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ragonJeong
10,000+ Views

일본을 이야기 하다. (스압주의)

역사를 잊은 나라는 미래가 없다. 필자인 나는 이 말이 제일 먼저 하고 싶었다. 지금의 일본 정부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옛날의 일본은 어쩌면 지리적으로 고립되었던 불쌍한 나라였다고 본다. 현재 우리가 겪어 보지 않아서일까? 예전의 일본은 외딴 섬나라여서 세계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일까? 우리의 입장에서 저들의 약탈은 노략질이라 했지만, 그들은 생계 수단이였을 것이다. 우선적으로 땅덩어리가 섬이라 물자와 식량 생산에 있어 한계를 느껴 바다 건너 잘 사는 걸로 보이는 우리나라 제주도, 부산, 울산, 울릉도 강원도 등등 수백차례 약탈을 했어야만 살았던 그들이 참 불쌍하다 느낀다. 하지만 동정도 거기까지다.
역사를 조금 이야기 해보자. 고대의 일본의 해적질 덕분에 우리나라의 수군이 커지고 조선(선박)기술도 발달 하게 되었다. 조선 태종때에는 거북선의 프로토타입이 설계가 되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의 해전 23전 23승을 기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임진왜란이 있었다. 조선 중기 선조대 정당이 나뉘는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물론 붕당이 나쁜 것이 아니다. 나라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다스리려, 왕명에 의해, 혹은 큰 하나의 세력에 의해 그릇된 정치를 타개하고자 서로 의견을 주고 받고 합의점을 찾고자 붕당이 생성되었다. 지금 모든 나라는 붕당 정치를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 붕당의 초창기인 선조때엔 잘못된 붕당이였다. 세력이 나뉘고 의견은 타협되지 않았다. 그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가 끝이 나고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되었다. 토요토미는 지략가였다. 항간에는 얻어걸린 승리라 하는 이도 있다. 무력으로 통일한 나라는 무력으로 흩어질 것을 대비한 것으로 무사, 군인들을 움직이게 하려했다. 당시 조총으로 통일을 했던 토요토미는 더욱더 조총전술로 단련된 군인들을 양성했고, 이들이 있으면 대륙을 도모할 수도 있겠다는 망상을 하게 된다. 바닷길로만 명나라(중국) 대륙으로 가려면 당시 일본선박으론 너무 먼 거리였다. 조선은 명나라 옆 작은 나라로 생각한 토요토미는 조선을 먹고 대륙으로 향할 계획을 세운다. 이 사실을 접한 선조였지만 막 붕당된 신하세력들의 말에 귀가 가려졌다. 조선의 관군만 3만이 넘는다며 안심시켰다. 또한 일본으로 보냈다가 돌아온 통신사들의 말도 한 몫했다. 이전에 통신사 두명을 보냈는데, 서로 다른 당의 신하들을 보냈던 것이였다. 한 쪽은 전쟁을 일으킨다하였고, 다른 한 쪽은 당이 달라 같은 말을 할 수 없었는지 하찮게 보인다고 고했다. 낙천적인 선조는 안심하였지만, 결국 서기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진다. 3만이 넘는 군인들의 절반 이상은 전투능력이 전혀 없는 가축, 사물 등에 이름을 붙여 등록된 숫자였다. 이는 기득권 세력의 자제들을 전쟁에 보내기 싫어 그리 한 것이였다고 한다. 터무니 없는 숫자의 군인들... 조선은 짓밟히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선조는 평양, 의주로 파천(몽진이라 하며, 왕이 수도를 빠져나와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피신)을 감행한다. 보통은 왕이 도망간 비겁한 행동이라 꾸짖음 받을만한 행동이다. 하지만 필자는 선조의 한 수가 먹혔다고 생각한다. 왜군은 상상도 못했다. 왕은 항복을 하던지, 항전을 하던지 해야 왕을 볼모 삼아 다음 일을 도모할 수 있었지만, 한양에 도착한 왜군은 선조가 얼척없는 행동을 하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조선에 들어서니 생각보다 조선이 거지였다. 부족한 식량과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바다를 통해 오려 했던 배들이 소식이 없다. 선조의 행동 덕에 왜군이 딜레이 되는 틈을 이용해 이순신은 수군을 단단히 훈련시켰다. 이순신은 왜수군을 격파했기 때문에 왜군들은 더욱 힘들어했다. 모든 전쟁엔 이와 같은 변수가 많다. 조선이 사대하는 명나라에서 4만의 지원군을 파병했다. 명분이 있어 도우려 왔지만 정작 명나라 역시 오랜 평화때문에 위는 나태해지고 아래는 혼란스러웠다. 임진년을 시작으로 7년에 걸친 전쟁의 피해는 막대했다. (중간의 이야기도 많지만 생략) 명나라는 타국에 군대를 지원하면서 생기는 많은 물자를 낭비하게 되어 국고가 흔들렸고, 여진족(후금, 금나라의 뒤를 잇는 이민족. 