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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진, 4년 전 4등 오늘은 세계 1등

오늘 (12일, 한국시간) 한국 여자 양궁대표팀의 장혜진 선수가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의 첫 2관왕 주인공이 됐습니다.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오른 장혜진은 애국가가 나오는 동안 눈물을 보이기도 했는데요, 양궁 여자 대표팀의 주장인 장혜진 선수는 4년 전 런던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4위’에 머물러 아쉽게 출전권을 놓쳤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 절치부심한 장혜진은 양궁 여자 대표팀의 주장으로 생애 첫 올림픽에 출전해 준결승에서 강력한 우승후보 기보배를 꺾으며 올림픽 2관왕을 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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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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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도 솜씨도 맘씨도 이쁘네요
메달만 못땃다뿐이지 세계에서 4위도 정말 대단했던거 아님??? 제가 사위도 해드릴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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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성범죄 처벌
조선시대는 성범죄에 대해서 지금보다 관대했으리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도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요. 조선은 기본적으로 사대를 하는 나라였으므로 법에 관련해서는 명나라의 체계와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성폭행 사건의 경우 은 '대명률(大明律)' 범간(犯奸)조의 적용을 했다고 합니다. * 강간 미수 : 장 100대에 3천리 유형(유배) * 강간 : 교형(絞刑·교수형) * 근친 강간 : 목을 베는 참형 지배층에 더욱 엄격한 처신을 요구했다. - 예 : 중종 23년(1528) 벼슬아치인 도백손이 과부를 강간하자 중종이 "상인(常人, 상민)이 강간하는 것도 옳지 않은데, 더구나 사족(士族)이겠는가?"라며 엄벌을 지시 * 화간(和姦,부부가 아닌 남녀의 관계) : 남녀 모두 장 80대(장 80대는 남녀 모두에게 견디기 힘든 벌이었으므로, 여성은 강간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 경우 여성의 처음 의도가 판단 기준이었다고 합니다..) - 예1 : 세종 12년(1466) 정4품 호군 신통례가 관비 고음덕과 여러 차례 성관계를 가졌다고 합니다. 고음덕은 "처음에는 거절하여 소리 내어 울었다."는 이유로 무사하고 신통례만 처벌받은 것이 이런 경우이다. * 이 사건처럼 피해여성의 신분은 중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예2 : 중종 26년(1531) 이팽령이 사노 봉원의 딸(순금)과 관계했다고 합니다. 봉원의 아우가 중매한데다 관련자가 모두 화간이라고 증언했지만, 순금이 "나는 여인이라 거역할 힘이 없어서 이틀 밤을 함께 잤다."고 답하는 바람에 강간으로 처벌받았다고 합니다. * 피해여성의 신분은 중요하지 않음, 정당방위 적극 인정합니다. : 세종 15년(1469) 좌명 1등공신 이숙번의 종 소비(小非)는 강간하려는 주인의 이마를 칼로 내리쳤으나 무죄 방면합니다. * 기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폭력이 없었어도 여성의 동의가 없었으면 강간으로처벌 * 피해 여성이 처벌을 원하는지 여부는형량의 참작 대상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 절도 도중 강간까지 한 경우는 참형 * 유아 강간은 예외 없이 교형이나 참형 성범죄에 관련된 몇몇 왕들의 일화 태종 “사노 잉읍급이 11살 어린아이를 강간했습니다.” 