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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통해 들여다 본 내면과 외면, 그리고 현실과 허구

일본 도쿄 태생의 포토그래퍼 ‘TOKYO RUMANDO’가 ‘I’m only happy when I’m naked’라는 적나라한 타이틀과 사진으로 구성된 개인전을 앞두고 많은 예술 애호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난 벗을 때만 행복을 느낀다”는 자극적인 타이틀과 적나라한 사진들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직전의 전시 ‘Orphee’에 전시됐던 사진 8점과 100여점 이상의 폴라로이드 작품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TOKYO RUMANDO는 수 년간 모델로 활동했던 지난 날을 포함해, 그녀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영감을 토대로 즉흥적으로 스스로를 촬영해 ‘날 것’의 이미지를 선보였습니다. 지난 2014년에 선보였던 전시 ‘Orphee’에서는 TOKYO RUMANDO가 대형 사이즈의 원형 거울 앞에서 직접 옷을 벗었는데요.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에서는 그녀의 기억과 공포, 열망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투영됩니다. 각각 이미지들의 시퀀스는 한 사람임에도 각기 다른 여성들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거울 앞에 선 자신에서부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한 전체적인 분위기 등 모든 것은 그녀의 작품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들인데요. 각 요소들의 경계는 내면과 외면을 구분 짓는 듯 하지만, 동시에 그 경계를 허물어뜨립니다. TOKYO RUMANDO는 거울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나누는 연대 순의 경계로 삼는데요. 그렇기에 그녀가 선보이는 작품 이미지들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역설적인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본래 ‘Projection⇔Introduction’타이틀이었던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이미지 시리즈는 그녀의 과거를 보여주는데요. 그녀는 “난 나의 내면을 다듬고 있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난 새로운 내 모습을 찾기 보다는 다듬어진 나의 내면을 사진으로 드러내고, 또다시 나의 내면에 비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나는 무언가를 얻어간다.”며 자신의 작품이 가진 의미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번 전시회 타이틀인 ‘I’m only happy when I’m naked’는 그녀의 데뷔작이자 일본의 모텔을 배경으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REST 3000~ STAY 5000’ 시리즈 이후 그녀의 작품세계를 드러내는 핵심 구절의 역할도 하는데요. 거울이라는 익숙하면서도 미스테리한 사물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자유롭게 오가는 그녀의 사진 작품에서는 주인공으로 드러난 그녀의 개인적인 모습만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사진을 보고 공감과 유대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마 모든 이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과거로부터 퇴적된 기억의 더미, 잡을 새도 없이 지나쳐버리는 현재,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작가의 자세한 프로필과 더 많은 작품은 TOKYO RUMANDO의 공식 홈페이지를, 전시 정보는 ‘Taka Ishii Gallery’의 공식 홈페이지를 참조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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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야 속 맥주한잔, 후쿠오카#1
