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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하는 발레리나 강수진이 얘기하는 "하루 하루"의 의미

노력하는 천재 발레리나 강수진 씨하면 떠오르는 것이 그녀의 발이죠. 박지성 선수의 발, 김연아 선수의 발도 많이 알려졌지만 강수진 씨의 흑백 사진은 정말 충격적이었는데요. 제가 막연히 아는 우아한 발레리나의 모습 뒤에 그런 피나는 노력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었거든요. Ttimes에 이번에 30년 경력을 뒤로 하고 은퇴하는 강수진 씨에 대한 기사가 실렸어요. 그녀가 얘기하는 하찮은, 평범한 "하루 하루"의 의미에 대한 내용입니다. 요즘 자극이 필요한 저에게 쿡쿡 찔림이 되는군요. 물론 총론적으로는 동의하지만 각론에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어요. 휴식이 없는 30년의 강행군을 누가 견딜수 있겠어요. 강수진이니까 가능했던 부분도 분명 있어요. 일반화시킬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고 봅니다. 다만 그녀가 말하는 "하루 하루"의 의미에만 집중해 보도록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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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나의 하루는 지금..? - White 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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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말자 오늘이 마지막 인것처럼 열심히 살자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건 없다. 진리를 보여 주네요.
그야말로 진정한 백조로군요..
보기만해도 숨막히는 당신의 노력과 열정을 존경합니다 당신과 같은나라 국민인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hun4237 ...허울 좋은 모습들 멘붕이라고 얘기하시기 전에 문장을 제대로 만들고 얘기하시는게 좋을 것 같네요...해석하는데 몇초 더 걸렸습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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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되는 사람한테는 이유가 있는거같은 소녀시대 윤아의 노력
중국에서 드라마를 찍게 된 윤아 사실 중국에서 활동을 해도 중국 드라마는 입모양만 따라하면 성우의 더빙을 입히는 방법으로 촬영을 하고 중국행사나 촬영장에서 의사소통을 할때에는 통역관을 붙여주기 때문에 중국어를 크게 잘하지 않아도 돼 중국에 처음 갔을 때 윤아는 중국어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어 같이 촬영했던 중국 배우가 말하는 처음 중국에 갔을때 윤아의 중국어 실력 대화를 이해하지 못해서 운적도 있다고 함ㅜㅜㅜ 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정말 이악물고 공부했다고 해 방송 카메라에 잡힌 콘서트 대기실에서 혼자 중국어 공부하고 있는 윤아 중국 역사도 같이 공부 한번 책상을 공개한 적이 있는데 중국어 문제집들이 쌓여있기도 했어 그 노력때문인지 현지 중국 연예인들 피셜 통역이 필요없는 수준으로 실력 상승 중국 지방사투리도 알아듣고 통역관 없이도 예능하는데 문제× 중국 유머나 사투리같은거 다 이해하고 문제없이 대화함 현지 언론들도 놀라는 윤아의 