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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 영화제작 비용은 왜 그렇게 많이 들까? 영화제작비 전격해부 -2-

아직 1편을 보지 않고 들어오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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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 때 헐리우드 영화제작 비용 중 두 가지를 파헤쳐봤는데요.
두가지는 영화의 토대가 되는 '기본 스토리'와 그 스토리를 영화로 제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스크린 플레이'가 있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어떤 제작비들이 남았는지 계속 살펴볼까요?
3. 이제 이 영화의 총 책임을 질 프로듀서가 필요합니다.
프로듀서와 영화감독의 차이는 프로듀서는 영화의 비용부터 모든 지휘를 맡고, 감독은 실제 영상에 촬영되는 모든 부분을 감수한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통 미국은 프로듀서의 권한이 더 높이 있습니다. (한국은 감독이 더 위에 있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프로듀서는 영화의 모든 책임을 져야하는 자리이니 만큼 높은 페이를 자랑합니다.
왠만한 헐리우드 영화의 프로듀서는 미니멈으로 10억 정도는 받는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탑 프로듀서들은 정상급 배우들과 비슷한 페이를 받습니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호빗을 제작한 로라 지스킨은 2002년 스파이더맨 제작당시 300억원을 받았습니다.
4. 다음은 감독 입니다. 디렉터라고 부르는데요. 미국 작가협회가 있듯 미국 감독협회 또한 있습니다.
미국 감독협회는 감독들이 영화를 찍을 때, 최소 1주에 16,800불을 지급받고 최소 10주 이상 일을 해야하는 조건이 있습니다.
단순계산 했을때 1억 7000만원 정도는 미니멈 개런티를 하고 가는 셈입니다.
역시 감독마다 편차는 있지만 보통 10억원 이상은 받게 되고 영화감독은 영화제작에 필요한 비용을 어느정도는 자신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가 주어집니다.
보통 50억에서 100억원 사이는 자기 마음대로 비용 집행이 가능합니다.
5. 이제 연기자입니다. 연기자 협회 또한 빠질 수 없겠죠. 연기자 협회는 최소 1주당 2,300불을 지급받는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정상급 배우들은 어마어마한 돈을 받게 되구요.
한가지 특이한 것은 미국은 엑스트라 연기자 조합이 따로 있는데 엑스트라 조합에 등록되어있는 엑스트라들은 일당 130불을 보장받습니다.
그래서 저예산으로 책정된 영화들은 이런 협회나 조합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아마추어 연기자들을 고용하기도 합니다.
6. 다음은 모든 제작에 드는 프로덕션 코스트 입니다.
영화 마지막 크레딧이 올라갈때 어마어마한 인원들의 이름을 보셨죠?
그중에 반 이상은 이 프로덕션을 담당하는 스탭입니다.
촬영팀, 영상팀, 분장팀 등 셀 수 없이 많은 제작 인원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스튜디오 대여 값, 스탭들이 움직일때마다 이동하는 교통비, 식비, 숙박비 등 어마어마한 돈이 여기에서 지출됩니다.
7. 이제 영화를 다 찍었으면 영상효과를 입혀야겠죠.
영상효과라고 생각하면 흔히 트랜스포터나 반지의 제왕에서 나오는 불기둥과 레이저를 생각하기 쉬운데 물론 이를 포함한 모든 영상효과 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특히나 요즘은 실제 장소에서 촬영은 현장통제 등 여러가지 어려움이 잇따라 카페에서 차 한잔 마시는 장면도 세트장에서 찍고 합성을 하는 때가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거의 모든 연기가 실제 장소가 아닌 green screen에서 이루어진다는 말들이 있습니다.
영상효과에도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는데 아바타나 반지의 제왕 같은 경우에는 이 특수영상효과를 입히는데만 1,000억 정도가 들어갔다고 합니다.
8. 마지막은 OST라고 불리는 음악인데요.
