게 된 것도 비슷했죠. 프랭크와 테일러 사이에 어느 정도 교감이 있었던지, 1912년 프랭크는 <과학적 관리 입문>이라는 문답 해설서를 출간해 테일러의 이론에 관심과 지지를 보였습니다. 프레데릭 윈슬로우 테일러. 세계 최초의 컨설턴트. 부유한 집안 출신에 직장에 다니면서 이런저런 특허로 많은 돈을 벌었고, 은퇴 후 강연, 자문, 저술 활동을 왕성하게 수행했습니다. 작업장에 스톱워치를 끌어들여 노동자의 작업과 휴식 시간을 통제한 게 그의 업적 중 하나인데, 이후 노동자들이 반발하자 1912년 미 의회에서 작업장에서 스톱워치를 쓰지 못하게 하는 법까지 제정했다고 하죠. 또 테니스와 골프를 잘 쳐서 1881년 미 테니스 복식 챔피언십에서 우승 트로피를 따는가 하면, 1900년 하계 올림픽에서 골프 종목 4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골프채를 손수 디자인하기도 했다네요! 테일러와 만남을 가진 지 몇 년 후, 프랭크는 <동작 연구(1911년)>라는 저서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재미있게도 1911년은 테일러가 <과학적 방법론>을 출간한 해이기도 합니다. 이 <동작 연구>에서, 프랭크는 작업자의 동작을 분석해 가장 기초 단위 요소 17개로 분류하고, 이들 각각에 부호를 붙이는 한편 효율적인 행동과 비효율적인 행동을 구분합니다. 자신이 고안한 이 새로운 체계를, 프랭크 길브레스는 서블릭therblig이라고 지칭합니다. 혹시 눈치채셨나요? 서블릭이란 이름은, 바로 길브레스gilbreth 성을 뒤집어 쓴 거란 사실을요. 이것 또한 그가 남긴 묘한 기행 중 하나입니다. 1912년 이들 부부에게 또 한 번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부인 릴리언이 그동안 부부가 함께 연구한 바를 토대로 산업심리학 논문 한 편을 써서 대학 측에 학위논문으로 제출합니다. 하지만 대학 당국이 논문 접수에 조건을 걸죠. 대학 측 논리는 이렇습니다. 릴리언의 주전공은 영문학이고, 따라서 제출한 논문은 학위 취득에 부적합하다. 하지만 릴리언이 본교로 돌아와 1년간 산업 공학 전문 실습을 수료한다면 논문을 접수받겠다. 문제는 미 동부에 사는 릴리언이 캘리포니아에 있는 모교로 홀로 돌아가 수업을 수료하는 게 말처럼 그리 쉽지 않단 사실이었죠. 고민하는 릴리언을 위해 프랭크가 아이디어를 내죠. 그는 출판업자를 찾아가 설득한 후, <산업공학잡지>에 릴리언의 논문을 1년간 연재할 수 있도록 허가를 따냅니다. 릴리언의 논문은 1914년 <경영심리학>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판됩니다. 이 책에서 릴리언은 여러 기업들이 권위와 수직적 명령에만 의존하는 전통적 체제에서 탈피해 과학적인 관리방법론에 기반한 새 체제에 따라 운영해야 한다고 역설하죠. 책에 적은 저자명은 L.M.Gilbreth였습니다. 저자가 여자인 게 알려지면 불리한 대우를 받을까 우려해서 필명처럼 이름을 적은 거죠. 그러다보니 평소 길브레스 부부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대체 저자가 누구냐는 이야기가 나왔던 모양입니다. 그럴 때면 프랭크 길브레스는 자신에게 질문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했다지요. '우린 결혼한 사이입니다.' 마치 두 사람은 일심동체이니 누가 썼느냐를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는 것처럼 말이죠.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학 측은 새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릴리언이 경영 혹은 심리학 학위를 주는 어느 대학에서건 전문 실습을 받는다면 학위를 수여하겠다고요. 그 제안을 받아들여 릴리언은 1915년 브라운 대학 응용경영관리 박사 학위를 무사히 취득합니다. 학위를 취득한지 불과 3일 후에 출산을 하게 됐지만요. 1916년 부부는 노동자의 피로를 유발하는 요소들을 분석한 <피로 연구>를 발표합니다. 1917년엔 <응용동작연구>를 내놓으면서 동작연구를 위해 활동사진기 촬영, 작업자 몸에 꼬마전구를 달아 행동 궤적을 찍는 사진 등 독창적인 방법론을 제시했고요.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프랭크는 육군 소령으로 입대합니다. 릴리언은 부상 군인의 재활 연구에 뛰어들죠. 장애인들을 위해 몇몇 장치를 새로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팔만 가지고도 쓸 수 있는 타자기 같은 거죠. 부부는 전쟁 후 상이 군인들의 재활을 돕는 전쟁위험보험법 통과에도 협력했습니다. 