중국어 실력 통역없이 중국어로 수상소감한 윤아에게 따봉 날리는 중국 시상식 MC 쎄씨 차이나에서 인터뷰한 한국 연예인 중 처음으로 중국어로 동시에 인터뷰하며 답하는 연예인이었다고 함 심지어 한국어를 못하는 중국인에게 중국어로 통역까지 해줬다고 함 그리고 한한령으로 중국활동이 이전보다 뜸해지면서 팬들은 윤아의 중국어에 대해 별생각없이 살고있었는데 올해초 합격하기 어렵다는 중국어 말하기 시험 통과한걸 깜짝 발표함 팬들도 윤아가 그 바쁜 와중에 언제 준비했는지 의문ㅋㅋㅋㅋㅋ 윤아 합격 소식에 본인들이 뽕찬 중국인들 윤아 합격 소식을 웨이보 실검 2위에 올려놓고 하루동안 윤아 웨이보를 백만명 이상이 새로 팔로우 함ㅋㅋㅋㅋㅋ 사실에 한번에 합격한건 아니야 첫시험에서 1점 차이로 떨어졌다는데 나와는 다른 마인드.. 이제는 현지식당에서 음식 주문도 척척 처음 시작할때는 중국어가 안들린다고 울었다는데 이제는 현지인들이랑 아무 문제없이 대화하고 농담, 사투리 다 알아듣는거 존멋 잘되는 사람한텐 이유가 있다는걸 윤아를 보면서 느껴.. 본받을만한사람이야 이렇게 노력한 윤아한테 팬들이 치이는 포인트 중 하나 팬싸에서 한국팬이랑은 한국말로 대화하고 중국팬이랑은 중국말로 대화하고 일본팬이랑은 일본말로 대화함ㅋㅋㅋㅋ 본새오져 (중국어로 대답해주고 있는거임) 이렇게 끝내기 아쉬우니까 중국예능에서 멋있고 다정한 윤아짤 음식 주문하는 윤아 https://www.youtube.com/watch?v=RfCmzfDTWdc&feature=youtu.be&app=desktop 3분 30초~ 이제 영어도 공부하고 싶다고 함 윤아라면 진짜 해낼거같음ㅋㅋㅋㅋㅋ 출처 단점이 없는 윤아에 이어.. 못하는게 없네ㅋㅋ 이쁜데다 노력까지 ㅋㅋ 멋지다
인도보다 심하다는 영국 계급 사회 ㄷㄷ
많은 영국인 출신 배우들이 영국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헐리우드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음 그 대표적인 이유로 제임스 맥어보이 영국국적이지만 할리우드에서 입지를 쌓은 배우 맥어보이가 영국에서 연기하며 귀족 연기를 했을때 엄청나게 지탄을 받음 영국의 사회 계급은 대충 세가지로 나뉘는데  맥어보이는 영국에서 워킹 클래쓰, 즉 노동자 계층에 속함 따라서 말투나 사용하는 억양에서 위의 두 계급과 큰 격차가 있고 어렸을 때서부터 소위 말하는 연예인 교육을 받지 못했고 학력도 낮음 그래서 영국에서 연예계 진입은 극소수의 사례를 제외하고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할리우드로 건너간 케이스 (이 둘 말고도 더 있지만 성공한 사례가 많이 없음..) 잘 생각해보면 유명한 영국 배우 중에 왜 귀족, 엄청난 금수저 출신이 유독 많은건지 의심해 볼 수 있음 +제임스가 로미오 역할 맡았을 때 한 평론가의 평 "제임스 맥어보이의 로미오는 무식하다.  문제는 스코틀랜드 억양이다" 또한 신사의 대명사 콜린퍼스 또한 미들클래스(중산층)으로  킹스 스피치에서 조지6세 왕 역할을 했을때 엄청난 지탄을 받음 마찬가지로 국민아빠 리암니슨 또한 워킹클래스로 영국에서 교사와 복서 생활 및 연기활동을 하면서 빛을 못보다가 헐리우드 진출 후 쉰들러리스트로 이름을 알렸음  반대로 영국 출신 귀족연기자로는  베데딕트 컴버배치가 대표적이라고.. 어퍼클래스로 태생부터 귀족 집안 출신 영국의 명문학교 해로우 스쿨 출신으로 영국의 대표 고급 자동차 브랜드 재규어의 모델도 함 2015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훈장 3등급에 해당하는 CBE 작위를 받기도 함 연기도 혈통이 있어야 인정받을 수 있는 나라 ㄷㄷㄷ 이종격투기카페 펌
미국의 망가진 사법 시스템을 대표하는 인물
