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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레전드 특집] 04. 영원한 '밀레니엄 특급', 이천수

사람들에게 있어 팀에서 '레전드' 로 평가받는 선수들이 공통분모격으로 해당되는 기준이 '해당팀의 원클럽맨' 이라거나, 아니면 '최소 그 팀에서 오랫동안 뛴 선수' 로 클럽에서 얼만큼 뛰었는지를 중요시하게 여긴다. 물론 그 클럽에서 오랫동안 뛴 시간은 중요하다. 그만큼 클럽을 지지하는 이들과 오랫동안 추억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외나 국내나 레전드로 꼽는 선수들에게 '멘탈' 부분도 중요하게 보고 있다. 즉,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피치 위에서의 행동이라던지, 대중매체에 노출되는 모습이 프로의식이 투철해야한다는 점이다. 이 부분 또한 선수들에게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예외도 분명 존재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었던 에릭 칸토나, 바이에른 뮌헨의 주장출신인 슈테판 에펜부르크의 경우에는 각각 맨유와 바이에른에서 5시즌 이상 뛴 것도 아니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다혈질이며, 어느 순간에는 시한폭탄같은 분노를 피치에서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들은 두 클럽의 레전드 반열에 올라있으며 팀의 영광과 함께했다.
지금부터 언급하려는 4번째 울산의 레전드는 이것과는 정반대격인 스타일이다. 앞서 언급했던 유상철, 김현석, 김병지와 달리 오랫동안 울산에서 뛴 것도 아니며, 진중하거나 겸손한 스타일이 아닌, 화끈하면서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다. 그럼에도 이 선수는 울산 팬덤 내에서는 말그대로 '언터쳐블(Untouchable)' 이며, 2000년대 이후 울산 팬이 된 사람들이 울산에 빠져들게 만든 주요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이쯤되면 눈치챘을 것이다. 바로 '밀레니엄 특급' 이자, '2000년대 K리그 대표 사기유닛' 으로 언급되는 이천수다. 이천수의 일대기를 지금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울산 레전드 특집 - 04. 영원한 '밀레니엄 특급', 이천수
1. 모든 이들로부터 주목받던 '밀레니엄 특급' 10대 소년, 그렇게 2002년 월드컵까지 종횡무진
이천수는 프로 데뷔하기 전부터 한반도 전역에서 주목받는 '슈퍼 탤런트' 였다. 그가 고등학생 신분일 당시인 1990년대 후반에 고교리그는 이천수가 다녔던 부평고가 주름잡고 있었고, 이천수와 더불어 최태욱-박용호를 '부평고 귀각 3인중' 이라 불렸다. 그들을 앞세운 부평고는 국내 대회를 제패했고, 이를 바탕으로 이천수는 청소년대표팀에도 선발되는 영광을 누렸다. 1999년에 방글라데시에서 열린 방가반두 컵에 청소년대표팀 주전으로 참가하였고, 태국 올림픽 대표팀을 7대2로 대파하였고(이천수가 무려 4골을 기록하였다), 브라질 청소년 대표팀까지 격파하며 결승까지 올라갔다. 비록 일본 실업리그 팀에게 2대3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대회에서 통합 8골을 기록하면서 득점왕에 올라섰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이천수를 '밀레니엄 특급' 이라 불렀고, 그는 10대의 나이에도 벌써부터 전국의 축구팬들이 주목하는 유망주로 등극했다.
이천수는 곧바로 1년 뒤인 2000년, 시드니올림픽대표팀으로부터 부름을 받았고 동시에 국가대표팀 데뷔까지 끝마쳤는데, 그 때 그의 나이 겨우 19세에 불과했다. 이천수는 반짝 스타로 끝나지 않고, 2년 뒤인 2002년 월드컵 본선에서도 당당히 엔트리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물론 비슷한 연령대였던 박지성처럼 주전선수로 월드컵 무대를 밟은 것은 아니지만, 한국대표팀이 치뤘던 모든 경기에 출장했다. 주로 그는 교체선수로 투입되곤 했는데, 득점이나 도움을 기록하진 않았지만 폭발력 있는 스피드와 왕성한 체력을 바탕으로 상대 수비진을 흔드는 역할을 하였고, 미국전에서 안정환이 동점골을 기록하고 쇼트트랙 세러모니를 할 때 오노 역할로 전파를 타기도 하였고, 이탈리아전에서는 최고 수비수로 평가받는 파올로 말디니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등 팬들 뇌리에도 상당히 강렬하게 남았다. 거스 히딩크가 이끌었던 한국대표팀은 '월드컵 4강' 이라는 한국축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대표팀 엔트리에 포함되었던 23인에 대한 해외 클럽들의 관심은 점점 높아져갔다.
월드컵 때 모두의 시선을 끌었던 박지성과 이영표는 히딩크의 부름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따라 네덜란드로 날아갔고, 차두리도 아버지인 차범근의 뒤를 이어 독일 분데스리가 진출에 성공했으며, 이을용은 한국인 최초로 터키 수페르리가 진출을 하는 등 대표팀 선수들의 해외이적이 활발해지고 있었다. 그에 맞물려 이천수 또한 월드컵 직후 곧바로 해외이적을 할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예상하였다(월드컵 시작하기 이전에 이천수는 2001년에도 유럽 진출할 기회가 있긴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의 달리, 그는 해외보단 국내리그를 택했다. 이미 그는 월드컵이 시작하기 이전에 국내 프로팀 입단을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2. 반시즌만에 K리그를 접수한 '사기 유닛' 으로 등극하다(2002 ~ 2003 여름)
2001년 말, 고려대 2학년에 재학중이던 이천수는 학교를 자퇴하고 울산과 계약하면서 프로 선수가 되었다. 계약금 3억원에 연봉 2000만원, 당시 신인선수가 받을 수 있는 역대 최고액을 갱신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계약에 붙어있는 특별조항들이다. 우선 울산은 이천수가 원할 때에는 언제든지 그의 해외 진출을 돕겠다고 하면서 동시에 그의 이적료 전액을 이천수에게 지급하는 조건으로 당시 이적료의 10%를 선수에게 주는 관례와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파격적이었다. 뿐만 아니다. CF 광고시에도 이천수에게 전액 보장되었다. 예를 들어, 그가 이천수의 이적료가 10억원이고 CF 광고를 몇차례 촬영한다고 가정하면 그는 1년에 무려 20억원을 버는 구조인 셈이다. 사실 그는 모교였던 부평고를 졸업하고 프로팀에 입단하길 갈망했었고, 함께 뛰었던 최태욱은 졸업 후 안양 입단을 확정지었다. 집안형편도 어려웠던 상황이었기에, 그는 하루빨리 집안에 큰 힘을 보태기 위해 프로전향을 강력히 원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대학교 진학을 택하기 되었던 케이스였다.
그렇게 오매불망 프로선수를 꿈꿔왔던 이천수는 실질적인 프로데뷔는 2002년 여름이 되어서야 이뤄졌다. 그 전까지는 히딩크 감독 지도 하에 월드컵 이전까지 대표팀 선수들을 합숙식 해외 전지훈련이 연달아 소화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푸른색 유니폼을 입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반시즌간 공백이, 울산이나 이천수 양 쪽 입장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후반기에 울산은 무시무시한 팀으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그가 푸른색 유니폼을 입고 뛰는 순간, K리그 모든 클럽들은 그를 경계할 수 밖에 없었는데 2002년 시즌 그의 기록이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18경기 출전에 7골에 9도움으로 데뷔 첫 해에 K리그 도움왕과 신인상, 나아가 AFC 신인상까지 거머쥐었고, 그는 유상철과 함께 팀을 리그 준우승까지 끌어올렸다. 만약 울산이 성남을 제치고 2002년에 리그 챔피언에 올랐더라면 이천수가 올해의 선수상까지 거머쥘 뻔 했을 것이다. 데뷔 첫 시즌에 보여준 그의 능력 때문에 그의 별칭이 괜히 '밀레니엄 특급' 이 아니라는 것을 만천하에 각인시켜주었다.
울산에서의 두번째 시즌을 맞이하는 이천수, 그를 막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2003년 여름이 되기 전까지 이천수가 기록한 스탯은 18경기 출전 8골 6도움, 가히 "리그를 씹어먹는다" 는 표현의 적절한 예시였다. 그렇기에 이천수를 보는 상대팀은 그의 존재 자체가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2003년 5월 21일, 상대팀이 얼마나 이천수를 견제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던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당시 울산은 수원 원정을 왔던 상황이었고 후반 23분, 이천수는 수원 수비수와 충돌하다가 어깨가 빠져 한동안 피치 위에 누워있었다. 그 때, 수원 서포터즈는 이천수를 도발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 날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던 이천수는 화가 나서 서포터즈를 향하여 가운데 손가락을 높이 치켜들며 응수했다. 이에 뒤질세라 수원 서포터즈는 '삽질개천수' 라는 플랜카드를 내걸며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다. 그 날 경기는 0대0 무승부로 마쳤고, 이천수는 이후 벌금 300만원 징계를 받았다. 수원 쪽에서 이천수를 도발했던 것은 그가 수원킬러로 유명할 정도로 수원전에 강한 면모를 보여왔다(지난 시즌 7골 중 2골은 수원이었고, 공교롭게도 데뷔무대도 빅버드였다). 그랬기에 그들은 이천수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천수는 참지 못하고 화답해버린 셈이다. 그 후, 이천수는 수원에게 있어서 공포의 대상이었고 이천수가 울산 선수로 있는 동안 수원은 거의 이겨본 적이 없었다. 이 당시엔 서로가 몰랐을 것이다. 몇 년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말이다.
3. 한국인 최초 프리메라리가 1호, 하지만 순탄치 않았던 스페인 생활(2003 여름 ~ 2005 여름)
워낙 국내무대를 손바닥 위를 내다보듯이 마음껏 휘젓고 있던 이천수, 그는 분명 국내에서 뛰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이천수에게 뜻하지 않는 손님이 스페인에서 찾아왔다. 그를 보러 멀리서 온 손님은 바로 레알 소시에다드. 소시에다드는 2002년 월드컵 때부터 줄곧 이천수의 모습을 지켜봤었고, 그의 K리그 활약상을 보고 확신을 가져 그를 영입하기로 결정했다. 기본 3년 계약에 이적료 42억원에 연봉 6억원, 의식주 부분 모든 것을 지원받게 되었다. 먼저 유럽으로 진출한 박지성, 이영표, 송종국보다 더 파격적인 조건이었고, 울산 입단 시에 체결한 계약 조건이 발효되어 그는 이적료의 70%인 27억 3천만원을 챙기게 되었다. 성남과 리그 우승경쟁을 벌이고 있던 울산 입장에서는 전력상 상당한 타격이지만, 울산 성향이 선수들의 해외진출에는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를 쿨하게 보내주기로 결정했다. 그의 스페인 진출은 마치 1990년대 후반에 안정환이 이탈리아 무대로 진출하는 것과 맞먹을 만큼의 이슈를 몰고 왔다.