이러한 연구 성과는 1920년 <장애인을 위한 동작 연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죠. 친구 프레데릭 테일러도 그랬지만, 길브레스 부부는 동작 연구가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여 더 나은 처우를 받게 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생각한 건 프랭크 자신의 개인적 경험 탓이기도 했죠. 건축 일을 할 때, 프랭크는 자신의 동작 연구 성과를 실제 현장에 적용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프랭크의 저서 <동작 연구>는 벽돌 쌓기나 건축에 관계된 사례가 많습니다. 예컨대 벽돌쌓기의 경우 동작연구를 적용했을 때 사용하는 동작 수는 18개에서 5개로 줄고, 시간당 쌓는 벽돌 수는 175개에서 350개로 크게 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작업 생산량은 두 배가 증가했죠. 한편, 테일러는 작업자의 근로 의욕을 높이기 위해 성과급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올바른 작업 방식으로 생산성을 높이면, 그 혜택이 곧 작업자에게 돌아가도록 설계한 거죠. 또 작업자 개개인의 효율이 증진되면 회사 전체의 수익성도 높아집니다. 결과적으로 노사 모두 윈윈이죠. 정작 노동자들에게는 기계적 수탈과 착취를 위한 이론으로 비판받았지만, 프랭크의 저서에는 작업자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동작 연구>의 몇몇 구절을 아래 옮겨 적을까 합니다. 작업자가 맡은 일 이외의 건강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전적으로 회사 복지 부서의 담당이다(...) 작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작업자의 개인 생활을 살펴보는 일도 복지 담당 부서의 역할이다. 복지 부서는 작업자가 개인은 물론 속한 집단에서 더욱 가치 있는 경제인이 되도록 지원한다. ...따라서 작업자를 배치할 때는 작업자가 일을 대하는 태도와 성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작업자는 자신의 성향에 적합한 작업에 배치될 때 작업 지시를 더 잘 지키며 더 높은 성과를 낸다. 수습공이 당장 오늘 해야 할 일을 훈련하면 그 훈련은 무조건 실패한다. 수습공은 이론적인 훈련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실습에 적응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충분한 실습이 없으면 수습공은 실제 작업에서 연습을 하게 되고 결국 제대로 된 결과를 얻지 못한다... 미국의 건축 분야에서 수습공이 훈련을 받는 기간은 일반적으로 3년 정도이며 때로는 21세가 될 때까지 훈련을 받기도 한다. 최상의 조명은 작업자가 피로를 해소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줄여준다. 가장 좋은 조명과 가장 나쁜 조명의 설치비용 차이는 눈의 피로를 줄여 휴식 시간을 단축함으로써 절약되는 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많은 생산량을 달성하려면 작업자가 개인 공구를 쓰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작업자에게 개인 공구를 쓰게 하면, 작업자는 공구 구매 비용을 아끼고 도난을 당할 경우 손해를 줄이기 위해 같은 종류의 공구는 한 가지 크기만을 구입한다. 그러나 대부분 작업에서는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다양한 크기의 공구를 사용해야만 보다 많은 생산성을 얻을 수 있다. 1910년대 인물의 시각으로 적은 것이기에 오늘날 현실과는 다소 맞지 않는 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프랭크 길브레스가 얼마나 꼼꼼하게 작업자들을 봐오고 개선책을 나름대로 궁리했는지를 알 수 있는 구절들이라고 생각합니다. https://ridibooks.com/books/2602000003 프랭크 길브레스의 <동작 연구>. 이 책이 번역 출판되어 있단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이미 출간된 지 100년도 넘은 고전이라 할 만한 책이네요. 릴리언 길브레스 이야기는 이 다음 글에서 적겠습니다.
여행사진 뽀샵 요청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_+
