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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레전드 특집] 04. 영원한 '밀레니엄 특급', 이천수

사람들에게 있어 팀에서 '레전드' 로 평가받는 선수들이 공통분모격으로 해당되는 기준이 '해당팀의 원클럽맨' 이라거나, 아니면 '최소 그 팀에서 오랫동안 뛴 선수' 로 클럽에서 얼만큼 뛰었는지를 중요시하게 여긴다. 물론 그 클럽에서 오랫동안 뛴 시간은 중요하다. 그만큼 클럽을 지지하는 이들과 오랫동안 추억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외나 국내나 레전드로 꼽는 선수들에게 '멘탈' 부분도 중요하게 보고 있다. 즉,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피치 위에서의 행동이라던지, 대중매체에 노출되는 모습이 프로의식이 투철해야한다는 점이다. 이 부분 또한 선수들에게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예외도 분명 존재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었던 에릭 칸토나, 바이에른 뮌헨의 주장출신인 슈테판 에펜부르크의 경우에는 각각 맨유와 바이에른에서 5시즌 이상 뛴 것도 아니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다혈질이며, 어느 순간에는 시한폭탄같은 분노를 피치에서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들은 두 클럽의 레전드 반열에 올라있으며 팀의 영광과 함께했다.
지금부터 언급하려는 4번째 울산의 레전드는 이것과는 정반대격인 스타일이다. 앞서 언급했던 유상철, 김현석, 김병지와 달리 오랫동안 울산에서 뛴 것도 아니며, 진중하거나 겸손한 스타일이 아닌, 화끈하면서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다. 그럼에도 이 선수는 울산 팬덤 내에서는 말그대로 '언터쳐블(Untouchable)' 이며, 2000년대 이후 울산 팬이 된 사람들이 울산에 빠져들게 만든 주요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이쯤되면 눈치챘을 것이다. 바로 '밀레니엄 특급' 이자, '2000년대 K리그 대표 사기유닛' 으로 언급되는 이천수다. 이천수의 일대기를 지금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울산 레전드 특집 - 04. 영원한 '밀레니엄 특급', 이천수
1. 모든 이들로부터 주목받던 '밀레니엄 특급' 10대 소년, 그렇게 2002년 월드컵까지 종횡무진
이천수는 프로 데뷔하기 전부터 한반도 전역에서 주목받는 '슈퍼 탤런트' 였다. 그가 고등학생 신분일 당시인 1990년대 후반에 고교리그는 이천수가 다녔던 부평고가 주름잡고 있었고, 이천수와 더불어 최태욱-박용호를 '부평고 귀각 3인중' 이라 불렸다. 그들을 앞세운 부평고는 국내 대회를 제패했고, 이를 바탕으로 이천수는 청소년대표팀에도 선발되는 영광을 누렸다. 1999년에 방글라데시에서 열린 방가반두 컵에 청소년대표팀 주전으로 참가하였고, 태국 올림픽 대표팀을 7대2로 대파하였고(이천수가 무려 4골을 기록하였다), 브라질 청소년 대표팀까지 격파하며 결승까지 올라갔다. 비록 일본 실업리그 팀에게 2대3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대회에서 통합 8골을 기록하면서 득점왕에 올라섰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이천수를 '밀레니엄 특급' 이라 불렀고, 그는 10대의 나이에도 벌써부터 전국의 축구팬들이 주목하는 유망주로 등극했다.
이천수는 곧바로 1년 뒤인 2000년, 시드니올림픽대표팀으로부터 부름을 받았고 동시에 국가대표팀 데뷔까지 끝마쳤는데, 그 때 그의 나이 겨우 19세에 불과했다. 이천수는 반짝 스타로 끝나지 않고, 2년 뒤인 2002년 월드컵 본선에서도 당당히 엔트리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물론 비슷한 연령대였던 박지성처럼 주전선수로 월드컵 무대를 밟은 것은 아니지만, 한국대표팀이 치뤘던 모든 경기에 출장했다. 주로 그는 교체선수로 투입되곤 했는데, 득점이나 도움을 기록하진 않았지만 폭발력 있는 스피드와 왕성한 체력을 바탕으로 상대 수비진을 흔드는 역할을 하였고, 미국전에서 안정환이 동점골을 기록하고 쇼트트랙 세러모니를 할 때 오노 역할로 전파를 타기도 하였고, 이탈리아전에서는 최고 수비수로 평가받는 파올로 말디니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등 팬들 뇌리에도 상당히 강렬하게 남았다. 거스 히딩크가 이끌었던 한국대표팀은 '월드컵 4강' 이라는 한국축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대표팀 엔트리에 포함되었던 23인에 대한 해외 클럽들의 관심은 점점 높아져갔다.
월드컵 때 모두의 시선을 끌었던 박지성과 이영표는 히딩크의 부름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따라 네덜란드로 날아갔고, 차두리도 아버지인 차범근의 뒤를 이어 독일 분데스리가 진출에 성공했으며, 이을용은 한국인 최초로 터키 수페르리가 진출을 하는 등 대표팀 선수들의 해외이적이 활발해지고 있었다. 그에 맞물려 이천수 또한 월드컵 직후 곧바로 해외이적을 할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예상하였다(월드컵 시작하기 이전에 이천수는 2001년에도 유럽 진출할 기회가 있긴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의 달리, 그는 해외보단 국내리그를 택했다. 이미 그는 월드컵이 시작하기 이전에 국내 프로팀 입단을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2. 반시즌만에 K리그를 접수한 '사기 유닛' 으로 등극하다(2002 ~ 2003 여름)
2001년 말, 고려대 2학년에 재학중이던 이천수는 학교를 자퇴하고 울산과 계약하면서 프로 선수가 되었다. 계약금 3억원에 연봉 2000만원, 당시 신인선수가 받을 수 있는 역대 최고액을 갱신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계약에 붙어있는 특별조항들이다. 우선 울산은 이천수가 원할 때에는 언제든지 그의 해외 진출을 돕겠다고 하면서 동시에 그의 이적료 전액을 이천수에게 지급하는 조건으로 당시 이적료의 10%를 선수에게 주는 관례와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파격적이었다. 뿐만 아니다. CF 광고시에도 이천수에게 전액 보장되었다. 예를 들어, 그가 이천수의 이적료가 10억원이고 CF 광고를 몇차례 촬영한다고 가정하면 그는 1년에 무려 20억원을 버는 구조인 셈이다. 사실 그는 모교였던 부평고를 졸업하고 프로팀에 입단하길 갈망했었고, 함께 뛰었던 최태욱은 졸업 후 안양 입단을 확정지었다. 집안형편도 어려웠던 상황이었기에, 그는 하루빨리 집안에 큰 힘을 보태기 위해 프로전향을 강력히 원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대학교 진학을 택하기 되었던 케이스였다.
그렇게 오매불망 프로선수를 꿈꿔왔던 이천수는 실질적인 프로데뷔는 2002년 여름이 되어서야 이뤄졌다. 그 전까지는 히딩크 감독 지도 하에 월드컵 이전까지 대표팀 선수들을 합숙식 해외 전지훈련이 연달아 소화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푸른색 유니폼을 입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반시즌간 공백이, 울산이나 이천수 양 쪽 입장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후반기에 울산은 무시무시한 팀으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그가 푸른색 유니폼을 입고 뛰는 순간, K리그 모든 클럽들은 그를 경계할 수 밖에 없었는데 2002년 시즌 그의 기록이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18경기 출전에 7골에 9도움으로 데뷔 첫 해에 K리그 도움왕과 신인상, 나아가 AFC 신인상까지 거머쥐었고, 그는 유상철과 함께 팀을 리그 준우승까지 끌어올렸다. 만약 울산이 성남을 제치고 2002년에 리그 챔피언에 올랐더라면 이천수가 올해의 선수상까지 거머쥘 뻔 했을 것이다. 데뷔 첫 시즌에 보여준 그의 능력 때문에 그의 별칭이 괜히 '밀레니엄 특급' 이 아니라는 것을 만천하에 각인시켜주었다.
울산에서의 두번째 시즌을 맞이하는 이천수, 그를 막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2003년 여름이 되기 전까지 이천수가 기록한 스탯은 18경기 출전 8골 6도움, 가히 "리그를 씹어먹는다" 는 표현의 적절한 예시였다. 그렇기에 이천수를 보는 상대팀은 그의 존재 자체가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2003년 5월 21일, 상대팀이 얼마나 이천수를 견제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던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당시 울산은 수원 원정을 왔던 상황이었고 후반 23분, 이천수는 수원 수비수와 충돌하다가 어깨가 빠져 한동안 피치 위에 누워있었다. 그 때, 수원 서포터즈는 이천수를 도발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 날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던 이천수는 화가 나서 서포터즈를 향하여 가운데 손가락을 높이 치켜들며 응수했다. 이에 뒤질세라 수원 서포터즈는 '삽질개천수' 라는 플랜카드를 내걸며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다. 그 날 경기는 0대0 무승부로 마쳤고, 이천수는 이후 벌금 300만원 징계를 받았다. 수원 쪽에서 이천수를 도발했던 것은 그가 수원킬러로 유명할 정도로 수원전에 강한 면모를 보여왔다(지난 시즌 7골 중 2골은 수원이었고, 공교롭게도 데뷔무대도 빅버드였다). 그랬기에 그들은 이천수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천수는 참지 못하고 화답해버린 셈이다. 그 후, 이천수는 수원에게 있어서 공포의 대상이었고 이천수가 울산 선수로 있는 동안 수원은 거의 이겨본 적이 없었다. 이 당시엔 서로가 몰랐을 것이다. 몇 년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말이다.
3. 한국인 최초 프리메라리가 1호, 하지만 순탄치 않았던 스페인 생활(2003 여름 ~ 2005 여름)
워낙 국내무대를 손바닥 위를 내다보듯이 마음껏 휘젓고 있던 이천수, 그는 분명 국내에서 뛰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이천수에게 뜻하지 않는 손님이 스페인에서 찾아왔다. 그를 보러 멀리서 온 손님은 바로 레알 소시에다드. 소시에다드는 2002년 월드컵 때부터 줄곧 이천수의 모습을 지켜봤었고, 그의 K리그 활약상을 보고 확신을 가져 그를 영입하기로 결정했다. 기본 3년 계약에 이적료 42억원에 연봉 6억원, 의식주 부분 모든 것을 지원받게 되었다. 먼저 유럽으로 진출한 박지성, 이영표, 송종국보다 더 파격적인 조건이었고, 울산 입단 시에 체결한 계약 조건이 발효되어 그는 이적료의 70%인 27억 3천만원을 챙기게 되었다. 성남과 리그 우승경쟁을 벌이고 있던 울산 입장에서는 전력상 상당한 타격이지만, 울산 성향이 선수들의 해외진출에는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를 쿨하게 보내주기로 결정했다. 그의 스페인 진출은 마치 1990년대 후반에 안정환이 이탈리아 무대로 진출하는 것과 맞먹을 만큼의 이슈를 몰고 왔다.
