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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자신과 대화하기(feat.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방)
자기자신과 대화하기(feat.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방) 자신과 대화를 못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다만 우리가 대화하는 수준은 어찌보면 수영장에서 물장구치는 수준일지도 모른다. 산소통을 들고 심해로 내려가는 것이 우리가 본질적으로 원하는 자기대화가 아닐까? 내 마음의 바다속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 마음의 자세가 필요할까? 3명의 수문장을 통과해야 한다. 첫번째 문 : 탐욕 탐욕은 악착같이 그것을 갖고자 하는 욕심이다. 돼지가 배가터지도록 밥을 먹듯... 당신은 무엇에 탐욕을 부리고 있는가? 돈, 명예, 권력, 외모, 음식, 술, 마약, 사람..etc 당신은 그것의 주인이 되고자 하지만 결국 그것의 노예가 된다. 마약중독자가 마약을 맞기 위해서 혈안이 되듯 당신은 자기자신을 잃어버린자가 된다. 그저 탐욕의 방에 갇혀서 먹고 싸고 먹고 싸는 동물에 지나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탐욕에 물든 당신의 얼굴을 보라. 그 얼굴을 마주한자는 탐욕의 방을 벗어나게 된다. 두번째 문 : 분노 분노는 작은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는 마음이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강력한 저항과 함께 폭력이 수반된다.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입술을 잘그잘근 깨물것이며 두주먹을 쥔채 부르르 떨것이다. 당신의 내면은 휘발유와 같다. 작은 스파크에도 금세 활활 타버릴 것이다. 누군가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맹수처럼 달려들 것이다. 성난 야수의 이빨처럼 당신은 으르렁 거릴 것이다. 이제 당신은 분노의 노예가 되었다. 싸우는데 당신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한다. 분노에 방에 갇히면 평생 싸움만 하게 된다. 분노에 물든 당신의 얼굴을 보라. 그 얼굴을 마주한자는 분노의 방을 벗어나게 된다. 세번째 문 : 어리석음 어리석음은 가장 무서운 적이다. 내가 사람을 살리고자 칼을 들었지만 결과는 무자비한 망나니의 칼이 될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선한 마음을 지녔을지라도 어리석음이 있는 자는 위험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노력,믿음, 성공, 행복.. 아무리 좋은 무기가 있을지라도 어리석음을 붙잡는자는 그 노력이 헛수고가 될 것이며 그 믿음이 상대를 파괴시키는 수단이 될 것이며 그 성공을 쫓다 소중한 가족을 잃게 될 것이며 그 행복이 당신을 불행의 늪으로 인도할 것이다. 어리석음에 물든 자는 거울을 봐야 한다.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자기 생각안에 빠져서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지혜로운 자의 조언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이며 사랑하는 가족의 눈빛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거울을 통해 그 모습을 본 자는 어리석음의 방을 벗어나게 된다. 물론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방은 각 방마다 1만 단계정도는 되는듯 싶다. 나는 절반도 못 내려가듯... 죽을때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다 사라지겠지만 강제적으로 갑옷(업)이 벗겨질바에는 내가 미리서 나를 애워싸고 있는 갑옷을 미리서 벗겨나가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만약 다음생 다시 태어나더라도 다시 그 무거운 옷을 입고 시작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자기자신과 대화하는법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비움과 함께 한다. 탐욕을 내려놓어야 하며 분노를 내려놓아야 하며 어리석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건강하게 내면의 문이 열리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오염된 의식이 오히려 무의식까지 오염시키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일상생활에서 항상 깨어있어야하고 눈을 감고 고요히 호흡하며 자신을 관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파도에 휩쓸리듯 우리의 몸과 마음도 다람쥐 쳇바퀴돌듯 할 것이다. 김영국 행복명상센터
터키의 쿠르드족 침공, 쿠르드 족 설움의 역사 (미국... 할많하않)