어때여 연휴의 시작 행복하게 보내고 계세여? 연휴니까 좀 웃으시라고 오늘은 웃긴거 가져와봤어여!! 네덜란드의 한 음식 블로거 Sid Frisjes씨가 4chan에 자기 여행 사진 뽀샵을 요청했는데 벌어진 일들을 지금부터 보여드리려고 해여+_+ 울나라도 이런 뽀샵놀이가 많은데 외쿡애들도 이러고 노는군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누구 내 손가락이 에펠탑 위에 있게 뽀샵해 줄 수 있나여?ㅋ 이케 올렸다고 해여..ㅋㅋ 그랬더니... 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맞네여 "The Eiffel Tower"가 손가락 밑에 있네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기린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포탈이 열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웜홀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와중에 지게차는 현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창의력대장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데없이 이티뭐임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려 다리도 길어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신발도 신겨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에펠탑 지어지고 있는중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맞네 손가락 밑에 에펠탑 있는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귀여워+_+ 기린한테 밥주는 기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 손 아래 둘 수 없다면 차라리 없애버리겠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건 또 뭨ㅋㅋㅋㅋ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왓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출처 : http://4archive.org/board/b/thread/61047493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뭐가 젤 웃기세여? 아 올리면서 웃겨 돌아가실뻔했네옄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습관을 연구한 공학자, 길브레스 부부 (1)
1904년 10월 19일, 미 오클랜드. 막 결혼식을 마치고 나온 신혼부부가 기차에 올라 몇 마디 대화를 나눴습니다. '아이는 몇이나 낳았으면 좋겠어?' '글쎄, 한 다스만 낳지. 기왕이면 남녀 각각 여섯 명씩.' 대화 내용이 살짝 소름끼치긴 합니다만, 결과적으로 이 말은 실제로 실현됩니다. 평생 길브레스 부부는 여섯 명의 아들과 여섯 명의 딸을 가졌고, 개중 다섯째 아들과 일곱째 딸에게 자신들 이름을 각각 붙여줬죠(프랭크 2세, 릴리언 2세). 비록 둘째는 1912년 디프테리아로 사망하지만, 나머지 형제자매들은 모두 잘 성장해 주었습니다. 길브레스 부부와 11명의 자식들. 자녀들은 부부의 실험 연구 대상이자 참가자였습니다. 부부는 여러 번 자녀들이 접시를 닦는 동작을 촬영해 분석하거나, 그들이 개발한 방식으로 타자기 사용을 보름 만에 숙지하게 교육하는 등 일상 생활에 그들의 연구를 접목했습니다. 그렇지만 자녀들이 기억하는 부모는 유머러스하고 자상한 사람들이었다고 하네요. 어째서 남편, 프랭크 길브레스가 열두 명 자식을 원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프랭크 길브레스는 매번 가족들을 데리고 국립공원이나 영화관에 입장할 때, 혹은 기차나 차편을 타야 할 때면 항상 단체 할인을 받아냈다고 하네요. 나중에 프랭크는 아이들 중에 쌍둥이나 세쌍둥이가 없어서 섭섭해했답니다. 여러 명 아이들을 한 번에 낳아 한 번에 기르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나요? 뉴저지 몽클레어에 집을 한 채 마련해 두고, '과학적 관리법과 낭비의 동작을 없애는 학교'라고 이름붙인 집에서 길브레스 부부는 평생 자신들의 연구를 그 자신과 자기 자식들에게 적용했습니다. 나중에 셋째 어네스틴과 다섯째 프랭크 2세는 자기 가족들이 그 집에서 살았던 경험담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는데요. 