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songs
10,000+ Views

당신은 행복한가

한 해가 저물 무렵
편지 꾸러미를 풀어 챙기다가
뜻밖에 이제는 고인이 된 친지의 편지를 발견하고
한 줄 한 줄 사연을 읽어내려 갈 때,
다시는 더 만날 수 없는
이승과 저승의 아득한 거리를 두고
덧없는 인생사를 되돌아보면서
내 가슴 한쪽에는 애틋한 흐름이 있다.
우리는 지금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존재는
그 누구에게도,
그 어디에도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이다.
살아 있을 때 이웃과 따뜻한 가슴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의 자리를 잃지 않고
사람된 도리를 지켜갈 수 있다.
영국 속담에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이 있다.
옳은 말이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자기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러니 행복과 불행은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고 찾는 것이다.
비슷한 여건 속에 살면서도
어떤 사람은 자기 처지에 고마워 하고
만족하면서 밝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불평과 불만으로
어둡고 거칠게 사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묻는다.
나는 행복한가, 불행한가?
더 물을 것도 없이
나는 행복의 대열에 끼고 싶지
불행의 대열에는 결코 끼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내 안에서 행복을 만들어야 한다.
행복은 이웃과 함께 누려야 하고
불행은 딛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
-법정스님-
Comment
Suggested
Recent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펌) 새언니가 장애인을 소개해줬어요
1. 장애인분들을 무시하고 비하하려는 것이 아님을 먼저 밝힙니다 20대 후반 여자입니다 3살 많은 오빠는 작년에 결혼했고 저는 미혼이에요 별로 결혼 생각 없고, 부모님도 제 결혼에 관심 없고, 오빠 결혼때도 알아서 해라 우린 몰라 이랬어요 지난주에 오빠가 오랜만에 엄마밥 먹고 싶다고 새언니랑 왔어요 새언니가 결혼하니까 너무 좋다, 아가씨도 결혼해서 사랑 많이 받으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러면서 직장동료 중에 좋은 사람 있는데 만나볼 생각 없냐고 했어요 만나보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겠다고 했고 시간 정해서 오늘 만났어요 카페에서 기다리는데 휠체어 탄 남자분이 혹시 ##씨 맞으세요?하는데 정신이 아득해졌어요 제가 당황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니까 그분도 어쩔 줄을 모르고 그분은 제가 비장애인이라 되려 놀라신 것 같더라고요 겨우 정신 수습하고 그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만 했어요 그분이 웃으시면서 왜 ##씨가 죄송하냐며 새언니가 실수한 것 같은데 그럴 사람이 아닌데 왜 그랬지 하면서 끝까지 좋게 좋게 말씀하셨어요 남의 가게에 들어왔다가 그냥 나가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차 한잔 마시고 15분만에 나왔어요 집에 가서 그냥 아무말 안해야지 하고 시간 좀 때우다 들어갔는데 엄마 아빠 보니까 눈물이 막 나는 거예요 결국 엉엉 울고 말았어요 엄마 아빠가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제가 말도 제대로 못하고 계속 우니까 소개팅남한테 무슨 일 당한 거라 넘겨짚어서 그게 아니라 휠체어 탄 사람이 나왔어 이 한마디 겨우 하고 계속 울었어요 당장 오빠네 전화해서 오라고 했죠 오빠 부부 신발도 다 벗기 전에 우리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엄마가 악다구니를 썼어요 오빠는 깜짝 놀라고 새언니는 전 아무것도 몰라요 이런 표정이구요 자초지종을 듣고는 오빠도 얼굴이 벌게져서 손을 막 떨고 새언니 진짜 뻔뻔하게 정말 좋은 사람이라 소개해준 거래요 장애 있다고 사람 차별하시면 안돼요 이러고 있네요 엄마가 오냐 너 말 잘 했다 그럼 너는 왜 사지멀쩡한 내 아들이랑 결혼했냐고 소리소리 지르고 오빠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면 처제한테는 소개해줬어? 