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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애니메이션 수상작 발표

TokyoAnimeAward 2016
2014년 11월 1일부터 2015년 10월 31일까지 1년간 일본에서 제작 · 방송된 TV판, 극장판 애니메이션「전 489개 작품」중에서 100명이 넘는 애니메이션 관계자의 투표로 결정된 후보 작품들
<극장판 애니메이션>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
괴물의 아이
낙원추방
Love Live!
The School Idol Movie
<TV 애니메이션>
오소마츠상
4월은 너의 거짓말
시로바코
원펀맨
그래서 올해의 애니메이션 수상작은!
극장판 : LoveLive! The School Idol Movie
TV판 : 시로바코
18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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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 4월은 너의거짓말 꼭 보삼 (보고 우울증걸린건 안 비밀
아진짜 4월은 너의 거짓말!!!!!♥
낙원추방 진짜 쩌는 애니인데 아무도 모르는...ㅠㅜ 진짜 와....우워어...낙원추방 아는분 없나요
럽폭도의힘이란ㅋ
러브라이브는 어딜가도 빠지질않는구나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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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레고가지고 천재소리 듣는 방법+_+ 카드가 넘나 흥행해서 쫌 놀랬어요. 얼떨떨... 아 빙글러들은 천재가 되고 싶었던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서 쫌 더 천재가 될 수 잇는 방법들을 갖구왔어요 +_+ 레고가지고 천재소리 듣는 방법 2탄!!! >_< 두근두근하죠? 헿 1. 열쇠걸이 만들기 2. 티슈케이스 만들기 3. 시계 만들기 우왕 이거 해볼만한데여 +_+ 4. 레고테이블 5. 계단벽? 암튼 인내심 엄청 필요한거 음 이거 만드는건 정신수양하기 딱이겠는데요 ㅋㅋㅋ 6. 시간 많고 돈 없고 레고는 많을 때 핸드폰 치대 ㅋㅋ 기계 덕후의 거치대 7. 컵받침 예쁘네영 +_+ 8. 놀이방 벽 애들 있는 집에서는 짱일것 같아요 +_+ 9. 예쁜 연필꽂이 이건 근데 진짜 예쁜 연필꽂이네요 ㅋㅋㅋㅋㅋ 10. 기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11. 비누 거치대 12. 테이프 디스펜서 ㅋㅋ 13. 스케줄표 +_+ 오 이거 아이디어 쩌는듯 ㅋㅋ 14. 전등갓 15. 아기 놀이방? ㅋㅋㅋㅋ 이거 너무 귀엽네요 +_+ 16. 휴지 거치대 거치대 엄청 많죠? 죄다 거치대만 만드나봐요 ㅋㅋ 17. 칼 거치대 오 이거 좀 좋잖아요 +_+ 18. 책선반 +_+ 정신사납지만 예뻐... 19. 나비넥타이 패완얼이라 그런가 예뻐보이는데요 +_+ -///////- 20. 컴퓨터 본체 케이스 우와 이거 진짜 멋지다......+_+
제갈량 공명 (諸葛亮 孔明) AD.181~234
"삼국지"가 큰 영향력 갖는 동아시아 3개국인 한국, 중국,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인물 꼽으라면 중국은 관우, 일본은 조운, 한국은 바로 "제갈량"이다. (예로부터 문을 숭상한 전통기조 탓인지...) 이 칼럼의 첫 포문도 그래서 제갈량으로 준비했다.. 여러분이 읽었던 삼국지에는 잘 나오지 않은 소제들 위주로 갈테니 다들 Focus! 고향은 서주 낭야현.(지금의 장쑤성 쉬저우) 조조가 부친 잃은 빡침으로 서주 제노사이드 자행 시 부친 제갈규가 형주로 거처 옮길 때 함께 이주. 부친 사후 숙부 제갈현 슬하에서 자란다. 3남2녀 중 넷째였고 당시 기준으로 신장이 무려 189cm가량으로 전란과 기근 탓에 성인남성의 평균신장이 140cm중후반이던 3세기 중국 기준 가히 거인이나 진배없던 장신에 용모도 잘 생겼단 기록이 남아있고 마른 체형이였다고 한다. 당시의 선비들의 주류 학업스타일은 토시 하나까지 달달달 외우던 방식이였는데, 제갈량은 그런 암기 위주가 아닌 요약정리 방식으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후한 마지막 천자인 헌제와 동갑인데다 사망한 해도 같았다. 그 유명한 유비와의 "삼고초려"는 나관중의 각색이 들어가긴 했으나, 실제로 사료에도 유비가 세 번 찾아간 끝에 제갈량을 만났다고 남아있다. 연의에서처럼 제갈량이 유비를 피한건 아니였고 정말 서로 타이밍이 안맞았으며, 휴대폰도 없던 시절 이다보니 당시로서는 어찌보면 다짜고짜 찾아가서 마침 딱 만나는것도 쉽진 않았기에 그랬던듯 싶다. 그는 딱히 유비를 따를 마음은 없었으나, 임관하여 모실 마땅한 군주가 없던데다 당시 절친이던 서서의 권유도 있고 해서 유비를 모신다. 대기업 서류전형에서 컷트되던 유망주가 입사제의 하는 중소기업 들어간 꼴. 연의내용과 달리 모친이 인질 잡혀 서서가 조조에게 가기 전까지 한 동안 제갈량과 서서는 유비 휘하에 있었고 방통과도 인척 관계였는데, 제갈량의 누나 중 한 명이 방통의 숙부의 아내.. 즉 숙모였다. 유비에게 임관 후부터 관우, 장비 형제의 그에 대한 텃새는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였다. 장비는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재사를 공경하는 편이라 제갈량이 일정 수준 능력을 보인 후로는 그닥 태클이 없었으나, 유비 다음은 자신이라 자부하던 관우의 견제와 경계는 제갈량으로서도 관우 사망시까지 참 벅찬 일이였다. 상명하복이 투철한 전형적인 군인이라 제갈량의 지시도 잘 이행하여 케미가 잘 맞은 덕에 제갈량이 가장 의지하던 무관은 "조운"이였다. "마량"과도 코드가 맞았는지, 사석에서는 호형호제 하던 사이였다고 한다. 촉빠에 제갈량빠던 나관중에 의해 가장 주인공버프 크게 받은 인물 중 하나인 제갈량이였기에 소설 속 모습은 거의 닥터 스트레인지에 가깝게 묘사되나 그도 사람인지라 완벽의 면모만 있던건 아니고...ㅋ 분명 단점도 있었고 매사에 뛰어난건 아니였다. 우리에게 그는 탁월한 전략가의 이미지가 강한데, 실제로 전장에서의 전략과 전술, 병법에 능했던건 맞으나 당시 그 분야의 최강자는 사실 아니였다. 당대의 평가 등과 커리어들을 볼 때, 그는 전략가보다는 오히려 정치가로서의 실적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업적도 그쪽이 훨씬 많았다. 전체적 판세를 파악하는 전략적 면모는 오히려 주유, 조조가 앞섰고.. 전투에서의 전술적 재량은 방통, 법정에 뒤졌으며.. 후방보급에서는 순욱도 결코 제갈량 못지 않았고 심리전에 있어서는 가후나 정욱이 더 나았고 방어전술은 사마의가 우위였다는 평가가 지배적. 특히 중국에서의 책략,전략가로서의 자질을 따질 때 큰 척도로 삼는 것은 기책.. 쉽게 말해 창의적이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임기응변 더 쉽게 풀어 전술적 "에드립"여부였는데, 제갈량은 앞서 말한 책사들에 비해 이 부분이 특히 좀 빠지는 편이였다. (중국 역사상 이 분야의 갑은 바로 "한신") 역사기록에서나, 소설에서나 제갈량 전술의 주요패턴은 지형 및 기후 등의 사전정보 철저 숙지를 베이스로 한 정석 응용이였던 범생 스타일. 그의 임기응변 부족론에는 반론도 있었는데, 사실 유비를 처음 섬기는 순간부터 오장원에서 숨 거둘 때까지 그는 남만정벌같은 일부를 제하면 대부분 조조~위를 상대하며 늘 열악한 자원과 인력으로 압도적인 적을 맞이했고.... 그가 이끄는 것은 유비세력 & 촉의 거의 전부였기에, 성공하면 대박이지만 실패시의 리스크가 큰 기책을 선뜻 쓰기는 무리였다는 반론이 그것. 정치적인 치적은 소설에는 잘 안나오는데, 그는 촉의 경제발전 및 과학기술 개발과 심지어 사법제도 개편 및 군의 현대화 등 여러 분야의 내정에서 눈부신 업적들을 이뤄냈다. 당시 서천지방의 대표적 특산물은 "비단"이였는데 이 비단의 생산량과 퀄리티를 높이고자 다양한 개량을 시도했고, 이 비단사업의 대성공 덕에 촉한의 비단재벌들은 중원의 어지간한 부호들 싸닥션을 날릴 수준의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농지개간과 경작법도 많이 손봤고 천연가스 시추에 성공했으며, 내륙이라 소금이 금값이던 그때에 암염이라는 바위에서 소금을 추출하는 방법도 개발, 놀라운 건 당시로는 의심만 받아도 목이 날아가고 삼족 멸하는건 우습던 위나 오와 달리 전문 수사관 시스템을 도입하여 증거와 증인심문 등 통한 체계적 수사시스템을 구축했던 것도 제갈량이였다. "인간" 제갈량은 친절하고 예의바른 성격이였고, 상당히 도덕적이였으며 청렴했음은 물론, 매사에 꼼꼼을 넘어 깐깐한 완벽주의자로 자신이 직접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심 못 하는 스타일로서... 지금으로치면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비서실장, 외교부장관, 행정부장관, 산업경제부장관, 감사원장, 국정원장, 경찰청장, 대법원장, 검찰총장을 합친 것보다 많고 다양한 업무들을 일일히 서류 뒤적이며 직접 처리했다. 이런 사람이 부하라면 더할 나위 없지만 직위가 황제 바로 아래인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승상이였기에 이런 사람이 상관이면 아랫것들 여럿 죽어나가는거 일도 아니였다... 제갈량 본인도 끝내 과로사했지만, 위, 촉, 오 통틀어 촉의 고위관료 과로사 비율이 가장 높은건 결코 우연이 아니였다. 참고로 그는 유비 사후 그냥 승상이 아닌, 황태자와 동급에 왕보다 높은 "상국"의 지위였으며, 그의 사후 승상직 자체가 영구 결석 처리되어... 촉한 역사상 유일한 승상이였다. 어벙띠리하기 그지 없던 유선도, 부친 유비의 유조도 있었고 제갈량의 영향력과 충심이 워낙에 굉장했던터라 제갈량을 부친처럼 대했고 꼬박꼬박 경어를 썼으며 제갈량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 및 토를 달지 않았다고 한다. 거의 입헌군주제 수준이였으며, 오너는 따로 있으나 전반적 경영은 제갈량이 일임하는 전문 경연인체제의 C.E.O.나 다름 없었다. 지금까지만 보면 퍼펙트같은 제갈량의 단점은 사람 보는 "안목"이 그닥이였다는거다... 촉에서 사람 잘 보는 분야의 최고수는 "유비"였는데, 이에 반해 제갈량은 그 뛰어난 여러 분야에도 불구.. 사람 보는 안목은 별로였다. 그가 발탁한 이들의 대표적인 케이스를 보자면.. 장완 - 결과적으로 훌륭했으나 대체로 직무태만인 스타일로서 제갈량이 뒤봐주지 않았다면 유비에게 밉보인 그로서는 진즉 Fired... 마속 - "읍참마속"이란 고사를 만들어 낸 대표적인 실패작으로서 전투경험 전무에 글로 전투 배우고 나대다 끝내.....-_-;; 이엄 - 제갈량이 평하길, "육손에 견줄만 하다!"라고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육손 근처도 못 감. 양의 - 업무능력에 대해 제갈량이 치켜세웠으나 인성 쓰레기에, 제갈량 사후 위연과의 불화로 위연의 사망을 초래. 위연 - 제갈량이 발탁하진 않았으나, 유비는 잘만 활용한 최고의 맹장이건만 제갈량은 내내 겐세이만 줬고 결국 위연과 양의의 불화의 단초를 제공하는 계기를 줌. 강유 - 능력과 인성은 좋았으나, 근자감에 휩싸여 끝없는 북벌시도로 촉한을 멸망으로 가는 특급열차에 태운 일등공신. 마량 & 비위 - 능력 자체는 대단들 했으나 단명. 오에서 마지막에 대장군 직위까지 오른 친형, "제갈근"과는 서로 모시는 주인이 달랐고 둘 다 각자의 소속집단의 중역이였기에 볼 일이 거의 없어 주로 편지를 주고 받았고 막상 만나도 비즈니스적인 이야기만 했다고 한다. 마흔 후반대에 들어 유일무이한 자식(제갈첨)을 하나 얻었고 꽤나 예뻐했는지, 제갈근에게 어린 첨의 자랑으로 가득 채운 편지를 보낸 기록이 있다. 위, 촉, 오는 모두 이민족(그들 기준 오랑캐) 문제가 난제였는데 무력으로 굴복 시키거나 축출 일변도였던 위나 오에 비해 제갈량의 남만정벌은 비록 무력으로 제압은 했으나 이후 먼저 교섭 시도 후, 이민족들로 하여금 지금으로보면 "자치구"개념의 자율통치권을 인정하여 삼국 중 가장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대이민족 대응법을 보여줬다. 고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맵고 짠 음식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편식이 좀 있었던거 같다. 그리고 식사도 정해진 때에, 정해진 장소에서 먹기 보다 대강대강 챙겨서 이런저런 일들을 보며 아무곳에서나 먹었다고 한다.(가정교육이...ㅋ) 이건 정확한 건 아니지만, 무릎이나 고관절 쪽이 좋지 않아서 장년 이후 휠체어 비슷한 작은 의자형 수레를 타고 다녔다는 설이 있다. 적벽대전 앞두고 오에 가서 그곳의 재사들의 다구리를 말발로 역관광 시킨 이야기는 허구다. 짚단을 실은 배를 타고 노숙과 함께 조조군 진영으로 가서 화살 10만 개를 슈킹해온 일화도 허구다. 과로사는 분명해 보이지만, 정확한 사인으로는 "폐결핵"설과 "위암"설이 팽팽하다. 워낙 불규칙한 식습관과 수면부족 및 극도의 스트레스, 과로 등 암 발병에는 최적이긴 했다. 첫 칼럼인데, 두서도 없거니와 일단 너무 양 많고 내가 봐도 지루하다.... 그래도 뭐 읽을 사람들은 읽겠지 T-T 피드백 괜찮으면 앞으로도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해 위와 같은 방식으로 대중적이지 않은 스토리 위주로 갈 예정. 삼국지 관련 궁금증에 대한 질문이나 다뤄줬으면 하는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신청도 받음.
당부.
