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brielBarbo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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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짤] 이정협의 빅피쳐

퍼스트 터치를 구리게 한 건
내 앞의 수비수를 끌어드리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성공적인 울산 데뷔골!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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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그래도 슛좋았네요!!
드디어 이정협선수가 골을 넣었군요! 이대로 쭉 자신감 갖고 승리를 안겨줬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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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슛토리] 아프리카의 '검은 예수'
2005년 11월. 당시 코트디부아르는 남북으로 나뉘어 전쟁 중이었다. 정부군이 점령한 코트디부아르 남쪽, 반군이 깃발을 꽂은 북쪽. 분단된 나라에서는 수없이 총성이 울리며 동포들의 가슴에 총알을 박아넣었고, 한 나라의 국민들끼리 동족상잔을 이어가며 비극적인 하루하루를 반복하고 있었다. 오랜 전쟁으로 지쳐가던 그 때, 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이었던 한 남자는 동료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강적들을 꺾으며 월드컵 본선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에게는 한 가지 목표가 있었다. 내전으로 지친 국민들에게 '축구'로 희망을 주고, 전쟁을 멈추자는 메세지를 보내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렇게 그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었다. 예선을 통과하고 본선에 진출해 세계인의 '축제'에 참가하면, 전쟁을 멈출 수 있을거란 희망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코트디부아르 대표팀은, 수단 대표팀을 3-1로 이기고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경기가 끝난 직후, 그는 선수단을 촬영하는 TV 생중계 카메라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붉어진 눈시울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호소했다. 사랑하는 코트디부아르 국민 여러분. 우리 모두 서로를 용서합시다. 그리고. 제발 월드컵 본선이 진행되는 1주일만이라도 무기를 내려놓고 전쟁을 멈춰 주세요. 그리고 그의 진심과 눈물이 섞인 호소를 TV로 지켜본 반군과 정부군은 정말로 1주일 동안 전쟁을 멈추게 됐고, 코트디부아르에는 작은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렇게 휴전이 진행되던 2007년, 극적으로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코트디부아르는 길었던 내전이 끝나고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가족들과 웃으며 식사를 하고.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모두 함께 축제를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는 '검은 예수' 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슛토리] 오늘의 주인공. 세계 정상급의 실력을 가졌던 완성형 스트라이커. 실력만큼 인성도 월드 클래스였던 남자.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은 아프리카의 '검은 예수' 디디에 드록바(Didier Drogba) 안녕 친구들! 오늘은 정말 유명한 선수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해. 아마 축구 좀 좋아한다 싶은 사람들은 모두가 이 선수에 대해 알 거라고 생각해. 심지어 축구를 잘 몰라도 이 선수의 이름을 들어본 친구들도 많을거야. 특히 이 선수가 전성기를 맞이했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첼시FC의 팬들에게 드록바는 거의 신과도 같은 위치에 있어(드---멘) 전성기 때 드록바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야말로 '완벽형 스트라이커'야. 흑인 특유의 유연성 + 피지컬과 189cm의 키와 점프력에서 나오는 제공권, 빠른 스피드. 여기에 뛰어난 축구 지능으로 패스와 연계, 위치선정까지 뛰어난 그야말로 만능 공격수였어. https://youtu.be/T-BCZmQ8WU0 (드록바의 베스트 골을 모아놓은 영상) 드록바라는 선수가 첼시에서 세운 업적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데, 첼시는 드록바와 함께 프리미어리그 우승 4회, FA컵 우승 4회, 리그 컵 우승 3회, 유럽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 커뮤니티실드 우승 2회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웠고, 드록바는 첼시에서 381경기 164골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지. 첼시라는 팀의 최전성기에 핵심으로 활약했던, 그야말로 전설 중의 전설이지. 이런 드록바는 조국인 코트디부아르를 위해 선행을 베푸는 것으로도 유명해. 그는 내전이 진행되는 중 잉글랜드에서 '조국과 국민은 고통 속에 있는데, 나 혼자만 이렇게 편하게 살아도 될까?' 라는 고민을 항상 했다고 해. 그리고 그가 결심한 것이 생방송에서 호소하는 것이었고, 그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지. 그리고 내전이 종료된 직후, 그의 연봉 중 절반이었던 한화 약 60억원으로 조국을 위해 코트디부아르에 병원을 설립하고, 4,000명에 달하는 전쟁 난민들을 후원하기 시작했어. 또한 2009년 펩시콜라 CF를 촬영하고 출연료로 받은 약 54억원을 자신의 고향인 아비장의 종합병원 건립 기금으로 내놓았고, UN 친선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했어. 그의 아내 또한 드록바와 함께 선행을 하기로 유명해. 스캔들 및 여자문제 한 번 일으키지 않고 아름답게 사랑하며 살고 있는 드록바 부부는 코트디부아르를 넘어 아프리카 전역의 의료시설 부족 및 낙후된 의료체계에 관심을 갖고 재단을 설립해 꾸준히 의료지원을 하고 있어. 또한 에이즈퇴치운동 등 공공 보건에 관련된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아프리카 전역에서 인기가 높다고 해. 심지어 드록바의 어머니조차 2012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때 코트디부아르를 응원하러 온 서포터들을 위해 현지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서포터들에게 전달하며 감사함을 표했어. 서포터들은 대표팀의 주장의 어머니라서가 아닌, 워낙 인품이 훌륭하신 분이라서 유명하다고 얘기했다고 해. 정말 그 엄마에 그 아들... 우리나라로 치면 손흥민 선수 어머니께서 경기를 보러 온 팬들에게 음식을 돌린 정도...일까? 드록바의 사진을 들고 마치 신처럼 숭배하는 코트디부아르 국민들의 모습이 보여? 드록바가 입국할 때면 사람들은 환호를 하며 그에게 다가가 왕관을 씌워주고, 망토를 전달한다고 해. (대략 이런 느낌...?) 어떤 외신 기자는 코트디부아르 국민에게 '만약 드록바가 대통령 후보로 나온다면,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 국민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해. 어차피 당선될 건데 돈 아깝게 투표는 왜 해야 하죠? 이렇듯, 코트디부아르에서는 신과도 같은 위치에 서있는 남자야. 물론 그가 조국을 위해 한 일들을 생각해보면, 국민들이 이렇게 열광적인 지지를 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 이랬던 그는 어느 날 돌연 중국 리그로 이적해버렸는데, 노쇠화로 인해 피지컬적인 부분이 떨어졌어도 충분히 유럽에서 통할 능력을 가진 그였기에 많은 팬들이 의아해했었어. 나중에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 조국은 아직 많은 지원이 필요하고, 내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도 많기 때문에 나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아빠가 돈 많이 벌어갈게 기다려!) 라고... 아아...드---멘... 참고로 중국 리그는 다른 곳보다 많은 연봉을 보장하지만, 리그의 수준이 많이 떨어지고 삶의 질 또한 낮아지기 때문에 정상급 선수들은 기피하는 곳이야. 그의 선행은 아프리카에서만 국한되지 않고, 그가 있는 곳이면 그는 어디든 선행을 베풀었어. 선수 말년 그는 터키 갈라타사라이라는 팀에서 황혼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 당시 터키에서 광산 폭발로 인해 3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던 대참사가 일어났었어. 선수들은 팀과 함께 십시일반 모금을 해 위로금을 전달했었고, 드록바도 아낌없이 모금에 동참했어. 그런데 그 후, 익명의 기부자가 한화 약 14억원에 달하는 큰 돈을 기부했다는 거야. 그런 큰 돈을 한 번에 기부할 사람이 몇 되지 않았기에 추리는 것은 쉬웠고, 그 인물은 드록바로 밝혀졌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드---멘...) 익명의 기부자가 드록바라는 것이 밝혀진 이후, 그는 인터뷰에서 '이런 일로 내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라며 아낌없는 프로 선행러의 모습을 보여주었지... 가장 최근에는 코로나로 인해 조국이 고통받고 있다며 자신의 재단인 '드록바 자선재단'을 이용해 자신의 병원을 개방해서 환자들을 격리시키고, 아낌없는 지원을 통해 코로나와 싸워나갈 수 있는 전초기지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고 해. 드록바는 이렇게 얘기했었어. "그동안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 봤지만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가져다 준 순간이야말로 가장 영광스러운 트로피다." 이 말 한마디에 그의 인품이나 애국심, 국민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드러나 있다고 생각해. 여전히 선행을 멈추지 않는 남자. 가정에서 좋은 아버지, 남편이자 범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남자. 코트디부아르와 아프리카의 영웅 '검은 예수' 흔히들 축구를 전쟁으로 비유하곤 하지. 하지만 이 세상엔 축구로 전쟁을 끝낸 남자도 존재한다는 거. 전쟁을 멈춘 남자. 디디에 드록바였어!