등번호 19번을 받은 이천수, 때마침 레알 소시에다드가 지난시즌 리그 2위를 기록해 챔피언스리그 무대까지 진출한 상황이었기에 그는 한국인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출전할 수 있는 영광까지 누렸다. 하지만 이천수는 여기서 결정적인 실수를 하나 저질렀는데 바로 "레알 마드리드로 진출하는 것이 꿈" 이라는 발언이었다. 레알 소시에다드는 레알 마드리드와 앙숙 관계였는데 이천수는 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인터뷰 도중 실언을 해버린 것이다. 그가 입단할 당시 매우 환영했던 현지 팬들과 구단은 그의 인터뷰 때문에 소시에다드를 그저 "거쳐가는 클럽"으로 생각한다며 반감이 생겼다. 논란 속에서 레알 소시에다드 선수로서 라리가에 모습을 드러낸 이천수, 하지만 K리그에서 보여줬던 이천수 특유의 위풍당당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고 오히려 위축되어 있었다. 2003/04 시즌, 그는 총 13경기에 무득점으로 실망스럽게 시즌을 마쳤고, 팀 또한 중위권으로 추락하며 시즌을 마쳤다.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 소집될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결국 그는 2004/05 시즌이 시작되기 직전에 2부리그에서 갓 승격된 팀인 누만시아로 임대가게 되었다. 당시 소시에다드에선 Non-EU 규정 때문에 카르핀, 니하트, 코바체비치 등에 밀려 출전기회가 다소 적었고, 반면 누만시아는 스쿼드가 빈약했기 때문에 다소 출전기회는 많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누만시아로 임대가서도 이천수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누만시아와의 임대가 끝난 후, 국내로 복귀할 준비를 하였다. 그의 유럽 진출기는 실패로 막을 내리고야 말았다.
4. 한국으로 돌아온 '사기 유닛' 울산의 제2 전성기를 만들다(2005 여름 ~ 2007 여름)
국내 복귀를 모색하던 이천수, 그에게 손길을 내밀었던 것은 바로 친정팀이었던 울산이었다. 이천수가 떠난 이후, 울산은 막강한 수비를 앞세워 최강방패의 면모를 보여줬지만, 경기의 흐름을 한순간에 바꾸거나 상대의 심장을 꿰뚫을 창끝이 무뎠던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울산이 번번히 우승으로 가는 문턱 앞에서 좌절해야만 했고, 팀을 이끌던 김정남 감독의 발목을 잡고 있던 주요 고민거리이기도 했다. 김정남은 이 문제를 이천수로 해결하기로 결심한 셈이다. 그렇게 2005년 여름, 그는 호랑이굴로 컴백할 수 있었다.
그가 한국으로 컴백할 때, 사람들은 과연 이천수가 스페인 생활동안 잃어버렸던 감각과 자신감을 재빠르게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고 보통 웬만한 선수들은 복귀하고 난 뒤에 적응하는 시간이 제법 필요했다. 이것은 부상에서 회복한 선수들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천수는 여론의 상식을 완전 뛰어넘어버렸다. 이천수를 다루는 법을 잘 알았던 김정남이었기에 그것이 가능했고, 그는 최대한 이천수를 최전방에 배치하면서 자유롭게 풀어놓았다. 그리고 그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천수는 그에 보답하는 듯한 모습으로 반시즌 밖에 소화하지 않았음에도 무려 7골 5도움을 기록하면서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았다. 플레이오프에서 선보였던 그의 모습은 실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플레이오프 3경기동안 무려 3골 2도움을 기록했고 그 중 챔피언결정전이었던 인천과의 홈&어웨이 경기 중 1차전에서 3골 1도움으로 혼자서 인천을 초전박살내는 말그대로 끝판왕의 아우라였다(이것이 후에 제작된 인천의 다큐멘터리인 '비상'에서도 고스란히 담겨졌다). 결국 울산은 이천수의 맹활약 덕분에 2005년 두번째 별을 달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이천수처럼 반시즌동안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건 이전에도 없었고, 오늘날까지도 찾아볼 수 없다.
리그 MVP와 베스트 11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이천수, 그 다음해인 2006년에도 선봉장에 선 그는 두고두고 회자될 이야기들을 여러가지 만들어냈다. 짧고 굵직한 족적이 바탕이 되어 그는 딕 아드보카트의 간택을 받아 독일월드컵에 출전하였다. 첫 경기인 토고전에서는 안정환이, 두번째 경기인 프랑스전에서는 박지성, 그리고 마지막 조별경기였던 스위스전에서는 심판판정 논란이 부각되긴 했지만, 이천수는 박지성에 버금가는 대표팀의 에이스 역할을 수행하였고, 토고전에서 프리킥 골을 성공시키며 4년 전 무득점의 한을 풀기도 했다. 월드컵이 끝난 직후,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야기가 나오니 바로 A3 챔피언스컵 대회였는데, 울산은 한국 대표로 출전하였고, 감바 오사카와 제프 유나이티드, 그리고 다롄 스더와 풀 리그 형식으로 치뤘다. 특히 감바 오사카와의 경기가 이천수라는 이름을 아시아 전역에 떨치는 경기가 되었는데, 당시 이천수는 감기기운으로 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교체출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반전에 무려 해트트릭을 달성하면서 감바 오사카를 6대0으로 격파하는 선봉장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다롄 스더 경기에서도 2골을 쓸어담아 울산이 대회 우승을 하는 데 1등 공신으로 떠오르면서 득점왕과 MVP까지 싹쓸이했다. 이 대회를 계기로 울산은 '아시아 깡패' 라는 별칭까지 탄생하였다.
AFC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울산의 위용은 대단했다. 특히나 8강전이었던 알 샤밥(사우디)와의 홈 앤드 어웨이 경기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이야기로, 1차전에서 6대0 대승, 그리고 2차전에 1대0 승리로 통합 7대0 승리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선사하였다. 이천수는 역시나 이 경기에서도 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비록 4강전인 전북과의 두 차례 경기에서 통합 6대4로 역전패를 당하긴 했으나, 이천수의 역량이 가장 만개하던 시기가 아니었나하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2007년 2월, 대표팀으로 차출되어 그리스전에서 프리킥 골을 성공시켜 팀의 승리를 이끌었고 그 골은 후에 팬들이 선정한 아름다운 골이 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천수는 못다 핀 꿈이었던 유럽 진출을 다시 한 번 노크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스페인이 아닌 네덜란드 무대였고, 송종국이 뛰었던 페예노로트였고, 그 해 8월에 이적완료하였다.
5. 날개가 꺾인 비호(飛虎), 악마의 재능으로 불리게 되다(2007 여름 ~ 2012)
페예노르트에서 등번호까지 부여받은 이천수, 하지만 그는 페예노르트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새 팀에 적응해야할 시기에 한국에서 소송문제로 심적으로 묶여있는 상태였고, 이천수가 여기에 신경쓰다보니 페예노르트에 제대로 녹아들 리가 없었다. 그의 부진한 모습에 네덜란드 현지 언론들과 팀에서는 당연히 그를 곱게 보질 않았다. 결국 2008년 7월, 이천수는 한시즌만에 페예노르트를 떠나 다른 팀으로 임대가야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그는 K리그 무대로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울산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그를 가장 껄끄러워했던 수원이 당시 차범근 감독의 요청 하에 그를 임대영입한 것이다. 가장 싫어하는 선수 중 한 명이 빅버드에서 뛰게 되었으니 당시 수원팬들은 말그대로 '충격' 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이천수가 부진과 부상으로 3경기 밖에 소화하지 못한데다가 팀 내 항명사건까지 일으키니 그를 증오 수준으로 배척하였다. 항명 도중 팀 내 동료 폭행을 저질러으니 차범근 또한 억누르던 분노를 참지 않고, 그를 임의탈퇴로 공시해버렸다. 임의탈퇴 처분을 받게 된다는 것은, 사실상 이천수는 더이상 K리그에서 뛸 수 없다는 소리나 다름없었고, 그의 선수생활의 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위기에 봉착했던 이천수를 구원해준 인물은 바로 과거 2002년 월드컵 때 함께했던 전남의 박항서 감독이었고, 극적으로 임의탈퇴까지 가진 않았다. 이천수는 페예노르트 소속으로 전남으로 임대가는 모양새로 광양에 둥지를 틀었다. 7경기 4골을 기록하는 등 기량은 서서히 예전의 모습으로 찾아나가는 듯 했지만, 다른 문제가 이천수의 발목을 잡았다. 쉽게 설명하면, 2009년 2월, 이천수가 전남에서 뛰기 직전에 선수 본인 동의 없이 에이전트와 전남이 말도 안되는 계약을 체결했었다. 그러던 와중, 원소속팀인 페예노르트는 그 해 여름 사우디의 알 나스르로 이천수를 이적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천수 또한 알 나스르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찰나였다. 이 사실을 안 전남은 이천수에게 일종의 배신감을 느껴 그의 이적에 제동을 걸려고 했었고, 이천수는 자신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으려고 하는 전남을 떠나고 싶어했다. 그러던 와중에 또 한 번 그는 코치스태프들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고, 공식적인 인터뷰에서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면서 전남의 뒤통수를 쳤다. 전남은 이에 이천수를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하였고, 연맹은 그것을 받아들여 그를 임의탈퇴로 처분하였다. 사실 이 문제는, 양 측의 잘못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전남은 선수가 알지 못하게 어떻게 해서든 갑의 입장에 서기 위해 치졸한 모습을 이적과정에서 보여주었고, 이천수는 전남에서 뛸 때에도 적잖게 사건사고를 일으킨 데다가 떠나는 과정까지도 트러블을 만들어 모든 이의 비난을 샀던 것이다.
모든 논란을 만들고 사우디로 떠났던 이천수, 알 나스르 선수로서의 삶도 그렇지 평탄치 못했다. 알 나스르에서 15경기 출장하여 3골을 기록하며 나쁘진 않았으나, 문제는 구단에서 급여를 제 기한에 맞춰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임금 체불이 길어지자, 이천수는 이 명목 하에 무단 이탈하였고, 다음 행선지는 J리그의 오미야로 정했다. 이천수는 오미야에서 연습생 신분부터 시작하는, 왕년의 스타플레이어로 군림했었던 시절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2011년 말 계약이 종료되면서 그는 무적신세가 되어 새로운 팀을 알아봐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듬해 호주 A리그의 어느 클럽에서 오퍼가 왔지만, 이천수는 거절했다. 그는 K리그로 돌아가길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타향살이가 힘들었던지, 이천수의 마음 한 켠에는 'K리그에 복귀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국내무대에서 뛰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있는데, 바로 전남과의 틀어진 관계를 되돌려놓아야한다는 점이다. 사실 이 문제가 간단해보이면서도 쉽지 않았다. 비록 전남 또한 잘못한 점은 있지만, 이천수가 전남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 부분 등이 합리화시킬 수는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었고, 전남의 공식 입장 또한 "진정성이 부족하다" 고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실제로 전남 입장에선 일종의 배신감이 느껴졌던 건 사실이다). 그러던 2012년 10월, 이천수는 직접 광양까지 내려가 전남의 홈경기를 보러온 관중들 한 명 한 명 대상으로 사죄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것이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천수는 이후에도 본인이 용서받을 때까지 홈경기가 열리는 날마다 와서 사과하겠다고 말했으나, 축구인 상당수는 그의 진정성을 여전히 의심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2013년 2월 5일, 프로축구연맹에서 그의 임의탈퇴 신분을 풀어주었고, 22일에는 전남도 그를 풀어주기로 확정지은 것이다. 드디어 이천수의 고난의 연속이 끝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6.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마음으로, 고향팀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2013 ~ 2015)
극적으로 K리그로 복귀할 수 있었던 이천수, 전남이 임의탈퇴를 풀어주기로 한 소식과 동시에 그의 입단소식이 보도되었다. 팀은 자신의 고향팀인 인천이었고, 등번호는 10번을 받았다. 4년만의 복귀라 그런지, 이천수는 절주선언에 이어 오로지 가족과 축구에만 전념하겠다고 남다른 각오를 밝혔다. 1년동안 무적신세였던 탓이 예전같은 기량을 보여주진 못했으나, 당시 팀의 중심을 잡아줄 베테랑이 절실히 필요했던 인천 입장에서는 그의 존재감만으로도 팀 전력에 충분히 보탬이 되었다. 그러던 4월 16일, 전남과의 홈경기에서 선발로 풀타임 소화한 후에 전남 서포터들이 포진하고 있던 원정석으로 다가가 깍듯이 인사하였고, 이에 박수로 화답하는 등 서로간의 앙금이 완전히 풀렸다. 그 후 4일 뒤에 전북과의 홈경기에서 역전골을 어시스트하면서 1,428일만에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급작스런 현역복귀로 몸이 적응안되었는지 발목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적도 있지만, K리그 복귀 후 첫시즌은 19경기 2골 5도움으로 팀 성적을 고려하면 제법 괜찮은 스탯이었다.
