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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혼날까봐 무서워 집을 나온 소녀는 잠잘 곳이 없었다. ▲소녀는 스마트폰 앱으로 “재워줄 사람 구함”이라는 글을 올렸다. ▲25세 남성이 소녀를 모텔로 데리고 가, 성폭행을 했다. ▲소녀는 13살이었다. ▲게다가 지적장애가 있어, 실제 지능은 7살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 “가해 남성이 민사상 손해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자발적 성매매를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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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 소녀의 머릿속에 ‘성행위’란 개념이 있을까? ‘성매매’가 뭔지는 알까? 게다가 소녀는 지적장애로 지능지수(IQ)가 70에 불과했다. 그런 소녀가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성폭행한 가해자에게 아무런 배상을 받지 못했다.
2014년 6월, 당시 만 13세였던 소녀 하은이(가명)는 엄마의 스마트폰을 갖고 밖에서 놀고 있었다. 그러다 그만 폰을 떨어뜨려 액정을 깨뜨리고 말았다. 야단맞는 것이 두려웠던 하은이는 집으로 가지 못했다. 대신 ‘친구찾기’란 스마트폰 앱에 “가출함, 재워줄 사람 구함”이라는 글을 올렸다.
야단 맞을까봐 두려워서… 잘 곳을 찾았던 13세 소녀
그러자 마트 직원으로 일하던 양모(당시 25세)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하은이를 데리고 서울 송파구 잠실동 M모텔로 갔다. 이곳에서 하은이는 성폭행을 당했다. 이제 겨우 중학교 1학년이 된 어린 소녀였다. 게다가 하은이의 지능은 7살 수준에 불과했다. 지적장애를 앓고 있기 때문에 지능지수(IQ)가 70 밖에 되지 않았다. 하은이의 변호를 지원한 십대여성인권센터의 조진경 대표는 13일 팩트올에 “하은이는 말이 어눌해서, 누가 봐도 지적장애가 있다고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고 했다.
욕구를 채운 양씨는 그날 밤 바로 모텔을 나왔다. 하은이는 어둠 속에 홀로 버려졌다. 혼자서는 집을 찾아갈 수 없었다. 하은이는 계속 스마트폰 앱으로 ‘재워줄 사람’을 찾았다. 조진경 대표는 “하은이는 5일 동안 총 10명이 넘는 남성들로부터 수차례 성폭행이나 성추행을 당했다”고 했다. “잘 곳을 구하지 못해, 화장실에서 10시간 넘게 누워 있던 날도 있었다”고 했다.
5일 동안 10명 넘는 남성에게 성폭행 당해
가출 1주일 뒤, 하은이는 인천의 한 공원에서 발견됐다. 두 눈은 풀려 있었고 옷차림은 거지꼴이었다. 한 번도 옷을 갈아입지 못해 악취도 심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온 하은이는 극도의 불안증세를 보였다. 급기야 자살시도까지 했다. 충격을 받은 하은이의 엄마는 딸을 경기 고양시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치료를 받게 했다.
하은이 엄마는 13일 팩트올과의 통화에서 “사건 이후 2년 가까이 됐지만 아직도 하은이는 마음의 상처를 지우지 못했다”고 했다. 엄마는 “하은이가 너무나 예민해져서, 성인이 된 후에도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성행위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
십대여성인권센터 조진경 대표는 “하은이는 성행위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라며 “자신이 뭘 당했는지도 몰라, 경찰 진술에서 ‘(성기를) 넣었다’ ‘만졌다’ 등의 말만 되풀이 했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하은이의 진술을 토대로 양씨를 포함한 가해자 5명이 검거돼 형사재판에 넘겨졌다”고 했다. 하지만 나머지 가해자들은 신상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했다. 기소된 5명은 모두 징역형 또는 벌금형을 받았다.
조진경 대표는 “하은이 엄마를 도와 가해자들에게 따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고 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첫 번째 가해자였던 양모씨가 민사재판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 하은이가 입은 상처에 대해 배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성폭행 민사재판에서 가해자가 승소했다?
팩트올은 십대여성인권센터를 통해 판결문을 입수했다. 서울서부지법 민사 제21단독 신헌석 부장판사는 4월 28일 판결에서 “원고(하은이)의 인지기능이 떨어져 상황 대처·사회 적응 능력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러한 이유만으로는 의사 결정 능력이 미약하다고 인정할 수 없다”면서 “자발적 성매매의 대상 아동은 성범죄의 피해 아동과 다르다” 등의 이유로 원고 측 주장을 기각했다. 신헌석 판사는 그러면서 “원고의 청구는 더 살펴볼 필요 없이 이유 없다”고 결론지었다.
십대여성인권센터 조진경 대표는 “지적장애가 있기 때문에 상황 대처 능력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고 했으면서, 의사 결정 능력이 부족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은 모순 아니냐”면서 “다분히 가해자의 시각에서 내려진 판결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60일 더 살았기 때문에 성적 자기결정권 인정?
하은이의 변호를 맡은 배진수 변호사는 “숙박을 제공받은 점 때문에, 성범죄 피해자가 아닌 성매매 대상자가 돼버렸다”고 말했다. 배 변호사는 “재판부는 하은이가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는 전제 하에 판결을 내렸다”고 했다. 우리나라 형법에선 만 13세 미만의 사람은 성관계에 동의할 능력, 즉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다고 보고 있다. 이는 곧 만 13세 미만의 아동·청소년을 성폭행한 사람은 무조건 처벌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피해자가 성관계에 동의했다 해도 마찬가지다.
하은이가 성폭했을 당했을 때 나이는 정확히 만 13세 2개월이었다. 재판부는 소녀가 13년에서 고작 ‘60일’ 더 살았다는 이유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한 셈이다.
같은 법원 다른 판결…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 능력 부족”
법원이 같은 사건을 놓고 다른 판결을 내리는 황당한 상황까지 연출됐다. 서울서부지법 민사 제7단독 하상제 판사는, 하은이의 또 다른 가해자인 20대 남성 김모씨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판결을 4월 7일 내렸다.
하상제 판사는 “아동·청소년은 아직 성적 가치관과 판단능력이 충분하지 않고 사회적·경제적으로 약자”라며 “하은이는 사건 당시 만 13세의 아동일 뿐만 아니라 지능에 비춰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하은이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전제로 판결을 내린 신헌석 판사와 정반대되는 판결이다.
“판사가 아이 직접 봤다면 결과 달랐을 것”
십대여성인권센터 조진경 대표는 “신헌석 판사가 하은이를 직접 봤다면 이렇게 판결하진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은이는 양씨에 대한 민사재판에 직접 출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배진수 변호사는 “하은이가 앞서 있었던 형사재판에 한번 나갔는데, 너무 겁에 질린 나머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면서 “그 후로는 직접 재판에 나간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