때에 따라 음악은 영화의 특별한 캐릭터를 결정짓기도 합니다.
보디가드의 I will always love you 라던지 러브액츄얼리의 All you need is love 등이 이에 해당하죠.
흔히 음악에 쓰이는 돈은 총 제작비의 2%를 넘지 않는 것으로 제작 되어 집니다.
너무 많아서 숨이 차진 않으셨나요?
왜 엄청난 돈이 투입 되는지 슬슬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하는데요.
워낙 요소가 많아서 한번에 감이 안오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3편에서는 실제 영화를 하나 선택해서 어떤식으로 제작비가 들었는지
알기쉽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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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영화 보는게 무서워진다........
데드풀 총 제작비가 어벤져스 아이언맨 한명 출연료보다 적다는 것에 놀랐음..... ㅋㅋㅋ
어마어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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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㉒/ 전시체제6...상하이 외
<사진=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조선영화 황제 김염의 작품. 사진=CCTV 영상.> '일본영화 경제학’을 집필하고 있는 이곳은 미국이다. 한국에서 일본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과 달리 이곳 미국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는 한다. 지난 8월 8일, 미국의 공기관들과 대학들 그리고 교회 등에는 일제히 조기게양이 이뤄졌다. 특히나 필자는 사우스캐럴라이나에서 장기 체류 중이었으므로 그 경이적인 장면에 감탄을 연발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랬다. 그날은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여한 날로 비록 전쟁의 종식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사죄를 뜻하는 것이었다. 물론 일본이 태평양전쟁 당시 인류에게 행한 행위들에 대해서 무조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정 속에서 있었던 오류에 대해서는 미국은 적어도 이민자의 나라이자 금세기 최고의 나라답게 역사의 공과 과를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고 있었다. 덕분에 동양인이었던 나는 인종차별이 아직도 존재한다고 오해 받고 있는 미국의 남부에서 수시로 인사를 받았고 일본의 점심 인사인 ‘곤니찌와’(こんにちは, 今日は)를 수시로 듣고 다녔다. 전시체제라는 주제를 마무리 하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이 단순히 황민화 정책의 홍보가 아닌 순기능과 역기능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글을 마치기로 하였기 때문에 서론이 길었다. 우선적으로 이 연재는 일본영화의 경제학적 측면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영화의 영향이 아시아 전체에 미친 파급효과를 살펴보고 향후 전후의 영화산업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언급함으로써 전시체제시 일본영화를 정리하고자 한다. 이 중 가장 주목할 지역은 중국 상하이와 필리핀 그리고 인도네시아다. 이중에서 1937년 일본의 중국침략이 시작되자 영화제작사들 가운데에는 문을 닫거나 싱가포르·홍콩 등지로 옮겨가는 회사가 속출하였으며, 나머지는 충칭(重慶)으로 천도하는 국민당 정부와 중국영화는 그 궤적을 함께 했다. 당시 중국영화는 상하이가 중심이었고 여러 나라의 조차지가 공동으로 들어서 공동조계(租界)라는 공동통치구역이 들어섰다. 