공항노숙으로 여행의 시작을.. 블라디보스톡과 삿포로에 이은 세번째 출국이자 30대 첫 해외여행도 어김없이 출국 전 날 공항에서 보내게 되었다. 퇴근 후 항상 들어가는 지하철 입구를 그대로 지나가 공항버스 정류장에 들어서 발걸음을 멈췄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퇴근길 교차로를 꽉꽉 채우고 있는 차량들만 멍하니 초점없이 바라 보았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교차로 한 가운데 멍하게 아무생각도, 행동도 하지 않는 여유로움이 있는 시간이 묘하게 매력있었다. 전세 낸 듯, 개인 버스인듯 아무도 없는 공항버스에서 서울을 뚫고 가는 도중에 보이는 서울야경이 참 예쁘다. 항상 지하철로 청담역에서 뚝섬역으로 가는 도중에도 잠깐 볼 수 있는 야경이지만 스마트폰 불 빛에만 시선을 두곤 했다. 역시 속세를 잠시 벗어나야 주변으로의 시야가 조금씩 넓어지는 것 같다 피곤한 설레임 운 좋게 폭신한 벤치에서의 하루밤을 새우고 아침 공항의 긴 무빙워크에 영혼없는 깡통 몸만 얹었다. 처음엔 들떠 보이던 사람들의 표정이 게이트 앞에서는 다시 피곤이 드리워지고 있다. 모두가 빨리 비행기에 들어가 잠들 생각만 하는것 같다. 혼자 타보는 해외 비행기에 대한 쓸데없는 의미를 부여하며 혼자만의 감성에 빠져 하염없이 잠인듯 구경인듯 창 밖으로의 시선을 던져본다. 비오는 날에는 뜨끈한 국물이 진리 공항에서 친구와 만나 후쿠오카 시내로 들어서니 비가 우산에 구멍을 낼 기세로 내리고 있다. 안그래도 회사에서 바로 공항에 갔던터라 입고 있는 캐쥬얼정장 차림에 비로 인해, 한 껏 머금은 습기가 마치 온 몸을 물티슈로 감싸고 있는 느낌이다. 호텔의 체크인 시간이 되지 않아 짐만 맡기고 바로 나와 멀리 가지도 않고 바로 앞 골목길에 있는 라멘집으로 들어갔다. 입구부터 반겨주는 티켓 자판기에 일본어만 가득한 걸 보니 믿을건 사진 밖에 없다. 메뉴를 고르고 처음 나온 교자를 보니 예전에 애니메이션을 봤을 때 분식집에서 라멘이나 교자 먹는 장면이 불현듯 떠오른다. 애니메이션 내 감성까지는 잘 모르지만, 밖은 엄청나게 쏟아지는 폭우에 가게 안에서 속이 뜨거운 교자를 간장에 찍는 모습이 한 손에 교자를 들고 있었어도, 나름의 교자 감성이 있어 보이지 않았을까. 바늘생강의 꼭 찌르는 맛 진한 국물의 돈코츠라멘은 테이블의 한 쪽 구석 통 안에 바늘처럼 썰어놓은 생강을 만나면서 한 단계 더 깊은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이전 삿포로에서도 유명한 라멘집을 가서 먹었었지만 이곳만큼 진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조금은 딱딱하게 느껴지는 면과 기름기가 있는 돼지고기 육수의 조합은 마지막날 공항에서까지 라멘을 찾게 해 줄 그런 조합이었다. 호텔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며, 얼른 들어가 비에절어 찝찝한 옷부터 얼른 갈아입어야겠다.
엄마야, 가을이 다 여기 있었네! - 뮤지엄 산
기분 좋게 서늘한 날들에 방심하던 사이 시린 바람이 갑작스레 옷깃을 파고들었던 지난 주말, 원주에 있는 뮤지엄 산(museum SAN)을 방문했더랬어요. 원래 안도다다오를 좋아하기도 하고, 일행 중 한명이 이전에 다녀왔다가 반해 버린 바람에 꼭 같이 가고 싶다고 하여 주말 아침부터 출발하여 다 같이 신나게 다녀왔더랬죠. 하늘만 보고 가을을 느꼈던 서울에서의 날들이 무색하리 만치 온갖 가을이 다 모여 있던 뮤지엄 산의 풍경에 칼바람에도 꿋꿋이 바깥을 지켰더랬어요. 운명처럼 이렇게, 프레임 속에 낙엽이 뛰어들기도 했고요. 히. 긴 말 말고, 칼바람을 맞으면서도 '아- 가을이다-' 느껴졌던, 정말 온갖 가을이 다 모여있던 뮤지엄 산의 풍경... 한번 같이 보실래요? 주차장 마저 너무 예뻤지만 주차장 풍경을 미처 찍지 못 해 너무 아쉽네요 ㅜ.ㅜ 정말이지 빨강, 노랑, 초록, 주황, 모든 가을의 빛깔이 공존하는 느낌이었달까. 사실 뮤지엄산이 일반인들(?)에게 그리 유명한 곳은 아니었어요. 우선 대중교통을 이용해서는 갈 수 없는 곳인지라 근처 골프장을 찾는 어르신들이나 찾는 곳이었는데, 인스타그램에서 이 물과 함께 하는 카페의 뷰가 유명해 진 이후로 북적대게 된거죠. 제 사진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실은 정말 엄청 많았단 말이죠, 사람들이. 사실 뮤지엄 티켓도 그렇게 저렴한 가격이 아님에도 주차장이 가득 차서 주차장에 차를 대지도 못했더랬어요. 