이재성에게 관심 보인 클럽 목록
K리그 클래식 전북 현대 모터스 소속 이재성 프로 데뷔 후 1년 만에 유럽 클럽팀 스카우터들의 관심을 받고 있으며 이번 시즌 중반에 유럽으로 이적하는게 점처졌었습니다. K리그 클래식 스타로서는 권창훈과 함께 유럽 리그로 건너갈 유력한 재목으로 평가받고 있죠. 그렇다면 이재성에게 관심을 보인 클럽들을 살펴볼까요 분데스리가 - 함부르크 SV 손흥민 선수도 뛰었었고 빅리그 이적을 위한 발판으로 삼기 좋은 팀입니다. 분데스리가 - 아인트하르트 프랑크푸르트 차범근을 레전드로 대우하고 있는 프랑크푸르트입니다. 역시 동양권 선수에게 개방적인 분데스 분데스리가 - 베르더 브레멘 15년 12월, 분데스리가의 3개 팀이 이재성에게 관심을 표명했고 이적료를 문의하기도 했음. 출처 http://www.fussballtransfers.com/bundesliga/verstarkung-aus-fernost-drei-bundesligisten-buhlen-um-neuen-heung-min-son_60187 라 리가 - 발렌시아, 세비야 동아시아컵에서 이재성+권창훈 등을 관찰하기 위해 스카우트 파견. 특히 발렌시아가 큰 관심. 출처 http://m.sports.naver.com/kfootball/news/read.nhn?aid=0000443588&oid=111& EPL - 에버튼, 왓포드 꽤 신뢰도 있는 기자의 보도. EPL의 여러 클럽들이 이재성을 주시하고 있으며 에버튼과 왓포드가 영입 레이스를 주도하고 있음. 하지만 안타깝게도 양팀 감독이 모두 바뀐 상황이라 변수가 있음. 출처 http://www.teamtalk.com/news/exclusive-everton-watford-chase-south-korean-ace-lee 최근 이재성 수준.gif 말이 필요없음 그야말로 케클 쌈싸먹고 다니는중 엄청 기대되네요!
[상식축구]이승우 사건, 도대체 뭐가 예의입니까
(사진=네이버 KBSN SPORTS 캡처) 후반 35분 우리나라 선수가 쓰러졌다. 심판은 다급히 휘슬을 연달아 불었다. 동료, 상대 선수 할 것 없이 달려왔다. 팀닥터들이 뛰어 들어갔다. 몇 초, 몇 분이 흘렀을까. 그제야 구급차가 경기장으로 들어갔고 쓰러진 정태욱은 그대로 구급차에 실려 경기장을 빠져 나왔다. 다행히 정태욱은 검사 결과 이상이 없음이 확인됐다. 이 과정에서 이승우의 태도가 논란의 대상이 됐다. 대한민국 U-20 대표팀은 지난 3월 27일 아디다스 U-20 4개국 친선 축구대회서 잠비아를 만나 4-1 대승을 거두었다. 한국의 초특급 유망주로 손꼽히는 이승우가 이 날 경기서 2골을 몰아넣으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역시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유망주다. 이승우는 전반 40분, 바르셀로나 동료 백승호의 패스를 받아 골로 성공시키며 2-1로 한국의 리드를 가져왔다. 이어 후반 24분 상대 골키퍼가 나온 것을 보고 환상적인 칩샷을 터트렸다. 이승우의 클래스를 볼 수 있던 순간이었다. (사진=연합뉴스) 이승우 인성, 논란거리인가? 세계는 이승우의 성장세를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승우의 인성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이승우는 후반 35분, 헤딩 경합을 하다 쓰러진 정태욱에게 달려왔다. 다급히 구급차를 불렀다. "빨리 오라고! 빨리 오라고! XX." 문제는 이 발언이었다. 경기장 안으로 빨리 들어오지 않은 구급대원들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핵심은 '욕까지 해야 했었나?'라는 것이다. 빨리 들어오라고만 하면 될 것을 그렇게까지 분노하면서 소리쳐야만 했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이승우의 감정은 모두가 이해할만 하다. 팀 동료가 심각한 부상일지도 모르는 머리 부상을 당해 쓰러졌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걱정하지 않을 사람은 없으며 다급한 마음에 구원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지극히 당연한 행위다. 과장된 표현일수 있지만, 세월호 사건을 이 사건에 대입해본다면, 마치 '가만히 있어라' 같은 내용이 될 수도 있다. 큰 부상을 당했다.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연히 방방 뛰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맞다. 주변에 팀닥터가 있어서 괜찮다? 그렇다면 주변에 선생님들이 계시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좋다는 말인가? 글쎄. 충분히, 100% 이승우의 행동에 동의한다. 비유가 적절치 못할 수 있겠으나 적어도 내 입장은 이승우 편이다. 또한 이승우는 현재 스페인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유럽의 시스템이 다 잘 갖추어져있고 우리나라는 그에 비해 형편없다고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대체적으로 스페인의 의료 시스템은 최고 수준일 것이다. 특히, 선수가 부상당했을 때의 대처 요령 등과 같은 것 말이다. 이승우는 그런 상황에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의료진에게 불만이었을 것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이승우의 태도, 사진=네이버 KBSN SPORTS 캡처) 근본적인 원인을 고찰하자 이승우가 화낸 것만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왜' 이승우가 그랬는지를 근본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도대체 왜 이승우가 화를 냈을까. 그 이유는 의료진의 초동 대처가 미흡한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포츠 경기에서 위급한 상황이 많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철저한 상황 대처 요령을 숙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체감할 때 분명 우리나라 스포츠 의료 체계는 문제가 있다. 과거 2000년 4월 18일 롯데 자이언츠와 LG 트윈스의 경기에서 2회 초 2루로 진루하던 故임수혁(롯데 자이언츠, 향년 42세)선수를 떠올려보자. 2000년대라면 분명히 의료 기술이 발전한 시기였다. 지금은 그보다 더 발전했겠지만 그 당시도 충분히 구급차, 의료 체계가 갖춰졌을 기술력이다. 하지만 당시 구급차도 준비되어있지 않았고 사고 대책이 미흡해 결국 故임수혁 선수는 식물인간 상태로 10년을 지냈고 끝내 2010년 눈을 감았다. 당시에 누군가 소리쳤다면, 구급차를 애원하며 울부짖었다면, 초동 대처가 확실했다면 故임수혁 선수는 야구 팬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故임수혁 선수 사건 이후 스포츠계는 의료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고 특별히 큰 사건을 겪지 못했다. 내가 알기론 큰 사건이 기억나지 않는다. 있다면 알려주시길 바란다. 무엇이 예의인 것일까. 예의를 생명보다 먼저 갖춰야 하는 것일까. 정태욱이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혹여나 초동 대처의 미흡으로 인해 식물인간이 되기라도 한다면 뒷감당은 누가 할 것인가. 그 때는 누구를 비난할 것인가. 잘잘못을 논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갖춰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주목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가 아닐까.
