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SS
100+ Views

5분으로 압축한 사진의 역사

사진은 발명된 지 200년도 되지 않았지만, 우리 생활에는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처음으로 촬영된 사진부터,사진기의 발명으로 종식된 논란까지, 사진기에 얽힌 모든 역사를 5분으로 압축해서 정리했습니다.
Comment
Suggested
Recent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2차대전에서 돌아온 이후 정신병자 취급받은 일본인
2차대전 당시 뉴기니아에서 오쿠자키 겐조가 소속된 제 36연대는 보급비용이 많이든다는 일본정부의 판단아래 강제로 보급을 끊어버려 병력 대부분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아사하는 사태를 맞이한다. 종전 후 그는 자기만 살아돌아온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전우들의 무덮앞에서 "일본정부의 사과를 받을 것이다" 라는 맹세를 하게된다. 그는 2차대전 최종책임자인 히로히토 일왕에 대한 사과요구를 수 십년동안 하였으나 사과는 커녕 정부는 은폐하기 바빴고 사회는 그는 정신병자 취급하였다. 결국 82년 그는 일왕을 저격하는 계획을 세웠지만 미수에 그치며 14년동안 감옥에서 살아가게 된다. "일왕이 2차대전 사과를 함으로써 제국주의 일본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일본을 만들자"는 깨어있는 일본지식인들도 종전 이후 존재하였지만, 일본정치권의 탄압과 극우단체의 테러 등으로 90년대 이후 세력이 약해졌다. 이같이 "일왕에게 전쟁책임이 있다"고 주장한 정치인들은 우익단체의 테러 대상이 되었다.  '모토지마 히로시'는 해당 발언 이후 1990년 차안으로 뛰어들어온 우익테러범에게 난자당하는 참변을 당한다. "제국주의 일본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일본을 만들자"고 주장했던 정치인이 '제국주의 일본'을 그리워한 청년의 칼에 찔리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후 소수였던 깨여있는 일본지식인들도 입을 닫아버리며 '일왕책임론'은 일본사회에서 묻혀지게된다. 1989년 결국 '히로히토 일왕'은 끝내 전쟁에 대한 사과없이 사망하게 되고 수 만명이 일왕의 황거에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통곡하였다. (일왕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땅에 머리를 연달아 박으며 통곡하는 한 일본인의 모습) 일왕테러를 감행해 일본사회에서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14년동안 감옥살이를 한 '오쿠자키 겐조'는 2005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가 사망한 2005년엔 "전쟁의 책임이 있다"며 사과받고 싶어했던 '히로히토 일왕'이 '독가스 살포와 731 마루타 실험'을 허가해준 사실이 밝혀지며 '일왕 전쟁책임론'이 다시 불거지게된 해였다. [출처 - 에펨코리아]
[펌] 어느 고대 중국 상남자의 이야기
때는 전국시대. 당시 위나라의 문후는 공자의 제자인 자하를 스승으로 두었고 인재풀이 넓었다. 어느날 위문후는 당시에는 완전 촌동네였던 업이라는 땅에 증자의 제자였던 서문표라는 남자를 파견보내게 되는데... 서문표: 음...여기가 업인가... 백성들: 아흐규ㅠㅠㅠㅠㅠㅠ꺼이꺼이ㅠㅠㅠㅠㅠ 서문표: 님들 왜 그렇게 질질짜는거에여. 백성들: ㅠㅠㅠ저희가 매년 하백[황하강의 신]께 장가를 보내야해서 너무 힘듭니더 나으리 ㅠㅠ 서문표: ???이게 멍게소리? 알고보니 업에서는 하백신의 진노를 달래며 물길을 평탄케 하기 위해서 처녀를 인신공양하는 풍습이 있었다. 돈있는 백성들은 인신공양을 피하려고 딸 대신 돈을 바쳤고 무당과 지역지주들은 그 돈을 꺼억하며 이 잔인한 풍습을 이용했던 것이었다. 결국 백성들은 피폐해지고 딸있는 집안은 이타치를 시도하는 등 말이 아니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서문표는  서문표: 하백이 장가를 든다고? ㅋㅋㅋㅋㅋ개꿀잼이겠네. 나도 필참해야겠다! 백성들:(죽일놈...) 서문표는 하백의 결혼식이라는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무당과 지역유지들. 백성들과 제물이 된 처녀들이 모여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그렇게 행사가 진행되고 처녀를 바치려고 하는 가운데... 서문표: 잠깐! 무당[무당사진 올리면 고소먹을까 무당벌레로 대체]: 뭐시여? 서문표: 그 처녀. 미인인지 내가 확.인.해.야.겠.다.구? 백성들: ...저거 관리맞아? 그냥 변태아니야? 아무튼 서문표는 행사에 난입. 처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서문표: 악! 야 이 뿅뿅들아. 이런 추녀를 하백께 바치겠다고? 누런 황하처럼 하백얼굴도 황달걸리겠다! 이보시오. 무당!  무당: ? 서문표: 하백신께 다른 미인을 보내겠다고 알려야겠음. 시간이 좀 걸린다고 알려드리시오. 얘들아! 부하들: 예! 서문표: 담가라. 이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부하들을 시켜 무당을 물에 빠뜨려 버렸다! 