뮤지엄에 이렇게 사람 많은거 처음 봤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이 모든 가을 속에 폭 파묻혀 있으니 정말 갈만한 곳 아니겠습니까. 건축 뿐만 아니라 물소리, 바람소리, 우수수 나뭇잎이 바람에 부대끼는 소리, 걸음 걸음 떨어지던 낙엽들, 뮤지엄 정원에서 들려오던 노랫소리 모든 것이 아름답던 곳. 반사되는 물빛마저 너무 아름답지 않나요 ㅠㅠ 그저 두기만 해도 아름다운 곳이니 당연히 어디다 카메라를 들이대도 포토 스팟이죠. 사진에 사람이 들어가면 전혀 다른 느낌을 받게 되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인생샷들이 탄생하기도 한답니다 *_* 트랜치 코트 입고 바들바들 떨었지만 넘나 맘에 드는 사진을 건졌고요... 억새도 여기저기 심어져 있어서 가을가을한 샷들을 마구마구 얻을 수 있답니다 후후 전시도 다 너무 맘에 들었고요. 정말 맘에 들었던 터렐의 전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없지만... 종이 전시들은 촬영이 가능해서 몇장 보여 드릴게요. 그리고... 너무 아름다웠던 해질녘까지 *_* 그리고 원주시내로 나와서 겁나 맛있는 고기를 먹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_* 아름다운 하루였어... 지금, 가을의 끝물에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해요. 평일에 시간이 되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찾기 좋은 곳이겠지만 주말이어도, 사람이 많다 해도 정말 가볼 만한 곳이에요. 시간이 된다면 한번 방문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가을을 배웅하러!
일본 산에 중국시인 '도연명 미술관'이 왜?
중국 시인 도연명의 무릉도원을 모티브로 한 시가현의 '미호 미술관(MIHO MUSEUM) 전경. 작은 사진은 미술관 설계자 중국계 건축가 이오밍 페이. 일본 최대 호수 비와코 남쪽에 ‘코난 알프스’(湖南アルプス) 이 산 기슭에 ‘미호 뮤지엄’(MIHO MUSEUM) 자리 잡아 도연명 ‘무릉도원’ 모티브...미술관 설계 중국계 건축가 별세 교토 인근 시가현(滋賀県)에는 일본 최대의 호수인 비와코(琵琶湖, 비파호)가 있다. 비와코 호수 남쪽 지방에는 여러 산들이 미니 알프스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를 ‘코난 알프스’(湖南アルプス)라고 부른다. 이 코난 알프스의 산중에 한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일본 최고의 자연 친화적 미술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미호 뮤지엄’(MIHO MUSEUM)이다. 이 미술관은 5월 17일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미호미술관(MIHO MUSEUM)을 설계한 건축가 I.M. 페이씨가 5월 16일 102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삼가 애도의 뜻을 바칩니다.> I.M. 페이(I.M. Pei)는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이오 밍 페이(Ieoh Ming Pei, 貝聿銘)를 말한다. 건축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루브르 박물관의 피라미드(Louvre Pyramid)’는 알 것이다. 그걸 설계한 이가 이오밍 페이다. 중국 광저우 태생(1917년)인 페이는 1935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마지막 모더니즘 건축가’로 불리며 1983년엔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받았다. 터널과 다리를 지나면 신사모양의 박물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photo=교토트래블닷컴(kyototravels.com) 그런 이오밍 페이는 일본에서는 미호 미술관의 설계자로 유명하다. 이 미술관은 주변을 둘러싼 자연 경관을 살리기 위해 건축 용적의 80%를 지하에 매설했다. 페이는 여기에 기하학적 무늬가 만들어내는 유리 지붕을 설치, 밝은 자연광이 쏟아지도록 했다. 그는 생전에 “내 작품의 열쇠는 빛(光)”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미호 미술관의 또 다른 특징은 컨셉트에 있다. 다름아닌 무릉도원(桃源郷). 시가현 박물관협회에 따르면, 중국 동진(東晋)의 시인 도연명의 시집 ‘도화원기’(桃花源記)를 모티브로 했다. 