어느날 신하가 고하는 성범죄 소식에 태종은 신속한 판결을 내립니다. 잉응급을 교수형으로 사회에서 사라지게 합니다. 또다른 일화는 판사(현재의 차관급) 이자지 부부의 딸인 내은이란 딸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부모 둘이 모두 사망해서 3년상을 행하려 하는데 이때 이집의 노비였던 실구지 형제와 그의 처남등 3명이 내은이를 집으로 끌고 가 손발을 묶고 성범죄를 저지릅니다. 태종은 당시 이 보고를 듣고 교수형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겨 그들 모두를 능지처참형으로 사회에서 사라지게 합니다. 세종 한 앳된 부인이 편복 차림으로 여종을 거느리고 여종 2명을 데리고 성균관 옆 냇가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곳에서 옷을 홀랑 벗고 목욕을 하고 있던 생원 최한경이 갑자기 뛰어나가 여인을 쓸어안았습니다. 부인이 완강히 저항합니다. 계집종이 “우리집 안주인이시다”라고 외칩니다. 최한경과 함께 목욕을 했던 동료 두 명이 여종들을 때려 쫒아냅니다. 세 명은 완력으로 여인을 눌러 옷을 벗기고 욕 보이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큰 일을 당할 뻔했던 여인은 사헌부에 최한경을 비롯한 유생들을 ‘강간미수죄’로 처벌해달라고 고소합니다. 조사가 시작되자 최한경은 "희롱한건 사실이지만 강간하려는 마음은 없었다.”고 변명하지만 세종은 적절한 선에서 처벌을 합니다. 바로 곤장 80대 형을 내립니다. 조선시대 성범죄에서는 교수형이나 참형같은 극형도 있었지만 부수적으로 이렇게 곤장형도 있었다고 합니다. 근데 곤장형이 너무 가벼운 처벌이 아니냐고 생각할수 있는데요. 곤장은 십자모양으로 된 형틀에 죄인을 엎드리게 묶어놓고 나졸이 서서 저런 몽둥이로 볼기짝을 내리는 형벌이었다고 합니다. 곤장은 듣기와는 다르게 몇대만 맞아도 엉덩이 살이 터져나가고 곤죽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로 인한 평생 흉터 + 트라우마+ 신체불구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맞는 도중 죽는경우도 있고 다 맞고 회복중 장독이 올라 사망하기도 하는 무지막지한 형벌이었다고 합니다. 양반의 경우 성범죄로 처벌시에 사회적으로는 매장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성종 오늘날로 치면 군수를 지낸 전직 공무원 황우영이 이란 양반이 반가의 부인인 반씨의 집에 들어가서 강간하려다가 반씨의 어머니와 여종의 저항에 강간미수에 그칩니다. 당시 사헌부에서 이 사건을 거론하며 "죄질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라고 고합니다. 이 보고를 들은 성종은 화우영의 직첩을 거두고 영원히 등용하지 않고 3천리 밖으로 유배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최악의 변방인 회령의 관노(노비)로 강등시켜 쫓아냈다고 합니다. 또 요즘의 대통령 사면에 준하는 대사면령에서도 성범죄만큼은 제외시킬정도로 강한 의지를 보입니다. 또다른 성범죄 사건으로 처삼촌의 조카딸을 강간한 최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실수로 사면을 받아 풀려납니다. 이 사실을 들은 성종은 전가사변을 시켰다고 합니다. 전가사변이란 죄인의 처자식까지 전부 변방중에 변방으로 강제로 쫓겨나는 처벌이라고 합니다. 이런 예는 강력한 처벌을 받지만 경우나 신분에 따라 요즘처럼 관대한 처벌을 받는 경우도 당연히 있었다고 합니다. 왕족이라든지 상위1% 권력층일 경우 처벌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조의 경우에는 달랐습니다. 선조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시대 임금으로 가장 안 좋은 말을 많이 듣는 임금입니다만 성범죄의 경우 자기 친아들을 강간죄로 처벌합니다. 당시 선조는 “이보의 소행은 차마 형언할 수 없다. 여러차례 살인을 했고~오직 마음을 태우고 부끄러워 할 뿐이었다.