무당: 다...다스케테!!!!곻ㄴㅇ호ㅗㅎ호ㅗㅎㅎㄴ 무당은 그렇게 강에 입수했고 서문표는 계속 기다렸다. 마치 무당이 정말 하백신을 만나고 오는 것을 믿는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당연히 나올리가 없었고 서문표는 잠시 있더니.. 서문표:...아무래도 무당이 연로하셔서 시간이 걸리는 것 같구먼. 제자분이 가보시오. 얘들아. 담가라. 무당의 제자: 아....안돼! 부하들: 돼! 그렇게 또 다시 강에 담구었지만 반응은 없었다. 그리고 다른 제자를 담갔지만 역시 반응은 없었다. 그러자 서문표는 서문표:...음...무당놈들은 이래서 안된단 말이야..신속배달이 고금없이 생명이거늘. 이보시오. 마을의 원로분들. 댁들이 가셔야 하백께 소식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겠소. [그래도 나오지 않자] 아니다...관리여러분들이 가야하려나? 그러자 관리들: 살려주십시오!!! 저희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았던 이 부패한 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구걸하게 되었다. 그러자 서문표는 서문표: 거 앞으로 하백에게 장가들게 하려면 님들이 먼저 강에서 중매부터 서시오. 알겠음? 그렇게 이 업이라는 동네에서는 인신공양의 풍습이 사라졌고 서문표는 치수사업을 실시. 보를 쌓아 업은 대도시가 되어 번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역사서 사기[사마천이 아닌 저소손이 수정, 첨가]에 나오는 일화이다. [수정] 글을 잘못적음. 유지들도 하백과 결혼시켜 줬습니다 ♥ [출처 - 루리웹]
제주 그 이면
서울의 인왕산 아래 서촌을 찾았을 때 초행길이 분명한데 익숙한 경관이 눈에 들어왔다. 데쟈뷰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건 아마 조선시대 화가들의 그림에 많이 나타나는 인왕산 실경 때문일 거다. 그중 비 갠 직 후의 인왕산을 그린 겸제의 '인왕산 제색도'가 으뜸이다. 그림 속의 바위, 소나무가 변함 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이렇듯 초행길의 제주 여행은 낯선 곳에서 익숙한 것 만나기의 연속이다. 사진이나 티브이 등 모든 매체를 통해 많이 보고 접해 왔던 경관이다. 아마 나보다 여러 분들이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기에 여기서 굳이 제주 관광기를 쓸 필요는 없겠다. 그래서 나는 제주의 다른 면에 주목하기로 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제주의 이면을 보고자 했다. 아름다운 제주의 이면엔 슬프고 아픈 현대사가 있다. 제주 4ㆍ3 사건이다. 2003년 10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확정한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더라도 당시 제주 인구의 9분의 1에 달하는 3만 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당시 이승만 정부가 주도한 강경진압작전으로 제주도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만9285동이 소각됐다고한다. 전형적인 국가 권력에 의한 폭력이다. 어떤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유옌이 정한 국제법 '제노사이드(genocide)'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한다.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 같은 잔혹한 범죄를 말한다. 우리는 나치의 만행에 분노하면서도 정작 자국인 제주에서 벌어진 만행에 대해 모르고 산다. 천제연 폭포를 오르다 보면 스치고 지날뻔한 중문면 4ㆍ3희생자 위령탑을 볼수있다. 빼어난 경관으로 알려진 곳은 대부분 학살터다. 희생자 수 만큼 이나 제주 곳곳엔 이런 위령탑이있다. 세계적인 관광지로 알려진 제주 중문의 이면에도 800여명의 희생자가 있었다. 위령탑 비문엔 죽어가면서 자식들에 대한 걱정으로 눈 감지 못한 영혼들에대한 위로가있다. ~당시 기적적으로 살아난 10살 배기 어린 자식들은 박해와 탄압에 굴하지 않고 악착같이 살아내 오늘의 아름다운 제주를 일구었고 공동체를 복원시켰다고 편히 눈 감으시라고...~ 단재 신채호선생의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거창한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제주의 이면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본 잡지의 카피처럼 담담함으로 만났던 것이 먹먹함으로 다가온다. 수일이 지난 지금도 어느 노파의 증언 인터뷰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제주 공항 활주로 밑에는 수많은 희생자들의 시신이 있을 거라고 어린시절 까치발을 하고 담 밖의 살상을 목격했다고 당시 가장 피해가 많았던 장소라며... 수많은 관광객들이 떠나고 내리는 활주로 이면 그건 우리가 절대 잊어선 안될 제주의 아픈 이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