그리고 이천수는 연봉 삭감까지 감수하면서 인천과 2015년까지 함께하며 인천과의 의리를 과시함과 동시에 팀 내 최고참으로서 후배들에게 모범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2000년대를 풍미하던 사기유닛도 나이에는 장사 없었고, 예전과 달리 날카로움과 체력이 떨어지고 있는데다가 부상 빈도 또한 높아져서 출전 횟수조차 점점 줄어들었다. 부상으로 인천이 FA컵 결승전에 진출하던 모습을 관중석에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2015년 11월 5일 JTBC 뉴스룸을 통해 은퇴를 선언했고, 11월 28일인 마지막 홈경기는 부상으로 인해서 은퇴식으로 대체하여 그의 파란만장했던 선수로서의 생활도 비로소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는 부분 중 하나가, 이천수는 "게으른 천재", 또는 "트러블메이커" 이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이는 적합하지 않다. 그가 경기 때마다 번뜩이는 모습이 타고난 부분도 있겠지만, 그는 승부욕이 강해서 그 어떤 누구에게도 지지 않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열심히 노력하는 악바리 스타일이며 이천수 본인 또한 악바리로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도 이 부분 때문이다. 트러블메이커라고 표현하는 부분에서도 조금 억울한 것이, 해외 사례만 하더라도 이천수보다도 더 심하면 심한 선수는 끝도 없다. 호마리우, 안토니오 카사노, 조이 바튼, 아드리아노, 마리오 발로텔리, 하르템 벤아르파 등 피치 밖에서 더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으면서도 잘만 선수생활을 이어나갔다(국내에서 이천수 같은 유형을 좀처럼 보기 힘들었을 뿐이다). 그가 비록 언론에서 보여줬던 인터뷰 방식 등이 경솔했던 것은 있었으나, 그것만으로 이천수의 업적이나 기량 등을 폄하하는 것은 금지했으면 하는 바다. 인천에서 마지막 선수생활을 통해 개과천선 했으니 이만하면 훈훈한 결말이다.
은퇴식을 치르고 나서 인천 서포터즈는 "풍운아를 품은 우리가 행운아" 라는 걸개를 내걸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 플레이어를 배웅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쓰고 싶었던 것은 울산 쪽이 아니었나 싶다. 이천수의 전성기는 곧 울산의 전성기 중 하나로 꼽힐만큼 일종의 공동운명체로 함께 해왔다. 김정남 감독이 이천수에게 모든 걸 맡기듯이, 울산에게 있어서 이천수는 "쟤만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이천수는 무언가 해줄 것이다." 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고, 이천수는 언제나 기대에 부응하여 결국 울산을 리그 챔피언에 올려놓은 후에 아시아 깡패라는 칭호까지 선사했다. 실제로 이천수가 임의탈퇴 신분으로 K리그에서 한동안 떠나있을 때에도 남들은 다 적으로 돌아서도 항상 그의 편에 서있었던 것은 울산 팬들이었고, 그가 다른 유니폼을 입고 오더라도 집 나갔던 자식이 돌아온 것마냥 환호해주곤 했다(심지어 울산으로 돌아오라는 걸개도 걸렸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 JTBC 해설위원으로 종종 울산 문수경기장을 방문할 때마다 울산 팬들로부터 이천수콜을 받는다. 누가 뭐래도 그는 울산의 또 하나의 레전드였고, 영원한 '밀레니엄 특급', 'K리그 사기 유닛' 이다. 두고두고 기억하리, 이.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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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 드디어 나오네 이천수 아직도 2000년 신년청소년대회때 이탈리아 꺽은 골 기억나는데 .. 실력으로 경기전체를 바꿀수있는 몇안되는 판타지스타였던거같다
진짜 재능이 너무 아까울정도였음 천재가 지는걸 박지성vs이천수보면서 느꼇음
축하합니다! 빙글 [명예의 전당] 카드로 선정되었습니다! 이제 명예의 전당 컬렉션 https://www.vingle.net/collections/4535494 에서도 이 카드를 확인하실 수 있어요 :)
실력은 있어지만 논란이 많았던 품성 과 국내에서 잘했으나 유럽까지는 아니였던 그래도 02년 독일전 멋진슛기억한다 올리번 칸..... 자식
예전 인터뷰때 "아니 언제부터 서울이 명문팀 이었다고 터키에서 감독하나 왔다고..." 빵 터졌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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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에게 관심 보인 클럽 목록
K리그 클래식 전북 현대 모터스 소속 이재성 프로 데뷔 후 1년 만에 유럽 클럽팀 스카우터들의 관심을 받고 있으며 이번 시즌 중반에 유럽으로 이적하는게 점처졌었습니다. K리그 클래식 스타로서는 권창훈과 함께 유럽 리그로 건너갈 유력한 재목으로 평가받고 있죠. 그렇다면 이재성에게 관심을 보인 클럽들을 살펴볼까요 분데스리가 - 함부르크 SV 손흥민 선수도 뛰었었고 빅리그 이적을 위한 발판으로 삼기 좋은 팀입니다. 분데스리가 - 아인트하르트 프랑크푸르트 차범근을 레전드로 대우하고 있는 프랑크푸르트입니다. 역시 동양권 선수에게 개방적인 분데스 분데스리가 - 베르더 브레멘 15년 12월, 분데스리가의 3개 팀이 이재성에게 관심을 표명했고 이적료를 문의하기도 했음. 출처 http://www.fussballtransfers.com/bundesliga/verstarkung-aus-fernost-drei-bundesligisten-buhlen-um-neuen-heung-min-son_60187 라 리가 - 발렌시아, 세비야 동아시아컵에서 이재성+권창훈 등을 관찰하기 위해 스카우트 파견. 특히 발렌시아가 큰 관심. 출처 http://m.sports.naver.com/kfootball/news/read.nhn?aid=0000443588&oid=111& EPL - 에버튼, 왓포드 꽤 신뢰도 있는 기자의 보도. EPL의 여러 클럽들이 이재성을 주시하고 있으며 에버튼과 왓포드가 영입 레이스를 주도하고 있음. 하지만 안타깝게도 양팀 감독이 모두 바뀐 상황이라 변수가 있음. 출처 http://www.teamtalk.com/news/exclusive-everton-watford-chase-south-korean-ace-lee 최근 이재성 수준.gif 말이 필요없음 그야말로 케클 쌈싸먹고 다니는중 엄청 기대되네요!
[상식축구]이승우 사건, 도대체 뭐가 예의입니까
(사진=네이버 KBSN SPORTS 캡처) 후반 35분 우리나라 선수가 쓰러졌다. 심판은 다급히 휘슬을 연달아 불었다. 동료, 상대 선수 할 것 없이 달려왔다. 팀닥터들이 뛰어 들어갔다. 몇 초, 몇 분이 흘렀을까. 그제야 구급차가 경기장으로 들어갔고 쓰러진 정태욱은 그대로 구급차에 실려 경기장을 빠져 나왔다. 다행히 정태욱은 검사 결과 이상이 없음이 확인됐다. 이 과정에서 이승우의 태도가 논란의 대상이 됐다. 대한민국 U-20 대표팀은 지난 3월 27일 아디다스 U-20 4개국 친선 축구대회서 잠비아를 만나 4-1 대승을 거두었다. 한국의 초특급 유망주로 손꼽히는 이승우가 이 날 경기서 2골을 몰아넣으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역시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유망주다. 이승우는 전반 40분, 바르셀로나 동료 백승호의 패스를 받아 골로 성공시키며 2-1로 한국의 리드를 가져왔다. 이어 후반 24분 상대 골키퍼가 나온 것을 보고 환상적인 칩샷을 터트렸다. 이승우의 클래스를 볼 수 있던 순간이었다. (사진=연합뉴스) 이승우 인성, 논란거리인가? 세계는 이승우의 성장세를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승우의 인성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이승우는 후반 35분, 헤딩 경합을 하다 쓰러진 정태욱에게 달려왔다. 다급히 구급차를 불렀다. "빨리 오라고! 빨리 오라고! XX." 문제는 이 발언이었다. 경기장 안으로 빨리 들어오지 않은 구급대원들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핵심은 '욕까지 해야 했었나?'라는 것이다. 빨리 들어오라고만 하면 될 것을 그렇게까지 분노하면서 소리쳐야만 했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이승우의 감정은 모두가 이해할만 하다. 팀 동료가 심각한 부상일지도 모르는 머리 부상을 당해 쓰러졌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걱정하지 않을 사람은 없으며 다급한 마음에 구원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지극히 당연한 행위다. 과장된 표현일수 있지만, 세월호 사건을 이 사건에 대입해본다면, 마치 '가만히 있어라' 같은 내용이 될 수도 있다. 큰 부상을 당했다.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연히 방방 뛰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맞다. 주변에 팀닥터가 있어서 괜찮다? 그렇다면 주변에 선생님들이 계시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좋다는 말인가? 글쎄. 충분히, 100% 이승우의 행동에 동의한다. 비유가 적절치 못할 수 있겠으나 적어도 내 입장은 이승우 편이다. 또한 이승우는 현재 스페인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유럽의 시스템이 다 잘 갖추어져있고 우리나라는 그에 비해 형편없다고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대체적으로 스페인의 의료 시스템은 최고 수준일 것이다. 특히, 선수가 부상당했을 때의 대처 요령 등과 같은 것 말이다. 이승우는 그런 상황에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의료진에게 불만이었을 것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이승우의 태도, 사진=네이버 KBSN SPORTS 캡처) 근본적인 원인을 고찰하자 이승우가 화낸 것만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왜' 이승우가 그랬는지를 근본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도대체 왜 이승우가 화를 냈을까. 그 이유는 의료진의 초동 대처가 미흡한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포츠 경기에서 위급한 상황이 많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철저한 상황 대처 요령을 숙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체감할 때 분명 우리나라 스포츠 의료 체계는 문제가 있다. 과거 2000년 4월 18일 롯데 자이언츠와 LG 트윈스의 경기에서 2회 초 2루로 진루하던 故임수혁(롯데 자이언츠, 향년 42세)선수를 떠올려보자. 2000년대라면 분명히 의료 기술이 발전한 시기였다. 지금은 그보다 더 발전했겠지만 그 당시도 충분히 구급차, 의료 체계가 갖춰졌을 기술력이다. 하지만 당시 구급차도 준비되어있지 않았고 사고 대책이 미흡해 결국 故임수혁 선수는 식물인간 상태로 10년을 지냈고 끝내 2010년 눈을 감았다. 당시에 누군가 소리쳤다면, 구급차를 애원하며 울부짖었다면, 초동 대처가 확실했다면 故임수혁 선수는 야구 팬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故임수혁 선수 사건 이후 스포츠계는 의료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고 특별히 큰 사건을 겪지 못했다. 내가 알기론 큰 사건이 기억나지 않는다. 있다면 알려주시길 바란다. 무엇이 예의인 것일까. 예의를 생명보다 먼저 갖춰야 하는 것일까. 정태욱이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혹여나 초동 대처의 미흡으로 인해 식물인간이 되기라도 한다면 뒷감당은 누가 할 것인가. 그 때는 누구를 비난할 것인가. 잘잘못을 논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갖춰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주목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가 아닐까.
