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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P Journal & 사진작가 양승우 인터뷰

ASAP Journal(이하, A)은 자신의 주변에서부터 사회 저변에 자리한 소외된 이들의 모습까지, 적나라하고 가감없이 담아내 온전히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담아내는 사진작가 ‘양승우(이하, 양)’을 만나 그의 사진과 그의 세계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지난 1996년에 혈혈단신으로 도일 후 외로움과 생활고, 쉽지 않은 거리 생활까지 거쳐온 그의 모습에는 청춘의 푸른 빛에너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힘 있는 눈동자와 거센 기운은 주변을 온 전시장을 채울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투박하고 거친 그의 사진 속에는 예쁘게 포장되거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적인 요소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혹자에게는 불편하고 언짢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양승우의 이미지는 우리가 편하든 편하지 않든 여전히 우리 사회 이면에 존재하는 모습이며, 때때로 우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기에 고개를 내젓는 대신 끄덕이게 됩니다. 돈, 섹스, 유흥으로 드러나는 그의 사진 시리즈 ‘靑春吉日(청춘길일)’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조직 폭력배들의 범죄와 거친 생활만이 아닌, 조직 폭력배 이전의 친구, 사람간의 정과 일상, 추억이 담겨 있습니다.
A) 만나서 반갑습니다. 먼저 간단한 소개 부탁 드립니다.
양) 96년도에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그곳에서 배운 사진이 너무 재미 있고 일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 처음 사진을 찍게된 이후 계속 사진을 찍고 있는 사진 작가 양승우입니다. A) 진행중인 전시<청춘길일>에 대한 간단한 설명 부탁 드리겠습니다.
양) 사진 속 인물들이 다 친구들이거든요. 저를 포함한 그들의 젊었던 시절을 다 좋은 추억이라고 생각하기에 청춘 길일이라는 제목을 지었어요. 이 시리즈는 자살한 친구를 계기로 찍기 시작했는데요. 친구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 친구를 보려고 했는데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거에요. 그 이후부터 아무도 잃고 싶지 않아 주변 사람들을 계속 찍고 기록에 남기게 됐습니다.
A) 이번 전시는 누군가 에게는 노골적으로 보일 수 도 있지만 작가님에게는 익숙한 ‘청춘의 일상’ 쯤으로 생각을 해도 될까요?
양)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A)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청춘은 어떻게 정의 할 수 있나요?
양) 에네르기(에너지)죠. 청춘 하면 친구, 섹스, 일, 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A) 그런 면에서 작가님은 아직도 청춘의 한 가운데에 있으신 것 같은데
양) 아뇨. 끝났어요. 끝난 지 꽤 됐어요.(웃음)
A) 저희가 보기엔 아직도 작품에서 드러나는 힘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도 젊고 에너지가 넘치는데 왜 청춘이 끝났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양) 옛날하고 몸이 틀리거든요. 싸움하면 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웃음) 옛날에는 보면은 내가 지겠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좀 거친 세계의 사람들을 보면 지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나의 청춘은 끝났다고 생각해요.
A) 일본을 비롯한 외국에서는 많은 전시를 진행 하셨지만 국내에서 진행하는 전시는 이번이 처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감회가 새로울 것 같은데 어떠세요?
양) 해외에서 전시를 하면, 작품 설명을 할 때 통역을 써서 말을 하다 보니까 직접적으로 소통하지 못해 불편한 점이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지금은 제가 직접 설명을 하려 하니 말투도 어색하고 일본 말도 섞여서 나오다보니 더 조심스러운데요. 그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더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한국말인데도. 그래서 그런 부분에 있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A) 그간 국내에서 전시를 진행하지 않으셨던 이유가 있으신가요?
양) 하고는 싶었어요. 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아무도 말을 안 붙여오더라고요. 학연도 없고 지연도 없고, 그래서 그렇게 된 것 같은데, 그쪽(일본)에서 그나마 책 4권 5권 정도 나오니까 좀 알아봐 주시는 분도 있고, 찾아봐주시는 분도 있고 하다 보니 연락이 오고, 전시까지 진행하게 됐습니다. A) 현재까지 약 20년 동안 일본에서 활동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군 제대 이후 한국에 사는게 재미가 없어서 일본으로 건너가셨다고 하셨는데, 왜 하필 일본을 가게 되신 건가요?
양) 일단 가깝고 얼굴에 이방인 티가 잘 안 나기 때문에 일본으로 가게 됐습니다. A) 언어 문제를 비롯한 여러 문제로 처음엔 힘든 점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양) 처음에는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죠. 한 번은 자전거보관소에 쭉 세워진 자전거를 막 발로 차고 그랬어요. 경찰 신고를 받고 파출소에 갔는데 순경이 와서 훈계를 하면 권총을 뺏어버릴 정도로 함부로 행동 한 적도 있었는데 그것도 세월이 지나니까 없어지더라고요. A) 도일 직후부터 2006년 도쿄공예대학 미디어아트 박사전기 과정을 수료하기까지 10년 가까이 사진을 공부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특히 도쿄 공예대학은 오랜 전통과 함께 일본 내에서도 사진교육의 주력 학교로 입학 자체도 쉽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입학하게 되었고 어떻게 10년이란 시간 동안 사진을 공부 하시게 됐나요?
양) 처음엔 사진을 하겠다는 마음이 없었어요. 어학교는 비자가 2년밖에 되지 않으니까 비자 문제도 해결할 겸 원서만 내면 입학을 허가해주는 전문학교에 다니게 됐죠. 그게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사진학교였어요. 그런데 수업을 들어보니까 너무 재미있는 거에요. 그래서 더 공부하고 싶어 공예 대학교 시험을 봤는데 운이 좋게도 합격해 대학원까지 마치게 됐습니다. A) 10년이라는 시간이 상당히 긴 시간인데요. 그 시간 동안 학비라든가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굉장히 쉬운 일이 아닌데, 어떻게 계속 학업을 유지할 수 있었나요?
양) 학생 때는 계속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했는데, 의외로 장학금 제도도 있고 상금도 많이 타고 그러다 보니 오히려 지금보다 학생때가 돈이 더 많았던 거 같아요. 그 때야 계속 아르바이트의 연속이었죠. A) 지난 2005년에는 코토부키초의 일용직 노동자와 노숙자 ‘곤타’씨를 비롯한 3-4개의 테마를 작품으로 일본의 포토저널리스트들이 창간한 잡지 ‘데이스 재팬(Days Japan)’에서 주관하는 일본 국내 다큐멘터리 상을 수상하셨는데요. 어떤 계기로 이들을 사진에 담게 되셨나요? 양) 같은 냄새가 나는 거 같아요, 그런 분들을 보면 저랑 비슷한, 뭐라 해야하죠? 느낌이 비슷해요. A) 동질감이라든가 어떤 유대감을 말씀하시는건가요?
양) 네. 나는 항상 그걸 냄새라고 표현해요. A) 이런 작업 과정에서는 실제 노숙도 마다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이에 대한 에피소드와 곤타 씨는 어떠한 사람인지 말씀해 주세요. 양) 에피소드 많았죠. 예를 들어 추운 겨울 날이 되면 곤타가 내 옆에 자고, 모르는 사람도 같이 자곤 했는데 추우니까 막 서로 몸이 딱 붙어서 자잖아요. 그러면 이 같은 것도 막 옮고, 가려워서 힘들기도 하고.. 날씨가 훤하게 밝을 때까지도 둘이 껴안고 자는 일도 있었어요.
그리고 곤타는 지방 출신의 홈리스인데 부모님이 빨리 돌아가셨나봐요. 도쿄에 14살에 올라왔는데 일하던 공장이 도산하는바람에 그때부터 홈리스 생활을 하게 됐죠. 곤타랑은 2-3년 동안은 거의 일주일에 2-3일은 같이 있었어요. 그 친구는 원래 나라에서 운영하는 노숙자 보호 시설에 있었어요. 그 곳에서는 한 달에 한 150만원정도 나오거든요. 그런데 중간에서 소개하는 업자들이 다 떼어먹고 결국 얼마 남지 않게 되요. 그런 문제도 있고, 그 시설은 겨울에도 따뜻하고 좋긴하지만 곤타는 안 들어가겠다고 했어요. 통행금지도 있고 행동에 제한이 있으니까. 자기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하며 밖으로 돌아다니더라고요.