결혼 안한 사촌동생들도 많잖아 거기도 소개해줬어? 막 몰아붙이니까 아무말 못 하네요 아빠가 다 듣기 싫고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라고 했어요 며느리 있기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거 없으니 안 보면 된다고 혹시 몰라서 말씀드리는데 결혼한지 8개월 됐는데 지금까지 5번 봤어요 설, 어버이날, 오늘 포함해서요 시집살이? 그런 거 절대 없습니다 오빠네한테 관심이 없어요 오히려 관심받고 싶어서 이 난리를 일으켰나 싶어요 오빠한테 미안하네요 오빠있는 친구들보니까 어릴 때 많이 싸우던데 저희는 그런 거 없었어요 저 철부지랑 싸움이 되냐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공부도 잘 가르쳐주고 숙제도 도와주고 정말 잘해줬어요 글쓰다가 몇번이나 멈췄는지 모르겠네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어요 2. 많은 분들이 제 마음 이해해주시고 같이 분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오빠가 집에 와서 둘이 얘기 많이 했는데 결론은 제가 싫어서 그랬대요 얘기가 좀 긴데... 오빠랑 저랑 축구 엄청 좋아하거든요 얼마 전 6월7일 새벽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있었어요 저희 부모님이 현충일에 꼭 인사드리러 가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주무시고 오신대서 새벽에 눈치 안보고 축구 볼 수 있으니까 오빠한테 축구보러 올래? 물어봤어요 새언니 자는데 방해될까 싶었는데 잘됐다며 오겠대요 그래서 밤 12시쯤 와서 잠깐 자고 축구보고 6시 안돼서 집에 갔거든요 그일 때문에 제가 너무너무 싫어졌대요 오빠가 밤에 말없이 나간 것도 아니고 미리 얘기하고 괜찮다고 해서 간건데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겠다고 하니까 오빠도 자기도 모르겠고 이해하기도 싫대요 몇년을 알고 지냈는데 하루만에 다른 사람이 됐다고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생각밖에 안든다고 일단 당분간 나가있으라고 했대요 친정이든 어디든 집 내가 샀으니까 나가라는 유치한 말을 내가 하게 될 줄 몰랐다며 백번 양보해서 제가 잘못했다 칩시다 근데 이렇게 허접한 일을 꾸몄다는 게 너무 기가 막혀요 눈 깜빡깜빡거리면서 과장된 표정 있잖아요 전 순진해요, 아무것도 몰라요, 장애인 차별하면 안돼요 그것 때문에 부모님이나 저나 오빠나 더 화가 났어요 그리고 남의 집안일에 엮여서 어이없이 봉변당하신 그분께 너무 죄송해서 큰 용기내서 전화해서 다 얘기했어요 어찌됐든 새언니는 저랑 가족이니까 너무 죄송하다고 새언니가 한 말 중에 한가지는 사실이더라구요 그분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거 욕먹을 각오도 했는데 마지막까지 신사적이셨어요 그래서 더더욱 죄송했고 더더욱 새언니를 용서할 수가 없어졌어요 엄마, 아빠는 우리 인생에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으로 치면 된다하시고 저도 그럴 생각이에요 사과도 필요없고 다시 볼 필요도 없고 마음 같아서는 회사에 소문 쫙 나서 아주 개망신을 당했으면 싶은데 그럼 그분에게 더 상처겠죠 답답하네요 정말 마지막으로 혹시 저희 부모님을 차별주의자로 보실까 걱정되어 한말씀 드리자면 저희집 위탁가정 했었어요 입양가기 전 아이들을 당분간 데리고 있는 일인데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훨씬 많았어요 장애 때문에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으니까요 아빠는 수화배워서 봉사활동도 하세요 절대 장애인 무시하고 차별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속 시원한 마무리가 아니라 어쩐지 죄송하네요 아무튼 위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3. 