[울산 레전드 특집] 01. '유비' 유상철
울산도 어느덧 팀이 생긴지 30년이 넘은 K리그를 대표하는 명문팀이나, 그 30년 가까운 역사에서 리그를 제패했던 적이 딱 2번, 운도 지지리 없어서 준우승만 머물렀던 것이 무려 8번이나 되니 이만하면 K리그의 '콩구단'이 아닌가 싶을정도다. 이 3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울산에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거쳐갔지만, 정작 레전드로 꼽을만한 선수가 누가 있냐고 말한다면 의외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선수들 대부분이 '거쳐가는 클럽'으로 인식을 한건지 울산을 발판으로 다른 팀으로 떠나기 일쑤였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울산을 대표하는 레전드가 그만큼 더 귀하고 생각보다 끄집어내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그 중에서 가장 생각나는 선수를 꼽자면 나는 제일 먼저 이 선수를 언급하고 싶다. 바로 '유비' 유상철이다. 유상철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울산골수팬으로 자리잡았을 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1. 허약체질 개선을 위해 신었던 축구화, 선수로써 꿈을 키우다 184cm 78kg(선수시절 프로필)의 체격으로 몸싸움에서 웬만한 유럽 선수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유상철이지만, 어렸을 때는 아주 정반대였다. 어렸을 적 유상철은 유난히 허약하고 잔병치레가 많아 키도 작고 비쩍 말라서 운동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며, 그가 초등학교 5학년때 처음 축구를 시작하게 된 것도 축구에 대한 재능이 있었다기 보단 허약체질을 개선해서 몸이 좋아질 것을 기대한 어머니의 권유였다. 그렇게 축구를 시작하게 된 유상철은 응암초등학교-경신중-경신고를 거쳐서 축구선수로써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었으나, 문제는 그의 작은 키가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경신고에 진학하고 나서 1학년 때 당시 감독이 축구를 그만두라고 권유했을 정도였다. 이 권유가 충격요법으로 작용했던 것인지 그해 겨율 합숙훈련에 합류하는 대신에 두달간 보약을 보충하면서 체력을 키워나갔고 그 노력의 정성이 빛을 발했던 것인지 고2때부터 키가 자라 2년 사이에 20cm나 성장했다. 고등학교 시절 눈에 띌 정도로 부각되진 않았으나 팀플레이에 능했던 덕분에 유상철은 1990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U-19 AFC대회 챔피언쉽에 한국대표팀으로 뽑혔으며 한국을 우승으로 이끄는 데 크나큰 활약을 펼쳤고, 한국은 1991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진출티켓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러나 1991년 남북 단일 대표팀이 결성되는 바람에 아쉽게도 유상철은 청소년대표팀 엔트리에 들지 못하였다. 그렇게 유상철은 경신고를 거쳐 건국대학교로 진학한 후에 1994년에 프로무대에 발을 내딛게 되는데, 그가 데뷔한 팀은 다름 아닌 자신의 고향인 서울팀이 아니라 울산이었다. 2. '유비' 유상철, 대중 앞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새기다(1994~1997) 사실 유상철은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자란 서울 로컬이었기 때문에 프로팀을 서울을 연고로 하는 팀을 원했었으나 울산이 드래프트 1순위로 유상철을 택했다. K리그가 개막하기 전에 그는 94년 미국월드컵 대표팀 전지훈련에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몸만들기에 들어간 것이 그에게 긍정적인 효과로 작용되었고, 1994년 3월 5일 미국과의 A매치 데뷔무대를 가지기도 했다(아쉽게도 94 미국월드컵 대표팀 최종엔트리에 뽑히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그는 울산에서 우측 수비수로 처음 프로데뷔무대를 가지게 되었다. 수비수로서 좋은 활약을 보였던 덕분에 그는 그의 존재를 처음으로 부각할 수 있었던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대표팀 명단에 선발되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8강전은 유상철 이름 석자를 대한민국에 처음 부각시켰던 경기였다. 당시 8강전은 한일전이었기 때문에 분위기상으로는 사실상 결승전이나 다름없던 무대였고, 우리나라는 일본을 상대로 1대0으로 밀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한정국의 힐패스를 이어받은 유상철은 오른발 발등으로 공을 골대로 밀어넣으면서 동점골을 뽑아냈고, 이것을 기점으로 한국은 일본을 계속 몰아치다가 결국 3대2 역전승을 거두며 아시안게임 4강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것이 유상철이 '한일전의 사나이'로 불리어지게 된 첫 계기였다. 그 해 유상철은 국가대표로서 아시안게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듯이 클럽팀인 울산에서도 5골 1도움을 기록하며 신인선수 신분으로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기쁨까지 누리게 되었다. 프로 첫시즌을 성공리에 마무리한 유상철은 다음해인 1995년에는 홍콩국제대회나 다이너스티컵과 코리아컵 등 다수의 국제대회에 참가하면서 경험을 축적하였고, K리그 올스타전에서 올스타대표로 선정되며 1996년 아틀랜타 올림픽대표팀 와일드카드로 뽑히면서 1996년 올림픽에 참가하려고 했으나, 올림픽 직전에 부상을 당하면서 중도하차하게 되었다. 이 때 부상의 여파로 유상철은 8경기에서 1골을 기록하는 등 부진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밑바닥을 찍으면 다시 상한가로 돌아서듯이 그러한 부진을 유상철은 1996년 수원과의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 1대1로 비기고 있던 상황에서 역전골을 뽑아내면서 부진을 만회하는 데 성공했고, 울산의 첫번째 챔피언 등극에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 때 고재욱 감독의 플랜에 유상철이란 존재는 필수요소였다. 1996년 첫 리그 챔피언으로 등극한 이후 이듬해인 1997년은 울산 구단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화려한 멤버진을 갖췄다. 이당시 울산은 일명 '깡패축구'로 올드팬들에게 불리기도 했는데, 김현석, 유상철, 김병지, 김종건, 황승주, 정정수, 김상훈, 박정배 등 울산 스쿼드 한 명 한 명의 존재감이 상당히 컸다. 하지만 1996년 리그 우승의 임팩트가 너무나 컸던 지, 1997년은 슬럼프에 빠졌다. 특히나 1996년에 속히 말해 '날라다녔던 신인 선수들'도 2년차 징크스에 대부분 빠져버린 셈이었다. 유상철은 부진한 것은 아니나 당시 팀의 분위기에 맞물려서 그렇게 큰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3. 세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유상철, 그리고 J리그 사기유닛시절(1998~2002) 1998년은 유상철을 대한민국을 대표로 하는 슈퍼스타로 만들어준 결정적인 해였다. 