K리그 응원문화의 새로운 한 획을 긋고 있는 그녀들, '울산 큰애기'
논쟁이 되었던 치어리더 문화 재도입, 실질적인 영향력은 미비 때는 2010년 시즌이 시작할 때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내 축구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간 N석과 S석으로 항변되던 서포터즈 대결구도식의 응원문화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K리그에, 일반석을 살리기 위한 방책으로 치어리더를 도입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치어리더 문화는 K리그의 서포터즈 라는 단체가 탄생하면서 자연스레 세력을 잃어갔고, 1990년대 후반에 치어리더는 피치에서 더이상 찾아볼 수 없었던 존재들이었으나, 10여년이 지난 2010년, 서포터즈 문화가 활성화되고 있는 K리그 바닥에 재등장한 셈이다. 이미 서포터즈 문화에 물들어버린 각 팀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다소 경계하는 야구의 응원문화를 왜 도입하느냐면서 자신들과 다른 응원방식에 융화되지 않기 위해 선을 그어버렸다. 게다가 각종 매체를 통해 접한 유럽식 서포터즈를 동경하는 분위기가 매우 강했던 국내 분위기였기에 성공보단 실패로 끝날 것이라는 분위기가 다수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수원과 서울, 포항 등 일부 구단들은 치어리더 팀을 만들어 관중석에 투입시키는 과감한 한 수를 던졌다. E석에 치어리더를 위한 단상까지 만들고 그들을 위한 존(Zone)까지 만들었다. 반대를 무릅쓰고 그들이 치어리더를 도입한 이유는 바로 극심한 흥행 부진이 원인이었다. 당시 K리그 관중은 전년도에 비해 13% 감소하는 굴욕을 겪었고, 관중 동원 1,2위를 자부하던 수원과 서울마저도 각각 22%, 19.6% 감소하면서 체면을 구긴 상태였다. E석을 활성화하여 일반관중 유치를 위해 갖가지 볼거리를 제공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클럽 프론트들이 골머리를 썩히는 또다른 이유는 바로 서포터석이라 불리는 N석과 일반관중들이 밀집한 E/W석과의 보이지 않는 벽이 너무나도 크다는 점이다. 서포터즈 문화의 정착은 분명 팀에 대한 팬들의 충성심을 높이고, 해당 팀을 위해 뛰는 선수들에게 더할 나위없이 좋은 활력제이지만, 클럽 입장에서는 서포터 뿐만 아니라 일반 관중 또한 놓쳐서 안될 부분이었다. 최원창 수원 커뮤니케이션팀 과장은 "야구팀의 롯데 자이언츠의 융합을 벤치마킹하여 모든 팬이 융화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밝혔고, 실제로 이것이 대부분 클럽들의 입장이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내가 수없이 경기장을 다니면서 목격한 치어리더들과 축구 경기는 서로 이질적으로 '따로따로 노는 분위기' 였다. 일단 서포터즈들이 사용하는 응원가나 치어리더들이 사용하는 응원패턴은 각개전투하는 것마냥 개인 플레이였다. 축구로 치자면 패스플레이가 전혀 안되는 모습이었다. 그렇다보니, 서포터즈와 일반 관중들의 거리가 좁아지기는 커녕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치어리더 활용이 제대로 되지 않자, 클럽들은 오히려 유명인사 등을 시축하게 하거나 하프 타임에 축하 공연을 가지는 등으로 마케팅을 하여 관중몰이를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반응일 뿐, 그 효과가 지속적인 흥행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렇게 치어리더 도입은 무관심 속에 묻혀가며, '실패' 로 확정되어가는가 싶었다. K리그 응원문화의 새로운 한 획을 그어버린 그녀들, '울산 큰애기' 2015년 연초, 지난시즌에 부진하여 부활의 해를 선포한 울산이 윤정환 체제로 바꾸면서 새롭게 도입한 부분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치어리더제 도입이었다. 그간 다른 K리그 클럽들이 연거푸 치어리더 제도를 도입했으나 실패한 사례들만 보여줬던 터라, 울산 팬들은 무의미한 곳에 자금을 투자한다면서 일종의 낭비로 판단하였다. 하지만 울산은 이전 클럽들이 치어리더를 도입했다가 실패한 선례를 제대로 학습한 것인지, 도입하는 부분에서 뚜렷하게 차별점을 두었다. 바로 치어리더들을 또하나의 독보적인 컨텐츠로 승화시킨 것이다. 여기서부터 울산은 다른 선상에서 출발하였다. 2015년 2월 중순, 울산 팬들 사이에서는 한 장의 프로필 사진이 SNS를 통해서 공유되었다. 바로 울산 치어리더로 '치어리더계의 슈퍼스타'로 불리는 김연정이 울산 유니폼을 입고 촬영한 사진이었다. 김연정, 프로야구팀의 NC 다이노스, KBL의 LG 세이커스의 간판이자, 박기량과 함께 치어리더계의 양대산맥으로 손꼽힐 만큼, 스포츠 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이슈메이커 그 자체인 여성이다. 호날두-메시 부럽지 않는 인기를 과시하고 있던 그녀가, 울산 치어리더의 메인 이벤터로 자리잡았으니, 울산의 치어리더는 단숨에 주목받기 시작했다. 울산은 김연정을 필두로 한화 이글스에서 활약하고 있는 조민지와 이은지 등까지 영입하면서 4~6인조로 활동하는 '울산 큰애기'를 창단하였다. '울산 큰 애기' 라는 이름은 마치 그녀들에 딱 어울리는 이름인데, 1966년 가수 김상희씨가 발표한 노래에서 따온 이름으로 '사랑스럽고 인물이 뛰어난 울산의 여인상(이렇게 표현하면 울산 사람들은 가장 먼저 울산의 자랑인 김태희를 떠올린다)'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울산 큰애기는 울산의 홈개막전을 앞두고 실제로 길거리로 나가서 손수 전단지를 돌리면서 경기를 홍보하면서 단순히 경기장에서만 활동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켜주었다. 그리고 서울과의 홈개막전이 열렸던 3월 8일 일요일, 울산이 문수 E석에 새로이 창설한 익사이팅존에 그녀들이 등장하자, 울산의 서포터인 처용전사들의 시선까지 빼앗아갔다. 피치 위에서는 절대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치어리더계의 연예인들이, 이웃 관중석에 등장했으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날 하프타임 때 울산 큰애기의 축하공연이 펼쳐지는 동안, 처용전사는 물론이겠거니와, 멀리 서울에서 원정온 서울 팬들마저 하프라인을 향해 넋놓고 지켜봤다고 한다. 그리고 울산이 개막전 승리를 거두었는데, 개막전 승리 못지 않게 울산 큰애기의 언론 노출도 제법 상당했다. 2010년 치어리더 재도입 이후, 축구장의 치어리더들이 이정도로 주목받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타팀 축구팬들까지도 울산 큰애기가 소문이 났다. 울산팬들 입 사이로 자주 오르내리는 울산 큰애기가 워낙 궁금해서 나 또한 지난 5월 황금연휴 때를 이용하여 문수경기장에서 열리는 동해안더비를 보러 직접 울산까지 내려갔었다. 그 당시 울산은 동해안더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부가적으로 울산 큰애기가 경기의 중요성과 비례하여 최정예 멤버 6인조로 출격한다는 홍보까지 하면서, 한동안 SNS와 온라인에서 축구팬들의 반응을 유도했고, 나더러 직접 사진을 찍어와라, 동영상 찍어와라는 식의 부탁을 했던 익명의 지인까지 있었다. 그래서 직접 울산 큰애기를 익사이팅 존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로 본 소감은, "아! 얘네 너무 좋다!" 로 어느 순간에 바뀌어버렸다. 치어리더 문화에 부정적이었던 나도 느끼지 못한 사이 어느 순간에 긍정천사로 바뀌어 있었다. 경기 끝나고 치어리더 조민지가 누군지에 대해 검색하는 나 자신이었고, 옆에서 나와 같이 경기 보러왔다가 울산 큰애기 사진만 수백장 찍은 지인도 막상막하였다. 사상 최초(?) K리그 원정 치어리더로 발돋움한 울산 큰애기 비록 동해안 더비는 2대2 무승부로 승부를 가르지 못했고, 울산은 8경기 연속 승리를 달성하지 못하는 부진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산 내에서 반응은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물론 구단 게시판 내에서 성적 부진을 놓고 끝없는 논쟁을 펼치는 양측 구도(좀 더 지켜봐야한다 vs 이대론 안된다)의 대립은 여전했지만서도 말이다. 동해안 더비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울산은 서울 상암 원정경기에 울산 큰애기를 대동한다는 내용을 SNS로 홍보하였고, 이것은 다소 구단의 신선한 시도였다. 내가 다른 클럽들이 치어리더 운영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자세하게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나의 지인들 사이에서 치어리더들이 원정길에 올랐다는 소식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이러한 홍보 자체가 팬들에게는 또다른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가 되었다. 요즘 괜히 K리그 클래식 팀들 중 울산이 독보적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런 부분이 아닐까 싶다. 내친 김에 5월 31일 일요일, 나는 축구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하는 내 동생을 억지로 끌고 상암 경기장을 방문했다. 경기 시작은 오후 4시였지만, 나는 한 시간 일찍 원정석으로 입장하였고, 내가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울산 큰애기 2명(김주하, 송재경)이 도착했다. 처용전사들이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고, 일반 울산을 응원하는 관중들도 띄엄띄엄 들어오니 그녀들 또한 다소 어색하고 뻘쭘해보였다. 하지만 서포터즈들이 도착하여 S석을 채우기 시작하면서 그녀들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경기 시작 전에 서포터즈와 함께 원정석을 찾아준 일반 관중들에게 응원용 부채와 유니폼을 나눠주고, 폴라로이드로 같이 즉석 사진을 찍으면서 팬들과 상당히 가깝게 다가갔다. 난생 처음, 그것도 원정석에서 서포터즈와 치어리더가 한 공간에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융화되는 모습이 어색하면서도 놀라웠고, 한 편으로는 좋아보였다. 하프타임 때 서울 측에서 자신들의 팬들을 대상으로 이벤트하는 동안, 원정석에서는 치어리더들이 소소하게 호응 좋은 사람들에게 사인볼과 유니폼을 나눠주는 행사를 하면서 일반 팬과 서포터즈, 치어리더들이 한 데 어울리는 광경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좋은 반응을 유도하고 있었으니, 원정석에서 대기하던 기자들이나 방송국에서도 신기한듯 계속 자신들의 프레임에 담아갔다. 경기는 0대0 무승부로 끝나, 울산은 9경기 연속 무승을 거두면서 아직까지 살아나기엔 다소 힘이 부치는 모습을 보였고, 윤정환 감독에게도 상당히 고민거리가 되는 경기로 남았다. 하지만 경기 내용과 관계없이 S석은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처용전사들은 경기 끝나고 자축하는 의미에서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있다가, 함께 했던 여리한 울산 큰애기 2명과도 단체사진을 찍었다. 찍은 사진을 보았을 때, 누가 치어리더이고 서포터즈인지 구분하기가 조금 힘들었지만, 서포터즈나 치어리더나 양 측 다 한 켠의 좋은 추억거리로 남았고, 이것을 계기로 치어리더가 결코 K리그 응원문화에 마이너스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런 반응이 바로 울산보다 먼저 치어리더를 도입하였던 클럽들이 바라던 게 아니었을까? 이미 K리그 응원문화는 어여쁜 여성들로 이루어진 '울산 큰애기' 이전과 이후로 한 차례 변화하고 있고, 이것은 알게 모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이미 어느 한 기자는 원정 온 울산 큰애기를 주제로 한 기사까지 냈다. 원문 : http://blog.daum.net/manutdronaldo/658
호날두 빠진 ‘호르투갈’, 유로2016 우승 비밀