안녕하세요. Three Kingdoms Generation.의 필자입니다. 일단 삼국지관련 내용의 글이 아닌 점 먼저 사과드립니다.ㅎ 오늘은 이것저것 몇 가지 말씀 올리고자 타이핑을 합니다. 1. 표절. 연재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데다, 아직 카드나 팔로워가 많은 편은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이리저리 빙글을 뒤적이다보니 몇 곳에서 제가 쓴 글과 흡사한 카드들을 몇 번 목격했습니다. '삼국지'라는 역사 및 소설관련 컨텐츠를 다루다보니 당연히 내용은 비슷할 수 있는 점 십분 헤아리지만 읽어보면 제가 쓴 문장의 구성이나 표현, 어휘까지 같거나 매우 흡사한 경우들이 있더라구요. 제가 쓰는 이 칼럼은 보시는 분들의 생각 이상으로 공을 들여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제가 삼국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 어린시절부터 찾아보고 조사하고 공부하며 모은 수 많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쓰여지며, 이것들을 알맞게 구성하여 쓰다보면 순수 작성시간만 짧게는 2~3시간, 길면 5시간 가까이 소요됩니다. '아니, 겨우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게 뭐 이리 오래 걸려???' 하실 수도 있어 의아하시겠지만... 저도 그냥 베껴 쓰거나 하는게 아닌 제가 아는 지식들을 좀 읽기 편하게, 그나마 재미있게, 되도록 자연스럽게 쓰고자 어떻게 쓸 지를 고민하고 다듬으며 쓰다보니 그리 시간이 걸리며 저도 제 생업과 사생활이 있다보니 마냥 시간을 내기 힘들어 보통 2~4일에 걸쳐 써나갑니다. 물론, 제 칼럼들을 베끼셨던 참고하셨던... 그분들이 사익을 추구하여 그러시진 않은 거 같긴 해도 어쨌건 저로서는 수일 간 공들인 제 성과물이 누군가에 의해 몇 분만에 표절 되는건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전에 어느 독자분께서 자신이 활동하는 커뮤니티에 출처를 밝혀서 사용하고 싶다고 하셨던 적이 있었는데, 얼마던지 스크랩, 클립해 가셔도 좋고 오히려 그렇게 여기저기 이리저리 제 글이 퍼져나가 삼국지에 대해 더 재미있고 흥미롭게 느끼시는 분이 늘어나는 것은 저로서도 즐겁고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단순 표절은 금해주셨으면 하고 지적재산권에 대한 존중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혹자는 '니가 첨부하는 그림과 사진은 그럼 뭐냐'라고 하실 수도 있지만, 제가 첨부하는 매체들은 누가 봐도 어디의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들이고 매체의 저작권자들이 이미 이익추구가 아닌 분야들에 대한 개방을 허한 매체들이라 제 글을 베끼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2. 부진. 안타깝게도 점점 연재가 진행될 수록 초반에 비해 '팔로워증가', '좋아요', '클립' 등의 수치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그 원인으로는 첫째가 너무 더딘 제 "연재속도", 두번째는 "인기스타의 부재"가 아닌가 싶네요ㅎ 일단 연재속도에 대해서는 참 뭐라 드릴 말이 없습니다. 헌데 위에서 말씀 드렸듯, 글 쓰는데 걸리는 시간 자체가 길고 또 제가 전문작가가 아닌 관계로 일과 사생활이 병행되며 연재하다보니 아무래도 더뎌지네요;;, 그렇다고 스피드를 좀 내보자고 분량을 줄이자니 이 칼럼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의 기대치와 수준을 고려할 때, 분량의 축소는 곧 내용의 양과 질의 하락.. 다시말해, 퀄리티 하향의 우려가 생길거 같아서.. 물론, 길게 쓴다 능사는 아니지만 다른 분야와 달리 역사관련물은 내용이 디테일할수록 즉, 분량이 길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저로서는 연재속도 탓에 분량을 타협할 생각은 없다보니 그런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댓글보면 조운, 조조, 장료, 여몽 등등 네임밸류 있는 인물들에 대한 니즈가 많은데, 일전에 이미 말씀 드린 적이 있지만 제 나름으로는 그런 인기인물, 유명인물들이 초반에 나오기 시작하면 뒤로 갈수록 이 칼럼의 위력이 반감할까 싶은 우려로 좀 아껴두던 터였습니다. 게다가 비록 우리가 잘 모르는, 혹은 아예 처음 듣는 이름의 인물들을 제가 재조명하여 그들 역시 역사 속의 주요했던 이들임을 부각시켜주고픈 마음도 컸기에ㅎㅎ 아무튼 연재속도도 최대한 스퍼트를 올려보고 앞으로는 중간중간 이쯤이다 싶을 때 유명인물들도 게시하도록 하겠습니다. ^^ 3. 부탁. 대신 저도(건방지게) 부탁을 좀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읽어주시는 것으로도 참 고맙습니다만..ㅎㅎ 그래도 기왕이면, "좋아요"도 좀 클릭해주시고, 또 "클립" 해가셔서 본인들 컬렉션에도 게시하여 보다 많은 분들이 보실 수 있게끔 홍보도 부탁 드립니다! 나아가 아직 팔로우 안하신 분들은 "팔로우"도 해주십사 고개 숙여 청을 좀 드립니다. 허허허;;; 물론, 다양한 내용의 "댓글"들도 언제나 대환영! 길이와 내용 관계없이 댓글들은 항상 힘이 되거든요. 제가 여기에 글 써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어디 입사지원할 때 이력서에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저 취미로 쓰는 것인지라 여러분들의 "팔,좋,클,댓"의 피드백이 제 엔돌핀이고 에너지!! 또, 혹시 Three Kindoms Generation.의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좋은 아이디어나 건의사항 있는 분들은 지금 이 글에 댓글을 좀 부탁드립니다. 4. 출판. 댓글 주시는 분들 중 은근 많은 분들이 해주시는 말 중에 "책 내시면 꼭 살께요!" "한 번 책으로 내보세요ㅎ" 등등이 있습니다. ..ㅋㅋㅋ 출판이라...허헣 일단 누가 책을 내줘야 저도 출판을 하는거겠지만, 제가 전문작가가 아니다보니 필력도 부족하고 또 요즘같은 모바일시대에 설령 책을 낸들, 인쇄간행물이 과연 얼마나 판매가 될지도 의문이고..ㅋ 그리고 이 칼럼독자분들이야 아니라 생각하시겠지만 요새 들어서는 워낙에 미디어가 풍년이다보니 삼국지라는 컨텐츠가 어딘가 모르게 매니악한 소제로 치부된다는 인상도 받습니다만ㅎ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삼국지를 읽지 않은 자와는 벗 삼지 말라"는 말까지 있던 보편적 매체였는데, 지금은 삼국지가 뭔지 모르는 분들도 적잖은 세상 같아서 좀 서글프네요...T-T 여튼 출판관련 말씀들은 그만큼 좋다는 칭찬들이시니 기분좋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엇?! 벌써 새 카드가 올라왔어!?' 하시는 마음으로 반갑게 클릭했더니 왠 쓰잘데없는 사설이냐며 실망하셨을 분들께는 다시 한 번 사과와 양해를 올리며, 삼국지관련 내용은 최대한 빨리 연재할께요! 항상 많은 관심 주시고 찾아 주시며 읽어 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 드리고 싶네요ㅎ 고맙습니다!
삼국지에 대한 이해도 높이기 2.
지난번에 이어, 오늘도 삼국지를 보다 쉽고 재미지게 접하는데 도움을 줄만한 팁들을 준비해 봤다. 삼국지를 아직 읽지 않았다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고 이미 읽어본 분들 역시 한결 넓게 바라볼 수 있게끔 삼국지에 대한 이해도 높이기 2 Start!! 1. 무기. 삼국지연의 속 장수들은 저마다의 무기들을 쓰고 이 무기들은 곧 그 유져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분신의 역할을 하기도 하며, 정말 다양한 무기들이 등장한다. 관우의 청룡언월도, 장비의 장팔사모, 손견의 고정도, 전위의 쌍철극, 여포의 방천화극, 정보의 철등사모, 기령의 삼첨도, 서황의 개산대부, 황개의 철편, 유비의 자웅일대검 등등.. 열거하기 귀찮을만큼 많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숱한 무기들 중의 대다수는 당시에 실존하지 않았던 것들. 대표적인게 관우의 트레이드 마크인 "청룡언월도". 먼저, '도(刀)'는 한쪽만 날이 있는 칼, '검(劍)'은 양쪽 모두 날이 있는 칼을 뜻한다. '청룡도'는 너비가 넓은 도를 일컫는 말이며, '언월도'는 '월도'라고도 했는데 이는 긴 자루가 달린 도를 일컫는다. 고로, '청룡도 + 언월도 = 청룡언월도'라 함은 긴 자루 달린 청룡도를 말한다. 너비가 넓다보니 일정 수준 이상 부피가 있던 무기인 청룡언월도는 대체로 일반 도검들에 비해 중량이 좀 나가는 무기였고, 찌르기보다 베기용이긴 했다만.. 날카로움으로 벤다기 보다는 무게로 내리찍는 용도의 무기였다. 왜냐하면 당시의 제철수준으로 큰 월도를 날카롭게 제련하는 기술력의 한계가 있었고, 설령 내가 쓰는 질레트 마하3 면도기날처럼 어찌어찌 날카롭게 만들었다 한들... 몇 번만 쓰면 금새 날이 무뎌지기 마련. 게다가 날카로우려면 단면이 얇아야 하고 또 얇게 만들다보면 그만큼 가벼워지니 살상력이 떨어진다. 쉽게 말해, 청룡언월도에 맞으면 영화나 만화처럼 '뎅겅~'하고 썰리는게 아니라, 짓뭉개지며 박살이 나는건데, 심지어 연의에서의 묘사에 의하면 관우가 썼다는 청룡언월도의 무게는 무려 "82근"! 혹자는 한대의 한 근은 지금의 한 근보다 가벼워, 당시의 여든 두 근은 대략 18kg쯤이라고 하는데, 나관중이 명나라 사람이라 명대의 도량형으로 설명 했기에 청룡언월도의 무게는 48kg이 맞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무기 + 그 무기 휘두를 덩치 + 갑옷 + 안장 + 마갑 = 어림잡아도 230kg을 넘어가는데 그럼 말은 도대체 무슨 죄인가? 더구나 아무리 장사여도 저 중량의 무기를 휘두르기 위해 마상균형을 잘 잡아야 하는데, 그 시대에는 말 타며 균형 잡고자 발을 거는 등자가 몹시 어설퍼, 제 기능 발현이 어렵던 시기였다. 일단 송나라 때에나 등장한 청룡언월도를 관우가 썼을 리 없고 정사기록에 "관우가 안량을 찌른 후 목을 베었다"라는 구절을 볼 때, 관우는 '삭'으로 불리는, 당시 기병의 보편적 주무장인 찌르기용 창을 썼다고 본다. 그리고 '여든 두 근'이란 표현도 실제 측량무게가 아닌 관우의 파워의 대단함을 묘사키 위한 나관중의 중국인 종특인 과장의 산물이다. 소설과 인물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부여된 일종의 아이템같은 개념이였던 것이다. 장비의 "장팔사모" 역시, 지금 추산 시 5m가량의 기나긴 창으로 묘사되지만 한대에는 그런 긴 창은 쓰지도 않았거니와 동서양 역사에서의 그런 길고 긴 창은 보병의 대기병전용 무장이였지, 말 위에서 휘두르기는 너무 불편한 무기였다. 당시의 백병전은 인정사정 없었고 사소한 실수, 작은 삑사리 하나로 장애인이 되거나 바로 요단강에 발을 담그는 리스크가 될 수 있기에... 여든 두 근 청룡도니, 한 장 여덟 척 장팔사모니 하는 후까시용 무기보다는 그저 실용적이고 쓰기 편한 무기가 답이였다. 여포의 방천화극 또한 그 "방천화극" 자체가 역시 청룡언월도와 마찬가지로 송나라 중엽에서야 등장하는 무기였기에 픽션이며 그냥 찌르기용 '극'을 쓴 것으로 보여진다. 삼국지 등장 장수의 거의 8할이 "찌르기용 창"을 실제로 썼는데, 이는 '베기'보다 '찌르기'가 더욱 적은 에너지와 운동각으로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기에 체력소모와 한 번 움직임에서 다음 움직임 까지의 인터벌을 최소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베는 창을 쓸 경우, 창을 더욱 높이, 크게 휘둘러야 상대에게 치명상 입힐 수 있는 반면... 빗나갈 경우 오히려 상대에게 역관광을 당하기 제격이다. 그렇다고 적은 각도로 움직이면 운동에너지나 원심력이 제대로 실리지 않아, 상대에게 그만큼 데미지를 많이 주지 못 한다. 놀랍게도 "쌍철극"의 경우, 정사에 전위가 80근의 쌍철극을 휘둘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는 그 당시의 사료이므로 한대의 도량형에 따라 지금 기준 약 16~18kg가량의 무기가 맞다. 2. 일기토. 일본어의 "잇키우치(いっきうち, 一騎討ち)"에서 한자어인 '一騎討'만을 우리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기마무사간의 1vs1 대결을 의미한다. 사실 한, 중에서는 거의 안쓰는 한자어인데, 국내에서는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 탓에 1대1 결투의 일반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정말 숱하게 등장하는게 바로 저 일기토이지만... 놀랍게도 실제 역사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일기토 기록은 열 손 이내 밖에 없다. 192년 "여포 VS 곽사" (장안) 놀랍게도 곽사가 먼저 결투 신청. 