이미 K리그 내에서는 나름 입지를 갖춘 미드필더이긴 했지만, 그의 진가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아마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 아니었나 싶다. 월드컵 대표팀으로 나서기 전에 열렸던 아디다스컵 대회에서 유상철은 주축선수로 활약하면서 팀의 컵대회 우승에 큰 도움이 되었고, 이 때 활약을 발판으로 프랑스월드컵에서는 대표팀 주장완장을 차고 뛰었다. 특히나, 벨기에전에 유상철이 터뜨린 극적인 동점골은 유상철이라는 선수를 전세계적으로 알리게 된 경기이자, 유상철의 득점본능을 깨우게 된 결정적 사건이었다. 그 전까지 유상철이 울산이나 국가대표에서 맡았던 역할은 주로 중원에서 조율을 전담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1998년의 유상철은 내 뇌리 속에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고, 내가 울산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유상철이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비록 수원에게 리그 챔피언 타이틀을 빼앗기긴 했지만, 그의 활약상은 충분히 찬사받을만 했다.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를 경험하고 난 뒤, 유상철은 한 층 더 진화한 모습이었다. 그동안 수비수와 미드필더로만 뛰었던 그가 정규리그에서만 무려 14골을 뽑아내면서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1997년에 김현석에 이어 1998년에 유상철이 득점왕에 올라서면서 울산은 2년 연속 득점왕을 배출해낸 셈이다. 사실 유상철이 기술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그가 스트라이커로 포지션 변경해서 성공할 수 있었던 계기는 타고난 피지컬과 위치선정, 그리고 넓은 시야가 크게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유상철처럼 수비수/미드필더/공격수 모두 뛰면서 좋은 활약을 펼쳤던 선수는 이전에 김주성 밖에 없었고, 현재까진 없다. 하지만 유상철은 1998년을 끝으로 울산을 떠나게 되었다. 월드컵과 K리그에서 보여준 활약상의 영향인지 옆나라 일본 J리그에서 오퍼가 들어왔고,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 일본 요코하마 마리노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그의 활약은 여전했다, 아니 유상철은 속칭 "J리그를 씹어먹는 사기유닛"이 되었다. 전반적으로 J리그 선수들이 하드웨어적인 부분에 있어서 약점을 보이다보니 힘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유상철에게 있어서는 J리그는 완전히 독무대였다. 요코하마로 가서 유상철은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전 포지션을 오가면서 활약했다. 그러다 2000년에는 같은 울산 출신인 김현석과 더불어 J리그 득점왕 경쟁까지 했을 정도이니 그의 J리그 활약은 길게 설명하면 입이 아플 정도다(2000년 유상철의 경기 기록 : 리그 22경기 출장 17골/리그컵 6경기 출장 4골). 그렇게 2001년에는 황선홍-홍명보가 있는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하면서 '코리안 3인방'을 결성하기도 했다. J리그 활약 당시에 유상철에게 놀랄만한 오퍼가 들어왔다. 바로 스페인의 명문 클럽인 FC 바르셀로나로부터 이적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이 당시 한국인 선수에게 유럽팀으로부터 오퍼가 들어온다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이며, 지금 시대에 비해 한국 선수들의 유럽에서의 인지도도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시절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유상철의 바르샤행 링크 자체만 하더라도 크나큰 파장을 줬다. 사실 바르샤에서 관심을 가질 만 했던 것도 당시 유상철이 1998 FIFA 올스타팀에 선정될 정도 주가를 높이고 있던 터였는 데다가 수비수/미드필더/공격수를 가리지 않는 멀티 플레이어 능력이 주목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이적설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에이전트 및 기타 문제로 결렬되었다고 한다. 4. 2002년 월드컵의 진정한 히어로, 그리고 친정팀으로 금의환향(2002~2006) 2001년, 한국 축구는 거스 히딩크라는 네덜란드 출신 외국인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앉히면서 터닝포인트를 맞이하였다. 그가 오기 전에 한국 축구는 "축구강국들에 비해 기술이 떨어지고, 힘과 체력이 앞선다"라는 평이 많아서 브라질로 유학 보내는 사례가 많았다(울산이나 포항 등 몇몇 K리그 클럽들이 실제로 브라질 유학파를 육성하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히딩크는 오히려 "한국축구는 기술은 좋으나, 힘과 체력이 떨어진다"는 정반대의 평가를 하면서 한국 축구계를 발칵 뒤집어놨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선수들에게 체력과 피지컬 강화 운동에 주력했다. 그 중심에는 유상철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히딩크호가 부침을 거듭하게 되자, 국가대표팀에 대한 불안감도 가중되었고, 이에 맞물려 유상철도 한국 스타플레이어들이 통과의례로 치르던 안티지분을 대량 확보했다. 정확하게는 유상철의 안티확보 근원은 2000년 허정무 감독시절, 그가 스트라이커로 뛸 때 숱한 1대1 찬스를 날려버린 것 때문에 붙은 것이다. 그 이후로 스트라이커 기용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흔들릴 유상철은 아니었다. 히딩크호에서 유상철의 입지는 굳건했고, 일전에 히딩크가 홍명보를 다스리기 위한 방책으로 그를 센터백으로 기용하기까지 했으니 그의 입지에는 별 타격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02년 월드컵 당일, 유상철은 폴란드전에서 통쾌한 중거리슛을 꽂아넣으면서 한국대표팀에게 첫 월드컵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한국은 54년만에 월드컵 1승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월드컵 기간 내내 줄곧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하면서 김남일과 함께 중원에 포진되었다. 영국의 축구평론가인 앤드류 워쇼가 UEFA에 기고한 글에서 유상철을 "유상철은 이번 월드컵에 참여한 수비형 미드필더 중 최고다. 그의 침착성과 탁월한 볼 배급 능력은 경이로운 수준이고, 세계 축구팬들은 그의 등번호(6)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평가할 만큼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히딩크가 김태영-홍명보를 빼고 닥공모드를 시전할 당시에 최진철과 함께 최후방 수비를 맡으면서 이탈리아의 역습을 막아내기도 했고, 스페인과의 8강전에선 센츄리클럽에 가입했다. 2002년 월드컵 영웅은 이렇게 탄생했다. 월드컵 4강신화의 주축으로 주목받던 유상철은 월드컵이 끝나고 일본에서 유럽으로 진출하기 위해 가시와 레이솔을 떠나 유럽 클럽팀들을 알아보고 있었으나, 자신의 에이전트의 무능력으로 인해 유럽 진출은 커녕 무적신세가 되면서 선수생활에 큰 위기에 봉착했다. 