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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경이 쓴 <어른의 어휘력>을 읽고 있다. 저자는 문장을 이어나가며, 중간중간 재밌는 단어들을 소개하고 활용하는데 그중 유독 신선했던 것은 ‘잠포록하다’라는 말이었다. 이런 단어는 정말이지 처음 들어본다. 그리고 예쁘다. 심지어 뜻조차도. “날이 흐리고 바람기가 없다”라는 뜻이다. 나는 볕 드는 맑은 날도 좋아하지만, 흐리고 궂지 않은 날도 좋아한다. 바람이 없고, 흐리지만 선명하며, 그래서 전에 없이 차분해지기도 하는 그런 날. 그게 바로 잠포록한 날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여태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날씨를 표현하기 위해 많은 부연이 필요했다. 내가 좋아하는 날에 드디어 이름을 붙여줄 수 있게 되었다. 잠포록한 날. 나는 잠포록한 날을 좋아한다. 오늘은 비가 올 듯 말 듯 날이 흐린데, 얼핏 잠포록한 날로도 보이지만 언제든 빗방울이 울컥 쏟아질 것 같기도 하고, 미약하나마 찬 기운을 얹은 바람이 느껴져 잠포록하다 하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습작 시절에는 눈에 띄는 단어가 있으면 섣불리 시에 써버리고는 했다. 그러나 그건 단어를 내 것으로 채 만들지 못하고 쓴 것이라 영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잠포록한 날이 드문드문 찾아올 때 이름을 불러주고, 또 누군가에게 그런 날을 소개하고, 그날의 이름을 소개하며 온전히 내 마음에 새겨지면, 어느 시구 사이에 이 예쁜 단어를 가만히 올려놓고 음미해보고 싶다.
드로잉 끝판왕이라는 평가를 받은 한국인 만화 작가
무라타 유스케라는 일본 만화 작가가 있는데 현지에서는 '노력하는 천재' 라는 소리를 들음  이 사람 드로잉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냥 연재하는 만화 컷들을 연속으로 슬라이드 배치하면 애니메이션이 될 수준임  채색능력도 엄청나서 소년점프 2000호 기념 한정 컬러 포스터를 두 번이나 맡았는데 서로 다른 만화의 주인공들을 각 작품의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그림체를 덧씌운 고퀄리티 작품을 뽑아 냈음  G펜과 마카를 이용한 수작업만 고집하는 방식으로 그런데 이런 완전체 같은 능력치를 가진 무라타 유스케가 '이런 사람이 천재구나' 라고 생각하고 교류를 시작한 만화가가 있으니  김정기라는 사람임  G펜과 마카를 애용하는 무라타 유스케처럼 이 사람은 붓펜이나 붓을 주로 사용하는데 작업 과정을 보면 천재가 누군가를 천재라고 부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됨  블리자드와 콜라보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드로잉 마블 스탭들 앞에서 직접 시연한 시빌워2 드로잉  안시성 개봉 당시 콜라보레이션 이 영상을 본 사람 중 몇 명은 영화보다 드로잉이 더 기억에 남는다고 ..  삼일절 기념 드로잉  지금은 전세계 돌아다니면서 드로잉 쇼도 하고 간간이 방송출연도 하는 중 출처 : 더쿠 개인적으로 김정기 작가님의 드로잉은 정말 경이롭다고 생각합니다 *_* 위 동영상들을 봐도 충분히 그렇다고 생각하실 듯 . . 정말 어마어마한 재능을 가진 작가님이시죠 ! 추가로 몇가지 드로잉을 더 올려볼게요 - 영상도 꼭 꼭 보시길 바라요 :) 압도적인 드로잉 실력에 감탄을 연발하실듯 해요 어떻게 밑그림도 없이 이렇게 완벽한 그림을 그려내시는지 . . 이미지 출처 : 구글, 핀터레스트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 현황 및 전시일정
이중섭의 '흰 소' (1953~54)  - 현존하는 이중섭의 '흰 소'는 약 5점뿐이다.  - 기증 작품은 1972년 개인전과 1975년 출판물에 등장했으나 자취를 감췄다가 이번 기회에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됐다. 이중섭의 '황소' (1950년대)  - 삼성가에서도 아끼던 작품으로 그의 부산시절 가장 중요한 작품. 이중섭의 '바닷가의 추억_피난민과 첫눈' (1950년대) 청전 이상범의 '무릉도원도'(1922)  - 존재만이 알려진 작품이었으나 이번 기증으로 약 100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 1980년대 이후 실제로 보기 어려웠지만, 다시 감상할 기회가 마련됐다. 김환기의 '산울림 19-II-73#30' (1973)  - 국립현대미술관에는 김환기의 예술적 기량이 절정에 달한 1970년대 전면점화는 한 점도 없었다. 나혜석의 '화녕전작약'(1930년대)  - 나혜석 작품 진위평가의 기준. 장욱진의 '소녀(전면)/나룻배(후면)' (1939/1951) -  작품 뒷면에는 1939년 그린 ‘소녀’가 있다. 재료가 부족했던 시기여서 양면에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장욱진의 '공기놀이' (1937)  - 양정고보 재학 중 제2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최고상을 받은 작품. 여성 화가 백남순의 '낙원'(1937)  - 백남순의 유일한 1930년대 작품. 김종태의 '사내아이'(1929)  - 총 4점만 전해지는 김종태의 유화 중 1점 박래현의 '여인 A'(1942) 클로드 모네의 '수련' (1919~20) 파블로 피카소의 '무제(도자기)' 호안 미로의 '구성' (1953) 마르크 샤갈의 '붉은 꽃다발과 연인들' (1975) 폴 고갱의 '무제' (1875) 카미유 피사로의 '퐁투아즈 시장' (1893)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책 읽는 여인' (1890년대)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 (1940)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1954) 김기창의 '군마도'(1955)   - 한국전쟁이 끝난 후 폐허를 딛고 재개된 1956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추천위원 자격으로 이 작품을 출품. 