훗날 명나라를 삼키고 청나라로 명명)의 몸체를 키워주게 된 계기가 되었다. 조선 역시 종전에 남은 병사는 전국을 통틀어 1천명도 채 남지 못했고, 백성들은 더욱 배곯았으며 많은 역사유적도 재가 되었고 왕에 대한 신뢰도 바닥을 기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충무공의 부고였다. 이대로 망국이 되어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을 정도. 일본은 도공, 철재공 등 장인을 업어가서 약간의 득이 생기게 되었지만, 그들도 결국 힘든 전쟁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 후로 약 200년 후 임진왜란의 향수가 남은 것인지 이토 히로부미가 총대장으로 있는 일본군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또 엄청난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서구문물을 미리 접한 그들은 동아시아를 평정할 수 있겠다 믿었다. 당시 일본은 이미 배부른 나라였다. 배가 부르면 더 먹고 싶다 했던가. 일본은 조선을, 중국을, 베트남을, 필리핀을... 다른 나라들을 계속해서 점령해 나갔다. 좋게 한자어로 점령이지만, 그냥 짓밟았다. 그 옛날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하고 세계를 100년간 호령했던 원나라(몽골)의 칭기즈칸(징기스칸)은 상대국의 지도자, 세력권, 정치자, 군대만 공격했고, 민간인은 살게 해주었다. 또한 점령한 나라는 짓밟지 않고, 그 나라는 잘 돌아갔다. 포용하고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이 제국이 되면서 어땠는가? 일반인들을 고문하고, 겁탈하고, 살해하고, 도륙하고... 민간인들을 노예로 팔고 사는 사기도 쳤다. 그 대표적인 예로 위안부 문제를 삼을 수 있다. 유학보내 공부시켜주겠다고. 돈버는 일자리 주겠다고, 좋은 걸 주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말이 군인을 위한 군 위안부이지, 성노예나 다름 없었다. 3.1만세운동도 일본은 싫어했고, 귀찮아했다. 유관순 열사의 희생도 따랐다.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쏜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을 관통한 총탄은 통쾌했지만, 안중근은 국제재판을 받게 됐다. 그 재판에서는 한국인도 일본인이 대변하게 했고, 결국 사형을 면치 못하게 됐다.
일본은 천하의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했다. 중국의 지배지인 요동반도를 포함한 만주일대를 자기들 맘대로 만주국으로 독립을 시키는 한 편, 일본의 군사적 요충지로 삼고, 중국 난징에서 30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 심지어 살아있는 사람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자행하기도 했다. 이것을 마루타라 한다. 또 식민국의 청년들을 일본 군에 강제 편입시키기도 했고, 그들은 총알받이가 되어야만 했다. 조선의 왕비 명성왕후(대한제국반포 이후 황후로 승격)는 살해당했고, 고종황제는 몸을 피해야만 하는 굴욕을 당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겼다. 이완용은 학자였고 충신이였다. 독립을 위해 물신양면 하는 그런 사람이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 나라의 국권인 통치권을 을사조약에 의해 일본에 건내게 된다. 충신인 그가 나라를 통째 팔아먹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백성은 더이상 백성이 아니게 됐다. 아마도 이완용을 포함한 극친일파가 생긴 것도 이대로 일본이 영원만세 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것도 잠시, 온갖 만행을 저지른 일본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세계를 우습게 본 탓으로 유럽국가들의 식민지도 건들기 시작했고, 태평양 건너 미국까지 넘보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유럽, 러시아 등을 쉽게 생각했나? 2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키고자(명목은 그런데, 미국도 유럽에 무기를 팔았다) 가만히 있던 군사강국인 미국이 대전에 참전한 동기를 만들었고, 결국 일본의 악행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맞게 했다. 원자(핵)폭탄은 어마무시한 피해를 남겼다. 일본은 결국 미국에 항복하고 식민지에서 철수하게 된다. 일본은 아시아전, 태평양전의 댓가로 경제는 바닥이 되고, 국제연맹법에 없는 조항까지 만들어졌으며, 일본은 그 법으로 인해 군대가 해체되고 또한 갖지 못하게 됐다. 당시 일본은 국제재판에 회부되고 전쟁범죄국으로 낙인찍혔다.
