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HyunsH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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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황제' 펠레가 마지막으로 월드컵을 출전해 정상에 등극했던 1970년까지만 하더라도 브라질은 자타공인 세계최강 축구팀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황제가 자리에서 물러난 뒤, 브라질은 자신들의 라이벌 국가인 아르헨티나를 비롯 유럽 강호(독일, 이탈리아)들에게 정상을 내주며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며 이제 한 물 간 게 아니냐는 평가를 받았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2002년 밀레니엄 시대까지, 브라질은 다시 자신들의 자존심과 명성을 되찾았다. 1990년부터 2002년까지 4회가 열린 월드컵 동안 카나리아 군단은 무려 2번의 우승(1994, 2002)과 한 번의 준우승(1998)을 거뒀다. 셀레상(Seleção)의 공격첨병으로 나섰던 두 사람, 호마리우, 그리고 호나우두의 발 끝에서 이뤄졌다.
"괴수 골잡이. 시대를 불문하고 올스타 일레븐을 뽑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명단에 올리겠다."
- 디에고 마라도나 -
호마리우 지 소우자 파리아, 그는 "축구황제" 펠레 이후 브라질 최강의 스코어러였고, 디에고 마라도나와 대등한 악마의 재능을 겸비한, 그야말로 무적과도 같았다. 공교롭게도 호마리우는 자신의 선대에 활약했던 위대한 두 영웅의 교집합적인 요소로 비춰졌다. 170cm 를 넘지 않는 작은 키, 하지만 신체능력과 관계없이 그가 출격하면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는 개선장군 같은 모습을 그에게서 엿볼 수 있었다. 그랬기에 호마리우의 커리어는 말그대로 축구만화를 연상케했다. 한 팀에 오래 머물지 않았음에도 해당 팀에서 뛸 때마다 언제나 제 몫 이상을 해냈고, 득점이 일상이었다. 비교적 가장 오랫동안 몸담았던 PSV에서 뛸 때에는 4시즌동안 98골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고, 바르셀로나 시절에는 자신이 호언장담한 것처럼 이적 첫 시즌에 30골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하이커리어의 연속이었던 호마리우는 1994년 미국월드컵을 순전히 혼자의 힘으로 브라질을 우승으로 올려놓았다. 마치 1970년의 펠레, 1986년의 마라도나에 이어 3번째로 한 사람의 힘으로 월드컵의 향방이 결정되었다. 그가 정점을 찍었던 1994년에 만약 발롱도르가 비유럽권 선수들에게도 수여가 되었다면, 1994년에 호마리우는 FIFA 올해의 선수상에 이어 발롱도르 트로피도 챙겼을 것이다. 하지만 호마리우는 경기 이외에도 유명했다. 스스로 훈련해야할 필요성을 못느끼는, 말그대로 타고난 재능을 지닌 "악마의 재능"을 지닌 능력자였고, 언제나 거침없는 발언으로 미디어의 이슈메이커이자, 검은 양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라운드에서 정확하게 뭘 할 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데 연습을 왜 해야하지?" "나는 돈과 같다. 사람들은 결국 나를 좋아하게 된다."