노수현의 '계산정취'(1957) 김은호 '간성(看星)'(1927)  외 다수 작품 ------- 한국 근현대미술 작품 유영국187점(회화 20점, 판화 167점), 이중섭 104점(회화 19점, 엽서화 43점, 은지화 27점 등), 유강열 68점, 장욱진 60점, 이응노 56점, 박수근 33점, 변관식 25점, 권진규 24점 등 한국 근현대미술 작가 238명의 작품 1천369점  - 1950년대까지 제작된 작품이 320여 점으로 전체 기증품의 약 22%  - 1930년 이전 출생해 근대작가 범주에 들어가는 작가 작품이 약 860점으로 약 58% ------- 해외 거장 작품 모네, 고갱, 피카소,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마르크 샤갈 등 외국 근대작가 8명의 작품 119점  - 국립현대미술관 역사상 처음으로 소장하게 됨 전시일정 덕수궁관 ・2021년 7월 '한국미, 어제와 오늘'  - 도상봉의 회화 등 일부 작품 첫선 ・2021년 11월 '박수근 회고전' ------- 서울관 ・2021년 8월  '이건희 컬렉션 1부: 근대명품'(가제) 전  - 한국 근현대 작품 40여 점 전시 예정. ・2021년 12월 '이건희 컬렉션 2부: 해외거장'(가제) 전  - 모네, 르누아르, 피카소 등의 작품 전시 예정. ・2022년 3월 '이건희 컬렉션 3부: 이중섭 특별전'  - 이중섭의 회화, 드로잉, 엽서화 104점 전시 예정. ------- 과천관 ・2022년 4월 / 2022년 9월 '새로운 만남'  - 이건희 컬렉션과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및 아카이브의 새로운 만남을 주제로 한 전시 예정. -------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뮤지엄(LACMA) ・2022년 9월 한국 근대미술전  - 이건희 컬렉션 중 일부를 선보여 수준 높은 한국 근대미술을 해외에 소개할 계획. ------- 청주관 수장과 전시를 융합한 '보이는 수장고'를 통해 이건희 컬렉션 대표작들을 심층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할 예정. ------- 2022년 지역 미술관과 연계한 특별 순회전 개최. 출처
전세계를 매료시키는 한국의 아름다운 풍경들
오늘 보여들 사진작품들은 2013년 8월 12일 미국 CNN Travel에서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 40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외국 사진 작가들의 작품입니다 *_* 아름다운 사계절의 자연경관을 즐길 수 있는 우리나라, 찾아보면 아직 가보지 못한 곳들이 굉장히 많은데 국내여행은 별로 ! 라는 생각으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모습을 잊고 지내지 않았나 싶어요 :) 특히나 제주도의 풍경을 많이 보이네요 . 그래도 나름 제주도를 많이 다녀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진 속의 제주도는 제가 알던 제주도와는 또 다른 매력을 뽐내는 것 같아서 새로운 기분도 들고요 ㅎ_ㅎ 올 겨울 여행의 계획을 아직 짜지 못하셨다면 아래에서 Pick !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 자 해외 사진작가들의 시선에서 바라 본 우리나라 <3 그 아름답고 경이로운 자연풍경 속으로 함께 빠져보실까요 ? 40위 사릉 (Sareung)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 조선 제6대왕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이다. 39위 삼부연폭포 (Sambuyeon Falls) 위치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 높이 20m의 폭포로 폭포수가 높은 절벽에서 세 번 꺾여 떨어지고 세 군데의 가마솥 같이 생긴 못이 있다고 하여 삼부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38위 남한산성 (Namhansanseong Fortress) 위치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년)에 축성하였다. 37위 선정릉 (Seonjeongneung) 위치 :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서울에 있는 조선 왕릉으로 삼릉공원이라고도 불린다. 선정릉에는 성종 왕릉과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의 능, 그리고 중종 왕릉인 정릉이 모여 있다. 36위 창녕교동고분군 (Gobungun, Changyeong) 위치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리 가야시대 고분군으로 교동고분군은 목마산 북서쪽 기슭에 있으며 인접한 송현동고분군과 함께 창녕읍 교리 일대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35위 안압지 (Anapji Pond) 위치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신라시대 때의 연못으로 연못 기슭과 섬에 실시된 호안공사는 정교하고 도수로와 배수로의 시설도 또한 교묘하다. 34위 경복궁 근정전 (Geunjeongjeon, Gyeongbokgung)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1 경복궁의 중심이되는 정전이며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33위 창경궁 (Changgyeonggung)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조선시대 궁궐로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건물이다.