1. [카드뉴스] 호날두 빠진 ‘호르투갈’, 유로2016 우승한 이유 2. 대망의 유로 2016 결승 포르투갈은 개최국 프랑스와 결승에서 맞붙었습니다 3. 대회 시작 전 축구전문가들이 예측한 우승후보는 프랑스. “공격진과 미드필더진이 매우 강하다. 게다가 그들은 홈에서 경기한다” 프랑스 축구전설 티에리 앙리 BBC의 축구전문가 마크 로렌슨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까지. (1958년 이후 4719번의 국제경기를 분석해 프랑스를 우승후보로 예측) 여기에 한 명이 더 있었습니다. 축구황제 펠레. 4. 그에 반해 포르투갈은 호날두 원맨팀으로 불렸습니다. ‘호르투갈(호날두+포르투갈)’로 놀림받았죠, 1975년 이후 프랑스에 10연패한 기록도 그들의 기를 눌렀습니다. 5. 프랑스와의 결승에서는 ‘원맨’ 호날두가 빠집니다. 경기 시작 25분 만에 무릎 부상을 당해 교체된 호날두 그는 12년만의 유로 결승전에서 또다시 눈물을 보였습니다. 6. 하지만 프랑스가 경기를 압도하리란 예상은 뒤집어졌습니다. 특히 프랑스의 공격력을 무력화시킨 수비는 철벽이었습니다. 해설위원들은 “호날두의 빈 자리를 11명 선수가 골고루 나눠가졌다”고 평가했죠. 7. 잔뜩 웅크리고 있던 포르투갈은 연장전에서 한 방을 보여줍니다. 연장 후반 3분 에데르의 결승골이 터집니다. 그리고 경기 종료. 포르투갈은 처음으로 국제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8. 경기 후 인터뷰에서 선수들은 ‘하나’로 뛰었던 이유를 말합니다. 경기 MVP에 선정된 페페는 “부상당한 호날두를 위해서 뛰었다” 결승골을 넣은 에데르는 “포르투갈은 간절히 우승을 원했다. 우리는 자격이 있다” 부상 이후 벤치에서 동료들을 응원한 호날두는 “불운했던 부상, 그러나 동료들 믿었다”고 화답했죠. 9. 호날두 없이 ‘팀’으로 승리한 포르투갈 축구가 어떤 스포츠인지를 말해준 유로 2016 결승전이었습니다
군대실화) 본격 군대에서 축구하는 이야기
안녕하세요! optimic입니다. 누군가가 제게 그러셨죠. "이 분이라면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도 재밌게 쓰실 수 있을걸요?" 항상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껄껄... 그 말. 정말인지 확인해보기 위해! 제가 한 번 써보겠습니다. 바로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 나는 육군 출신이다. 육군이란 무엇인가. 밥 먹고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운동뿐이고, 운동 중에서 '축구'와 '족구'에 환장하는 종족. 첫 번째로 동명동 메시, 서초구 히바우두, 달서구 호날두 등등... 전국에서 숨어있던 동네 고수들이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며. 두 번째. 축구라고는 맥주 한 잔 하면서 프리미어리그를 보며 입으로만 축구하는 남자들이 모이기도 하며. 마지막으로 태어나서 축구를 해본 적도 없는 부드러운 사내들이 모여 눈치를 보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저 세 부류들 중 1~2번에 속했다. 축구를 잘하지는 못했다. 중학교 때 축구보다 먼저 '슬램덩크'에 빠진 나는 열심히 농구만 했고, 고등학교 때는 농구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반강제로 골키퍼를 맡았다. 그렇게 대학생이 됐다. 국어국문학과.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은 학과였고, 사지 멀쩡한 남자들은 체육대회 때 반강제로 축구를 해야 하는 곳이었다. 특히 내가 신입생이 됐을 때, 축구를 열심히 하며 체대생을 꿈꿨지만 부상으로 인해 축구 유망주를 접고 국문과에 입학한 예비역 선배 한 명과, 축구에 미쳐 학과 수업보다 축구를 더 사랑했던 선배 두 명이 날이면 날마다 축구를 할 수 있는 인원들을 모아 반강제로 축구를 시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나는 골키퍼를 열심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 단순히 과대라서 선배들에게 잘보이고 싶었던 나는 팔자에도 없는 다이빙을 열심히 하며 골키퍼를 했고, '너에게서 가능성을 봤다'며 축구 유망주를 꿈꿨던 그 선배는 시간날 때마다 나를 호출해 골키퍼 연습을 시켰다. 어찌 보면 고등학생 때까지 축구부에서 배웠던 사람에게 배웠으니, 나도 축구부 시스템으로 훈련받았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나는 방구석 입축구 전문가에서 국문과 골키퍼가 되었고, 선배들의 무수한 압박 속에 승부차기에서 두 골을 막아내며 국어국문학과가 공대를 꺾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입대한 군대. 그 중에서도 내가 나왔던 부대는 정말 공놀이에 미친 사람들 투성이었다. 군화도 제대로 신지 않은 채 차에서 내린 행보관님이 날렵한 몸놀림으로 족구장에서 서브를 꽂아넣고 하품을 하며 출근하기도 했고, 육중한 몸놀림으로 '훈련이나 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중대장이 안정환처럼 수비수를 농락한 뒤 세레머니를 하기도 했다. 축구를 너무 하고 싶어서 부대원들과 간부들이 사이좋게 삽 한자루로 언덕을 깎아 평지를 만들고, 정성스럽게 철근을 용접해 부대 내에 풋살 경기장을 만들었던 미친놈들의 소굴이었다. 그리고. 우리 중대에는 '그 사람'이 있었다. 대한민국 프로축구. K-리그에서 유망주로 불리다 불행한 사건에 휘말려 일반 육군으로 입대한 프로 선수. 소속팀과 이름은 밝힐 수 없다는 점. 심지어 그 사람과 동반입대한 친구는 대한민국 프로 씨름선수 출신이었다. 아무도 그 둘에게 개길 수 없었다. 그 선임들이 일병 때였다. 나와 2개월 차이가 났기 때문에 나도 일병이었고, 자주 붙어다녔다. 그 당시 중대에서 운동을 좋아하고 격투기 좀 배웠다 싶은 선임들, 간부들이 모두 그 씨름선수에게 "야. 나랑 씨름 한 판 해보자. 나도 운동 좀 했다." 라고 말하며 도전장을 내밀었고, 그 선임은 넉살 좋게 웃으며 "에이. 진짜 다치십니다. 그럼 저는 프로 출신이니, 다리 하나를 들고 하겠습니다." 라고 하며 샅바를 잡았고, 그 선임은 그렇게 중대의 모든 도전자들을 다리 하나로만 들어서 넘겨버렸다. 그 때 뜨거운 햇볕만큼이나 그 선임의 만두귀는 강렬했고, 보여주기 위한 근육이 아닌 단단하게 들어차 있는 '실전압축근육'은 모든 중대원들에게 경외감을 심어주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만두귀는 피해다녀라' 라는 격언을 인생 좌우명으로 삼으며 살고 있다. 그리고 프로 출신 축구선수였던 그 선임. 군대는 전국 팔도에서 온갖 사람들이 다 모이기에, 축구를 배웠던 사람들, 유학을 다녀왔던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 선임은 어나더 레벨이었다. 프로 구단에서 훈련을 받고 경기를 뛰며 어느정도 촉망받던 유망주였던 그 선임. 미드필더로 이미 스무살의 나이에 1군에 출장한 진짜 '선수'. 티비에서 축구 중계를 할 때 나오던 그 선수.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물론 프로 선수였다는 것은 네이버에만 쳐도 다 나왔기 때문에 믿었지만, "제가 진짜로 하면 축구 재미 없어집니다." 라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대대 축구대회에서 대대 최강 7중대를 상대로 우리 8중대 대표로 나왔던 그 선임은, 후반전 때 팀이 1대 0으로 지고 있자 "하아..." 라는 긴 한숨을 쉬고는 우리 골키퍼에서 상대방 골키퍼까지 혼자 공을 몰고 돌파해 여유있게 두 골을 때려박고 대대 체육대회에서 8중대를 우승으로 올려놓았다. 긴 한숨을 쉬며 어이없다는 듯 그 선임을 쳐다보던 7중대장의 이마. 탈모가 시작된 그 넓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만큼이나 그는 빛났다. 적어도 그 때만큼은 그는 호날두였다. 우리중대 호날두...호우... 그 날 이후 우리 중대는 소위 말하는 '짬순'으로 축구를 하던 룰이 사라졌다. 병장이라고 공격수만 할 수 없었고, 이등병이라고 수비수만 하지 않았다. 모든 포지션과 전술은 그 선임이 말하는 대로만 이루어졌다. 그리고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아마 그것은 그 선임 옆에서 듬직하게 지키고 있던 고향만두가 생각나는 귀를 가진 씨름선수 선임의 포스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이기자 역사상 최강의 동반입대병들의 포스는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그 선임들이 운동법과 축구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때는 모두가 경청했다. 사실 군대에 있으면서 어지간한 남자들은 몸 만드는 것과 축구에 목말라있었기 때문에 그 선임들이 하는 말들은 단순한 조언이 아닌 '프로 씨름선수의 피지컬 훈련'과 '프로 축구선수의 기본기 훈련'이었다. 유투브에서 해도 솔깃할 만한 달콤한 조언들 아니겠는가. 그리고 축구 대회가 진행될 때면. "오우. 중대장님 나이스!" "아 그래? 헤헤 성호야 나 잘했어?" 일병이 엄지를 들고 칭찬하면 대위가 쑥쓰러워하며 고마워하는 기상천외한 상황들이 연출됐다. "야. 너는 축구 한 번 배워봐라. 가능성 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 신체 밸런스가 괜찮은데? 들배지기 하나 알려주까?" "알려주시면 제 한 몸 씨름을 위해 쓰겠습니다!!!" 그 선임들이 툭 뱉는 칭찬은 후임들에게는 '프로 선수에게 인정받았다'라는 엄청난 동기부여를 주었고, 거의 모든 중대원들이 주말만 되면 오전에는 씨름과 웨이트 트레이닝, 오후에는 공을 들고 운동장을 누비는 광경이 연출됐다. 그렇게 중대원들 몸이 점점 구릿빛으로 진해질 무렵. 나는 상병이 됐다. "어이. 랩쟁이." 가끔 씨름선수였던 그 선임은, 사단 대표로 나가서 노래를 부르고 휴가를 받았던 나를 이렇게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나는 부끄러움이 많은 편이었다. "랩 한번 해보그라." "췍. 췍. 앰네ㅐ뤠눌내무랜ㅁ언ㅁ엉어단아ㅡㅏ 췍!" 그리고 부끄러움보다 만두귀의 공포가 더 많은 편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 번씩 궁중 광대같은 생활을 하며 터미네이터들에게 예쁨을 받았고, 상병이 되고 그들이 고참이 됐을 때도 그들을 따라다녔다. 그렇게 우리가 상병일 때, 대대에서는 또 체육대회가 열렸고, 축구대회를 위해 선임들은 중대원을 호출했다. "니는 공은 잘 못차는데 달리기가 빠르네. 골키퍼 하지 말고 측면 공격수를 해라." "잘못들었습니다? 저... 저는 공을 잘..." "닥치고 그냥 공 받으면 앞으로 툭 차. 그리고 뛰어. 누가 붙으면 어깨로 밀어. 그리고 슛을 때리던 패스를 하던 알아서 해. 쉽지?" "...그게 축구 맞습니까?" "야씨. 그럼 내가 농구선수냐? 너넨 다 기본기가 부족해서 여러가지 시키면 안돼. 하라는 것만 해." 그렇게 나는 왼쪽 공격수가 됐다. 그 선임의 전술은 매우 간단했다. 한 명 한 명 불러서 뭔가를 주문했는데, 다들 엄청 쉬운 것들이었다. "측면 수비수는 측면 공격수한테 무조건 공을 차. 받아도 그만 못받아도 그만. 오케이?" "중앙 수비수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앞으로 뻥 차던가, 앞에 있는 나한테 주던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공격수는 기다리시면 됩니다. 어떻게든 제가 공 올려드릴테니까, 발만 대시면 됩니다." -끄덕. 공격수를 맡았던 소대장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작된 대대 축구대회. 수비수에 있던 씨름선수 선임과 중앙에서 모든 것을 진두지휘했던 프로선수 출신의 선임, 그리고 '우리는 프로들에게 훈련받았다'는 자부심으로 사기가 하늘을 찌르던 중대원들과 간부들. 우리는 파죽지세로 결승전까지 진출했고, 결승전에서 대대 최강이었던 7중대를 다시 만나게 됐다. 무난하게 우리가 이길 거라고 생각했던 결승전은 묘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애초에 우리가 연습한 것보다 7중대는 더 열심히 연습을 했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던 7중대장은 축구대회 전부터 쥐잡듯이 중대원들을 훈련시켰고, 결승전에서 축구선수 선임에게 무려 4명을 붙여 꽁꽁 싸매는 전술을 들고 나왔다. '축구선수는 일반 게임에서 진지하게 뛰면 안된다'는 주의로 중앙에서 패스만 뿌려주던 선임과 실력이 부족한 8중대원들, 그에 비해 악에 받힌 채 뛰어다니던 7중대원들로 인해 경기는 0대0으로 팽팽하게 전반전 막바지까지 흘러갔다. 그렇게 전반전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패스가 최전방에 있던 소대장에게 흘러갔다. 센스있게 중앙에서 패스를 뿌려준 그 선임 덕분에 당시 중위였던 소대장은 마지막 슛을 날리게 됐고, 소대장은 힘차게 공을 찼다. -뚜둑! 공은 프리미어리그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궤적을 그리며 아름답게 골대로 빨려들어갔고,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소대장에게 뛰어갔다. "와아!!! 