왜 그 밤에 불러냈냐는 얘기가 있던데 경기있는 그날 갑자기 부른 거 아니고 5일전에 물어봤어요 새언니가 어차피 난 그 시간에 자고 있으니까 갔다오라했대요  킥오프는 3시45분인데 졸음운전 할까봐 더 일찍 온 거구요 새언니가 가지말랬으면 오빠도 당연히 안 왔죠 새언니가 같이 왔었어도 상관없구요 오빠랑 저를 이상한 관계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댓글은 진짜 충격이네요 생각도 안 해봤어요 상상도 안돼요 정말 그런 이유로 저를 싫어하는 거라면 그저 기가 막힐 뿐입니다 오빠랑 연락을 매일 하는 것도 아니고 줄창 붙어다니는 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소개팅에 장애있는 분이 나와서 당황한 게 그렇게 비정상적인 반응인가요? 사전에 그런 중요한 사항에 대해 아무 말도 듣지 못했는데도요? 저 절대 싸가지없게 굴지 않았습니다 그저 당황해서 안녕하세요? 한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가만 있었어요 그분이 상황파악 하시고 혹시 얘기 못 들으셨어요? 하셔서 네.. 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만 했어요 그러고 그분이 저도 못 들었습니다 라고 하셨는데 제가 비장애인이라는 얘기를 못 들었다는 거였어요 이미 뭔가 이상하다, 잘못됐다는 걸 둘 다 알아버렸는데 애써 아닌 척 외면하는 건 가식 아닌가요? 또 집에 가서 왜 울었냐고 하시던데 엄마가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너 별로래? 저녁 먹자고 안해? 거봐 엄마가 머리 푸는 게 낫다 그랬잖아 그러시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새언니가 나쁜 의도로 그 자리를 만들었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서 지금 머리가 중요한 게 아닌데 하면서 울컥하더라구요 이 나에게 감히 장애인 따위를 소개해줘? 이런 마음은 조금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새언니가 처음부터 장애에 대해 얘기했다고 해도 거절했을 거예요 그건 그 힘듦을 같이 안고갈 자신이 없기 때문이에요 책임지지 못할 일은 아예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요 또 그분의 장애를 보고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한 걸 결국은 차별하는 거 아니냐고 하시는데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얘기지 이성으로서는 다른 얘기 아닌가요? 물론 자연스럽게 알게 돼서 연인이나 부부가 될 수 있죠 도서관을 갔는데 사서가 휠체어를 타고 있다해서 그런 일로 놀라지 않아요 하지만 장애있는 분을 소개받았는데 거절하면 차별하는 거니까 무조건 좋다해야 합니까? 그건 차별하지 않는 게 아니라 동정하는 거죠 4. 오빠 걱정을 많이 해주시는데 결국 이혼하기로 했어요 미쳐버릴 것 같대요 그냥 빨리 다 끝내버리고 싶대요 부모님이란 저는 한번에 팍 터뜨리고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데 오빠는 점점 더 힘들어해요 사돈댁에서 우리가 무조건 죄인이다, 입이 열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다, 집에 가둬두는 한이 있더라도 댁에 얼씬도 못하게 하겠다고 하셔서 일단은 믿고 안심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오빠가 고민 끝에 소개팅 나오셨던 그분께 연락을 했어요 직접 만나서 사과드리고 싶다고요 다행히 만나주셨어요 그리고 오빠가 집에 와서 얘기해주는데 그분 말씀이 사과 받으려고 나온 게 아니다 사과는 저번에 ##씨한테 받은 걸로 충분하다 안 만나겠다 하면 ##씨 오빠분이 마음 안 편할 것 같아서 나왔다 전 괜찮으니 마음쓰지 마시라고 세상에 그런 일을 당하고도 오히려 저희 오빠 마음을 배려해주셨어요 그런 분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오빠가 꺽꺽거리면서 우는데... 글 내린다면서 또 얘기가 길어지고 말았네요 일면식도 없는 저를 걱정해주시고 힘내라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편이 졸혼을 하재요