~오늘 빈전의 곁 여막(무덤을 지키려고 옆에 지어놓은 초가)에서 제 어미의 배비(陪婢)를 겁간했으니 경악을 금할 수 없다. 국가의 치욕과 내 마음의 침통함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자식을 둔 것은 곧 나의 죄로서 대신들을 볼 면목이 없다. 다만 내가 차마 직접 정죄(定罪)할 수 없으니, 유사로 하여금 법에 의해 처단하게 하라.” 신하들이 “골육 사이의 정이 있으니 화를 참으시라”고 상주했지만 선조 임금은 단호합니다. “상중에 백주대낮에 궁인(宮人)을 겁간한 자식을 용서할 수는 없다.”고 하며 아들 순화군을 유배형과 동시에 녹안에 처한다고 합니다. 유배형은 강간죄에 대한 처벌이었고 녹안은 거기에 낙인을 찍는 것이라고 합니다. 현대기준으로는 전과가 남는것이죠. 왕자신분으로 성범죄 전과가 남는다는것은 얼굴을 못들고다닐정도로 치욕적인 일이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죄를 짓자 아버지가 나서서 가중처벌을 해 처벌을 마무리합니다. 조선시대 성범죄 처벌은 기본이 곤장 80대~ 100대 상위층인 양반은 사회에서 완전매장 왕족이라 할지라도 낙인 ,참수, 능지처참, 교수형, 유배, 노비전락등 현대보다 훨씬 강력한 처벌을 보여줍니다. 성범죄에 관대한 우리 사회의 그릇된 인식은 조선이 아니라 일제 때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일제의 유산인 현재의 성범죄 인식을 조선시대인들의 엄격한 인식으로 되돌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성범죄 처벌이 너무 관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 https://m.blog.naver.com/ghshffnfffn1/221961542988 조선시대만도 못한 성범죄 처벌 현황... 이게 나라냐... 성범죄자들한테 인권이라는게 존재하냐고 다른 나라는 성범죄, 특히 아동 관련 성범죄자는 인간 취급도 안 하던데 우리나란 대체 왜.... 에휴........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은 미국인
동해에 고래가 많이 잡힌다는 소문을 듣고 포경을 하러 온 미국 선원들이었음. 조선 기록 다음에 미국인들 증언도 있어 1855년 [철종 6년] 7월 2일 - 철종 어진 강원도 통천군 임도면 남애면 존위(尊位) 김철이, 후망감관(候望感官) 이완백 등이 보고했다. 술시[저녁 5-7시] 경에 이양선 작은 배 한 척이 풍랑에 떠밀려 거의 모두 파괴 되었는데 이양인 4명이 겨우 죽음을 면하고 기어서 육지에 올라 왔으므로 동네에서 잠시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고를 받은 현감이 남애진(현재의 북한 지역, 강원도)에 달려가 먼저 김철이 등을 불러 당초에 상륙한 곡절을 상세히 물었더니, 그들이 말하기를 근래에 장마가 져서 비가 오지 않은 날이 없고 풍랑이 크게 일어 해안 주민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고 있는데  본진 앞바다에 갑자기 작은 배 한척과 사람들이 함께 표류하다가  배는 돌에 부딪혀 파쇄 되고 사람은 간신히 잠수하여 육지로 올라온 자가 4명이었다고 하였다. 이는 바다를 지나가던 상선이 침몰한 것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서 보니 그들은 곧 이국인이어서 더욱 놀랍고 괴이하여 문답을 해보려고 하였더니 언어가 불통하고 또 필담(글로 대화)을 해보자 했으나 문자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머리를 숙이고 울면서 구조를 바라는 모양을 나타내는 것 같아서 그들 4명을 일제히 불러 이르게 하여 보니, 몸의 생긴 모양이 혹은 크고 혹은 작아 모두 우리나라 사람과 서로 닮았다. 그 중의 한 사람은 두발의 빛깔이 검고 길이가 세치 정도 였으며 얼굴 빛깔은 반홍 반백이었다. 수염은 짧고 콧마루는 높고 눈동자는 푸른색이었다. 오른쪽 팔뚝 위에 밧줄을 풀어놓은 것 같은 모양의 문신을 하고 있었다. 상의는 속에는 흰무늬의 비단 저고리를, 밖에는 녹색 옷을 입었고 하의는 검은 무늬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검은 모자를 쓰고 발에는 검은 가죽신을 신고 있었다. 한 사람은 위에서 말한 사람과 비슷했으나 수염이 없었다. 