소대장님!!! 대박!!!" 하면서 뛰어가던 우리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힘차게 공을 찼는데... '뻥'이 아니라... '뚜둑'...?" 그렇게 생각하며 소대장 쪽을 쳐다보자 "와아!!! 내가 골이다!!!" 라고 말하며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소대장이 있었고, 축구선수 선임은 "아.. 십자인대 나갔네..." 라고 말하며 절래절래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전반전이 종료되고, 소대장은 대대 엠뷸런스를 타기 위해 들것에 실려나갔다. "내 인생 최고의 슛이었어." 라고 말하며 엄지를 세우던 소대장은 그렇게 엠뷸런스의 구슬픈 사이렌 소리와 함께 대대를 벗어났다. 그렇게 폭풍같던 전반전이 지난 다음 찾아온 후반전. "그러니까 조심 좀 하라니까는 소대장님. 어휴. 나와 이 새끼들아!" 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걸죽한 욕설과 함께 행보관이 공격수로 투입됐다. 장동건과 동갑이었지만 임하룡과 비슷한 연배의 얼굴을 소유한 행보관은 경기 시작부터 욕을 한 바가지로 퍼부으며 상대방 수비진을 농락했다. "나와! 다 뒤질래? 나와! 나오라고!" "7중대! 쫄지마! 얼굴만 늙었지 형이야! 쫄지말고 막아!" "아니 7중대장님 너무하십니다!" "행보관님 애들 겁주지 마세요!" 나름대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각종 예능축구들을 선보이던 행보관.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격진에서 시끄럽게 해준 행보관 덕분에 후반전이 시작되고 얼마동안은 1:0이 유지됐다. 우리 수비진들은 평화롭게 산책을 했고, 예상 외의 행보관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10분동안만... "허억....허억... 아 씨바 힘들어..." 10분이 지나자마자 행보관의 체력은 거짓말처럼 급격하게 방전되기 시작했고, 우리는 위험한 한골 차 리드를 챙긴 채 아등바등 뛰고 있었다. 그리고 후반전이 끝나기 얼마 전. "어! 어! 씨바 비켜!" 축구선수 선임이 차올린 공이 정확히 행보관의 머리 위로 떨어졌고. -팡! -우당탕! 그 공은 정확히 행보관의 발등에 걸렸다. 무려 오버헤드킥. 행보관은 그 짧은 순간 육중한 몸을 띄워 공중에서 공을 차냈고, 공중에서의 임무를 무사히 마친 그의 무거운 몸은 중력과 함께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어..? 어...?" "와아아!!!!!! 행보관님!!!!!" 우리는 믿을 수 없이 멋진 골에 놀란 채 환호하며 흙바닥에 대자로 누워있는 행보관을 향해 달려들었다. "야! 야! 오지마! 이 씨바 오지마! 잠깐만! 진짜 야!" 행보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지만, 아드레날린이 폭발한 우리들은 행보관 위로 올라타며 기쁨의 세레머니를 했고, 세레머니가 끝난 후 행보관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일어나지 못했다. "야. 소대장님 태우고 간 엠뷸런스... 복귀했으면 일로 오라그래라...빨리..." 그렇게 방금 부대로 복귀해 체육대회를 즐기고자 했던 의무병과 운전병은 다시 들것을 들고 뛰어왔고, 날렵했던 소대장과는 달리 100키로에 가까웠던 행보관을 들기 위해 들것에는 4명의 장정이 달라붙었다. -웨용 웨-용 웨-용 그렇게 행보관은 떠나갔다. 허리가 나갔다며... 엠뷸런스는 오늘따라 더욱 구슬프게 사이렌 소리를 두 번이나 내며 초가을 연병장 바닥에 타이어자국을 남긴 채 떠나갔고, 그렇게 우리 중대는 대대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이 시발 간부가 둘이나 실려간 팀을 어떻게 이겨..." 오늘따라 더 휑해보이는 이마를 빛내며, 7중대장은 절규했다. 그렇게 요란한 금요일이 지나고, 주말이 지난 후. 행보관은 허리에 복대를 찬 채 복귀했다. '앞으로 축구하면 죽여버리겠다'며... 소대장은 돌아오지 못했다. 십자인대 파열로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우리 중대장. 기아 타이거즈의 광팬이며 사회인 야구단에서 오래 활동했던 우리 중대장은 "축구하다 사람이 왜 이렇게 다치냐. 당분간 축구는 금지한다." 라고 말하며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야구 글러브 10개를 부대로 주문했다. 그렇게 열심히 축구를 배우던 병사들과, 전직 프로 축구선수, 전직 씨름선수는 모두 4번타자를 꿈꾸며 배트를 휘둘렀고, 중대장은 매주 주말 환하게 웃으며 글러브를 들고 우리를 집합시켰다... ------------------------------끝 이상 군대에서 축구했던 이야기였습니다! 재미는 음... 어... 없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재밌게 읽어 주세요! 감사합니당!
KOT가 선정한 역대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TOP 6
FC 코리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들의 축구 국가대표팀에 대한 관심은 상당합니다. 국대 축구를 00년부터 보기 시작한 본 에디터가 약 17년간 본 국대 스쿼드 중 가장 강했던 TOP 6를 선정해보았습니다. 'KOT가 선정한 역대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TOP 6' P.S: 사실상 성인팀에 가까운 올림픽 대표팀도 포함했습니다. 6위. 2007 아시안컵 대표팀 감독: 핌 베어벡 성적: 아시안컵 3위 의의: 한국축구에 4백 장착 아시안컵 3위에 그친 팀이 지난 17년간의 대표팀 중 6위에 선정된다는 점에 대해 의아해 하실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전에 쿠엘류, 본프레레, 아드보카트 감독 등 유수의 외국인 수장들이 거쳐갔지만, 우리나라에는 아직 4백 수비가 제대로 정착되어있지 못했는데요. 이 대회를 통해 4백 수비가 정착된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물론, 경기력이 발암이었다는 점은 논외로 하구요. MVP: 이운재 (토너먼트 무실점 및 승부차기 2승 1패) 5위. 2004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 감독: 김호곤 성적: 올림픽 8강 의의: 세계무대에서의 가능성을 엿보다 평가전 내내 강했던 파라과이를 만나 허무하게 8강에서 떨어진데다, 본선 4경기에서 8실점으로 수비라인이 무너졌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올림픽 대표팀은 지역예선에서 8전 8승 12득점 무실점으로 쾌조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비록 기존 와일드카드인 송종국, 김남일의 부상하차 및 박지성 차출 실패 등이 겹쳤지만, 지난 2012 런던 올림픽 이전에 가장 좋은 경기력을 보여준 팀이었습니다. MVP: 조재진 (4경기 2득점) 이천수 (4경기 2득점) 4위. 2015 아시안컵 대표팀 감독: 울리 슈틸리케 성적: 아시안컵 준우승 의의: 27년만의 아시안컵 결승 진출 55년만의 아시안컵 우승에도 실패했고, '늪축구'라고 포장하긴 했지만 경기력도 별로였죠. 사실 2011 아시안컵 대표팀의 경기력이 더 나았다고 보여지나, 프로는 결과로 말합니다. 대회 전부터 이동국, 김신욱이 부상으로 낙마했고 대회를 치르면서 이명주의 폼 저하 및 이청용, 구자철의 부상 이탈로 애를 먹었지만 꾸역꾸역 승리하며 결승전까지 갔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우즈벡과의 8강전에서 연장전 2골로 승리한 점은 백미였다죠? MVP: 김진현 (5경기 무실점) 3위. 2012 런던 올림픽 대표팀 감독: 홍명보 성적: 동메달 의의: 사상 첫 올림픽 메달 획득 병역면제라는 동기부여가 주어질 경우, 얼마나 좋은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 드러난 대회였습니다. 뭐, 선수들의 동기부여를 폄하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 당시 선수들의 폼은 절정에 이르렀죠. 홍명보 감독 특유의 (전술 유동성이 없는) 4-2-3-1의 명암 중 암보다는 명이 드러났던 시기였습니다. 나름의 의리축구가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 대회였다고 평합니다. MVP: 구자철 (주장 + 6경기 출전) 2위. 2010 남아공 월드컵 대표팀 감독: 허정무 성적: 16강 의의: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 대회 직전에 센터백인 곽태휘가 부상으로 이탈하고, 지역예선에서 팀을 캐리했던 이근호가 폼 저하로 탈락. 설상가상으로 베테랑 골키퍼 이운재도 노쇠화가 뚜렷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을 잘 추스려 사상 첫 원정 16강 신화를 만들어낸 허정무 감독의 역량은 평가절하하기 힘듭니다. 사실 저 스쿼드로 16강에서 그친 점은 아쉽긴하지만, 순수 전력만 보면 어쩌면 2002 한일 월드컵 이상이라고 보여집니다. MVP: 박지성 (4경기 1골) 기성용 (4경기 2도움) 이정수 (4경기 2골) 1위. 2002 한일 월드컵 대표팀 감독: 거스 히딩크 성적: 4강 의의: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승리 사상 첫 월드컵 16강 진출 아시아 국가 역사상 첫 4강 진출 아시아 선수 역사상 첫 개인 타이틀 수상 (홍명보의 브론즈볼 수상) 이 대표팀을 글자 몇 줄로 평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실례일 것 같습니다. 제 유년시절을 수놓았고, 축구로 벌어먹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해준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팀이었죠. 이런 대표팀이 다시 나올 수 있을까요? MVP: 히딩크 감독에게 적극적인 지지와 지원을 아끼지 않은 KFA 관계자 전원 + 히딩크 감독 이하 코칭스태프 전원 + 23인 엔트리 선수 전원 좋아요와 댓글은 본 에디터에게 큰 힘이 된다능..ㅎㅎ 데헷 :) https://www.facebook.com/sportsgurukorea/
[울산 레전드 특집] 01. '유비' 유상철
울산도 어느덧 팀이 생긴지 30년이 넘은 K리그를 대표하는 명문팀이나, 그 30년 가까운 역사에서 리그를 제패했던 적이 딱 2번, 운도 지지리 없어서 준우승만 머물렀던 것이 무려 8번이나 되니 이만하면 K리그의 '콩구단'이 아닌가 싶을정도다. 이 3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울산에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거쳐갔지만, 정작 레전드로 꼽을만한 선수가 누가 있냐고 말한다면 의외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선수들 대부분이 '거쳐가는 클럽'으로 인식을 한건지 울산을 발판으로 다른 팀으로 떠나기 일쑤였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울산을 대표하는 레전드가 그만큼 더 귀하고 생각보다 끄집어내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그 중에서 가장 생각나는 선수를 꼽자면 나는 제일 먼저 이 선수를 언급하고 싶다. 바로 '유비' 유상철이다. 유상철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울산골수팬으로 자리잡았을 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1. 허약체질 개선을 위해 신었던 축구화, 선수로써 꿈을 키우다 184cm 78kg(선수시절 프로필)의 체격으로 몸싸움에서 웬만한 유럽 선수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유상철이지만, 어렸을 때는 아주 정반대였다. 어렸을 적 유상철은 유난히 허약하고 잔병치레가 많아 키도 작고 비쩍 말라서 운동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며, 그가 초등학교 5학년때 처음 축구를 시작하게 된 것도 축구에 대한 재능이 있었다기 보단 허약체질을 개선해서 몸이 좋아질 것을 기대한 어머니의 권유였다. 그렇게 축구를 시작하게 된 유상철은 응암초등학교-경신중-경신고를 거쳐서 축구선수로써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었으나, 문제는 그의 작은 키가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경신고에 진학하고 나서 1학년 때 당시 감독이 축구를 그만두라고 권유했을 정도였다. 