고1딸이 있고 중2 아들 있습니다. 첫 아이 가졌을 때 저는 퇴사를 했고 그 후 쭉 전업주부입니다. 그러나 결코 먹고 논게 아닙니다. 아들 딸 핏덩이때 부터 혼자 키웠고 작년에 돌아가신 시아버지 암 수발 7년을 들었으며 아버님 돌아가신 후 어머님 수술까지하셔서 저희집에 모셨습니다. 이 모든게 다 지나니 이제 졸혼 하쟤요. 자기가 돈 벌어오는 기계냐며 이제 자기가 번 돈 자기가 마음껏 쓰며 살고 싶데요. 한푼 두푼 모아서 산 이 집에서 저더러 나가랍니다. 지가 벌어 샀다구요. 너도 나가서 제발 돈 한번 벌어서 살아보라고…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아냐 합니다. 저는요? 이제 지는 수발 들 아버님도 안계시고 어머니 병수발도 끝났는데… 저는 그럼 니도 수발 들어봐라 할 대상이 없습니다. 애들도 더이상 젖먹이가 아니며 잠도 못자고 미친년처럼 뼈 삯아가며 어르고 달래던 시절이 끝났는데. 저는 너는 그럼 뭘 해봐라고 해야 하나요? 나 진짜 먹고 논 적 단 한순간도 없었고 오히려 밖에 나가 맘편히 집안일따위 신경 안쓰고 돈만 버는 남편이 부러웠는데… 이제와서 저더러 나가서 혼자 벌어 먹고 살랍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미친놈인가여 시아버지 시어머니 병수발을 몇 년을 했는데 뭐요??????? 사람탈을 쓰고 저러면 안되는 거 아닌가여ㅠㅠㅠㅠ
가장 뻔뻔한 새
주로 호주와 파푸아 뉴기니에 서식하는 바우어새는 독특한 구애 행동으로 유명합니다. ​ 바우어새의 수컷은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서 몇 달에서 길게는 1년까지 공을 들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독특한 행동을 하는데 바로 호화로운 둥지로 만드는 것입니다. ​ 약 1m 높이의 둥지를 지어놓고 각종 열매, 꽃, 조약돌, 조개껍데기 등을 물어와 내부를 꾸미고 과일즙으로 외벽을 칠하기도 하며 장식물이 시들거나 낡으면 새로운 것으로 계속해서 바꿔주기도 합니다. ​ 이 때문에 바우어새는 숲 속의 작은 정원사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 그러나 암컷을 유혹하려는 목적을 모두 달성한 뒤에 수컷은 돌연 폭군으로 돌변합니다. 암컷을 부리로 쪼아대며 못살게 괴롭히고 새끼도 돌보지 않고는 새로운 짝을 찾는다고 합니다. ​ 이러한 모습을 보곤 조류학자들은 ‘가장 뻔뻔한 새’라고 별칭을 붙여주기도 했습니다. 친구, 연인, 가족 등 어떤 관계도 항상 처음처럼 뜨거울 수만은 없습니다. 특히 오래된 관계일수록 서로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당연함이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 그렇게 소중함마저도 점점 무뎌지고 서로 소홀해지면서 어렵게 맺어진 인연이 허무하게 끊어지기도 합니다. ​ 인간관계에서도 권태가 찾아올 때면 지난 세월 동안 받은 배려와 격려를 생각해보세요. 지금까지 옆을 지켜주고 있는 인연에 대해 감사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 # 오늘의 명언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 – 오노레 드 발자크 – ​ =Naver "따뜻한 하루"에서 이식해옴.... ​ ​ #초심
[부산IN신문] 청년창조발전소 꿈터플러스, 청년 오픈 소셜 ‘소굿(So good)’ 프로젝트 참여 단체 모집
부산 금정구 소재 청년창조발전소 꿈터플러스는 청년 오픈 소셜 ‘소굿(So good)’ 프로젝트에 참여할 청년단체를 5월 3일까지 모집한다고 밝혔다. 소굿(So good) 프로젝트는 2021년 소띠 해를 청년들이 사회 참여 확대와 역량 강화의 한 해로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기획됐다. 청년들이 스스로 모임, 교육, 창업 등 다양한 활동을 주체적으로 펼칠 수 있도록 돕는 플랫폼으로 고안되었다. 청년 운영자는 스스로 프로그램을 제안하여 기획 역량을 높이고, 청년 참여자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재능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더불어 청년 운영자의 주도와 청년 참여자의 활동이 서로 시너지를 내며 지속 발전적인 상호교류 관계망이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지원대상은 프로젝트 운영을 희망하는 만 39세 이하 청년으로 구성된 부산시 소재 청년단체, 청년기업, 청년법인 등이다. 3~5개 프로젝트를 공모·선정하여 1개 프로젝트 당 홍보비, 진행비, 전문가 활용비 등 300~500만원을 지원한다. 