이러한 와중에, 국제미아가 될 뻔한 유상철에게 구원의 손길을 준 팀이 있었으니, 바로 유상철의 친정팀인 울산이었다. 그리고 유상철이 복귀한 뒤에 처음으로 골을 터뜨린 경기가 재밌게도 지난 1998년 울산에서의 마지막 골을 기록했던 성남전이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선발 출장하여 이천수와 3골 합작하면서 침체된 울산의 순위를 끌어올리기 8연승을 달리며 2위로 리그를 마쳤다. 이정도면 상당히 성공적인 K리그 복귀였다. 다음 해인 2003년에 FA 자격으로 자유신분이 되었지만, 울산이 연봉 3억원에 격려금 2억원을 제시하면서 울산과 재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해 부산과의 경기에서 이장관이 유상철에게 비신사적인 태클을 걸었고, 이에 이성을 잃은 유상철은 이장관을 폭행하면서 5경기 출장정지와 820만원의 벌금을 물었다. 유상철은 이 징계에 대해 "동업자 정신을 버린 축구에 대해 화가 났다"고 밝혔고, 이 사건을 계기로 J리그로 떠나버렸다. 자신이 J리그에서 처음으로 뛰었던 요코하마로 재이적한 유상철은 2003년 시즌 후반기에 17경기 출장 6골을 뽑아내면서 요코하마의 전/후기 리그 통합 우승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연봉 1억엔으로 계약하였다. 히딩크가 국가대표 지휘봉을 내려놓은 이후에도 유상철은 여전히 국가대표팀의 중심이었다. 쿠엘류-박성화 감독체제를 거치면서 맏형 역할로 동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일조하였으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선 와일드카드로 뽑혀서 어린 선수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맡으며 올림픽 대표팀을 8강까지 견인하였다(올림픽 대표팀에선 플랫3에서 뛰었다). 요코하마가 2년 연속 리그 제패한 뒤에, 유상철은 방출되었다. 노장인데다가 2002년 이후로 계속 부상이 잦았던 것이 원인이었다. 이러던 와중에, 유상철은 다시 울산으로 복귀하길 결심하면서 2005년 울산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유상철은 그렇게 많은 경기 수를 출장하지 못했다. 부상후유증과 노쇠화도 있지만, 유경렬-조세권 등의 주축 선수들이 자리를 잡은 터라 쉽사리 이들을 밀어내고 주전으로 자리잡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상철은 조금 뒤로 물러나서 울산 선수들을 독려하는 역할을 맡았고, 결국 울산은 2005년에 리그 두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유상철은 울산에서 뛰면서 리그 우승 2번 모두 경험하는 울산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그 이후, 유상철은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고 싶어했지만, 그의 무릎이 허락하지 않았다(유상철의 왼쪽 무릎 부상이 호전되지 않았던 터였다). 결국 그는 2006년 K리그 울산 홈개막전에서 은퇴경기를 치뤘고, 후에 요코하마에서도 유상철의 은퇴경기를 기념했다고 한다. 이렇게 '유비' 유상철의 선수 경력은 마감하게 되었다. 후에 예능 프로그램에서 밝혔는데, 유상철은 선수로 뛸 당시에 왼쪽 눈이 실명상태라 오른쪽 눈에 의지한 채로 경기를 뛰었다는 것을 고백했고, 이러한 사실은 심지어 그의 가족들조차도 몰랐다고 한다. 이러한 부상을 숨긴 채, 그는 남모르는 노력을 부단히 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선수 생활 은퇴 이후, 유상철은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으며, TV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날아라 슛돌이 감독을 시작으로 춘천기계공업고 감독, 그리고 현재는 대전 감독 지휘봉을 잡기도 했었고, 현재는 울산대학교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오로지 울산에서만 뛰었던 '의리파 유비' 유상철, 그 때가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울산으로 돌아오길 기다린다. 유.상.철. 원문 : http://blog.daum.net/manutdronaldo/502
지난시즌 악몽이 되살아나는 울산, 왜 제자리걸음하는가
2년째 초반 레이스에서 허덕이는 호랑이들 이번 어린이날에 문수경기장에 찾은 어린이들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인상적인 경기가 되어버렸다. 홈팀인 울산이 원정팀에게 완벽하게 3대0으로 박살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생생하게 지켜봤기 때문이다. 울산이 성남에게 비해 객관적인 전력에서 밀리는 팀도 아니었고, 경기 초반 페이스는 울산이 쥐고 있었고 성남은 끌려가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전반 30분, 울산 수비진들이 성남의 윤영선을 놓치면서 내준 실점으로 인해 분위기는 한 순간에 바뀌었다. 후반이 시작되자마자,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해 울산은 성남을 밀어부치려했으나, 오히려 성남의 에이스인 황의조의 두 번의 침투에 울산은 완전히 무릎을 꿇으면서 전의상실했다. 후방이 허무하게 무너져버리니, 그 여파는 전방까지 이어져 울산은 다급하게 쫓기기 시작했다. 반면, 3골이나 넣은 성남은 여유를 가지기 시작했고 모든 선수들의 시야가 완전 개방되는 듯 했다. 성남은 울산 원정 4연승이라는 기록을 이어나가면서 리그 2위로 발돋움한 반면에, 울산은 7위로 내려앉았다. 주말에 열리는 포항, 수원의 경기결과에 따라 더 추락할 가능성도 생겼다. 문제는 이 행보가 작년과도 유독 유사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시즌 윤정환 부임 첫시즌의 경우, 3연승으로 쾌조 스타트를 끊은 뒤, 4월부터 무승 징크스에 시달리기 시작했었다. 올시즌은 더욱 심하다. 개막전 패배를 시작으로, 이번 성남전을 포함하여 통합 5번의 홈경기에서 울산이 쌓은 승점은 겨우 4점(1승 1무 3패)이며, 총 3승 2무 4패(승점 11점)를 기록하고 있다. 작년에 비해 홈 승률이 급격하게 떨어진 것도 문제지만, 빈곤한 득점력도 심각한 상태이다. 성남전이 끝난 직후, 기자들이 득점력 문제를 질문하자 윤정환 감독은 오히려 기자들에게 되물어 득점력 빈곤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하였다. 경기력이 오죽 답답하니 하는 말이지만, 지금 시점에서 정작 감독 본인이 모른다는 것이 조금 아이러니하다. 마치 원인은 감독 빼고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나쁘지 않은 전력을 갖추고도 울산은 왜 허덕이고 있는 것인가? 1. 뻔한 공격 패턴, 그리고 맞지 않는 공격진 상성 "이정협-코바" 윤정환은 김신욱을 전북으로 보내고 난 뒤에도 공격의 무게감이 떨어질 것이라는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밝혔던 적이 있다. 국가대표팀 주전 공격수로 도약하고 있는 이정협이 있고, 지난 후반기 울산의 에이스 노릇을 했던 코바치치(이하 코바)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두 공격수들은 상대 수비수들에게 있어서 그리 위협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주소다. 두 선수가 뽑아낸 골은 겨우 3골(이정협 1골, 코바 2골)이며, 베테랑 수비수인 김치곤이 올시즌에 벌써 2골을 기록하며 팀 내 득점 공동 선두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는 매우 심각하다. 