여기 칼리프 브라우더라는 한 흑인 학생이 있어 그리고 일주일 전 흑인 2명에게 책가방을 빼앗겼다는 멕시코 노동자의 911 신고가 들어왔었어 당시 16살이던 칼리프는 친구와 함께 파티에 놀러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 책가방 절도범으로 지목 돼 구치소로 끌려가게 됐어 7시 47분에 시작해 7시 50분에 끝난 취조 칼리프는 자기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이 3분으로 인해 칼리프의 인생은 망가져 버렸어 미국 뉴욕에서는 16살 부턴 죄를 저지렀을 경우 성인과 똑같은 형량을 받게 되거든 그래서 고작 책가방 절도혐의로 2급 강도혐의 중범죄 형에 처한거야 보석금 3000달러(한화 약 350만원)을 내면 불구속 수사가 진행 될 수 있었지만 미국에서도 가장 빈곤한 동네로 꼽히는 브롱크스에서 평생을 살던 칼리프의 가족은 그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어 칼리프의 어머니는 보석보증금인 900달러(100만원)를 마련하기 위해 온동네를 돌아다니며 이웃들에게 돈을 빌렸고 그게 꼬박 2주가 걸렸어 그 사이 칼리프의 보석은 보류 되었고 칼리프는 교도소에 구속된 상태로 수사를 받아야 했어 그래서 칼리프는 악명 높은 라이커스 교도소에 수감됐어 (이 섬 전체가 교도소야) 168cm의 작은 체구인 16살 소년을 교도소로 내몰았을 때의 결과는? 뻔하지 칼리프는 교도소 내의 갱들의 표적이 됐어 의자에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집단 폭행을 당했고 복도에서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집단 폭행을 당했어 교도소내 전화로 가족들에게 전화라도 할라치면 칼리프의 얼굴에 침을 뱉었어 그렇게 칼리프는 집단 폭행으로 인해 끊임없이 교도소 이감을 했어 하부에서 상부로 상부에서 중심으로 계속해서 동을 바꿔가며 이감했고 이감이 될때마다 새로운 동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어 교도관들은 도대체 뭘 했냐고? 그들도 똑같이 칼리프를 폭행했어 그리고 칼리프가 집단 폭행을 당하고 있을 때 방관했어 그게 "교정 제도" 라면서 말야 하지만 칼리프는 계속해서 자신의 인권탄압에 대한 부당함을 주장했고 끊임 없이 무죄를 주장했었어 그렇게 칼리프는 명령 불복종의 이유로 독방에 수감 됐어 UN에서 독방 수감 15일 이상은 고문이라고 명시했음에도 16살이던 칼리프가 처음 독방에 들어갔을 때 그는 저 독방에서 연속 300일 수감이란 벌을 받았어 이쯤 되면 재판은 왜 안해? 라고 생각할거야 놀랍게도 칼리프는 정식재판 판결 조차 없이 교도소에 3년 간 수감 됐었어 칼리프가 독방에서 벗어나 재판을 받으러 갈때마다 검사측의 증거가 준비 되지 않았다 검사가 휴가를 갔다 증인이 오지 않았다 증거를 보강하겠다 등등등의 이유로 무려 31 차례나 재판이 연기 되었고 한 두명도 아닌 9명의 판사를 만났으나 칼리프는 재판조차 받을 수 없었어 그냥 재판이 연기 되었으니 3개월 뒤 다시 오시오 라는 판사의 말만 되풀이 해서 들었을 뿐이야 (이 사진은 칼리프 사건은 6개월 간 맡았던 판사) 그리고 당시 검사가 칼리프에게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 있어 바로 책가방을 도난 당했다고 신고한 멕시코 노동자의 거처였어 그는 강도를 겪은 후 두려움으로 일상생활을 하기 힘들어했고 강도 사건 몇달 후 멕시코로 다시 돌아갔어 결국 피해자이자 목격자인 유일한 증인은 미국에 있지도 않았는데 칼리프는 계속 교도소에 수감된거야 그렇게 칼리프는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교도소를 떠날 때 마다 심장이 부서진 채 다시 독방으로 돌아왔어 그리고 몸과 정신이 망가진 칼리프에게 검사는 계속해서 유죄협상을 들이밀었어 그 협상의 내용은 "너 2급 강도 중범죄라 10년형인데 지금 니 죄를 인정하면 5년형으로 줄여줄게" 였어 사실 많은 빈민가 흑인들은 여기서 없던 죄를 인정하고 이 협상을 받아들이게 돼 재판이 언제 열리지도 모르거니와 재판이 열릴 때까지 구속되어 있는 기간은 형 집행으로 쳐 주지 않거든 예를 들어 보석금을 낼 돈이 없어서 2년 동안 구속되어 있다가 어찌저찌 정식 재판을 받고 3개월형이 나왔어 그럼 그 사람은 3개월을 교도소에서 형을 받아야 하는 거야 이게 뉴욕의 사법 시스템이야 그들의 죄목은 다름 아닌 가난 이거든. 