이곳에 조차지를 얻은 나라 중에는 일본도 있었는데, 이로 인해서 일본인 주도의 영화 대신 중국인이 만드는 순수 ‘중국영화’를 제작하면서도 내용에는 참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비록 1937년 일본이 상하이를 점령했다지만 영화 촬영소는 프랑스 조차 지역 안에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게 자립적으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도 사실 상하이는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일제치하를 피해 도피해 온 식민지 조선의 영화인들에게는 ‘성지’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중 김염(金焰)은 가장 주목 받는 인물이었다. 상하이 시에서 활동한 영화배우이며 본명은 덕린(德麟), 레이먼드 킹으로 알려진 김염은 중국 영화의 황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었다. 김염은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였을 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을 ‘영화’로 풀어나갔던 대배우로, 중국 사실주의의 효시라고 부르는 ‘대로(大路)’등 4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애국혼(愛國魂)’은 1928년 상하이에서 만들어졌는데 일제의 검열을 피해 만들었던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이면서 무성극영화이기도 했다. 정기탁(鄭基鐸), 전창근(全昌根), 이경손(李慶孫), 정일송(鄭一松), 한창섭(韓昌燮) 등 조선인 영화인들이 망명길에 올라 상하이라는 국제도시를 통해 만든 영화였다. 이처럼 상하이의 영화는 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항일영화가 적극적으로 만들어졌던 전통이었기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일본은 육군의 도와상사(東和商事)의 가와키타 나가미사(川喜多長政)에게 중국 영화의 관리를 요청했다. 그는 영민한 인물로 이미 만에이(만주영화협회)의 실패 원인과 현지에서의 불평을 리서치한 끝에 일본인 주도의 영화제작을 포기하고 중국인에 의한 중국영화를 제작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중국인 감독들은 훗날 중화민국 국민당군이 귀환하자 ‘한간’(漢奸 : 조국을 배신한 중국인)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고 대부분 홍콩으로의 망명을 선택했는데 이 때문에 전후 홍콩영화는 상하이의 하청업자라는 오명을 씻고 영화산업을 융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가와키타 나가미사는 더 나아가 중국인 회유를 위해 전력했는데 첫 작품으로 비록 스즈키 시게요시(鈴木重吉)를 통해 ‘동양 평화의 길’(1937)을 제작했는가 하면, 아예 1939년에는 상하이에 있던 12개의 영화사들을 합병하여 ‘중화전영’(中華電影)을 설립하고 ‘목란종군’(木蘭從軍)이라는 국방영화를 제작했고 항일영화인이었던 장센쿤(張善琨)까지 영입하기 까지 한다. 그러나 군부의 비호를 받은 일본인들이 영화계를 지배한 것은 사실이며 만에이와 합작으로 리샹란 주연의 ‘만세류방’(萬世流芳)을 제작하여 아편전쟁을 배경으로 한 중국인들의 영웅적 투쟁을 못하면서 일본 본토에서도 마키노 마사히로(まきのまさひろ)가 ‘아편전쟁’을 만든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이 중국의 승리로 끝나 뿔뿔이 흩어졌던 영화인들이 상하이로 복귀하기 까지 이른바 ‘충칭시대의 영화’는 극심한 영화자재의 부족 등으로 흥행이 부진하였다. 인도네시아의 경우는 현지인의 영화 촬영을 금지하고 일본어로 된 선전계몽영화를 주로 제작하였는데 이중 대표적 작품은 두 가지로 히나쓰 에이타로(日夏英太郞, 본명 許泳)가 자카르타에서 촬영한 ‘콜링 오스트레일리아’(Calling Austrailia, 1944)와 ‘도나리구미’(隣組 : 반상회)를 결성하여 일본어와 일본정신을 배운다는 계몽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중 히나쓰 에이타로는 입체적 인물이다. 조선인이었지만 히나쓰 에이타로라는 일본인으로 살다가 전후에는 닥터 후융(DR.HUYUNG)이라는 이름으로 인도네시아 독립영웅이 된 인물이다. 그는 ‘콜링 오스트레일리아’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스위스의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연합국에 전달되었는데 포로인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것으로 꾸미는 바람에 전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출연 포로들을 다시 불러 모아 허위를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를 다시 제작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키스신을 촬영한 감독으로 기록되었다. 