등번호 19번을 받은 이천수, 때마침 레알 소시에다드가 지난시즌 리그 2위를 기록해 챔피언스리그 무대까지 진출한 상황이었기에 그는 한국인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출전할 수 있는 영광까지 누렸다. 하지만 이천수는 여기서 결정적인 실수를 하나 저질렀는데 바로 "레알 마드리드로 진출하는 것이 꿈" 이라는 발언이었다. 레알 소시에다드는 레알 마드리드와 앙숙 관계였는데 이천수는 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인터뷰 도중 실언을 해버린 것이다. 그가 입단할 당시 매우 환영했던 현지 팬들과 구단은 그의 인터뷰 때문에 소시에다드를 그저 "거쳐가는 클럽"으로 생각한다며 반감이 생겼다. 논란 속에서 레알 소시에다드 선수로서 라리가에 모습을 드러낸 이천수, 하지만 K리그에서 보여줬던 이천수 특유의 위풍당당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고 오히려 위축되어 있었다. 2003/04 시즌, 그는 총 13경기에 무득점으로 실망스럽게 시즌을 마쳤고, 팀 또한 중위권으로 추락하며 시즌을 마쳤다.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 소집될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결국 그는 2004/05 시즌이 시작되기 직전에 2부리그에서 갓 승격된 팀인 누만시아로 임대가게 되었다. 당시 소시에다드에선 Non-EU 규정 때문에 카르핀, 니하트, 코바체비치 등에 밀려 출전기회가 다소 적었고, 반면 누만시아는 스쿼드가 빈약했기 때문에 다소 출전기회는 많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누만시아로 임대가서도 이천수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누만시아와의 임대가 끝난 후, 국내로 복귀할 준비를 하였다. 그의 유럽 진출기는 실패로 막을 내리고야 말았다.
4. 한국으로 돌아온 '사기 유닛' 울산의 제2 전성기를 만들다(2005 여름 ~ 2007 여름)
국내 복귀를 모색하던 이천수, 그에게 손길을 내밀었던 것은 바로 친정팀이었던 울산이었다. 이천수가 떠난 이후, 울산은 막강한 수비를 앞세워 최강방패의 면모를 보여줬지만, 경기의 흐름을 한순간에 바꾸거나 상대의 심장을 꿰뚫을 창끝이 무뎠던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울산이 번번히 우승으로 가는 문턱 앞에서 좌절해야만 했고, 팀을 이끌던 김정남 감독의 발목을 잡고 있던 주요 고민거리이기도 했다. 김정남은 이 문제를 이천수로 해결하기로 결심한 셈이다. 그렇게 2005년 여름, 그는 호랑이굴로 컴백할 수 있었다.
그가 한국으로 컴백할 때, 사람들은 과연 이천수가 스페인 생활동안 잃어버렸던 감각과 자신감을 재빠르게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고 보통 웬만한 선수들은 복귀하고 난 뒤에 적응하는 시간이 제법 필요했다. 이것은 부상에서 회복한 선수들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천수는 여론의 상식을 완전 뛰어넘어버렸다. 이천수를 다루는 법을 잘 알았던 김정남이었기에 그것이 가능했고, 그는 최대한 이천수를 최전방에 배치하면서 자유롭게 풀어놓았다. 그리고 그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천수는 그에 보답하는 듯한 모습으로 반시즌 밖에 소화하지 않았음에도 무려 7골 5도움을 기록하면서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았다. 플레이오프에서 선보였던 그의 모습은 실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플레이오프 3경기동안 무려 3골 2도움을 기록했고 그 중 챔피언결정전이었던 인천과의 홈&어웨이 경기 중 1차전에서 3골 1도움으로 혼자서 인천을 초전박살내는 말그대로 끝판왕의 아우라였다(이것이 후에 제작된 인천의 다큐멘터리인 '비상'에서도 고스란히 담겨졌다). 결국 울산은 이천수의 맹활약 덕분에 2005년 두번째 별을 달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이천수처럼 반시즌동안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건 이전에도 없었고, 오늘날까지도 찾아볼 수 없다.
리그 MVP와 베스트 11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이천수, 그 다음해인 2006년에도 선봉장에 선 그는 두고두고 회자될 이야기들을 여러가지 만들어냈다. 짧고 굵직한 족적이 바탕이 되어 그는 딕 아드보카트의 간택을 받아 독일월드컵에 출전하였다. 첫 경기인 토고전에서는 안정환이, 두번째 경기인 프랑스전에서는 박지성, 그리고 마지막 조별경기였던 스위스전에서는 심판판정 논란이 부각되긴 했지만, 이천수는 박지성에 버금가는 대표팀의 에이스 역할을 수행하였고, 토고전에서 프리킥 골을 성공시키며 4년 전 무득점의 한을 풀기도 했다. 월드컵이 끝난 직후,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야기가 나오니 바로 A3 챔피언스컵 대회였는데, 울산은 한국 대표로 출전하였고, 감바 오사카와 제프 유나이티드, 그리고 다롄 스더와 풀 리그 형식으로 치뤘다. 특히 감바 오사카와의 경기가 이천수라는 이름을 아시아 전역에 떨치는 경기가 되었는데, 당시 이천수는 감기기운으로 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교체출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반전에 무려 해트트릭을 달성하면서 감바 오사카를 6대0으로 격파하는 선봉장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다롄 스더 경기에서도 2골을 쓸어담아 울산이 대회 우승을 하는 데 1등 공신으로 떠오르면서 득점왕과 MVP까지 싹쓸이했다. 이 대회를 계기로 울산은 '아시아 깡패' 라는 별칭까지 탄생하였다.
AFC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울산의 위용은 대단했다. 특히나 8강전이었던 알 샤밥(사우디)와의 홈 앤드 어웨이 경기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이야기로, 1차전에서 6대0 대승, 그리고 2차전에 1대0 승리로 통합 7대0 승리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선사하였다. 이천수는 역시나 이 경기에서도 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비록 4강전인 전북과의 두 차례 경기에서 통합 6대4로 역전패를 당하긴 했으나, 이천수의 역량이 가장 만개하던 시기가 아니었나하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2007년 2월, 대표팀으로 차출되어 그리스전에서 프리킥 골을 성공시켜 팀의 승리를 이끌었고 그 골은 후에 팬들이 선정한 아름다운 골이 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천수는 못다 핀 꿈이었던 유럽 진출을 다시 한 번 노크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스페인이 아닌 네덜란드 무대였고, 송종국이 뛰었던 페예노로트였고, 그 해 8월에 이적완료하였다.
5. 날개가 꺾인 비호(飛虎), 악마의 재능으로 불리게 되다(2007 여름 ~ 2012)
페예노르트에서 등번호까지 부여받은 이천수, 하지만 그는 페예노르트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새 팀에 적응해야할 시기에 한국에서 소송문제로 심적으로 묶여있는 상태였고, 이천수가 여기에 신경쓰다보니 페예노르트에 제대로 녹아들 리가 없었다. 그의 부진한 모습에 네덜란드 현지 언론들과 팀에서는 당연히 그를 곱게 보질 않았다. 결국 2008년 7월, 이천수는 한시즌만에 페예노르트를 떠나 다른 팀으로 임대가야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그는 K리그 무대로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울산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그를 가장 껄끄러워했던 수원이 당시 차범근 감독의 요청 하에 그를 임대영입한 것이다. 가장 싫어하는 선수 중 한 명이 빅버드에서 뛰게 되었으니 당시 수원팬들은 말그대로 '충격' 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이천수가 부진과 부상으로 3경기 밖에 소화하지 못한데다가 팀 내 항명사건까지 일으키니 그를 증오 수준으로 배척하였다. 항명 도중 팀 내 동료 폭행을 저질러으니 차범근 또한 억누르던 분노를 참지 않고, 그를 임의탈퇴로 공시해버렸다. 임의탈퇴 처분을 받게 된다는 것은, 사실상 이천수는 더이상 K리그에서 뛸 수 없다는 소리나 다름없었고, 그의 선수생활의 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위기에 봉착했던 이천수를 구원해준 인물은 바로 과거 2002년 월드컵 때 함께했던 전남의 박항서 감독이었고, 극적으로 임의탈퇴까지 가진 않았다. 이천수는 페예노르트 소속으로 전남으로 임대가는 모양새로 광양에 둥지를 틀었다. 7경기 4골을 기록하는 등 기량은 서서히 예전의 모습으로 찾아나가는 듯 했지만, 다른 문제가 이천수의 발목을 잡았다. 쉽게 설명하면, 2009년 2월, 이천수가 전남에서 뛰기 직전에 선수 본인 동의 없이 에이전트와 전남이 말도 안되는 계약을 체결했었다. 그러던 와중, 원소속팀인 페예노르트는 그 해 여름 사우디의 알 나스르로 이천수를 이적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천수 또한 알 나스르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찰나였다. 이 사실을 안 전남은 이천수에게 일종의 배신감을 느껴 그의 이적에 제동을 걸려고 했었고, 이천수는 자신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으려고 하는 전남을 떠나고 싶어했다. 그러던 와중에 또 한 번 그는 코치스태프들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고, 공식적인 인터뷰에서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면서 전남의 뒤통수를 쳤다. 전남은 이에 이천수를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하였고, 연맹은 그것을 받아들여 그를 임의탈퇴로 처분하였다. 사실 이 문제는, 양 측의 잘못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전남은 선수가 알지 못하게 어떻게 해서든 갑의 입장에 서기 위해 치졸한 모습을 이적과정에서 보여주었고, 이천수는 전남에서 뛸 때에도 적잖게 사건사고를 일으킨 데다가 떠나는 과정까지도 트러블을 만들어 모든 이의 비난을 샀던 것이다.
모든 논란을 만들고 사우디로 떠났던 이천수, 알 나스르 선수로서의 삶도 그렇지 평탄치 못했다. 알 나스르에서 15경기 출장하여 3골을 기록하며 나쁘진 않았으나, 문제는 구단에서 급여를 제 기한에 맞춰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임금 체불이 길어지자, 이천수는 이 명목 하에 무단 이탈하였고, 다음 행선지는 J리그의 오미야로 정했다. 이천수는 오미야에서 연습생 신분부터 시작하는, 왕년의 스타플레이어로 군림했었던 시절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2011년 말 계약이 종료되면서 그는 무적신세가 되어 새로운 팀을 알아봐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듬해 호주 A리그의 어느 클럽에서 오퍼가 왔지만, 이천수는 거절했다. 그는 K리그로 돌아가길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타향살이가 힘들었던지, 이천수의 마음 한 켠에는 'K리그에 복귀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국내무대에서 뛰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있는데, 바로 전남과의 틀어진 관계를 되돌려놓아야한다는 점이다. 사실 이 문제가 간단해보이면서도 쉽지 않았다. 비록 전남 또한 잘못한 점은 있지만, 이천수가 전남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 부분 등이 합리화시킬 수는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었고, 전남의 공식 입장 또한 "진정성이 부족하다" 고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실제로 전남 입장에선 일종의 배신감이 느껴졌던 건 사실이다). 그러던 2012년 10월, 이천수는 직접 광양까지 내려가 전남의 홈경기를 보러온 관중들 한 명 한 명 대상으로 사죄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것이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천수는 이후에도 본인이 용서받을 때까지 홈경기가 열리는 날마다 와서 사과하겠다고 말했으나, 축구인 상당수는 그의 진정성을 여전히 의심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2013년 2월 5일, 프로축구연맹에서 그의 임의탈퇴 신분을 풀어주었고, 22일에는 전남도 그를 풀어주기로 확정지은 것이다. 드디어 이천수의 고난의 연속이 끝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6.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마음으로, 고향팀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2013 ~ 2015)
극적으로 K리그로 복귀할 수 있었던 이천수, 전남이 임의탈퇴를 풀어주기로 한 소식과 동시에 그의 입단소식이 보도되었다. 팀은 자신의 고향팀인 인천이었고, 등번호는 10번을 받았다. 4년만의 복귀라 그런지, 이천수는 절주선언에 이어 오로지 가족과 축구에만 전념하겠다고 남다른 각오를 밝혔다. 1년동안 무적신세였던 탓이 예전같은 기량을 보여주진 못했으나, 당시 팀의 중심을 잡아줄 베테랑이 절실히 필요했던 인천 입장에서는 그의 존재감만으로도 팀 전력에 충분히 보탬이 되었다. 그러던 4월 16일, 전남과의 홈경기에서 선발로 풀타임 소화한 후에 전남 서포터들이 포진하고 있던 원정석으로 다가가 깍듯이 인사하였고, 이에 박수로 화답하는 등 서로간의 앙금이 완전히 풀렸다. 그 후 4일 뒤에 전북과의 홈경기에서 역전골을 어시스트하면서 1,428일만에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급작스런 현역복귀로 몸이 적응안되었는지 발목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적도 있지만, K리그 복귀 후 첫시즌은 19경기 2골 5도움으로 팀 성적을 고려하면 제법 괜찮은 스탯이었다.