선수를 데리고 있는 감독 입장에선 이 '타고난 악동' 을 길들인다는 자체가 여간 쉽지 않았다. 선수단 관리가 뛰어난 거스 히딩크도, 자아가 강하기도 소문난 요한 크루이프도, 그의 가족을 납치하여 협박하던 납치범들도 호마리우를 감당하지 못하고 두 손 들었다. 말그대로 그는 '유아독존(唯我獨存)' 그 자체였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렇게 통제가 불가능한 트러블메이커임에도 아무도 그를 찾게 되는 이유는 바로 호마리우가 있고 없고의 경기력 차이가 천차만별이라는 점이다. 호마리우가 워낙 조직력을 무너뜨리고, 통제불가능한 스캔들을 몰고다니기로 유명하다보니 감독에 의해 국가대표에서 탈락했었다. 다시 셀레상으로 복귀하게 된 이유도, 브라질이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부진의 늪을 거듭하고 있었고, 브라질의 부진을 구제해줄 인물로 오로지 '호마리우' 밖에 없었기에 여론은 악동의 복귀를 요구했다. 악동이 복귀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브라질은 월드컵 본선을 통과했고 1994년 여름 미국에서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 이후에도 브라질이 부진을 겪기라도 하면, 자동반사처럼 브라질 사람들은 호마리우를 찾았고, 2001년 컨페더레이션 컵과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계속 헤매고 있을 때에도 호마리우의 이름이 끊임없이 거론되었다. 마치 1980년대 마라도나를 신봉하던 아르헨티나 사람들처럼 1990년대 브라질 사람들이 그러했고, 이 점이 오늘날 "악마의 재능" 이라고 거론되는 선수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펠레-마라도나의 계보를 이을 것만 같았던 호마리우는 1994년 이후에는 두 번 다시 월드컵 무대를 밟지 못했다. 감독 입장에서는 팀 케미스트리를 철저히 무너뜨리는 "악마의 재능" 을 오랫동안 데리고 있기엔 감독으로서 감당해야할 요소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악마의 재능의 소유자들의 숙명처럼 그도 예외는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호마리우는 필리페 스콜라리에 의해 두 번 다시 카나리아군단의 일원이 되지 못했다. 호마리우는 그답지 않게 2002년 한일월드컵에 출전하게 해달라고 언론을 통해 호소했고, 브라질 자국민부터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그의 발탁을 요청했으나, 스콜라리와 시대는 끝끝내 호마리우를 외면했다. 어차피 그를 대체할 영웅이 셀레상의 선봉장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인 2007년 1000호골을 달성하였다며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브라질축구협회는 1969년 펠레 이후 1000호 골 수여 메달을 호마리우에게도 수여했으나, 친선경기를 제외한 공식경기 통계기록으론 2008년 은퇴식을 치르기 전까지 개인 통신 772골을 기록하면서 역대 2위(1위는 805골이라는 기록을 보유한 요세프 바이칸이다), 브라질 선수 역사상 국가대표 역대 득점 3위를 기록하였다.
작은 거인을 앞세워 브라질이 세계 정상에 복귀할 당시, 호마리우의 환상적인 모습을 대표팀 벤치에서 지켜보던 17살짜리 브라질 소년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다른 브라질 유망주와 크게 다를 바 없어보였다. 하지만 월드컵이 끝나고 이 소년은 공교롭게도 호마리우와 같은 길을 걷게 되었고, PSV-바르셀로나를 거치면서 그는 순식간에 호마리우와 동급의 괴물로 성장했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1996년 5월 19일 캄포스텔라와의 경기는 펠레의 뒤를 잇는 새로운 축구황제이자 '경이로운 존재(Il Fenemeno)' 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무려 상대선수 6명을 드리블로 제치고 골을 기록한 이 장면이, 경기 끝나고 무려 TV 쇼에서만 180번 이상이나 다시보기가 되었을만큼, 전세계적으로 갓 20대에 접어든 브라질 청년의 존재감을 알리기엔 충분했다. 바로 호나우두 루이스 나자리우 지 리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마라도나 이상의 선수와 함께 호흡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한다."
- 요한 크루이프 -
호마리우가 활약하던 시대에 호나우두까지 등장한 것은 마치 신이 셀레상에게 주는 일종의 선물이나 다름없었고, 호마리우와 호나우두 두명의 R를 후원하던 나이키에게 있어서는 1997년은 나이키의 전성기 중 하나로 평가받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1997년 코파 아메리카와 컨페더레이션스 컵은 세계 축구계에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했고, 2R의 더블 해트트릭도 이 때 나온 기록이었다. 호나우두의 특징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183cm의 좋은 신장으로, 카카처럼 달리고, 마라도나처럼 드리블하며, 아드리아누처럼 슛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빠른 주력을 기반으로 하여 오프사이드 트랩을 무너뜨리는 이른바 라인 브레이킹과, 대중들이 알고 있는 일명 '헛다리 드리블' 또한 호나우두의 주무기였다. 마치 호마리우에서 신체적인 능력이 강화된 것이다. 그를 선봉에 내세웠던 셀레상의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기록이 아쉬웠던 점이, 호나우두의 모든 기량이 가장 최고조였음에도 우승을 개최국 프랑스에게 내줬고, 결승전에서 그것도 3대0 완파를 당한 게 브라질에게 크나큰 상처로 작용했다. 준우승에 머물렀던 것이 호나우두 개인 기록에 있어 FIFA 올해의 선수상 및 발롱도르를 지네딘 지단에게 내주면서 황제의 자존심에도 스크래치를 냈다.