심지어 네덜란드에 맞선 인도네시아의 독립 투쟁을 그린 영화 ‘프리에다’(Frieda) 등을 제작하며 국민 감독으로 불리고 있는데 우쓰미 아이코(內海愛子)가 ‘시네아스트 허영의 쇼와’(1987)에서 허영의 전기적 삶을 복원한 바 있다. 필리핀은 원래 미국의 식민지였다. 할리우드의 영향이 강한 뮤지컬과 멜로 드라마가 1930년대부터 이미 발달했는데 스페인과 미국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를 골고루 경험했고 필리핀 최초의 영화 상영이 1897년 1월 마닐라로 알려져, 아시아 최초로 영화 상영이 있었던 인도 뭄바이 이후 두 번째였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앞선 행보였다. 1917년 최초의 영화사가 문을 열고 이후 첫 장편영화 네포무세노(Nepomuceno)의 ‘시골 소녀’(Country Maiden)가 1919년 개봉하면서 시작된 영화산업은 할리우드의 영화를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비교적 생소한 일본영화를 다시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데 역시 일본군의 통제 하에 현지인과 합작으로 포로들을 출연시켰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베 유타카(阿部豊)다. 그는 1920년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배웠다는 인연으로 제럴드 드 레온(Gerald de Leon)이 공동으로 제작한 ‘저 깃발을 무찔러라’(The dawn of Freedom, 1943)를 만든다. 필리핀에서 미국을 몰아낸 일본군을 찬미하는 내용이지만 레온 쪽이 훨씬 더 고전적인 할리우드 방식을 따랐고 아베 유타카는 딱딱한 연출로 일관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훗날 스페인에 맞선 무장봉기와 미국과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에디 로메로(Eddie ROMERO) 감독의 ‘그때 우리는’(As we were)을 통해 꿈을 좇아 도시로 나간 시골 청년이 혁명의 격랑 속에서 당시 필리핀이 겪던 고난의 과정을 그려내고, 마리 오하라(Mario O Hara) 감독의 일본 식민지 시절의 아픔을 그린 영화 ‘신이 부재한 3년’(Tatlong Taong Walang Diyos Three Godless Years, 1976)을 통해 모두를 희생자로 만드는 것이 전쟁이라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던지게 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신이 부재한 3년’은 필리핀인이면서 일본인인 주인공을 내세운 전쟁영화로 2차 세계대전 시기, 필리핀계 일본군 마수기가 시골마을 교사 로사리오를 강간하고, 임신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분노에 찬 로사리오는 마수기의 모든 제안을 거절하지만 결국 그와의 결혼에 동의하게 되면서 필리핀인, 일본인, 그리고 미군들로부터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아이러니한 비극을 뛰어난 심리묘사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와 같이 일본의 영화인들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 때로는 종군으로 때로는 단순히 창작을 위해서 혹은 식민지배를 정당화 하거나 새로운 영화 환경을 통해서라도 명맥을 이어나가는 한편 전후 일본 영화계의 중심인물로 자리매김할 자양분을 얻는다. 또 전후에도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중에는 기회주의자들도 상당수 존재했으며 대동아공영권 아래 있었지만 실제로는 여러 형태로 할리우드 영화와 만나고 그 영향을 받아가며 영화를 제작했다. 본토가 단절 속에서 독자적인 영화를 만들어 나갔다면 식민지에 흩어져 있던 영화인들은 할리우드 혹은 지배지 안의 영화인들과 교류 혹은 발굴을 통해 영화를 제작했다. 이중 상당수는 필리핀에서 ‘저 깃발을 무찔러라’에서 카메라를 담당했던 미야지마 요시오(宮島義勇)처럼 필름을 불태우고 증거를 없앤 후 전후 일본영화계에서 좌익세력의 중심인물로 활약한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미국 LA=이훈구 작가>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87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나가사키 짬뽕에 녹아든 영국 상인의 이름
