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rlyadop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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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에 관심을 가지게 된 후 캠핑용 조리도구로 스노우픽 칼, 도마 세트를 준비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 제품을 받아 봤을 때는 원목으로 된 나무 도마에 멋지게 수납되는 칼이 더없이 멋져 보였죠.
하지만 캠핑장에서 맛있게 익은 고기를 자를 때 써보니 달랐습니다. 고기에서 좔좔 흐르는 기름이 나무 도마에 쏙쏙 스며들었습니다. 꼼꼼하지 않은 성격의 저는 대충 정리를 하고 집에 가서 설거지를 할 생각이었지만 기름진 나무 도마를 챙기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죠. 결국 플라스틱이나 실리콘으로 된 도마를 또 찾아보던 중…
으응? 그럼 도마에 넣고 다니던 칼은?
…새 칼이 필요하다!
칼을 산다!
그럼 어떤 칼을 사는 게 좋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그 결과, 조건은 2가지.
– 가능하면 작을 것.
– 안전하게 수납할 수 있는 칼집이 있을 것.
바이크에 짐을 실어 몇 번의 캠핑을 다녀오니 짐은 작으면 작을수록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넉넉하게 수납이 가능한 SUV차량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서 짐의 부피가 제한적인 것도 있지만, 집에서 보관하기에도 공간을 작게 차지하는 미니멀한 제품들로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칼날이 접히는 형태의 칼을 사자.”
집 밖에서 사용하는 칼이다 보니 안전하게 수납이 가능한 제품들 중에서 칼날이 접히는 형태의 칼을 선택했습니다. 칼집보다는 훨씬 부피를 줄일 수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간간이 바이크 정비에 사용할 때 말고는 거의 택배박스 개봉할 때만 사용하게 되는 굴러다니는 레더맨 멀티툴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기름 때가 묻은 기계부품들을 다루거나 먼지 많은 택배박스 뜯을 때 사용하던 도구를 조리용 도구로 사용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판단. 새로운 접이식 칼을 찾아봅니다.

오… 역사가 깊은 오… 오피넬

그렇게 며칠을 잠까지 설쳐가며 마음에 드는 칼을 찾던 중 만나게 된 오피넬(Opinel). 오래된 프랑스 회사네요. 프랑스라니, 벌써부터 왠지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어떤 종류가 있는지 훑어보기 위해 “opinel knife”로 먼저 검색을 해봤습니다. 스크롤이 어마어마 합니다. 일단 나무로 된 손잡이에 칼날을 접어서 수납이 가능하군… 이란 생각을 하면서 아래로 아래로… 스크롤 하며 발견한 사진 한 장.

콘테스트? 125년?

발견한 사진 속 모델은 오피넬 창업 125주년이었던 2015년을 기념해 진행됐던 디자인 콘테스트의 우승작. 그 콘셉트가 실제 제품에 입혀진 ‘한정판’의 모습이었습니다. 2015년 10월부터 12,500자루만 한정 생산됐다고 하는데요, 찾아보니2015년 2월 현재 아직 구매가 가능하네요. 가슴을 울리는 단어 ‘한정판’에 넋을 놓다가 하마터면 살 뻔했지만 일러스트가 제 취향은 아니라서 구매버튼까지 누르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어쨌든 오피넬의 역사는 1800년 알프스산맥에 인접한 프랑스 작은 마을에서 시작됩니다. 처음엔 농부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낫 등의 날붙이를 만들면서 시작됐죠. 지금 같은 포켓 사이즈의 오피넬 칼은 1890년부터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넘버 몇일까?

왠지 많이 들어본, 프랑스 향수 같은 이름의 ‘오피넬 넘버 8’. 8이란 숫자는 칼의 사이즈를 분류하기 위한 이름입니다. 1897년부터 오피넬은 다양한 손 크기에 잘 맞도록 여러 크기의 포켓 칼을 만들었는데요. 처음엔 1번부터 12번까지의 열두 가지 종류였지만, 너무 작다는 이유로1번 사이즈가 빠지고, 나머지 사이즈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11번이 빠져 10가지 종류의 사이즈가 남아있습니다. 가장 작은 2번 사이즈는 날 길이 3.5cm에 전체 길이 8cm이며, 가장 큰 12번은 날 길이가 12.2cm 전체 길이는 28.2cm입니다. 어마무시하네요.
번호별로 차이는 있지만 약 5mm씩 날의 길이가 틀립니다. 나중에 소매점들의 요청에 의해 13번이 추가 되긴 했지만 날 길이 22cm에 전체 길이 50cm로 포켓사이즈라고 하기엔 너무 크죠. 그래서 13번은 ‘자이언트 나이프’로 따로 분류됩니다.

접는 날은 안전해야 하니까. Virobloc

접이식인 오피넬 나이프엔 안전장치가 있습니다. 이름하여 Virobloc.
Virobloc은 1955년 마르셀 오피넬이 발명하여 적용되기 시작한 방식인데요. 칼날이 접히는 부분의 금속 재질 안전장치를 돌려서 쓰는 간단한 방식입니다. 스프링이나 걸쇠가 있는 특별한 구조가 아니라서, 오래 두고 사용해도 쉽게 고장 날 것 같진 않습니다. 든든하네요.

내 손에 닿을 나무는…

포켓 사이즈의 오피넬 나이프, 그 손잡이는 전통적으로 비치우드(beechwood, 너도밤나무)로 제작되고 있습니다. 이게 기본이고, 그 외에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손잡이는 프리미엄으로 따로 분류하고 있죠. 올리브나무, 호두나무, 부빈가, 참나무, 흑단 등의 손잡이 재료들이 프리미엄으로 구분됩니다. 본사 방침이라네요. 칼날의 길이도 여러 가진데 손잡이 나무 종류도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보니 선택하기가 슬슬 어려워지는데요.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유광이냐 무광이냐(?)

