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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국민들이 월 300만원을 거부한 진짜 이유는?

현충일 연휴 동안 많은 국민들이 입맛을 다셨을 것입니다. 스위스에서 모든 성인에게 매달 2500스위스프랑(약 300만원)을 지급하는 ‘국민 기본소득안’ 도입을 위한 국민투표가 펼쳐졌으니까요.
‘역시 스위스는 선진국이라 달라’ ‘나도 스위스로 이민가고 싶어’ 등 스위스 국민들에 대한 부러움을 쏟아내는 댓글들이 봇물처럼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죠. 국민투표 결과 스위스 국민의 76.9%가 반대했고 찬성은 23.1%에 그쳤다고 합니다.
이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 언론들은 일제히 ‘월 300만 원 공돈의 유혹 뿌리친 스위스’ ‘퍼주기식 포퓰리즘에 일침’ ‘놀고먹는 낙원 거부한 스위스 유권자들’ 등 스위스 국민들이 현명한 선택을 했다는 극찬을 쏟아냈습니다. ‘좌파들 스위스 국민들 이해못할 것’ 등 스위스 국민투표에 열광했던 우리 국민들을 질책하는 듯한 기사도 나왔죠. 이번 국민투표가 통과되지 않길 진심으로 바랬나봅니다.
일단 기본소득 개념부터 알아보겠습니다. 국가 또는 사회공동체가 모든 구성원에게 특별한 조건을 달지 않고, 특히 노동을 요구하지 않고 지급하는 소득을 뜻합니다. 한 사회가 보유하고 있는 가치의 총합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당연히 함께 누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죠. 토머스 모어의 소설 ‘유토피아’(1516)에 처음 언급된 개념입니다.
이때까지 모든 복지제도는 노동을 하는 사람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노동하지 않더라도 인간으로 태어나면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는 것이죠.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꾸는 것처럼 혁명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스위스 국민들이 월 300만원을 거부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국내 언론들은 공짜 돈이 일할 동기부여를 사라지게 해 결국 스위스 경제를 고꾸라트릴 것으로 우려한 결과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연간 2080억스위스프랑(250조원)의 재정부담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유가 이것만일까요.
일단 300만원이라는 숫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월 300만원이면 많지는 않지만 사는데 부족하지 않은 액수입니다. 아껴 쓴다면 4인 가족도 생활할 수 있는 돈이죠. 서울연구원이 조사한 2013년 기준 서울에 거주하는 가구의 한 달 평균 생활비는 314만원이었으니까요. 최저임금도 월급으로 따지면 126만270원에 불과하니 300만원이면 넉넉하진 않지만 많은 돈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스위스 국민들도 300만원을 우리와 같이 넉넉한 숫자로 생각할까요. 일단 스위스의 물가는 살인적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비쌉니다. 빅맥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도 스위스(6.44달러)입니다. 한국의 빅맥지수가 3.59달러이니 대략 2배 가까이 높은 셈이죠. 따라서 스위스에서 300만원으론 최저임금 수준 밖에 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최저임금제가 시행되지 않고 있는 스위스에서 빈곤선에 해당하는 소득은 2219 스위스 프랑을 간신히 넘어선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매달 300만원을 받는다고 놀고먹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는 것은 기우라는 주장입니다. 물론 최저임금 수준만 받고 살겠다는 사람이 전혀 없진 않겠지만 인간다운 삶을 포기해야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기본소득을 가장 반길 것으로 알았던 노조가 반대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기존 사회보장제도가 감축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스위스 국민들은 현재도 12개월 이상 세금을 착실히 내면서 일하면 실직하고도 2년 동안 기존 임금의 70~80%를 국가로부터 보장받습니다. 실업률도 3.8% 수준(지난해 기준)으로 매우 낮죠. 이 때문에 기본소득보다는 사회보장제도의 강화를 노조에서는 원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이번 기본소득 지급 대상을 스위스 국민뿐 아니라 최소 5년 이상 합법적으로 거주해 온 외국인들에게도 적용하려 한 점입니다. 자칫 이민자가 급증해 복지 혜택 축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심이 발동한 것이죠. 실제로 기본소득 반대를 주창해 온 스위스국민당(SPP) 소속 루치 스탬 의원은 “만약 모든 개인에게 돈이 지급된다면 수십억명의 사람이 스위스로 진입하려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기본소득은 반대론자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져 결과는 큰 표차로 부결됐습니다. 하지만 이번 국민투표를 통해 기본 소득이라는 이슈에 대한 전세계인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성공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습니다. 2013년 이 법안을 발의한 ‘기본소득을 위한 지식인 모임’은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국민투표가 부결됐지만 기본 소득과 같은 중요한 이슈에 대해 폭 넓은 논의를 시작한 것 자체가 이미 승리한 것”이라며 “지난 수십년간 기본 소득은 유토피아처럼 여겨졌지만 오늘날 가능성을 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이 때문일까요. 반대투표자의 70%가 “25년 뒤에는 기본소득이 도입 될 것 같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 시행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하게 될 것이란 이야기죠.
특히 이들은 알파고 등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달로 일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인간과 로봇이 품위 있게 공존하려면 기본소득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월급이 많든 적든 모두가 기본소득을 받아야 생계를 볼모로 사용자가 노동자를 열약한 환경에서 일하도록 강요하는 수단으로 쓰일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기본소득이 인권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죠. 기본소득으로 경제적 안정을 보장하면 직업 선택 폭이 넓어지고 근로자의 권리도 강화할 것이란 기대도 있습니다.
이 덕분일까요. 다른 여러 국가나 도시들에서도 스위스와 비슷한 기본소득을 검토하고 있거나 시험 프로그램을 시작한 상태입니다. 핀란드는 내년부터 1만 가구(전국 130여만 가구)를 대상으로 월 550유로(약 70만 원)를 지급하는 ‘부분 기본소득’ 제도를 2년간 시범 실시한 뒤 전국으로 확대할지 여부를 결정할 방침입니다.
네덜란드에서도 중부 대도시 위트레흐트 등 19개 시 당국이 전 시민에게 매달 기본소득 900유로(약 120만 원)을 지급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위트레흐트에서는 우선 일부 복지수당 수급자에게 매달 900유로를 제공하고 이외에 따로 소득이 생기더라도 지급액을 깎지 않는 실험에 나설 계획입니다.
영국에서는 기본소득은 아니지만 법정 최저임금을 대체하는 생활임금(National Living Wage)을 4월부터 시행했습니다. 물가를 반영해 근로자와 그 가족이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의 임금 개념입니다.
이밖에 프랑스, 독일,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웨덴, 노르웨이, 아일랜드, 오스트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등도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을 예의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들 국가의 실험을 통해 기본소득을 줬더니 일을 더 열심히 하는지, 그것 받아서 노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안타까움이 있군요. 우리사회에서는 이런 실험조차 실시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정규직 고등학생이 바쁜 업무 때문에 컵라면도 먹지 못하고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목숨을 잃는 ‘헬조선’에 사는 국민으로서 이런 논의가 부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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