거리상 가장 가까워서 가장 많이 쥐락펴락 했던 대한제국은 1945년 그렇게 해방되고 자유를 얻었으나 임금이 없고 피폐해진 땅에선 사람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 혼돈 그 자체였다. 국제사회와는 다른 이념인 공산, 사회주의체제의 러시아는 누구보다 빠르게 한반도를 지켜준단 명목으로 일본군이 철수한 틈을 이용해 점령하고 사화주의를 심게 된다. 민주주의국가인 미국도 뒤늦게 개입해 한반도 남쪽에 자리 잡는다. 미국도 명분은 좋았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이념을 전파하려 했다. 하지만 결국 독일 분단사태처럼 우리나라도 분단이 된 계기를 일본이 만들어 주게 된 셈이다. 1950년 6월 25일 우리는 부모형제가 총칼을 겨누는 참극을 맞이하게 된다. 추가된 내용 ※일본은 한반도의 통일 반대에 앞장 서는 나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남북이 합치면 우선적으로 영토의 크기가 일본 보다 커진다. 두번째는 북한이 소지한 재래식 무기들과 군인의 수는 일본에겐 굉장한 위협이 된다. 셋째, 북한땅에는 아직 캐지 않은 희토류와 석탄, 그리고 금이 있다. 이 상당한 매장량은 세계에서 6위에 달한다. 이로 인한 경제적 발전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남쪽의 기술력과, 북쪽의 노동력으로 한 단계 성장하는 기술력을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또 북한이 개발중인 핵무기는 개발 자체만으로 핵을 보유한 것이기에 군사적으로도 일본보다 우위를 점하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독도의 영유권 주장을 영영 포기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위 사항들과 같이 모든 면에서 일본 보다 우세하면 반대로 일본이 한국에 찍 소리 못내게 되는 형국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 후 일본의 국민들은 힘든 살림에 하나같이 힘을 모았고 빠른 경제 회복을 이룩했다. 제국주의파는 그 당시의 향수때문인지, 군대를 갖고 싶어했다. 일본은 UN에 가입하고 자위권을 얻었다(샀다). 그래서 자위대란 이름으로 군대 아닌 군대가 생겼다. 전쟁으로 해외어서의 기록들이 일본 기술의 밑천이 되어 얼마 전까지 세계에서 인정받는 제품들이 쏟아졌다. 이젠 다시 먹고 살만 하니까 딴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일본 정부는 역사를 바로잡기(그들의 입장에서)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왜곡이다. 일본은 세계 평화를 위해 이바지 했다고 하고, 독도가 처음부터 자기네 영토라고 우기며, 한반도 동해를 일본해라고 적었다. 그리고 지금도 사용 금지된 욱일기(일본은 욱일승천기라 말한다;대전 당시 일본의 기상을 알리기 위해 점령국에 꽂은 제2의 국기. 모양은 일본국기인 일장기의 빨간 점을 마치 해(천황)가 빛나 세계로 뻗는 다는 내용이 담긴 문양. 지금은 해상자위대가 사용.)를 암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독일도 나치시절에 쓰던 하켄크로이츠 깃발도 지금은 쓰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군함도를 아는가? 작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적관광지인 군함도. 작은 섬 하나를 마치 예전의 찬란한 유적인 것 마냥 좋은말만 써서 등록된 항공모함을 연상시키는 모양. 그 속엔 우리의 뼈 아픈 상처가 있다. 대전 시절에 노예로 끌려간 우리의 청년들이 그 군함도 지하탄광에서 광물을 캐고 봉급으로 빵을 받으며 일해야만 했다. 은을 제주하면서 은에 중독되기도 했고, 탄광에서 질식도 했고, 깔려 죽고, 맞아 죽고, 굶어 죽기도 했던 섬이다. 이 젊은 시절에 죽은 청년들의 시신들은 매장할 땅도 없다며 수습도 않은채 그대로 바다에 버려졌다고 한다. 뭔가 비밀이 많은 듯 섬 테두리에 벽을 쌓았다. 도망가지도 못했다. 행여 도망자가 있어도 놔뒀다. 어차피 바다에서 죽거나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런 아픔 가득한 섬을, 일본은 자랑스레 유네스코에 신청하였다. 세계에서 위, 아래의 입장은 없다라고 했지만, 우리 정부는 동등한 입장에 서서 끝까지 대항하고 말리지 못한 것이다. 영문 단어 하나에, 문장 하나에.. 