> 나가사키짬뽕 운영하는 체인점 ㈜링거하트 > 회사명 영국 상인 ‘프레데릭 링거’서 유래 > 나가사키 무역산업에 크게 기여했던 인물 런던 북동쪽의 작은 도시 노리치(Norwich). 이 지역 매체 노리치 이브닝뉴스(Norwich Evening News)는 2013년 6월 26일, 이곳 출신의 한 사업가를 조명하는 기사를 실었다. 제목은 ‘일본에서 유명인이 된 노리치의 비즈니스맨’(The Norwich businessman who became a star in Japan: 아래 URL 클릭하면 해당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eveningnews24.co.uk/news/the-norwich-businessman-who-became-a-star-in-japan-1-2252584 이 매체는 “노리치 공동묘지 뒤쪽, 잡초와 갈대들이 웃자란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일본에서 유명인이 된 영국 사람 프레데릭 링거(Frederick Ringer)의 무덤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고 운을 뗐다. 노리치 이브닝뉴스 "링거하트는 프레데릭 링거서 유래" 노리치 이브닝뉴스는 이어 “미국을 포함해 많은 나라에 매장을 두고 있는 일본 음식 체인점 링거하트(Ringer Hut)는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the Ringer Hut restaurant chain, which has branches in a number of countries, including the US, was named after him)고 전했다. 링거하트(リンガーハット. 일본어로는 링가핫또). 자주 들어 본 이름일 것이다. 일본에서 나가사키 짬봉과 돈가츠 매장을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회사다. 한국 관광객들이 나가사키로 여행 가면 한번은 먹게 되는 메뉴가 나가사키 짬뽕이다. (국물 요리의 절대강자 짬뽕. 일본에서 짬뽕이 생겨난 건 1899년으로 알려져 있다. 나가사키의 사해루(四海楼)라는 중국 음식점이 발상지다. 중국 복건성 출신의 종업원 입에서 짬뽕이라는 말이 연유했다고 한다.) 링거하트는 글자 그대로 ‘링거씨의 작은 오두막집’(Hut)이라는 뜻이다. 링거하트 로고에는 링거(Ringer)의 이름을 의미하는 대문자 R자 옆에 오두막이 그려져 있다. 영국 노리치 출신인 프레데릭 링거의 이름이 일본 음식점 회사 브랜드로 이어진 것이다. 프레데릭 링거와 나가사키짬뽕을 운영하는 링거하트의 인연을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 봤다. 프레데릭 링거와 나가사키짬뽕의 인연은 1865년 시작 프레데릭 링거(1838~1907)가 일본 나가사키 땅을 밟은 건 1865년이다. 그의 나이 스물 일곱이었다. 링거는 토마스 글러버가 운영하는 글로버 상회(Glover & Co)의 차(茶)무역 감독관으로 채용됐다. 링거는 3년 뒤인 1868년 글로버 상회를 퇴사하고 영국인 동료와 별도의 회사를 세웠다. 링거는 차뿐만 아니라 제분, 발전, 석유, 언론 등 다양한 사업으로 영역을 확대해 나갔고 나가사키 지역의 무역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나가사키에 있는 글로버 가든 파크 내에는 링거가 살았던 주택이 아직 남아있다. 링거는 1907년 고향으로 돌아간 후 죽었다. 노리치 이브닝뉴스 기사로 되돌아가 보자. 이 매체가 당시 관련 기사를 실은 건, 링거하트의 회장단 일행이 프레데릭 링거의 무덤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링거하트의 창업주는 요네하마 카즈히데(米濱和英) 회장이다. 링거하트 요네하마 회장은 중국 산동반도서 태어나 요네하마 카즈히데(1943년생)는 중국 산동 반도의 엔타이(煙台: 연태 고량주로 유명한 지역)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원래 돗토리현 출신이지만 아버지대에 이르러 중국에서 영화관을 경영했다고 한다. 1945년 패전으로 쫓겨나듯 중국을 떠나온 가족은 돗토리현의 어촌 마을에서 다시 터를 잡았다. 이런 가족사를 가진 요네하마 카즈히데는 스무 살인 1962년, 열두 살 많은 형이 세운‘ 하마가츠’(浜かつ)라는 돈가츠 회사에 취직했다. 