그럼 그렇지, 여포의 창에 맞고 죽기 직전에 부하들이 곽사 구출. 196년 "손책 VS 태사자" (곡아) 말 타고 싸우던 중 손책이 태사자의 말을 찌르고 (나쁜새끼), 태사자의 창을 빼앗자, 태사자는 낙마하며 손책쪽으로 넘어지며 손책의 투구를 슈킹. 196년 "학맹 VS 조성" (하비) 여포에게 반기를 든 학맹과 조성이 싸우던 중 고순이 나타나 학맹을 죽임.(읭?) 196년 "마초 VS 염행" (서량) 그 천하의 마초가 염행의 창에 찔려 죽을 위기 맞음. 단, 당시의 마초는 만 19세로 아직은 경험미숙.. 200년 "관우 VS 안량" (백마) 추후 관우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음. 202년 "방덕 VS 곽원" (평양) 방덕이 당시 난전 중에 적병을 그냥 막 죽이던 와중에 곽원도 섞여 죽음.(이건 좀...;;) 208년 "여몽 VS 진취" (강하) 유표군과 싸울 당시 선봉이던 여몽이 적 수비대장 진취와 맞서 싸움. 2011년 "김형수 팀장 VS 이민형 과장" (백림호프) 만취한 이과장이 김팀장에게 반말로 도발하자 이에 격한 김팀장이 숟가락 볼록면으로 이과장의 정수리를 갈겨 단 일 합에 이과장을 처단. 사실, 일기토 자체가 성사 쉽지 않을 수 밖에 없는게, 저건 보는 사람이나 재미있지... 당사자들로서는 자신 뒤의 수 많은 군세의 기세를 책임진 상태에서 사소한 실수 하나로 자기 목숨은 물론, 전술적 승패를 갈음 짓는 1대 1 대결은 실로 무모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기고 있거나 우세한 군세의 우두머리가 이겨도 본전에 지면 그야말로 대참극의 아비규환을 불러올지 모를 그딴 제안에 응할 리가 없다. 그럼 상대가 응하지 않는데 홀로 싸울 수도 없다. 그리고 어지간한 급의 장수들은 영화나 만화처럼 행군 중이나 군사들간 대치 상황에서 가장 맨 앞에 나와 보란듯이 있지 않았다. 그럴 경우, 상대방의 활에 의한 저격에 피격될 위험성이 높기 때문. 물론, 장수의 화려한 차림새나 그 주위의 대장기를 든 호위대 등으로 분명 눈에는 띄었을 것이나, 가장 선두에 다 보란듯이 나와 있진 않았다고 한다. 솔직히 이게 뭐라고 쓰는데 두 시간 걸린다는.... 쓰고 나면 지치지만 여러분들이 주시는 관심 가득한 피드백들이 그런 피로를 잊게 해줍니다ㅎ 연재가 더디긴 해도 심도깊은 내용으로 차차 다룰 소재들이 매우 많으니 인내를 갖고 기다려 주시길 양해 바라며 타인을 비방하거나 불쾌히 만들 댓글은 자제 부탁 드려요. 궁금하신 점 등은 댓글로 문의 주시면 아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답변 드리고 있습니다! 주관적 견해를 바탕으로 한 논쟁은 도돌이표인 경우가 많고 감정만 상하기 부지기수라 응하지 않습니다. 역사와 삼국지라는 다소 고루하며 남성적인 소제를 다룸에도 예상외로 적잖은 분들의 관심과 기대에 늘 고마움 갖고 정성껏 쓰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장소 자포 (張昭 子布) A.D.156 ~ 236
삼국지연의 속 손책의 임종 장면에서 손책은 동생 손권을 불러 유언을 남기며 이런 말을 한다... "밖의 일(군사, 외교)은 공근(주유)에게 묻고... 안의 일(내정, 정치)은 자포(장소)에게 묻거라.."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나이차도 큰 터라 실상 손권이 부친처럼 의지하고 따르던.. 당시의 어린 손권으로서는 넘사벽이던 형의 유언. 손권은 그 후 형의 유조대로 살고자 애쓰고 노력했지만 그런 손권의 인내심의 리미트를 간당간당하게 했던 인물이던 "장소"에 대해 다뤄본다. 이 칼럼이 일단 아직 그리 많은 인물들을 다룬 것은 아니긴 하지만, 어쨌건 앞서 다룬 이들에 비해서 기록이 의외로 많이 남아있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니 오늘은 평소보다 분량이 좀 짧을지도...ㅎ 장소는 원래 서주의 팽성(지금의 중국 산둥성 린이시) 출신으로, 황건적의 난을 피해 강남지역으로 뒤늦은 이주를 했고 주유나 노숙같은 오의 주요대신들처럼 기존부터 강남지역의 호족세력은 아니였다. 그러나 워낙 학식이 깊고 대쪽같은 성품과 밝은 혜안 덕에 일대에서는 이름난 명사였고 그 소문을 들은 주유가 손책에게 천거하여 손책이 초빙하며 손가와 장소의 인연은 시작된다. 손책은 워낙에 장소를 믿었고 좋아했으며 군사와 외교는 주유와 의논하며 자신이 직접 챙겼지만, 내정과 행정관련 안살림은 일체 장소에게 일임하여 맡길말큼 신뢰했다. 연의에 나오는 손권에게 남긴 손책의 유언도... 사실 그건 나관중이 각색한 것이고 실제로는 유비가 제갈량에게 그러하듯, 장소에게 손권을 최대한 돕되, 아니다 싶으면 이 세력을 이끌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편으로는 당시 손책 세력의 부동의 2인자는 손책과 의형제요, 그날의 손책이 있기까지 가장 많은 공적 세운 주유였음에도 주유가 아닌 장소에게 여차하면 자신을 갈음하라는 유언 남긴 이유가... 설령 손권이 얼빵한들 장소는 결코 그런 손권을 제끼고 자기가 대빵노릇을 하진 않을 거라는 손책의 계산에서 비롯된 일종의 장소에 대한 신뢰를 보임으로서 더욱 손권을 잘 보필하게끔 유도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일단 당시로도 손권이 그만큼 모자르지도 않았음) 만약 저 소리를 주유에게 했다면.... 역시 주유 또한 손가에 대한 충성이 대단하긴 했음에도 혹시 또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만큼 주유는 워낙에 야망과 능력과 배경 및 그 명망이 굉장했던 사람이였다. 여담으로, 이미 고향에서도 학자로 명성이 자자하던터라 당시 서주자사였던 도겸이 스카웃제의를 하였으나 거절하자... 무시당한 도겸에게 하옥되어 잠시 수감생활을 했던 적이 있으나 장소의 절친 중 한 명의 노력 덕에 간신히 풀려난 일이 있었다. 아무튼 손책 사후, 다음 보스가 된 어린 손권과 그 손권의 후견역할을 맡게 된 한결 책임감 무거워진 장소... 그냥 삼국지연의만 읽으셨거나 게임만 해보셨을 분들은 상상도 못 할 이 둘의 악연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ㅋㅋㅋㅋ 손권은 상당히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이며 밝고 놀기 좋아하는데다 특히 술을 굉장히 좋아하던 사람이였어서 뛰어난 재능과 능력으로 형의 뒤를 이어 국정운영도 잘 하긴 했지만 유난히 술자리를 자주 가졌고 적벽대전 이후 기세도 오르고 본인의 나이도 차고 나서는 문무대신들에게 짖궂은 농담이나 장난도 정말 잘 쳤다. (자세한 내용은 후에 손권편에서 다룰 예정!) 그런데... 그럴 때마다 손권을 똑바로 쳐다보며 독한 직설로 손권을 나무라고 훈계하던 게 장소였다. 살짝 난봉꾼에 망나니 기질 있던 손권조차도 감히 함부로 못했던 이들이 몇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 인물들이 주유와 장소였다. 주유는 하늘같은 형과 의형제고 어려서부터 먼치킨스러움을 곁에서 보고 들었기에 그렇고 장소는 자신의 부친과 동갑에, 형에게 자신을 부탁받은걸 빌미로 작정하고 손권을 갈궜기에 여간 어려운게 아니였다. 그나마 주유는 성격이 시원시원 쿨한데다 주로 전방 요충지를 맡아 나가있던터라 딱히 손권과 조우할 일이 없었으나 장소는 아니였다. 장소 몰래 연회를 갖기도 했으나 손권 주위에 쁘락치를 심어놓고 첩보를 입수한 장소는 그곳이 어디던 나타나 흥을 깨고 부하들 다 보는 앞에서 손권도 깼다. 아무리 형의 유언이라지만 손권도 사람인지라..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내면 속 빡침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슬슬 장소의 말에 반박을 시도했다. 그렇게 시간이 가자, 오의 조회나 회의시간은 손권 VS 장소의 언쟁시간이 되기 시작했고 다혈질이던 손권은 연륜과 갑스러운 멘탈로 무장하여, 주군인 자신인데도 한 마디도 안지고 꼬장꼬장 일일히 반박 + 지적질 + 훈계 + 잔소리를 쏟아내는 장소에게 분개하기에 이른다. 어느 날은 손권이 평소같이 장소와 다이를 뜨던 중 참지 못하고 칼을 꺼내 장소의 목을 겨눈 후, 한 마디만 더 입 열면 이 자리에서 목을 친다고 협박을 했고, 장소는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울며, '신도 이러길 원치 않으나 선주(손책)의 당부가 떠올라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T-T'라 하였고... 장소가 죽은 형 이야기를 끌어대자 손권은 그냥 칼을 거두고 gg.... 이렇듯, 손권을 스트레스의 도가니로 밀어넣던 장소의 입지가 박살이 나는 계기가 생기게 되니 바로 "적벽대전"이다. 당시 장소는 조조에게 항복하자는 주장하며 같은 의견이던 무리들의 수장 격이였는데, 결국 적벽대전에서 손권 & 유비 연합군이 승리 거두며 장소는 그대로 손권에게 깨갱이가 된다. 그 후로도 장소가 잔소리를 않은 것은 아니나 그때마다 손권이 '허허.. 경의 말대로만 했다면 지금쯤 난 조조의 개가 되었을테지요....ㅎㅎ' 하는 식으로 받아쳤고, 천하의 장소도 차마 저 말로 사람 기죽이는 손권의 쉴드를 깰 길이 없었다. 그리고 사실상..... 적벽대전 승전 이후 장소의 정치적 커리어는 끝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였다. 물론, 은퇴하거나 아예 칩거한 것은 아니였으나 적벽대전을 계기로 그 이후부터의 장소의 입지나 영향력은 급격히 줄어들어, 그냥 원로로서의 공경만 받을 뿐 실질적인 정치참여는 불가해졌다. 그냥 삼국지연의만 읽어보면 언뜻, 장소의 반전의견이 이해가 안가긴 한다. 그리도 충신이라며 왜 주군에게 항복을 권한건지... 사실 장소로서는 억울할 일이긴 했다. 결과적으로 어쨌건 손권 & 유비 연합군이 승리하긴 했다만... 사실, 개전직전의 양측 전력차이는 비교불허일만큼 압도적이였다. 더구나 조조는 당시 전국 최강인 원소세력을 무너뜨리고 중원 한가운데에서 결코 녹록치 않은 세력인 유표세력까지 무너뜨린 시점에, 형주의 잘 훈련된 수군까지 손에 넣어... 손권세력의 최대 강점인 양쯔강의 지리적 이점도 상실한 상태였다. 심지어 끝까지 조조에게 항전했던 원소의 아들들은 끝내 죽음을 면치 못한 반면, 일찌감치 항복한 유종과 그 일족들은 목숨을 보전하고 있던 상황에.. 손책에게 손권을 신신당부 받은 장소로서는 자신의 주군이 몇몇 객기 앞세운 이들의 부추김에 넘어가, 젊은 혈기로 항전을 택했다가 어렵게 이룩한 기반이 다 작살나고 결국... 손권마저 목숨을 잃을 것이 걱정되어 그리한 것. 당장 여러분들도 여러분들 아버지께서 브록 레스너와 프로레슬링 경기를 치뤄서 이기고 말겠다면... 울아빠는 짱짱맨이니 반드시 이길거얌! 하며 응원할건지, 뜯어 말릴건지..? 이후 거의 아닥하고 지내던 중.... 지금의 랴오둥 지방의 군벌이던 공손연이 서찰을 통해 손권 세력에 편입할 의향을 타진해왔으며 장소는 공손연의 속셈을 알 길이 없다고 거절하라 했으나, 손권은 그대로 즈려밟고 씐나서는 공손연에게 사자를 보냈고 빡친 장소는 그대로 병을 핑계로 집에 짱박히고 역시 빡친 손권 역시 다시는 나오지 말라며 장소의 집 대문을 진흙으로 막아버렸다. 변심한 공손연에 의해 두 사자가 죽음 당하자 뻘쭘해진 손권은 장소를 부르나 당연히 장소는 안왔고 장소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그래도 장소는 나오지 않았다. 화가 치민 손권은 어디 이래도 안나오는지 보자며 장소의 집에 불을 싸질렀고.ㅋㅋㅋ 그래도 장소는 버티던 중 결국 장소의 아들이 들쳐없고 나온다. 놀라운 점은... 아무리 손책의 유지가 있었다고는 하나, 연의와 달리 마냥 온화하지도 않았고 나름 성깔 있던 손권의 생애에서 저토록이나 손권에게 막장으로 개기고도 끝내 숙청 되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는 것. 보다시피 80세까지 살았는데, 거의 1,800여 년 이후의 지금으로도 오래산 나이인지라 평균수명이 40대 초반이던 시절의 그 나이는 거의 지금으로 치면 160살까지 산 거나 진배없는 상황... 심지어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사망한 시점에도 꾸역꾸역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사료에 남은 오의 인물들 중 "두번째"로 장수했다. (첫번째는 무려 96세에 사망한 "여대"ㅋㅋ) 이토록 장수를 해서 그런지, 각종 미디어 속 장소는 저렇게 백발의 70대 노인으로 그려지나, 이미지가 저래서 그렇지, 앞서 언급했던대로 손견과 동갑에, 조조보다 1살 어렸고(!?) 불과 유비보다 5살 많았다. 정말 저런 어르신 비쥬얼 당시의 장소는 위에서 말했던대로 적벽대전 이후 실권을 잃고 별 다른 영향력이 없는지도 꽤 지난 시절의 모습인 것이다. 덧붙여 손권과의 또 에피소드가 있는데, 추후 손권이 제위에 오르자 승상직에 숱한 이들이 당연히 장소를 천거했으나 손권은 싫다며 "손소"를 임명.. 그러나 손소가 단명하여 다시 공석된 승상직에 다시 문무대신들이 장소를 추천했고 역시 손권은 또 싫다며 "고옹" 임명.. 다행히 고옹은 장수ㅋ 여담이지만 노숙과는 사이가 안좋았다. 서로 무시하고 일단 반대부터 하고 보는 그런 사이. 손책이 믿고 기대던 양대산맥이였으나 주유와도 개인적 왕래의 기록이 없다. 황개와도 한 번 큰 언쟁을 벌인적이 있다. (뭐 이래 적이 많어...)
손견 문대 (孫堅 文臺) A.D.155? ~ 191?