해석을 잘 못해 인정을 하여 등재되었는데, 말장난에 놀아났다고 안타까움을 표현한 우리 정부. 현실은 어쨌거나 일본보다 아래의 입장을 자처한 게 된다. 실제로도 일본에게 찍소리 못 하는 정부이다.(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 후로 쭈욱 우리의 정부를 말함. 꼭 현 정부가 아니라. 물론 좋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어두운 시절이 더 많았다.)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지 마라. 절대. 독도는 크게 두개의 섬으로 나뉘는데 동도와 서도이다. 그 중 하나를 죽도(대나무 죽/섬 도)라 일컷는데 이 죽도를 일본어로 타케(죽)시마(도)가 된다. 일본강점기 시절엔 자기네 땅이라고 할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절대 일본땅이 될 수 없다. 중국 역사서 삼국지(정사) 위지 동이전에 실린 기록에는 한반도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동쪽에 위치한 작은 섬이 있고 이를 우산국이라 썼으며,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칭하는 동쪽에 우산국이 있다. 여기서 말한 우산국은 중국역사서에서는 독도를 의미하는 해석이 있고, 삼국사기에 나오는 우산국은 오늘 날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이다. 신라 지증왕때 우산국을 점령하여 복속시켰고 그때부터 이름도 없는 땅은 우리의 영토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에 울릉도와 주변 섬들을 관측하고 울릉도와 무릉도(지금의 독도)로 칭한다. 독도는 사람이 살 곳이 못 되어 죄인들의 유배지로 사용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다시 한번 울릉도와 무릉도가 조선 통치영역임을 기록했다. 한동안 유배지에서 제외된 독도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숙종때 강원도 삼척 군영에서 관노이자 어부로 있던 안용복은 고기를 잡다 파도에 휩쓸려 독도에 표류하게 됐는데 그 곳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물고기 잡으며 살고 있었더라 했다. 일본 군인들이 안용복을 감금하고 나중에 풀어 주었다. 이에 화가 난 안용복은 훗 날 말끔한 차림으로 다시 나타나 공무원임을 자처하며 이 곳은 우리땅 이라고 일본에 전한다. 당시 관할 영역이였던 대마도주는 이를 인정하고 울릉도와 독도 근처에 일본사람을 보내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다. 어찌 보면 이 안용복은 독도를 수호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셈이지만, 조선에 돌아온 안용복은 신분사칭으로 체포된다. 역사는 이렇게 사실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역사 기록에는 독도가 자기들 영토였단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또한 강제점령을 철폐하면서 독도를 한국에 반환한다에 도장찍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런데도 왜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가? 근거 따윈 없다. 하지만 독도의 가치가 일본에 막대한 재산적으로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나 어렸을 때는 그냥 내 것이 많으면 무조건 좋고, 독도를 가짐으로써의 득은 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는 이익이 생기기 때문이라고만 생각 했다. 하지만 그 것은 하찮은 이익이였다. 독도의 지하에는 엄청난 양의 지하광물이 있기 때문이다. 희토류가 상당량이 있고, 미래 대체 자원인 메탈하이드레이트(드라이아이스 같지만 불이 붙는 자원)가 막대한 양이 매장되어 있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거는 없지만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군위안부 이야기를 해보자. 지금은 군 위안부라고 띄워 써야 맞다. 위안부는 군인에게 연애의 느낌(?) 