미술관으로 향하는 터널과 다리에 무릉도원의 이미지를 담았다고 한다. 이 미술관이 개관한 건 1997년 11월. 특이한 건 미술관을 만든 주체가 신주슈메이카이(神慈秀明会, 신자수명회)라는 종교단체라는 것. 이 단체를 이끌던 코야마 미호코(小山美秀子)라는 사람이 수집한 전 세계 국가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코야마 미호코는 1987년 건축가 페이와 만나 미술관 구상에 착수(1991년), 1997년에 결실(개관)을 맺었다고 한다. 2017년 루이비통이 ‘크루즈 패션쇼’를 여기서 개최하면서 미호 미술관은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5월 17일, 중국 언론을 인용 “페이가 맨해튼에 있는 그의 집에서 사망했다”며 “그의 죽음은 아들인 건축가 리 청 페이(Li Chung Pei)에 의해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이재우 기자, 재팬올 발행인>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390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전시: 부산현대미술관
1.나와마주하기 2.자연생명인간 3.상상의공식 시간이 꽤 지났지만 아직 두 개의 전시는 진행중이라 기록해본다. 하단동에 위치한 공공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내가 방문했을 땐 총 3개의 무료 전시 중이었다. 1. 자연, 생명, 인간 2. 마음현상 : 나와 마주하기 3. 소장품 기획전Ⅰ상상의 공식 도슨트 시간에 맞춰갔다. 도슨트: 화-금 3시(1회) / 토,일 11시,3시(2회) 1층의 어둑한 전시공간. 지하 전시공간에 있는 이 하얗고 거대한 풍선은 관람객이 직접 참여하면서 느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시간타임에 따라 선착순으로만 참여가 가능해서 미리 명단을 올려두고 다른 작품들을 보다가 시간 맞춰가서 참여했다. 온통 새하얀 천으로 둘러쌓여 있는 공간 처음엔 공간의 나눔이 없어 어지럽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살면서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마치 우주에 있는 것 같기도. 저마다 남겨놓은 이별의 순간들. 마음의 자화상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마음의 모습을 사진으로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무분별하고 이기적인 인간에 의해 고통받고 사라져가는 것들.. 늘 생각하는거지만 지구의 주인이 인간이라는 착각이 가장 큰 문제다. 개인적으로 도슨트가 너무 아쉬웠지만 작품수도 많고 그림, 사진, 미디어아트, 설치미술 등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어서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너무 심오하다거나 어렵지 않아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었던 현대미술전시.
열대야 속 맥주한잔, 후쿠오카#2
등을 타고 흐르는건 땀인지, 빗방울인지 다시 호텔로 돌아와 짐을 풀고 샤워를 먼저 했다. 금요일 출근했던 복장 그대로 공항 노숙에 빗방울에 절여져 있어 찝찝함이 말로 다 이룰수가 없었다. 샤워를 하고 캐리어 속에서 안전하게 보관된 뽀송한 옷으로 갈아입으니 후쿠오카인듯 서울인듯 큰 상관없이 마냥 좋았다. 이 크나큰 만족감에 방점을 찍은 것은 바로 샌들!! 다 젖은 운동화 속에 아무리 퍼내도 물은 가득 차 있고, 발과 따로 놀기 시작한 양말은 내가 양말을 신은건지, 빗물에 족욕을 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운동화를 탈출한 발을 보니 이미 발도 새하얗게 질려있다. 가늘어지는 빗방울을 뒤로 하고 성난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빗방울이 조금씩 가늘어지더니 이내 비가 그쳤다. 쏟아지는 빗방울에 먼지도 함께 씻겨나간듯 길거리와 건물 외벽이 반짝반짝하다. 숨 쉴 때 느껴지는 습하디 습한 느낌만이 아직 비의 여운으로 남아있었다. 호텔에서 후쿠오카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캐널시티로 가기 위해서는 나카스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하나 건너야한다. 