중국의 삼국시대를 구성하는 위, 촉, 오 중의 하나요.. 위, 촉, 오 중 가장 마지막에 망한 오나라의 황실이던 손가의 시작에는 이 남자가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손가의 제네시스라 할 수 있는 "손견"이다. 여기저기에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중국 춘추시대의 위대한 병략가인 '손무(孫武)'의 후예'라는 소문과 추측까지 났지만 일절 그 실제는 확인된 바가 없는 그저 루머에 불과하다. 물론, 절대 아니란 증거도 없지만 유비가 한황실의 종친이라는 사실처럼 족보를 뒤져 팩트를 입증한 것이 아닌 본인의 자칭이며 또 이를 갖고 삼국지정사의 저자인 진수 또한 정황상의 추측을 한 것에 불과하다. 양주 오군 부춘현이 고향이며 오늘날 중국의 최대도시인 '상하이(上海)' 인근쯤이다. 물론, 저 당시의 오군은 이미 전한시대를 넘어 진나라 때부터 살기 괜찮은 지역이였고, "항우"도 거점 삼았던 인구도 적잖던 곳이긴 하지만 당연하게도 지금의 상하이와는 넘사벽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유의해두자. 전반적인 사료들 및 역사서와 그 주석본들, 열전까지 죄다 뒤적여 추론해 볼 때... 양주지역의 제법 좀 사는 "호족집안 아들"이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고 또 대대손손 유구한 금수저까진 아닌거 같고, 후한 말에 이르러 떠오른.. 러시아의 올리가르히같은 그런 신흥세력의 자제였다. 어릴 때부터 이미 살던 동네와 고향 일대에서 먹어주는 깡다구와 대담함을 지닌 싹수 다른 소년이였으며, 만 17세에, 모여있는 수적떼들에게 홀로 덤벼 그들을 쫓아내 와해시킨 일화가 있고, 이걸 계기로 벼슬길에 나가 무관이 되어 같은 해 회계군의 허창 & 허소의 난을 제압한다. 이때부터 손견은 고속승진을 시작했다. 참고로 손견이 잘 나가는 호족집안임을 입증해 주는 한 예가 바로 위의 저 허씨들의 난을 제압코자 모병하는 과정이였는데, 관군만으로는 전력이 부족하다 판단.. 사재를 털어 1천 여명의 병력을 추가로 모병하여 임무를 완수했다는 점이다. 당장 천 여명을 모병하고.. 그렇게 모집된 인원들을 무장 및 최소한의 복색을 통일시켜 먹이고 재우고 훈련하는데 투자되는 비용이 벌써 보통이 아니다. 아무튼 놀라운건 손견이 저런 히어로급 활약을 올렸던 연령이 고작 겨우 열 일곱 가량(추정) 나이였다는 것인데, 아무리 저 시절이 평균수명, 사망연령이 낮디 낮아 일찍일찍 결혼하고 얼른얼른 성인대우를 받았던 시절임을 감안해도 참 대단함이... 당장 나도 그렇고, 여러분들이 열 일곱살 때 어땠는지 떠올려보면 바로 답 나온다. 담임선생님의 빠따 한 번에도 고통에 몸을 뒤틀고 쉬는 시간 벨이 울림과 동시에 매점으로 달려나가 빵 사먹으려고 버둥이던 우리의 그 나이에 손견은 홀로 수적떼를 목 베고, 벼슬도 오르고 군사를 모아 전투도 나갔던 것.. T-T 다만.. 어려서부터 아예 학문은 내려 놓았었던 듯. 책을 읽었다는 기록도 없고 심지어 문맹이였다는 설도 있다. 물론, 저 당시에 문맹률은 엄청나긴 했다지만, 그래도 나름 사는집 잘 나가던 자제로서 문맹설은 본인이 얼마나 학업을 멀리 했는지를 보여준다. 저 당시는 오로지 무예만 출중한 이들은 무시를 받았고 높은 직위에 오르는 데도 한계가 있었기에 어느 정도의 클래스가 되는 무장들은 깊은 학식까진 아니여도 최소한 여러 권의 병략서, 병법서들을 읽는 수준은 되야했던 시절이였기에 문맹설이 돌 정도로 학문을 등한시한 점은 자랑할건 못 됨이 맞다. 허나 그런 무식함에도 불구하고 군사관련 행정처리에는 꽤나 빠삭하게 처리를 했었고 그런 일처리와 용맹 그리고 궂은일은 미루거나 피하지 않고 나서서 쓱싹 처리하는 빠릿함덕에 평판은 좋았던 편으로 성격은 좀 불같을 지언정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시원시원하면서도 화끈한 성격 덕분에 따르는 이들은 적잖았던 모양이다. 군율준수에 매우 엄하면서도 풀어줄 때는 풀어줬고, 병사들을 고압적인 자세 일변도가 아닌 "전우애"로서 대함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식사도 병사들과 함께 동일메뉴로 먹었다고 하니 당근 병사들의 충정도 높았다. 이래저래 빠른 출세가도 달리며 승승장구 했던 손견이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땅 넓고 사람 많은 중국의 어느 지역, 어느 군벌에나 두엇쯤은 있는 준재였던 그가 전국구로 발돋움하는 계기는 다 필요없고 바로바로 원소의 격문에 의해 집결한 18로 제후들의 유니온인 "반동탁연합군 VS 동탁군"과의 대립이였다. 참고로, 삼국지연의 속에는 마치 손견이 원소, 원술, 조조 등 당시 각자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참전한 여러 제후들과 역시 동등한 제후들 중 하나로 그려지는데 이는 왜곡이다. 그때까지도 손견은 독자적인 자신만의 세력을 이끌던 군벌이 아니였다. 이미 그전, '황건적의 난' 당시에는 엄연히 조정의 벼슬에 임관된 상태로 '주준'의 부장으로 참전, 그 후, 서량에서 184년에 변장 & 한수의 난 당시에는 십상시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은 것으로 밉보여 지휘관직을 박탈당한 '황보숭'의 후임으로 정벌군 사령관을 맡았던 '장온'의 부장으로 참전 하는 등... 주로 황실직속의 고위장군들의 부장으로 참전한 경우가 많았던 만년부장이였다 덧붙이자면... 변장 & 한수의 난 당시에는 서량에서 그 위명 높던 동탁도 장온의 천거로 참전한 상태였는데, 손견과는 여러 모로 행실과 견해의 차이로 몹시 사이가 안좋았던 터였고 손견과 달리, 상관인 장온에게도 불손하며 제멋대로에 안하무인으로 굴던 동탁이였기에 둘은 상극.. 게다가 서량에서는 먹어주던 동탁이 상당한 군공을 쌓았음에도 손견은 몇 차례 패전하는 등 재미를 못 봤다. 반동탁연합군에 합류했을 무렵도 당시의 위세가 천하에서도 세 손에 꼽히던 "원술"의 사실상 부장에 가까운 자리로 원술의 지시와 서포트를 받으며 참전했었다. 아무튼 하여간 그렇게 반동탁연합군 소속으로 참전한 손견은 그야말로 군계일학적인 대활약을 벌이며 동탁군을 양민학살하여 후한의 슈퍼스타로 발돋움 하는데... 일단 첫 타석에서는 접고 들어갔다. 동탁의 부장이던 '서영'과의 전투에서 박살이 나서 간신히 최측근의 호위병력 몇 십여 기만 이끌고 살아나왔고 그마져도 위급상황까지 몰려.... 자신의 한 팔과 다름없던 "조무"가 손견의 붉은 두건을 대신 쓰고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어준 덕에 겨우 살았다. 참고로, 삼국지연의에서 조무는 저렇게 손견을 살리고 간지 뿜으며 장렬히 전사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저 때 손견의 두건을 걸어놓고 적병들이 돌아갈 때까지 짱 박혀 있다가 살아남았다. 다만.... 그 이후로 정사에 더 기록이 없어서 어찌 되었는지는 알 길은 없다. 저 패배를 보약 삼아 그 다음부터 나선 손견은 다른 사람이 되어 동탁군을 거침없이 관광 태우기 시작한다. 동탁의 부장 '호진'의 군대를 엘리시키고, 무력의 화신이던 그 "여포"의 부대조차 지워버렸으며, 심지어 이 와중에 연의에서는 관우가 "데운 술이 식기 전에" 목을 베었다는 "화웅"도 참수한다. 솔직히 화웅이 연의에서 관우버프용 적장으로 나와서 동탁군의 에이스던 여포와 함께 원투펀치를 이루는 맹장으로 그려지지만 솔직히 정사나 그밖의 기록들에서는 별 다른 언급이 없어서 그 정도의 장수인지는 알 길이 없다. 허나 당시 화웅이 맡았던 임무나 직위등을 볼 때, 그렇다고 또 듣보잡은 결코 아니였음을 예상할 뿐! 결국 이런 손견의 크레이지 모드 탓에 동탁은 당시의 후한 수도이던 낙양을 죄다 초토화 시킨 후, 장안으로 천도를 하게 되며... 이 와중에 한 번 여포부대를 박살냈던 손견은 다시 한 번 낙양에서 여포부대를 짓이겼다. 이렇게 수복된 낙양성에 진입하며 손견이 옥새를 득템하게 되었고 그 옥새는 당시 손견의 주군이던 원술이 반협박을 하여 삥뜯기고 만다. 삼국지연의처럼 옥새를 꿍쳤다가 손책에게 물려주고 손책이 그 옥새를 담보삼아, 원술에게 병력을 인수받아 독립했다는 것도 삼국의 한 축을 맡는 손가의 라이프를 보다 드라마틱하게 만들고자 각색된 것이였다는...ㅎ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손견은 명백한 "원술의 부하"였다. 삼국지연의만 보셨거나 게임 등으로만 접하신 분들은 절대 몰랐을 사실이다. 허나 원술이 그럼 그렇지, 명군이 아니다보니 그 아래에서 손견이 이래저래 속앓이를 하긴 했다. 일단 저 동탁과의 전투에서도 파죽지세였지만... 손견이 너무 잘 나가, 그 위세나 명성이 높아지면 그를 컨트롤하기 벅찰 것을 염려하고 시기했던 원술이 겐세이를 놓고자 군량보급을 끊었던 탓에 손견은 그 드높던 기세가 주춤해질 수 밖에 없었고 위의 언급대로 옥새마져 협박으로 빼앗기며 심지어 그 아들 손책마져도 원술로 인한 스트레스가 여간 아니였다고 한다. 그 후.. 그 원술의 명으로 유표를 공격하던 중, 당시 손견에 맞선 유표측 장수인 "황조"의 부대와 전투 중, 원정군 총지휘관답지 않게 퇴각하는 황조를 직접 앞장서 추격하는 무리수를 두다 가뜩이나 눈에 잘 띄는 붉은 두건을 두른 탓에 빗발치는 화살과 돌에 맞아 젊은 나이에 허망히 생을 마감한다. 직접적인 사인은 날아온 돌에 머리를 직격으로 맞고 두개골의 골절에 의한 즉사. ... 손견 본인의 전투 스타일 자체가 겁대가리 상실하여 앞뒤 재고보고 할 거 없이 자신이 앞장서는 스타일. 심지어 공성전에서조차 자신이 앞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고 위에서 언급된, 손견을 전국구스타로 만들어준 동탁과의 전투에서도 그 잘났다는 18로 제후들 중 거의 유일하게 손견 혼자 동탁군 전군을 발랐을 당시 역시 가장 선두에서 미친 듯 싸웠던 손견이였다. 일기토기록이나 무예솜씨에 대한 언급은 따로 남아있는 자료가 없으나, 저렇게 밑도 끝도 없이 앞장 서서 날뛴걸 보면 결코 힘과 무예가 뒤쳐진 사람은 아닐 거라는 것은 기정사실. 저런 스타일은 뭔가 간지넘치고 상남자스러워 보이긴 해도 정말 크나큰 리스크를 안고 있는 '하이 리턴 & 하이 리스크' 타입이라 할 수 있다. 총지휘관이 후방에서 지령만 내리는 부대와 직접 장병들을 독려하며 자신이 선두에서 달려 나가는 부대의 사기 차이는 극명하다. 저 당시의 병사들은 딱히 긴 시간 제대로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 드물었고, 대개 필요시에 허겁지겁 긁어모은 농부들 출신이 대부분에 장비나 무기도 별 볼일 없었다. 우리가 삼국지관련 각종 미디어에서 보듯, 무슨 요새군대처럼 통일된 군복을 입은 것도 아니였다. 쉽게 말해 거의 오합지졸이였는데... 그런 병구성일수록 몹시 중요한 요소는 딱 두 가지! "병력의 수"와 "병력의 사기"이다. 헌데, 그 둘 중에도 더욱 중요한 것은 "사기"였다. 기세가 드높은 소수가 그렇지 못한 다수를 일방적으로 도륙하는 경우도 저 당시는 부지기수였고. 서양의 역사를 봐도 숫자가 많다고 볼 수 없던 로마군이 다수의 게르만족, 북아프리카에서 승리를 거둔 큰 이유는 잘 훈련되고 통제된 정예병들의 자신감에서 오는 결국은 "앞선 기세" 탓에, 상대들이 더 많은 수나 지리적 이점을 가졌음에도 오히려 기가 꺾인 탓이였다. 심지어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는 그 무섭다는 '코끼리부대'를 앞세우고도 보병중심의 로마군에게 패했다. 이유는 카르타고는 코끼리를 앞세우고 나머지는 뒤로 배치, 코끼리가 짓밟고 휘저으면 나서서 시마이하는 전법인데, 로마군의 화살과 투창에 결국... 살로 이루어진 코끼리가 쓰러지면 그 후로는 대책이 없던 카르타고군은 기세가 꺾였기 때문. 아무튼 그렇다보니 저런 용감한 지휘관이 선두한 부대에, 겁을 먹는 장수나 병사가 있을리 만무하여 손견의 부대는 어지간한 적세력은 별 다른 전략없이도 죄다 씹어버렸던 것이다. 허나... 저 방식이 반대로 정말 극히 위험한 게.. 앞장 선 지휘관은 다시 말하자면 그만큼 적병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고, 제아무리 무예가 뛰어난들... 절대 다수의 병력이 다구리를 놓으면 장사가 없고, 활같은 원거리무기에 대해서도 취약하며 또 언급했듯, 만에 하나 지휘관이 전사하면 그 중요한 기세가 꺾이기에.. 다수여도, 승세를 타고 있었어도,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어 패할 위험이 지배적이다. 게다가 저 방식의 장점덕에 열 번, 백 번 이긴들... 저 방식의 단점탓에 한 번 패하면.. 그 당장의 전투는 물론, 그 세력 자체의 존망이 걸리게 된다. 그렇기에 이미 진즉부터 손견의 측근들은 그의 무모한 선두돌격을 자중시켰으나 그때껏 멀쩡한 손견은 당연히 씹고 지고집대로 했고, 그러다 결국은 누가 어디서 던졌는지도 모를 돌팔매에 맞고 허망히 사망한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이러한 성향은 장남에게도 고스란히 유전된다는... 성격은 시원시원했던 모양이다. 처벌도, 용서도 화끈했고 철저한 행동파였다. 대개의 맹장들이 그렇듯, 성격이 불같고 급했으며 전략전술 등은 비겁한 꼼수로 생각하여 비중을 크게 두지 않았다고 한다. 물욕은 없으나 고집이 센 편이였고 대단히 헌신적(?)인 아버지로서 어느 정도 나이가 된 아들들은 전장에 늘 데리고 다니며 각종 군사전투관련 경험과 지식들을 쌓게끔 지도했고 무예도 직접 가르쳤다. 아내(오국태 부인)를 몹시 사랑했던 로맨티스트이기도 했는데, 낙양에서 얻은 옥새를 원술에게 바치게 된 이유가 바로 원술이 손견의 아내를 인질 삼았기 때문이였다. 물론, 현대의 기준으로 아내가 인질인데 그깟 도장은 당연히 포기하는게 맞는거 아니냐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여성인권은 지금과 비교불가인 거의 남성의 부록으로 여겨지던 때고 다른 인물들은 자신의 야망이나 위급시에 아내의 안위는 내팽개 친 경우가 부지기수에 심지어 아내가 여럿인 경우도 많았고 "옥새"는 그냥 열쇠도 같이 하는 도장집 가서 인감으로 쓸 거니까 소뿔로 파달라며 3만원 주고 잠깐 기다리면 도장아저씨가 돋보기끼고 레이져로 파주는 그런 물건이 아닌! 상당한 야망가였던 손견같은 이에게는 대단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 당시로는 황실의 권위와 정통을 의미하는 물건이였다. 괜히 삼국지게임에서 옥새를 얻으면 여포도 매력이 100이 되는게 아니고, 원술이 아무리 또라이인들 이 옥새 얻고부터 황제의 꿈을 현실화시킨게 아니다. 게다가 당시 옥새를 분실한 후한 황실도 분실한 옥새를 새로 제작하지 못 하고 전전긍긍하던 것도 옥새는 어디 뒀는지 기억 안나면 다 서랍 뒤지고 엄마한테 어디 있냐 소리질러 찾다 끝내 기억 안나면 새로 마련하는 그런 물건이 아니였기 때문이였다. 옥새 이야기가 길어졌다만, 결론은.. 그런 어마무시대단굉장한 슈퍼레어템을 겨우(?) 아내 때문에 포기한 손견의 가족애가 깊었다는 것. 게다가 그런 가족애는 당시의 영웅이라 일컬어지는 인물들에게는 결여된 가치관이였다는 점이다. 당장 조조만 해도 자기 죽게 생겼으니 장남 조앙을 내버렸고(당시의 장남의 가치와 위치는 상당했음!) 인의의 아이콘 유비도 자기가 위급하니 부인들과 형제들 내팽개치고 지살자고 혼자 내뺐으며, 기타 숱한 인물들이 아내나 기타 가족들에 대한 안위는 뒷전인 경우가 다반사였다. 여러분들도 만약 강남 테헤란로 한복판의 15층 짜리 빌딩 하나를 얻었거나 국회의원 공천권을 받았는데 누군가가 여러분의 아내나 여친을 인질삼아 내놓으라면 내놓겠나? (잠깐.. 당연히 안내놓는다는 전제로 이리 물어본 나만 혼자 지금 쓰레기가 되는건가!?) 하여간 단점도 적지 않았다만 이런저런 영웅호걸의 면모들이 있었기에, 그 DNA가 전달된 손책, 손권같은 이들이 그 인물많고 사건많던 중국 삼국시대 속에서도 큰 획을 그은 히어로가 될 수 있었다는 말씀! 오늘의 주인공인 굵고 짧게 살다 간 손견의 이야기는 여기서 매듭 짓는다. 이번 칼럼은 원래도 늦었지만 유독 더 많이 딜레이가 된 점 깊은 사과 드립니다...T-T 변명을 해보자면, 제가 늦은 나이에 다시금 학구열을 불태우느라 지금 사이버대학에 등록해 퇴근 후에 공부를 하고 있는데, 중간과제 제출 기간 및 중간고사 기간을 앞두고 과제와 시험공부 탓에 틈내기 쉽지 않았고, 또 한 가지는 제가 좀 더 좋은 회사에 보다 나은 조건으로 이직을 하게 되면서 이것저것 좀 정신이 없었어요.. 아무튼 저도 노느라 늦어진 것은 아닌 점 양해 바랍니다. 이번주와 다음주중으로 중간과제 제출도, 중간고사도 다 마무리 지어지니 그 후부터는 제깍제깍 올리겠습니다!