등으로 성으로 봉사하고 댓가로 돈을 받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처음엔 일본 여인들이 자처를 했다. 하지만 너무 많이 생각했던 것일까? 자국의 여인들이 해외 군영으로 빠져나가면 자국의 자손 번식을 우려했다. 일본은 타국의 여인들을 설득해 데려왔고 보수도 정당하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군은 더 이상 위안부에 쓸 돈과 물자가 아까운지, 지원을 중단했다. 전쟁통에 남자들만 득실대는 군대에서 그 꿀 맛 같은 여인의 향기가 얼마나 그리웠을까, 각 군부대에선 난리가 났고 이 걸 잠재우기 위해 다시 타국의 여인들을 상대로 이번엔 사기를 쳤다. 가면 다 좋은 일이 있다고... 다시 시작한 위안부 징집. 이젠 모집이 아니다. 처음엔 유부녀지만 전장에 나간 남편이 없는 아낙들을, 다음엔 처녀들을, 나중엔 그도 모자라 10살도 안된 소녀들까지 설득하고 사기치고 납치까지 해놓고 위안부를 위해 나갈 돈이 없다며, 하루에 한끼 식사 하는 걸로 연명했다고 한다. 굼주려야만 했던 고통, 강제 성봉사, 죽을 것 같이 시름시름 앓고 있는 성행위 능력이 없는 여인에게는 어차피 죽을 거라고 성고문, 신체 실험, 구타, 감금이 행해졌다. 또 다른 마루타라 여길 정도. 그런 모진 아픔을 겪은 여인들은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 죽지 못해 살아야만 했다던 지난 세월들을 한탄한다. 일본은 이 일도 반성해야만 한다. 진심으로, 성심껏, 사죄해야 한다. 얼마 전 위안부 협상 타결 되고 나서 나 또한 울분했다. 그 이유는 이 협상은 애초부터 협상이라는 단어를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우리의 할머니들은 사과든, 보수든 무조건적으로 받기만 할 자격이 있다고 본다. 협상은 말처럼 받는 것이 있으면 내어 주기도 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얻을 10억? 돈이 문제가 아니다. 마이크에 대고 한국에 대해 대국민 사과? 이런 하찮은 것을 요구한 게 아니다. 게다가 줮도 모르는 상당수의 일본 국민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10억을 주려면 우리가 내는 세금에서 나간다며 협상을 반대한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모금을 해서 보내주자고 한 사람도 있었다. 모금? 보내줘? 무슨 우리 할머니들이 불우이웃이냐? 전쟁난민이냐? 감히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인간들이 동정따위를 해?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어 화가 났던 것이다. 일본도 얻은 것이 있다. 돈줄게 대신 위안부 언급은 이제 하지마. 라고 마침표를 찍었다. 협상이 끝나자마자 돌변하는 일본측의 입장. 너네 뜻대로 했으니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치워줘. 나 참, 소녀상을 앞에 두고 삼배구고두례를 해도 모자랄 판에 그 따위 요구를 하다니. 자신들의 조상이 저지른 악행은 후손인 당신들이 반성하고 뉘우쳐야 하는 거 아닌가? 세계를 향해, 하늘을 보기에 부끄럼 없게 깨끗하게 인정하고 사죄하면 될 일을...
물론, 일제의 만행은 피지배국으로서 당연히 싫다. 하지만, 어찌보면 일본에게 잘 했다고 보긴 어려우나 고마운 점도 있을 것이다. 강제점령 하면서 신분제도 폐지로 인해 천민의 자식은 대대로 천민이 되는 악순환을 끊은 것. 또 경인철도를 이어 이동 수단의 편리함을 줌과 동시에 기술 발전의 동기를 심어준 것. 이 정도 뿐이겠지만.. 일본에게 배울 점도 있다. 일본의 국민들은 타인을 배려할 줄 안다. 자기 차량은 꼭 자기 집 안에 둔다. 이로 인해 타인이 겪을 주차난이 해소된다. 일본의 국민들은 검소하다. 소비를 거의 안한다는 것이 경제도움에 흠이 되긴 하겠지만, 저축을 잘 한다. 일본의 국민들은 개방적이다. 타국에서 온 손님들에게 굉장히 친절하다. 일본의 국민들은 장애인들에게 극진히 대우한다. 개발이 잘 된 도시일 수록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꼭 있다. 설령 작은 구멍가게라도. 오늘날 우리가 일본에게 배워야 할 사항들이다. 또한 일본도 우리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래에 언젠가는 맹목적인 우호관계의 나라가 되지 않을까? 지리상 매우 가깝지만, 마음만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나라 일본.