하지만 이 20대 초반의 젊은 황제가 다음에 겪을 시련이 더 혹독했다. 1999년 11월 21일에 벌어졌던 인테르와 레체 경기는 호나우두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었던 시간이었다. 신이 호나우두에게 모든 재능을 주었으나, 그 재능을 버틸만한 무릎을 주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만큼, 호나우두는 이 때부터 무릎부상을 족쇄처럼 달고 다녔다. 호나우두의 동작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매번 드리블 시 상체 전체 무게가 무릎에 집중하다보니 무릎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젊은 황제는 이 때 입은 부상으로 약 2년동안 그라운드에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인테르 구단주인 마시모 모라티를 비롯하여 인테르의 모든 이들은 그가 재활하여 복귀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었고, 결국 2002년 봄에 호나우두는 피치로 복귀하여 여름에 이어진 2002 한일월드컵에 출전하여 득점왕과 함께 브라질의 통산 5번째 월드컵 우승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직접 그가 트로피를 들어올리기까지 8년씩이나 걸렸다. 월드컵이 끝나고, '황제' 역시 갈락티코의 일원으로 레알 마드리드에 합류하였다. 마드리드에서 제법 트로피를 많이 챙겼으나, 그의 기량도 하락하고 있었다. 자기관리 실패 및 통제안되는 사생활이 그의 발목을 잡게 되었고, 그 때문에 팬들로부터 조금씩 멀어져갔고, 그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무릎부상은 더욱 더 깊어갔다. 시대를 풍미했던 황제의 마지막은 안타까웠고, AC밀란과 코린치안스를 거치다 결국 2011년 2월, "머리로는 수비수를 따돌리는지 알고 있었는데, 몸이 따라주지 못한다." 라는 말을 남기고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선수생활은 호마리우와 호나우두, 평행이론이라 할 만큼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다. 태어난 환경부터 처음 축구계에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 그들이 거쳐왔던 클럽들, 전세계 최고봉까지 올랐던 그들의 위상, 그에 반해 불안정의 연속이었던 사생활까지 흡사한 점이 참 많은 두 사람이다. 그렇기에 브라질 현지에서 누가 더 뛰어난가? 를 놓고 투표를 부치면 용호쌍박에 걸맞는 대결구도가 나오곤 했다. 하지만 이 2명의 'Ro'는 축구화를 벗은 이후에는 각자 다른 노선, 확연하게 반대의 위치에 서게 되면서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 이 되어버린 꼴이 되었다.
갈등의 원흉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국 브라질에서 열렸던 2014년 월드컵이다. 2010년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이 물러나고 브라질은 월드컵을 개최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국가 전체가 불안정했다. 더군다나, 월드컵 유치를 하는 데 있어 브라질 공적 자금이 전적으로 투입시켜 무리하게 선진국 기준에 맞추다보니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선수시절부터 반항아 기질이 강했고, '스포츠 진흥과 장애인들에 대한 복지향상' 이라는 공약을 내걸고 정치계에 입문한 호마리우는 이치에 어긋난 이 행위에 격렬하게 맞서 싸우며 비난했다. 그는 브라질 축구협회(CBF) 테세이라 회장을 비롯해, 월드컵 및 올림픽 유치를 이끌어낸 룰라 대통령, 나아가 무리하게 브라질에게 요구기준을 제시하는 FIFA에게 거침없는 발언과 독설을 퍼부으면서 "이런 형태로 월드컵을 개최한다면 브라질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하면서 브라질 민중계의 체게바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호마리우는 월드컵 개최반대를 주장하는 민중 데모에도 귀를 기울이며 크게 공감했다. 반면 호나우두는, 은퇴 후 CBF의 요청으로 월드컵 조직위원회 이사로 취임하며 각종 대회 광고탑으로 참가하는 이벤트마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면서 얼굴마담을 하고 있던 것이다. 브라질 축구계 인사 중, 은퇴 이후에 지명도를 이용해 거액을 손에 넣었던 것은 펠레 뿐이었고, 호나우두도 마치 펠레의 행보를 이어가는 "제2의 펠레"와 같았다. 빈곤층 출신이면서 '축구 성금'이 된 이후부터는 기성 체제를 지지하면서 기회주의적이라는 험담을 들으면서도 교묘히 빠져나갔다.