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32위 인왕산 (Inwangsan)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 3-1 서울 종로구와 서대문구 홍제동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 338.2m이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된 서울의 진산 중 하나이다. 31위 종묘 (Jongmyo Shrine)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 조선시대 역대의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가의 사당이다. 30위 고창고인돌 (Gochang Dolmen site) 위치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인돌 무리 전북 고창은 인근 화순, 인천 강화와 더불어 이름난 고인돌 분포지역이다. 29위 왕궁리 (Wanggungri) 위치 :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는 사적 제408호로 지정된 익산 왕궁리 유적이 남아 있다. 왕궁리성지 라고도 부르며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다. 28위 서울성곽 (Seoul Seonggwak Fortress Wall)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서울성곽은 조선을 세운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전쟁을 대비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거나 도적을 방지하기 위해 쌓은 시설이다. 27위 강릉안반데기 (Gangneung Anbandeok) 위치 :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강원도 고랭지의 감자밭과 배추밭을 감상할 수 있는 안반데기 마을은 평창군 대관령면과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사이에 놓인 피동령이라는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 봄이면 감자밭, 가을이면 배추밭으로 뒤덮인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 26위 광안리 (Gwanggalli) 위치 : 부산광역시 수영구 광안2동 부산을 상징하는 장소로 모든 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바닷가이다. 25위 소양호 (Soyang Lake) 위치 :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1973년 소양강을 막아 만든 소양댐으로 생겨난 국내 최대의 호수로 ‘내륙의 바다’라 일컬어진다. 24위 우포늪 (Upo Wetlands) 위치 : 경상남도 창녕군 유어면 우포늪길 220 ‘생태계의 고문서’, ‘살아 있는 자연사 박물관’이라 불리는 우포늪은 우리나라 최대의 자연 늪지다. 23위 합천다랑논 (Hapcheon daraknon) 위치 :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은 아름다운 산과 사찰로 유명한 곳이지만 층층으로 되어 있는 다랑논도 멋진 풍경이다. 22위 부석사 (Buseoksa) 위치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이다. 21위 금산보리암 (Geumsan Boriam) 위치 :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남해 금산 정상에 위치한 보리암은 신라시대 638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국내 3대 관음성지이다. 20위 돌산대교 (Dolsan Bridge) 위치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전라남도 여수시 남산동과 여천군 돌산읍 우두리를 연결하는 다리로 1980년 12월에 착공하여 1984년 12월에 완공되었다. 19위 안동하회마을 (Andong Hahoe Village) 위치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종가길 40 한국의 대표적인 민속마을로 2010년 8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8위 오작교 (Ojakgyo) 위치 :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 전라북도 남원 광한루에 있는 석재로 된 다리이다. 17위 비양도 (Biyangdo)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제주도 서쪽, 협재해수욕장에서 바로 앞으로 보이는 작고 아름다운 섬이다. 16위 삼화사 (Samhwasa) 위치 : 강원도 동해시 무릉로 584 강원도 동해시 두타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15위 함덕 (Hamdeok)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리로 중산간지역에 자리한 마을이다. 물이 부족하여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14위 협재해변 (Hyeupjae Beach)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 한림읍 서해안 지대에 위치하며 조개껍질이 많이 섞인 은모래가 펼쳐진다.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하다. 13위 마라도 (Marado)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리 우리나라 최남단의 섬으로 대정읍 모슬포항에서 남쪽으로 11㎞, 가파도에서 5.5㎞ 해상에 있다. 12위 용화해변 (Yonghwa Beach) 위치 :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용화해변길 자그마한 해변이 반달처럼 휘어져 아담하며, 해변 뒤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양쪽 끝은 기암절벽으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11위 세화해변 (Sehwa Beach)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코발트 빛깔의 맑은 바다가 아름다운 곳으로 인파로 붐비지 않아 아직 자연 그대로의 깨끗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10위 송악산 (Songaksan)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81미터 높이의 산으로 저벼리 또는 저별악이라고 한다. 