작정하고 애니메이션 사업에 뛰어든 네이버웹툰
네이버웹툰은 2017년 자회사 스튜디오 리코를 설립했는데 2021년 로커스를 인수합병함 그리고 최근 네이버웹툰 자회사 통합체제가 마무리됐다고... 본격적으로 웹툰 애니메이션화 사업에 속도를 낼 예정인 듯 최근 로커스를 인수한 게 진짜 미친 거 같음 로커스는 CGI/VFX기업+애니메이션 스튜디오임 <스튜디오 리코> 최근 인수한 <로커스> 일단 <스튜디오 리코>는 콘텐츠 제작 회사 웹툰을 제작하거나 혹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함 웹툰 제작으로는 성과가 큰 편인데, 애니쪽에서 큰 성과를 보인 적은 아직 없음 1~2분 짜리 단편애니는 꽤 많이 선보였고, 장편애니는 2023년 연의편지 극장판을 통해 처음으로 선보일 예정 아래는 <로커스> 제작물들 일단 현재 로커스 애니메이션은 2023년을 목표로 유미의세포들 극장판을 제작중 동시에 원작작가 이우혁님과 2020년부터 퇴마록 애니메이션화 진행중 스튜디오 리코는 연의편지 극장판 제작에 집중하는 중 여튼 인수합병 마무리한 지 얼마 안 된 상태라 당장 협업 작업물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추후 둘이 협업을 하면서 웹툰 애니화 사업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면 퀄리티 장난아닐듯 개인적으로 화산귀환 팬인데 심장떨리네요 웹툰 화산귀환이 네이버 자회사 스튜디오 리코 작품 만약 애니화한다면 웹툰팀이 애니화 작업에 동참 가능 1차 출처ㅣ로커스, 스튜디오 리코 유튜브 2차 출처ㅣ엽혹진
주유 공근 (周瑜 公瑾) A.D.175~210
역사에 있어 가장 무의미 하면서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역시 "만약에"(Maybe)라는 가정이 아닐까 한다. 특히 역사 속 인물들에 있어서 가장 많이 적용되는 '만약에'는 'OO가 더 오래 살았다면...'이 아닐런지. 오늘의 주인공은 삼국지를 읽어본 이들에게서 바로 저 '만약에...'를 가장 많이 되내이게 했을 인물 "주유". 삼국지에서 주유는 위에서 언급한 '만약에...'에 제일 많이 언급됨과 동시에 저승에서 나관중에게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었다면 초호화 변호인단을 꾸린 나관중의 거듭된 항소에 3심까지 가더라도 무조건 다 승소할 만큼.. 삼국지연의 최대의 피해자나 다름 없는 너프를 먹은 비운의 인물이다. 삼국지 등장인물 중 가장 빼어난 용모 + 명문가의 귀족 + 최상류 부유층 금수저 + 너그럽고 대범한 성격 + 천부적음악재능 + 천재적 전략가 기질 + 미녀 아내 등등.... 엄친아를 넘어 먼치킨이던 이 남자는 촉빠에 제갈량빠인 나관중에 의해 "제갈량과 맞다이를 벌인 죄"로 앞뒤 안가리고 덤비는 다혈질에, 상황파악 못 하는 넌씨눈, 속 좁아서 제 성격도 못 이기는 쫌생이로 격하되었다. 어린 초딩시절, 당시 원술 휘하의 장수던 손견의 장남인 손책을 조우하고 그에게 반해 그때부터 마음 깊이 손책의 사람이 되기로 다짐한 주유는 당시 대대로 명문가에 양주지역의 큰 호족의 자제였음에도 고작 일개 장수의 아들에 불과한 손책에게 다방면의 호의를 베풀며 둘의 우정은 깊어간다. 나이는 동갑이지만 생일은 손책이 빨랐고, 손책의 모친 오국태부인도 주유를 매우 예뻐 했으며 손견 또한 주유를 아들같이 대했고 주유는 자기네 집안이 보유한 가장 큰 저택을 손책에게 선물한 적도 있었다. (역시 친구를 잘 만나야..) 지금으로 치면 하버드를 졸업하고 잘 생긴데다 머리 좋고 돈 많은 신진그룹의 조태오가 아버지가 9사단에서 대대장 하시는 내 친구 창석이랑 친구나 마찬가지다. (지금은 창석이네 아버지 예편 하시고 베스킨라빈스 하심) 삼국지연의에서 어쨌건 삼국의 한 축을 맡는 손가의 출발점인 손견에 대한 미화가 커서 그렇지, 사실 죽는 순간까지도 손견은 원술 휘하의 장수였고 더구나 손책과 주유가 알게 될 당시의 손견은 진짜 크게 대단할 게 없던 장수였다. 손책이 십대 후반이 되면서부터 주유는 양주 일대의 여러 호족들에게 손책을 소개하고 친분을 쌓게 하고 안면을 트게 하는 등 손책을 키우기(?) 시작했고 물심양면으로 손책을 조건없이 도울만큼 손책에게 잘 대해줬다고 한다. 이후 손책의 바로 아랫동생인 손권과도 친분이 깊어졌고 손권 역시 하나님같이 여기던 형의 베프인 주유를 형님의 예로 모셨는데, 놀라운건 그래봤자 친구 동생이고 무려 일곱 살이나 어린 꼬맹이던 손권을 "깍듯이" 대했고 늘 존칭과 경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결과론적으로 주유가 손권 아랫 사람이 된 역사를 아는 우리 입장에서야 '당연한거 아님??' 이라지만 그때만 해도 손책이 그렇게 크게될 지, 손권이 그보다도 더 크게될 지는 알 수 없던 상황.... 심지어 손책은 부친 손견이 전사한 후, 원술에 의해 잉여쩌리 취급 받다 소수병력만 이끌고 독립했는데, 이 때만 해도 손책의 성공을 점치는건 고영욱이 뽀뽀뽀 진행자를 맡을 확률보다 낮았다. 아마도 주유는 손책의 대단한 포텐셜을 감지하고, 자신의 모든 걸 바쳐 손책을 크게 성장시킬 마음을 먹고서 그랬던게 아니였나 하는 짐작을 해본다. 이전 제갈량편에서 짧게 언급했지만, "전략가"로서의 자질과 능력은 제갈량 이상이였고, 실제 역사에서 조조를 사실상 유일하게 처참히 발라버린 판의 총지휘자였다. 적벽대전 당시 고작 3만 여에 불과한 겁에 질린 오군을 이끌고 2만이 좀 안되던 유비군과 연합하여 당시 약 20만 ~ 24만 여 명으로 추산되던 조조군을 지워버린 가장 큰 주역은 각 군의 배치와 전술기획, 총 지휘를 한 주유였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 24만 VS 5만은 넘사벽 차이까진 아니라 보여질 수도 있지만, 무슨 첨단무기나 장비가 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쪽수가 깡패고 전술이던 당시 상황에서 저 차이면 대개 GG 치는 경우가 부지기수.. 더구나 저 때의 조조군은 중국 특유의 빅뻥을 가미, "100만 대군"을 자칭하며 장강(양쯔강) 상류에 진을 쳤고, 당시 분위기는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와 스파르타의 전쟁이나 엇비슷한 분위기, 상황이였는데 오히려 이길 수 밖에 없다는 자신감으로 뭉쳐서 여유있던 주유였다. 오의 대부분 고관대작들이 항복을 주창했으나, 항전론을 외친 최초 발언자는 "노숙"이였지만 노숙은 "우리가 이김!"이라기보다는 "아마 질거임...그래도 붙어보자능!!!" 이던데 반해 주유는 항전을 넘어, 승전을 자신했다. 그는 여느 전략가들처럼 혼자 이것저것 짜내기보다 여러 책사들과 장수들과 회의를 하고 거기에서 나온 여러 아이디어들 중 "될 만한" 기획안을 채택하는데 능한 '수석' 스타일이였다. 사실 저것도 대단한 게, 정말 뛰어난 대국안이 없으면 당연히 여러 아이디어 중 뭐가 옥석인지 알 수 없다. 적벽대전의 신의 한 수였던 "화공"도 주유나 제갈량의 아이디어가 아닌 무장이던 "황개"의 의견이였던걸 주유가 채택한 것... 게다가 유비를 대단히 경계했던 사람이였다. 당시 오 내부에서 대체로 유비를 그리 높게 보는 이가 없었고, 유이하게 노숙, 주유만이 유비를 높게 봤으나 둘의 대처는 달랐다. 노숙은 유비와의 화친을, 주유는 유비 및 유비세력의 조기견제를 주창.... 만약, 손권이 주유의 의견을 따랐다면 이후 황제까지 오른 유비는 없었을 것이나, 손권도 유비를 잠재적 위협요소라 인지는 했으나, 주유만큼은 아니였고 당시의 상황도 상황인지라 노숙의 의견을 따른다. 장로가 유장이 통치하던 익주를 공격하자, 그 소식을 듣고 손권에게 서촉정벌을 주장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안이였다. 일단 천하패권보다 형과 자신이 일군 강동의 지배력 강화가 우선이던 손권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던 시각의 오 문무대신들에게, 성공할 시에는 천하의 남쪽 절반을 먹는 서촉 정벌은 실로 스펙터클 했다. 그러나 홈에서는 막강했어도 원정능력이 그닥이던 오군 이끌고 장거리 원정에 심지어 험준한 산지에다 오군 최대 장기인 수전을 벌일 수 없던 터라, 주유의 "서촉정벌"은 '하이리턴 & 하이리스크'로 받아들여졌고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 나는데 맞손뼉 없어 흐지부지 되었으나 이를 통해 주유의 야망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솔직히 이건 좀 많이 무리수였다...) 그는 실제로 서량의 마등&한수와 연합하고 요동의 공손일파와도 협력한 후 조조의 등 뒤를 흔든 틈을 타 형주와 서촉을 온전히 손에 넣어, 양쯔 이남 점령 후 북진하여 위를 쳐부술 플랜을 갖고 있었고... 그 당시에는 심지어 조조조차 천하통일을 염두 못한 시점에서 삼국지 등장인물 최초로 천하통일 플랜을 품었던 인물이였다. 제갈량과는 앙숙처럼 나오며 못 죽여 안달처럼 이미지가 각인 되었지만, 적벽대전 당시는 제갈량을 존중했고, 이후로도 비즈니스적으로만 적대했을 뿐, 그를 상당히 대우했다고 한다. "하늘은 어찌 주유를 낳고, 또 제갈량을 낳으셨나!" (旣生瑜, 何生亮) 주유는 이 말을 한 적이 없다. 주유가 화살 맞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제갈량 탓의 빡침에 상처가 터져 끝내 죽었다는 것은 픽션으로, 병사했고 학자들은 말라리아로 추정하는 쪽으로 무게가 기운다. 적벽대전 당시 위의 스파이 역의 장간이 연의에서는 주유와 동문으로 나오지만 이는 허구... 둘은 이 때 처음 본 사이였다. 손책과 주유의 아내인 대교와 소교가 유명한데, 대교와 소교를 얻을 당시 손책은 이미 정실이 있어서 대교를 첩으로 들였으나, 미혼이던 주유는 소교를 정실로 맞았다. 아내를 많이 사랑했는지, 굉장히 자상히 아내를 잘 챙겼던 듯 한 기록이 있다. 상당히 젠틀했고 사실상 오의 군권을 잡은 손권 다음 2인자였음에도 누구에게도 위압적이거나 하대 하는 법이 없이 예의바르고 겸손히 대했다고 한다. 손견부터 손가를 섬긴 노장 정보가 초반 그를 몹시 무시했으나 변함없이 예의바르고 자신을 공경하는 그에게 감화되어 끝내 잘못을 빌었다. 이건 왠만한 이들 잘 모르는데... 신은 공평했는지, 키는 좀 작았다고 한다.ㅋ 노숙에게 장신이던 제갈량과 마주하며 목이 아프단 말을 한 적 있다. 음악적 재능이 대단하여 아무리 정신없거나 술 취한 와중에도 곡의 연주가 틀리면 지적했다고 하고, 악기도 다루고 노래도 잘 했다고 한다. 굉장한 말술을 마셨다고 하며 오에서 손권 다음가는 주당이였으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진 않았고 술도 주위에 강권하진 않았다. 장남은 이것도 유전인지 요절, 차남은 개망나니, 막내딸은 남편이 요절.... 자식농사는 흉작이였던 듯..;;; 홍콩 영화배우 주윤발이 주유의 후손이라고 한다. 실제로 영화 적벽에서 원래 주유 역은 주윤발이 먼저 캐스팅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검술에 제법 조예가 있었다고 하며, 감녕과의 대련에서 호각지세를 이뤘다고 한다! 허나 그렇다고 감녕과 무력이 동급이라 할 수 없는게, 감녕은 전장에서 다수를 상대하는 마상창술 (말 타고 창질)에 능한 야전장수였기 때문. (또 실전이 아닌 '대련'이였고...) 이건... 진짜 깨는 정보인데... 주유가 오의 군권을 쥐고 있었고 오는 지리적 특성상 양쯔강의 수군이 주력이라, 오는 수군의 총사령관인 "도독"이 지상군과 수군을 총괄한다. 아무튼 주유는 그런 수군 사령관임에도 함선에 탄 적이 "거의" 없었다.(아예 없진 않음) 그 이유는.... 그 이유는..... 바로 "배멀미".... 수군 도독인데도 배멀미를 해서 함선을 왠만하면 안탔고 본인도 이게 되게 창피했는지 이를 숨기려고 꽤 애를 쓴 모양이다. (멀미약이 있었다면 역사는 바뀌었을 지도..) 아무래도 주유의 리즈가 적벽대전 당시이다보니 적벽대전 관련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 적벽대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 단독으로 다룰 예정이라 일부러 너무 자세히 풀진 않았음! 또 주유가 워낙 손책과 베프인지라, 손책 이야기도 좀 나왔는데, 역시 손책도 나중에 자세히 다룰 예정.
허저 중강 (許褚 仲康) A.D.? ~ ?