관심 있는 청년 단체 또는 기업은 5월 3일까지 꿈터플러스 홈페이지 공고문을 확인 후 꿈터플러스 방문 또는 이메일(7104920@naver.com)로 접수하면 된다. 모집을 거쳐 5월 중 오리엔테이션을 시작으로 본격 운영될 예정이다. 꿈터플러스 관계자는 “청년 오픈 소셜 ‘소굿(So good)’ 프로젝트가 청년 운영자에게는 전문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청년 참여자에게는 현실적인 현장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달받아 진로를 설계하고 현장을 경험할 수 있는 교육 및 네트워크의 장을 제공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자세한 사항은 청년창조발전소 꿈터플러스 운영사무실(051-710-4920~3)로 문의하면 된다. #청년창조발전소 #꿈터플러스 #소굿프로젝트 #sogood #청년단체 #청년기업 #프로젝트 #청년네트워크
한국이 약하면 진짜 죽던 시절.gif (스압주의)
1961년, 머리카락을 가발 공장에 팔기 위해 줄을 선 여성들의 모습  울음을 터뜨리는 소녀를 같이 온 어머니가 달래고 있다. 1961년, 당시 서울역 플랫폼 모습.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띈다 6.25 전쟁을 겪지 않은 첫 세대인 1954년생이 초등학교 (당시 명칭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한복을 차려입은 어머니들의 손을 잡고 교정으로 향하는 모습. 1962년 경상남도의 장날 풍경 짐을 머리에 이고 장터로 향하는 사람들 강원도 춘천에서 칡뿌리를 말리는 주민의 분주한 모습 1962년, 대구에서 열린 우시장 1962년, 모내기가 한창인 서울시 성동구 논현동 (현재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1동, 논현2동) 1963년, 평범한 남해 어촌의 풍경 방과 후 초등학생들이 들판으로 소를 끌고 나가 풀을 먹이고 있다. 집의 재산인 소를 배불리 먹이고 잘 데리고 오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 당시 어린 학생들에게는 중요한 임무였다고 한다. 1964년,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의 턱걸이 연습이 한창인 교정  하나라도 더 해내려는 모습의 학생. 달리기를 겨루며 체육 활동을 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방영되었다. 고무신이 닳을까봐 맨발로 운동장을 달리는 학생들과 응원하는 친구들. 영유아사망률 1000명 당 218명. (2021년 세계 최악의 영아사망률을 기록하는 우간다의 2.3배) 신생아 5명 중 몸이 약한 1명은 첫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시대였다.  아이들에게 야외 활동을 장려하여 체력과 면역력을 기르자는 표어가 방송되었다. 1964년, 한국전력 직원들이 경상북도 영양군에 전봇대를 설치하고 있다.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가정까지 전기가 들어가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보릿고개 넘기기 운동'이 한창인 시골의 분주한 모습 전국적으로 문맹 퇴치를 위한 운동이 시작되었다. 경북 영덕군에 내려온 대학생들이 글을 모르는 주민들을 모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전국적으로 늘상 문제가 되었던 쥐떼 해결을 위해 '쥐잡기 운동'이 시작되었다. 잡힌 쥐를 보고 속이 시원한듯 웃는 어른들 1965년, 춘천 수력 발전소가 완공되었다. 산 능선에 올라선 시민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당시 고등학교의 수업 모습 교련 시간에 M1 총기 분해조립, 맨손으로 쇠봉 타기 연습을 하는 고등학생들. 전국에 큰 비가 내렸다. 잠긴 집과 들을 보고 망연자실한 사람들, 머리를 다친 동생을 돌보는 형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중부지방에서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청주 시민들이 힘을 합쳐 복구에 나서고 있다. 흙을 퍼내는 아버지들과, 갓난아이를 내려놓고 삽을 들어 복구를 돕는 어머니들 범람 위기의 청주 무심천에서 청주공업고등학교 학생들과 교사, 시민들이 힘을 합쳐 제방을 손보고 있다. 