해안에 접한 사면이 벼랑이고, 위는 평평하다. 9위 우도 (Udo)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우도면 제주가 품고 있는 섬 속의 섬이다. 종달리 해안가에서 바라보면 마치 소 한 마리가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8위 용두암 (Yongduam)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 용연 부근의 바닷가에 용머리의 형상을 하고 있는 이 바위의 높이는 약 10m에 이르며,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이다. 7위 천지연폭포 (Cheonjiyeon Falls)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천지동 제주도에는 폭포가 많은데 그 중 규모나 경관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관광객의 발길이 가장 많이 머무는 곳이다. 6위 토끼섬 (Tokkiseom)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하도리 해안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간조시에는 걸어갈 수 있는 섬이다. 현재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지만 토끼섬의 비경을 감상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탐방객들이 찾기도 한다. 5위 영암 (Yeongam) 위치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동쪽은 장흥군, 남쪽은 해남군, 강진군, 북쪽은 나주시와 접한다. 남동쪽 군계를 중심으로 월출산이 천황봉을 최고봉으로 구정봉, 사자봉 등 많은 봉우리를 일으키면서 기암절벽을 이룬다. 4위 만어사 주변 (Miryang Maneosa) 위치 : 경상남도 밀양시 만어산 전설에 의하면, 만어사는 46년(수로왕 5)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대웅전, 미륵전, 삼성각, 요사채, 객사가 있으며 보물 제466호로 지정된 3층석탑이 있다. 미륵전 밑에는 고기들이 변하여 돌이 되었다는 만어석이 첩첩이 깔려 있는데 두드릴 때마다 맑은 소리가 나기 때문에 종석이라고도 한다. 3위 성산일출봉 (Seongsan Sunrise Peak)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 거대한 성과 같은 봉우리로 제주도 동쪽 바닷가에 솟아 있는 해발 182m의 수중 화산체이다. 10만년 전 제주에서 생겨난 수많은 분화구 중 유일하게 바다 속에서 폭발해 만들어졌다. 2위 창덕궁 (Changdeokgung)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1405년(태종 5)에 지어진 조선시대의 궁궐로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고궁들 중 하나이다. 1위 한라산 (Halla Mountain)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해안동 제주특별자치도 중앙부에 솟아 있는 산이다. 높이 1,950m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전문가가 대한민국 국보 중의 국보 중의 국보라고 하는 문화재.jpg
다른 사람도 아니고 관련 전문가가 국보 중의 국보 중의 국보라고 하는 유물. 과장이나 호들갑이 아니라 진짜 원 오브 카인드라 말하는 유물이란 무엇일까. 그것을 알려면 1993년으로 돌아가야 함. 1993년 부여 능산리 문화재가 가장 없을 만한 곳에 주차장 짓기로 결정 주변 다 파보고 검사했는데 없어서 승인됨. 발굴단 중 한 명이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함. 한번만 더 파보자라고 공무원에게 필사적으로 요청함. 원래 규정되면 이미 승인되서 윗사람들까지 결재 땅땅 받은 거라 NO인데 갑자기 우주의 기운이 이상하게 몰렸는지 당시 부여군청 문화재관리국 기념물과 담당자가 오케이 해봅시다! 이러고 무리해서 예산까지 따로 때줌. 그리고 땅을 파보는데.. 갑자기 진흙 속에서 이게 나옴 전에 이런 유사한게 한번도 없어서 발굴 당시에 뭔지 아무도 모름 보름동안 유물처리 끝에 발굴단은 엄청나게 경악함. 백제 금동 대향로 무려 1300년전 향로가 완벽한 형태로 보존된 유물인 것. 1300여 년을 당 속에 있었지마 진흙이 완벽한 진공상태를 만들어줘 녹이 슨 흔적조차 없었다. 당시 학자는 이 유물 하나가 무령왕릉 발굴 전체와 맞먹는 고고학적 대발견이다 할 정도 당나라에 의해서 사비 백제가 멸망할 때 이름 없는 한 명의 백제인이 목숨을 걸고 보물을 보호하다, 진흙 속에 파 묻은 것이라 한다. 이것이 천년이 지나 우연하게, 그것도 완벽하게 보존된 상태로 후손에게 발견된 것. 수은과 금을 이용한 도금법인 ‘수은아말감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서양보다 천년이나 앞선 기술이었음. 정밀하고 화려한 백제 문화재 중에서도 초초초초고난이도의 작품으로, 동시대에도 견줄만한 작품이 없음. 이것을 만든 사람은 삼한 중에서도 미켈란젤로에 해당하는 초특급 천재일 것으로 추정. 1300년전 유물이 어디 손상된 곳없이 완벽하게 보존된 지금의 자태를 보노라면 나라가 멸망하고 온 도시가 불타고 사람들이 죽느 ㄴ와중에 무명의 한 백제인이 왜 목숨을 걸고 이것을 보호하여 진흙속에 파 묻었는지 알 것 같음. 정말 우연의 우연의 우연의 연속과 행운이 겹쳐서 발견된 유물. 발견될 때 섬유 조각과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금동대향로를 감싸서 묻은 흔적이라 추정된답니다. 즉 우연하게 던져졌거나 난리중에 떨어져 간게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파묻어 숨겨둔 것. 현재로 소개할 때 학자가 국보중의 국보중의 국보라고 말하는 그것. 백제 금동대향로. 출처 도탁스 향피우는 장면도 추가해봅니다. 정말 예술이네요..