다리 한 가운데 놓여있는 기념비인지 단순한 장식물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낙서가 되어있는걸 보니 문화재 같은건 아닌가 보다. 낙서 중에서도 맨위에 사람 표정을 그려놓은듯한 낙서는 마치 낙서 같지가 않고 원래 디자인이 그런듯 자연스럽다. 갈 길 잃은 쇼핑센터 중심 산책 캐널시티에 입성하니 오락시설도 있고 쇼핑센터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어서 이리저리 구경할 것도 많고 쇼핑할 곳도 많다. 하지만 쇼핑에 대해 감흥이 없는 짐승 두마리라 오락실에 들러 잠시 피규어 뽑기만 조금 해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캐널시티 안에서 길을 잃었다. 아니 그냥 어디를 갈지 딱히 길이 없었다. 캐널시티에서 유일하게 할 일은 저녁에 분수쇼를 보는 것만 남았다 다이어트 화제(?)의 커피, 버터 커피 나카스강으로 가는 도중 잠시 들른 편의점에 버터 커피가 있었다. 미국 배우들이 다이어트할 때 먹는다고 들었다. 두 종류의 버터 커피를 들고 나름의 아이쇼핑으로 소모한 체력을 충전하기 위해 샌드위치도 하나 사서 나카스강으로 갔다. 비가 와서 탁한 물빛과 꼬릿꼬릿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도 꿋꿋하게 자리를 잡고 커피를 세팅했다. 한 입 먹어본 버터 커피는 글쎄... 마치 그란데 사이즈에 한샷만 들어가서 좀 연한 아메리카노가 느끼한 맛이었다. 커피 뒷 맛의 쌉싸름함과 깔끔한 입안이 아닌, 마치 참기름 바른 가래떡을 먹은 것처럼 입안이 매끈매끈하다. 내 스타일은 아니다. 다이어트에도 글쎄..
‘유환석 화백의 CEO 명언’/ 마쓰이 타다미쓰
<글, 그림=유환석(한국시사만화가협회장)> 한 달에 1회 꼴로 ‘유환석 화백의 CEO 명언’과 관련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일본 경영자를 고르고, 그들의 어록(명언)을 다시 선택하는 작업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 그러던 와중에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일본 경영자들이 의외로 많은 경영철학과 경영에 대한 말을 남겼다는 거다. 반면, 한국의 창업주들이 남긴 경영철학이나 그들의 말과 글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후대는 그것조차 찾아보려는 노력이 없는 듯하다. 실로, 아쉬운 일이다. 남의 나라 경영자들의 경영철학을 소개하면서 ‘타산지석 지혜’로 삼는 이 작업이 결코 헛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설이 길었다. 오늘은 송정충삼(松井忠三)이라는 경영자를 골랐다. 한자로 봐서는, 소나무 우물가 집안의 충직한 셋째 아들쯤 되지 않을까. 이름은 마쓰이 타다미쓰. 우리가 잘 아는 무인양품(MUJI)을 운영하는 회사 ‘양품계획’의 회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지금까지 소개했던 ᐅ혼다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 本田宗一郎: 1906~1991) ᐅ마쓰시타전기(현재의 파나소닉)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1894~1989) ᐅ도시바 사장 출신 도코 도시오(土光敏夫:1896~1988) ᐅ일본항공(JAL) 회장 출신 하나무라 니하치로(花村仁八郎: 1908~1997)는 모두 고인들이다. 헌데, 이번 회에서는 처음으로 생존해 있는 경영자쪽으로 마음이 갔다. 그런 마쓰이 타다미쓰는 1949년생으로, 우리 나이로는 71세다. 그 역시 많은 어록을 남기고 있는데, 우리가 되새겨 볼 만한 말은 바로 ‘실행의 힘’이다. 마쓰이 타다미쓰는 이렇게 말한다. <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행력이다. 전략이 이류라도 실행력이 일류인 회사는 ‘전략은 일류인데 실행력이 이류인’ 회사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 (企業で一番大事なのは実行力。戦略が二流でも実行力が一流の会社は、戦略が一流でも実行力が二流の会社よりも圧倒的に強い。) 마쓰이 타다미쓰는 전략보다 실행력을 우위에 두고 있다. 전쟁에 나갈 때는 무기와 더불어 전략(戦略)이 필수다. 한자 ‘략’(略)은 간략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다스리다는 뜻도 갖고 있다. 이런 전략도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전쟁뿐 아니라 기업도 마찬가지 일게다. 