이정협-코바 조합은 현재까지 실패한 셈이다. 울산의 주요 패턴은 코바를 중심으로 하는 공격이며, 측면에서 중앙으로 꺾어들어오는 코바만 막아내면 울산의 모든 공격의 50% 이상을 막아낼 수 있다는 말이 나올 만큼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실제로 현재 K리그에서 가장 많은 슈팅을 기록하고 있는 선수가 코바(37개 슈팅 기록)이며, 코바가 쉽사리 상대 수비진에 의해 막히면 그들의 파트너인 이정협과 김승준까지 덩달아 한쪽 측면으로 기울어져 그를 도와야하는 문제가 발생해 도리어 반대측면이나 중앙에 공을 받을 공격수가 사라진다. 특히나, 반대편 측면에는 김태환 혼자 덩그러니 존재할 정도이다. 코바 본인 또한 올시즌에는 이타적인 플레이보다는 자신이 무리하게 직접 해결하려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는데, 전남전을 제외한 나머지 경기에서는 크게 제 몫을 하지 못했다. 코바가 지나치게 해결사같은 행동을 보이니 자연스레 골을 결정지어줘야할 이정협이 고립되거나 정체성에 혼란이 발생한다. 이정협의 경우, 현재까지 코바의 슈팅의 절반도 안되는 슈팅 기록(14개)을 보유하고 있고, 그 때문에 중앙이 아닌 측면에서 코바를 지원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타겟 스트라이커가 제 자리를 찾지 못하니 자연스레 울산의 득점력은 떨어지는 것이다. 성남전을 복기해보자면, 코바는 이 경기에서 전혀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반면에, 이정협은 비록 득점하는 데 실패했으나 이 경기에서 가장 위협적인 슈팅만 몇 차례 기록했고 그것이 울산의 주요 찬스였다. 이정협을 제대로 살리려면, 사이드백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해야한다. 이기제-김태환이 성남전에서 날카로운 크로스로 연결한 것이 대부분 이정협에게 정확하게 연결되었고, 사이드백들의 측면 활동량이 많아져야 이정협이 타겟 스트라이커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코바를 중심으로 하는 공격을 유효하게 하려면, 이정협을 기용하지 않거나, 코바를 더이상 측면에만 국한시키면 안된다. 울산이 빈곤한 득점력을 듣기 싫다면, 이 조합은 반드시 해체해야하는 게 맞다. 2. 한상운이 부상당하면, 이를 대체할 플레이메이커가 없다 울산 내에서 한상운의 존재감을 쉽게 표현하자면, 그가 울산 전력의 최소 3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팀 내에서 그만큼 경기를 조율할 줄 알면서, 세트피스 찬스에서 예리한 킥을 보여줄 수 있는 선수가 없다. 울산이 제파로프를 미련없이 내보낼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한상운이 군복무를 마치고 울산에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한상운이 실질적으로 많은 스탯을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1도움), 그가 출전했을 때 울산의 모든 공격과 패스에 관여했고, 그의 발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마디로 울산에서 컨트롤 타워다. 서울과의 홈경기에서 그가 부상으로 교체아웃 되기 전까지 한상운 한경기 스페셜을 찍을 정도로 그는 서울에게 가장 위협적인 선수였다. 하지만 한상운이 부상으로 나가버리자, 울산의 빌드업과 공격은 매우 단조로워졌고, 매끄럽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후반 종료 직전에 역전패를 당했다. 인천 원정과 성남과의 홈경기에서도 그의 부재는 매우 컸다. 서정진이 한상운을 대신하여 교체로 나왔지만, 별다른 활약을 하진 못했다. 2선에서 중심을 잡아줄 선수가 없으니, 울산의 2선까지 무기력해졌고 후방에서 지나친 다이렉트 패스로 전방으로 연결시도하는 모습이 지속적으로 노출되었다. 애초에 서정진에게 한상운 같은 역할을 부여한다는 자체가 무리였다. 수원에서 뛸 당시에 서정진의 역할은 현재 코바나 김승준같이 측면에서 중앙으로 쇄도하거나 라인 브레이킹을 했었지, 오히려 한상운의 역할은 염기훈이 맡았다. 서정진 이외에 울산에 새롭게 합류한 서명원이나 베르나르도는 출전명단은 커녕 1군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얼굴이 되어가고 있다(2군경기 혹은 연습경기에서나 간간히 얼굴을 비추고 있다). 한상운이 부상으로 전력이탈한 것이, 도리어 윤정환이 야심차게 영입한 2선 자원들이 쓸모가 없게 되어버렸다는 것을 반증하는 듯한 모양새로 가고 있는 실정이다. 측면에서 강한 선수들은 많지만, 경기를 지배할, 혹은 조율할 선수는 막상 없다는 것이다. 마치 작년 이 때, 제파로프가 장기부상을 끊게 되면서 전력의 큰 누수가 발생했던 울산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제파로프가 빠지면서 윤정환은 플랫 4-4-2 로 김신욱-양동현 트윈타워를 앞세웠으나 상대방에게 쉽게 읽히는 단순한 공격패턴으로 무려 두 달 가까이 승리를 취하지 못했다(FA컵 제외). 불과 1년 전에 겪었던 일들을 잊었는지, 울산은 한상운이 빠지고 나서 마땅한 플랜B를 내놓지 못한 채 억지로 4-2-3-1 전술에 끼워맞춰서 경기를 풀어나가려고 하고 있다. 물론 그가 부상에서 복귀하는 것이 가장 최상의 시나리오겠지만, 한상운이 없을 시 이를 극복할 플랜B 전술은 필수다. 3.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는 마스다의 짝, 왜 신예들을 기용하지 않는가? 세번째 문제는 바로 울산의 중원이 아직까지도 헐거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인데, 마스다 치카시의 파트너를 아직까지 찾지 못한 게 원인이다. 마스다, 2013년 울산으로 이적하여 울산이 막판 레이스까지 리그 우승경쟁을 다투는 데 있어 실질적인 살림꾼 역할을 도맡았던 허리의 핵심인물이었고, 넓은 활동반경과 다양한 역할 소화가 가능한 미드필더다. 하지만 이전 감독이었던 조민국에 의해 J리그로 임대가는 신세가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울산에 복귀하니 이전 파트너였던 김성환이 상무 입대를 하게 되면서 허리를 구성하는 데 크게 차질이 생겨버렸다. 이에 윤정환은 지난시즌에 마스다의 파트너격으로 하성민과 구본상을 염두해두고 그들을 마스다의 짝으로 교차로 기용하는 방안, 또는 마스다의 체력 안배가 필요할 때 하성민-구본상 이라는 중원 조합을 내세웠었다.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윤정환의 선수구성은 완벽하게 실패했다. 그들이 마스다의 파트너로 뛰기에는 세밀하지 못하고, 불필요한 파울과 카드를 수집하면서 오히려 울산에게 더욱 더 위기를 초래했던 적이 많았다. 지난 시즌의 문제점을 인지했는지, 윤정환은 올시즌 하성민을 아예 벤치에서 대기시키고 구본상을 고정격으로 마스다의 파트너로 배치하였으나, 크게 효과는 없어보인다. 하성민과 구본상이 마스다의 파트너로 사실상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면, 울산은 다른 자원들의 활용가능성을 적극 고려할 때가 된 것이다. 먼저, 울산은 지난 시즌 강원으로부터 알짜배기 미드필더인 이창용을 영입했었고, 이창용은 출전할 때마다 자신의 몫 이상으로 중원에서 활력소가 되었고 때에 따라서는 마스다 못지 않는 전천후 미드필더의 모습을 보이며 공격 가담에도 일가견 있는 모습을 보였다. 이번 시즌에는 2선에 투입하여 공격력을 부각시키는 교체 멤버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창용이 오히려 뛰어할 자리는 2선보다도 중원인 3선이라고 본다. 