교복을 입은 청주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 삽을 들고 수해 복구를 지원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에서 필리핀이 2배 이상 앞서던 시절,  거액을 들여 초빙한 필리핀 경제사절단이 내방했다. 일렬로 도열한 한국 관료들의 90도 인사와 환대에 경제사절단 단장인 필리핀 농림상 로드리게스와 필리핀 사절단이 흡족하게 웃고 있다. 1965년 1월, 뉴스에서 가장 중요한 소식으로 다루었던 첫 1인당 국민소득 세자리 돌파 (110달러) 1961년 70달러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낮았던 1인당 국민소득의 증가를 새해 첫 뉴스로 꼽았다.  지나치게 과장된 그래프가 어이없지만 당시에는 매우 큰 소식이었던 모양이다. 1965년, 한국은 방글라데시를 2달러 차이로 처음으로 제쳤다.   파독 광부 예비소집에 모인 인원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고 있다. 서독 탄광으로 떠나기 위한 광부 모집에 최종 합격한 20대의 젊은 광부들 독일로 떠나기 전 마지막 밤. 배웅하는 가족, 지인들을 향해 거수경례를 올린 파독광부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일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다 한복을 입고 가족들을 향해 손수건을 흔드는 파독 간호사들 이륙 준비를 하는 여객기. 공항에 모인 시민들과 가족들이 파독 광부, 간호사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며 손을 흔들고 있다.  독일에 도착한 파독 간호사들이 거동이 불편한 독일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40도가 넘는 온도, 지하 1200미터가 넘는 탄광의 끝자락에서  11시간의 작업을 끝마치고 나온 파독 광부들 당시 파독 광부 평균연령은 25세, 파독 간호사 평균연령은 23세였다.  (출처 : 한국직업건강간호학회) 국군의 남베트남 파병이 결정되었다. 만 38세의 나이에 맹호부대 사단장 겸 주월한국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채명신 소장(당시 38세, 6.25 참전)이 수통과 탄띠를 착용하고  출발 전 현충원에 묵념을 올리고 있다. 수도사단 맹호부대 사단장 - 소장 채명신 (당시 38세, 6.25 참전) 제9보병사단 백마부대 사단장 - 소장 이소동 (당시 38세, 6.25 참전) 해병 제2여단 청룡부대 여단장 - 준장 이봉출 (당시 39세, 6.25 참전) 1965년, 파병을 위해 도열한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맹호부대) 병력 전선으로 떠나는 제 9보병사단 (백마부대) 장병들의 결연한 표정 부동자세의 해병대 수색대 병사들 서울 시가지를 통과하는 파병 장병들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노인과  부채질을 해 주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이화여대 총장 김옥길 여사와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파병 장병들을 위해 쓴 문구가 방송되었다.  '조국 떠나 만릿길  온 겨레의 마음이  그대들의 방패가 되리  아세아 (아시아)의 최정예,  우리 국군 가는 길  오직 승리뿐이다.' 베트남 전선으로 향하는 국군 수송을 위해 36개편의 열차가 동원되었다.  수송 열차가 지나는 역, 마을 어귀마다 장병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시민들 대구역에서 잠시 정차한 수송열차. 국군 장병을 위해 기차역에서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중년 여성 한 병사가 역까지 배웅을 나온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부산항에서 승선 전, 부하들을 향해 악수하는 중대장을 바라보는 해병 소위 이학철 (당시 23세) 파월 1진 해병 청룡부대 제3대대 9중대장 김종세 대위 (중앙, 당시 28세),  박준교 상병 (왼쪽, 당시 22세), 정명국 일병(오른쪽, 당시 21세)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종세 대위: "월맹 정규군 (북베트남 정규군)이 밀림에서 미군도 위협할 만큼 맹위를 떨치고 있고, 국군 장병들에 대해서 '단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 할 것'이라고 비방하고 있지만   산악에서 단련된 소부대 전술, 체력과 같은 신체능력, 실제 전투에서의 호전성은 우리 병사들이  크게 앞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코 두렵거나 하는 마음은 들지않습니다." 