전략과 실행력 중에서 뭐가 중요하다고 딱 잘라 말하긴 곤란하다. 각자, 각 기업마다 처한 상황과 생각들이 다르기 때문일터. 잘 짜여진 전략이라면 실행하는 게 바람직하다. 하지만 애매한 전략을 실행에 옮겼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다. 말인즉슨, 현명한 경영자라면 판단을 잘 해야 한다는 거다. 그럼에도, 나는 전략보다 실행력을 우위에 둔 마쓰이 타다미쓰의 말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왜냐? 살아오면서 전략만 짜다, 또는 계획만 세우다 꼬꾸라지는 사람들을 수 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실행해 보지 않으면 성공도 없고 실패도 없다. 실패는 실행해 본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에너지원’이다. 그런 실패는 과연 ‘쓸모없는 경험’일까, 아니다. 마쓰이 타다미쓰의 또 다른 어록을 ‘덤’으로 소개하자면 이렇다. <인간 만사 새옹지마. 향후 어떻게 될까 따위 아무도 모르지만, 단 하나, 말할 수 있다면 인생에 쓸모없는 경험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人間万事塞翁が馬。将来どうなるかなんて誰にもわからないが、たったひとつ、言えることがあるとすれば、人生に無駄な経験などひとつもないということだ。) 정리하자면, 실행=쓸데 있는 경험. 실행력>전략. 일단 한번 해보자.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393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열대야 속 맥주한잔, 후쿠오카#3
톡쏘는 하이볼 한 잔 캐널시티의 분수쇼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마침 맥주 한 잔도 생각나는겸 시원한 곳에서 쉬고 싶은 마음에 캐널시티에서 돈키호테가는 방향에 가득 들어선 식당중 아무데나 하나를 잡아 들어갔다. 공손히 건네받은 메뉴판을 펼쳤을 때 바로 보이는 메뉴가 하이볼이었다. 산토리와 짐빔 하이볼 두 종류였는데 짐빔 하이볼은 먹어본적이 없어서 짐빔 하이볼로 선택했다. 한모금 마신 짐빔 하이볼은 먹어봤던 산토리 하이볼보다는 강한 맛이었다. 부드러운 탄산의 톡 쏘는 성질머리에 은은하게 풍겨오는 산토리 위스키 향이 흘러들어오는 산토리 하이볼과는 다르게 짐빔 하이볼은 짐빔 위스키향이 강하게 물결치고 있었다. 강한 향 덕분인지 탄산의 톡 쏘는 목넘김도 한 성질 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산토리 하이볼이 더 마음에 들었다. 달밤의 캐널시티 캐널시티 내부에는 지역 축제가 있는지 화려했다. 무사들이나 일본성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보니 꽤나 큰 축제인가보다. 조형물 뒤로 건물의 불이 꺼지면서 높게 솟아오른 화려한 분수 한 발과 함께 분수쇼가 시작했다. 건물의 벽면 전체가 스크린처럼 되었다. 고질라와 같은 괴물이 도시를 침범하는 스토리의 분수쇼로 일정을 잘 맞추면 원피스 스토리의 분수쇼도 한다고 한다. 형형색색의 조명아래 높고 낮게, 가늘고 넓게 펼쳐지는 분수의 물줄기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냉정한 현실의 분수쇼 분수쇼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스마트폰 앱을 통해 스크린에 나오는 괴물을 공격해볼 수도 있다. 단순히 분수쇼를 바라만 보며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직접 참여할 수도 있게 해두었다. 한 5분간 지속된 공격에도 지치지 않는 어린아이들과 꿋꿋하게 버티는 괴물의 공방전이 이어졌다. 공격 성공의 게이지가 시원하게 올라가지 못하고 찔끔찔끔 내려오더니 결국 졌다. 보통 이런건 나중에 이겨서 정의구현(?) 하는 줄 알았더니 현실은 냉정하다.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 도호(東寶)