하지만 칼리프는 이 협상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어 그리고 그 이유는 개인적인 이유 라고 말을 해 그리고 이 사진이 바로 그 이유야 칼리프는 어린시절 자신의 형인 아킴이 갑자기 경찰들에 의해 내던져 진 후 강간혐의로 경찰서에 끌려가게 된 걸 직접 목격을 했어 당시 15살이던 아킴은 칼리프와 똑같이 재판을 기다리다 16살이 되었고 성인과 똑같은 벌을 받게 된 거지 아킴을 아는 사람들 심지어 같은 학교를 다니는 백인 여학생들 까지도 아킴을 절대 그런 아이가 아니라고 걔는 여성을 그렇게 생각하며 다루지 않는다고 뉴스 인터뷰까지 했으나 아킴은 [브롱크스의 강간범]이 되었어 그렇게 아킴은 자신이 한 적도 없는 죄를 인정하고 유죄협상을 했고 그렇게 형 집행 후 석방 됐어 칼리프는 자신의 형을 봤었기에 절대 유죄협상을 할 수 없었던 거야 결국 칼리프는 1110일 동안 교도소에 수감 되었고 그 중 800일이 넘는 시간을 홀로 독방에서 보냈어 그 과정에서 칼리프는 총 6차례의 자살시도를 했어 칼리프가 자신이 무얼 하는건지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던 첫번째 자살시도에 대해 얘기해볼게 지속된 독방 수감으로 환청에 시달리던 칼리프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고 교도관에게 내 머리에 문제가 생겼다고 상담사와 만나봐야 한다고 했으나 그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칼리프는 어느순간 이 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침대 시트를 찢어 목을 매달려 했어 그리고 그 과정을 하츠라는 교도관이 지켜 보고 있었고 칼리프가 목을 매달기 전 망설이고 있자 "얼른 해! 뭘 망설이는 건데? 얼른 뛰어!" 라며 자살을 부추겼어 칼리프가 그 말을 듣고 목을 매달자 동료 교도관에게 "그냥 둬 조금이라도 더 고통을 느끼게" 라며 칼리프가 질식해 가는 과정을 지켜봤어 그리고 그들은 칼리프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 칼리프를 끌어내 침대에 집어 던지고 폭행을 하기 시작했어 독방의 문은 열려 있었고 복도에는 감시 카메라가 있다는 걸 알고 있던 칼리프는 본인이 구타 당하는 모습을 남기기 위해 복도로 뛰쳐나가 교도관들에게 계속 폭행을 당했어 그런 칼리프에게 돌아온건 뭐였을까? 정신과상담? 약물 치료? 아니 탈옥이라는 죄가 추가되면서 독방 수감 400여 일이 추가됐어 그럼 상부에 칼리프의 자살시도는 어떻게 보고 됐을까? [독방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의적인 꾀병] 으로 보고가 됐어. 교도관들은 인권 운운하며 말이 많은 칼리프를 싫어했고 칼리프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교도소 내의 폭행을 묵인하기도 하고 직접 폭행을 가하기도 하고 밥도 주지 않고 몇주 간 샤워도 하지 못하게 하며 칼리프의 정신을 완전히 망가트렸어 칼리프는 이 박스로 불리는 독방에서 굶주림과 추위 더위에 시달렸고 그 과정에서 몸무게는 10키로 이상이 빠지게 됐어 가족들이 면회를 갈때마다 작고 말라갔다고 해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기소가 기각 됐으니 석방 이라고 칼리프를 풀어줬어 칼리프는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부당함을 알리고 사법체계를 바로잡기위해 변호사들을 찾았고 뉴욕시와 사법기관, 교정기관을 상대로 법정 싸움을 시작했어 하지만 칼리프는 교도소를 나와서도 정식 재판도 받아보지 못한 채 모욕적인 시간을 보내야 했어 사전 청취를 