이 책이 어찌나 유행했던지 속편에 영화, 뮤지컬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기억하는 프랭크 길브레스는 자상하고 유쾌한 가장이었던 모양이지요.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혁신주의 운동이 미국 사회 전체에 영향을 떨칠 때가 1900년대 초 일입니다. 최초의 경영 컨설턴트 프레데릭 테일러가 활발하게 강연, 저술 활동을 하며 자신의 소위 과학적 관리론을 설파하고 다닌 때도 이 즈음이죠. 1904년 결혼한 길브레스 부부가 어떻게 평생에 걸쳐 공동연구를 수행했는지는 잠시 미뤄 두고, 먼저 프랭크 길브레스에 대해 잠깐 조명을 해보겠습니다. 프랭크는 메인 주 페어필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아났습니다.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결과 MIT에 입학 허가를 획득하지만 가정 형편상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하기를 선택했죠. 17세이던 그가 선택한 첫 직업은 벽돌공 수습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차차 능력을 인정받아 현장감독으로 승진했고, 나중엔 아예 독립해 건축회사를 차리게 됩니다. 이때 프랭크 나이가 34세였습니다. 사장이 된 프랭크가 집요하게 파고든 건, 바로 벽돌쌓기의 효율을 높이는 일이었습니다. 다양한 수단으로 현장 연구를 실시한 후, 그가 내린 결론은 바로 불필요한 작업 동작을 선별해내 제거하거나 교정하는 동작 연구였죠. 프랭크는 자기 연구를 바탕으로 건설업계의 작업 방식을 합리적으로 개선하는 여러 방안을 줄줄이 내놓았습니다. <현장 시스템(1901)>, <콘크리트 시스템(1908)>, <벽돌쌓기(1909)> 3부작 저서가 바로 그 방안이었죠. 운명적인 만남은 정말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1903년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한 부유한 집안 여성이 미 동부로 여행을 옵니다. 그녀 응접을 맡은 안내원 미니 번커는 프랭크의 친척이었죠. 결국 미니 번커의 소개로 여성은 프랭크 길브레스와 만남을 갖게 됩니다. 그 뒤 약 1년간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서로 마음이 맞음을 확인한 두 남녀는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되는데요. 이 여성이 바로 프랭크의 영원한 반려, 릴리언 길브레스였죠. 릴리언의 아버지는 독일 태생의 미국인으로 설탕 정제업으로 나름대로 부를 쌓은 인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몸이 약해 집안일에서 자주 릴리언의 도움을 받았죠. 릴리언은 학업 성적이 뛰어났는데, 부모는 대학 진학을 반대했습니다. 자기 딸이 형편 넉넉한 집 자녀와 결혼해 행복하게 사는 게 두 사람의 바람이었죠. 릴리언은 그런 부모를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그렇지만 전 너무 평범해서, 부자들은 아무도 저와 선뜻 결혼하려 하지 않을 거에요.' 설득이 먹힌 건지, 아니면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는 건지, 릴리언은 소원대로 근처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당시 캘리포니아 대학은 주 시민은 누구든지 무료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대형 강의가 많아서 심지어 건물 밖에 텐트를 치고 진행하는 수업도 있었다고 하네요. 또 학교에 기숙사가 따로 없어서 릴리언은 매번 집에서 통학을 해야 했습니다. 전공은 영문학이었는데, 심리학 등에도 관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릴리언은 대학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올려, 졸업식 연사로 연단에 올랐죠. 캘리포니아 대학에선 처음으로 여성이 졸업 연사를 맡은 사례였습니다. 1900년 릴리언은 콜롬비아 대학의 대학원에 지원하는데요. 본인은 영문학 전공을 희망했지만, 지도 교수 소개를 받아 찾아간 영문학 교수는 여학생을 제자로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는 대신, 그녀는 전공을 심리학으로 바꾸어 진학하는데요. 