이 권유가 충격요법으로 작용했던 것인지 그해 겨율 합숙훈련에 합류하는 대신에 두달간 보약을 보충하면서 체력을 키워나갔고 그 노력의 정성이 빛을 발했던 것인지 고2때부터 키가 자라 2년 사이에 20cm나 성장했다. 고등학교 시절 눈에 띌 정도로 부각되진 않았으나 팀플레이에 능했던 덕분에 유상철은 1990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U-19 AFC대회 챔피언쉽에 한국대표팀으로 뽑혔으며 한국을 우승으로 이끄는 데 크나큰 활약을 펼쳤고, 한국은 1991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진출티켓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러나 1991년 남북 단일 대표팀이 결성되는 바람에 아쉽게도 유상철은 청소년대표팀 엔트리에 들지 못하였다. 그렇게 유상철은 경신고를 거쳐 건국대학교로 진학한 후에 1994년에 프로무대에 발을 내딛게 되는데, 그가 데뷔한 팀은 다름 아닌 자신의 고향인 서울팀이 아니라 울산이었다. 2. '유비' 유상철, 대중 앞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새기다(1994~1997) 사실 유상철은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자란 서울 로컬이었기 때문에 프로팀을 서울을 연고로 하는 팀을 원했었으나 울산이 드래프트 1순위로 유상철을 택했다. K리그가 개막하기 전에 그는 94년 미국월드컵 대표팀 전지훈련에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몸만들기에 들어간 것이 그에게 긍정적인 효과로 작용되었고, 1994년 3월 5일 미국과의 A매치 데뷔무대를 가지기도 했다(아쉽게도 94 미국월드컵 대표팀 최종엔트리에 뽑히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그는 울산에서 우측 수비수로 처음 프로데뷔무대를 가지게 되었다. 수비수로서 좋은 활약을 보였던 덕분에 그는 그의 존재를 처음으로 부각할 수 있었던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대표팀 명단에 선발되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8강전은 유상철 이름 석자를 대한민국에 처음 부각시켰던 경기였다. 당시 8강전은 한일전이었기 때문에 분위기상으로는 사실상 결승전이나 다름없던 무대였고, 우리나라는 일본을 상대로 1대0으로 밀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한정국의 힐패스를 이어받은 유상철은 오른발 발등으로 공을 골대로 밀어넣으면서 동점골을 뽑아냈고, 이것을 기점으로 한국은 일본을 계속 몰아치다가 결국 3대2 역전승을 거두며 아시안게임 4강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것이 유상철이 '한일전의 사나이'로 불리어지게 된 첫 계기였다. 그 해 유상철은 국가대표로서 아시안게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듯이 클럽팀인 울산에서도 5골 1도움을 기록하며 신인선수 신분으로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기쁨까지 누리게 되었다. 프로 첫시즌을 성공리에 마무리한 유상철은 다음해인 1995년에는 홍콩국제대회나 다이너스티컵과 코리아컵 등 다수의 국제대회에 참가하면서 경험을 축적하였고, K리그 올스타전에서 올스타대표로 선정되며 1996년 아틀랜타 올림픽대표팀 와일드카드로 뽑히면서 1996년 올림픽에 참가하려고 했으나, 올림픽 직전에 부상을 당하면서 중도하차하게 되었다. 이 때 부상의 여파로 유상철은 8경기에서 1골을 기록하는 등 부진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밑바닥을 찍으면 다시 상한가로 돌아서듯이 그러한 부진을 유상철은 1996년 수원과의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 1대1로 비기고 있던 상황에서 역전골을 뽑아내면서 부진을 만회하는 데 성공했고, 울산의 첫번째 챔피언 등극에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 때 고재욱 감독의 플랜에 유상철이란 존재는 필수요소였다. 1996년 첫 리그 챔피언으로 등극한 이후 이듬해인 1997년은 울산 구단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화려한 멤버진을 갖췄다. 이당시 울산은 일명 '깡패축구'로 올드팬들에게 불리기도 했는데, 김현석, 유상철, 김병지, 김종건, 황승주, 정정수, 김상훈, 박정배 등 울산 스쿼드 한 명 한 명의 존재감이 상당히 컸다. 하지만 1996년 리그 우승의 임팩트가 너무나 컸던 지, 1997년은 슬럼프에 빠졌다. 특히나 1996년에 속히 말해 '날라다녔던 신인 선수들'도 2년차 징크스에 대부분 빠져버린 셈이었다. 유상철은 부진한 것은 아니나 당시 팀의 분위기에 맞물려서 그렇게 큰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3. 세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유상철, 그리고 J리그 사기유닛시절(1998~2002) 1998년은 유상철을 대한민국을 대표로 하는 슈퍼스타로 만들어준 결정적인 해였다. 이미 K리그 내에서는 나름 입지를 갖춘 미드필더이긴 했지만, 그의 진가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아마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 아니었나 싶다. 월드컵 대표팀으로 나서기 전에 열렸던 아디다스컵 대회에서 유상철은 주축선수로 활약하면서 팀의 컵대회 우승에 큰 도움이 되었고, 이 때 활약을 발판으로 프랑스월드컵에서는 대표팀 주장완장을 차고 뛰었다. 특히나, 벨기에전에 유상철이 터뜨린 극적인 동점골은 유상철이라는 선수를 전세계적으로 알리게 된 경기이자, 유상철의 득점본능을 깨우게 된 결정적 사건이었다. 그 전까지 유상철이 울산이나 국가대표에서 맡았던 역할은 주로 중원에서 조율을 전담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1998년의 유상철은 내 뇌리 속에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고, 내가 울산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유상철이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비록 수원에게 리그 챔피언 타이틀을 빼앗기긴 했지만, 그의 활약상은 충분히 찬사받을만 했다.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를 경험하고 난 뒤, 유상철은 한 층 더 진화한 모습이었다. 그동안 수비수와 미드필더로만 뛰었던 그가 정규리그에서만 무려 14골을 뽑아내면서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1997년에 김현석에 이어 1998년에 유상철이 득점왕에 올라서면서 울산은 2년 연속 득점왕을 배출해낸 셈이다. 사실 유상철이 기술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그가 스트라이커로 포지션 변경해서 성공할 수 있었던 계기는 타고난 피지컬과 위치선정, 그리고 넓은 시야가 크게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유상철처럼 수비수/미드필더/공격수 모두 뛰면서 좋은 활약을 펼쳤던 선수는 이전에 김주성 밖에 없었고, 현재까진 없다. 하지만 유상철은 1998년을 끝으로 울산을 떠나게 되었다. 월드컵과 K리그에서 보여준 활약상의 영향인지 옆나라 일본 J리그에서 오퍼가 들어왔고,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 일본 요코하마 마리노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그의 활약은 여전했다, 아니 유상철은 속칭 "J리그를 씹어먹는 사기유닛"이 되었다. 전반적으로 J리그 선수들이 하드웨어적인 부분에 있어서 약점을 보이다보니 힘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유상철에게 있어서는 J리그는 완전히 독무대였다. 요코하마로 가서 유상철은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전 포지션을 오가면서 활약했다. 그러다 2000년에는 같은 울산 출신인 김현석과 더불어 J리그 득점왕 경쟁까지 했을 정도이니 그의 J리그 활약은 길게 설명하면 입이 아플 정도다(2000년 유상철의 경기 기록 : 리그 22경기 출장 17골/리그컵 6경기 출장 4골). 그렇게 2001년에는 황선홍-홍명보가 있는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하면서 '코리안 3인방'을 결성하기도 했다. J리그 활약 당시에 유상철에게 놀랄만한 오퍼가 들어왔다. 바로 스페인의 명문 클럽인 FC 바르셀로나로부터 이적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이 당시 한국인 선수에게 유럽팀으로부터 오퍼가 들어온다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이며, 지금 시대에 비해 한국 선수들의 유럽에서의 인지도도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시절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유상철의 바르샤행 링크 자체만 하더라도 크나큰 파장을 줬다. 사실 바르샤에서 관심을 가질 만 했던 것도 당시 유상철이 1998 FIFA 올스타팀에 선정될 정도 주가를 높이고 있던 터였는 데다가 수비수/미드필더/공격수를 가리지 않는 멀티 플레이어 능력이 주목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이적설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에이전트 및 기타 문제로 결렬되었다고 한다. 4. 2002년 월드컵의 진정한 히어로, 그리고 친정팀으로 금의환향(2002~2006) 2001년, 한국 축구는 거스 히딩크라는 네덜란드 출신 외국인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앉히면서 터닝포인트를 맞이하였다. 그가 오기 전에 한국 축구는 "축구강국들에 비해 기술이 떨어지고, 힘과 체력이 앞선다"라는 평이 많아서 브라질로 유학 보내는 사례가 많았다(울산이나 포항 등 몇몇 K리그 클럽들이 실제로 브라질 유학파를 육성하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히딩크는 오히려 "한국축구는 기술은 좋으나, 힘과 체력이 떨어진다"는 정반대의 평가를 하면서 한국 축구계를 발칵 뒤집어놨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선수들에게 체력과 피지컬 강화 운동에 주력했다. 그 중심에는 유상철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히딩크호가 부침을 거듭하게 되자, 국가대표팀에 대한 불안감도 가중되었고, 이에 맞물려 유상철도 한국 스타플레이어들이 통과의례로 치르던 안티지분을 대량 확보했다. 정확하게는 유상철의 안티확보 근원은 2000년 허정무 감독시절, 그가 스트라이커로 뛸 때 숱한 1대1 찬스를 날려버린 것 때문에 붙은 것이다. 그 이후로 스트라이커 기용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흔들릴 유상철은 아니었다. 히딩크호에서 유상철의 입지는 굳건했고, 일전에 히딩크가 홍명보를 다스리기 위한 방책으로 그를 센터백으로 기용하기까지 했으니 그의 입지에는 별 타격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02년 월드컵 당일, 유상철은 폴란드전에서 통쾌한 중거리슛을 꽂아넣으면서 한국대표팀에게 첫 월드컵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한국은 54년만에 월드컵 1승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월드컵 기간 내내 줄곧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하면서 김남일과 함께 중원에 포진되었다. 영국의 축구평론가인 앤드류 워쇼가 UEFA에 기고한 글에서 유상철을 "유상철은 이번 월드컵에 참여한 수비형 미드필더 중 최고다. 그의 침착성과 탁월한 볼 배급 능력은 경이로운 수준이고, 세계 축구팬들은 그의 등번호(6)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평가할 만큼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히딩크가 김태영-홍명보를 빼고 닥공모드를 시전할 당시에 최진철과 함께 최후방 수비를 맡으면서 이탈리아의 역습을 막아내기도 했고, 스페인과의 8강전에선 센츄리클럽에 가입했다. 2002년 월드컵 영웅은 이렇게 탄생했다. 