형이 요절하면서 서른 둘의 나이에 사장에 취임한 요네하마는 1974년 나가사키 짬뽕을 주력메뉴로 하는 링거하트 체인점 1호를 오픈했다. 요네하마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먹은 짬뽕에 감명 받아 회사를 세웠다”고 말했다. "프레데릭의 성공과 존경 의미에서 링거하트 이름 붙여" 또 다시 노리치 이브닝뉴스 기사. 요네하마 카즈히데 회장은 당시 이 매체에 프레데릭 링거의 무덤을 찾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번 방문은 링거씨에게 존경을 표하는 기회의 자리가 됐다. 우리는 150년 전 링거씨가 노리치에서 일본으로 건너 왔으며,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의 용기와 성공 방식을 존경하는 뜻에서 우리 음식점 체인명을 그의 이름에서 따오게 되었다.> 링거하트는 1979년 도쿄가 있는 관동 지역으로 매장을 확대했고, 나가사키짬뽕은 일본 전국구 음식이 됐다. 요네하마 회장은 2000년 회사를 도쿄증시 1부에 상장시키고 외부 인사에게 경영을 물려줬다. 하지만 회사는 2005년부터 불어 닥친 저가 경쟁에 밀려 실적이 악화되고 말았다. 이에 요네하마는 2008년 65세의 나이로 회장직에 복귀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50개에 달하는 적자 점포 폐쇄였다. 야채 완전 국산화, 가격 인상 전략으로 V자 경영 회복을 이뤘다.<에디터 이재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85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촉수로 가득찬 '이 동물'은 누구일까? 바로!
먹이를 갈기갈기 찢을 듯한 뾰족한 돌기가 입천장과 혓바닥에 가득 차 있습니다.  마치 공포 괴수 영화에나 나올 법한 구조인데요. 과연 어떤 동물일까? 바로 바다거북입니다. 바다거북은 잡식성으로 가끔 동물성 먹이를 잡아먹기도 하지만 주로 해조류를 먹습니다. 돌기는 먹이를 씹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죠! 그렇다면 입안이 왜 뾰족한 돌기로 나 있을까? 자세히 보면 바다거북의 돌기는 역방향인 안쪽을 향해 나 있습니다. 이 돌기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한번 먹은 먹이를 밖으로 다시 내뱉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바다거북은 먹이를 먹을 때 많은 양의 바닷물도 함께 삼키게 되는데요. 생선들은 아가미를 통해 입안으로 들어온 바닷물을 바로 배출시키지만, 바다거북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바다거북은 삼킨 바닷물을 바깥으로 다시 배출하기 위해 토해냅니다. 이때 수많은 돌기는 바다거북이 바닷물을 토해내는 과정에서 힘들게 잡아먹은 먹이가 입 밖으로 다시 빠져나가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위 사진은 바다거북이 삼킨 바닷물을 다시 토해낸 사진입니다. 마치 피를 토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픈 것도 다친 것도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극히 건강하고 정상적인 현상이죠. 즉, 돌기는 아가미가 없는 바다거북이 생존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그럴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입니다. 우리가 바다에 버린 플라스틱, 비닐봉지 등의 쓰레기를 삼킨 바다거북이를 죽어가고 있습니다. 수억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인공 쓰레기들이 바다를 가득 채우고 있고, 이 새로운 환경 속에서 돌기는 오히려 바다거북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쓰레기를 절대 바다에 버려서 안 되는 이유입니다. 위 사진과 일러스트 자료는 생물학자인 헬렌 카이로가 만든 삽화 시리즈로, 야생동물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그는 "동물을 보호하자고 무작정 외치는 것보다는 보존하려는 동물에 대한 호기심을 갖는 게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말합니다. 에디터 제임수  ggori.story@gmail.com 꼬리스토리가 들려주는 동물 이야기!