사람 보는 안목도 훌륭했고 용인술도 뛰어났으며 철저한 능력 위주의 인재기용 방식을 추구한 실리주의자 "조조"의 휘하에는 모두가 알다시피 삼국시대 당시 가장 많고 두터운 인재풀을 자랑한 삼국시대의 레알 마드리드 라고 할 수 있었고 응당 그런 조조 아래에는 뛰어난 무장들도 참 많았다. 여러모로 뛰어나거나 조조와 코드가 맞아 신임을 얻은 장수들도 여럿 있었지만, 사료를 살피고 그 모든 것들을 토대로 볼 때 조조에게 '인간적인 애정'을 가장 많이 받았다 느껴지는 장수가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허저"였다. 오늘의 주인공은 이 진짜 "스트롱맨"인 이 인물로 간다. 오늘 날, 중국 안후이성 보저우시 출신인 허저는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며 당시 온갖 히어로들.. 그중에도 특히 범인을 훌쩍 초월하는 피지컬과 신체능력을 자랑하는 차이니즈 슈퍼히어로들 중에서도 가히 압도적인 진짜 '스트롱맨'이였음이 기록에 나온다.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하는 허저 관련 에피소드들 중 허저가 조조 휘하로 임관 전... 고향에 살 당시 1만 여명 이상의 대규모 도적떼가 허저의 고향에 침공했고 대치에 지친 양측이 휴전을 합의하며 도적들의 곡식과 허저측의 소를 물물교환 하는 와중, 소가 놀라 달아나자 그 소의 꼬리를 한 손(!?!)으로 잡고 백여 걸음을 끌고 갔다는 이 말같잖고 믿기지 않는 스토리가 엄연하게도 위서의 허저전에 실려있다.... 당시 후한말에 일반적으로 사육하던 소의 품종, 암수(♂♀)여부, 소의 연령, 소의 영양상태 등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품종여부 떠나 소라는 동물 자체가 원체 크고 암수의 무게차도 상당하지만 암컷인들 일반인에게 끌어 당겨질 무게는 아니며 어린 송아지 또한 지금 이 글 쓰는 나, 읽는 댁들이 힘으로 해볼 수준을 가뿐히 넘어서고 당시 허저측이 처한 환경이 열악해 사람도 제대로 못 먹어 오죽하면 도적떼에게 고기를 주고 곡식을 받아오려는 시도까지 한 점등 비추면 소인들 제대로 먹어 평소의 몸상태는 아니였겠으나 그렇다한들 소는 소인지라 어쨌건 사람이 일신의 용력만으로 한 손끌이를 할 생물이 절대 결코 아님은 명백하다. 게다가 소의 꼬리를 잡아끌었다는건 소 또한 순순히 끌려가지 않고 그러지 않으려 끌려가는 반대방향으로 가려고 용을 썼다는 이야기인데... 전 중국 및 전인류사에서 최강의 파워맨이라 일컬어지는 항우가 이런 허저보다 힘 좋았을까 싶을만큼 여간 대단한 힘이 아니다. 위서에 의하면 신장도 "여덟 자 남짓" 이라 하는데, 당시 후한 말 기준의 여덟 자가 현대 기준의 거의 190cm에 가깝고 '남짓'이라는 표현은 여덟 자를 좀 넘는다는 뜻. 게다가 후한 말 관련 모든 역사서들 중 유일하게 허저는 허리둘레에 대한 언급이 있다. 당시 단위로 "10위"나 되는 허리둘레를 지녔다고 나오며 이 역시 현대기준 무려 115cm(45inch가 넘는다!!)라는... 당장 이 수치는 체격이 작은 편은 아닌 내 가슴둘레를 넘어선다.. 아마도 위에 언급된 인간계 끝자락급의 파워를 볼 때 엄청난 근육질이였을 것으로 보이며 저런 피지컬까지 지닌 것으로 보아, 대략 상상해보면 '브록 레스너'나 '밥 샙' 정도 되는 체구를 가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런 거구들은 지금도 길에 지나가면 사람들이 다들 쳐다볼만큼 눈에 띄는 엄청난 거한들인데, 성인남성의 평균신장이 146cm 가량 정도였을 후한 말의 중국에서는 그야말로 단순 거인을 넘어서, 방금 화장실 다녀왔더라도 마주하면 소변을 지릴 괴물이였음이 분명하다. 이런 엄청난 신체조건 + 신체능력을 지닌 초인 허저는 조조가 허저의 고향 일대를 점령하자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을 이끌고 조조휘하로 가는데, 당시의 조조 또한 허저의 체구를 보고 심히 놀랐다는 기록이 있고 이 당시 "실로 나의 번쾌가 될만하다!!" 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조조는 허저와 그가 이끌고 온 장정들을 고스란히 자신의 근위대 즉, 최측 호위대로 임명했다고 하는데 당시같은 난세에 당시 조조가 듣보잡이 아니였음에도 그런 새로 갓 합류한 이들에게 자신의 신변경호를 맡긴 것을 보면 허저를 굉장히 좋게 보고 신뢰했던 모양인데, 이때부터 조조는 허저에게 반한 듯 싶고 조조의 알음알음 허저 챙기기가 시작되었던거 같다.ㅎㅎ 허저는 생김이나 체구, 그 압도적인 신체능력 등을 갖추고도 전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샤이가이였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눈에 띄는 것도 싫어해서 조조가 장수들을 집결하면 가장 구석이나 뒷편에 숨겨지지도 않는 체구를 한껏 움츠려 섰다고 한다. 조조는 장수들이 군공을 세우면 많은 이들 앞에서 당사자를 불러내 크게 칭찬하는 방법으로 당사자를 띄워주고 다른이들도 분발을 유도했는데, 부끄럼쟁이 허저는 간혹 공을 세우고도 이런 수 많은 사람들 앞에 불려나가 주목을 받고 추켜지는 것에 상당히 큰 부담을 갖고 있었고... 조조가 그를 앞으로 호명해도 못 들은체 딴청을 부리고 밍기적대다 거듭 그를 불러도 쌩까는 허저를 조조가 호통을 쳐 부른 후에야 마지못해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성격이 저런 사람이다보니 말도 거의 없었던 듯. 그러나 할 말은 하는 편이였던거 같고 하루는 형주방면 총사령관이던 조인이 급한 보고를 위해 허창으로 갔는데 당시 조조가 바쁜 정무 중이였고 조인은 맡은 중책이 중책인지라 조조를 기다릴 겨를은 없어 허저에게라도 메모를 전달하려 허저를 불렀다. 허저는 조조의 인척이자 최측근이고 방면군 사령관인 조인의 부름을 거절할 수는 없어 조인에게 갔는데.. 조인 : 아, 허중강! 나 지금 쫌 급한데 말 좀 전해줘! 허저 : 기다리시면 전하 곧 나오십니다.. 이러고는 조인의 대꾸도 듣지 않고 바로 휭~ 조조에게 돌아갔고 이날 이후 조인은 허저를 벼르기 시작한다. 조인은 다시 정욱을 불러 이 일을 이야기했고 정욱이 듣고 놀라 허저에게 가서 물었다. 정욱 : 중강! 사회생활 참 못하네.. 조장군 성격 몰라? 전하의 친척에 측근에 개국공신인데 왜 그러셨대? 허저 : 암만 그래봐야 저 사람은 방면 맡는 바깥사람이고 난 전하의 신변경호를 맡았는데 내가 왜 전하의 허락없이 외부인을 만납니까... 이 에피소드가 조조의 귀에 들어가자 안그래도 이쁨받던 허저는 더욱 조조의 사랑을 받았다. 허저와 조조는 아무래도 주군과 호위관이다보니 서로 붙어있는 시간이 길었는데, 허저는 종종 옷매무새가 허술하거나 한 경우 조조가 이를 먼저 보면 직접 옷매를 다시 챙겨주기도 했고, 조조가 식사시에 조조곁에 서서 조조의 식사를 지켜보는 허저에게 같이 식사를 권해서 허저가 응하면 함께 먹기도 했다. 허저는 자신이 좋아하는 찬이 있으면 응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며 응하지 않았다.... 허저가 체격이 체격인지라 허저가 타는 말은 금새 지쳐 여러 마리를 번갈며 탔는데, 허저가 탈 말은 조조가 직접 선별해 골라줬고 경우에 따라 자신이 타고 있는 말과 바꿔타기도 했는데, 주군이 신하와 말을 바꿔 타는 것은 당시 "말"이라는 동물의 군사적, 물질적 가치를 고려하면 대단한 호의를 베푸는 것이였다. 게다가 당시의 조조가 타는 말이 예삿말들도 아니였고.. 이는 마치 내가 새로 간 회사 사장님이 외근 나가며 업무용 레이를 타는 내게 자신의 아우디 Q7을 타고 가라며 바꿔 주는 것이나 진배 없는 것이다. 조조의 경호실장이면 거의 대부분 조조의 가장 근처에 있다보니 전장에 나가 지휘를 맡은 적이 드물지만 없진 않다. 양에서의 장수와 전투 당시 돌격대를 맡아 돌진하여 적의 기세를 꺾었던 적도 있고, 관도대전과 원소 사후, 원소의 잔당들을 정벌하는 중 업군 포위전 당시에도 소수나마 병력을 이끌고 나선 적 있다. 하지만 사람을 적재적소에 잘 쓰는 조조가 그를 호위관으로만 거의 중용하고 전장에 내보낸 횟수가 다섯 손에 꼽히는 걸 보면 통솔능력은 별 볼일 없었던 것 같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종종 허저의 일기토 내용들이 나오던데 올뻥이다. 허저는 누군가와 1vs1로 전투에서 맞붙은 적이 없다. 전위와 조조의 경호패키지로 묶음처리 되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둘은 연의에서처럼 서로 맞붙은 적도 없고 심지어 둘이 얼굴을 마주한 적조차 없다. 왜냐 하면 실제 역사에서는 전위가 이미 사망한 후에 허저가 조조휘하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삼국지연의의 내용 및 이를 토대로 캐릭터들의 능력치를 데이터화시킨 코에이의 삼국지 게임 내의 허저 어빌리티만 보면, 왠지 자기 이름이나 쓸 수 있을지.. 1부터 10까지 숫자는 셀 수나 있을런지 싶을 힘 쎈 바보로 그려지지만 절대 그런 사람은 아니였다. 조조에게 임관 전에도 고향에서 도적떼를 상대로, 또 조조에게 임관 하면서도 자신을 따르던 적잖은 무리들이 있었던 점 등으로 봐서 아주 근본도 없는 사람이 아니였고 정사나 위서, 그의 열전 등 어딜 봐도 '허저는 빠가였다'는 식의 언급은 진짜 1도 없다. 다만... 워낙 별 말이 없고, 게다가 이게 좀 치명적인데 허저는 평상시에 입을 약간 벌린 눈도 촛점없는 멍한 어딜 보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이 표정 탓에 그의 별명은 "호치(虎癡)"가 된 것.. 저 허저의 유명한 닉네임 호치의 호는 범 호, 다시 말해 전장이나 임무수행 및 조조곁을 지킬 때의 그의 호랑이같은 무시무시한 기세를 뜻하는 것이지만 문제는 뒤에 붙은 저 '어리석을 치(癡)' 인데... 저 치가 바로 허저의 그런 평상시 표정 탓에 붙은 것이였다. 그치만 허저입장에서 이것도 좀 억울한게, 조조곁에 있거나 전장이거나 뭐 그러면 모르지만 진짜 아무일없는 평상시에 조조가 내전에서 업무 보거나 천자를 알현, 또는 자거나 등등 그럴 때의 허저는 혼자 긴 시간을 문앞에 서 있어야 하는데 이 당시에 무슨 스마트폰이 있어서 허저가 유튜브나 빙글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쨌건 근무시간인데 이어폰끼고 음악 들을 것도 아니고, 진짜 할 수 있는거 없이 서 있는데 누군들 표정이 저리 멍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고 영국 왕실근위병들처럼 뭐 교대를 하는 것도 아니였을 것이고.... 당연히 허저는 본인의 저 별명을 싫어했고 위나라 내부에도 감히 허저앞에서 저 별명을 입에 담을 수 있을 힘과 용기를 지닌 자도 없었지만 어쨌건 허저가 기피하던 저 닉네임은 훗날... 동관에서 마초, 한수와 마주할 때 마초가 바로 달려가 조조를 개 때려잡듯 하려다 조조가 데려간 허저의 비쥬얼을 보고 짐짓 쫄은 마초가 "조공에게는 호후(虎侯)가 있다는데,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말해준 후부터 "호후(虎侯)"로 격상된다. 삼국지연의에서 업을 함락 후, 깐죽대는 허유를 빡친 허저가 죽이는 씬이 나오지만 허구다. 저런 일 자체가 없었고, 허저의 성격상 단지 저렇게 깝친다고 하여 아무나 썽큼썽큼 죽이는 스타일이 아니였다. 일에 있어서는 더할나위없이 용맹무쌍했지만 평상시도 거칠고 격한 그런 사람이 아니였다. 평소에는 온순하니 풀 뜯지만 맹수가 다가오면 날뛰는 아프리카 물소같은 타입이였던듯 싶다. 조조가 죽자 탈진하여 쓰러질만큼 울부짖었으며 어찌나 심신이 상할만큼 슬퍼했는지 각혈까지 했다고 한다... 조비 또한 허저를 근위로 삼았는데, 조조가 허저를 자신의 최측에서 경호하는 소수의 경호대를 이끄는 경호실장역을 시켰다면, 조비는 황실전체를 경호하는 황실근위대를 이끄는 근위대장같은 직책을 맡겼다. 허저는 생몰연대가 명확히 사료에 나와있진 않지만 조조의 죽음에 이어 그 아들 조비의 죽음도 봤다. 물론, 조비가 그리 오래 못산 탓도 있으나 아무튼 주군부자의 죽음을 모두 겪고 조조의 손자인 조예대에 사망한다. 여러 정황들 볼 때, 조예재위기에는 사실상 은퇴상태로서 원로예우를 받았던거 같고, 조예 재위 후 그리 오래지 않아서 사망한 듯. 사인에 대한 별 다른 언급도 없고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사망당시의 허저나이가 상당한 고령이였음으로 추정되기에 그냥 노환에 의한 병사였을 듯 싶다. 사실... 주군의 최측근 경호는 그리 공을 세우기가 쉽지 않은 자리다. 그럼에도 허저를 아끼던 조조는 그런 허저가 혹여라도 기가 죽을까, 늘 그가 있음에 자신이 마음 편할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큰 공이라며 그를 치켰고. 가끔은 허저를 전장에도 내보냈다. 허저가 근위대장임에도 몇 차례 전투에 나섰고 비록 몇 차례 안된다고는 해도 어쨌건 모두 승리했는데 추측해 보건데 이는 조조가 허저를 장수로서의 공을 세울 수 있도록 별 다른 지휘통솔능력이 없어 대병을 이끌기는 무리인 그가 소수병력을 이끌고나마 충분히 승리할 법한 전투에 가려 보내 허저로 하여금 주워 먹게끔 했던 배려로 보여진다. 허저 또한 박식똘똘이까진 아니여도 자신을 아끼는 그런 조조의 마음씀씀이를 캐치할 정도는 충분히 되었고 조조를 깊게 공경해 따랐으며 심지어 조조가 그에게 휴식을 명해도 허저는 이를 따르지 않고 거의 자는 시간을 제하면 조조의 지근거리에서 머물렀다. 삼국지 등장인물들 중 통틀어도 손 꼽힐만한 막강한 피지컬과 그에 따른 용맹과 괴력을 겸한 그가 전장을 휘젓고 싶지 않았을리가 없다. 하루종일 자신의 엄청난 신체를 서 있는데 써야함이 실로 괴로웠거나 자괴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책임감과 충성으로 묵묵히 해냈다. 비록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부여받더라도 이를 최선 다해 충실히 해내는 프로패셔널. 그렇기에 조조는 늘 자신 곁에 시립해 서 있는 그를 대함에 있어, 외지의 수만 병력을 이끌고 요충지를 지키는 사령관, 전장에서 대규모 전투를 승리한 개선장군들에 못지 않게 대했던 것이다. 어찌보면 허저 본인도 그런 자신의 성품 덕에 그 험한 난세에서 난전이나 내부적 정치싸움에 휘말림없이 내내 인정받다 천수를 누렸는지도 모르겠다. 다들 즐거운 주말 잘 보내시고 사전투표 안하신 분들은 돌아오는 화요일에 꼭! 잊지 마시고 투표 하시길 바랍니다ㅎ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대의명분에 입각해 각자가 생각하는 최선의 후보분께 소중한 한 표를 반드시 행사하세요! 사려깊은 문후보님, 구여우신 홍후보님, 총명하신 안후보님, 기개있는 유후보님, 혁신적인 심후보님 모두 화이팅 하시길. 그리고 누가 대권 잡건 부디 국가와 국민을 진정으로 위하는 참지도자 되길 기원합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ㅎ 무슨업적도 필요없이, 앞 둘이 워낙 10년 깽판이라 평타만 쳐도 성군소리 들을 각인데...