A) 곤타씨를 촬영할 때 어떤 점이 가장 재미있거나 인상깊었나요?
양) 처음엔 옆에서 보고 있는데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뭐 어쨌든 계속 찍긴 찍고 있었어요. 사실 정리해서 책으로 낼 마음까지는 크게 없었죠. 그렇게 계속해서 찍고 있는데, 어느 날은 곤타가 빠찡코 앞에서 자고 있었어요. 밤이 지나고 가게 오픈 시간이 되니 가게 직원들이 나와서 곤타를 쫓아내더라구요. 날씨 환해졌으니까 이제 그만 나가라는 식으로 쫓아내니까 곤타가 일어나면서 짧은 시를 하나 짓더라구요. 뜻이 뭐냐면 ‘자는 것이 좋은데 바보 같은 세상 사람들은 왜 일어나서 일을 하려고 하나?’라는 내용이었어요. 이거 재미있다 싶어서 곤타가 시를 쓸 때마다 달라고 해서 모아놨어요. 이후로 만날 때 마다 계속 시를 써서 주더라고요. 근데 그 내용이 정말 재미있어요. 그래서 내가 찍은 사진하고 곤타의 시를 같이 엮어서 한 콘테스트에 냈는데 대상을 받아서 책을 공짜로 내줬어요. 그게 제 첫 번째 포토북이에요. A) 그럼 곤타씨는 지금도 계속 노숙생활을 하고 있는 건가요?
양) 아뇨, 곤타는 안타깝게도 지금 당뇨병에 걸려서 보호시설 안으로 들어갔어요. A) 그 이후로도 계속 연락은 하고 있나요?
양) 네. 계속 연락 하고 있어요. 전화도 계속 오고.
A) 다큐멘터리 사진은 설정된 모습이 아니기에 현장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기가 정말 힘들다는 점을 알고 있는데요. 작가님은 촬영하기 어려워 보이는 상황에서도 수많은 이미지를 남기셨는데, 특별한 노하우가 있으신가요?
양) 특별한 노하우는 없어요. 오늘 누군가를 찍어야겠다, 예를 들어 곤타를 찍겠다 마음을 먹으면 하루 종일 계속 따라다녀요. 대화를 하든 안 하든. 뭐 물론 대화 하면서 놀 때도 있고…. 자기 볼 일 보고 있으면 옆에서 그냥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어요. 그러면서 사진을 찍어야 할 순간이 보일 때마다 셔터를 눌렀어요. 딱 느낌이 오잖아요? 얼굴 표정이 재밌다거나, 특이한 행동을 한다거나….
A) 2003년부터 2006년까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찍은 우리나라 조직 폭력배, 일본의 야쿠자 집단을 담은 사진집을 보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친구들 덕분에 다소 수월하게 접근 할 수도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어떻게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촬영을 하셨나요?
양) 야쿠자를 처음 찍게 된 신주쿠 가부키초, 그 곳이 예전에는 가지도 말라고 할 정도로 아주 위험한 동네였어요. 그런데 저에겐 그 동네가 굉장히 친숙하게 느껴졌어요. 마치 한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구요. 거리에 담배 버리는 사람도 있고, 깡통 차는 사람도 있고. 너무 편했어요. 그래서 가부키초를 혼자 나름대로 찍기 시작했는데, 야쿠자들이 한 서너명이서 걸어오는데 너무 찍고 싶은 거에요. 그런데 아무리제가 겁이 없다 해도 망설여지더라고요. 못 찍었어요. 말도 못 붙이고….
그렇게 그냥 집에 갔는데 잠을 못 잘 정도로 후회가 되더라구요. 그래서 다음에 만나면 꼭 말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다시 가부키초를 찾아갔죠. 또 그 야쿠자들을 만났는데, 내가 여기서 한 대 맞더라도 말을 해야겠다 싶어서 일단 가서 말을 걸었어요. 나는 사진 전공하는 학생인데 한 번만 찍게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아무 망설임도 없이 괜찮다고, 찍으라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사진을 찍고 급하게 학교로 뛰어가서 암실에서 인화해서 갖다 줬어요. 그랬더니 마음에 들었나 봐요. 잘 찍는다고 하면서 우리 사무실로 놀러 오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놀러 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많이 했죠.
야쿠자들의 세계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거칠고 자극적인 이야기거리도 많은데요. 예를 들어, 잘린 손가락은 버립니까? 물어보면 안 버린대요. 그럼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면 싱크대 열어보면 손가락이 있다고 그런 이야기도 하고…. 점점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야쿠자들의 일상에도 깊숙이 들어가 사진을 찍게 됐죠. 일본 사람들이야 야쿠자를 보면 쳐다보지도, 말을 걸지도 않는데, 오히려 저는 외국인이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A)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양) 뭐 싸우거나 그런 문제는 없었어요. 제가 인상이 워낙 안 좋아서 그런가(웃음). 그런데 한 번은 경찰하고 트러블이 있었는데 너무 짜증이 나고 화가 나서 필름을 버려야 했던 적이 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쉽죠….
A) 작가님의 사진을 보면 대부분 굉장히 자극적인데요. 이에 반해 사랑하는 이(사모님)를 담은 사진집 ‘사쿠라’ 시리즈는 굉장히 따뜻하고 사랑스러워서 조금 의외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양) 보통 한국 남자들은 여자들한테 사랑한다는 말 안 하잖아요? 이 시리즈는 제가 3년에 한 번씩 아내에게 하는 애정표현이에요.
A) 그렇다면 사쿠라 시리즈는 보통 3년의 주기를 가지고 진행하시나요?
양) 정확히 3년의 주기를 정해놓은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하다보니 3년에 한 번씩 하게 되더라고요.(웃음) A) 작가님의 사진의 특징은 방금 이야기한 사쿠라 시리즈도 그렇고, 이번 전시인 청춘길일도 그렇고 보통 주변의 일반적인 인물을 통해 영감을 받아 작업을 진행 하시는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어떤 주제로부터 영감을 얻으시나요?
양) 축제 같은걸 하면 포장마차가 쭉 들어서잖아요? 그것도 야쿠자들이 하는 건데, 요즘엔 거기에 있는 일반인들과 야쿠자들을 찍고 있어요. A) 작가님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말레이시아, 콩고, 필리핀을 배경으로 촬영하신 사진도 보았는데, 그 곳엔 어떻게 가게 되셨나요?
양) 그곳엔 사진 찍으러 간 게 아니라 다른 일, 진짜 노동을 하러 갔어요. 일본인들은 정글이나 위험한 환경을 무서워해서 갈 사람이 없기에 제가 가게 됐어요. 그래서 일 하지 않는 시간에 틈틈이 사진을 찍게 된거죠. A) 콩고는 흔히 가볼 수 있는 나라는 아닌데, 어떤 인상을 받으셨나요?
양) 깜짝 놀랐어요. 처음 가자마자 입국 심사를 하는데 사람이 없는 거에요. 한참 기다리면 그제서야 공항 관계자가 나와서 돈을 달라고 요구해요. 돈이 없다고 하면 또 한참을 기다리고, 조금 주면 또 다른 게이트로 데려가서 또 돈을 요구하고, 몇 번을 반복한 후에야 공항을 벗어났는데 너무 편안한 거에요. 사람들도 자유로워 보이고. 이 사람들 진짜 편하게 사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A)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진예술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가장 감동적인 예술 중 하나라고 말하지만 이에 대한 사회여건 및 현실은 너무나도 열악 하다고 들었습니다. 현재 일본 도쿄의 ‘젠 포토 갤러리’, 프랑스 파리의 ‘인 바트윈 아트 갤러리’ 소속작가이긴 하지만 여전히 녹록치 않은 생계로 일본에서 일용직 노무자로 생활을 이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힘든 생활에도 불구하고 사진이란 끈을 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양) 희열이죠. 힘들어도 그냥 맘에 드는 사진 하나씩 찍으면 모든 힘든 일들이 다 날아가버려요. 하얗게.