이 두 영웅은 자국에서 개최하는 월드컵을 두고 갑론을박을 펼치기 시작했다. 먼저 포문을 열였던 것은 호나우두였고, 끊임없이 월드컵 반대를 부르짖는 호마리우를 향해 "멀리서 비판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는 애국심이 부족한가?" 라고 공격했다. 호마리우는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사람에게는 각자 좋아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건 이러쿵저러쿵하지말자." 면서 과거 호나우두의 평생 수치로 손꼽히는 트랜스젠더 사건을 통렬하게 비꼬면서 응수했다. 호마리우는 놓치지 않고 과거 호나우두가 과거 자신의 SNS에서 게재했던 약속(장애인용 월드컵 티켓을 3만 2천장을 구입하겠다)을 지키지 않고 있다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호나우두는 이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나 혼자만의 책임이 아닌데, 호마리우는 전세계 시스템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나를 향한 대항의식인지 잘 모르겠다." 고 반박했다. 물론 호마리우가 노리는 타겟은 호나우두 뒤에 가려져 있는 FIFA와 CBF, 그리고 조직위원회이며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그들의 중요 인사 중 한 명인 호나우두를 공격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호마리우와 일부 브라질 사람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준비는 멈추지 않고 착실히 준비해 결국 2014년 6월, 전세계인들에게 브라질월드컵은 열렸다.
브라질 월드컵이 개최되는 기간에도, 브라질 곳곳에서는 브라질 월드컵을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와, 월드컵보다는 국민들을 위해 보건과 교육에 돈을 쓰고, 치안 서비스 개선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그 때문에 브라질 치안은 더욱 악화되었고, 때마침 브라질이 독일에게 크나큰 치욕을 선물받은 '미네이랑의 비극' 이라는 새 역사까지 수립하면서 브라질 월드컵은 브라질에게 실패를 안겨다줘버린 꼴이 되었다. 월드컵 우승도 실패, 월드컵을 발판삼으려 했던 경제 부흥에도 실패, 분노하는 브라질 국민들을 더이상 통제하지 못하면 치안 유지도 실패했다. 그동안 월드컵 유치 반대를 일관적으로 유지해왔던 호마리우는 재선 투표에서 무려 63% 라는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그의 말이 힘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주었다. 월드컵을 계기로, 호마리우는 빈곤층을 필두로 한 중하류층에게 있어 일종의 체게바라와 같은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반면, 호나우두의 입지는 현격하게 초라해졌다. 비록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성세력의 지지를 받는 입장이었으나, 이미 그는 체제유지의 대변인이 되어버렸다. 같은 셀레상의 영웅들이었지만,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다.
월드컵 실패로 인하여 브라질은 1년 뒤 칠레에서 열렸던 코파 아메리카 대회에서도 셀레상은 8강에서 쓴 잔은 들이키면서 축구강호의 입지가 대단히 흔들리고 있고, '축구' 라는 단어가 사상의 뿌리같은 브라질 국민들은 더욱 더 위축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브라질은 오는 6월에 미국에 치뤄질 코파 아메리카 100주년 대회와 뒤를 이어 열릴 리우 올림픽에 사활을 걸어야하는 입장이다. 특히나 리우 올림픽은 브라질 국가 자체의 향후를 결정짓는 중요대회이기에 더더욱 자신들의 주종목인 축구팀은 역대 최정예멤버로 꾸릴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네이마르와 티아고 시우바는 이미 무조건 스쿼드에 포함되었다는 말도 나돌고 있다). 이럴 때 과거 셀레상의 선봉장이었던 2명의 'Ro'가 있다면 그들의 정상복귀는 가능할까?
참고 : [THE JOURNALISTIC - BRAZIL] 'RO-RO' 콤비 비난대결의 이면 http://pivote84.tistory.com/entry/THE-JOURNALISTIC-BRAZIL-1 by Pivote84
본격대결 Pt.1 : 디에고 마라도나 vs 리오넬 메시. 영웅적 삶의 스펙타클 - http://blog.daum.net/manutdronaldo/444
본격대결 Pt.2 : 데이비드 베컴 vs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대중 언론에 의해 자유자재로 변형되는 이들 - http://blog.daum.net/manutdronaldo/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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