도중에 건강 문제로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1902년 모교인 캘리포니아 대학으로 돌아와 기어이 석사 학위를 마친 후, 릴리언은 바로 박사 과정을 지원합니다. 이때 지원한 전공은 영문학, 부전공으로 심리학을 선택했죠. 이후 1903년 동부 여행 도중 소개받은 프랭크와 1904년 결혼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앞서 적은 그대로입니다. 결혼 이후 프랭크의 연구는 부부 공동의 연구가 되었습니다. 프랭크는 릴리언에게 산업심리학 분야를 공부해 보라고 권유하죠. 릴리언 역시 그 편이 프랭크의 일을 도울 수 있겠다고 생각해 동의합니다. 결혼 당시 이미 프랭크는 길브레스 사Gilbreth inc.라는 컨설팅 업체를 운영하고 있었거든요. 이후 두 사람이 꾸리는 가정 생활은 여러모로 독특했습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1. 그 집에선 항상 심부름거리가 판에 적혀 있었습니다. 용돈이 추가로 필요한 아이들은 자신이 할 심부름거리를 골라 길브레스 부부에게만 자신이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와 입찰액을 적어 제시했는데요. 부부는 이중에 최저입찰액을 제시한 사람에게 응찰해 심부름을 맡기고 용돈을 주었다네요. 2. 프랭크는 매번 조끼를 입을 때면 아래부터 위로 올라가며 단추를 채웠다고 합니다. 그에 따르면, 위에서 아래로 끼우면 7초가 허비되지만, 아래서부터 채워 올라가면 고작 3초밖에 안 걸린다나요? 3. 한번은 면도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면도솔 두 개로 거품을 낸 후, 면도칼 두 자루로 한꺼번에 면도를 하는 편이 효율적이라는 걸 확인하려고 직접 실행에 옮겼다고 합니다. 당연히 면도칼에 목이 베여서 피가 났는데, 자녀들 증언에 따르면 프랭크는 베인 것 자체보다 그걸로 인해 목에 붕대를 감느라 2분이 오히려 허비된 것에 실망한 듯 보였다네요. 4. 평소에 프랭크는 가족 집합 신호로 휘파람을 정해 놓고 스톱워치까지 동원해서 신호 즉시 모든 가족이 무슨 일이 있어도 모이도록 훈련했다고 합니다. 가족들 전체가 모여야 할 일이 있거나 손님이 와서 가족을 소개시킬 때 등 여러 상황에서 휘파람 신호를 이용했다는데요. 어느날 이들 가족이 길가에서 낙엽을 태우던 중, 그만 불이 나무 벽에 옮겨 붙었다고 합니다. 프랭크가 즉시 휘파람을 불자, 불과 14초만에 온 가족이 밖으로 뛰쳐나왔죠. 불은 소방수에게 채 연락할 틈도 없이 꺼졌답니다. 5. 프랭크 길브레스가 가족 중에서도 유난히 특이한 성격이 아니었냐고요? 화장실에는 가족들이 매일 할 일과 공정표가 붙어 있었는데요. 이건 부부가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각종 가사일을 해낼 수 있을지 연구한 결과였습니다. 아이들은 밤에 자기 전 체중을 달아 그래프에 적고, 숙제를 마무리하고 손과 얼굴을 씻고 이를 닦으면 또 도표에 표시를 했습니다. 이때 아내 릴리언 길브레스는 스케줄에 기도하는 것도 표시하고 싶다고 제안했는데요. 프랭크는 심사숙고 끝에 각자 자유로 두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을 내렸다네요. 특이한 성격은 부부 양쪽 모두였던 모양입니다. 1924년 프랭크 길브레스는 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제 1회 국제경영컨퍼런스에 참석하려고 여행길에 오릅니다. 도중에 그는 무언가를 문득 떠올리고 근처 공중전화로 아내이자 파트너인 릴리언에게 전화하죠. '오는 도중에 가루비누 담는 동작을 생략할 좋은 생각이 났는데 어떻게 생각해?' 믿기지 않지만, 그게 프랭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되었습니다. 슬로바키아에 가기도 전에 프랭크 길브레스는 심장병으로 사망합니다. 홀로 남은 릴리언 길브레스에겐 11명의 자녀와 집, 남편이 남긴 사업체와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맡은 일이 남아 있었죠. 프랭크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돌자, 심지어 그동안 길브레스 사와 거래해 온 업체들이 컨설팅 계약 중지를 통보했습니다. 릴리언 길브레스에겐 두 선택지가 있었죠. 모든 일을 접고 고향에 가서 남편 잃은 미망인으로 평생 가족을 돌보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남편의 업무 파트너로서 그의 연구와 일을 이어갈 것인가. 릴리언 길브레스는 남편의 모든 것을 자신이 잇기로 결심했습니다. 산업 공학의 퍼스트 레이디는 그렇게 탄생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