A) 혹시 앞으로 다큐멘터리 사진 이외에도 다른 영역으로도 범주를 넓혀가실 생각이 있으신 건가요?
양) 네. 이제는 싸움에서 질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웃음), 아직은 그래도 일하는 거 보면 일본 젊은 사람들 보다는 잘하거든요. 아직 에너지가 있을 때는 이런 식으로 좀 더 찍고, 나중에 체력이 달리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것 저것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죠. A) 국내에서도 작가님을 좀 더 자주 만나고 싶은데 앞으로 국내 활동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양) 일단 이번 전시가 끝나면 아무 전시 스케줄이 없으니까 일본으로 돌아가 막노동을 다시 해야죠. 그러면서 사진도 계속 찍고. 그러다 또 기회가 생기면 다시 한국에서 전시를 하고 싶어요. 원래는 한국에서 전시를 할 생각이 크게 없었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 많은 걸 듣고, 느끼면서 한국에서도 작업을 많이 해야되겠다고 생각이 바뀐 것 같아요. 다른 곳에서도 뭔가를 같이 해보자 했을 때 일본 작품밖에 없으면 얘기가 안된다고 그런식으로 조언도 해주더라구요. 사실 그런거 신경 안쓰고 나 혼자 하고싶은거 하려고 했는데 조금은 생각도 해봐야 하겠더라구요.(웃음) 결혼도 했고. A) 모 인터뷰에서 앞으로 기회와 여건이 된다면 한국에서도 “고향, 엿장수를 찍고 싶다”고 하셨던 내용을 봤는데, 꼭 엿장수를 찍고 싶은 이유가 있으신가요?
양) 어릴 때 엿을 한 번 사먹으려면 돈이 있나요? 그래서 들판에 가면 비료 포대 있죠? 그걸 열 장을 가져가야만 엿을 조금 떼줘요. 그렇게 어렵게 구한 엿이여서 그런지 엿이라는 게 굉장히 애틋한 간식이고 저에게는 큰 추억이 된 거죠. A) 사진작가 양승우를 한 문장으로 정의 또는 정리 할 수 있을까요?
양) ‘영화’요. 저는 그냥 영화 편집 하듯이하면서 지금까지 사진을 해왔거든요. 혼자 할 수 있는 영화인거죠. 물론 진짜 영화는 혼자는 제작할 수 없지만 사진을 통해 나만의 스토리를 담고 모든 내용을 직접 구성하기에 그런 의미에서 영화라 할 수 있는거죠. A)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 및 어떠한 작가로 남고 싶은지 ASAP Journal 독자들에게 한마디 부탁 드립니다.
양) 작가라고 불려지지 않는, 그냥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작가님이라고 부르며 대우해주는 이런 건 불편해요. 그냥 저 친구 또 사진 찍네? 또는 ‘찍새’ 그런 식으로 편하고 격식 없이…. 예쁘게 포장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저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이처럼 양승우 작가는 꾸밈 없고, 가감 없이 주변의 모든 것들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거칠고 투박한 그의 사진 이면에는 좀 더 본질적인 인간의 모습이 녹아 있으며, 원초적인 욕구와 감정이 포장되지 않은 상태의 ‘날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날 것, 단편적인 면만 본다면 불편하고 껄끄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표현하는 날 것은 오히려 때묻지 않은 순수한 아주 처음의 모습이 보이기에 더 큰 울림을 주는 것 같습니다. 현실적인 문제에도 사진이라는 끈을 놓지 못한다는 그의 단호한 어조에서는 그의 사진 세계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강한 에너지가 느껴지는데요. 다가올 시리즈에서는 또 어떠한 사진들로 우리에게 영감을 줄 지 기대가 됩니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주신 양승우 작가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청춘길일’을 비롯한 더 많은 사진 작품은 양승우 작가의 공식 홈페이지를 참조해보세요.
16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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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네요........ 자신만의 삶을 살고있는거 같아서 부럽기도하고 존경스럽기도하고..... 멋진분이신거 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삶ᆞ좋은 사진 부탁드리겠습니다!!!!!!^^
@photolover3 작가님은 실제로 뵀을 땐 사진 이상의 에너지가 느껴지시는 분이셨어요. 사진 자체는 거칠고 투박한 느낌이지만 작가님은 오히려 더 순수하고 진실된 분이셨습니다 :)
멋지다
글이 재밋네요 ㅎㅎㅎ 제가 인터뷰 기사는 잘안보는데요 이야기가 재미있고 읽다보면 궁금증이 생기는 부분을 질문해주셔서 끝까지 읽었어요 ㅎㅎ
와.. 저한테 뭔지 모를 잔잔한 충격을 주는 사진들입니다. 흑백처리를 제외한 다른 보정이나 편집도 없는.. 외설적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만큼 정말 날것의 느낌이 나네요 사진 예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우연히 들어와서 작품들 보게되었는데 저한테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잘 모르는 예술분야는 댓글 안다는데..ㅋㅋ 작품 잘 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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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08/10 류효상의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이야기들 = 1. 국민의힘은 전국위원회를 열어 권성동 당대표 직무대행에게 비상대책위원장 임명권을 부여하는 당헌 개정안을 가결했습니다. 국민의힘은 비대위 체제 전환을 위한 당헌 개정을 마무리하고 주호영 의원을 위원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이 난리에 고작 꼬마 이준석 하나 몰아내려고 그래야만 했니? 그런 거니? 2. 윤석열 대통령의 폭우 속 '자택 전화 대응'을 놓고 비판이 고조되자 대통령실은 '문제없다'는 반응을 내놨습니다. 대통령실은 경호와 의전 문제를 고려해 차후에도 윤 대통령이 재난과 관련해 '유선 대응'을 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있으나 없으나 하니까 문제는 없겠지만, 어떻게 파이팅 한번 외쳐줘? 3. 유력한 당권 주자인 안철수 의원이 당권 도전 의지를 공식화했습니다. 이준석 대표가 비대위 전환과 관련해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 등 법적 조치를 예고한 데 대해서는 "본인과 당을 위해서 멈출 때"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안철수 당대표 조합이 썩 어울려 보이긴 해… 바보들의 행진? 4. 민주당은 ‘대통령이 있는 곳이 상황실’이라는 대통령실 입장에 “참으로 구차해 보인다”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민주당은 또 "사실상 대통령이 이재민이 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며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게, 청와대에서는 왜 나와 가지고 이 욕을 사서 먹냐고… 오래는 살겠어~ 5. 이재명 의원은 '당직자 기소 시 직무 정지' 내용의 당헌 80조 개정 논란에 대해 "야당 탄압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또 “검찰공화국이라고 할 정도로 검찰권 남용 문제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180석 민주당이 끝내 검찰 개혁 하나 못하고 정권 빼앗긴 업보 아닐까? 6. 정부의 재난 대응에 대한 비판이 커지는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 발언이 논란에 기름을 끼얹는 모양새입니다. 윤 대통령이 일가족 참변 현장을 찾아 '전날 퇴근하며 일부 지역에 침수가 시작되는 걸 봤다'는 목격담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걸 자랑이라고 하는 건지… 그래서 집구석에서 전화통 들고 뭐 했는데? 7. ‘인사 참사'가 계속되자 여권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반복된 인사 논란과 경제난, '사적 채용' 논란, 여권 내홍 등이 겹친 가운데 8일부터 내린 폭우로 도시 곳곳이 잠긴 것도 악재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옵니다. 문제만 생기면 전 정부 탓하는 게 버릇이라 이번 폭우도 문재인 정부 탓할라~ 8. 