한때 20대 이상의 커뮤니티를 휩쓸었던 작자 미상의 먹먹한 글 세 편 (스압주의)
1. 그 해 새벽 내가 살던 고향은 새벽이 유난히 짙었다. 동네 옆구리에 낀 바다가 새벽만 되면 해모(안개)를 짙게 끌어올렸다.  해모가 내려앉은 조용한 새벽의 동네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 녀석과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새벽이 되면 아파트 입구에서 만나 시덥지않은 놀이를 즐겼다.  하늘에 뜬 별을 누가 먼저 세나, 주차된 자동차들의 번호판에 숫자 7이 몇개나 있을까 같은.  우리는 그저 우리의 새벽이 해모에 잡아먹히는 것이 싫었다.  나와 그녀석은 아주 어렸을 때 부터 빤스 한장만 걸치고 동네 절에서 찬물로 등목을 하며,  법당에 놓인 다과를 몰래 집어먹고 놀았다.  절 한 가운데에 위치한 아주 커다란 종이 있었는데, 햇볕이 뜨거운 날이면 그 안에 들어가 종 벽에 기대어 노래를 불렀다.  무슨 노래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녀석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다 떨어진 슬리퍼를 신고 동네 여기저기를 쏘다녔는데,  고모는 항상 그 모습을 보고 녀석과 놀지 말라고 나를 꾸지람 했다.  나는 오히려 그녀석의 다 떨어진 슬리퍼가 좋았다.  만약 녀석이 때깔 고운 나이키 운동화를 신었다면, 나는 녀석을 좋아하지 않았을 거다.  내 신발은 항상 메이커가 없는 얇은 운동화 였으니까.  너희 엄마 창녀야? 그날은 처음으로 그 녀석에게 돌맹이로 얻어맞은 날이었다.  어느날 늦은 밤에 큰 상가 뒷골목에서 그 녀석 엄마를 본적이 있었다.  빨간 불빛이 새어나오는 유흥주점 앞에서 목욕탕에서나 쓰는 플라스틱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그 다음날 그 녀석을 보자마자 나도모르게 저 말이 튀어나왔다. 녀석은 힘도 셌다.  돌맹이를 맞고 씩씩대는 나를 크게 넘어뜨리고 도망가는 녀석을 우리 오빠가 잡아다가 한바탕 패주었다.  그날 저녁 나는 집에 들어가 되려 오빠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곤 저녁밥을 먹고서 몰래 나가 아파트 입구에서 새벽이 될 때 까지 그녀석을 기다렸다.  그 때 나는 아홉살이었다.  나는 열아홉이 될 때 까지도 늘 같은 자리에서 그 녀석을 기다렸다.  십년이 넘도록 우리의 새벽은 여전히 짙었다.  우리는 항상 손을 잡고 바닷가를 뛰어다니며 온 몸에 해모를 묻혔다.  나는 그게 사랑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늘 어렸다. 그리고 우리는 늘 새벽이었다.  나른한 오후에 한수원 사택 옥상에 몰래 올라가 햇볕을 맞으며 선처럼 가만히 죽은 듯이 누워있을 때에도,  우리는 새벽이었다.  나는 가끔 우리가 혹시 남매는 아닐까 생각했었다. 녀석에게 그걸 말 했을 때 녀석은 크게 웃기만 했다.  나는 분명히 그 녀석이 속으로 '그래 그럴지도 몰라'라고 생각했다고 믿었다.  고삼의 반틈을 그녀석과 새벽을 즐기는 것으로 보내고,  우리가 무얼 하며 돈을 벌어먹고 살지 고민하게 된 것은 여름의 한복판 이었다.  그해 여름엔 비가 많이 왔다. 어쩌면 올해 여름이 우리 인생일지도 몰라. 내가 말했다.  그 녀석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녀석은 노래를 하고 싶어했다.  솔직히 그녀석의 노랫소리는 언제나 듣기 좋았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나는 녀석에게 우리가 놀던 절에 가자고 졸랐다. 햇볕이 뜨거우니, 종 안으로 들어가자고.  그 녀석은 내가 알아 듣지 못하는 외국 노래를 계속해서 불렀다.  종 벽에 기대면 종의 반 허리 에도 안 닿던 우리 키가 10년 새에 종 끄트머리까지 부딪칠 정도로 자랐다.  우리는 무릎을 굽혀 불편한 모양새로 좁은 종 안에 찌그러져 있었다. 그녀석은 불편한 기색도 없이 노래를 불렀다.  그녀석은 나의 제국이었다. 나는 녀석을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신앙했다.  녀석에게서 어떤 감정에 대한 대답을 한번도 듣진 못했지만  그녀석도 분명히 날 사랑하고 있을거라고 한번도 믿지 않은적이 없었다.  손을 잡고 새벽의 해모 속을 달리는게 사랑이라고 믿었으니까.  우리는 그 후에도 이따금씩 새벽에 만났다.  하루는 동네 통닭집 오토바이를 몰래 훔쳐다가 바닷가를 밤새 달리기도 했고,  한벌뿐인 교복을 입은 채로 얕은 바다에 들어가 뻘에 박힌 조개를 주웠다.  용돈이 넉넉해서 남자친구 여자친구를 여유롭게 만나고,  비싼 레스토랑 음식을 먹으며 부모님 눈을 피해 여관방에 들락거리는 한수원 사택 애들보다는 우리가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서른살이 될 때 까지 서로 결혼을 못했다면 그땐 나랑 결혼하자.  졸업식을 앞둔 어느날에 내가 말했다.  나는 돈도 엄청 많고 화장실이 세개 있는 집에 사는 몸매 좋은 여자랑 결혼할거야. 서른이 되기 전에는 꼭.  그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처음으로 죽고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졸업식날 까지 우리는 한번도 새벽에 만나지 않았다.  졸업을 하자마자 그녀석은 한수원에 취직했다. 보수가 꽤 많은 모양이었다.  내가 번화가로 일을 하러 나갈 때 마다 가끔씩 녀석을 마주쳤다.  옷도 좋은 옷을 걸치고 핸드폰도 고장나지 않은 최신 핸드폰을 가지고 다녔다.  