한다며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칼리프의 유치원 시절 이야기를 언급하고, 칼리프가 입양 된 것을 캐묻는가 하며 그것도 모자라 극단적으로 피폐해져가는 칼리프의 약점을 노리고 공격했어 그러던 중 라이커스 교도소 내부 감시카메라 영상이 공개 되면서 칼리프의 학대가 증명 되었고 칼리프의 증언에 더욱 더 힘이 실리게 됐어 세상은 칼리프의 얘기로 떠들썩 했고 여러 매체에 출연해 본인이 겪을 일들을 알렸어 하지만 칼리프는 인터뷰 도중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기도 하고 떠오르는 기억들에 괴로워 하기도 했어 전문가들은 16살은 뇌가 다 자란 상태가 아니며, 800여일의 독방 수감은 칼리프의 전두엽을 손상 시키고 세포체계 자체를 뒤바꾸는 일 이였을 것 이라고 말을 했어 실제로 칼리프는 집으로 돌아온 뒤 수 차례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으며 거듭 자살시도를 했었어 그렇지만 칼리프는 열심히 공부를 해서 고졸 학력 인증서를 받고 커뮤니티 대학에 입학했어 2014년 11월에는 유죄협상을 하지 않고 라이커스 라는 지옥을 견뎌낸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인터뷰도 했었어 말 그대로 칼리프는 다시 정상적인 삶을 되찾기 위해 정말 부단히 노력을 했고 이 과정에서는 유명 래퍼 제이지가 많은 도움을 주었어 하지만 석방 2년 후인 2015년 6월 지속적인 피해망상과 환시 환청에 시달리던 칼리프는 티비가(경찰이)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말을 하며 갑자기 티비를 부수었는데 그 날 밤 자신의 집에서 목을 매달아 삶을 마감하게 돼 그리고 칼리프의 삶을 망가트린 담당검사는 이름 조차 밝혀지지 않았으며 담당 경찰 검찰 판사 교도관 그 누구도 처벌 받지 않았어 슬프게도 칼리프의 죽음을 계기로 소년범 독방 수감, 재판 지연과 신속 재판법 라이커스 교도소의 처우 개선 등에 관한 논쟁에 중요한 부분이 되었어 그리고 칼리프의 어머니 베니다는 인권 운동가가 되어 칼리프 법안을 통과시켰고 뉴욕시 형사사법제도 개혁을 이끌어냈어 베니다는 이 날 “나처럼 고통 속에 종신형을 살아야 하는 엄마가 나오기를 원치 않는다." 는 말을 남겼고 칼리프의 죽음 1년 남짓한 시간이 지난 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돼 이 사건은 미국의 사법시스템이 얼마나 엉망인지를 보여준 비극적인 사건이야 또한 구조적인 인종차별을 여과없이 보여준 사건이기도 해 멋진 야경과 자유의 여신상 뒤에 가려진 라이커스 섬은 리처드 라이커가 소유한 섬이였어 섬 이름 자체도 라이커에서 따온 이름이지 리처드 라이커는 뉴욕시의 사법체계를 책임지는 치안판사였고 동시에 흑인노예 납치 클럽 회원이였어 노예 사냥꾼들은 탈출한 흑인 노예들을 잡아들여 리차드 앞으로 데려왔고 자유 흑인 아이들 마저도 납치해 노예로 삼았어 라이커 섬은 그렇게 이용되다가 뉴욕시에 매각 됐어 그리고 뉴욕시는 리차드 라이커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1932년 라이커스 교도소를 설립했어 뉴욕시 내 흑인 인구는 24%에 그치지만 죄수의 비율은 95%에 달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야 이건 100년 200년 전의 먼 이야기가 아니야 아직도 흑인 아이들은 납치되어 라이커 섬에 끌려가고 있어 라이커스 교도소 내의 재소자 중 85%는 칼리프 처럼 보석금을 낼 돈이 없어 구속 상태로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야 그리고 제이지가 이를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6부작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어 출처 충격...