오피넬 나이프의 칼날은 2종류입니다. 스테인레스와 탄소강. 제일 큰 차이는 강도입니다. 물론 돈 뺏는 강도 말고 강한 정도를 말합니다. 탄소의 함유량이 다르게 때문인데, 탄소가 많이 함유되면 칼날의 강도가 높아지게 되죠. 칼로써의 성능(?)으로만 놓고 보면 탄소강이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테인레스 재질에도 소량의 탄소가 함유되어 있긴 합니다. 탄소강 재질에 비하면 훨씬 적은 비율이지만요.
이것은 4개월간 수풀에 방치되었던 탄소강. 탄소강 재질의 칼날에는 녹이 생겼지만 스테인레스인 Virobloc 안전링 부분에는 녹이 없죠.
하지만 탄소강에게도 단점은 있었으니… 바로 수분에 노출되면 녹이 금방 생긴다는 것입니다. 대신 스테인레스 재질은 탄소의 함유량을 줄이고 대신에 녹에 강한 크롬이 높은 비율로 함유되어 있습니다. 오피넬 나이프에는 스테인레스 재질의 경우 칼날에 ‘INOX’, 탄소강의 경우 ‘CARBONE’라고 오피넬 로고 밑에 멋스럽게 각인되어 있죠.
오피넬의 탄소강 재질의 나이프는 비치우드 손잡이의 제품에만 만들어집니다. 올리브나무 등 일부 목재들은 칼날을 부식시킬 수 있는 기름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서라고 하네요. 꼼꼼하죠? 멋스러운 카본 각인을 놓치기 아깝긴 하지만 항상 사용 후에 깨끗이 닦아가면서 관리해야 한다면 꼼꼼하지 않은 성격의 저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과감히 포기합니다. 편하네요.

최종 선택, 흑단 No.8!

며칠 밤낮으로 오피넬 홈페이지를 들락날락 거리며 고민하던 끝에 결정했습니다. 스테인레스 재질 칼날, 흑단나무 손잡이의 8번 사이즈로요. 이유는…
– 칼날의 경우는 관리가 쉽다고 하니 당연히 녹이 잘 생기지 않는 스테인레스 재질로 선택.
– 다양한 사이즈에서 한참을 갈등했지만 각종 한정판 디자인들이 8번 사이즈로 나오는걸 보니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사이즈인 것 같아 8번 사이즈로 선택.
– 마지막 고민은 손잡이 나무 재질이었는데… 올리브, 부빈가, 흑단 3가지 중 최종적으로 흑단을 택했습니다. 비치우드는 괜히 흔해 보여서 처음부터 제외! 올리브와 부빈가의 나무결이 예뻐 보여 고민됐지만, 주문해서 받은 제품의 나무결이 샘플 사진처럼 안 이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결국 통지표에 몰래 찍던 아버지의 인감도장처럼 고급진 검은색의 흑단나무로 결정했습니다.

선택 장애 유발 복병 소개

이렇게 저는 선택 장애 요인들을 훌륭하게 물리쳤지만, 원래 이 밖에도 복병들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잠시 소개해드리자면.
– 와인 오프너가 들어있는 모델, 연인과 함께 무드 있는 분위기를 연출할.
– 커스텀 할 수 있는 손잡이. 왠지 해태상으로 하면 너무 멋지겠네요.
– 십자, 일자 드라이버 비트가 포함된 모델, 이거 하나 괜히 더 갖고 싶습니다.
– 늘씬하게 잘 빠진 손잡이만큼 이름도 아름다운 ‘에필레(effile)’ 모델.

그리고 드디어 도착. 오피넬 흑단 No.8

도-착!
칼은 7~8만원, 그리고 가죽 케이스까지 합쳐 10만원 정도 들었네요.
실제로 보니까 정말 멋지네요. 프랑스에서 온 오피넬! 이 중후한 느낌의 흑단 손잡이, 번쩍거리는 스테인리스 날.
수동 안전 장치 Virobloc의 든든함과 편리함. 캠핑 갔을 때 스팸과 김치를 너무나도 쉽고 편하고 엣지 있게 썰어 먹을 수 있겠죠?
그냥 손에 쥐거나 바라만 보고 있어도 든든한데, 가죽 케이스도 참 멋집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사주셨던 야구 글러브의 새 가죽 냄새가 화악…
옆에서 물끄러미 오피넬 흑단 No.8을 바라보던 옆 동료 직원도 며칠 후 질렀습니다. 사이즈는 같은 No.8이지만 손잡이는 프리미엄 느낌의 올리브나무죠. 칼날도 같은 스테인리스이긴 한데 이건 살짝 다른 느낌이네요. 헤어라인이 나름 보기 좋습니다.
어쨌든 저의 고급스런 흑단 No.8이 훨씬 낫다고 봅니다.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이렇게 저에게는 레더맨 툴까지 합쳐 5번째의 칼이 생겼습니다. 너무 기쁩니다.

이런 분들께 추천!

– 놀러 가서 누구보다 멋지게 햄과 김치를 썰고 싶다면
– 언제든 부담 없이 안전하게 지니고 다닐 칼이 필요하다면
– 콜렉팅 범위가 방대한 새로운 아이템에 꽂히고 싶다면
– 내 안에 있는 남자의 야성미를 괜히 한 번 건드리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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