적어도 녀석이 가난하게 살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다음해에 호주로 떠났다. 어느정도 자리가 잡힌 아버지가 나와 오빠를 데려갔다.  호주에 산지 3년이 지나도록 나는 한국어밖에 할 줄 몰랐다.  만일 그녀석이 열아홉때 종 안에서 불렀던 노래의 구절이 생각났다면, 영어를 좀 더 열심히 공부했을지도 모르겠다.  스물다섯살이 되던 해, 동창의 동창을 건너 건너 받은 고등학교 동창회 소식에,  주저 없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당연히 그녀석을 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새벽이 없어진지 자그마치 5년이었다.  5년.  동창회의 밤이 깊어갈 수록 비만 줄기차게 내렸고, 그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날에서야 전해들은 이야기로 알았다. 내가 몇주 전 아침 호주인들과 답답한 아침식사를 하고 있을 때,  그 녀석은 원자로 안에서 냉각수를 몸에 적시며 일했다.  그 녀석은 피폭(被曝)되었다.  호주로 돌아가고 싶었다. 녀석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새벽은 오늘도, 내일도 돌아온다.  정확히 말하면, 도망치고 싶었다.  우리의 관계가 시간이라면 우리는 새벽 세시였다.  하루 중 가장 어둡고 짙을 때 우리는 적어도 사랑은 아닐지라도 교감했다.  나는 한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석 처럼 불행 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함께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멍청한 기대도 한 적 없다. 그래도 이건 아냐.  내가 그 뒤로 그 녀석의 죽음 소식을 들을 때 까지 녀석을 한번도 찾아가지 못한 이유는,  우리는 새벽에 함께 있어야 비로소 사랑을 하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이제 영영 새벽을 달릴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그래서 나도 아팠다.  누군가를 아픔으로 보듬고 슬픔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지독한 일이었다.  행복의 원칙은 의외로 간단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불행이 생기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나 그 행복의 원칙이 태어날 때 부터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그녀석이었고, 녀석을 사랑한 나였다.  그 녀석은 피부가 뒤집어지고 머리털이 다 빠진채 암세포에 온몸을 잡아먹혀 죽어갔다.  그 녀석이 가장 행복했을 때는 언제일까.  아마도, 그 해 여름에 종 안에 들어가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 노래를 불렀을 때라고 믿고싶다.  서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그 녀석은 내가 가보지 못한 세계 어딘가에서 화장실이 세개 있는 집에 사는 몸매 좋은 여자와 결혼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녀석의 제국은 이제 군주가 없고, 새벽의 해모를 맞으며 뛰어다니는 고등학생도 없고,  종 안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없지만 내가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는 아직도 종 안에서 그 해 새벽을 달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발견했다. 대못으로 날카롭게 긁어 놓은 녹슨 낙서 자국을 종 안에서.  '새벽으로 가자'  2. 그 애 우리는 개천쪽으로 문이 난 납작한 집들이 게딱지처럼 따닥따닥 붙어있는 동네에서 자랐다. 그 동네에선 누구나 그렇듯 그애와 나도 가난했다. 물론 다른 점도 있었다. 내 아버지는 번번히 월급이 밀리는 시원찮은 회사의 영업사원이었다. 그애의 아버지는 한쪽 안구에 개눈을 박아넣고 지하철에서 구걸을 했다. 내 어머니는 방 한가운데 산처럼 쌓아놓은 개구리인형에 눈을 밖았다. 그애의 어머니는 청계천 골목에서 커피도 팔고 박카스도 팔고 이따금 곱창집 뒷방에서 몸도 팔았다. 우리집은 네 가족이 방두 개짜리 전세금에 쩔쩔맸고, 그애는 화장실 옆에 천막을 치고 아궁이를 걸어 간이부엌을 만든 하코방에서 살았다. 나는 어린이날 탕수육을 못 먹고 짜장면만 먹는다고 울었고, 그애는 엄마가 외박하는 밤이면 아버지의 허리띠를 피해서 맨발로 포도를 다다다닥 달렸다. 말하자면 그렇다. 우리집은 가난했고, 그애는 불행했다.  가난한 동네는 국민학교도 작았다. 우리는 4학년때 처음 한 반이 되었다. 우연히 그애 집을 지나가다가 길가로 훤히 드러나는 아궁이에다 라면을 끓이는 그애를 보았다. 그애가 입은 늘어난 러닝셔츠엔 김치국물이 묻어있었고 얼굴엔 김치국물 같은 핏자국이 말라붙어있었다. 눈싸움인지 서로를 노려보다가 내가 먼저 말했다. 니네부엌 뽑기만들기에 최고다. 나는 집에서 국자와 설탕을 훔쳐왔고, 국자바닥을 까맣게 태우면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사정이 좀 풀려서 우리집은 서울 반대편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친척이 소개시켜준 회사에 나갔다. 월급은 밀리지 않았고 어머니는 부업을 그만두었다. 나는 가끔 그애에게 편지를 썼다. 