어제부터 터키가 쿠르드족을 침공했다는 뉴스가 뜸... 이 뉴스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왜냐면 쿠르드 족이 굉장히.... 역사 자체가 너무나 안타까운 민족이기 때문임.. 그리고 어쨌든 미국도 꽤 관련이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마냥 지나치기 어려운 사건임... 그냥 제가 알고 싶어서 정리한 것.. 먼저 쿠르드 족은 BC 9세기 메디아 족의 후손으로 지구촌 최대의 유랑 민족이라고 할 수 있음. 정식 국가를 가지고 있지 않은 민족임. 하지만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고,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도 사용하는 아리안계 민족. (사진 속 국기도 쿠르드 족 국기) 유대인의 경우 유랑 생활을 하다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국가를 찾았지만 쿠르드 족의 경우 중동의 아직까지 여러나라에 흩어져 사는 중.. 현재는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인구가 꽤 많아서 중동에서 4번째로 인구가 많음. 쿠르드 족이 안타까운 이유는 독립을 하지 못해서도 있지만, 이들의 독립을 빌미로 아랍의 근접 국가들과 열강들이 쿠르드 족을 단물만 빨아먹는 등... 쿠르드 족이 도와주면 후에는 나몰라라함.. 배신만 몇번을 당했는지 잘 모르겠음. 배신과 설움의 역사임.. (당시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 1946년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이란을 점령함. 소련의 도움으로 쿠르드 족은 이란 북부에 쿠르드 공화국을 세웠으나 1년도 안되어서 이란에 궤멸당함. 소련은 쿠르드가 공화국을 세우는 게 이란과의 협상을 할 때 자신들에게 유리했음. 그래서 그냥... 말 그대로 심심풀이로.. 이용했던 것임.. 이란이 1년도 채 되지 않은 쿠르드공화국을 공격할 때 쿠르드 족은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소련은 군사를 지원하지 않았음. 197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함. 이때 세력이 점점 커지는 이라크를 견제하고자 미국은 이란을 지원했고, 그 속에서 쿠르드족도 이란-미국을 도와줌. 미국은 돈만 쓰면 되지만 쿠르드 족은 직접 자신들이 나가서 싸우는 거임.. 하지만 이란과 이라크가 국경분쟁에 합의하면서 쿠르드 족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음. 두 친구가 싸워서 한 친구 편 들었는데 싸운 두 친구가 화해해서 나만 이상해지는 상황.. 이후 1980년대에 이라크 독재자 후세인은 이란을 도와준 것에 대한 보복으로 쿠르드인에게 독가스 세례를 했음. 그 결과로 쿠르드인이 5000명이 학살당하기도 함... -> 미국은 아무말도 하지 않음. (걸프전 당시 부시 대통령) 1991년 걸프전 이후 미국은 후세인 제거를 목표로 이라크 북부에 거주하고 있던 쿠르드 족에게 무장봉기를 부추겨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듯! 했으나 얼마 못가 역시 지원을 끊음 그냥.. 후세인 세력 약해지게 하는 일환으로 쿠르드 족 이용한 것. -> 그 과정에서 많은 쿠르드 족이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까지 다 잃고 난민 피난소에서 지냄. 2017-2018년에는 중동에 ISIS가 활개를 치고 다니던 시절... 이 때 미국의 골칫거리는 단연 ISIS 이 때에도 쿠르드 족은 미군을 도와. ISIS를 퇴치하는 것에 주도적인 역할을 함. 여전히 미국이 자신들의 독립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당시 ISIS와 싸우던 쿠르드 족 민병대) (각 커뮤에서 화제가 됐었던 ISIS와 싸우는 쿠르드족 민병대원 사진.) 쿠르드 족은 ISIS와의 전쟁에 앞장섰음. ISIS의 세력이 약해지는 것에 어느정도 일조를 했다고 볼 수 있음. 대략 1만 1천명의 쿠르드 족이 ISIS 와의 전쟁에서 희생된 걸로 추정. 하지만.. 지금 결과를 보면 알겠지만. 미국은 또 무슨일이 있었냐는 듯 발을 빼고... 중동 지역에서 미군은 철수하기에 이름. 왜냐, 자신들의 목적이었던 ISIS 격퇴를 달성했으니까... 미군 있을 필요 없다~ 이거임. 그리고... 터키의 쿠르드족 침공 기사가 남. ISIS 세력과 싸웠던 쿠르드 민병대가 터키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을 거임. ISIS와 싸워줄 때는 좋았지만 이 민병대가 자신들, 즉 쿠르드 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기 시작했을 때는 터키 입장에서 골치가 아플테니까... 터키는 현재 쿠르드 족 민병대를 테러리스트로 규정 중. (터키군의 공격으로 피난을 떠나는 시리아 쿠르드족 주민들) 어찌되었든 터키가 쿠르드족을 공격하겠다는 걸 미국이 알고 있었을 것이고 묵인 해줬으니 지금 공격을 하고 있는 것... 실제로 공격 전날 러시아와 미국에게 공격할 것이라고 계획을 전달했다고 함. 누군가의 힘을 빌릴게 아니라 자신들만의 힘으로 독립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지금 당장 그런 힘이 쿠르드 족에게는 없을 것. 그래서 자꾸 열강들에게 기대게 되고. 계속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함. 이런저런 국가들 사이에 끼여서 총알받이 신세로 내몰린 후에 버려지는.. 이번에도 역시 국제사회에서는 미국이 토사구팽을 했다고 말이 많은 상황이지만. 말만 많을 뿐... 도와줄 누군가가 없음. 참...