그리고 이천수는 연봉 삭감까지 감수하면서 인천과 2015년까지 함께하며 인천과의 의리를 과시함과 동시에 팀 내 최고참으로서 후배들에게 모범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2000년대를 풍미하던 사기유닛도 나이에는 장사 없었고, 예전과 달리 날카로움과 체력이 떨어지고 있는데다가 부상 빈도 또한 높아져서 출전 횟수조차 점점 줄어들었다. 부상으로 인천이 FA컵 결승전에 진출하던 모습을 관중석에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2015년 11월 5일 JTBC 뉴스룸을 통해 은퇴를 선언했고, 11월 28일인 마지막 홈경기는 부상으로 인해서 은퇴식으로 대체하여 그의 파란만장했던 선수로서의 생활도 비로소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는 부분 중 하나가, 이천수는 "게으른 천재", 또는 "트러블메이커" 이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이는 적합하지 않다. 그가 경기 때마다 번뜩이는 모습이 타고난 부분도 있겠지만, 그는 승부욕이 강해서 그 어떤 누구에게도 지지 않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열심히 노력하는 악바리 스타일이며 이천수 본인 또한 악바리로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도 이 부분 때문이다. 트러블메이커라고 표현하는 부분에서도 조금 억울한 것이, 해외 사례만 하더라도 이천수보다도 더 심하면 심한 선수는 끝도 없다. 호마리우, 안토니오 카사노, 조이 바튼, 아드리아노, 마리오 발로텔리, 하르템 벤아르파 등 피치 밖에서 더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으면서도 잘만 선수생활을 이어나갔다(국내에서 이천수 같은 유형을 좀처럼 보기 힘들었을 뿐이다). 그가 비록 언론에서 보여줬던 인터뷰 방식 등이 경솔했던 것은 있었으나, 그것만으로 이천수의 업적이나 기량 등을 폄하하는 것은 금지했으면 하는 바다. 인천에서 마지막 선수생활을 통해 개과천선 했으니 이만하면 훈훈한 결말이다.
은퇴식을 치르고 나서 인천 서포터즈는 "풍운아를 품은 우리가 행운아" 라는 걸개를 내걸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 플레이어를 배웅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쓰고 싶었던 것은 울산 쪽이 아니었나 싶다. 이천수의 전성기는 곧 울산의 전성기 중 하나로 꼽힐만큼 일종의 공동운명체로 함께 해왔다. 김정남 감독이 이천수에게 모든 걸 맡기듯이, 울산에게 있어서 이천수는 "쟤만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이천수는 무언가 해줄 것이다." 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고, 이천수는 언제나 기대에 부응하여 결국 울산을 리그 챔피언에 올려놓은 후에 아시아 깡패라는 칭호까지 선사했다. 실제로 이천수가 임의탈퇴 신분으로 K리그에서 한동안 떠나있을 때에도 남들은 다 적으로 돌아서도 항상 그의 편에 서있었던 것은 울산 팬들이었고, 그가 다른 유니폼을 입고 오더라도 집 나갔던 자식이 돌아온 것마냥 환호해주곤 했다(심지어 울산으로 돌아오라는 걸개도 걸렸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 JTBC 해설위원으로 종종 울산 문수경기장을 방문할 때마다 울산 팬들로부터 이천수콜을 받는다. 누가 뭐래도 그는 울산의 또 하나의 레전드였고, 영원한 '밀레니엄 특급', 'K리그 사기 유닛' 이다. 두고두고 기억하리, 이.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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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 드디어 나오네 이천수 아직도 2000년 신년청소년대회때 이탈리아 꺽은 골 기억나는데 .. 실력으로 경기전체를 바꿀수있는 몇안되는 판타지스타였던거같다
진짜 재능이 너무 아까울정도였음 천재가 지는걸 박지성vs이천수보면서 느꼇음
축하합니다! 빙글 [명예의 전당] 카드로 선정되었습니다! 이제 명예의 전당 컬렉션 https://www.vingle.net/collections/4535494 에서도 이 카드를 확인하실 수 있어요 :)
실력은 있어지만 논란이 많았던 품성 과 국내에서 잘했으나 유럽까지는 아니였던 그래도 02년 독일전 멋진슛기억한다 올리번 칸..... 자식
예전 인터뷰때 "아니 언제부터 서울이 명문팀 이었다고 터키에서 감독하나 왔다고..." 빵 터졌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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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레전드 특집] 01. '유비' 유상철
울산도 어느덧 팀이 생긴지 30년이 넘은 K리그를 대표하는 명문팀이나, 그 30년 가까운 역사에서 리그를 제패했던 적이 딱 2번, 운도 지지리 없어서 준우승만 머물렀던 것이 무려 8번이나 되니 이만하면 K리그의 '콩구단'이 아닌가 싶을정도다. 이 3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울산에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거쳐갔지만, 정작 레전드로 꼽을만한 선수가 누가 있냐고 말한다면 의외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선수들 대부분이 '거쳐가는 클럽'으로 인식을 한건지 울산을 발판으로 다른 팀으로 떠나기 일쑤였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울산을 대표하는 레전드가 그만큼 더 귀하고 생각보다 끄집어내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그 중에서 가장 생각나는 선수를 꼽자면 나는 제일 먼저 이 선수를 언급하고 싶다. 바로 '유비' 유상철이다. 유상철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울산골수팬으로 자리잡았을 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1. 허약체질 개선을 위해 신었던 축구화, 선수로써 꿈을 키우다 184cm 78kg(선수시절 프로필)의 체격으로 몸싸움에서 웬만한 유럽 선수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유상철이지만, 어렸을 때는 아주 정반대였다. 어렸을 적 유상철은 유난히 허약하고 잔병치레가 많아 키도 작고 비쩍 말라서 운동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며, 그가 초등학교 5학년때 처음 축구를 시작하게 된 것도 축구에 대한 재능이 있었다기 보단 허약체질을 개선해서 몸이 좋아질 것을 기대한 어머니의 권유였다. 그렇게 축구를 시작하게 된 유상철은 응암초등학교-경신중-경신고를 거쳐서 축구선수로써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었으나, 문제는 그의 작은 키가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경신고에 진학하고 나서 1학년 때 당시 감독이 축구를 그만두라고 권유했을 정도였다. 이 권유가 충격요법으로 작용했던 것인지 그해 겨율 합숙훈련에 합류하는 대신에 두달간 보약을 보충하면서 체력을 키워나갔고 그 노력의 정성이 빛을 발했던 것인지 고2때부터 키가 자라 2년 사이에 20cm나 성장했다. 고등학교 시절 눈에 띌 정도로 부각되진 않았으나 팀플레이에 능했던 덕분에 유상철은 1990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U-19 AFC대회 챔피언쉽에 한국대표팀으로 뽑혔으며 한국을 우승으로 이끄는 데 크나큰 활약을 펼쳤고, 한국은 1991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진출티켓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러나 1991년 남북 단일 대표팀이 결성되는 바람에 아쉽게도 유상철은 청소년대표팀 엔트리에 들지 못하였다. 그렇게 유상철은 경신고를 거쳐 건국대학교로 진학한 후에 1994년에 프로무대에 발을 내딛게 되는데, 그가 데뷔한 팀은 다름 아닌 자신의 고향인 서울팀이 아니라 울산이었다. 2. '유비' 유상철, 대중 앞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새기다(1994~1997) 사실 유상철은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자란 서울 로컬이었기 때문에 프로팀을 서울을 연고로 하는 팀을 원했었으나 울산이 드래프트 1순위로 유상철을 택했다. K리그가 개막하기 전에 그는 94년 미국월드컵 대표팀 전지훈련에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몸만들기에 들어간 것이 그에게 긍정적인 효과로 작용되었고, 1994년 3월 5일 미국과의 A매치 데뷔무대를 가지기도 했다(아쉽게도 94 미국월드컵 대표팀 최종엔트리에 뽑히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그는 울산에서 우측 수비수로 처음 프로데뷔무대를 가지게 되었다. 수비수로서 좋은 활약을 보였던 덕분에 그는 그의 존재를 처음으로 부각할 수 있었던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대표팀 명단에 선발되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8강전은 유상철 이름 석자를 대한민국에 처음 부각시켰던 경기였다. 당시 8강전은 한일전이었기 때문에 분위기상으로는 사실상 결승전이나 다름없던 무대였고, 우리나라는 일본을 상대로 1대0으로 밀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한정국의 힐패스를 이어받은 유상철은 오른발 발등으로 공을 골대로 밀어넣으면서 동점골을 뽑아냈고, 이것을 기점으로 한국은 일본을 계속 몰아치다가 결국 3대2 역전승을 거두며 아시안게임 4강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것이 유상철이 '한일전의 사나이'로 불리어지게 된 첫 계기였다. 그 해 유상철은 국가대표로서 아시안게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듯이 클럽팀인 울산에서도 5골 1도움을 기록하며 신인선수 신분으로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기쁨까지 누리게 되었다. 프로 첫시즌을 성공리에 마무리한 유상철은 다음해인 1995년에는 홍콩국제대회나 다이너스티컵과 코리아컵 등 다수의 국제대회에 참가하면서 경험을 축적하였고, K리그 올스타전에서 올스타대표로 선정되며 1996년 아틀랜타 올림픽대표팀 와일드카드로 뽑히면서 1996년 올림픽에 참가하려고 했으나, 올림픽 직전에 부상을 당하면서 중도하차하게 되었다. 이 때 부상의 여파로 유상철은 8경기에서 1골을 기록하는 등 부진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밑바닥을 찍으면 다시 상한가로 돌아서듯이 그러한 부진을 유상철은 1996년 수원과의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 1대1로 비기고 있던 상황에서 역전골을 뽑아내면서 부진을 만회하는 데 성공했고, 울산의 첫번째 챔피언 등극에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 때 고재욱 감독의 플랜에 유상철이란 존재는 필수요소였다. 1996년 첫 리그 챔피언으로 등극한 이후 이듬해인 1997년은 울산 구단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화려한 멤버진을 갖췄다. 이당시 울산은 일명 '깡패축구'로 올드팬들에게 불리기도 했는데, 김현석, 유상철, 김병지, 김종건, 황승주, 정정수, 김상훈, 박정배 등 울산 스쿼드 한 명 한 명의 존재감이 상당히 컸다. 하지만 1996년 리그 우승의 임팩트가 너무나 컸던 지, 1997년은 슬럼프에 빠졌다. 