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낡은 수첩 한 구석에서
나는 이런 구절을 읽게 되리라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랬던가
너를 사랑해서, 너를 그토록 사랑해서
너 없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너를 사랑한 것을 기필코 먼 옛날의 일로
보내버려야 했던
그 날이 나에게 있었던가.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한사코 생각하는 내가
이토록 낯설게 마주한 나를
나는 다만 떠올릴 수 없어서
낡은 수첩 한 구석에 밀어넣은
그 말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그 말에 줄을 긋고 이렇게 새로 적어 넣는다
언젠가 너를 잊은 적이 있다
그런 나를 한 번도 사랑할 수 없었다
남진우 /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말 수가 줄어들듯이 너는 사라졌다
네가 사라지자 나도 사라졌다
작별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은
발설하지 않은 문장으로
너와 내가 오래 오래 묶여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잊혀진 줄도 모른채로 잊혀지지 않기 위함이다
이제니 / 그믐으로 가는 검은 말

청파동에서 그대는 햇빛만 못하다 나는 매일 병을 얻었지만 이마가 더럽혀질 만큼 깊지는 않았다 신열도 오래되면 적막이 되었다 빛은 적막으로 드나들고 바람도 먼지도 나도 그 길을 따라 걸어나왔다 청파동에서 한 마장 정도 가면 불에 타 죽은 친구가 살던 집이 나오고 선지를 잘하는 식당이 있고 어린 아가씨가 약을 지어준다는 약방도 하나 있다 그러면 나는 친구를 죽인 사람을 찾아가 패를 좀 부리다 오고 싶기도 하고 잔술을 마실까 하는 마음도 들고 어린 아가씨의 흰 손에 맥이나 한번 잡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는 해를 따라서 돌아가던 중에는 그대가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나도 그대를 떠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파서 그대가 아프지 않았다.
박준 / 용산가는 길- 청파동 1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오후 네시의 빛이
무너진 집터에 한 살림을 차리고 있듯
빛이 남아돌고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이 남아돌고
여기저기 돋아나는 풀이 남아돈다
벽 대신 벽이 있던 자리에
천장 대신 천장이 있던 자리에
바닥 대신 바닥이 있던 자리에
지붕 대신 지붕이 있던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
잉여의 시간 속으로
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
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
가뭇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
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
두고온 집이 떠오르고
너의 시간 속에 있던 내가 떠오르는데
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
나희덕 / 잉여의 시간

별로 존경하지도 않던 어르신네가
인생은 결국 쓸쓸한 거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는 지금도 연애 때문에 운다
마음이 뻐근하다
이제부터는 쓸쓸할 줄 뻔히 알고 살아야한다
허연 /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