교육부 국회 업무보고에 박순애 교육부 장관 대신 참석한 교육부 차관에게 대통령실이 쪽지 의견을 전달한 것이 포착돼 논란입니다. 쪽지에는 대통령실 교육비서관의 '학제개편은 언급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쓰여 있었습니다. 일개 비서관이 차관에게 쪽지로 업무를 지시하는 위대한 대한민국~ 9. 80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로 서울 곳곳이 침수 피해를 본 가운데 서울시가 수방 치수 예산을 900억 원 가까이 삭감한 것으로 나타나 논란입니다. 서울시는 재해 관련 주요 보직도 공백 상태로 호우 대비에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 난리에 한강 변 대관람차 공약이나 하는 오세이돈의 뚝심~ 대단해요~ 10. 유정복 인천시장이 집중호우가 내린 지난 8일 휴가를 가 전화 등으로 피해 상황을 보고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피해가 커지자 휴가 하루 만인 9일 업무에 복귀했지만, 비 피해가 있는 날 휴가를 간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입니다. 어쩌면 닮아도 이리 닮았는지 ‘용호상박’ 대결이라도 할 작정인가봐~ 11. 정남진 장흥 물축제를 개최한 장흥군이 행정안전부의 갑작스러운 축제 안전관리 자료 요청에 뒤숭숭한 분위기입니다. 개막식에 국민의힘 도당위원장 축사를 생략한 데 따른 괘씸죄에 걸린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국민의힘의 강점이 뭐냐면, 이렇게 대놓고 한다는 거야… 거리낌 없이~ 12. ‘김건희 논문’에 대한 국민대의 '봐주기' 논란에 대해 국민대 교수 전체를 대상으로 한 의견 수합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수합된 의견은 다음 주 발표될 예정으로 ‘김건희 논문'과 관련해 새로운 국면을 맞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검건희 논문 ‘봐주기 Yuji’하면 국민대 학생 보기 쪽팔리지 않겠어요? 13. 전여옥 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의 약식 기자회견 당시 아이랑TV 기자가 ‘대통령님 화이팅’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이게 진짜 여론”이라고 호평했습니다. 또 “저는 끝까지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할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표절 작가 전여옥 선생께서 김건희 여사와 공감대가 형성된 모양이지? 14. 이틀 연속 폭우가 쏟아지면서 80년 만에 시간당 강수량 기록을 갈아치웠습니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많은 비를 뿌린 정체전선이 11일까지 남북으로 이동하며 계속해서 많은 비를 뿌릴 것으로 예상돼 대비가 필요해 보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폭우라고 하더라도 인명 피해는 없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서울이 흙탕물에 잠긴 날 마포구청장 "찌개에 전, 꿀맛". 강남 물난리 되풀이, 다신 침수 없다던 오세훈 시장 '머쓱'. 이준석 사면초가 ‘준석 맘' 사퇴, 오세훈은 "자중자애" 권성동 '비대위원장 맡아달라' 요청 주호영, 사실상 수락. 박순애 취재 기자에 공무원들 연행하듯 몸으로 제압. 교육부 차관 "국민대 '김건희 여사 논문 판정' 존중". 이경 "윤·김건희 비판했더니 국민의힘 의원에게 압박받아". 정의당 "집과 상황실 다르지 않다면 용산 출근은 왜 하나". MB·김경수·이재용 사면심사 종료, 윤 대통령 결단만 남아. 살아오면서 수많은 재난에 시달렸다. 그런데 그 대부분은 일어나지도 않은 재난이었다. - 마크 트웨인 - ‘이만하길 다행이다’라고 위로처럼 하는 말이 힘든 사람을 더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재난은 되도록 일어나지 않도록 방비해야 하며 일어난 재난은 최대한 신속히 복구해야 합니다. 천재지변을 인간이 막아설 방법은 없겠지만, 최소화할 수 있는 지혜는 우리에게 충분히 있다고 믿습니다. 류효상 올림.
영화 "king's man"의 한장면 디오라마로 만들어보기😊 킹스맨!
너무 오랜만이네요:) 더워지기 한참전에 마지막 포스트를 작성했던 것 같은데.. 벌써 지방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답니다 작업실에 꽁박혀서 나갈 일이 거의 없다보니.. 갈수록 계절의 변화에 무감각해지는 요즘입니다. 각설하고 이번 작업은 영화 킹스맨의 한장면 디오라마로 만들어보기!! 제 포스트를 접해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제가 만드는 디오라마들은 1/6 사이즈로 작업한답니다:) 그래서 제법 크기가 커요^^; 그럼 작업기 바로 시작해보겠습니다. 우선 구현할 장면은 ...ㅎㅎ 영화속 킹스맨 양복점입니다 :) 디테일 요소들이 제법 많은 타입이라 시작부터 머리가 좀 아팠지만 .. 언제나 그렇듯이 씬을 처음보고 구상할땐 전체그림이 아닌 , 디테일 요소들 하나씩 눈에 담고 만들어가야 지치질 않는답니다.. 우선 작업물은 완성을 했으니 완성샷 몇장 보시고 작업기로...( 늘 순서가 대중이 없습니다..ㅠ ) 아무래도 천장이나 양옆 벽체로 마감이 서는 타입이 아니다보니 어두운 공간에서 봤을때 더 예쁘긴하네요ㅎㅎ 본래 쇼윈도 안쪽에 3벌에 의상이 걸려있어야하는데 한벌은 아직 작가님이 제작중이시라 하시네요:) 디오라마 의뢰자분이 추후에 오시면 입혀서 전시하신다하시니..ㅎㅎ :) 조금 아쉽지만 완성샷은 이정도로.. 그럼 작업과정샷은 최소한으로...ㅎㅎ^^ 구성되는 모든 요소들을 손으로 직접 만들다보니 :) 늘 매우 긴 작업시간을 요하지만 하나하나 완성하고.. 만들어가다보면 .. 언제나 끝이날까... 하던 일들도 금방 마무리가 된답니다. 펜스 봉 하나.. 그리고 보도블럭 타일 한장 :) 모든 요소들을 직접 만들다보면 .. 늘 그렇지만 고행하는 기분이 든답니다.. 하지만 그 작고 변변찮은.. 정말 하찮은 요소들이 하나씩 모여 그럴 듯한 그림이 만들어지는 것! 그게 디오라마 작업에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습니다. 하나의 작업물에도 족히 수만번의 사포질과 커터질(?) 그리고 같이 갈려나가는 제 손목인대(?)들이 하모니를 이룬 작업물들..ㅎㅎ :) 예전엔 받으시는 분들에게 " 이거 정말 어렵게 만들었어요..ㅠ" , "정말 최선을 다 했습니다..ㅠ"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정말 감사하게도 스스로 말하지않아도 작업물 그 자체로 "최선"을 알아주시는 분들이 늘어나다보니.. 선배 작업자분들이 항상 말씀하셨던 "초심"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는 요즘입니다:) 결국은 가장 하기싫고 , 피하고싶고 , 도망치고싶은 방법으로 만든다. 부족한 제가 처음가졌던 생각이고 , 지금까지 지켜오고있는 신념이라고하기엔 너무 거창하지만.. 그럼 오늘도....ㅠㅠ 유튜브로 노래도 크게 틀어놓고:) 작업대앞에서 흥얼거리며 오늘도 작업을 시작해봐야겠습니다. 부족함만 가득한 작업물들 늘 재밌게 즐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슷한 취미나 작업에 관심있으신 유저분들이 계시다면 변변찮은 제 인스타로 놀러오세요 ㅎㅎ 은근 많이들 찾아주셔서 소중한 인연들이 늘어나고.. 기뻐요:) 그럼 곧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www.instagram.com/aj_cust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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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가볼만한곳 #아산여행 #가을꽃구경 #곡교천은행나무길 #곡교천황화코스모스 안녕하세요. 호미숙 여행작가입니다. 9월 29일, 이렇게 9월도 가고 10월이 코앞이네요. 10월 1일부터 3일까지 연휴인데 여행 계획은 있는지요? 호미는 제주도 여행을 1박2일로 다녀올 계획이에요. 제주도에서 먹거리 볼거리 많이 담아 오겠습니다. 이번 소개하는 국내 여행지 가을에 가볼만한곳은 충남 아산으로 곡교천에 황화코스모스가 만발했습니다. 아산 은행나무길은 단풍명소로 11월 경에 가면 노랑 은행나무 단풍길이 환상적으로 펼쳐지는 곳입니다. 현재는 황화코스모스, 일반코스모스, 메리골드, 백일홍들을 볼 수 있어요. 아산 가볼만한곳 아산 여행 코스 1. 아산 은행나무길 2. 아산 곡교천 황화코스모스와 백일홍. 메리골드 일반 코스모스 3. 아산 곡교천 자전거 대여소 요금 - 현충사와 가까운 아산 지중해마을 구경해요. 4. 아산 현충사 곡교천 은행나무길 공영 주차장 아산 곡교천에서 가까운 현충사와 지중해마을까지 자전거 대여해서 다녀오시면 좋을 거에요. 곡교천에서 자전거 대여도 가능합니다. * 링크를 누르면 아산 곡교천 은행나무길 황화코스모스 꽃구경 해요. * 아산 은행나무길 가을 단풍명소 노란 가을길 영상도 감상해요. #아산가볼만한곳 #아산곡교천 #곡교천은행나무길 #곡교천황화코스모스 #가을단풍명소 #자전거타기좋은곳 #아산은행나무길 #곡교천자전거 #곡교천자전거대여 #곡교천주차장 #곡교천은행나무길카페 #곡교천은행나무길황화코스모스 #아산자전거대여 #곡교천자전거길 #은행나무광장카페 #아산카페 #아산여행 #아산당일치기 #당일치기여행