동적인 마스다에 비해 구본상은 지나치게 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결정적인 순간 때마다 그가 보여주는 집중력이 떨어지는 점은 울산에게 경기 때마다 위기를 초래한다. 게다가 최근 활동반경과 시야가 넓지 못하다보니 지역 마크에 있어서 구본상이 유독 약한 면을 드러내고 있다. 진지하게 이창용을 교체가 아닌 선발로서 마스다의 파트너로 한 번 기용해볼만한 필요성이 있다. 그 외에 이번에 울산으로 새롭게 합류한 신인 김건웅에게 출전기회를 부여해보는 것도 생각해봐야 할 점이다. 김건웅은 울산 유스팀인 현대고 출신 선수로 이번 시즌에 대학교 무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프로팀에 합류한 유망주로, 센터백인 정승현처럼 향후 울산 중원의 미래를 책임질 자원으로 분류되고 있다. 얼마 전 인천 원정에서 교체투입으로 데뷔전을 치뤘다. 이처럼 기존 선수들의 기량이 예전같지 않다면,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할 것이다. 푸른 호랑이, 울산에게 과연 발전의 여지는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 울산이 승리를 거둔 팀들은 죄다 울산보다 객관적인 전력이 약한 팀들 위주였고, 유일하게 득점을 뽑은 경기가 이 경기들 뿐이었다. 지난시즌에도 하위스플릿으로 내려가는 굴욕을 겪었던 이유 중 하나가 강팀과의 경기에서 승점을 제대로 쌓지 못했고, 어이없이 패배한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이번 시즌 행보도 작년의 무기력한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어느덧 33경기 중 9경기를 치뤘고 리그 판도도 어느정도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는 서울과 전북은 벌써 저만치 벌어져가고 있고, 혼란스러운 중위권은 한경기 한경기 승패에 따라 판이하게 순위가 뒤바뀐다. 울산이 똑같은 사태를 겪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승리하는 법을 반드시 익혀야 한다.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안정적으로 지키는 경기도 중요하겠지만 절대 지켜서는 이기기란 어렵다.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의 골망을 흔들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공격적으로 상대방에게 덤벼들어야 한다. 윤정환은 지나치게 안정적으로 추구하려고 하는 경향이 강했고, 실제로 그런 안전지향주의로 인하여 손해봤던 승점들을 손으로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앞으로 울산의 행보를 결정짓는 데 있어 이번 달이 가장 중요한 달이다. 여기서 울산이 반전의 기회를 삼지 못하고 작년처럼 추풍낙엽처럼 무너진다면, 2012~2013년 시즌같은 영광으로 되돌리기란 더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K리그 응원문화의 새로운 한 획을 긋고 있는 그녀들, '울산 큰애기'
논쟁이 되었던 치어리더 문화 재도입, 실질적인 영향력은 미비 때는 2010년 시즌이 시작할 때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내 축구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간 N석과 S석으로 항변되던 서포터즈 대결구도식의 응원문화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K리그에, 일반석을 살리기 위한 방책으로 치어리더를 도입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치어리더 문화는 K리그의 서포터즈 라는 단체가 탄생하면서 자연스레 세력을 잃어갔고, 1990년대 후반에 치어리더는 피치에서 더이상 찾아볼 수 없었던 존재들이었으나, 10여년이 지난 2010년, 서포터즈 문화가 활성화되고 있는 K리그 바닥에 재등장한 셈이다. 이미 서포터즈 문화에 물들어버린 각 팀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다소 경계하는 야구의 응원문화를 왜 도입하느냐면서 자신들과 다른 응원방식에 융화되지 않기 위해 선을 그어버렸다. 게다가 각종 매체를 통해 접한 유럽식 서포터즈를 동경하는 분위기가 매우 강했던 국내 분위기였기에 성공보단 실패로 끝날 것이라는 분위기가 다수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수원과 서울, 포항 등 일부 구단들은 치어리더 팀을 만들어 관중석에 투입시키는 과감한 한 수를 던졌다. E석에 치어리더를 위한 단상까지 만들고 그들을 위한 존(Zone)까지 만들었다. 반대를 무릅쓰고 그들이 치어리더를 도입한 이유는 바로 극심한 흥행 부진이 원인이었다. 당시 K리그 관중은 전년도에 비해 13% 감소하는 굴욕을 겪었고, 관중 동원 1,2위를 자부하던 수원과 서울마저도 각각 22%, 19.6% 감소하면서 체면을 구긴 상태였다. E석을 활성화하여 일반관중 유치를 위해 갖가지 볼거리를 제공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클럽 프론트들이 골머리를 썩히는 또다른 이유는 바로 서포터석이라 불리는 N석과 일반관중들이 밀집한 E/W석과의 보이지 않는 벽이 너무나도 크다는 점이다. 서포터즈 문화의 정착은 분명 팀에 대한 팬들의 충성심을 높이고, 해당 팀을 위해 뛰는 선수들에게 더할 나위없이 좋은 활력제이지만, 클럽 입장에서는 서포터 뿐만 아니라 일반 관중 또한 놓쳐서 안될 부분이었다. 최원창 수원 커뮤니케이션팀 과장은 "야구팀의 롯데 자이언츠의 융합을 벤치마킹하여 모든 팬이 융화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밝혔고, 실제로 이것이 대부분 클럽들의 입장이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내가 수없이 경기장을 다니면서 목격한 치어리더들과 축구 경기는 서로 이질적으로 '따로따로 노는 분위기' 였다. 일단 서포터즈들이 사용하는 응원가나 치어리더들이 사용하는 응원패턴은 각개전투하는 것마냥 개인 플레이였다. 축구로 치자면 패스플레이가 전혀 안되는 모습이었다. 그렇다보니, 서포터즈와 일반 관중들의 거리가 좁아지기는 커녕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치어리더 활용이 제대로 되지 않자, 클럽들은 오히려 유명인사 등을 시축하게 하거나 하프 타임에 축하 공연을 가지는 등으로 마케팅을 하여 관중몰이를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반응일 뿐, 그 효과가 지속적인 흥행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렇게 치어리더 도입은 무관심 속에 묻혀가며, '실패' 로 확정되어가는가 싶었다. K리그 응원문화의 새로운 한 획을 그어버린 그녀들, '울산 큰애기' 2015년 연초, 지난시즌에 부진하여 부활의 해를 선포한 울산이 윤정환 체제로 바꾸면서 새롭게 도입한 부분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치어리더제 도입이었다. 그간 다른 K리그 클럽들이 연거푸 치어리더 제도를 도입했으나 실패한 사례들만 보여줬던 터라, 울산 팬들은 무의미한 곳에 자금을 투자한다면서 일종의 낭비로 판단하였다. 하지만 울산은 이전 클럽들이 치어리더를 도입했다가 실패한 선례를 제대로 학습한 것인지, 도입하는 부분에서 뚜렷하게 차별점을 두었다. 바로 치어리더들을 또하나의 독보적인 컨텐츠로 승화시킨 것이다. 여기서부터 울산은 다른 선상에서 출발하였다. 2015년 2월 중순, 울산 팬들 사이에서는 한 장의 프로필 사진이 SNS를 통해서 공유되었다. 바로 울산 치어리더로 '치어리더계의 슈퍼스타'로 불리는 김연정이 울산 유니폼을 입고 촬영한 사진이었다. 