마지막 승선 인원인 맹호 혜산진부대 소속 소대장 소위 최정길(당시 24세)이  부산시 부시장을 비롯한 환송 인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당시 국내 최대의 여성단체 한국 부인회 회원들이 맹호부대 장병들을 환송하고 있다. 떠나는 장병들을 환송하는 부산 시민들과 수송선 난간을 가득 메운 장병들. 출발하는 수송선. 부산 시민들의 응원에 군가로 화답하는 장병들 멀어지는 부산항을 바라보는 해병 병사의 모습 1인당 국민소득 110달러 시절. 성대한 위문공연도, 거창한 위문품도 없었지만  시민들은 장병들의 무사귀환을 진심으로 빌어주었다. 첫 국내 기술로 만든 라디오가 시판되었다. 납땜질에 열중하는 어린 여공들 '벌거벗은 산에 나무를 심자' 식목일에 나무를 심기 위해 산으로 향하는 국민들. 남녀노소 민둥산에 나무를 심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가을 날, 고등학생들이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동장 흙바닥 위에서 유도 대결을 펼치고 있다. 1967년, 제2회 전국학생씨름대회. 씨름 프로대회가 존재치 않던 시절,  (씨름 프로대회는 80년대) 전국 고등학교에서 힘 좀 쓴다는 학생들이 모였다.  다른 지역 학생들의 경기를 살펴보는 서울 고등학생들. 치열한 결승전, 경북 영신고등학교 학생이 우승을 차지했다. 강원도 삼척시에 유례없는 대폭설이 내렸다. 지붕에 쌓인 눈을 치우는 주민들. 생활 체육으로 나날이 인기를 더해가는 씨름이 소개되었다. 씨름 대회를 구경하는 수많은 인파들. 국군 장성들이 베트남 전선을 방문했다. 전쟁터에서 경계근무 중인 해병 병사의 덥수룩한 수염을 만지며 웃는 육군참모총장. 주월 맹호부대 병사들이 시멘트로 만든 역기로 밀리터리 프레스를 하며 체력 단련을 하고 있다. 대다수가 임관과 동시에 베트남 전선으로 파병될 ROTC 5기생 생도들이  대간첩작전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교관으로부터 산악 게릴라전 교육을 듣고 있다. '웃지않는 한국 해병들' - 미국 UPI 통신 보도 1967년, 짜빈동 전투에서 중대 병력으로 월맹 정규군 정예 1개연대 병력과  (호치민 휘하의 월맹군 제2사단 1연대) 맞붙어 승리한 해병 11중대 장병들이  미군의 초청을 받아 계단 위에서 미군의 위문 공연을 지켜보고 있다.  선글라스를 낀 정경진 대위 (당시 28세, 중대장)와 김용길 중사 (좌측, 당시 26세),  중앙에서 카메라를 노려보는 어느 청룡부대 11중대 병사가 카메라에 담겼다. 서울 운동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 복싱 세계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인 '철권' 김기수 (당시 27세)가 도전자 프레디 리틀 (미국)과 15라운드까지 맞붙고 있다. 이를 악물고 덤비는 김기수의 기세에 밀리는 프레디 리틀 기립박수로 환호하는 시민들 타이들 방어에 성공한 김기수(당시 27세)의 기념촬영 1968년, 부산시 풍경 1968년, 서울의 모습 하늘에서 본 1968년 서울 첫 개통한 아현고가의 모습. 자전거와 자동차가 함께 다니고 있다. 1969년, 한강철교 복구공사, 작업에 열중하는 현대건설 노동자들의 모습 서울과 부산을 잇는 한반도 최초의 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공사 현장의 모습 부족한 중장비 대신 인부들이 달라붙어 바위를 깨고 길을 닦고 있다.  1969년, 나룻배들이 경부고속도로 낙동강 방면 공사에 쓰일 석재를 운반하고 있다. 1969년 연말,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서 '포항제철소' 공사가 시작되었다. 허허벌판인 영일만의 모습 1970년 1월 1일, 영일만 앞바다에 떠오르는 일출 삼천만이 힘을 합치면 역사는 바뀐다는 내용의 표어가 방송되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삼천만 하나된 힘, 역사를 바꾸리라.' 한국 평균 나이 23세 시절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