1930년대는 일본영화의 과도기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시기이기도 하지만 일본은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의 경계에서 점차 국가에 순응하는 형식을 취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1930년대는 일제 식민지 영화에 대한 지배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진 시기이기도 하다. 그 시기 영화는 대중예술의 총아로서 상품처럼 국경을 넘어 소비되고 만들어졌다. 역설적이게도 일본이 식민지 정책을 펼쳐나가면서 조선, 대만, 만주를 지배함에 있어 일체(一體)를 지향했던 까닭에 일본 본토의 영화사들과 식민지 지배하의 영화사들간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본래 영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창작이라기보다는 자본과 기술에 영향을 받는다. 하여 일본은 이들 3곳의 식민지에 영화산업의 기초를 닦아주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전쟁 이후 영화산업을 이어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왜냐하면 일본영화산업과 식민지 토착영화자본의 형성은 필연적이었고 국책영화들을 통해 근대 대중문화의 형성은 물론 보다 더 효율적인 문화적 지배도 가능할 것이라고 일본 스스로가 믿었기 때문이다. ‘만주사변’(1931)이후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벌이고 도쿄·나치독일연맹조약(1936)에 서약을 하면서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의 경계에서 극단적 민족주의가 지식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면서 기존 친마르크스주의 예술가와 작가, 예술가들이 연행되고 검열이 강화되던 시기였다. 그중 가장 대표적 인물인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 1903~1933)는 일본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대표 작가이다. 그는 암살되었고 그의 대표 서적인 ‘게공선’(1929)의 경우에는 대표적인 일본의 노동문학으로서 ‘게잡이 공선’의 잔혹한 노동과 학대에 대하여 폭로하는데, 두 번째 파업으로 비로소 어부들은 ‘동물’에서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주의적 작품이다. 이 작품은 훗날 감독 겸 배우인 야마무라 소(山村聰)에 의해서 우여곡절 끝에 각색되어 ‘해공선’(1953)으로 다시 2009년에 ‘게어선(Kanikosen, 蟹工船)’으로 사부(SaBu)감독에 의해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절 일본영화는 민족주의 정치를 위해 헌신하는 영화인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때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영화사가 바로 ‘도호(東寶)’다. 1932년 8월 12일 주식회사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으로 시작한 도호의 역사는 처음에는 영화와 연극배급회사로 출발했는데 제3의 대형 영화사이면서, 현재는 한큐한신홀딩스(한큐 전철, 한신 전기철도), H2O 리테일링과 함께 한큐한신도호그룹의 핵심 기업으로 우리에게는 ‘도라에몽 시리즈’나 ‘짱구는 못말려’시리즈 등으로 친숙하다. 도에이, 쇼치쿠와 함께 일본 3대 영화 배급사 중 하나로 아직도 활발하며 도쿄도 치요다구 유라쿠쵸에 본사가 위치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공공질서와 미풍양속을 해치는 소재를 다루지 않고 보수주의로 유명한 이 회사는 1930년에 설립한 토키연구소인 PCL(사진 화학 연구소, Photo ChemicalLaboratory, 통칭 : PCL, 후에 소니 PCL이 됨)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여기 출신이 바로 세계적인 명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와 그의 평생 지기이자 ‘고질라’ 시리즈로 유명한 혼다 이시로(本多猪四郎)이다. PCL은 일본 최초로 프로듀서 시스템을 채택해 가족적, 봉건적, 인맥 위주의 영화제작을 일체 거부하고 자유롭고 현대적인 경영방침을 정했다. 때문에 암울한 시대가 시작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미술이론가 다키구치 슈조(瀧口修造, 1903-1979)부터 훗날 SONY를 일으킨 이부카 마사루(いぶかまさる) 등 다양한 부류들이 모여들었는데, 좌익이나 전위예술운동에 관한 청년들의 치외법권적 대피소의 양상까지 보인다. PCL은 에노모토 겐이치(榎本健一)의 희극에서부터 지다이게키(현대극)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만들어낸다. 