장합 준애 (張郃 儁乂) A.D.?~231
누차 말했듯... 픽션(허구)이 가미된 "소설"인 삼국지연의는 여러 인물들을 영웅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반면 그네들의 영웅화 ~ 신격화를 위해 숱한 이들을 엿 먹이기도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오늘도 역사범죄자 나관중에 의해 너프 당한 또 한 명의 피해자, "장합"에 대해 다뤄 보기로..! 장합은 삼국지정사, 위의 역사록인 위지, 후한의 역사록인 후한서, 본인의 열전인 위서의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에도 생년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사망 당시의 연령을 알 수는 없지만 원소에게서 조조 휘하로 들어갈 당시 대략... 40대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저 '장악우장서전'은 조조가 자신이 공을 이루는데 그 기여가 으뜸이라며 추켜세운 다섯 장수인,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을 묶어 편찬된 열전이다. 저 다섯을 일컬어 당시에 "오자양장(五子良将)"이라 불렀고, 촉한의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과 살짝 비슷한 뉘앙스인데, 오호대장군이란 별칭은 그 때는 없었고 후대 사람들이 붙인데 비해 저 오자양장은 당시 사람들이 붙인 것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 오호대장군같은 저 시절의 '드림팀' 또는 '어벤져스' 느낌의 패키징은 위의 다섯 장수가 원조다. 고향은 당시로는 기주의 하간군 막현(오늘날 중국 허베이성 중남부 인근)이라는 그때 치고도 꽤나 궁한 시골 작은 마을 출신이였다. 참고로 진짜 중국이 겁나 드넓긴 드넓은게... 삼국지 게임 내의 맵에서 기주는 작은 주로 나오나, 조운의 고향인 기주 상산군과 장합의 고향인 기주 하간군의 거리는 무려 166km고, 이 거리는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거리보다 멀다..ㅎㄷㄷ 만화, 게임, 책, 기타 여러 미디어물들을 봐도 다른 네임드급 인물들과는 달리, 외형 이미지가 일관적이지 못한 편인데... 이는 사료 어디에도 장합의 외모 묘사가 일언반구도 없고 그를 그린 그림조차 몇 없는데다, 그것들 마저 묘사가 모두 중구난방이다보니 도무지 이미지 통일이 안된 것. 다만, 장합의 리즈시절이 펼쳐지는 것이 조조에게 투항 이후인데 그 당시의 추정 연령이 위의 언급처럼 40대로 보고, 조조세력 합류 후부터도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을 활약하다 전장에서 전사한만큼, 사실상 각종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젊은'느낌의 장수로 표현하는 것은 어색한 감이 없지 않다. 장합은 조조 휘하 장수들 중 가장 많은 전장에 참전했고, 위의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전공이 많은 장수였으며, 주/부장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여러 숱한 전투에서 닳고 닳은 백전노장이였다. 그러다보니 큰 전장의 주요한 임무는 물론, 작은 전장의 자잘한 임무까지 가림없이 두루 맡았고 야구로 치면 4~5선발과 롱릴리프, 경우에 따라 급하면 불펜으로까지 던지면서 하루 걸러 등판하며 혹사 당하는 노예투수 비슷한 포지션의 장수였다. 그 깐깐한 조조가, 또 당시 휘하에 숱한 명장, 용장, 맹장들이 수두룩 빽빽 채이고 밟히고 널렸던 위에서 저토록이나 빈번히 굴렸다는건 그만큼 능력 있기에 믿고 쓸만큼 훌륭한 장수였다는 증거다. 심지어 백발노인 되어 집에서 손주들 재롱이나 보고 탑골공원가서 장기두며 야쿠르트나 얻어 마실 나이에 전장에서 한창 싸우다 전사하니... 죽어 눈감는 그 순간까지 위의 군밀레에 갈려나간 군돌이였다. 삼국지연의나, 연의를 바탕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각종 미디어물들을 보면 장합은 그냥 본인의 무예와 전장에서 구르며 익힌 짬밥으로 밀어붙이는 단순한 장수로 그려지나... 위에서 언급하듯, 저렇게 숱한 전장을 누볐고 또 깐깐깐돌 조조에게 신임받으며 주장으로도 쓰인만큼 사실 전략적 대국안도 상당히 뛰어난 "지략을 갖춘" 장수였다. 본래 기주의 군소 군주인 한복 휘하에 있다가 한복이 패망하자 원소의 세력에 속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전장의 시국을 살핀 후 원소나 원소의 책사들에게 여러 전략들을 입안 했으나 거의 다 씹혔다.... 원소는 사람 자체가 선입견, 편견 이런 게 가득한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데다 또 고집은 있는 전형적 꼰대인 우리 회사 김대현 이사님같은 스타일이라 그저 야전에서 뒹구는 장수인 장합의 계책을 귀 담아 들어주질 않았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 정상에 올라 야호를 외치는 전형적 예였던 당시 원소의 책사들 역시, 지들끼리도 서로 내가 옳네, 내가 맞네 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장합까지 거기 껴서 자기 의견을 제출하니 고스란히 즈려밟아 무시했다. 이렇듯, 자기 아이디어와 의견이 매번 밟히던 끝에, 원소 VS 조조의 관도대전에서도 자기가 낸 계책이 원소의 책사 중 한 명인 곽도에게 씹혔고... 그 전투에서 결국 패하며 장합이 옳았음이 드러나자 곽도가 원소에게 장합을 모함하였으며, 이에 겁 먹은 장합은 결국 원소군 내에서 베프면서 역시 원소의 아쉬운 대우에 불만가득하던 '고람'과 함께 원소군의 망루에 불을 지르고 투항한다. 역사기록에는 이 "방화 후 이적"이 관도대전에서 원소의 패배 전인지, 후인지가 안나와 있으나 어쨌건 장합과 고람이 불 싸지른 망루는 당시로는 적군의 동태를 살피는 '레이더'역할을 하는 중요한 군사시설이였기에 이를 없앤 것 자체는 어쨌건 원소군에게 치명적이긴 했다. 삼국 정립 이후에는 주로 대촉전선에 투입되었고 이유는 조조가 양쯔강을 끼고 있던데다 북진의사가 거의 없는 손권에 비해, 명목상 "한실부흥" 내세워 줄기차게 자신들에 덤벼 오는 유비세력을 훨씬 더 위협적으로 여겼기 때문. 그때 손권과 대립하는 동부전선은 장료와 악진으로 묶어 두고 가용 가능한 네임드 장수들은 대부분 대촉전선에 투입되던 시기였다. 장합은 유비도, 유비 사후의 제갈량도 상당히 껄끄러워 하던 장수였다. 대촉전선의 총사령관 역할을 하던 하후연과 조홍보다 장합의 위치는 아래였으나 이는 위에서의 커리어, 또 하후, 조 두 장수는 조조와의 친인척 관계인지라 그럴 뿐... 장수로서의 자질은 저 둘을 뛰어넘던 장합이였으며 그래서인지 조홍과 하후연은 장합을 꽤나 견제했다. 아무리 자신들의 커리어가 앞서고 조조와 혈족이긴 하다지만 철저히 능력 위주로 사람을 쓰던 조조는 언제던 장합이 더 유능하다 드러나면 속절없이 자기들보다 장합이 더 상전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이를 막아낸 위방어군의 총사령관은 연의와 달리 사마의가 아닌 장합이였고, 4차 북벌 때, 목문도에서 유인책 쓰며 거짓 후퇴하는 촉군을 사마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뒤쫓자며 바득바득 우기고 쫓아가다 기어이 전사하는 연의와 역시 또 달리... 당시 제갈량의 흉계가 의심된다며 추격을 만류하던건 오히려 장합이요, 이에 대해 군령까지 내세워 제갈량을 추격할 것을 밀어붙여 장합을 사지로 내몬게 사마의였다. 이에 대해서도 또 제기되는 설이.... 당시 장합과 사마의는 위의 대촉전선에서 은연중에 경쟁관계였었다. 쟁쟁한 커리어의 백전노장 장합, 그리고 위 군부 신진세력의 주축이던 사마의는 서로 견제하던 관계였으며 당시 직급상 사마의가 높았지만 그렇다해도 사마의에게 장합은 결코 직위로 쉽게 누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였고.... 그런 장합을 이이제이 방식으로 간접 제거 하고자 제갈량의 계책을 눈치채고도 등 떠밀었다는 설이다. 연의에서의 묘사처럼 빗발치는 화살에 벌집이 되어 바로 죽기보다 화살을 여기저기 맞고 후퇴하던 중 과다출혈에 의한 쇼크사였다. 기록에는 허벅지에 맞은 화살로 인한 과다출혈이 결정적 사인이라 나와 있다. 참고로 허벅지는 대동맥을 비롯 여러 혈관 뭉치들이 지나는 곳이라 흉기에 잘못 찔리면 지혈도 힘들만큼 과다출혈이 발생하여, 옛날 야쿠자나 조폭들도 서로 칼부림 당시 오히려 방어하기 좋아 찌르기 여의치 않은 복부나 흉부보다 허벅지를 많이 노렸다고 한다. 동물을 좋아했는지, 직접 먹이를 주며 키우던 개가 있었다는 설이 있고 자신이 타던 말이 힘들까봐 행군하는 경우에는 중간중간 말에서 내려 걷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사료기록은 아니다.) 원소 휘하에서는 고람과만 거의 이야기를 나눴으나 조조에게 투항 후 각기 다른 부대에 배치되며 연이 끊어진 듯... 여러 장수들과 열전이 묶음으로 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신상과 일상에 대한 기록이 그닥 없다. 쉽게 말해 위의 장수로서의 공적인 기록은 좀 있지만 인간 장합으로서의 사적인 기록이 많지 않다.. 장합이 커리어나 능력에 비해 그닥 인기 많은 인물은 아니다보니 왠지 이번편은 반응이 별로일거 같은 좀 불길한 예감이... T-T 그래도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 드린다는 ;;;
원소 본초 (袁紹 本初) A.D.154? ~ 202
"역사는 승자의 편이다." 저 말을 저승에서 1,815년간 느끼며 이승을 내려다 봤을 인물.. 삼국지연의 속 무능하고 우유부단하다 망한 찌질이로 그려진, 그러나 실제는 전혀 절대 그러지 않았던 안타까운 거물, "원소"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오히려 수혜자를 꼽는 게 빠를만큼 피해자들이 범람하는데, 물론 작가인 나관중의 소설적 재미를 위한 각색도 적잖았지만 나관중이 수집한 여러 민담과 구전들 속에도 그런 사례들이 많다보니 꼭 나관중만의 가해라고는 볼 수 없으나... 아무튼 나관중이 저승으로 가자 멱살잡이 하고자 늘어선 줄의 앞열에 섰을 인물이 또 원소다. 그럼 왜 원소가 억울한지, 본래 역사속의 그는 어땠는지를 살펴보자. 참고로 오늘은 유독 지루하고 길지 모르며, 원소는 그의 역사적 자취 등에 비해 인기나 네임밸류가 현세에서 그닥이다보니 삽화도 그리 많지 않아서 첨부이미지를 많이 못 구했고, 그래서 글이 더 길다보니 오늘은 좀 더 평소보다 길게 느껴질 듯 싶어 양해를...T-T 전에 댓글보니 몇몇분들이 지루해도 좋으니 길게길게 써달라셨는데 이번 칼럼 재미없어도 내 탓 아니고 다 그분들 탓이당ㅎㅎ 삼국지연의 꽤 초반부터 등장하는 네임드군주이며, 삼국의 건국자 중 가장 그레이트한 조조의 생애에서 유비나 손권 등등들을 제치고 가장 위협적이던 라이벌이였다. 비록 조조가 자신일생 가장 큰 군세를 동원했고 또 날렸던 적벽대전이 있지만, 조조는 적벽의 패전으로 인한 데미지로 위의 기반이 흔들린 것은 아니였으나.. 원소와의 관도대전은 비록 승리했을지언정, 전쟁이 이어지는 하루하루를 패망의 기로에서 스트레스 받았고 모든 걸 던진 혼신의 사투 끝에 승리했다. 그만큼 굉장했던 원소는 "얼자(孼子)"였다. '얼자'가 뭐냐? 여러분들 '서자'는 들어봤지?(사극에서 하도 많이 나오니) 알기 쉽게, 여러분들의 거의 대부분은 여러분 아빠의 첫째(이자 유일한) 아내의 자식들일텐데 그럼 '적자'다. (그리고 여러분들 존재 자체가 부모님들께 적자) 아빠의 둘째(또는 그 이하 순) 아내, 즉 첩의 자식이 '서자'. (서자의 대표적 아이콘으로는 홍길동이 있지.) 그럼 얼자는 뭐냐면, 둘째나 셋째 아내가 아닌... "여자노비의 아들"놈새끼가 바로 얼자다. 여자노비, 다시 말해 여종의 아들이라는건데... 노비도 천한 마당에 노비아들인들 어떻겠나. .. 삼국지연의에서 원소를 표현할 때 "사대삼공의 가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이는 원소의 고조부부터 원소의 부친까지 4대가 모두 삼공에 속하는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 벼슬을 했다는 소리. 요즘에 비유하면 고조부부터 부친까지 4대가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경제부장관 등을 역임했다는 말이다. 참고로 사도는 정치와 행정전반, 사마는 군사, 사공은 국가전체의 각종 토목건축 등을 맡는 자리였기에, 사공은 지금으로 치면 국토교통부지만 현세 헬조선의 국교부와 후한의 그것의 위신차는 넘사벽이였기에 사공은 지금으로치면 국토교통부 + 산업통상자원부 + 행정자치부를 합친 것 이상의 자리였다고 보면 될 듯 싶다. 아무튼 원가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못할 어마무시한 명문가였고, 저런 배경지식 없이 사대삼공이라면 의례, '그냥 좀 사는 집 아들인갑네~' 했을 원소는 금수저를 넘어 플래티늄과 다이아도 부족.. 거의 비브라늄수저로 표현된 것이였다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숟가락, 젓가락 이상 무거운 건 안들어봤고 한 번 입은 옷은 안입고, 맨날 파티나 여는 패리스 힐튼스러운 삶을 살았을 거 같지만.... 그건 위에서 언급한 적자~서자일 때고, 원소는 말 그대로 '얼자'여서 어릴 때는 그냥 결국 노비나 진배없는 개같은 어린시절 보냈다. 고향은 현 중국 허난성 뤄양시, 당시 후한의 수도인 "낙양". 집안이 집안이니만큼 응당 수도이자 최대도시태생인 차도남 원소는 출생이 154년이란 설이 지배적이지만, 명확친 않은데, 이유는 앞서 언급한대로 노비의 아들인지라... 저런 초명문가에 노비가 한 둘이였겠으며, 그런 노비들의 출산까지 디테일하게 카운팅은 않다보니 사망일은 202년 6월 28일이란 정확한 기록이 있지만 출생일은 그렇지가 못 하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원소의 부친은 삼남이였는데 장,차남이 요절.. 원소의 부친도 적자는 커녕 서자도 없었던 모양인지 원소는 얼자인데도 청년기부터는 종손대접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저건 후한서 본문 내용이고 배송지의 주석에 의하면 원소의 부친이 차남이라 부친과 그 위 장남이 요절하여 종손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몰랑~ 하여간 야망큰 원소에게 자신의 출신은 크나큰 핸디캡이 아닐 수 없었고, 이걸 좀 타개해 보고자 원소는 부친의 정부인이 사망하자 "3년상"을 치른다... (친엄마가 아닌데도) 3년상이 무엇인고 하니, 논어(맞나?)