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cinem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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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의 포스터. 누가 더 화려한가를 뽐내는 도시의 이미지들 속에 그 포스터만이 세월을 잊은 듯하다. 시간을 잊고, 도시를 바라보는 두 얼굴의 미소에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어두운 시대, 아픈 이야기와 대면하는 것은 관객으로서도 힘든 일이지만, 포스터에서 전해지는 힘이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다. 흑백이라 좋았던 영화. 과거의 시간과 함께, 고전 영화의 느낌까지 재현한 영화. 그리고 화려함에 기대지 않은 우직한 영화. '동주'에 대한 첫인상은 그랬다.
두 명의 작가
(1) 어떤 글을 담아야 했을까
'동주'는 작가로 등단하는 몽규(박정민)로 시작해, 사후에 시집이 출간되고 작가가 되는 동주(강하늘)의 이야기로 문을 닫는다. 몽규는 작가가 된 자의 현실인식과 시대에 참여하는 혁명가의 모습을, 동주는 작가가 되지 못한 자의 문학에 대한 애정과 이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시대적 불안정함과 함께, 작가가 되었던 청년과 작가가 되고 싶었던 청년이 가지는 간극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두 친구는 문학이라는 교집합을 가지지만, 몽규는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글을 원했다. 반면, 동주는 시 자체의 아름다움을 고민하는 글을 썼다. 그는 암울한 시대에 시를 쓰는 이의 아픔, 자괴감 등을 담으며, 시가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바랐다.
이런 두 친구가 함께 문학 활동을 하면서, 부딪히는 장면이 있다. 몽규가 생각하는 현실 참여적 소설의 중요성과 동주가 품은 시의 가치가 대립하고, 두 친구는 열렬히 의견을 토해내며 날을 세운다. 문학의 종류에 가치와 순위를 매길 수 없겠지만, 한정적인 공간 안에 어떤 글을 담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 대화는 관객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특정한 시기, 특정한 공간에 단 하나의 장르를 담을 수 있다면, 어떤 것을 담아야 할까. 그리고 무엇이 더 옳은 일인가. 이것은 윤리의 문제인가. 아름다움의 추구가 정의의 추구로 이어질 수 있는가. 두 사람은 문학을 두고 거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좁은 방에서 미학과 철학이라는 세상과 부딪히고 있었다.
(2) '작가'라는 호칭의 경계
두 사람의 갈등은 성격, 문학에 대한 가치관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서로가 세상을 바라보는 위치에 따른 차이로도 읽을 수 있다. 동주는 위험을 각오하고서라도 '시집'을 출간해 작가가 되고 싶었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 했다. 그에게 작가는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인장이며, 혼란한 시대에 글을 쓰며 저항하고 있다는 정체성을 증명해줄 지위다. 영화에서 표현한 동주의 복잡한 심정 중, 몽규를 향한 부러움 혹은 열등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신화 속의 인물처럼 거리감이 있던 동주가 인간적으로 다가오고, 더 공감하고 싶은 인물로 느껴지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미 작가가 된 몽규의 눈은 문학을 넘어 세상으로 향하고 있다. 그는 문학을 위한 작가가 아닌, 세상을 위한 혁명가가 되기 위해 새로운 방향을 정했다. 그는 혁명을 위해 문학을 이용하듯, 세상을 위해 작가라는 지위를 빌린다. 몽규는 동주가 바라던 작가라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다음을 계획하고 그려볼 수 있었다.
동주는 생전에 작가라는 호칭을 얻지 못했지만, 역으로 이 덕분에 더 좋은 시를 쓰려 했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 출간된 시집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적 성취로 남았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글에 담고, 시에 대한 사랑과 시대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청년. 그렇다면, 동주가 '작가'라는 호칭을 일찍 얻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가졌던 시의 색깔은 많이 달라졌을까. 다른 작가를 소환해 보자. '동주'엔 또 한 명의 시인 정지용(문성근)이 등장한다.