기묘하지만 '천재적인 디자인' 모음 Part3
물 위에 편안하게 뜰 수 있는 슈트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주변의 많은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좀 더 쉬운 방법으로 일처리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일들도 해결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물건을 창조할 수도 있으며, 생활의 편리를 가져다주는 편리함도 만들어 낼 수 있다. 작은 생각의 차이가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기발한 발상과 창의력 넘치는 문제 해결 방식으로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새로움으로 가득한 창의적인 디자인은 우리 삶을 좀 더 재미있게 만들어 준다. 빨대와 결합된 칵테일 잔 망치처럼 때려서 깨트리는 저금통 물이 떨어지는 듯한 LED 조명 독특한 디자인의 주전자 자연을 보는 듯한 카펫 돌멩이를 사용하는 휴대용 체스 1인분씩 나오는 파스타 미끄럼틀로 내리는 버스 다리미가 내장된 거울 이색적인 거리의 조각상 흘러내리는 난 시계 먹을 수 있는 컵 독특한 디자인의 수저 포크 나이프 물 위를 걷는 듯한 다리 낚시를 하는 티백 거치대 쇠구슬이 굴러오는 것 같은 길 비닐봉지 같은 유리 가방 책이 딱 들어맞는다 늘어진 듯한 미러볼 충전 상태가 표시되는 케이블 손가락을 안고 있는 반지 캔 모양의 도자기 출처ㅣ아이디어래빗
반고흐 디오라마&미니어처 작업기 2부:)
"나는 어떤 확신도 없고 뭘 알지도 못하지만 별을 바라봄으로써 꿈꾼다 -빈센트- " 고흐처럼 밤의 다채로운 색체를 잘 표현한 화가는 없을 거에요:) 그는 화려한 낮도 좋아했지만 , 색체들이 살아숨쉬듯 꿈틀거리는 밤을 화폭에 담아내길 좋아했어요. 주로 이른 새벽부터 작업을 시작해서 , 해가 뜨고 나서야 잠깐 새우잠을 자는 저도 :) 밤의 아름다움을 느껴가는(?) 요즘입니다. 계속해서 저번 작업기에 이어서 디오라마를 구성할 미니어처 유화를 몇점 더 그려봅니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두텁고 거친 임파스토안에서 유려하고 섬세한 빛을 담아내기란.. 작은 모작을 할 뿐인 저에게도 쉽지않은 일이었어요. 하지만 "밤의 화가"라 불리는 고흐의 디오라마 작업을 시작했으니 피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네요.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은적은 없습니다만 좋아하는 화가의 작품을 미니어처화해서 작은 캔버스에 담아내는 것은 "교육"의 질 보단 , "열정"의 질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잠깐 해봤습니다. 살아생전 단 한점의 그림도 팔지 못했다고 전해지는 불우한 천재화가. (정확히 따지자면 유화 "붉은 포도밭" 한점과 여러장의 스케치는 살아생전에 판매한 적이 있습니다. ) 위대한 화가와 비견될 수는 없겠지만 , 저역시 이 일을 시작하면서.. 쿰쿰한 곰팡이 냄새가 가득한 지하 골방에서 5천원짜리 물감세트와 조각칼 , 싸구려 붓세트 몇개로 시작했던 기억이 있기에.. 물감값을 아끼려 목탄 스케치로 몇개월을 버틴 그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한답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마음이 가는 화가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해바라기. 그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이면서 , 인생 중 가장 희망에 차 있던 아를의 노란집 시절에 그려냈던 작품이지요:) 노란집에서 고갱을 기다리며 설레이는 마음으로 몇점 그렸던 고흐의 마음이 전달되 듯 , 매우 수줍고 기쁨에 찬 색채들이 .. 보는 사람에게도 그 설레임을 전달하는 듯 하는 작품. 고갱도 고흐가 그린 작품들 중 해바라기를 가장 좋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지요:) ( 둘의 다툼이 시작되고 결별한 순간에도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과 고갱 자신의 작품을 교환하려고 했을 정도로 그는 고흐의 해바라기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적은 캔버스에 담아내기가 역시나 쉽지않네요:( 사실 나이프를 사용해서 작업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질감을 주기에도 좋아보였습니다만 ㅠ..워낙 작다보니 한점 또 한점 면을 채워가며 그려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화물감을 한풀 푹 떠서 해바라기 잎사귀를 찍어내듯 그려낼땐.. 정말 재밌었던 것 같아요:) 별이 빛나는 밤에 &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 작업물 보다 훨씬 더 그려내기가 어려웠어요.. 고작 디오라마 구성품 중 하나일 뿐인데.. 시간을 너무 많이 써버렸네요. "오랜 시간을 믿고 기다려주시는 분들에게.. 이 한점의 진심은 통할 것이다" 역시나 촌스러운 아날로그 작업자네요 작업물을 맡기전부터 전 고흐의 열성팬이었어요:) 갤러리북이나 그의 편지들을 담아내 엮은 다양한 서적들도 수집했더랬죠:) 덕분에 질좋은 종이에 잘 프린팅된 해바라기를 보면서 작업할 수 있었답니다. 모니터 화면으로는 느껴지지않는 감성(?)이 있달까요 역시나 아재스럽네요. 얼추 모양이 잡혔으니 이제 또 시작된 건조...ㅎㅎ:) 작지만 진짜 유화작업물이다보니 건조에 적어도 열흘은 소요될 것 같습니다. 자.. 이제 주인공과 한컷 남겨보고:) " hello Vincent " 조명을 잘못써서 너무 밝게 나와버렸네요ㅎㅎ 사실 그리다가 손가락이 너무 아프고.. 그림이 워낙 작다보니 그리는 자세가 어정쩡해져서 끝을 대충 마무리지어버렸답니다:) 항상 그렇지만 작업기도 끝마무리가 참 어색해요 그럼 조만간 완성된 작업기로 다시 찾아뵐게요. 늘 부족함만 가득한 작업물들 재밌게 감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AJ- www.instagram.com/aj_custom
(2편) 움짤로 보는 50년 전 한국.gif
이전편을 보고 싶다면 링크를 누르세요 국군의 월남전 파병이 결정되었다. 만 38세의 나이에 맹호부대 사단장 겸 주월한국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채명신 소장(당시 38세, 조선경비사관학교, 6.25 참전)이 수통과 탄띠를 패용하고  현충원에 묵념을 올리고 있다. 수도사단 맹호부대 사단장 - 소장 채명신 (당시 38세) 제9보병사단 백마부대 사단장 - 소장 이소동 (당시 38세) 해병 제2여단 청룡부대 여단장 - 준장 이봉출 (당시 39세) 1965년, 파병을 위해 도열한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맹호부대) 병력 전선으로 떠나는 제 9보병사단 (백마부대) 장병들의 결연한 표정 부동자세의 해병 수색대 병사들 서울 시가지를 통과하는 장병들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노인과  부채질을 해 주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월남 전선으로 향하는 국군 수송을 위해 36개편의 열차가 동원되었다.  시민들과 장병들의 어머니들이 언덕 위에서 열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대구역에서 잠시 정차한 수송열차. 한 병사가 역까지 배웅을 나온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국군 장병을 위해 기차역에서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중년 여성. 부산항에서 승선 전, 부하들을 향해 악수하는 중대장을 바라보는  해병 소위 이학철 (당시 23세) 파월 1진 청룡 제3대대 9중대장 김종세 대위 (중앙, 당시 28세),  박준교 상병 (왼쪽, 당시 22세), 정명국 일병(오른쪽, 당시 21세)이 인터뷰를 가지고 있다.  김종세 대위: '적들에게 우리 대한 국군의 전투력과 기백을 보여주겠습니다.' 대한뉴스 박무환 기자: '삼천만의 마음이 국군과 함께 합니다. 호국영령들이 대한의 남아들을 수호할 것입니다. 무운을 빕니다.' 마지막 승선 인원인 맹호 혜산진부대 소속 소대장 소위 최정길(당시 24세)이  부산시 부시장을 비롯한 환송 인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당시 국내 최대의 여성단체 한국 부인회 회원들이 맹호부대 장병들을 환송하고 있다. 떠나는 장병들을 환송하는 부산 시민들과 수송선 난간을 가득 메운 장병들. 출발하는 수송선. 부산 시민들의 응원에 군가로 화답하는 장병들 멀어지는 부산항을 바라보는 해병 병사의 모습 첫 국내 기술로 만든 라디오가 시판되었다. 