창업자 데릴사위가 키운 스즈키 자동차
... 스즈키 자동차의 1대 창업주 스즈키 미치로(얼굴 사진). ... 은행원 하다가 오너 집안에 장가들어 마츠다 오사무(松田修)라는 사람이 있었다. 기후현 태생으로 주오대(中央大)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은행에 첫 발을 들여놓으면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대학 졸업 5년 후인 1958년, 은행원이던 그의 인생에 일대 큰 변화가 찾아왔다. 스즈키 자동차 실질적 창업주 스즈키 슌조(鈴木俊三)의 데릴사위가 된 것이다. 마츠다 오사무는 스즈키 슌조의 장녀와 결혼해 양자가 됐고, 그의 이름은 마츠다 오사무(松田修)에서 스즈키 오사무(鈴木修)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큰 변화가 닥친 것은 1977년 무렵이다. <1977년에 창업자인 스즈키 미치오와 2대 회장인 스즈키 슌조, 3대 회장인 스즈키 지츠지로 등의 경영자가 잇따라 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데릴사위인 내 어깨에 회사의 운명이 지워진 절박한 순간도 있었다.>(스즈키 오사무 저 ‘작아서 더 강한기업 스즈키’(김소운 옮김, 리더스북) 전현직 동시에 쓰러지면서 사장 자리 올라 전임, 현직 CEO가 동시에 쓰러지면서 스즈키 오사무는 순식간에 사장 자리를 맡았다. 입사 20년이 지난 1978년의 일이다. 닛케이비즈(2009년 3월 2일)는 당시 스즈키 오사무의 심정을 이렇게 보도했다. <“아, 내가 사장이야”- 스즈키 오사무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등골이 오싹한 생각에 사로잡혀, 이불에서 벌떡 일어났다. 쉴 때도 사장이라는 무게감이 덮쳤다.> 스즈키 자동차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스즈키 오사무(鈴木修‧87) 회장은 이렇게 큰 변화를 두 번 겪었다. 그는 경차의 대명사인 스즈키를 ‘위대한 중소기업’(偉大な中小企業)으로 키워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즈키 오사무는 2000년부터 회장을 맡고 있다. 스즈키의 차는 차체만 작을 뿐, 회사는 이제 더 이상 중소기업이 아닌 대기업의 반열에 올라 있다. 스즈키자동차의 슬로건은 ‘작게(小), 적게(少), 가볍게(輕), 짧게(短), 아름답게’(美)이다. 경차는 이익을 남기기가 어렵기 때문에 생산원가 절감이 생명이다. 오사무 회장은 공장 바닥에 나사 하나가 떨어져 있으면 “공장 바닥에 돈이 떨어져 있다”며 한 푼의 돈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즈키의 효자 상품은 알토(Alto:라틴어로 높다는 뜻의 altus에서 따왔다)다. 오사무의 사장 취임 직후인 1979년 첫 출시된 알토는 오랜 기간 인기를 끈 스즈키의 주역이다. 알토는 한국 대우자동차의 티코 모델이기도 하다. 스즈키 집안은 방직기계로 출발 스즈키 자동차는 창업주 이름에서 비롯됐지만, 처음부터 자동차업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다. 목화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스즈키 미치오(鈴木道雄:1887~1982)가 스즈키 방직기계(주)를 설립한 건 1920년이다. 그의 아들 스즈키 슌조(鈴木俊三)는 모터가 달린 자전거를 내놓으면서 업종을 변경했다. 1954년 ‘스즈키자동차공업’으로 회사명을 바꾸고 스포츠바이크와 경차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붉은 S자 로고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1958년부터다. 1990년 10월에는 현재의 스즈키로 사명을 바꿨다. “우물을 파려면 제일 먼저 파야 한다” 스즈키의 역사에서 인도 진출을 빼놓을 순 없다. 오사무 회장은 “우물을 파려면 제일 먼저 파야 한다”며 일본 자동차 메이커 중 가장 먼저 인도 시장에 눈떴다. 그가 사장 4년차이던 1982년(당시 52세), 스즈키는 자동차 기업으로서는 일본에서 꼴찌였다. 그래서 그는 “국내에서 1등하기 어렵다면 해외에서 하자”고 마음 먹었다. 모두가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인도 시장 진출 선언이었다. 인도 정부와 공동으로 합작사‘ 마루티 우도요그’(Maruti Udyog)를 설립, 이후 자회사로 만들었다. 2007년에는 ‘스즈키 마루티 인디아’로 회사명을 변경했다. 마루티는 인도에서는 ‘국민차’로 불린다. 스즈키는 한때 인도 시장 점유율 70%를 웃돌기도 했지만, 현재는 50%대를 유지하고 있다. <에디터 김재현>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27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흥미로운 조선의 주막 네트워크