도호는 사내에 영화기획, 제작을 담당하는 부서를 뒀다. 사원 프로듀서는 기본적으로 유명한 원작을 대상으로 기획을 했으며 원작에 대한 정보는 베스트셀러가 되기 전부터 각 출판사와의 네트워크를 통해 정기적으로 정보제공을 받는다. 이렇게 작성된 기획안은 사내에서의 기획 회의를 거쳐 승인을 받게 되고 기획개발에 들어간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작가를 정하고 섭외하고 진행하는 것 또한 기획을 한 사원 프로듀서가 맡는다. PCL은 전용 배급 영화관이 없이 출발하여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1937년 간사이(關西) 사설 철도의 대주주이자 다카라즈카(寶塚) 가극단의 소녀 가극 경영자인 고바야시 이치조(小林 一三) 의 산하에 있으면서 도호(東寶)로 개명, 흥행의 어려움을 단번에 해소했다. 이후 SONY PCL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지만 그 뿌리는 같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시 군부(軍部)와 적극적으로 유대협력 관계를 맺으면서 사업상 우위에 서게 된다. 게다가 특성상 도피처 역할을 한 까닭에 만주영화협회(약칭 滿映)가 만주국의 수도 신경(新京 : 지금의 長春)에 설립되어 국책영화에 착수하게 될 때 시류적 면에서나 인맥이 모두 도호에 의존하고 있을 정도로 많은 인력을 파견했으며 활발한 공동제작을 했다. 일본에서 활동하기 부자연스러워진 좌익, 우익, 군인 출신들이 기회의 땅이라는 만주로 찾아와 계몽영화와 오락영화를 제작했으며 전후에는 중국 공산당 팔로군(八路軍)이 공산당 최초의 스튜디오로 삼아 중공(중국공산당)영화의 기초를 닦는 계기가 된다. 물론 이들이 귀국하여 ‘도에이(東映)’의 기초를 만들었기 때문에 도호의 역할은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의 경계에서 한 축을 담당한다. 다시 PCL로 돌아가서, 맨 처음 두각을 드러낸 것은 기무라 소토지(木村莊十二)로 훗날 조선 경성촬영소의 이규환 감독과 함께 춘향전을 같이 함으로써 우리 영화사에도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한데, 군국주의가 뒤덮기 전 최후의 경향주의 영화인 ‘강 건너의 청춘(1933)’, ‘남매(1936)’등을 발표하게 된다. 다른 한 사람은 바로 나루세 미키오(なるせみきお)로, 쇼치쿠에서 ‘오즈 야스지로는 한 사람이면 족하다’는 다소 황당한 이유로 해고 당하자 이적하여 기량을 펼쳐 나가게 되는데 걸작 중에 걸작인 ‘아내여, 장미처럼(妻よ薔薇のやうに, Wife! Be Like A Rose!, 1935)’을 연출하여 뉴욕에서 일반에게 최초로 공개된 일본영화의 기록을 남긴다. 또 한 사람인 이시다 다미조(石田民三)는 ‘꽃은 져 버리고(1936)’를 통해 막부 말기 교토의 유흥거리를 무대로 활동하는 게이샤의 관점으로 외부의 정치적 변동을 그려내기도 했다. 그러나 앞서 기술하였듯 도피처 역할을 담당한 만큼 좌익 계열의 영화인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었기 때문에 훗날 노동쟁의로 심각한 인력난을 겪는가 하면 1948년부터는 영화제작을 중단하고 1947년부터 이 회사의 재정지원을 받아온 신도호(新東寶 )영화사에서 만든 영화를 배급하는 수난을 당하기도 한다. 193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조선인 영화제작자본과 일본인 자본과의 연관성에 있어서도 도호는 중요하다. 1935년 조선인 영화업자들이 세운 고려영화협회(高麗映畵協會)와 조선영화주식회사(朝鮮映畵株式會社)는 30년대 후반의 조선영화제작을 이끈 주요한 영화제작회사로 이 중 고려영화협회는 일본의 영화배급회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으며, 이들 회사의 도움으로 제작한 영화를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다.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설립도 일본영화산업과의 연관성을 가지고 살펴보게 되면 중요인물인 이재명(李載明)이 도호의 전신인 PCL에서 근무한 바 있었다. 도호는 조선 영화사와 일본 영화사에 동시에 기록되는 영화사인 셈이다.<이훈구 시나리오 작가>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392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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