납땜질에 열중하는 어린 여공들. 식목일에 나무를 심기 위해 산으로 향하는 시민들. 민둥산에 나무를 심고 있다. 가을 날, 학생들 간의 유도 대결이 펼쳐지고 있는 어느 학교 교정. 1967년, 제2회 전국학생씨름대회. 씨름 프로대회가 존재치 않던 시절, (씨름 프로대회는 80년대)  전국 고등학교의 힘깨나 쓴다는 학생들이 모였다. 다른 지역 학생들의 경기를 살펴보는 서울 고등학생들. 치열한 결승전, 경북 영신고등학교 학생이 우승을 차지했다. 강원도 삼척시에 폭설이 내렸다. 지붕에 쌓인 눈을 치우는 주민들. 생활 체육으로 나날이 인기를 더해가는 씨름이 소개되었다. 씨름 대회를 구경하는 수많은 인파들. 소나기에도 구경하는 사람들. 우승자 김학용 (당시 26세) 씨가 황소 한 마리를 상품으로 수령하고 있다. (* 김학용 씨 훗날 프로 씨름이 생기고 감독이 되면서 강호동을 천하장사로 키워냈다. 2007년 별세.) 국군 장성들 월남전선 방문. 전쟁터에서 경계근무 중인 해병 병사의 덥수룩한 수염을 만지며 웃는 육군참모총장. 주월 맹호부대 병사들이 시멘트로 만든 역기로 밀리터리 프레스를 하며 체력 단련을 하고 있다. 대다수가 임관과 동시에 월남 전선으로 파병될 ROTC 5기생 생도들이  대간첩작전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교관으로부터 산악 게릴라전 교육을 듣고 있다. '웃지않는 한국 해병대' - 미국 UPI 뉴스 보도 1967년, 짜빈동 전투에서 중대 병력으로 월맹 정규군 정예 1개 연대 병력과  맞붙어 승리한 해병 11중대 장병들이 미군의 초청을 받아 계단 위에서 위문 공연을 지켜보고 있다.  선글라스를 낀 정경진 대위 (당시 28세, 중대장)와 김용길 중사 (좌측, 당시 26세),  중앙에서 카메라를 노려보는 어느 청룡부대 11중대 병사가 카메라에 담겼다. 당시 '철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김기수의 경기를 보기 위해 서울 운동장 특설링을 가득 메운 시민들.  복싱 세계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인 김기수 (당시 27세)가 도전자 프레디리틀 (미국)과 15라운드까지 맞붙고 있다. 도전자를 압도하는 김기수. 기립박수로 환호하는 시민들. 타이들 방어에 성공한 김기수(당시 27세)의 기념촬영. 1968년, 부산시 풍경 1968년, 서울의 모습 하늘에서 본 1968년 서울 첫 개통한 아현고가의 모습, 자전거가 지나다니고 있다.
영국 화가의 눈으로 본 그때 그 조선
‘Portrait of Miss Elizabeth Keith’ by Ito Shinsui, 1922 20세기 일본 화단의 대가로 꼽히는 이토 신수이(伊東深水, 1898-1972)가 그린 키스의 초상화이다.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 1919년 엘리자베스 키스라는 호기심 많은 한 영국 여인이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을 방문했습니다. 그녀는 곧, 일제 식민 지배에서 신음하는 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과 풍습과 경관에 빠져들었고 깊은 애정으로 이를 그림과 글로 담아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그림은 오랫동안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다가 2006년에야 재미동포 송영달 선생의 노력으로 비로소 빛을 보게 됩니다. 아마,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을 처음 보시는 분들이 많을 터인데, 1920~1940년대 무렵 옛 우리나라의 모습이 아름답고 정밀하게 나타나 있는 그림들을 보면 경탄을 자아낼 것입니다. ◆ Marriage Procession, Seoul_1921 혼례 행렬 이 그림은 혼례 행렬, 정확히 말하면 신부 행차입니다. 꽃가마가 아주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네요. 행렬 앞에는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신랑 집으로 가마를 인도하여 갑니다. 그 인도자는 백년해로를 뜻하는 기러기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있습니다. 청사초롱을 든 사람들이 가마 앞뒤에 있고, 동네 아이들이 구경삼아 따라가고, 빨래하던 아낙도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데, 한 아낙은 길에다 물을 버리고 있네요. 뒤로 동대문이 보이는데, 다리는 청계천의 어느 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East Gate, Seoul, Moonlight_1919 달빛 아래 서울 동대문 푸른 달빛 아래의 동대문(興仁之門). 이 그림에 보이는 돌담 표현은 목판화로는 하기 어려운 기법이라고 합니다. 키스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23년 도쿄 대지진 때 목판 원본이 소실되었고, 이 그림은 키스의 저서 <동양의 창>에 실린 것인데, 현재 누가 실물을 소장하고 있는지는 모른답니다. ◆ East Gate, Pyeng Yang, Korea_1925 평양의 동문 “1392년에 지은 평양 성곽 중 동쪽에 있는 문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서울에 있는 동대문만큼 웅장하지는 못하지만, 평양의 동문은 그 단순한 스타일과 함께 연륜의 은은함이 배어 있는 문이다. 에카르트는 한국의 건축에 대하여 이렇게 논평했다. ‘한국은 그 건축법을 중국에서 들여왔지만, 그것은 한국의 상황에 맞추어 단순하면서도 우아하고 더욱 절제된 형태로 발전시켜 한국 특유의 건축문화를 만들어냈다.’ 평양의 동문은 바로 이런 한국 건축의 진수를 보여준다.” ◆ Riverside, Pyeng Yang_1925 평양 강변 “대동강변의 이 정자는 약 150년 된 것이라고 하며, 그 주변 환경이 너무 완벽하여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아주 조심스럽게 정자 터로 선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워 때때로 여행객은 기이한 감동을 맛보게 된다.” 키스가 대동강변이라고 적고 있는 것처럼, 이곳은 모란봉, 을밀대, 부벽루가 있는 근처인 듯싶습니다. ◆ Wonsan_1919 원산 “내가 아무리 말해도 세상 사람들은 원산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하늘의 별마저 새롭게 보이는 원산 어느 언덕에 올라서서 멀리 초가집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노라면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느낀다.” 명사십리로 유명한 원산. 키스의 그림을 보니 과연 원산이 아름다운 곳임을 알겠습니다. 밤하늘의 별빛과 바다 위 배의 불빛이 기막힙니다 ◆ Korean Domestic Interior 한옥 내부 “비교적 여유 있는 집의 내부 풍경이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는데, 이 집의 가장은 사랑방이 아닌 대청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남녀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지 않으며 부인이 식사를 날라다 준다. 남자들이 기거하는 사랑방은 대문 가까이 있다. 여자들이 기거하는 안채는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의 집은 길가에 붙어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집은 마당이 있고 부유한 집은 안채 앞마당까지 해서 마당이 둘이다. 한국 사람들은 방안에서는 신발을 벗는다. 방바닥은 노란 장판지로 덮여 있는데 항상 반짝반짝 닦아놓고 있다. 사랑방 나무기둥에는 ‘집에 연기가 자욱한 것은 즐거운 일이다’라고 써 있는데, 그것은 부엌에서 나는 연기를 가리킨다.” ◆ The Eating House 주막 “맛있는 음식 냄새가 솔솔 밖으로 새어 나온다. 주막은 추운 겨울날 먼 거리를 걸어가거나 무거운 짐을 나르는 시골 사람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곳이다. 이 집을 닮은 초라한 주막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집 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달을 쳐다보는데 최고로 좋은 집 >” ◆ The Hat Shop 모자 가게 “간판에 ‘높은 모자, 둥근 모자, 리본 달린 것, 세상 모자란 모자는 다 있습니다’라고 써 있다. 이 자그마한 모자 가게의 주인은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인은 어떻게든 공간을 만들어서 키가 큰 친구들까지도 가게 안에 다 들어오게 했다. 그들은 거기서 하루종일 담배를 피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정하게 나눈다. 한국에서 모자는 중요하다. 학자는 특별한 모자, 그러니까 검은 말총으로 된 모자(갓)를 쓰는데, 오로지 중국 고전을 다 읽은 사람만 쓸 수 있다. 