오징어게임 '영희'의 원래 이름은 '영이'다!
우리는 오징어게임에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 등장한 거대한 인형 캐릭터의 이름을 영희라고 알고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하던 같은 이름의 놀이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당시 교과서의 영희 일러스트를 참고하여 인형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원래 이 캐릭터의 이름은 영희가 아니다.  모두들 ‘철수와 영희’의 영희라고 알고 있는데 실제 그 여학생 캐릭터 이름은 ‘영이’ 다. ‘철수와 영이’라는 캐릭터는 일제 강점기 시절이 끝나고 대한민국이 탄생하자 마자 ‘한글학회’ 선생님들이 고심 끝에 만들어낸 우리 나라 남녀 어린이 대표 이름인데, 무심한 후손들이 이걸 어느 순간 스리슬쩍 일본식 명칭인 영희로 잘못 부르고 있는 것이다. 1945년 해방 당시 수년간 일본어만 사용하게 했던 터라 한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성인이나 학생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해방된 새 나라에서 자라날 어린이들에게 우리의 민족 혼을 심어주려던 한글학회 분들은, 우리말 사전 발간과 동시에 한글 교과서 발간 작업에도 박차를 가하게 된다. 당시 최현배 선생이 주도한 교과서 편찬위원회는 기본 방향으로 ‘모든 교과서는 한글로 하며, 한자는 필요한 경우에만 괄호 속에 넣으며 가로쓰기를 원칙으로 한다’ 고 정한다. 이에 1948년 《한글 첫 걸음》 등, 초·중등 교과서 50여 종을 집필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나라 대표 어린이 이름을 고심한 끝에 남자 아이는 ‘철수’, 여자 아이는 ‘영이’, 강아지는 ‘바둑이’를 선택하니, 첫 국민학교 1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 이름을 《바둑이와 철수 [국어 1-1]》로 정하여 반려 동물을 사랑하는 어린이들로 꾸민 것이다.  이후 1970년대까지 대한민국 대표 학생 캐릭터로 국어 교과서에 계속 등장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철수와 영희’로 잘못 알려지고 있으니 잊힌 여학생 ‘영이’가 실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원래 우리 조상님들은 여성 이름 끝자로 순이, 영이, 분이, 동이, 향이, 덕이 등‘이(伊)’를 많이 썼다. 요즘은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집안 족보에 딸 이름 대신 사위의 이름을 기재했고, 역사서에도 본명 대신 아무개의 부인이라거나 어머니로만 기록 되었기에 여성 이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여러 기록에 남은 여성 이름 끝자에 ‘희(姬)’를 넣은 경우는 드물었다. 실제로 현재 우리나라 여성 이름 끝자로 여전히 쓰이는 계집 희(姬)와 아들 자(子)는 일제강점기 때의 산물이다. 제국주의가 막바지로 치달아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둔 일본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강제로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게 하는 창씨개명과 더불어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말, 우리글의 사용까지 금지하는 등,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들었다. 