정지용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는데, 영화엔 나라를 뺏기고 시인이 가지는 감정이 표현되어있다. 시대를 향한 분노, 비애 등을 술 한 잔에 털어내는 정지용. 그에게서도 암울한 시대에서 '작가'로서 느끼는 무기력함, 부끄러움 등이 있었다. 동주처럼 무기력함을 느꼈지만, 영화 속 모습에서는 글을 쓰는 일에서 해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글에 대해 집착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다르다. (속세에서 도피한 듯했다) 몽규와 정지용과 비교한다면, 동주는 '작가'라는 호칭이 없었기에 더 절실히 시에 매달리고, 사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동주' 속 작가의 호칭을 얻은 자들이 공통으로 보이는 행동이 하나 있다. 동주에게 적극적인 행동을 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창씨개명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정지용은 동주에게 일본에 가서 공부를 더 하라고 한다. 불의에 맞서며 적극적인 운동을 하라는 말 대신, 배움을 이어가 작가의 길을 걸으라 한다. 몽규 역시 정지용과 유사한 행동을 한다. 그는 자신이 혁명을 위해 최전선에 서려고 하지만, 동주에겐 함께 하자고 하지 않는다.
어떤 이유 때문일까. 동주가 안전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을까. 혹은 자신이 추구할 수 없는 문학도의 길을 친구가 걸어줬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는 언제 순수 문학을 포기했을까. '동주'엔 몽규가 암살을 하는 장면이 있다. 비교적 초반부에 배치된 이 장면을 통해, 관객은 몽규가 손에 피를 묻혔고, 그만큼 더 참혹한 현실에 발을 디뎠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만큼 순수 문학이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멀어졌음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을 아름답게'만' 볼 수 없다. 문학이란 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이상을 가질 수도 없었다. 이런 몽규는 동주의 시에 담긴 순수함과 이상을 더 지켜주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세상의 쓴맛과 비린내 나는 피 맛을 자신만 맛본 게 아닐까. 적어도 영화에서는 그렇게 보였다.
이준익 감독의 변화
(1) 역사를 다루는 방법의 변화
'동주'에서 드러난 부끄러움의 감정과 예술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최근 이준익 감독의 필모그래피와 연결하면 흥미롭다. 최근 연출한 '사도', '동주'는 이전 작품들과 온도 차가 있다. 단 두 가지 작품만으로 정리한다는 것이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황산벌', '왕의 남자', '구름을 버서난 달처럼', '평양성'과 큰 차이를 보이는 몇 가지는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영화의 분위기, 톤 앤 매너다. 과거의 작품은 역사를 유쾌하게 연출해 즐거움을 전달했다. 이에 비해 '사도', '동주'는 영화가 무거워졌으며, 유머를 배제하지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배치해뒀다. '사도'엔 정조(송강호)가 귀를 씻으며 보이는 행동들, '동주'엔 강처중(민진웅)이 코믹한 장면을 보여주지만, 결코 그 정서가 영화의 중심에 있지 않다.
'사도'의 코믹한 부분은 정조의 습관이라는 정보를 덜 지루하게 전달하기 위해 배치되었고, '동주'의 코믹함은 암울한 시대의 청년들에게 잠깐이나마 있었던 빛을 보여주기 위해 배치된, 그래서 오히려 더 아련한 장면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보이는 특징은 사료에 기초한 사실성이다. '황산벌'은 계백, 관창 등의 역사적 인물이 나오지만, 사실성보다는 상상력과 유머러스한 재해석에 기댄 영화였다. 그리고 천만 관객으로 유명한 '왕의 남자'는 사료에 기록된 단 한 문장을 확장하여 보여준 영화였다.
이에 비해 최근의 두 작품은 사료에서 가져온 디테일이 빛나는 영화다. 여러 인터뷰에서 이준익 감독은 '사도', '동주'에서 역사적 자료를 굉장히 많이 찾아 읽었고, 참고했다고 밝혔다. 이전 작품도 많은 자료를 참고하고, 그를 기반으로 만들었겠지만, 최근엔 역사를 재현하는 방법이 분명 달라졌다.
이준익 감독이 역사를 재현하는 방법이 달라졌음은 영화의 구성에서도 볼 수 있다. 이전 작품들에서 영화 전체의 시간은 정방향으로 흐른다. 즉, 시간의 순서대로 배열하며 역사적 사건들을 선형적으로 배치했다. 하지만 '사도'와 '동주'의 영화적 구성은 비선형적이다.
두 작품의 시간은 정방향으로 흐르면서, 동시에 플래시 백으로 나뉘어있다. '사도'는 뒤주에 갇힌 7일을 보여주면서, 하루마다 과거로 돌아가 역사를 보여줬다. '동주'는 형무소에서 취조 받는 동주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취조에 등장한 정보를 기준으로 과거로 돌아간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1950)도 마찬가지고, 그런 작품이 꽤 많은데 한국영화에서는 별로 사용되지 않은 전개방식이기도 하다."