총각은 약혼식에서 노란 짚으로 만든 둥그런 모자를 쓴다. 결혼식 날에는 한 사람이 빨간 모자를 쓰고 손에는 백년해로와 신의의 상징인 기러기를 들고 간다. 이런 옛 풍습은 한국에서 차차 없어져 가고 있다.” ◆ The School - Old Style 서당 풍경 “하늘 천, 따 지, 달 월, 사람 인. 후렴처럼 반복하는 소리가 담장 너머로 들려왔다. 여름 해는 따갑게 비치고 있었는데, 서울 성문에서 멀지 않은 그 집은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서당 안을 슬쩍 들여다본 장면을 스케치한 것이다. 남자아이들이 글을 외면서 그 소리에 맞추어 앞뒤로 몸을 흔들어댔다. 나이 많은 훈장은 실내용 모자를 쓰고 앉아서 마치 조각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마음속으로 아름다운 한시를 한 수 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훈장은 조금도 학생들의 공부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반장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긴 대나무 작대기를 들고 감시하고 있다가 학생의 외는 소리가 끊긴다거나 조는 듯한 동작을 보이면 곧바로 등이고 어디고 내려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린 학생은 퍼뜩 정신을 차리면서 글 읽는 소리가 조금 커졌다.” ◆ Temple Interior 절의 내부 “서울 동대문 밖에 있는 이 사당은 전쟁의 신을 위해서 지어진 것이라 한다. 노란색의 작은 지붕 밑에 나무로 깎은 시커먼 조각상은 약 3백여 년 전 임진왜란 때 한국을 지켜주었다고 믿어지는 중국 장군의 영혼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 한다. 사당은 이상한 모양의 조각상들로 꽉 차 있었고 내부는 어두컴컴하였다. 얇고 가벼운 치마를 입고 땅에 납작 엎드려 염불하는 여인들은 마치 깊고 어두운 숲 속에 떨어진 꽃잎처럼 보였다.“ ※ 여기서 말하는 사당은 지금도 동대문 인근에 있는 관제묘를 말합니다. 동묘라고도 하고 관운장을 모시고 있죠. ◆ White Buddha, Korea_1925 흰 부처 이 그림의 흰 부처는 현재 서울 홍은동 보도각에 있는 백불(白佛)입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A Game of Chess_1936 장기두기 “전형적인 한국 시골의 두 노인이다. 한국에서는 남자들이 장기를 두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때로는 길가에 앉아서도 한다. 한국에는 놀이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보기엔 여자들에겐 그네뛰기가 유일한 놀이이다. 그들은 우리 스코틀랜드 여자들보다 훨씬 높이 그네를 탄다. 그네 타는 여자들은 자리에 앉아서 타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탄다. 그네는 대개 소나무에 줄을 맨 것이지만, 때로는 벽돌로 세운 기둥에 매기도 한다. 그네는 이런저런 명절에 타기도 하지만 주로 봄에 타는 듯하다.” ◆ Kite Flying 연날리기 “서울은 연날리기에 최고로 좋은 도시이다. 연 날리는 철이 돌아오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온통 형형색색의 연으로 뒤덮인다. 웬만한 가게에서는 각종 크기의 연을 파는데, 값도 싸서 어떤 것은 불과 일전밖에 하지 않는다. 여기에 그려본 것은 전형적인 아이들의 연 날리는 모습이다.” ◆ New Year's Shopping, Seoul_1921 새해 나들이 키스는 자신의 저서 <동양의 창>에 “정월 초하루인 설은 한국 최대의 명절이다. 이 날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나들이를 한다”라고 썼습니다. 광화문 해태 상 앞에서 어머니와 함께 나들이를 나온 아이들이 풍선을 가지고 놀고 있군요. 옛 우리의 세시풍경을 그린 귀중한 그림입니다. ◆ Young Korea_1920 한국의 어린이들 색동저고리를 입은 여자아이, 두루마기에 예쁜 꽃신을 남자아이들을 나란히 앉혀 놓고 그림을 그렸군요. 키스의 초기작 중 하나인데 이 그림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아이들이 설빔차림을 한 것 같군요. ◆ Two Korean Child_1925 두 명의 한국 아이들 “아이들의 의상은 그 디자인에 있어서 부모나 조부모가 입는 옷과 다를 바가 별로 없으나 색깔이 더 다양하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분홍장미 색깔의 넓은 치마를 발목까지 내려오게 입고, 어린 남자아이들도 같은 색깔의 옷을 입는다. 조금 큰 남자아이들의 바지는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통이 넓고 발목까지 온다. 갓난아기들의 저고리에는 색동 소매가 달려 있다.” ◆ Country Wedding Feast_1921 시골 결혼잔치 한국인의 풍습을 흥미를 가지고 관찰한 키스는 결혼식 장면을 여러 장 그렸습니다. 혹 그보다는 미혼이었기 때문에 결혼식에 더 흥미가 있었을지도 모르죠. 한번은 신부 행렬을 보려고 급히 따라가다가 물에 빠진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에는 아이 어른 다 합하면 2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흥겹게 잔치를 치르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 Korean Bride_1938 한국의 신부 “한국에서 제일 비극적인 존재! 한국의 신부는 결혼식 날 꼼짝 못하고 앉아서 보지도 먹지도 못한다. 예전에는 눈에다 한지를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신부는 결혼식 날 발이 흙에 닿으면 안 되기 때문에 가족이 들어다가 자리에 앉힌다. 얼굴에는 하얀 분칠을 하고 뺨 양쪽과 이마에는 빨간 점을 찍었다. 입술에는 연지도 발랐다. 잔치가 벌어져 모든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기지만 신부는 자기 앞의 음식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과일즙을 입안에 넣어주기도 하지만 입술연지가 번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루종일 신부는 안방에 앉아서 마치 그림자처럼 눈을 감은 채 아무 말 없이 모든 칭찬과 품평을 견디어내야 한다. 신부의 어머니도 손님들 접대하느라고 잔치 음식을 즐길 틈도 없이 지낸다. 반면에 신랑은 온종일 친구들과 즐겁게 먹고 마시며 논다.” '신부가 한국에서 제일 비극적인 존재'라는 키스의 표현이 재미있으면서 격세지감을 들게 합니다. ◆ Wedding Guest_1919 결혼식 하객 결혼식 하객으로 온 이 부인은 머리에 장식이 달린 조바위를 쓰고 단아한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키스의 관찰입니다. "일본 여자들은 두 다리를 붙이고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에 한국 여자들은 가부좌로 앉아서 피로하면 서슴지 않고 수시로 다리를 고쳐 앉는 게 풍습이다. 교회에 나온 한국 여자들을 그리다 보면, 다리를 고쳐 앉을 때마다 치마가 불쑥하게 들어올려졌다 내려앉았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광경이다.” ◆ Returning from the Funeral_1922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성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성 밖에 묻는 것이 법이라, 겨울 저녁 어두워진 후에 등불을 켜 든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성문의 현판에 ‘東大門’이라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서울은 아니로군요. 키스가 영국에서 전시회를 할 때 영국 왕실에서 이 그림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 The Widow_1919 과부 "온화하면서도 슬픈 얼굴을 한 이 부인은 한국 북부 출신의 여인이다. 한국에서는 남남북녀라 하여 북쪽의 여자를 더 쳐준다. 모델을 서려고 내 앞에 앉았던 그 당시,일제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몸에는 아직도 고문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였고 원한에 찬 모습은 아니었다.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움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인이었다. 이 과부는 남편의 죽음을 마냥 슬퍼할 처지가 못 되었다. 외아들은 일제에 끌려갔고 그녀는 언제 그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태였다. 