취향주의 '애드 아스트라' 영화 솔직후기/리뷰/해설/쿠키영상/관객수예상 [5분영화겉핥기]
안녕하세요! 재리예요~ 오늘은 멕아상자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영화보고 왔어요! 혼영도 좋지만 가끔은 같이 보는 영화도 매력있습니다. 쾌적하고 넓은 영화관에 친구들이랑 보기 '좋아보이는' 영화! 오늘 솔직하게 리뷰해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영화는 오랜만에 등장한 우주SF영화! '애드 아스트라'입니다. 브래드 피트에 우주영화라니 겉으로 본 밥상부터 먹음직스럽죠. 실제 해외 시사회 평도 좋았고 국내 홍보도 준수해 인기를 모으는데 무리가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취향을 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냥 보통이었습니다. 이는 정말 개인적인 취향이고 본 영화의 작품성과는 맥이 다릅니다. 느리고 잔잔하다 SF영화하면 화려한 비주얼에 긴박한 스토리가 먼저 생각납니다. 적어도 흥미진진한 세계로의 여행을 관객들을 기대합니다. 애드 아스트라 또한 볼거리는 충분합니다. 광활한 우주, 신비한 태양계 등 엄청난 기술력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마션이나 퍼스트맨과 같은 영화와는 다른 우주영화입니다. 템포가 느리고 잔잔하게 전개됩니다. 스토리가 굵다기 보다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인물 '로이'를 성찰하는 부분이 중점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관객은 인물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고 우주는 그저 배경이고 여행의 과정일 뿐입니다. 인간의 내면을 보는 방법 침착하고 천천히 전개되는 영화지만 연출만은 날카롭습니다. 루즈할 수 있는 분위기를 중간마다 환기시켜주는 요소이기도 하죠. 왜냐하면 브래드 피트의 연기가 모든 걸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정교한 기술이 없다면 관객은 금세 집중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엄밀히 말하면 애드 아스트라는 우주영화라기보단 우주를 배경으로 한 자기독백형 성찰영화입니다. 인생에 대한 생각, 과거에 대한 반성, 인간에 대한 고찰이 담겨있는 철학적인 영화입니다. 화려함을 쫓는 SF영화를 원했다면 조금 실망할 수 있습니다. 응축된 에너지, 그리고 폭발 영화는 하나의 우주적 사건을 소재로 얘기를 전개시키는 듯 보입니다만 사실은 그보다 더한 폭발을 중요시합니다. 응축된 에너지가 부작용을 일으키는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폭발보다 개인의 내면에서 쌓이다가 끝내 터지는 심리적 분노에 초점이 맞춰지죠. 계속 언급됩니다만 작품은 브래드 피트의, 브래드 피트에 의한, 브래드 피트를 위한 영화입니다. 몇십년 동안 겹겹이 쌓인 고민들이 터졌고,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커져 하이라이트에서 분출하게 됩니다. 잔잔하나 강렬한 힘을 가진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삶의 의욕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누군가는 지루할 수 있지만 우주여행을 다녀온 느낌은 강하게 받습니다. 나 또한 숨이 막히는 기분이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느낌이죠. 그 과정 속에서 관객 또한 스스로를 돌이켜볼 수 있으며 내면으로 접근이 가능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브래드 피트의 연기력은 정말 최고였고 비주얼 또한 압도적이었습니다. 단지 느린 템포에 관객들이 얼마만큼 발을 맞추어줄지는 미지수네요. 저 또한 인상 깊게 보기도 했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졸기도 했었습니다. 아무튼 영화가 끝나고 나면 관객도 로이도 삶의 의욕을 되찾고 지구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요. 오랜만에 우주SF영화를 통해 자기성찰의 시간을 갖는 시간이었습니다. 우주를 좋아하고 브래드 피트의 팬이라면 후회는 없는 영화입니다. 쿠키영상은 따로 없습니다. 관객 수는 조심스럽게 200만 예상해봅니다. 이상 스포없는 '애드 아스트라' 리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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