- '씨네21'. 이준익 인터뷰. "제일 안 좋은 건 시도하지 않는 거다" 본문 중
이준익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소묭'의 구성을 참고했다고도 밝히며, 이러한 플래시 백 구성의 흥미로운 점을 말하기도 했다. 그는 역사를 재현하는 자신만의 방법, 구성을 정립한 듯하다. 그는 왜 이러한 변화를 시도하게 되었을까. 두 가지 측면을 추측하자면, 하나는 시간을 자유롭게 오가는 것이 더 '영화적'이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시공간을 자유롭게 배치, 배열하면서 독특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가 과거와 다르다면, 이는 시간을 더 자유롭게 배치하고, 다루면서도 대중에게 자신의 의도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다른 하나는 과거엔 사실성보다 상상력에 초점을 맞춘 역사 영화였기 때문에, 시간을 변주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가 사실에 가까워질수록 다큐멘터리와의 변별점을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영화가 단순한 역사적 재연에 머물지 않으려면, 사료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고민할 시기가 온 것이다.
시간 순서에 따른 평범한 방법 외의 것을 고민했을 것이고, '사도'와 '동주'는 그가 찾은 답인 것 같다. 향후, 이준익 감독의 다음 역사 영화를 봐야겠지만, 최근 두 작품의 구성은 꽤 안정적이었고, 대중의 호응도 끌어낸 성공적인 연출이기에 인상적이었다.
(2) 영화의 역할에 대하여
역사 영화는 아니지만, '소원' 역시 실제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의 두 영화와 엮어 볼 만하다. '소원'은 아동 성폭력이라는 굉장히 민감한 소재를 다룬 영화다. 실제 피해자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스크린에 보여주는 것에 마냥 찬성할 수만은 없던 영화이기도 했다. 그래서 개봉 당시 혼란스러웠다.
이 작품을 그 피해자가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역으로는 이러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는 대중의 관심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다. 이 두 가지 생각 중 무엇이 더 옳으며, 윤리적인 것인지 고민해야만 했다. 이는 확장하자면, 사회 문제에 대한 영화의 역할, 책임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여전히 '소원'이라는 영화를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동주'라는 안경을 쓰고 '소원'을 본다면, 이준익 감독의 의도는 읽을 수 있다. 그는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다큐멘터리가 주로 맡았던 현실 참여, 변화를 향한 시도가 극영화에서도 가능함을 보여주려 했다. 많은 대중이 관람하고, 공감하는 영화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민감한 소재의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믿고 싶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이번 영화에서 동주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고 있었다. 동주의 시가 품은 이상을 영화도 품을 수 있다고 외치는 듯했다. 그의 시도가 어디까지 갈지, 어떤 성취를 이뤄낼 수 있을지는 아직 예상할 수 없다. 앞으로 펼쳐질 그의 필모그래피와 사회적 반응과 변화를 볼 때까지는 판단을 유보해야 할 것이다. 우선은 극영화의 열렬한 관객으로서 그의 시도를 응원한다.
동주를 이 시대에 소환한 이유
어떤 역사의 재현은, 그리고 특정 인물의 소환은 늘 지금 현실에 어떤 대화를 시도한다. 그렇다면 이준익 감독이 동주를 소환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이준익 감독 개인에게 이 영화는 영화감독으로서의 어떤 무기력함과 부끄러움에 대한 고백이고 성찰이며, 저항의 몸부림이자 다짐과 같은 영화일 수 있다.
그는 몽규가 '시'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듯, 영화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느냐는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영화를 향한 뜨거운 열정에서 답을 구하고자 했다. 그가 굳이 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이유가, 영화적 순수성을 되새기고자 한 발버둥은 아니었을까.
한편, '동주'는 지금 이 시대의 청년들과 공유하는 것도 있다. 동주가 느꼈던 무기력함과 부끄러움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정서다. 시대는 변했으나, 시대적 억압은 다른 얼굴을 하고, 청년들을 짓누른다. 삼포를 넘어 n포 세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 시대의 청년들은 강요된, 억압된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 청년들에게 자신의 삶을 버텨내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의 가치를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지는 않았을까.
더불어 이중엔 사회를 바꾸지 못함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청년도 있을 것이다. 이들에겐 시대를 바꾸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것, 윤동주처럼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음을 위로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면서 묵묵히 자신만의 저항의 길이라도 택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글] 영읽남 from 문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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