특히나 1996년에 속히 말해 '날라다녔던 신인 선수들'도 2년차 징크스에 대부분 빠져버린 셈이었다. 유상철은 부진한 것은 아니나 당시 팀의 분위기에 맞물려서 그렇게 큰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3. 세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유상철, 그리고 J리그 사기유닛시절(1998~2002) 1998년은 유상철을 대한민국을 대표로 하는 슈퍼스타로 만들어준 결정적인 해였다. 이미 K리그 내에서는 나름 입지를 갖춘 미드필더이긴 했지만, 그의 진가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아마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 아니었나 싶다. 월드컵 대표팀으로 나서기 전에 열렸던 아디다스컵 대회에서 유상철은 주축선수로 활약하면서 팀의 컵대회 우승에 큰 도움이 되었고, 이 때 활약을 발판으로 프랑스월드컵에서는 대표팀 주장완장을 차고 뛰었다. 특히나, 벨기에전에 유상철이 터뜨린 극적인 동점골은 유상철이라는 선수를 전세계적으로 알리게 된 경기이자, 유상철의 득점본능을 깨우게 된 결정적 사건이었다. 그 전까지 유상철이 울산이나 국가대표에서 맡았던 역할은 주로 중원에서 조율을 전담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1998년의 유상철은 내 뇌리 속에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고, 내가 울산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유상철이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비록 수원에게 리그 챔피언 타이틀을 빼앗기긴 했지만, 그의 활약상은 충분히 찬사받을만 했다.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를 경험하고 난 뒤, 유상철은 한 층 더 진화한 모습이었다. 그동안 수비수와 미드필더로만 뛰었던 그가 정규리그에서만 무려 14골을 뽑아내면서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1997년에 김현석에 이어 1998년에 유상철이 득점왕에 올라서면서 울산은 2년 연속 득점왕을 배출해낸 셈이다. 사실 유상철이 기술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그가 스트라이커로 포지션 변경해서 성공할 수 있었던 계기는 타고난 피지컬과 위치선정, 그리고 넓은 시야가 크게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유상철처럼 수비수/미드필더/공격수 모두 뛰면서 좋은 활약을 펼쳤던 선수는 이전에 김주성 밖에 없었고, 현재까진 없다. 하지만 유상철은 1998년을 끝으로 울산을 떠나게 되었다. 월드컵과 K리그에서 보여준 활약상의 영향인지 옆나라 일본 J리그에서 오퍼가 들어왔고,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 일본 요코하마 마리노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그의 활약은 여전했다, 아니 유상철은 속칭 "J리그를 씹어먹는 사기유닛"이 되었다. 전반적으로 J리그 선수들이 하드웨어적인 부분에 있어서 약점을 보이다보니 힘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유상철에게 있어서는 J리그는 완전히 독무대였다. 요코하마로 가서 유상철은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전 포지션을 오가면서 활약했다. 그러다 2000년에는 같은 울산 출신인 김현석과 더불어 J리그 득점왕 경쟁까지 했을 정도이니 그의 J리그 활약은 길게 설명하면 입이 아플 정도다(2000년 유상철의 경기 기록 : 리그 22경기 출장 17골/리그컵 6경기 출장 4골). 그렇게 2001년에는 황선홍-홍명보가 있는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하면서 '코리안 3인방'을 결성하기도 했다. J리그 활약 당시에 유상철에게 놀랄만한 오퍼가 들어왔다. 바로 스페인의 명문 클럽인 FC 바르셀로나로부터 이적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이 당시 한국인 선수에게 유럽팀으로부터 오퍼가 들어온다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이며, 지금 시대에 비해 한국 선수들의 유럽에서의 인지도도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시절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유상철의 바르샤행 링크 자체만 하더라도 크나큰 파장을 줬다. 사실 바르샤에서 관심을 가질 만 했던 것도 당시 유상철이 1998 FIFA 올스타팀에 선정될 정도 주가를 높이고 있던 터였는 데다가 수비수/미드필더/공격수를 가리지 않는 멀티 플레이어 능력이 주목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이적설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에이전트 및 기타 문제로 결렬되었다고 한다. 4. 2002년 월드컵의 진정한 히어로, 그리고 친정팀으로 금의환향(2002~2006) 2001년, 한국 축구는 거스 히딩크라는 네덜란드 출신 외국인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앉히면서 터닝포인트를 맞이하였다. 그가 오기 전에 한국 축구는 "축구강국들에 비해 기술이 떨어지고, 힘과 체력이 앞선다"라는 평이 많아서 브라질로 유학 보내는 사례가 많았다(울산이나 포항 등 몇몇 K리그 클럽들이 실제로 브라질 유학파를 육성하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히딩크는 오히려 "한국축구는 기술은 좋으나, 힘과 체력이 떨어진다"는 정반대의 평가를 하면서 한국 축구계를 발칵 뒤집어놨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선수들에게 체력과 피지컬 강화 운동에 주력했다. 그 중심에는 유상철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히딩크호가 부침을 거듭하게 되자, 국가대표팀에 대한 불안감도 가중되었고, 이에 맞물려 유상철도 한국 스타플레이어들이 통과의례로 치르던 안티지분을 대량 확보했다. 정확하게는 유상철의 안티확보 근원은 2000년 허정무 감독시절, 그가 스트라이커로 뛸 때 숱한 1대1 찬스를 날려버린 것 때문에 붙은 것이다. 그 이후로 스트라이커 기용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흔들릴 유상철은 아니었다. 히딩크호에서 유상철의 입지는 굳건했고, 일전에 히딩크가 홍명보를 다스리기 위한 방책으로 그를 센터백으로 기용하기까지 했으니 그의 입지에는 별 타격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02년 월드컵 당일, 유상철은 폴란드전에서 통쾌한 중거리슛을 꽂아넣으면서 한국대표팀에게 첫 월드컵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한국은 54년만에 월드컵 1승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월드컵 기간 내내 줄곧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하면서 김남일과 함께 중원에 포진되었다. 영국의 축구평론가인 앤드류 워쇼가 UEFA에 기고한 글에서 유상철을 "유상철은 이번 월드컵에 참여한 수비형 미드필더 중 최고다. 그의 침착성과 탁월한 볼 배급 능력은 경이로운 수준이고, 세계 축구팬들은 그의 등번호(6)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평가할 만큼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히딩크가 김태영-홍명보를 빼고 닥공모드를 시전할 당시에 최진철과 함께 최후방 수비를 맡으면서 이탈리아의 역습을 막아내기도 했고, 스페인과의 8강전에선 센츄리클럽에 가입했다. 2002년 월드컵 영웅은 이렇게 탄생했다. 월드컵 4강신화의 주축으로 주목받던 유상철은 월드컵이 끝나고 일본에서 유럽으로 진출하기 위해 가시와 레이솔을 떠나 유럽 클럽팀들을 알아보고 있었으나, 자신의 에이전트의 무능력으로 인해 유럽 진출은 커녕 무적신세가 되면서 선수생활에 큰 위기에 봉착했다. 이러한 와중에, 국제미아가 될 뻔한 유상철에게 구원의 손길을 준 팀이 있었으니, 바로 유상철의 친정팀인 울산이었다. 그리고 유상철이 복귀한 뒤에 처음으로 골을 터뜨린 경기가 재밌게도 지난 1998년 울산에서의 마지막 골을 기록했던 성남전이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선발 출장하여 이천수와 3골 합작하면서 침체된 울산의 순위를 끌어올리기 8연승을 달리며 2위로 리그를 마쳤다. 이정도면 상당히 성공적인 K리그 복귀였다. 다음 해인 2003년에 FA 자격으로 자유신분이 되었지만, 울산이 연봉 3억원에 격려금 2억원을 제시하면서 울산과 재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해 부산과의 경기에서 이장관이 유상철에게 비신사적인 태클을 걸었고, 이에 이성을 잃은 유상철은 이장관을 폭행하면서 5경기 출장정지와 820만원의 벌금을 물었다. 유상철은 이 징계에 대해 "동업자 정신을 버린 축구에 대해 화가 났다"고 밝혔고, 이 사건을 계기로 J리그로 떠나버렸다. 자신이 J리그에서 처음으로 뛰었던 요코하마로 재이적한 유상철은 2003년 시즌 후반기에 17경기 출장 6골을 뽑아내면서 요코하마의 전/후기 리그 통합 우승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연봉 1억엔으로 계약하였다. 히딩크가 국가대표 지휘봉을 내려놓은 이후에도 유상철은 여전히 국가대표팀의 중심이었다. 쿠엘류-박성화 감독체제를 거치면서 맏형 역할로 동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일조하였으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선 와일드카드로 뽑혀서 어린 선수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맡으며 올림픽 대표팀을 8강까지 견인하였다(올림픽 대표팀에선 플랫3에서 뛰었다). 요코하마가 2년 연속 리그 제패한 뒤에, 유상철은 방출되었다. 노장인데다가 2002년 이후로 계속 부상이 잦았던 것이 원인이었다. 이러던 와중에, 유상철은 다시 울산으로 복귀하길 결심하면서 2005년 울산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유상철은 그렇게 많은 경기 수를 출장하지 못했다. 부상후유증과 노쇠화도 있지만, 유경렬-조세권 등의 주축 선수들이 자리를 잡은 터라 쉽사리 이들을 밀어내고 주전으로 자리잡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상철은 조금 뒤로 물러나서 울산 선수들을 독려하는 역할을 맡았고, 결국 울산은 2005년에 리그 두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유상철은 울산에서 뛰면서 리그 우승 2번 모두 경험하는 울산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그 이후, 유상철은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고 싶어했지만, 그의 무릎이 허락하지 않았다(유상철의 왼쪽 무릎 부상이 호전되지 않았던 터였다). 결국 그는 2006년 K리그 울산 홈개막전에서 은퇴경기를 치뤘고, 후에 요코하마에서도 유상철의 은퇴경기를 기념했다고 한다. 이렇게 '유비' 유상철의 선수 경력은 마감하게 되었다. 후에 예능 프로그램에서 밝혔는데, 유상철은 선수로 뛸 당시에 왼쪽 눈이 실명상태라 오른쪽 눈에 의지한 채로 경기를 뛰었다는 것을 고백했고, 이러한 사실은 심지어 그의 가족들조차도 몰랐다고 한다. 이러한 부상을 숨긴 채, 그는 남모르는 노력을 부단히 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선수 생활 은퇴 이후, 유상철은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으며, TV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날아라 슛돌이 감독을 시작으로 춘천기계공업고 감독, 그리고 현재는 대전 감독 지휘봉을 잡기도 했었고, 현재는 울산대학교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오로지 울산에서만 뛰었던 '의리파 유비' 유상철, 그 때가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울산으로 돌아오길 기다린다. 유.상.철. 원문 : http://blog.daum.net/manutdronaldo/502