아들은 삼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애국자였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다. 여자는 전통적이고 폭넓은 크림색 치마를 입었고 그 속에는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고리는 빳빳한 삼베였다. 북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풍습대로 머리에 두건을 두른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인데도 여자는 그런 두건을 쓰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는 숱이 많고 길었으며 그것을 땋아서 머리에 감아올리고 있었다.“ ◆ Embroidering, Korea_1921 자수놓기 긴 머리에 빨간 댕기를 하고 수를 놓고 있는 처녀. 혼기를 맞아 자신의 혼수 준비를 하는 걸까요. ◆ Woman Sewing 바느질하는 여자 “중류 가정의 한 여자가 바느질을 하고 있는 모습. 그녀의 옆에는 바느질 그릇과 인두가 꽂혀 있는 놋화로가 놓여 있다. 한국 여자들은 세탁과 바느질을 아주 잘해서 아무리 더럽고 거칠었던 옷도 그들의 손을 거치면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깨끗하게 세탁된다.” ◆ A Hamheung Housewife_1921 함흥의 어느 아낙네 “한반도 북쪽에 있는 함흥의 여자들은 서울 여자들보다 키도 크고 자세도 더 꼿꼿하다. 독특한 옷차림으로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다닌다. 큰 두건 같은 머릿수건은 치마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나는 이 여자를 대낮에 그렸다. 그녀는 땡볕도 개의치 않았을 뿐 아니라 머리에는 빨래를 담은 붉은 함지를 이고 있었는데도 별로 힘들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옥가락지 두 개를 정성스럽게 끼고 있었다.” 이 그림과 아래의 ‘아침 수다’는 같은 소재의 그림입니다. ◆ A Morning Gossip, Hamheung, Korea_1921 아침 수다 "아침에 빨랫감을 이고 씻어야 할 요강을 들고 냇가로 나가던 여자와 다른 한 여자가 길에서 만나 수다를 떨고 있다. 머릿수건을 기술적으로 두르는 것이 풍습이며, 어떤 때는 치마나 아이들 옷으로 머리를 둘러싸기도 한다. 치마는 풍선처럼 넓게 퍼져 있고 저고리는 무척 짧다.“ ◆ From the Land of the Morning Calm_1939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사람 “중하층 계급에 속하는 한국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추운 겨울이라 머리에는 털이 안으로 달린 남바위를 쓰고 그 위에 말총으로 만든 갓을 쓰고 있다. 하얀 무명옷에는 솜을 넣어 방한을 하고 있다.” ◆ The Country Scholar 시골 선비 “이 선비는 원산 사람이다. 그가 입고 있는 전통적인 선비 의상은 8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던 것이고 모자도 옛날식이다. 그가 들고 있는 막대기는 끝 부분이 백옥으로 단장되어 있었고 복장과 잘 어울렸다..선비는 그 부분이 잘 보이도록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그의 옷고름은 연홍색 비단이고 옷은 엷은 옥색이었는데 까만 단하고 훌륭한 색깔의 조화를 이루었다. 이 나이 많은 한국 선비와 얼굴을 대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의 표정에서 좋은 가정교육, 자기 절제, 인자한 부드러움 등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의 매너는 은근하면서도 정중했다. 그는 속세의 근심을 떠나 별천지에서 노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 Young Man in Red 홍복을 입은 청년 "이 청년은 자기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입궐할 때 입었던 관복을 입고 있다. 붉은색의 겉옷 밑에는 파란색 옷을 입고 있었고, 백색 옥돌이 들어 있는 자그마한 주머니를 달고 있어서 걸을 때마다 패옥 소리가 낭랑했다. 거북이 등과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는 꼭 매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허리 위로 둥그렇게 두르도록 되어 있었다. 앞으로 내린 에이프런에는 금으로 된 단추가 두 개 있었는데, 그것은 관직 등급을 보여주는 표시였다. 모자는 말총으로 만들어졌는데 금색 칠을 했고, 신발은 넓적하고 코끝이 뭉특해서 발이 작아 보인다.“ ◆ A Daughter of House of Min_1938 민씨 가문의 규수 “이 처녀는 지체 높은 집안의 규수에게 어울리는 복장을 하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암살된 명성황후의 친척이다. 나는 그녀를 고풍스러운 병풍 앞에 세웠고 예쁜 신발을 그리고 싶어서 비록 실내지만 일부러 신발을 신게 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에 외교사절로 파견된 최초이자 최후의 인물이었다. 또 그는 내가 만난 최초의 한국 양반이었다. 그는 하얀색 옷을 입고 있었고 크림색의 얇은 천으로 된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그의 하얀 버선은 발에 아주 잘 맞았다. 만약 내가 시인이었더라면 그의 멋진 발을 노래하는 시를 지었으리라! 훗날 나는, 결혼하여 어린 딸을 둔 이 여자를 다시 만났는데, 그 모녀에게서 그 아버지의 우아함이나 온화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여자는 영어를 잘하고 꽤 똑똑해 보였다. 나는 그녀가 좋은 배필을 만난 듯해 기뻤다.” 처녀의 아버지는 조선 말기 최초의 프랑스 공사였다는 것으로 보아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특권대사로 파견되었다가 1902년에 주불공사로 임명되어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한 1905년까지 공사로 활약한 민영찬으로 추정됩니다. 민영찬은 국권을 빼앗긴 것을 분히 여겨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의 동생입니다. ◆ The Gong Player_1927 좌고 연주자 이 악기는 조선 말기 화가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에도 보이는 좌고(座鼓)로 생각되는데, 좌고는 궁중음악 연주에 사용되는 북입니다. 보통 삼현육각(三絃六角) 편성으로 연주하거나 춤 반주를 할 때 좌고를 치는데, 앉은 채로 연주할 수 있도록 높이가 낮은 틀에 북을 매달아 놓고 칩니다. 좌고의 북통에는 용을 그리고, 북면에는 태극 무늬를 그려 넣습니다. ◆ The Flute Player_1927 대금 연주자 "이 사람은 과거 국악원 소속이었으나 현재는 조선왕조가 망하여 궁중음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일본정부가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잇다. 다행히도 나는 국악원 사람을 몇 명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전에 종묘제례 때 보았던 아주 희귀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다. 제일 보기 드문 악기는 다듬지 않은 옥같이 보이는 삼각형의 돌을 여러 개 나무틀에 걸어놓은 것이었다. (편경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기술적으로 치면 전 음계의 음정을 낼 수가 있었고 소리가 아주 좋았다. 대개는 피리소리의 효과를 높이는 데 사용하였다. 또 오리 모양으로 만든 나무딱따기도 있었는데, 밝은 색깔의 옷을 입은 20여 명의 사람들이 전후좌우로 돌아가면서 소리를 냈다.(박을 가리킵니다). 북의 종류도 여러 가지여서 각기 다른 소리를 냈는데 언제나 피리소리가 제일 고음이었고 또 제일 아름다웠다. 이 대금 연주자는 연주도 잘하지만 행동도 점잖아서 좋은 가정에서 자란 사람 같았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과 마찬가지로 손이 잘생겼으며, 대금을 부는 사람의 섬세한 손놀림이 정말 보기 좋았다.“ ◆ Court Musicians, Korea_1938 궁중악사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후 전통 한국음악의 정수인 궁중음악이 사라져갈 무렵, 키스는 궁중악사들을 애써 찾아 몇 점의 그림을 남겼습니다. 아마 이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고종과 순종 재위 시에 궁중음악을 연주하던 마지막 궁중악사들로 생각됩니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