이 책이 흥미로운 건 그가 보고 들은 내용에 대해서는 제가 전혀 몰랐던 사실이 적혀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조선 후기 주막 네트워크였죠. 부산에 도착하여 태백산맥을 따라 강릉 쪽으로 간 후 서울로 온 저자는  처음 부산에서 돈을 환전 했을 때 문화 충격을 경험합니다. 조선에서 사용되는 화폐는 무거운 동전이었으며, 여행자금을 동전으로 바꾸니 그 무게가 무려 25킬로그램에 달하는 거였습니다. 이 때문에 저자는 자신이 탈 말과 함께 돈을 실어 나를 말을 한 필 더 빌려야 했고, 이런 조선의 후진성은 저자를 당혹시킬만 했으나 조선은 저자도 놀랄만한 주막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여행자들이 여행을 시작하면서 처음 묵게 되는 주막 주인에게  돈다발을 건네주고 영수증을 받은 뒤, 이후부터는 그것을 돈 대신 사용한다.  이후의 주막 주인들은 영수증에 여행객에게서 받아야 할 숙박비나  식대 그리고 기타 사소한 물품비를 표시해둔다. 여행자가 마지막에 머무는 주막의 주인은  여행자의 영수증을 받고 남은 돈을 내주게 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이 한반도 전역에 걸쳐 이미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뛰어난 재정조직,  그리고 여인숙 주인연합회의 훌륭한 부기능력을 보여준다.  여행객이 규칙을 어기거나 돈을 악용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전국의 주막 주인들이 조직이 광범위하고 일원화되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주막의 모습. 국밥 한 그릇을 먹으면 하룻잠을 잘 수 있었다.> 나는 이 편의를 이용할 기회가 없었다.  나는 실제로 그런 은행식 주막들이 마을마다 있으리라곤 믿지 않았다.  나중에 가서야 어디에나 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런 거래를 하려면 아주 경험 많은 통역사가 있거나 한국말을 잘 해야만 했다.  하여튼 통역사를 믿지 않았던 것은 후회스럽다."  (코레야, 1903년 가을, 개마고원, 41~42p) 정리하자면, 여행자가 어떤 행선지로 여행을 하기 위해선 숙박을 할 수 있는 주막의 이용이 필요한데, 돈의 무게가 무거워 운반하기 위한 경비가 들고 또한 오랜 여행기간동안 그것을 잃어버릴 리스크가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처음 가는 주막에서 필요한 여행경비를 모두 지불하면 그것을 증명할 영수증이 나오고, 그 후의 주막에선 영수증만으로 처음 금액에서 사용하는 금액을 차감하는 식으로 화폐 없이 여행을 가능하게 한 것이죠. 그리고 여행을 마치는 마지막 주막에선 처음 지불한 금액에서 여행동안 지불한 금액을 차감하여 나머지 금액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시스템은 저자가 묵은 모든 주막에 다 있었으며,  설마 낙후된 조선에 이런 시스템이 있을까 하는 의심에 통역사의 말을 믿지 않고 이용하지 않았지만 후에 보니 통역사의 말은 사실이었죠. 실제 저자는 조선의 신용거래나 대출 거래의 부재를 기관을 세울 능력의 부족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필요성의 부족으로 신용거래를 이용하지 않았을 뿐이고,  신용거래가 필요한 경우엔 T.Cook의 수표책에 결코 떨어지지 않는 여행자 신용거래 시스템이 존재했다고 언급하고 있지요. 출처 pgr 커뮤니티, 원문 코레야 1903년 가을 ㅡㅡㅡㅡㅡㅡ 신기하네 그냥 주모!! 국밥한그릇 주쇼!! 하는데인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