저는 이 글을 쓰면서 일본은 무조건 못됐고 우리는 무조건 옳아를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욕도 하기 싫었고, 비판만 하기도 싫었어요. 저는 일본을 좋아합니다. 미국도 좋아하고, 중국도 좋아하고, 서계가 전부 저의 관심사입니다. 일본의 국민이 우리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사례가 얼마나 될까요? 또 우리가 그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거나 있었던 적은 없는지 고민도 합니다. 가까이 있는 일본이 역사적으로 많이 우리랑 사소한 무언가라도 접하게 되니까 앞으로라도 함께 나아져보자 이런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의 아픈 상처를, 너희의 조상들이 저지른 실수는 인정하고 보듬어주어야 하지 않겠냐는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피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하지만 현실이, 입장이, 생각이 너무나도 다르고 가혹해서 타협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봅니다.
-Linked Lists of [SD's SEX Journal]-~~~~~~~~~~~~~~~~~~~ (19)선정성에 대해 / (19)S.M.의 기원 / (19)야외노출의 심각성 / (19)My Waxing Story... / (19)남녀 성에 관한 전부 AtoZ+ / (19)원치 않는 임신을 피하는 방법 AtoZ / ~~~~~~~~~~~~~~~~~~~~~~~~~~~~~~~~~~~~~~~~~~~~ -SD의 <미인 컬렉션> 링크-~~~~~~~~~~~~~~~~~~~~~~~~~~~~ [17+] 비공식 스타 모음1 / [17+] 비공식 스타 모음2 / [17+] 하늘하늘 / [15+] 서한빛. 러블리 / [17+] 정미. 란제리 / [17+] 락채은. 란제리 / [17+] 박무비. 란제리 / [17+] 한가은. Sexy / (19) 러블리 중국 모델. / [17+] 큐티 중국 모델. / [17.5+] 엘레강스 중국 모델. / [17+] 항공승무원들 / [17+] 승무원 이어진. / [17+] 이름 모를 그녀 / [17+] 락채은.<움짤> / [17+] 락채은. 란제리2 / [17+] 서양. 군복 / [17+] 각국의 승무원 / ~~~~~~~~~~~~~~~~~~~~~~~~~~~~~~~~~~~~~~~~~~~~ -SD의 <러블리 모음집>-~~~~~~~~~~~~~~~~~~~~~~~~~~~~~~ [♡] 반도의 흔한 일반인 클라스 / [♡] 우리나라 여학생 교복. / [♡] 키스를 부르는 입술 / ~~~~~~~~~~~~~~~~~~~~~~~~~~~~~~~~~~~~~~~~~~~~ -SD의 <배꼽 털이범 모음>-~~~~~~~~~~~~~~~~~~~~~~~~~~~~ [ㅋㅋ]여대생 자추l방의 벽지 / [ㅋㅋ] 코스프레 모음 ~~~~~~~~~~~~~~~~~~~~~~~~~~~~~~~~~~~~~~~~~~~~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 [※]일본을 이야기 하다 / [☆]태양의 후예. 오해와 진실 /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 [※]조건만남(사기주의) / ~~~~~~~~~~~~~~~~~~~~~~~~~~~~~~~~~~~~~~~~~~~~ -SD's 연예인 링크-~~~~~~~~~~~~~~~~~~~~~~~~~~~~~~~~ 이지은 어린이, 아이유가 되기까지.(1/2) / 소녀 아이유, 어른 되다.(2/2) / Girl's Day / 탱구짤 [태연 in SNSD] / 효블리 전효성 / 이젠 설현이당 / 아나운서 공서영 / 아나운서 배지현(꽃) / 걸그룹 AOA의 민아 / 개그우먼 안소미 / SKT에서 설현이가... / 기상캐스터 황지영 / AOA 설현의 과거 사진 공개 / [광고] 이정현 / ~~~~~~~~~~~~~~~~~~~~~~~~~~~~~~~~~~~~~~~~~~~~
14 Comments
Suggested
Recent
역사를 위조하려 하는건 일본인들의 특징인가 보군요. 우리나라 일본계 분들도 이미 진행중이라죠. 참 슬픕니다.