호날두 빠진 ‘호르투갈’, 유로2016 우승 비밀
1. [카드뉴스] 호날두 빠진 ‘호르투갈’, 유로2016 우승한 이유 2. 대망의 유로 2016 결승 포르투갈은 개최국 프랑스와 결승에서 맞붙었습니다 3. 대회 시작 전 축구전문가들이 예측한 우승후보는 프랑스. “공격진과 미드필더진이 매우 강하다. 게다가 그들은 홈에서 경기한다” 프랑스 축구전설 티에리 앙리 BBC의 축구전문가 마크 로렌슨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까지. (1958년 이후 4719번의 국제경기를 분석해 프랑스를 우승후보로 예측) 여기에 한 명이 더 있었습니다. 축구황제 펠레. 4. 그에 반해 포르투갈은 호날두 원맨팀으로 불렸습니다. ‘호르투갈(호날두+포르투갈)’로 놀림받았죠, 1975년 이후 프랑스에 10연패한 기록도 그들의 기를 눌렀습니다. 5. 프랑스와의 결승에서는 ‘원맨’ 호날두가 빠집니다. 경기 시작 25분 만에 무릎 부상을 당해 교체된 호날두 그는 12년만의 유로 결승전에서 또다시 눈물을 보였습니다. 6. 하지만 프랑스가 경기를 압도하리란 예상은 뒤집어졌습니다. 특히 프랑스의 공격력을 무력화시킨 수비는 철벽이었습니다. 해설위원들은 “호날두의 빈 자리를 11명 선수가 골고루 나눠가졌다”고 평가했죠. 7. 잔뜩 웅크리고 있던 포르투갈은 연장전에서 한 방을 보여줍니다. 연장 후반 3분 에데르의 결승골이 터집니다. 그리고 경기 종료. 포르투갈은 처음으로 국제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8. 경기 후 인터뷰에서 선수들은 ‘하나’로 뛰었던 이유를 말합니다. 경기 MVP에 선정된 페페는 “부상당한 호날두를 위해서 뛰었다” 결승골을 넣은 에데르는 “포르투갈은 간절히 우승을 원했다. 우리는 자격이 있다” 부상 이후 벤치에서 동료들을 응원한 호날두는 “불운했던 부상, 그러나 동료들 믿었다”고 화답했죠. 9. 호날두 없이 ‘팀’으로 승리한 포르투갈 축구가 어떤 스포츠인지를 말해준 유로 2016 결승전이었습니다
[상식축구] 도르트문트 프라이부르크...한국 도르트문트 팬이 기쁘고 고통받았던 날
(도르트문트 한국 공식 서포터즈 인정 기념 뷰잉 행사에 모인 팬들과 이영표, 차범근, 이유경 아나운서, 사진=도르트문트 공식 페이스북) 오랜만에 글로, 분데스리가 칼럼으로 돌아왔다. 직장인이라 콘텐츠 제작하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있다. 직장인들은 공감해주실 거라 믿는다. 각설하고, 상식축구가 뜻깊은 자리에 참석했다. 한국 도르트문트 서포터즈 공식 인증 기념 도르트문트 방한 축제에 다녀왔다. 나는 도르트문트도 좋아하지만 바이에른 뮌헨도 좋아하는, 분데스리가를 좋아하는 팬이다. 물론 뮌헨보다 돌문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다녀왔다. 분데스리가 리그 우승 트로피, 독일 축구 컵, 슈퍼컵 트로피, 다채로운 행사, 도르트문트 소속 선수 생활을 했던 이영표 위원과 이벤트, 차범근 감독과 함께한 사인회, 프라이부크르와의 경기 단관 등. 꽉 들어찬 행사를 준비해주신 도르트문트 Echte Liebe 팬카페 임원 및 스태프 분들과 도르트문트 구단 관계자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오늘 칼럼은 두 편으로 나누어 적고자 한다. 하나는 대 프라이부크르전 관전평 한글, 다른 하나는 관전평 영어 글이다. 오랜만에 글을 쓰려고 하니 벌써부터 키보드가 뜨겁다. 경기 결과부터 말한다면 도르트문트와 프라이부르크는 2:2로 비겼다. 한 골 차로 아슬아슬한 리드를 지켜나간 도르트문트가 끝내 리드를 지키지 못하면서 비기고 말았다. 분데스리가 강팀이라는 명성 치고 상당히 부족한 모습을 보이며 리그 7위에 머무르고 있다. (도르트문트의 에이스이자 얼굴이자 주장, 마르코 로이스, 사진=도르트문트 공식 홈페이지) 너무 잦은 패스 미스 경기를 보는 내내 답답하고 조마조마했다. 이게 도르트문트였나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였다. 도르트문트는 빠른 공격 전개, 뒷공간 침투로 다이내믹한 경기 색깔을 보여주는 팀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파브르 감독 부임 후 도르트문트 경기를 잘 보지 않았다. 한국에서 중계도 잘 안 해준 것도 있었고 따로 챙겨 볼 시간도 없었다. 경기를 보지 않았던 사이, 내가 알던 도르트문트가 사라졌다. 첫 번째 비판 포인트는 패스 미스다. 공격진에서 패스 미스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상대방이 우리 팀 선수보다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팀 수비 진영에서 패스 미스가 잦은 것은 문제가 있다. 이 부분은 집중하지 않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상대 공격수가 조금 떨어져 있어 보여도 확실히 동료가 받을 수 있도록 패스를 해줘야 한다. 그런데 어중간한 강세의 패스가 가니까 상대방이 인터셉트하려고 챌린지를 한다. 그렇게 볼을 빼앗기고 위협적인 장면을 허용했던 장면이 여러차례 있었다. 심지어 베테랑 수비수인 훔멜스도 패스 미스를 저질렀다. 수비에서 미드필더 진으로 전진 패스를 해야 공격이 이뤄지는데 그 간격이 너무 길었던 것도 문제였다. 미드필더가 받아 주러 내려오거나 공격진이 움직여줘야 수비진에서 패스할 공간이 생긴다. 그런데 계속 뒤에서 볼을 돌리고 빼앗기고. 마치 답답했던 한국 축구를 보는 것 같았다. (악셀 비첼의 원더골이 있었지만 빛을 바랬다, 사진+도르트문트 공식 홈페이지) 느린 반대 전환과 속도 공격을 전개할 때, 빠른 반대 전환이 있어야 상대를 흔들어서 공간을 만들 수 있다. 그렇게 공간이 만들어져야 골을 넣기 쉬워진다. 이리저리 패스로 흔들어야 한다. 공격진에서 볼을 돌리다가 다시 수비진으로 볼이 가면 반대편을 보고 길게 차주는 방법이 있다. 이게 빨리 이뤄지면 상대 수비에 균열이 생긴다. 그곳을 파고들어 침투 패스를 해주면 슈팅 기회가 생긴다. 이런 반대 전환이 너무 느렸기 때문에 오픈 찬스, 드리블 챌린지 등을 만들지 못했다. 속도도 느렸다. 빠른 발, 드리블로도 흔들 수 있다. 아니, 토르강 아자르, 마르코 로이스같이 드리블 좋고 빠른 발인 선수를 기용하면서 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전술을 짜다니. 파브르 감독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싶다. 이 날 경기에서 템포를 빨리 가져간 적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로이스의 능력치가 저하됐다해도 그의 장점을 살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약점을 보완하기보단 강점을 더 잘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게 나의 의견이다. 현대 축구는 빠르다. 이번 경기는 느렸다. 이러니 누가 분데스리가를 보겠는가. 옆 나라 리그를 봐라. 엄청 빠르다. 손흥민 빠르던데. 파브르가 느린 것 같다. ("파브르 감독을 평가해달라고요? 어우어우어우 전 못해요..." 사진=도르트문트 공식 홈페이지) 전술의 컨셉이 뭘까 물론 나는 축구 전문가가 아니다. 전술, 전략적으로 배운 사람보다 더 알지 못한다. 그냥 방구석 여포가 맞다. 그래도 축구를 많이 해보고 본 여포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파브르 감독의 전술 컨셉이 뭔지 모르겠다. 이번 경기만 두고 봤을 때, 뭐 하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내 옆에 여자친구도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다. 이분법적인 사고로 공격과 수비를 놓고 봤을 때도 뭘 하는지 모르겠다더라. 패스를 통한 빌드업 축구를 하려면 더욱 정교해야 한다. 이쁘게 축구하려는 것은 알겠는데 정교함이 없다. 정교함이 없으면 투박하게라도 가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든 투박하게는 안 하려고 한다. 이쁘게 이쁘게 한 땀 한 땀 패스해서 골 넣으려고 하는데, 그게 안 먹히면 다르게 가야지 그걸 고집하니까 팬들이 고통받는다. 공격은 2:1 패스를 통해 럭키 골을 노리는 게 전부였다고 본다. 그나마 측면 크로스, 컷백이 있었는데 그 모습도 빠르지 않았다. 어디 줄까 고민하는 눈치가 더 컸다. 선수들에게서 과감함은 사라졌다. 승리를 향한 의지, 투쟁 정신도 보이지 않았다. 프라이부르크에 실점을 할 때도, 보다 적극적으로 붙어서 슈팅을 방해하거나 우월한 체력을 바탕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선수도 부재했다. 우승을 하려면 수비형 미드필더 라인에서 강한 정신력을 보여주는 선수가 필요하다. 왜 피파 게임에서 다들 굴리트를 데리고 있으려는지 알려줘야겠다. 7시간 차이 나는 먼 곳에서 당신들을 응원하기 위해 모니터 앞에 앉는 사람을 기억해달라. 노란색과 검은색이 조화를 이룬 유니폼이 이뻐서, 잘생긴 로이스가 있어서, 축구 컨셉이 마음에 들어서 등 여러 이유로 도르트문트라는 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알아주든 몰라주든 꾸준히 응원해온 사람들이 있다. 몰라줘도 좋았다. 단지, 당신들을 응원하고 당신들이 뛰는 모습이 그저 좋았다. 팬들을 위해서 더욱 뛰어달라. 더 상대팀에 대해 연구하고 전술을 짜고 화끈하고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달라. 당신들 뒤에는 언제나 소리치고 함께 기뻐해 줄 팬들이 있다.
바이에른 뮌헨 한국인 유망주 영입 ㄷㄷ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오늘 뭔 날인가요?? 아침에는 이승우 선수 도르트문트 이적설 뜨더니 오후에는 국내 유망주의 바이에른 뮌헨 입단이라니 ㄷㄷㄷㄷㄷㄷㄷㄷ 정우영 선수에 대해 저도 이번에 알게 되긴 했는데 인천 유나이티드의 유스팀인 대건고 소속으로 측면 미드필더라고 합니다. 최근 바이에른 뮌헨 입단 테스트를 받고 잠재력을 인정받아 이적이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뮌헨이 인천에 8억원 가량의 이적료를 지불하고 연봉으로는 2억 5천 만원을 받는다고 하네요ㄷㄷㄷㄷ 물론 FIFA 규정때문에 아직 18세 미만 선수라 바로 이적할 수는 없지만 내년 1월에 넘어가는걸로 인천과 합의가 됐다고 하네요! 출처 http://sports.new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021&aid=0002317978 기사에도 나와있듯이 드리블이 꽤 좋은 테크니션으로 보입니다. 측면 미드필더라 그런지 드리블이 꽤 좋은거 같습니다. 방향 전환이나 개인기 능력이 꽤 좋은거 같아요. 검색해보니 오프더볼이나 연계 센스같은게 굉장히 좋다고 하네요! 무엇보다도 어린 선수치고 전술 이해도가 굉장히 좋다고 하더군요. 경기중에 선수들에게 전술 지시를 하는 모습도 보이는데 이런게 사실 어린 선수들에게 찾아보기 힘든 모습입니다. 그만큼 경기중 생각을 하면서 축구하는 똑똑한 선수라는 이야기죠. (움짤 출처 - 킥오프 http://www.kick-off.co.kr/pub/domestic.aspx?mode=view&postNum=4481&pageNum=1&searchType=1&searchText=%EC%A0%95%EC%9A%B0%EC%98%81) 예전에 일본의 우사미가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해 부러움을 샀었는데 이제 내년이면 뮌헨 유니폼을 입은 우리나라 선수를 볼 수도 있겠네요!