에 의하면, 아기가 태어나 부모의 일방적 보살핌을 벗어나 스스로 걷고 먹고 말하고 하는데까지 3년이 걸리기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그걸 기려 부모의 묘를 3년간 지키며 술,고기를 입에 대지 않고 부모묘소에 삼시세끼 차려 올리고 절하며 상복을 입고 지내는건데.. 써놓고보니 뭔가 간단해 보이지만, 극도의 멘탈과 체력을 요하는 고행의 길이였다고 한다. 다 치우고 조선의 12대 왕 인종이 부친의 3년상을 치르다 거식증에 의한 영양실조와 과로 등으로 붕어하셨으니 3년상의 난이도가 짐작된다. 왕도 저럴진데, 하물며 일반백성들은 오죽할까... 3년상치르다 아들이 지쳐죽고 그 아들이 다시 3년상하다 또 지쳐죽어 대가 끊기는, 무엇을 위한 3년상인지 싶은 일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원소는 자기 부친의 정실인 적모의 3년상 후, 연이어 자기가 기억도 못할 어린시절 돌아가신 부친의 상을 너무 어릴 때라 제대로 못 치렀다며 다시 3년상을 치뤄, 총 "6년상"을 치른다.... (48년 살았으면서 인생의 8분의 1을 상 치르는데 씀;;;) 당시 저 6년상은 그야말로 "장안의 화제"였다. 위에 기술했듯 워낙에 3년상이 고되다보니 실상 제대로 3년상을 하는 이가 손 꼽던 시절에, 하드코어 3년상을 FM대로만 해도 굉장한데, 어린시절 돌아가셔 못 챙긴 부친 3년상까지 굳이 치뤄 총 6년상을 지낸 울트라효자! 게다가 적자도 아닌 얼자에 심지어 엄마는 친모도 아닌데! 그것도 얼자일지언정 종손대우 받는 명가의 자제가! 역사가들의 추측으로는 저 6년상은 그냥 원소가 개효자라 그런게 아닌, 자신의 얼자컴플렉스를 벗기 위한 6년의 몸빵투자로 보며, 원소의 계산은 적중! 상 치르는 6년간 온갖 전국의 유력인사들은 3년상, 6년상 치르는 그 대단한 명가자제가 궁금하다며 묘역일대가 마비될만큼 모여들었다고 하며, 6년상을 치르며 원소의 인적네트워크와 명성은 만렙을 찍게 된다. 지긋지긋한 6년상 마친 후, 바로 낙양으로 달려간 그는 당시 조정실세인 십상시도 겁내지 않고 자기 목소리내며 세력을 모으다 대장군 하진의 라인을 타고 관직에 나갔고 십상시축출을 주장하며 당시 십상시무리와 함께 조정실권 양대산맥이던 하진세력의 명실상부 No.2가 된다. 원소주도로 이루어지던 십상시실각 프로젝트 와중에 위기 느낀 십상시는 하진을 암살하는 무리수를 두게 되고 이를 계기로 원소는 십상시 및 친십상시세력을 올킬하나 동탁에게 천자의 신변을 빼앗겨 정권장악에는 실패... 이후 당시 천자인 영제를 폐위 후, 외척이 없어 다루기 쉬울 진류왕(헌제)을 제위에 올리려는 동탁과의 마찰이 생기자 기주로 달아났고, 이때부터 우리가 아는 "기주의 원소"가 된 것이다. 일단 기주의 발해군으로 도망은 왔지만 낙양에서 나고 자란 네이티브 낙양지앵 원소는 기주에 아무런 연고도 없었고, 원소를 감시할 요량으로 동탁이 파견한 기주태수 한복은 매의 눈으로 원소를 살피며 겐세이의 연속이였다. 삼국지연의나 게임만 한 분들은 삼국지 시나리오 초기에 등장하는 약소군주 한복이 사실 원소의 상급자였다는거 잘 모르셨을 듯ㅎ 허나 동탁도 개의치않던 원소인지라 한복을 개량한복 취급해 버리며 그간 쌓은 명성을 이용해 인재와 군사를 모으는 한편, '개객끼 동탁을 다구리 놓자'며 전국으로 격문을 띄웠고 18로의 제후들이 모여 이것이 바로 "반동탁 연합군"이였는데, 면전에서 개기다 튀었어도 한 번 달래보려 오히려 벼슬도 줬건만, 그 벼슬을 지렛대로 오히려 자신에게 덤빌 세를 모으자 딥빡친 동탁은 낙양에 있는 원씨일족을 싹 다 올킬... 물론, 원소는 이를 예측 못 했을리 없음에도 반동탁연합을 주도한 것을 보면 자신의 목적과 야망을 위해서라면 거칠것없는 냉혈한임을 알 수 있고 앞서 언급한 6년상도 역시 목적이 아닌 수단이였음을 알 수 있다. 원소는 사대삼공의 명문가 공자 + 6년상 지낸 슈퍼효자 + 그간 쌓은 인적네트워크 + 슈퍼빌런 동탁에게 덤빈 용자 + 하진세력의 No.2 + 18로 제후의 응집자 등등의 온갖 버프덕에 만장일치로 반동탁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추대되었으며 민심 또한 대의를 위하려다 일가친족을 모두 잃은 동정표까지 더해져 원소의 동탁 향한 원기옥에 힘을 실어줬고, 원소는 이런 위세를 등에 업고 반동탁을 넘어.. 정권교체를 시도했다. 당시 동탁이 영제를 폐위하고 즉위시킨 9살의 헌제는 동탁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며 한황실 또한 그런 동탁과 헌제의 명분없는 괴뢰정부라 정통성을 인정 못 하니 그 무렵 상당한 인망을 얻고 있던 황족인 "유우"를 천자로 추대하여 새로운 정권을 만들려는 것이 그것이였다. 물론, 원소라고 순수한 의도는 아니였고... 비록 덕망은 높으나 정치,군사적으로는 무능에 가까웠던 유우를 옹립해 프랜차이즈화하여 자신이 후한이라는 판을 자신 위주로 다시 짜려는 정치적 계산에 의한 것. 이미 중국 전역에서도 동탁의 폭정은 뉴스와 인터넷이 없는 시절임에도 자자했고 그런 동탁이 멋대로 골라 앉힌 헌제와 그의 한황실도 정통성같은건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다들 별 대응책 못 찾던 터에 원소는 누구보다 먼저 대세를 뒤집어 볼 공격적 전략을 시도했던 터였는데, 원소 & 유우와는 상극이던 공손찬과 역시 자기 위주 아니면 다 싫고 같은 집안 얼자새끼가 나대는 것에 아니꼽던 원술, 아직 이때만 해도 한황실에 대한 충심이 남아있던 조조 등..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고, 다 떠나서 정작 당사자 유우가 적극 거부하여 끝내 무산. 유우는 진정 대인배답게 한황실에 대한 도리와 예를 져버릴 수 없다며 오히려 원소에게 황실에 대한 진심의 충성을 권유 하는 등...... 아무튼 원소의 플랜A는 이렇게 나가리. 그 후 동상이몽의 교과서와도 같던 18로 제후들의 반동탁 연합이 용두사미가 되어 근거지인 발해로 컴백한 원소는 거슬리던 한복의 기주를 따먹고 본격적인 하북강자의 포지션을 향해 나아갔으며, 원소의 모사진들 중 핵심인재인 전풍과 저수도 이 때 한복의 수하에서, 원소측으로 넘어오게 된다. 당시 하북의 초강자는 "공손찬"이였는데, 공손찬은 정말 여러분들이 단순 연의만 읽어 아는 그런 양반이 아닌 진짜 굉장한 강자로... 황건의 잔당, 오환, 흉노 할 거 없이 공손찬이 이끄는 기마군단이 지나가면 시체월드가 되었고 30여 만의 황건잔당들을 단 2만의 기병대로 지워버리는 일도 있을 정도였다. 이런 강려크한 공손찬을 끝내 꺾고 세력을 키워가는 와중... 원소에게 큰 호기가 있었는데 바로 "동탁의 사망". 당시 원소측 참모진에서는 동탁 사후 장안을 탈출, 낙양으로 돌아가던 헌제를 옹립하자는 의견이 강하게 나왔었다. 하지만 원소는 이미 헌제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다른 황족으로 천자를 갈아치우려던 이라 거부.... 이후, 헌제를 끼고 국정농단으로 엄청난 실익을 챙기는 조조를 보면 저 당시 원소의 판단이 이해가 안가지만 원소로서는 헌제를 옹립못할 조조와는 다른 사정이 있던게, 당시 조조의 측근들은 대개 조조의 어린시절부터 따르던 이들, 또는 조가와 하후가의 친족들이며 조조의 근거지는 조조가 나고 자란 곳이 가까워, 헌제를 옹립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원소는 달랐다. 일단 근거지인 기주는 원소의 아무 연고도 없던 곳이였고 동탁에 의해 원가 대부분이 멸살 당해 측근들 중 친족도 거의 없는데다 원소세력의 주요인사들은 아직 완전히 원소에게 녹아들지 않은 기주나 여타 지역 출신들이 많은터라... 괜히 헌제 데려왔더니 씨부랄 지는 원소가 아닌 한의 신하라느니, 한황실에 충성한다느니 이지랄들 해버리며 기주 내부에 원소파 VS 헌제파 이래 버리면 난감의 정점을 찍을 게 자명했기 때문. 심지어 원소가 그간 큰 명분 얻은 이유 역시 반동탁의 수장이였기 때문인데, 이제 와서 반동탁 오야가 그 동탁이 앉혀놓고 굴려 먹던 천자를 모신다면 그야말로 가오 날아가는 일인지라, 그간의 명분이 죄 박살나기 때문. 더구나.... 충격인 것은 원소는 애초에 플랜A로 유우의 천자추대가 나가리되자 플랜B로 여차하면 눈치봐서 자신이 제위에 오를 야심을 갖고 있던 자였기에 여러모로 헌제옹립은 원소로서는 택할래 택할 수 없는 길. 결국 헌제 옹립 이후부터 황실의 권위와 정통성 등에 업고 파죽지세로 세력 키우던 조조와 유, 병, 기, 청주를 토대로 하북의 기반을 확고히 한 원소는 피할 수 없는 결전을 벌이게 되는데, 원소는 천자를 등에 업은 조조를 상대하자니 이래저래 불리할 수 밖에 없었으나 오히려 이를 역이용! 조조를 도리여 천자를 억압하고 핍박하는 역적이란 타이틀을 붙이고 여기에 환관의 자제라는 조조의 핸디캡을 버무린 프로파간다로 조조를 맹비난 하는데, 이는 황실의 정통성을 짊어진 자를 그러지 못한 자가 오히려 역명분 갖고 공격하는 패러다임이 되었으며 원소 사후 유비도 이 스타일을 고스란히 이어 받아 써먹는다. 게다가 실제로 조조는 헌제 옹립 당시.... 이미 황실과 한에 대한 충심은 엿바꿔 먹은지 오래라 헌제를 '도구'로만 인식하여 단물을 빼먹던 터였기에 원소의 이 정치적 공세는 유효타를 냈다. 게다가 당시 원소의 하북 4주에서 징집된 11여 만의 대병력은 당시 전 중국 통틀어 최대병력이였고 이에 맞선 조조군 총병력은 4~5만 여에 그쳐 전력차는 명백! 참고로 그 당시 인구는 오히려 조조의 통치지역이 원소 통치지역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고 한다. 다만 조조의 지역은 동탁 → 이각 & 곽사로 이어지는 폭정과 숱한 전란으로 안정화가 안된 반면... 원소의 지역은 비교적 일찍 큰 내부적 전란없이 행정적 안정이 되어 조조의 배 이상 많은 병력을 뽑아낼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관도대전 앞서 원소군 최고의 행운은 "유비"의 합류였는데, 그때의 유비 자체는 이끄는 병력도 몇 없는 잡몹 수준이였으나... 헌제의 밀명에 동승의 주도로 조조를 제끼려다 실패한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유비의 합류는 천자가 없음에도 오히려 천자옹립의 조조보다 더 큰 명분을 가질 수 있게 해줬다. 확실히 병력과 물자, 명분면에서 크게 앞서던 원소였지만 전풍, 저수, 신평, 곽도, 심배, 봉기, 허유 등 원소의 참모진들은 개개인의 면모들은 화려하나 서로 자기가 공 잡으면 슛 쏠라 드는 올스타전 멤버같은 구성이였기에 전혀 융화가 없었고 조조와의 대결구도 또한 서로 자기 마음대로 굴려 드니 이미 이때부터 슬슬 망타의 조짐은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원소군의 주력 장수는 안량과 문추 그리고 순우경같은... 무력은 굉장해도 전략기재는 집에 놔두고 온 장수들이라 역시 좋지 못 했다고 본다. 결국 관도대전에서 조조에게 병력의 8할 가까이를 잃고 기주로 돌아와서는 강한 반전론자로서, 전쟁 전부터 재수없는 소리한다며 원소가 투옥시킨 기주 최고의 책사 전풍을 죽인다. 그런데 이건 그냥 빡침의 화풀이가 아니였고... 자신이 큰 전쟁에 패했고 이에 앞서 기주출신의 큰 호족이자 명망 있던 책사가 반전론을 펼쳤다면, 패전 후 그를 주축으로 한 기주파의 세력강화는 막을 길이 없어 세력 내부의 파벌형성 및 군주의 지위약화를 초래하기 때문이였다. 연의 속에서의 충분한 전후정황설명이 없는 경우도 많고 여러모로 조조 띄우기를 위한 폄하가 많아 그렇지, 원소는 삼국지 등장인물들 중 최고의 정치고수였고 상당히 정치공학적인 판단력이 뛰어난 군주였다. 워낙 코에이의 삼국지에 길들여지다보니 "정치"라는 부분의 정의가 왜곡될 수 있는데, 이를테면 게임내에서의 '정치'의 능력치는 엄밀히 말해 '행정능력'을 말한다. 주어진 과제를 해결함에 있어 다양하고 확실한 방침을 정하고 그에 따른 기준과 시스템을 만들어 업무를 처리하는 그런 부분들을 삼국지 게임에서는 정치라고 표현 해놨다.. 하지만 진짜 정치란, 국회에서 이루어지는 그런 것들... 상대를 이기고자, 상대를 설득하거나 상대와 타협하고자 몇 수 뒤를 가늠하고 내 이득을 취하거나 손해를 줄이고자 다양한 상황들과 대인관계를 교차계산하는 복잡한 함수를 푸는 과정이 바로 진짜 정치다. 원소는 이 부분에 있어 일말의 감정도 도덕도 양심도 없이 오로지 철저히 정치공학적인 판단을 우선하는 정치기계로, 그런 자신의 정치적 목적 달성 위한 요소들인 외모, 언변, 쇼맨쉽 등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예컨데 원소는 저 첨부삽화들처럼 전장이건 어디건 갑옷에 투구를 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차피 거대한 군세의 지도자인만큼 본인이 직접 화살 피하고 칼로 적을 벨 일은 없기도 했지만... 자신의 위엄을 뽐내고자 화려한 옷과 관으로 치장했다고 한다. 요샛말로 상당한 간지가 흐르는 멋진 외모였다고 하며, 말투나 눈빛의 카리스마가 대단했다고 한다. 원소의 패인들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바로 "후계자 문제"였는데... 원소는 사치와 허세가 심하고 난폭한 장남 원담보다 외모가 수려하고 실속있는 성격의 셋째 원상을 총애했다. 그래서 원담은 청주로 보내고 원상은 늘 자신의 곁에 두고 사실상의 후계자수업을 했는데... 이를 두고 저수는 원담을 청주로 보내는건 재앙의 시작이라 경고했을 정도였고, 결국 저수 말대로 되었다. 원담은 청주로 내려감과 동시에 사실상 독자세력이 되어 원소의 지시에 제대로 따르지 않았고 아끼는 원상은 당시 아직 미성년이라 많이 어설펐다. 원소 사후, 밉보였으나 장성한 장남인 원담 지지파와 아직 어리고 삼남이지만 원소가 후계로 정한 원상 지지파로 원소세력은 분열된다. 그 다음 패인은 "2인자의 부재"였다. 원소는 아들들과 병주를 맡긴 조카 고간을 제외하면 친족도 없었고 책사그룹내에서 가장 유력인사들인 전풍과 저수와는 노선도 많이 다른데다 기주외인이였던 본인과 달리 오래전부터 기주에서 터줏대감이던 둘을 굉장히 경계하여 그 둘을 견제코자 다른 책사들에게 무게를 배분하고자 했는데 이게 부작용나며 원소의 책사들은 삼국지를 통틀어 한 군주 휘하의 가장 단결 안되는 책사그룹이 되었다. 놀랍게도 위의 정치적 판단과 외모 및 쇼맨쉽 덕인지 관할영지 내에서의 백성들과 군사들의 원소를 향한 우러름은 대단했다. 원소가 죽자 기,청,유,병주의 수 많은 백성들이 눈물바다 이루고 원소의 장례를 손수 지내는 이들도 적잖았다고 한다. 그리고 원소의 사망 후에도 원소의 세력은 흩어지지 않고 원소의 아들들을 따라 조조에 끝까지 항거하다 세 아들이 죽고 나서야 온전히 조조에게 편입되었다. 참고로 원소는 관도대전 이후 크나큰 상실감을 앓다 죽었는데, 사망당시의 여러 정황들을 보아 스트레스로 인한 급성 쇼크사로 보여진다. 장단점과 그의 일대기 등을 통틀어 볼 때 절대 우유부단한 이가 아니였고 리더쉽과 카리스마, 결단력이 대단했고 정치적 술수가 엄청났던 조조 이상의 간웅이며 야망가였다. 철저한 자신의 1인 독재체제 구축과 다양한 수단을 활용한 백성들과 타세력 대한 선전활동 등... 지금으로 치면 구소련의 스탈린이나 현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과 여러모로 스타일이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