고려때부터 조선에는 사대부 라는 세력들이 당시 임금을 쥐락펴락하는게 가장 큰 걸림돌이엇고 모든 잘못된것들은 그들로부터 시작 되엇으며 지금도 남아잇다 할수 있겟습니다 예를 들면 선조와 이순신과의 이간질이죠 항상 국민들이 다시 나라를 일으켯지만 이제는 막을수 잇는 국민들이 됏으면 하네요
일본이라는 국호(国号)는, 아와타노 마히토(粟田真人)가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 국호를 왜국(倭国)에서 일본(日本)으로 변경신청해서 승인받은 이름. https://twitter.com/honest_kuroki/status/665987723824529408
"욱일기(旭日旗)는 "通勝(중국 달력)"에 그려지는 춘우도(春牛図)의 도용(盗用)" "일장기(日章旗)도 홍콩의 무덤에 그려지는 도교(道教)의 참적룡(斬赤龍)의 도용(盗用)" https://twitter.com/honest_kuroki/status/719575499593240576
내생에 통일은 이룰수 있을까? 어른들이 흔히했던 말.. 북한은 그래도 일제 친일파청산과 언어순화(일본어)는 잘했다는.. 늦어두 친일청산은 이루어져야~~정말 100년을 꼬박 기다려야하나?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흑인을 위해 테러리스트가 된 백인.jpg
존 브라운 1800년 5월 9일 ~ 1859년 12월 2일  그의 아버지는 가죽공장을 운영하던 사람으로 노예해방사상을 품고 흑인 노예들을 숨겨주거나 탈출 시켜줬는데 존 브라운 역시 이러한 환경에서 아버지의 성향을 물려받아 노예해방주의자가 되었다. 그가 나이가 들었을 무렵 캔자스로 이주하게 되는데... "유혈의 캔자스" 뒷배경을 잠시 설명하자면 캔자스가 캔자스 주로 승격되면서 과거 미주리 협정의 "위도 36도 30분선 아래로 노예주"에 따라 노예찬성주가 될 예정이었으나 캔자스의 정착민들은 대부분 북부 출신 또는 남부 출신이나 노예제를 반대하던 사람으로 그대로 노예주가 되기엔 곤란한 상황 이런 상황에서 투표로 결정하자는 결론이 나왔지만 해방자들은 자유주로 만들기 위해, 농장주들은 노예주로 만들기 위해 무장한 채 캔자스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한다. 결국 온갖 부정선거 끝에 캔자스는 노예찬성주가 되었지만 대부분의 정착민들은 노예찬성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노예 지지자들의 분풀이로 정착민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로렌스 약탈) 존 브라운은 캔자스에서 무장충돌과 유혈사태를 겪으면서 미쳐버린 나머지 완전히 과격파로 전향하게 되어버린다. 그는 미국 길리애드 동맹이라는 비밀결사를 창설하여 이들을 주축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데 그의 혁명활동에 선을 넘어버리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예시 이미지) 어느날 존 브라운은 노예제를 옹호하던 백인 5명을 유족들이 보는 앞에서 브로드소드로 무참하게 살해한다. 그는 피해자의 시신을 찢어발긴 뒤 그들의 사지를 캔자스 주 경계에 뿌려 노예찬성주의자들에게 강력하게 경고 했는데 이를 계기로 전미의 해방주의자에 대한 인식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 : 저 이 사람 모릅니다. 진짜로"  이 사건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에 링컨을 비롯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던 정치인들은 황급하게 존 브라운과의 어떠한 관계도 없다고 해명해야했다.  더불어 분노한 노예찬성주의자들은 민병대를 끌고 캔자스 주에 처들어가기까지 했는데, 존 브라운의 비밀결사들이 저들을 상대로 어느 정도 선전을 거둬 존 브라운의 명성이 좋든 나쁘든 북미 전역에 떨치게 되었고 특히 남부 노예주 사이에선 악마의 화신 그 자체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1859년 그는 노예 해방 나라의 주춧돌로 삼고자 버지니아 주 하퍼스 페리의 정부군 무기고를 기습점령하였으나 머지않아 출동한 연방군에 의해 패배 당하고 사로잡힌다 그는 그 해 12월에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나 존 브라운은 이 죄악의 땅의 범죄를 정화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피 뿐이라고 이제 확신한다." - 그의 유언 그리고 그의 사형 집행 4개월 뒤 남북전쟁이 터진다 그러자 북부군은 그를 상징으로 삼아 추앙하게 되는데, 그를 주제로한 군가가 바로 "존 브라운스 바디" 찬양가, 옛날 군가 때로는 광고 노래에도 흘러 나오는 음율의 원조 되는 곡이다. - 플로리다 주에서 백인들 불편하지 않게 인종차별역사 교육방침 바꾼다는 기사 읽고 옛날에 쓴 글 끌어다가 렉카해봄 차라리 그 시대에 백인들이 했던 선한 일을 알리던지 인종차별 과거사 비호는 역시 좀 그렇지 않나 출처 : 루리웹 인종차별과 남북전쟁하면 저 사람을 빼놓을 수 없죠 링컨과 함께 미국의 역사를 바꾼 인물이라.. 