[상식축구]이승우 사건, 도대체 뭐가 예의입니까
(사진=네이버 KBSN SPORTS 캡처) 후반 35분 우리나라 선수가 쓰러졌다. 심판은 다급히 휘슬을 연달아 불었다. 동료, 상대 선수 할 것 없이 달려왔다. 팀닥터들이 뛰어 들어갔다. 몇 초, 몇 분이 흘렀을까. 그제야 구급차가 경기장으로 들어갔고 쓰러진 정태욱은 그대로 구급차에 실려 경기장을 빠져 나왔다. 다행히 정태욱은 검사 결과 이상이 없음이 확인됐다. 이 과정에서 이승우의 태도가 논란의 대상이 됐다. 대한민국 U-20 대표팀은 지난 3월 27일 아디다스 U-20 4개국 친선 축구대회서 잠비아를 만나 4-1 대승을 거두었다. 한국의 초특급 유망주로 손꼽히는 이승우가 이 날 경기서 2골을 몰아넣으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역시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유망주다. 이승우는 전반 40분, 바르셀로나 동료 백승호의 패스를 받아 골로 성공시키며 2-1로 한국의 리드를 가져왔다. 이어 후반 24분 상대 골키퍼가 나온 것을 보고 환상적인 칩샷을 터트렸다. 이승우의 클래스를 볼 수 있던 순간이었다. (사진=연합뉴스) 이승우 인성, 논란거리인가? 세계는 이승우의 성장세를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승우의 인성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이승우는 후반 35분, 헤딩 경합을 하다 쓰러진 정태욱에게 달려왔다. 다급히 구급차를 불렀다. "빨리 오라고! 빨리 오라고! XX." 문제는 이 발언이었다. 경기장 안으로 빨리 들어오지 않은 구급대원들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핵심은 '욕까지 해야 했었나?'라는 것이다. 빨리 들어오라고만 하면 될 것을 그렇게까지 분노하면서 소리쳐야만 했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이승우의 감정은 모두가 이해할만 하다. 팀 동료가 심각한 부상일지도 모르는 머리 부상을 당해 쓰러졌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걱정하지 않을 사람은 없으며 다급한 마음에 구원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지극히 당연한 행위다. 과장된 표현일수 있지만, 세월호 사건을 이 사건에 대입해본다면, 마치 '가만히 있어라' 같은 내용이 될 수도 있다. 큰 부상을 당했다.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연히 방방 뛰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맞다. 주변에 팀닥터가 있어서 괜찮다? 그렇다면 주변에 선생님들이 계시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좋다는 말인가? 글쎄. 충분히, 100% 이승우의 행동에 동의한다. 비유가 적절치 못할 수 있겠으나 적어도 내 입장은 이승우 편이다. 또한 이승우는 현재 스페인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유럽의 시스템이 다 잘 갖추어져있고 우리나라는 그에 비해 형편없다고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대체적으로 스페인의 의료 시스템은 최고 수준일 것이다. 특히, 선수가 부상당했을 때의 대처 요령 등과 같은 것 말이다. 이승우는 그런 상황에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의료진에게 불만이었을 것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이승우의 태도, 사진=네이버 KBSN SPORTS 캡처) 근본적인 원인을 고찰하자 이승우가 화낸 것만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왜' 이승우가 그랬는지를 근본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도대체 왜 이승우가 화를 냈을까. 그 이유는 의료진의 초동 대처가 미흡한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포츠 경기에서 위급한 상황이 많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철저한 상황 대처 요령을 숙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체감할 때 분명 우리나라 스포츠 의료 체계는 문제가 있다. 과거 2000년 4월 18일 롯데 자이언츠와 LG 트윈스의 경기에서 2회 초 2루로 진루하던 故임수혁(롯데 자이언츠, 향년 42세)선수를 떠올려보자. 2000년대라면 분명히 의료 기술이 발전한 시기였다. 지금은 그보다 더 발전했겠지만 그 당시도 충분히 구급차, 의료 체계가 갖춰졌을 기술력이다. 하지만 당시 구급차도 준비되어있지 않았고 사고 대책이 미흡해 결국 故임수혁 선수는 식물인간 상태로 10년을 지냈고 끝내 2010년 눈을 감았다. 당시에 누군가 소리쳤다면, 구급차를 애원하며 울부짖었다면, 초동 대처가 확실했다면 故임수혁 선수는 야구 팬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故임수혁 선수 사건 이후 스포츠계는 의료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고 특별히 큰 사건을 겪지 못했다. 내가 알기론 큰 사건이 기억나지 않는다. 있다면 알려주시길 바란다. 무엇이 예의인 것일까. 예의를 생명보다 먼저 갖춰야 하는 것일까. 정태욱이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혹여나 초동 대처의 미흡으로 인해 식물인간이 되기라도 한다면 뒷감당은 누가 할 것인가. 그 때는 누구를 비난할 것인가. 잘잘못을 논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갖춰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주목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가 아닐까.
한국 축구 유망주 정리
저 jsy7268618은 앞으로 주로 유망주들의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국내 해외 관계없이요 일단 축구팬들이 제일 기대하고 많이 알려져있는 바르샤 트리오와 이강인에 대해 소개시켜드리겠습니다. 백승호 바르셀로나B 나이:(올해 기준) 20세 키:182 정도 (소개시켜드릴 유망주들은 성장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더 커질수 있음) 포지션:중앙미드필더,수비형 미드필더 주로 다는 백넘버:8,10번대의 등번호 성향,선수 특징:화려한 개인기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어릴적 스피드를 살린 간결하고 깔끔한 드리블 사용과 동시에 볼을 양옆으로 찔러주거나 벌려줌 키가 커짐과 동시에 공중볼싸움에 강해졌고 아직 피지컬면에선 더 성장할 필요가 있고 킥파워도 수준 높음 최근 복귀전에서 10번을 달고 나와 활약함 주발은 왼발이며 왼발은 패스할때 정교하게 가능하고 오른발은 강력한 슛팅을 반박자빠르게 때릴때 잘 사용한다 사실상 양발 이승우 바르셀로나B 나이:19세 키:170초반대 이승우 선수 형인 이승준님 페이스북에 의해선 172cm 로 알려져있음 포지션:원톱 최전방 스트라이커,측면 공격수,공격형 미드필더 주로 다는 번호: 9,10 등 10번대 번호 최근 복귀전에선 9번을 달고 나왔으며 이번 원정경기에서도 9번을 사용 선수 성향,특징:바르셀로나 선수답게 재치있고 창의적인 플레이를 선호하고 공을 직접 패널티 에어리얼까지 끌고 들어가서 골을 넣을만큼 드리블에 능해 흔히 제2의 메시라 불린다 언론에 알려진지 초반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골에 대한 아쉬움과 승부욕에서 나온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봄 (이 문제는 차차 나아질것임) 우리나라 스트라이커들이 지금껏 가지지못한 스타일의 선수라 언론의 반응을 과하게 많이 받음 가장 한국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는 선수이며 현지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현지에서도 메시를 이미 뛰어넘었다는 기사까지 나왔다(실제 기사) 다만 지켜보는 팬으로써 과한 부담을 안겨줄수 있다고 생각됨 주발은 오른발이며 강한 슛팅도 자주하고 키는 작지만 헤더 연습을 매우 많이 한다고함 장결희 후베닐A(위키백과상에선 A 네이버 B) 나이:19세 키:170초중반이라고 함 포지션:측면공격수(윙),측면 미드필더,공격형 미드필더 주로 다는 번호:11,10번대의 등번호 선수 성향,특징: 바르샤 징계로 인해 돌아오는 4월에 징계가 풀리고 계약해지설도 있지만 증명되지 않은 찌라시일뿐 장결희 선수 아버지 역시 그런 사실은 듣지 못했다고 함 징계때문에 현지내 다른 지역과 클럽에서 훈련중으로 알려져 있음 확실히 측면 공격수답게 속도를 살린 공격을 잘하며 개인기 역시 잘사용한다 다만 징계가 아쉬울뿐 현재 측면공격수로는 글쓴이 개인적인 생각으론 19세 이하 선수중엔 탑이 아닐까 싶다 이강인 발렌시아CF 나이:16세 키:160후반대,170컷?? 포지션:공격형 미드필더, 측면 미드필더,False9 주로 다는 번호:10번,10번대의 번호 17번과 같이 선수 성향,특징:개인기 하나는 유소년중 으뜸이라 할정도로 매우 능함 기본적으로 드리블할때 균형이 잘 잡혀있고 자세가 낮아서 빠른 동작교체에 능함 실제 경기에서 마르세유턴,빽숏,헛다리를 매우 잘 이용하고 순간 순발력이 좋아서 드리블 치다가 갑자기 멈췄다가 다시 드리블 치는등 드리블 하다가 멈춰서 키패스를 해주거나 등등 골 간수 능력과 시야가 최고 장점인 선수고 글쓴이가 가장 기대하고 좋아하는 유소년 선수이다 빅클럽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으며 발렌시아는 그 속에서 불안해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강인이는 발렌시아를 떠날 마음이 아직은 전혀 없다고 함. 이상으로 유소년 4인방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핸드폰으로 썻더니 거짓말 살짝 보태서 40분 걸렸네요 유익하게 보셨으면 저야 괜찮습니다 @잘못된 정보는 지적해주세요
[울산 레전드 특집] 03. '나는 전설이다' 김병지
축구에서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는 포지션은 공격수다. 왜냐하면 언제나 팀의 공격의 마무리를 담당하고, 멋진 슈팅으로 상대팀의 골문을 가르면서 팬들의 환호를 유도하기 때문이다. 반면, 가장 고생을 많이 하는 포지션이 어디일까? 바로 골키퍼다. 요즘은 덜하지만, 10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골먹히면 가장 먼저 비난받았던 순서는 골키퍼고, 그 다음이 수비수였다. 그만큼 '잘해도 본전치기' 였으며, 그렇기에 가장 외로운 싸움을 견뎌야만 했다. 게다가 골키퍼는 단순히 슈팅을 막는 것을 넘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수비수과 의사소통을 하면서 수비라인까지 조정해야하는 임무 또한 중요하다. 그렇기에 90분 내내 사자후를 장착해야하는 것은 물론이겠거니와, 필요할 때는 막말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 그만큼 수비가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역대 세계 최고의 골키퍼라 불리었던 레프 야신을 비롯하여 당대 최고의 골키퍼들도 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왔고, 오늘날 세계 최고의 골키퍼라 불리는 지안루이지 부폰이나 이케르 카시야스, 페트르 체흐, 마누엘 노이어 등도 그 전례를 이어가고 있다. 1990년대, 그 당시 골키퍼가 주목받지 못했던 시기에 혜성처럼 등장해 남다른 외모로 축구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고, 동물적인 감각으로 골문을 사수하던 염색한 꽁지머리 골키퍼가 있었다. 정말 주목받기 힘든 골키퍼라는 포지션을 감안한다면, 그는 K리그 내내 이슈거리었다. 단순히 선방쇼만 펼치는 것을 넘어 때때로 직접 드리블하여 40m 드리블로 전진하는 대담성을 보이거나, 위기상황일 때 세트피스 상황까지 올라와서 직접 헤딩슛으로 골을 만들어내질 않나,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독특했다. 기존 팬들이 접할 때에는 분명 '이단아' 성향이었지만, 그것이 그의 매력이었다. 그렇게 1990년대에 프로축구계에 발을 들인 그 20대 골키퍼는 2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골문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아직까지도 선수생활을 이어가길 갈망하면서 K리그 역사의 산증인이 되길 원하고 있다. 