크리스마스에는 일년동안 쓴 딱딱한 커버의 일기장을 그애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애는 얇은 공책을 하나 보냈다. 일기는 몇 장 되지 않았다. 3월4일 개학했다. 선생님한테 맞았다. 6월1일 딸기를 먹었다. 9월3일 누나가 아파서 아버지가 화냈다. 11월4일 생일이다. 그애는 딸기를 먹으면 일기를 썼다. 딸기를 먹는 것이 일기를 쓸만한 일이었다. 우리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애 아버지는 그애 누나가 보는 앞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나는 그 얘기를 풍문으로 들었다. 그애는 이따금 캄캄한 밤이면 아무 연립주택이나 문 열린 옥상에 올라가 스티로플에 키우는 고추며 토마토를 따버린다고 편지를 썼다. 이제 담배를 배웠다고 했다. 나는 새로 들어간 미술부며 롯데리아에서 처음 한 미팅 따위에 대해 썼다. 한번 보자, 만날 얘기했지만 한번도 서로 전화는 하지 않았다. 어느날 그애의 편지가 그쳤고, 나는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고3 생일에 전화가 왔다. 우리는 피맛골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생일선물이라며 신라면 한 박스를 어깨에 메고 온 그애는 왼쪽다리를 절뚝거렸다. 오토바이사고라고 했다. 라면은 구멍가게 앞에 쌓인 것을 그냥 들고 날랐다고 했다. 강변역 앞에서 삐끼한다고 했다. 놀러오면 서비스 기차게 해줄께. 얼큰하게 취해서 그애가 말했다. 아냐. 오지마. 우울한 일이 있으면 나는 그애가 준 신라면을 하나씩 끓여먹었다. 파도 계란도 안 넣고. 뻘겋게 취한 그애의 얼굴 같은 라면국물을.  나는 미대를 졸업했고 회사원이 되었다. 어느날 그애가 미니홈피로 찾아왔다. 공익으로 지하철에서 자살한 사람의 갈린 살점을 대야에 쓸어담으면서 2년을 보냈다고 했다. 강원도 어디의 도살장에서 소를 잡으면서 또 2년을 보냈다고 했다. 하루에 몇백마리의 소머리에 징을 내려치면서, 하루종일 탁주와 핏물에 젖어서. 어느날 은행에 갔더니 모두 날 피하더라고. 옷은 갈아입었어도 피냄새가 배인거지. 그날 밤 작업장에 앉아있는데 소머리들이 모두 내 얼굴로 보이데.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애는 술집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나직하게, 나는 왜 이렇게 나쁜 패만 뒤집는 걸까.  그애가 다단계를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만나지마. 국민학교때 친구 하나가 전화를 해주었다. 그애 연락을 받고, 나는 옥장판이나 정수기라면 하나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취직하고 집에 내놓은 것도 없으니 이참에 생색도 내고. 그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절이 바뀔 때면 가끔 만나서 술을 마셨다. 추운 겨울엔 오뎅탕에 정종. 마음이 따뜻해졌다.  부천의 어느 물류창고에 직장을 잡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고등학교때 정신을 놓아버린 그애의 누나는 나이차이 많이 나는 홀아비에게 재취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애가 둘인데 다 착한가봐. 손찌검도 안하는 거 같고. 월급은 적어. 그래도 월급나오면 감자탕 사줄께.  그애는 물류창고에서 트럭에 치여 죽었다. 27살이었다.  그애는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남자였다. 한번도 말한 적 없었지만 이따금 나는 우리가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손도 잡은 적 없지만 그애의 작고 마른 몸을 안고 매일 잠이 드는 상상도 했다. 언젠가. 난 왜 이렇게 나쁜 패만 뒤집을까. 그 말 뒤에 그애는 조용히 그러니까 난 소중한 건 아주 귀하게 여길꺼야. 나한텐 그런 게 별로 없으니까. 말했었다. 그러나 내 사랑은 계산이 빠르고 겁이 많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애가 좋았지만 그애의 불행이 두려웠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살 수도 있었다. 가난하더라도 불행하지는 않게. 3. 내가 열병처럼 앓았던 그 애 내 열일곱 살 때 그 애는 이미 내 우주였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에게서만 나는 묘한 냄새 같은 것이 있다.  집의 가정환경에 상관없이 사랑에 둘러싸여 자란 사람은 잘 알아채지 못하지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그런 동류의 냄새를 기막히게도 잘 맡아낸다.  항상 외로움에 둘러싸여 자란 그 애는 내 냄새를 그렇게 맡고 내게 다가왔었다.  그 애는 또래 애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도 항상 어딘가 혼자인 듯 겉도는 면이 있었다.  나름 성격도 밝고 여자 애건 남자 애건간에 그 특유의 싹싹함으로 손쉽게 구워삶는 타입이었지만  정작 집에는 항상 혼자 돌아가고  남들 다 있는 핸드폰 하나 없이 항상 주말을 혼자 나는 그런 아이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애는 결코 가난한 집 자식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 낡은 지갑 안에는 천원짜리 몇 장과  동전들과 함께 꼬깃꼬깃 접힌 편의점 영수증 따위만 어지럽게 굴러다녔지만  그 아이 아버지는 이 지역 대학의 경제학 교수였으며  그 애의 어머니는 중학교 선생님 출신으로 근처의 나름 이름있는 갤러리를 운영하는 소위 여사님이었고  두 살 차이나는 그 애의 여동생은 피아노 전공으로  근교의 학생 콩쿠르에서 상을 휩쓸고 다닌 장래의 기대주였다.  