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쟈 이현우 서평가가 들려주는 『롤리타』 이야기입니다. 나보코프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파로 에드거 앨런 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보코프는 롤리타가 「애너벨 리」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마법 때문이든 운명 때문이든 간에 롤리타는 애너벨에서 비롯되었다.”
● 그림은 맥닐 휘슬러가 그린 애너벨 리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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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태생의 망명작가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그렇게 시작한다. 중년의 사내 험버트와 그가 ‘님펫’이라고 부르는 소녀 롤리타의 사랑 이야기다. 님펫은 아홉 살에서 열네 살 사이의 소녀들 가운데 특별한 매력을 가진 아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자기보다 두 배 혹은 몇 배 더 나이가 많은 남자들을 매료시키는 마성을 지녔다. 험버트가 그런 마성에 사로잡히는 경험은 주관적인 것이고, 객관적으로는 미성년자에 대한 성적 학대로 보인다. 작품이 출간되자 도덕적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던 이유다.
하지만 그런 논란은 『롤리타』가 실제가 아닌 가상의 현실을 다룬 작품이라는 점에서 오해된 면도 있다. 소설은 물론 허구의 세계이지만 작가는 보통 그것이 실제 현실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쓴다. 반면에 나보코프는 유사 현실의 세계를 그려내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고안된 세계임을 끊임없이 암시한다. 『롤리타』에서 그가 창조한 것도 ‘원더랜드’(이상한 나라)에 빗댄 ‘험버랜드’이며, 그만의 환상 속 ‘바닷가 공국’이다.


롤리타의 바닷가 공국과 「애너벨 리」의 바닷가 왕국
‘바닷가 공국’은 에드거 앨런 포의 시 「애너벨 리(Annabel Lee)」에 나오는 ‘바닷가 왕국’을 비튼 말인데, 『롤리타』의 처음 제목이 ‘바닷가 왕국’이었다는 점에서 포에 대한 참조는 확실해진다. 아니, 나보코프 자신이 이 점을 숨기지 않는다. 님펫에 대한 험버트의 환상 혹은 이상성욕을 소재로 삼으면서 험버트에게 포를 모델로 한 문학적 전기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성상 『롤리타』는 험버트의 수기로 돼 있으니, 이 전기는 험버트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기도 하다.
마흔 살의 나이로 불운한 생애를 마친 포에게 유일한 행복은 버지니아 클렘과의 결혼생활이었다. 1935년 스물여섯 살 때 포는 사촌이었던 클렘과 결혼하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는 고작 열세 살이었다. 둘을 열렬히 사랑했지만 클렘은 결핵에 걸려 일찍 사망한다. 1847년 클렘의 나이 스물네 살 때의 일이다. 크게 상심한 포가 아내를 추억하며 쓴 시가 「애너벨 리」이며, 포는 이 시를 쓰고 난 얼마 뒤 술에 만취해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다가 세상을 떠난다.



천사들의 시샘으로 죽음을 맞이한 애너벨 리
멀고 먼 옛날, 바닷가 어느 왕국에
당신이 알지도 모를
애너벨 리라는 한 여인이 살았어요.
날 사랑하고 내게 사랑받는 것 외엔
다른 생각이 없는 소녀였어요.
「애너벨 리」의 첫 연이다. 포는 아내와의 사랑을 바닷가 왕국의 이야기로 변형시키는데, 애너벨 리는 천사들의 시샘으로 죽어 차갑게 식고 바닷가 왕국 묘지에 유폐된다. 그럼에도 둘은 한층 더 강렬히 사랑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강했어요.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보다도,
우리보다 지혜로운 사람들의 사랑보다도,
저 위에 존재하는 천상의 천사들도,
저 아래에 있는 바다아래 악마들도,
내 영혼을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영혼으로부터
떼어내지 못했어요.
「애너벨 리」는 죽음까지도 넘어서는 사랑을 노래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 열한 번째 번역 작품을 출간한 김경주 시인
● 아래 그림은 마네가 그린 애너벨 리

어릴 적 나보코프가 가장 사랑한 작가 포
“마법 때문이든 운명 때문이든 간에 롤리타는 애너벨에서 비롯되었다.”라고 험버트는 믿는데, 애너벨을 잃은 뒤 24년 만에 님펫으로서의 롤리타가 애너벨의 재현으로 그 앞에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그 미모사 덤불, 별무리, 전율하던 느낌, 불꽃같은 열정, 달콤한 이슬, 그 통증은 내게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내내 해변의 귀여운 팔다리와 뜨거운 혀는 나를 쫓아다녔고 마침내 24년이 지나 나는 그녀의 마력에서 벗어난다. 오직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그녀에 의해서.”
님펫은 두 남녀 사이의 일정한 나이차를 전제로 하기에 어린 시절 험버트의 애너벨은 님펫이 아니었다. ‘죽음 너머의 사랑’을 ‘님펫에 대한 사랑’으로 변형시키면서 험버트는 롤리타에 대한 사랑이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의 의미도 갖게 만들었다. 아니, 그러한 의미를 숨겨놓은 건 작가 나보코프다. 어릴 적 나보코프가 가장 좋아한 작가의 한 명이 바로 포였으니까.
―서평가 이현우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