월드컵 4강신화의 주축으로 주목받던 유상철은 월드컵이 끝나고 일본에서 유럽으로 진출하기 위해 가시와 레이솔을 떠나 유럽 클럽팀들을 알아보고 있었으나, 자신의 에이전트의 무능력으로 인해 유럽 진출은 커녕 무적신세가 되면서 선수생활에 큰 위기에 봉착했다. 이러한 와중에, 국제미아가 될 뻔한 유상철에게 구원의 손길을 준 팀이 있었으니, 바로 유상철의 친정팀인 울산이었다. 그리고 유상철이 복귀한 뒤에 처음으로 골을 터뜨린 경기가 재밌게도 지난 1998년 울산에서의 마지막 골을 기록했던 성남전이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선발 출장하여 이천수와 3골 합작하면서 침체된 울산의 순위를 끌어올리기 8연승을 달리며 2위로 리그를 마쳤다. 이정도면 상당히 성공적인 K리그 복귀였다. 다음 해인 2003년에 FA 자격으로 자유신분이 되었지만, 울산이 연봉 3억원에 격려금 2억원을 제시하면서 울산과 재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해 부산과의 경기에서 이장관이 유상철에게 비신사적인 태클을 걸었고, 이에 이성을 잃은 유상철은 이장관을 폭행하면서 5경기 출장정지와 820만원의 벌금을 물었다. 유상철은 이 징계에 대해 "동업자 정신을 버린 축구에 대해 화가 났다"고 밝혔고, 이 사건을 계기로 J리그로 떠나버렸다. 자신이 J리그에서 처음으로 뛰었던 요코하마로 재이적한 유상철은 2003년 시즌 후반기에 17경기 출장 6골을 뽑아내면서 요코하마의 전/후기 리그 통합 우승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연봉 1억엔으로 계약하였다. 히딩크가 국가대표 지휘봉을 내려놓은 이후에도 유상철은 여전히 국가대표팀의 중심이었다. 쿠엘류-박성화 감독체제를 거치면서 맏형 역할로 동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일조하였으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선 와일드카드로 뽑혀서 어린 선수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맡으며 올림픽 대표팀을 8강까지 견인하였다(올림픽 대표팀에선 플랫3에서 뛰었다). 요코하마가 2년 연속 리그 제패한 뒤에, 유상철은 방출되었다. 노장인데다가 2002년 이후로 계속 부상이 잦았던 것이 원인이었다. 이러던 와중에, 유상철은 다시 울산으로 복귀하길 결심하면서 2005년 울산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유상철은 그렇게 많은 경기 수를 출장하지 못했다. 부상후유증과 노쇠화도 있지만, 유경렬-조세권 등의 주축 선수들이 자리를 잡은 터라 쉽사리 이들을 밀어내고 주전으로 자리잡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상철은 조금 뒤로 물러나서 울산 선수들을 독려하는 역할을 맡았고, 결국 울산은 2005년에 리그 두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유상철은 울산에서 뛰면서 리그 우승 2번 모두 경험하는 울산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그 이후, 유상철은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고 싶어했지만, 그의 무릎이 허락하지 않았다(유상철의 왼쪽 무릎 부상이 호전되지 않았던 터였다). 결국 그는 2006년 K리그 울산 홈개막전에서 은퇴경기를 치뤘고, 후에 요코하마에서도 유상철의 은퇴경기를 기념했다고 한다. 이렇게 '유비' 유상철의 선수 경력은 마감하게 되었다. 후에 예능 프로그램에서 밝혔는데, 유상철은 선수로 뛸 당시에 왼쪽 눈이 실명상태라 오른쪽 눈에 의지한 채로 경기를 뛰었다는 것을 고백했고, 이러한 사실은 심지어 그의 가족들조차도 몰랐다고 한다. 이러한 부상을 숨긴 채, 그는 남모르는 노력을 부단히 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선수 생활 은퇴 이후, 유상철은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으며, TV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날아라 슛돌이 감독을 시작으로 춘천기계공업고 감독, 그리고 현재는 대전 감독 지휘봉을 잡기도 했었고, 현재는 울산대학교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오로지 울산에서만 뛰었던 '의리파 유비' 유상철, 그 때가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울산으로 돌아오길 기다린다. 유.상.철. 원문 : http://blog.daum.net/manutdronaldo/502
학교 폭력에 시달렸던 박지성
나를 때린 수많은 선배들에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얻어맞는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저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선배의 몽둥이 세례를 견디어야 한다는 것, 축구를 하기 위해서는 부당한 폭력을 묵묵히 참아내야 하는 상황이 나를 힘들게 했다. 잘못해서 맞는 것이라면 100대라도 기분 좋게 맞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제는 저 선배가 기분이 좋지 않아서, 오늘은 이 선배가 감독한테 야단맞았기 떄문에 밤마다 몽둥이 찜질을 당해야 하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었다. 학창시절 셀 수 없을 정도로 선배들에게 두드려 맞으면서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는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후배들을 때리지 않겠다" 그리고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켰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서 최고참 선배가 되었을때도 나는 후배들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다. 후배들에게 진정 권위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면, 실력으로 승부하기바란다. 실력과 인품이 뛰어난 선배에게는 자연스럽게 권위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동안 내가 뛰어난 선배들을 직접 겪으며 얻은 교훈이기도 하다. 어렸을적 어머니 심부름으러 오천원짜리 지폐를 들고 밖에 나섰다 잃어버렸던 날, 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맞았습니다. 고작 한 대 맞은 것이라 그리 아프지 않았는데도 어머니는 그날 이후 며칠간 내게 무척 미안해했습니다. 축구부 합숙을 시작하면서 정말 정기적으로 매일 구타를 당하던 나를 보셨다면 아마도 까무라치셨겠죠. 박지성 어머니가 박지성에게 보낸 편지中 학창시절 멍이 시퍼렇게 들도록 맞고 들어와 혹시나 엄마 눈에 눈물이 맺힐까봐 친구하고 부딫혀서 그렇게 되었다며 겸연쩍게 씩 웃던 속 깊은 네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구나. 아버지 자서전 中 지성이가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대 그 중학교 축구부에서 며칠 훈련에 참석했다가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분명 학교에서 무슨일이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추궁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여기저기 멍자국이 많아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도 신경쓰지 말라고만 했다. 나중에서야 이유를 말하길 "아빠, 내가 단체 훈련 끝나고 따로 개인 훈련을 했거든요. 그런데 선배들이 왜 너만 따로 훈련을 하느냐, 다른 선수들은 쉬고 있는데, 왜 유독 너만 튀는 행동을 하느냐면서 때리더라고요" 그후 박지성은 원래 가려던 중학교를 안가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중학교로감 아버지 자서전 中 "아빠, 전 절대 수원공고엔 가지 않을거에요. 3년 동안 화성에서 생활 하면서 다시는 수원에 가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지금 수원공고에는 절 괴롭혔던 사람들이 모두 뛰고 있단 말이에요" 수원공고 1학년 축구부 동기들도 지성이를 싫어했으니, 지성이의 마음고생이 어떠했으리란 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수원공고에 다닐 당시 선배의 구타에 못이겨 몇몇 선수들끼리 팀에서 도망을 치기로 계획을 짰다. 당연히 박지성도 그 멤버에 포함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중 디데이 며칠을 앞두고 훈련 후 선배의 구타에 박지성의 팔이 부러졌다. 어쩔 수 없이 박지성은 합숙소에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 부상으로 인해 축구부 숙소 이탈 약속을 지킬수 없게 되었다. 수원공고 시절 지성이가 훈련을 마치고 집에왔는데, 방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났다. 무슨일인가 싶어서 방문을 열어봤더나 인기척 소리에 후다닥 이불을 덮고 엎드려 있는 지성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그래? 어디 아픈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요. 그냥 좀 힘들어서.. 별일 아니에요" 아무리봐도 이상하다 싶어 이불을 들쳤더니 세상에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린 부분에 뻘겋게 피멍이 들어있었다. 지성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확인하자, 온통 씨뻘건 멍투성이였다. 운동하는 선수들이라면 훈련 외에 구타와 체벌은 덤으로 따라다니는 부분이라 나 역시 알면서도 웬만해선 눈감고 못 본척 넘기기 일수였다. 그러나 그때 내가 직접 목격한 모습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당장 학교로 달려가서 지성이를 때린 사람을 붙잡고 마구 혼을 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부터일까, 지성이가 한국에서 축구를 했다간 선배들 등쌀에, 또한 줄서기 좋아하는 일부 사람들의  사심에 의해 제대로 크지도 못하고 주저 앉을 것만 같았다. 가끔 지성이는 이런말을 한다 "만약 내가 맞지 않고 축구를 배웠다면 지금 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박지성 축구센터를 세운 이유도 이때문이다. 더이상 아이들이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축구를 배우기 보다는 더 나은 환경속에서 축구를 자유로이 즐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박지성 축구센터를 통해 어린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공을 차고 달리면서 희망도 함께 꿈꾸길 바란다. 차범근이 박지성 국가대표 은퇴 발표를 하고 난뒤 쓴글.. "지성이가 은퇴를 합니다. 아니 한다고 합니다.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무릎에 물이 많이 차는 모양입니다. 무릎을 너무 많이 쓴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것도 무리하게 어려서 부터.. 지난핸가. 지성이가 어딘가에서 스피치를 하면서 우리나라 처럼 맞으면서 축구를 하는 나라는 없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유독 그 얘기를 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 우리가 그토록 아끼고 자랑스러워 하던 최고의  선수를 30살에 은퇴시키는 안타까움 앞에서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출처 : 오유 유소년 대회도 열고 자선경기도 열어서 열악한 환경에서 축구하는 애들한테 다 기부하던데 자기가 맞으면서 축구를 했던 시절이 끔찍한 트라우마로 남아서 그런지 자라는 아이들은 자신처럼 축구를 안 하길 바라는 마음이 엄청 큰거 같습니다.. 예체능계의 똥군기는 진짜 언제쯤 없어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