이는 전쟁에 동원할 일본의 청년들이 부족하다 보니 식민지 조선인들까지 전쟁으로 내몰기 위한 사전 준 비 작업이었다.이 당시 조선인들은 딸의 이름을 등록하면서 과거 조상님들이 쓰시던 ‘이(伊)’가 그저 춘향이, 향단이 등 이름 뒤에 붙이던 호칭형 조사라고 착각해서 비슷한 발음을 가진 ‘계집 희(姬)’ 자를 많이 썼다. 원래 희(姬)라는 글자를 그저 ‘계집’이라고 훈독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희(姬)는 중국 주(周)나라 황제 가문의 성씨였고, 그후 ‘지체 높은 아가씨’라는 의미로 황제의 딸을 제희(帝姬), 왕의 딸을 왕희(王姬)라고 쓰다가 한(漢)나라 시절부터 공주(公主)가 ‘황제의 딸’을 의미하는 존칭으로 자리잡게 된다. 한나라로부터 한자를 전래받은 일본은 자기네 토착 존칭어인 ‘히메(ひめ)’에 원래 공주에 대한 존칭어인 ‘희(姬)’를 대응하여 쇼군이나 귀족 딸에게 쓰는 존칭어로 사용하게 된다. 다만 일왕의 딸은 히메라고 하지 않고 ‘내친왕(內親王)’ 또는 ‘여왕(女王)’이라고 불렀다. 그후 19세기 메이지유신 이후 전 일본인들의 호적을 정리하면서 평민들도 당당히 딸 이름에 이 글자를 넣었던 것이고, 서양 동화 ‘Snow White’를 ‘백설희(白雪姬)’로 번역하는 등, 공주(princess)라는 의미로도 확장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방 이후 ‘백설희’를 ‘백설공주’로 다시 바꿨는 데, 당시에는 한자어가 많이 쓰이던 때라 ‘백설(白雪)’이 ‘흰눈’이라는 것을 알았겠지만, 요즘 감각으로는 ‘흰눈 공주’로 번역했어야 하지 않나 싶다. 또한 ‘아들 자(子)’를 넣은 순자, 영자 등이 한동안 유행했는데, 다음번에는 아들을 낳자는 의미로 아들 자(子)를 썼다는 속설이 있지만 실은 딸을 지극히 사랑해서 넣은 것이다. 이 역시 일제강점기 때 시작되었다. 원래 자(子)는 중국에서 위인들에게 붙이던 존칭이었다. 그래서 공구(孔丘)가 본명이지만 공자(孔子)라 존칭으로 부르고, 맹자(孟子), 노자(老子), 장자(莊子) 등 여러 제자백가(諸子百家)사상가들을 우러러 모셨다. 그러던 중 춘추전국시대 송나라 무공(武公)이 딸에게 중자(仲子)라고 이름 지으며 금기를 깨자 중국에서 딸 이름으로 유행했다. 이 풍속이 일본 헤이안시대에 전래되는데, 왕족이거나 유력 귀족 가문이 아닌 다음에야 감히 ‘희(姬)’ 자를 쓰기는 어려웠기에 중견 귀족들이 딸 이름에 ‘자(子)’를 넣은 것이 천년 넘게 이어져왔다. 이 역시 1890년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호적을 정리하면서 평민들도 딸에게 자(子)를 넣기 시작했고, 1930년대에는 무려 여성 이름의 85%가 자(子) 자 돌림이었을 정도로 유행했고 이것이 우리나라에도 전파된 것이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잘못된 명칭 ‘영희’가 널리 알려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제의 탄압을 극복하고 우리나라 대표 어린이 이름을 ‘영이’로 지으셨던 한글학회 분들의 노고를 생각 한다면, 늦었지만 이제라도 국가 차원에서 마땅히 본래 이름을 되찾아주었으면 한다. 출처. <알아두면 쓸데 있는 유쾌한 상식사전> -우리말 우리글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