하지만 호불호가 굉장히 강한..
두 천재의 박사논문 심사 과정
1. 막스 베버 사회학자로 유명한 막스 베버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의외로 중세의 무역 회사에 대한 역사학 연구였음 (사실 그때는 대학에 사회학과가 있지도 않았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독일 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논문 주제에 관해 심사위원들과 토론을 하고 자신의 논지를 지켜내야 했는데 이 과정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외부 청중들도 많이 참석했고, 토론은 무사히 끝남 베버: ㅎㅎ 더 논박하실 분 있으신가요? 당연히 베버가 정말로 더 논박할 사람을 찾는 건 아니었고, 이 멘트는 그냥 전통이었기 때문에 독일어도 아니고 라틴어로 말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함 그런데 청중 중 누군가가 진짜로 손을 들어버림 "저요" 어떤 병신이 진짜 논박하라는 줄 알고 손드냐? 손을 든 사람은 베버보다 47세 많은 테오도르 몸젠 몸젠은 평생 로마사 관련 연구를 1500편 (150편의 오타 아님) 이상 발표했으며 나중에는 로마사 집필로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는 거물로 학계의 교황이라고 평가받기도 함 (위 그림은 젊을적이고 이건 늙은 사진) 몸젠: 로마 식민도시에 대한 의견이 나랑 좀 다른 거 같은데? 해명해봐 어쩔 수 없이 베버와 몸젠은 현실에서 키배를 뜨게 되고 누가 봐도 베버가 개좆된 상황 그리고 수십분간 토론하다가 몸젠이 토론을 중단시킴 (아쉽게도 자세한 토론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것같음) 몸젠: 베버의 주장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수험자의 앞길을 막을 생각이 없고 사실 젊은이들은 틀딱들이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하는데 이번이 그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몸젠: 내가 무덤으로 갈 때가 되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들아, 내 창을 받아다오. 이젠 내 팔에는 너무 무겁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아주 존중하는 막스 베버에게 말입니다. 몸젠의 급발진 후 역주행으로 논문 심사는 훈훈하게 끝남 2. 비트겐슈타인 사실 진짜로 일개 대학원생이었던 베버와 달리 박사학위를 받을 당시에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유명한 철학자였고 그냥 과거에 출판한 논리철학논고를 박사학위 논문 대신으로 제출함 마찬가지로 구술 시험이 있었고 심사위원은 천재 철학자 G.E. 무어와 천재 철학자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버트런드 러셀 시험이 끝난 후 비트겐슈타인은 심사위원들 어깨를 툭툭 치며 이렇게 말함 "너무 걱정 마십쇼. 나는 당신들이 절대 이해 못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Don't worry, I know you'll never understand it.) 그러나 무어는 이 지랄을 당하고도 심사 보고서에 "나는 이것 (논리철학논고)이 천재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박사학위에 필요한 기준을 훨씬 능가합니다." 라고 적고 통과시킴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