그 애는 내게 혹은 친구들에게 그런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지역 외곽에 있는 그 으리으리한 3층 주택 대신에  학교 근처에 조그만 자취방을 얻어 살았다.  3평이 좀 안 되는 그 습기찬 방에서는 가끔씩 곱등이도 튀어나오고  소위 돈벌레라 불리는 그리마도 심심찮게 기어나와 신경을 건드렸지만  그 애는 그런 벌레 따위보다 자기 가족들을 더 무서워했다.  성적 학대는 아니야. 맞고 자란 것도 아니야.  그래도 나는 우리 집이 너무 외롭고 무서워.  다가오는 그 애와 어렵사리 친구가 되고  어느 누구도 사귀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 그런 것과 다름없는 관계로 발전하며  나는 그 애의 자취방에 자주 들락거리게 되었다.  가끔은 학원까지 빠져가며 두드렸던 문이지만  사실 그 안에 들어가 '우리'가 함께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내가 등을 돌아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그 애는 티비를 봤고  내가 그 애의 만화책들을 읽으며 낄낄대고 있으면 그 애는 내가 빨아 놓은 제 빨래들을 갰다.  어쩌다가는 동네 비디오방에서 오래된 DVD들을 잔뜩 빌려와 보기도 했고  그러던 도중에 서로에게 기대어 발바닥을 서로 맞춰 보고는 했다.  나는 그 방에서 그 애와 키스를 하고 마침내는 그 애와 잤다.  미성년이라는 죄의식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때까지 어떤 성적 경험도 전무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거 같다.  성관계 혹은 순결에 대한 어떤 명확한 개념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난 딱히 그것들이 무섭지 않았고  그냥 연인의 사랑에 있어서의 당연한 수순을 밟는다는 느낌으로 그 애에게 안겼다.  지금 돌아보면 올바른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후회는 않는다.  사랑했었기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기억에 있다.  그 애가 내 처음이라는 게 좋았다. 두 번째나 세 번째가 아니고  그 때까지 고요하게 지켜왔던 내 처녀성을 그 애가 앗아감으로서  내가 세운 그 아이 기억의 묘비에 한 줄 더 적어넣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지만  어떤 관념적인 첫 번째가 아니라  몸을 섞음으로서 그 애가 정말 실체적인 기억이 되어 내 몸에 남아 있게 된다는 게 좋았다.  그 애는 어떤 유서도 남기지 않고  열일곱 겨울에 학교 숙직들의 샤워실 수건걸이에 고요히 목을 맸다.  1.6미터도 채 안 되는 그 높이에서 180을 웃도는 그 애가 그 낮은 곳에 목을 매며 얼마나 발악을 했을지  난 가끔 그 고통의 순간을 상상하고 또 곱씹어 보고는 한다.  어떤 말도 남기고 떠나지 않았지만  난 그 애 가족들도 끝내 밝혀내지 못했던 그 애의 자살 원인을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마 그건 그 애가 처음 내게 다가왔던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같은 사람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외로운 냄새. 오직 느낌으로만 알아챌 수 있는 것들.  그 애는 또래 애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도 항상 어딘가 혼자인 듯 겉도는 면이 있었다.  기억에는 영속성이라는 게 있어  나는 그 애가 떠난 뒤 몇 년이 지나고 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났어도  아직 제대로 남자를 마주하지 못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그 상실의 고통이 어느 정도 씻겨 내려갔다 믿었어도  비슷한 향수 냄새를 맡거나 툭 튀어나온 목의 결후같은 걸 바라보다가 보면  그 사소한 요소들이 바늘처럼 내 기억의 주머니를 툭 터뜨려  나로 하여금 그 이성과 그 애의 얼굴을 겹쳐보게 만드는 것이다.  아직 내가 누군가를 또다시 사랑하는 게 무서운 건  내가 열일곱 살에서 영원히 멈추어버린 그 아이를 아직껏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이 트라우마를 똑바로 직시하고 해소하려 노력하지 않는 이상  열일곱 겨울에 못박혀 있는 내 어떤 부분이 영원토록 성인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나 역시 알기 때문이다.  나와 어떤 관계의 종결점도 맺지 않고 그렇게 사라져버린 그 애 때문에  어딘가 정착할 듯 말 듯 애매하게 떠돌고 있던 그 애와 나의 관계성이 결국은 그 모호한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앞으로 성장하고 나아가 정착하려는 내 무의식적인 부분을 일부러 붙잡아 그 열일곱에 속박해 두려 하고 있음을  몸만 어른이 된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