그가 한 경기 한 경기 뛸 때마다 역대 최다 리그 출장기록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 '나는 전설이다'를 외치는 골키퍼, 김병지가 세번째 주인공이다. 1. 가난함을 딛고 축구선수의 꿈을 키우다 김병지는 1970년 경상남도 밀양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돈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밀양중을 거쳐 1986년 마산공고로 진학할 때, 등록금 납입 기간 때마다 가슴을 졸여야 했었다. 중학교부터 축구선수로써 꿈을 키우고 있던 김병지에게 축구회비를 집에서 지원해준다는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김병지는 축구선수로서의 꿈을 이어가고 싶었기에 국비 지원을 조건으로 그는 부산 소년의 집(지금은 알로이시오 전자기계고등학교로 바뀌었다)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렇기 학비와 축구회비를 국가에서 지원을 받으면서 김병지는 축구부로 계속 활동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당시 '소년의 집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세간에는 그리 곱지 않는 시선으로 보았기에, 그어느 대학교에서도 김병지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 진학이 사실상 어려워진 그는 축구부 생활을 하면서 학교에서 취득한 용접공 자격증을 가지고 선반 용접공이 되면서 축구선수 생활을 올스톱해야만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김병지가 하마터면 영원히 선반 용접공으로 지낼 뻔 했다. 그는 실제로 창원 기계공단의 금상산전에서 1년 6개월동안 용접공 생활로 산업의 역군이 되었고, 1989년 상무 입단 테스트를 받고 합격함으로써 용접공 생활을 청산했다. 김병지는 계속 축구를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그의 첫 축구선수 생활을 상무에서 시작하게 된 셈이다. 상무 소속으로 실업리그를 뛸 당시, 김병지는 그렇게 주목받진 못했다. 특출나게 띄는 포지션이 아니었던 골키퍼였으니까. 그러다 1991년, 추계실업축구연맹전 국민은행과 결승전에서 김병지는 국민은행의 공격을 모두 다 막아낼 뿐더러, 승부차기 접전 끝에 PK까지 하나 막아내면서 상무를 우승으로 이끌었고, 그는 그 대회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2. '김병지' 세 글자를 키워낸 울산, 그리고 그 영광스런 순간(1992~2000) 상무에서 보여준 활약 덕분에 김병지는 차범근 감독의 눈에 들어 월급 80만원 연습생 신분으로 1992년에 울산으로 입단할 수 있었다. 당시 울산의 주전 골키퍼는 한국 국가대표 넘버원 골키퍼이기도 했던 최인영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김병지가 넘어서기에는 너무나도 큰 벽과도 같았다. 최인영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국가대표로 출전했었고, 조별리그 3경기 전부 선발출장하였다. 그렇기에 김병지는 처음에 서브 골키퍼로 울산 생활을 시작하면서 주전인 최인영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도 기회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92년 아디다스컵 때 PK만 3개를 막아내면서 무서운 신예의 탄생을 예감케 했고, 김병지의 장점 중 하나인 민첩성과 반사신경 덕에 그는 2년 만에 기존 주전이었던 최인영을 벤치로 끌어내리고 주전 골키퍼로 장갑을 끼기 시작했다. 1993년에는 25경기에 나서 19실점을 기록, 평균 0.76 실점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당시 동유럽 골키퍼 열풍이었던 한국 골키퍼 무대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러다 최인영이 1994년 미국 월드컵 본선에서 알까기로 인한 실점으로 혹독한 비판을 받으며 쓸쓸한 선수생활을 마무리할 시점에 접어들었고, 그와 맞물려 본격적인 김병지의 시대가 열렸다. 최인영이 은퇴한 이후, 다음 한국 대표팀 차세대 골키퍼 1순위로 김병지가 물망에 올랐고, 그는 1996년 아시안컵 대표팀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면서 국가대표 생활까지 겸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하나하나씩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있던 김병지는 1996년 울산을 이끌고 리그 첫 챔피언에 등극하는 데 큰 힘을 보탰고, 기량과 폼도 최상의 정점을 찍고 있던 터라 클럽에서든 국가대표팀에서든 김병지를 제치고 넘버원이라고 외칠 만한 골키퍼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던 김병지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 주전 골키퍼까지 무난하게 승선할 수 있었다. 1998년 프랑스에서 한국대표팀의 성적은 처참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김병지는 같은 클럽팀 동료였던 유상철과 함께 유일하게 월드컵 대회 기간에 제 몫 이상을 해줬었다. 특히, 네덜란드에게 비록 5골을 실점했지만 90분 내내 수차례 파상공세를 펼치던 네덜란드를 상대로 김병지는 수많은 슈퍼세이브를 기록하면서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몸을 사리지 않았다. 설문조사에서도 김병지가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고 나왔을 정도다(한동안 유럽진출한다는 루머까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김병지의 1998년은 프랑스 월드컵보다도 더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라이벌팀인 포항과의 K리그 플레이오프전이었고, 수많은 축구팬들 사이에서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경기로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1998년 10월 24일, 1차전에서 울산은 포항 원정에서 3대2로 패배하였기에 무조건 홈경기에서 승리해야하는 입장이었다. 후반 40분에 포항의 박태하에게 실점을 허용하면서 점수는 1대1, 이 상태로 갔다가는 울산이 떨어지게 되는 상황이었기에 세트피스 기회에서 김병지까지 상대 골문까지 올라왔다. 후반 45분, 휘슬 소리와 함께 김현석의 프리킥은 골문 쪽으로 날아갔고, 김병지는 헤딩골로 만들어내면서 탈락 위기에 놓여있던 울산을 극적으로 살렸다. 이 때 기록한 김병지의 골이 K리그 역사상 최초로 골키퍼가 기록한 골이었다. 1,2차전 도합 3대3이었기에 동해안더비는 연장전까지 치뤘고 승부차기 접전끝에 4대2로 울산이 포항을 누르고 결승전에 올라섰다. 김병지 개인에게는 절대 잊을 수 없는 경기였다. 그렇게 김병지는 2000년까지 K리그 올스타전에서 독보적인 넘버원 골키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그와 더불어 새로운 국가대표팀 감독인 히딩크에 의해 발탁되어 칼스버그컵 출전준비를 하게 되었다. 3. 충격적인 포항으로의 이적, 영원한 라이벌 이운재와의 조우(2001~2005) 2001년 새해 첫 뉴스는 울산에게 있어 충격 그 자체였다. 오랫동안 울산의 수문장으로 활약해오던 김병지는 새 팀으로 이적했는데, 하필이면 울산의 최대 라이벌인 포항으로 이적하면서 울산팬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였다. 울산과 포항간에 선수 이적이 여태껏 한 번도 없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는 분명 이슈임에는 확실하다. 김병지가 8년간 뛰었던 울산을 등지고 포항으로 이적하게 된 계기는 지난해 6월에 구단과의 갈등이 적잖게 작용했다. 김병지는 그당시 해외진출을 요청하였고 특히 독일 분데스리가 진출을 원했었으나, 구단에서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었다. 때마침 포항은 주전 골키퍼였던 조준호가 지난 시즌 부상을 당한 이후 컨디션이 채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골키퍼 보강이 필수였던 터였고, 때마침 김병지가 울산 구단과의 불화를 겪고 있었기에 당시 최고 이적료 5억 5천만원에 연봉 1억 2천만원, 계약기간 3년으로 그를 데려오게 되었다. 김병지가 물꼬를 터주면서 울산과 포항 사이에서의 선수거래가 시작되었다(김병지 이후로는 이진호-노병준 임대 트레이드도 있었다). 그가 이적하고 나선, 울산이 유독 포항만 만나면 고전했다. 그래서 '김병지의 저주' 가 이때부터 생겨났다. 포항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된 김병지는, 새로운 국가대표 감독으로 부임한 거스 히딩크에게도 단연 1순위였다. 하지만 2001년 홍콩에서 열렸던 칼스버그컵이 자신에게 파장을 몰고 올 지는 예상못했을 것이다. 특히나 칼스버그컵 3,4위전인 파라과이전은 김병지 본인에게 큰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파라과이와의 경기 도중, 전반전 추가시간에 김병지는 갑작스럽게 페널티박스 밖으로 드리블하여 나오는 돌출행동을 보이면서 히딩크 감독 뿐만 아니라 국가대표팀 스태프들을 놀라게 만들었고, 하마터면 파라과이 공격수에게 공을 빼앗겨 실점할 위기를 초래했다. 김병지의 이러한 돌출행동이 사실 이 칼스버그컵에서 처음 보였던 것만은 아니다. 1996년 수원과의 아디다스컵 대회 개막전에서도 골문을 비우고 미드필드로 전진하는 불안한 장면을 연출하다가 팀의 패배를 자초했고 이로 인해 한때 국가대표팀 명단 제외라는 수모를 겪기도 했었다. 그러한 전례가 있던 김병지는 5년 후인 칼스버그컵에서 재현했고, 히딩크는 지시없이 독단적으로 움직인 김병지를 전반전 끝나고 김용대로 교체하면서 그에게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보라고 호통쳤다. 요즘에는 이러한 김병지의 플레이를 독일의 마누엘 노이어가 가끔씩 보여주곤 하는데, 그 당시에 골키퍼가 페널티 에어리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로 여겼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병지가 국가대표팀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그 자리에 라이벌인 이운재가 들어오게 되어 이 때부터 '김병지 vs 이운재' 의 구도가 시작되었고, 1년 뒤 2002년 월드컵에서도 그는 이운재에게 밀려 4강 신화의 조연에 머물렀다. 포항에서 베테랑 트리오(고정운-하석주-김병지)를 구축하면서 그는 포항의 최후방을 담당할 것으로 보였지만 김병지의 첫시즌은 부상과의 싸움이었다. 다행히 시즌 중반에 복귀하였으나, 그 이후 강철 군단은 FA컵에서 2년 연속 준우승에 머무르는 것 이외 이렇다할 기록이 없었다. 2003년 포항이 본격적인 최순호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편작업이 이뤄지고 이와중에 핵심전력이었던 홍명보, 이싸빅, 이동국, 하석주 등이 팀을 떠났음에도 김병지는 잔류하였다. 포항은 2004년 전반기 리그 우승을 발판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면서 오랫동안 꿈꿔왔던 리그 우승에 정조준하였고, 4강에서 철천지원수인 울산을 만나 1대0 신승을 거두며 결승전에 올랐다. 우승까지는 이제 단 한 경기 남은 상황에서, 상대는 수원이었고 수원의 골문을 지키는 선수는 공교롭게도 2002년 월드컵 당시 자신의 자리를 낚아챘던 이운재였다. 포항은 수원과의 2차례 경기는 두 명의 국가대표급 골키퍼들의 한경기 스페셜이라 할만큼, 그들의 존재는 너무나도 컸다. 그렇기에 승부를 가르지 못하여, 결국 승부차기까지 가야만 했다. 모든 이들은 김병지와 이운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승부차기에서 과연 누가 웃을 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양 팀은 한 명씩 승부차기 실축을 한 상태였고, 수원의 5번째 키커인 우르모브가 포항의 골문을 갈라 4대3으로 수원이 앞서고 있던 상황이었다. 포항의 다섯번째 키커로 김병지가 나섰고, 11m 공간에서 두 골키퍼간 일기토가 일어날 순간이었다. 이운재는 김병지가 찬 공을 막아냈고, 김병지의 실축과 동시에 승부는 이운재의 승리로 돌아간 반면, 김병지는 정상의 문턱에서, 단 한 번의 맞대결에서 그에게 패배했다. 그렇게 수원의 3번째 우승의 들러리가 되었다. 4. 기록의 시작을 알렸던 서울생활(2006~2008) 2005년 말, 김병지는 포항과 재계약 협상테이블에 앉았지만 끝끝내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갈라서게 되었다. 