김연정, 프로야구팀의 NC 다이노스, KBL의 LG 세이커스의 간판이자, 박기량과 함께 치어리더계의 양대산맥으로 손꼽힐 만큼, 스포츠 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이슈메이커 그 자체인 여성이다. 호날두-메시 부럽지 않는 인기를 과시하고 있던 그녀가, 울산 치어리더의 메인 이벤터로 자리잡았으니, 울산의 치어리더는 단숨에 주목받기 시작했다. 울산은 김연정을 필두로 한화 이글스에서 활약하고 있는 조민지와 이은지 등까지 영입하면서 4~6인조로 활동하는 '울산 큰애기'를 창단하였다. '울산 큰 애기' 라는 이름은 마치 그녀들에 딱 어울리는 이름인데, 1966년 가수 김상희씨가 발표한 노래에서 따온 이름으로 '사랑스럽고 인물이 뛰어난 울산의 여인상(이렇게 표현하면 울산 사람들은 가장 먼저 울산의 자랑인 김태희를 떠올린다)'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울산 큰애기는 울산의 홈개막전을 앞두고 실제로 길거리로 나가서 손수 전단지를 돌리면서 경기를 홍보하면서 단순히 경기장에서만 활동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켜주었다. 그리고 서울과의 홈개막전이 열렸던 3월 8일 일요일, 울산이 문수 E석에 새로이 창설한 익사이팅존에 그녀들이 등장하자, 울산의 서포터인 처용전사들의 시선까지 빼앗아갔다. 피치 위에서는 절대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치어리더계의 연예인들이, 이웃 관중석에 등장했으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날 하프타임 때 울산 큰애기의 축하공연이 펼쳐지는 동안, 처용전사는 물론이겠거니와, 멀리 서울에서 원정온 서울 팬들마저 하프라인을 향해 넋놓고 지켜봤다고 한다. 그리고 울산이 개막전 승리를 거두었는데, 개막전 승리 못지 않게 울산 큰애기의 언론 노출도 제법 상당했다. 2010년 치어리더 재도입 이후, 축구장의 치어리더들이 이정도로 주목받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타팀 축구팬들까지도 울산 큰애기가 소문이 났다. 울산팬들 입 사이로 자주 오르내리는 울산 큰애기가 워낙 궁금해서 나 또한 지난 5월 황금연휴 때를 이용하여 문수경기장에서 열리는 동해안더비를 보러 직접 울산까지 내려갔었다. 그 당시 울산은 동해안더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부가적으로 울산 큰애기가 경기의 중요성과 비례하여 최정예 멤버 6인조로 출격한다는 홍보까지 하면서, 한동안 SNS와 온라인에서 축구팬들의 반응을 유도했고, 나더러 직접 사진을 찍어와라, 동영상 찍어와라는 식의 부탁을 했던 익명의 지인까지 있었다. 그래서 직접 울산 큰애기를 익사이팅 존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로 본 소감은, "아! 얘네 너무 좋다!" 로 어느 순간에 바뀌어버렸다. 치어리더 문화에 부정적이었던 나도 느끼지 못한 사이 어느 순간에 긍정천사로 바뀌어 있었다. 경기 끝나고 치어리더 조민지가 누군지에 대해 검색하는 나 자신이었고, 옆에서 나와 같이 경기 보러왔다가 울산 큰애기 사진만 수백장 찍은 지인도 막상막하였다. 사상 최초(?) K리그 원정 치어리더로 발돋움한 울산 큰애기 비록 동해안 더비는 2대2 무승부로 승부를 가르지 못했고, 울산은 8경기 연속 승리를 달성하지 못하는 부진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산 내에서 반응은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물론 구단 게시판 내에서 성적 부진을 놓고 끝없는 논쟁을 펼치는 양측 구도(좀 더 지켜봐야한다 vs 이대론 안된다)의 대립은 여전했지만서도 말이다. 동해안 더비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울산은 서울 상암 원정경기에 울산 큰애기를 대동한다는 내용을 SNS로 홍보하였고, 이것은 다소 구단의 신선한 시도였다. 내가 다른 클럽들이 치어리더 운영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자세하게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나의 지인들 사이에서 치어리더들이 원정길에 올랐다는 소식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이러한 홍보 자체가 팬들에게는 또다른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가 되었다. 요즘 괜히 K리그 클래식 팀들 중 울산이 독보적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런 부분이 아닐까 싶다. 내친 김에 5월 31일 일요일, 나는 축구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하는 내 동생을 억지로 끌고 상암 경기장을 방문했다. 경기 시작은 오후 4시였지만, 나는 한 시간 일찍 원정석으로 입장하였고, 내가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울산 큰애기 2명(김주하, 송재경)이 도착했다. 처용전사들이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고, 일반 울산을 응원하는 관중들도 띄엄띄엄 들어오니 그녀들 또한 다소 어색하고 뻘쭘해보였다. 하지만 서포터즈들이 도착하여 S석을 채우기 시작하면서 그녀들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경기 시작 전에 서포터즈와 함께 원정석을 찾아준 일반 관중들에게 응원용 부채와 유니폼을 나눠주고, 폴라로이드로 같이 즉석 사진을 찍으면서 팬들과 상당히 가깝게 다가갔다. 난생 처음, 그것도 원정석에서 서포터즈와 치어리더가 한 공간에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융화되는 모습이 어색하면서도 놀라웠고, 한 편으로는 좋아보였다. 하프타임 때 서울 측에서 자신들의 팬들을 대상으로 이벤트하는 동안, 원정석에서는 치어리더들이 소소하게 호응 좋은 사람들에게 사인볼과 유니폼을 나눠주는 행사를 하면서 일반 팬과 서포터즈, 치어리더들이 한 데 어울리는 광경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좋은 반응을 유도하고 있었으니, 원정석에서 대기하던 기자들이나 방송국에서도 신기한듯 계속 자신들의 프레임에 담아갔다. 경기는 0대0 무승부로 끝나, 울산은 9경기 연속 무승을 거두면서 아직까지 살아나기엔 다소 힘이 부치는 모습을 보였고, 윤정환 감독에게도 상당히 고민거리가 되는 경기로 남았다. 하지만 경기 내용과 관계없이 S석은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처용전사들은 경기 끝나고 자축하는 의미에서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있다가, 함께 했던 여리한 울산 큰애기 2명과도 단체사진을 찍었다. 찍은 사진을 보았을 때, 누가 치어리더이고 서포터즈인지 구분하기가 조금 힘들었지만, 서포터즈나 치어리더나 양 측 다 한 켠의 좋은 추억거리로 남았고, 이것을 계기로 치어리더가 결코 K리그 응원문화에 마이너스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런 반응이 바로 울산보다 먼저 치어리더를 도입하였던 클럽들이 바라던 게 아니었을까? 이미 K리그 응원문화는 어여쁜 여성들로 이루어진 '울산 큰애기' 이전과 이후로 한 차례 변화하고 있고, 이것은 알게 모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이미 어느 한 기자는 원정 온 울산 큰애기를 주제로 한 기사까지 냈다. 원문 : http://blog.daum.net/manutdronaldo/6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