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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식탁

모두들 밥상 앞에서는 조금씩 틈이 보인다.
밥만 잘 먹어도 칭찬 받던 유년시절의 천진난만함이 한 소금씩 찔끔, 젓가락질 사이로 고개를 내민다.
어른이 된다는 건 싫은 사람과도 밥을 먹을 줄 안다는 것. 마음 맞는 애들끼리 책상 붙이고 앉아 먹던 학창시절은 물건너 갔다.
‘적과의 동침’ 만큼이나 어려운 ‘적과의 식사’ 자리.
긴장감을 조성하는 적 앞에서 끼니를 때우는 일은 고되다. 자고로 사람이 밥은 편하게 먹어야 하는 법인데, 사회생활은 그 짓조차 어렵게 만든다. 칼대신 수저를 쥐고 무방비하게 입을 벌려 속을 드러내야 하는 업무의 연장선.
돈 내는 사장님 앞에서 먹고 싶은 메뉴보다 가장 저렴한 메뉴를 고르면서도 왜 그리 눈치가 보이는지. 재빨리 물을 따르고 수저를 놔 드리며 막내의 본분을 다하고 나면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적당한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직원이 겨우 열명 남짓한 작은 회사라 '회장님'부터 말단 경리까지 다같이 밥을 먹었다. 얼핏, 가족같아 보이는 이 단란한 구성원 속에도 엄연히 파벌과 라인은 존재해서 다 큰 어른들이 "라면을 많이 먹네" "니가 다 먹어서 먹을게 없네"하며 라면 하나로 신경전을 벌였다. '부장님'이네 '이사님'이네 하는, 윗분들의 밥그릇 전쟁 속에서 묵묵히 내 끼니를 챙기느라 분주한 런치타임.
주로 가던 식당이 순대국밥집이나 동태탕집이라 젊은이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맞은편 자리에 삼삼오오 모여있는 또래집단을 보면 그렇게 부러웠다. 저기서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 최소한 마누라 뒷담화나 해외여행에서 은밀하게 추파를 던지던 묘령의 여인 이야기 같은 건 없겠지. 충고를 가장한 잔소리나 한가닥 하던 시절의 무용담도.
인정 받고 싶은 속내를 감출 줄 모르는 남자들의 단순함이 우습기도 했지만 회사 밥에 이골이 난 인생이 측은하기도 했다. 라면 좀 더 먹는다고 까이고, 속으론 열불이 나면서도 대충 웃어 넘기며 참는다. 녹을 먹는 일이 다 그러니까. 새끼도 키워야 하고. 사무실에서는 그에 걸맞게, 또 사무실 밖에서는 밥집의 온도에 따라 자신의 캐릭터를 바꿔야 하는 조직사회의 군상들. 국물의 간을 보면서도 무슨 말로 분위기를 띄울까 고민해야 하는 우리들.
가족이나 친구, 연인이 아닌 사람과 밥을 먹는 건 카메라를 앞에 두고 먹방을 찍는 기분이었고 요리쇼에 출연한 게스트처럼 개그부담감에 시달리는 일이었다. 딴에는 웃겨 보려고, 친해져 보려고 받아친 말이 누구에게도 호응을 얻지 못하고 공중에서 어정쩡하게 맴돌때는 울고만 싶었다. 말하기에 자신이 없어 열심히 '듣기'에 몰두했더니 사무실의 온갖 뒷담화가 다 나에게로 쏟아지던 나날들.
사람 사는 일이 사람의 욕구보다는 의무를 채워야 하는 일이 많은지라 그렇게 꾸역꾸역 밥값을 하며 살아야 했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건, 수저 한가득 상대의 표정을 담아 입에 넣는 건데 나는 그 숟갈들을 조미료 맛으로 견뎌냈던 것 같다. 어쨌든, 아주머니의 30년된 노하우가 담긴 김치찌개는 훌륭했고 길게 줄서서 먹는 쫄깃한 칼국수는 기다릴만 했으니까.
업무시간과 업무시간에 벌어져 있던, 열두시부터 한 시까지의 '틈'.
그 틈새에서 전해져오는 광화문 곳곳의 밥집 냄새가 아직도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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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지막 코스를 숙소 근처에 있는 방주교회와 본태박물관으로 잡았습니다. 일찍 숙소로 돌아가서 좀 쉬려구요. 그래봤자 오후 5시지만 ㅎ 숙소로 들어오자마자 와입과 초2는 수영장에 간답니다. 이러려고 숙소로 빨리 들어온거랍니다. 사람들도 많지 않고 뷰도 좋아서 괜찮았답니다. 서머셋 탐모라에선 사람들도 많고 물 튀기는 친구들도 많아서 별로였는데 초2도 여긴 마음에 들어하네요. 노천탕도 있는데 나갔다가 얼어죽을뻔 했답니다 ㅋ. 사진은 홈피에서 가져왔습니다. 저도 와입과 초2가 수영장 가는동안 온천 아니 목욕탕에 갔습니다. 중3은 수영도 싫고, 목욕도 싫다네요 ㅡ..ㅡ 오늘 1100 고지도 다녀왔는데 따뜻한 탕안에서 몸 좀 지져볼까 합니다. 아라고나이트 고온천이라는게 확 땡기더라구요. 특히 저 물색깔이 말입니다. 저는 목욕탕이나 온천에 그리 오래 머무는 타입은 아닌데 할일도 있고해서 일찍 나왔습니다. 뭐 물은 좋은것 같았습니다 ㅎ. 이 사진들도 역시 홈피에서 가져왔답니다. 겨울엔 온천도 좋죠. 그것도 제주도 산속에서 말이죠 ㅎ. 제가 할일이라는게 저녁식사 추진하는거였습니다. 온천만 간단히 하고 룸으로 돌아와서 아이들이 지시한 메뉴를 추진하러 중문까지 나가서 치킨 두마리 튀겨 왔습니다. 제 뒤로 바로 와입과 초2가 따라 들어오더군요. 초2는 실컷 재밌게 놀다온 표정이었고 와입은 지친 기색이었습니다 ㅋ 혹시나 했는데 너도 별로구나 ㅡ..ㅡ 디아넥스의 두번째 밤은 이렇게 깊어갑니다. 중3이랑 초2가 수영장에서 갖고 놀던 비치볼로 장난치다 와인잔 깬건 안비밀. 혹시라도 민폐를 끼칠것 같아 체크아웃 할때 와인잔 깨진거랑 위치 이야기하고 청소 철저 부탁했습니다. 다음 손님을 위해서 말이죠. 조식 먹는데 어제 갔었던 본태박물관이 보이네요… 디아넥스 패밀리 스위트 만족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