그리고 포항에 입단할 당시, 이적료 없이 타 팀으로 이적할 수 있다는 조항에 의해 그는 이적료가 발생하지 않은 채 타 팀으로 이적할 수 있는 권한이 생겼고 그 때 그를 원했던 팀은 친정팀이었던 울산과 수도권팀인 서울이었다. 특히 서울이 그를 적극적으로 원했는데, 이유는 서울이 지난 시즌 리그 6위를 기록했던 이유가 바로 후방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서울의 아이콘이었던 박주영 못지 않은 네임밸류를 지닌 선수가 필요했고, 김병지가 바로 이에 적합했었다고 한다. 그렇게 김병지는 김한윤과 함께 서울에 입단하여 서울의 후방을 책임지게 되었다. 계약기간은 3년이었다. 임팩트가 뚜렷했던 울산과 포항시절에 비하면 김병지의 3년간 서울생활은 비교적 조용(?)했다고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개인 기록을 세워나가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서울과 3년 계약을 맺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2005년 시즌 마감을 기점으로 그는 통산 387경기 출장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이상의 출장기록을 이어나가기 위함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리그 컵 우승을 공헌하였고, 이적 첫 해에 K리그에서는 2번째로 리그 4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고(첫번째는 성남의 레전드인 신태용이었다), 곧바로 리그 최다 출장 기록을 갱신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그 다음해인 2007년에는 통산 최다 무교체 기록을 153경기로 갱신하면서 현재까지 이 기록 부문에 있어서 독보적이다. 하지만 2008년 6여년 만에 복귀한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칠레전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하여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허리 부상에서 회복하고 다시 피치로 복귀했을 때, 김병지의 자리는 이미 잃어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겨우 복귀했던 국가대표팀에서는 라이벌인 이운재와 떠오르고 있던 김영광이 꽉 쥐고 있었고, 클럽팀인 서울에서는 김호준이 성장하면서 자리잡고 있었던 형세였다. 그러던 와중에 7월에 김병지와 귀네슈 감독 간 불화설이 뜨게 되면서 선수와 구단의 관계는 급격히 냉전체제로 바뀌었다. 결국 김병지는 서울과의 계약 연장을 하지 않고, 3년 계약기간을 채우고 쿨하게 떠났다. 사람들은 그의 다음 행선지가 어디일 지 대단해 궁금해했다. 5. 고향으로 돌아온 김병지, 맏형 역할과 대기록에 도전하다(2009~2012) 그는 서울을 떠나 2009년 시즌부터 경남에서 뛰었다. 계약기간 3년으로, 플레잉코치 신분으로 합류하였다. 사람들은 김병지의 경남팀 합류에 대해 고향팀에 입단하였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그의 고향인 밀양이 행정구역상 경상남도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고, 구단에서도 그를 고향팀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언급했을 정도였다. 창단한 지 얼마되지 않은 신참 경남 입장에서는 김병지라는 존재가 구성원 한 명 이상의 역할이었다. 아무래도 신예나 무명의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다보니 다양한 개성들을 지닌 선수들을 한 데 아우르고 다독여줄 수 있는 피치 위의 리더가 필요했었고, 김병지가 그 적임자였기 때문이었다. 김병지는 경남에 입단하면서 3가지 목표를 내걸었는데, 바로 "리그 통산 500경기 출장, 경남의 6강 진출, ACL 출전권 획득" 이었다. 2009년 시즌 마지막 라운드에서 경남은 전북을 맞이하여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둔 외나무다리 승부를 펼쳐야만 했는데, 그 경기가 김병지의 통산 리그 500경기 출장이었다. 그래서 등번호 500번을 새긴 유니폼을 특별제작했고 입고 뛸 수 있도록 프로연맹과 수차례 씨름한 끝에 가까스로 승낙을 받았다. 하지만 김병지에게 있어 500번째 경기는 자축보다는 슬픈 기억으로 남아버렸다. 하필이면 전북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무려 4실점이나 내주는 치욕을 당해야만 했고, 전북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경남은 자신들과 승점이 동률이었던 인천에게 6강 플레이오프 티켓을 내주기까지 했다(김병지 개인 기록도 500경기 통산 501실점이 되어버려 한 경기당 한 골 내주는 꼴이 되어버렸다). 곧바로 다음 시즌인 2010년에는 경남이 6강 안에 들면서 김병지는 500경기에 이어 6강 진출까지 이뤘다. 그리고 2012년에는 통산 200번째 클린시트 달성과 더불어 통산 600경기 출장기록까지 달성하였다. 600경기 달성을 이뤘던 서울전에서 김병지를 비롯한 경남의 모든 선수들이 경남의 맏형이 세운 기록을 기념하는 티셔츠를 입고 경기장에 입장하는 광경을 연출했다. 경남에서 뛰면서 자신이 내세운 목표 중 2개는 충족시킨 김병지, 하지만 ACL 출전권 획득만은 유일하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리그 3위 이내 진입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경남 입장에서는 국제 대회 출전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FA컵 우승이었고, 실제로 경남은 FA컵에서도 누구보다도 독하게 임했다. 김병지가 뛸 당시에도 경남이 FA컵 결승전에 한 번 올라갔었는데(2012년), 하필이면 상대가 4년 전 결승전에서 자신들을 쓰러뜨린 포항이었다. 포항과의 재대결에서 연장전까지 0대0으로 팽팽한 승부를 유지하고 있던 그 때, 후반 종료 휘슬이 울리기 직전에 포항의 박성호가 김병지의 마지막 목표달성을 무너뜨리는 결승골을 성공시켰다. 박성호로 인해 김병지는 마지막 목표를 접어야만 했고, 경남도 자신들이 그토록 바랬던 '시도민구단 최초 ACL 진출' 이라는 원대한 꿈을 다음으로 미뤄야만 했다. 2012년 시즌, 경남은 FA컵 준우승과 리그 최종순위 8위로 2% 아쉬움을 남긴 채 시즌을 마쳤고, 이 시즌을 끝으로 김병지는 FA 자격을 획득하였다. 사람들은 자유계약신분을 얻은 김병지의 다음 행보에 주목했다. 솔직히, 자신의 고향팀인 경남을 자신의 마지막 커리어 삼아서 기록 갱신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경남 구단의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구단 이사회는 경영 부실을 이유로 사무국을 구성하고 있던 직원과 감독을 필두로 한 코칭스태프 전부 사퇴 권고하는 등의 내부 분열을 조장했었고, 구단의 재정이 열악했던 상황이라 그를 붙잡기란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때마침 김병지가 이재명과 함께 전남으로 이적할 것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고, 결국 그는 드래곤던전에 입성하게 되었다. 6. 김병지, 불혹을 넘어선 골키퍼의 끝나지 않는 이야기(2013~현재) 김병지가 전남의 새로운 골키퍼로 입단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김병지는 슬하에 아들 세 명을 두고 있는데(태백, 산, 태산), 김병지가 전남 이적을 확정지으면서 세 아들 또한 전남 유스로 동시 입단하면서 전남을 이 4부자가 접수하였다. 두 번째는 김병지가 광양으로 오기 전에 전남의 주전 골키퍼 자리를 꿰찼던 사람이 다름 아닌 그의 라이벌이었던 이운재였다는 사실이다. 줄곧 상대팀에서 경쟁을 펼쳐왔던 두 사람이었는데, 한 클럽에서 두 사람이 거쳐가는 경우도 있었으니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이런 데에서 비롯되지 않나 싶다. 또한 그가 입단할 때, 당시 감독이었던 하석주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 및 코칭 스태프들 중에서 김병지보다 나이가 어렸으니, 사실상 그가 전남에서 서열 2위라 해도 좋았다(하석주가 물러난 뒤에 노상래가 전남의 새 감독이 되었을 때에는 구단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노상래 감독은 김병지와 동갑이다). 마지막으로 이번에는 플레잉코치가 아닌 선수 신분으로 계약했다. 이 말은 즉슨, 선수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셈이다. 노랑색 유니폼을 입고 뛰는 김병지의 한 경기 한 경기 자체는 전설로 쓰여지고 있었다. 이미 K리그 통산 최다 출장기록을 갱신하고 있었고, 불혹을 넘어선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신체적인 감각,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수비 장악력 및 조율은 젊은 선수들이 대거 포진된 전남에게 있어서 플러스 요소였다. 김병지는 후에 전남에 합류한 현영민, 스테보, 최효진 등과 함께 이른바 베테랑 라인을 구축하면서 전남의 균형있는 신구 조합을 만들어냈다. 그러던 와중 2015년 시즌 어느 날, 김병지는 또 한 번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2015년 7월 26일은 김병지 개인 커리어 뿐만 아니라 한국 프로축구 역사에 있어서 의미 있는 날이었다. 30년 넘는 K리그 역사상 통틀어 최초로 700경기를 소화하는 선수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1992년에 프로 데뷔한 이래 23년간 쉴새없이 달려온 김병지가 만들어낸 노력의 결과물이었고, 이 날 제주와의 홈경기를 가졌던 전남은 김병지를 위한 이벤트를 준비했고, 전남 선수들은 700이라는 등번호가 적힌 유니폼을 입고 입장하였다. 이전 500경기 출장 기록 때와 달리 김병지는 이번에는 웃었다. 전남은 이 날 제주를 3대1로 크게 이겼고, 김병지도 제주의 슈팅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으면서 승리와 기념을 자축하는 플레이를 선보였다. 중요한 사실은, 김병지의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내딛는 흔적은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지금 김병지가 남긴 족적만을 보았을 때에는 단순히 울산에서 뛰었던 골키퍼를 뛰어넘어 K리그를 상징하는 골키퍼이자, K리그 역사의 산증인이 되어가고 있어서 울산 레전드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으면, 2000년대부터 축구를 본 사람들에게 있어서 다소 생소할 수 있을 것이다(김병지가 유상철이나 김현석에 비해 원클럽맨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1990년대 울산 공설운동장에서 항상 어김없이 미친 존재감으로 모습을 드러내던 꽁지머리 시절 김병지가 뇌리 속에 아직도 남아있고, 그 때가 김병지 커리어 중에서 최절정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면, 김병지가 K리그를 선도하던 일종의 트렌드세터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1990년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행과 페널티 에어리어 밖을 뛰쳐나오던 필드 플레이는 지금은 마누엘 노이어가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골키퍼들도 드리블을 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보아 상당히 선도적이었다. 김병지처럼 리그 통산 700경기 이상 달성한 선수, 혹은 20년 넘게 현역 선수생활을 유지하는 선수가 해외에도 손에 꼽을 정도다. 이웃 나라인 일본의 살아있는 전설인 '킹 가즈' 미우라 가즈요시(현역 생활 30년째에 접어들고 있다)나 맨유에서 700경기 이상 출장 대기록을 달성한 라이언 긱스(총 963경기 출장, 리그는 672경기 출장) 정도 비교할 수 있을만큼, 김병지의 존재감은 상당히 크다. 700경기를 달성한 김병지의 다음 목표는 777경기 달성이라고 한다. 술, 담배를 전혀 안하고 항상 꾸준한 몸관리를 하기로 소문난 김병지, 그가 777경기를 달성하고 자신의 아들과 함께 경기에 출전할 날도 마냥 꿈은 아닐 것이다. 원문 : http://blog.daum.net/manutdronaldo/666 [울산 레전드 특집] 01. '유비' 유상철 http://blog.daum.net/manutdronaldo/502 [울산 레전드 특집] 02. '가물치' 김현석 http://blog.daum.net/manutdronaldo/5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