모두 의복에는 단추를 달아 풀고 끼우게 하고 있었다. 처음에 말로 심문하였더니 모두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을 하였고, 다시 한자와 한글을 써서 보였더니 역시 서로 통하지 않았다. 다만 손, 발, 입 및 눈을 놀려 형용하였는데 바닷가에 있는 대선[大船]을 가리키면서 세 손가락을 우뚝 세워 세 돛 범선의 형태를 나타내고 입을 오무려 숨을 내 뿜어 바람이 전복한 모양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모래위에 엎드려 눈을 감고 사람이 죽은 시늉을 하고 땅을 파고 옷을 묻고 울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이는 틀림없이 동료가 익사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남방을 가리키며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것은 고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건져낸 파선의 집물[什物]은 일일이 조사했는데 판목은 산산조각으로 파쇄 되었다. 소지품은 지남철 한 개, 쇠도끼 한 개, 한글도 범자(산스크리트어)도 아닌 글이 당지(唐紙)에 책자 5권 및 의복 등물이 있었는데, 모두 숫자를 맞추어 조사해 보고 봉하였다. 이 강원 감사는 장계에서 이와같은 내용을 밝힌 뒤에 역관을 파견하여 심문하고 배를 만들어 줘 이들에게 다시 바닷길로 귀향시키는 문제를 조정에 품의하였다. 그러나 조정은 이들을 이양인들이 많다는 북경을 통하여귀향시키기로 하였다. - 19세기 선박의 모습 조선인들은 몰랐겠지만 이들은 사실 난파 선원은 아니었고,  - 도망에 사용된 작은 보트가 난파된 건 맞긴 함 미국의 최대 포경 기지인 '뉴 배드포드 항' 소속 포경선 '투 브라더스 호'에서 도망친 선원들이었음. - 미국의 기록에서 확인 가능  당시 선원들의 삶은 너무 고달파서 견디지 못한 선원들이 도망친 것  <도망친 선원들의 명단> 멜빌 켈시 23세 토마스 맥과이어 21세 데이비드 번스 20세 에드와드 브레이리 18세 - 19세기 미국 선원들의 모습 아래는 당시 미국 선원들이 직접 적은 글이야. (도망 선원 중 제일 연장자, '켈시'의 증언) 우리가 '투 브라더즈 호'를 타고 1854년 6월 13일 미국 '뉴 베드포드 항구'를 떠나 북태평양에서 일년간 조업을 하다가 1855년 6월 조선해역으로 이동했다. 우리 배가 조선 연안에 접근했을 때 위도 40도선에서 다른 3명과 함께 탈출했다. 우리가 30일간 머무른 마을에서 원주민들(조선인)은 우리의 짐을 꾸리고 우리를 말에 태워  우리와 함께 국경으로 향했다. 거기서 우리는 청나라 관리들에게 인도 되었고 우리는 수레를 타고 북경으로 갔다. 북경에는 약 20일간 머물렀다. 러시아 외교관들(정교회 선교사들)이 우리를 찾아와서 보고  우리의 처지를 청의 황제에게 잘 설명해주어서 귀국 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51일전에 북경을 떠났다. 러시아인들이 우리들에게 말하기를,  황제가 우리들에게 상해로 가는 여비로 쓰라고 은화를 하사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은화를 우리는 한 푼도 보지 못했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거의 굶어 죽을 뻔했다. 먹을 것을 제대로 주지도 않아서 우리는 북경까지 오면서도 청의 호송 관리들과 싸움질을 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물을 원했으나 그들이 본체만체 했기 때문이다. 중과부적이던 우리는 그들에게 호되게 두들겨 맞았다. 우리 네 명은 타던 배에서 선장과 항해사들에게 내내 학대를 받다가 참을 수가 없어서 탈출했다. 생필품은 턱없이 부족했고 먹을 것도 제대로 얻어먹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벌로서 선체에 페인트 칠하는 고된 일을 자주해야 했다. 걸핏하면 선장의 구타를 당해야 했다. 우리가 불평을 하면 적게나마 주었던 음식물조차 빼앗아 가져가 버리고 조금도 주지 않았다. (선원 '맥과이어'의 증언) 1855 년 6월26일 부로튼 만 맞은 편의 타타르(조선) 연안에서 우리 네 사람은 본선의 보트 1척을 탈취하여 탈출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남쪽으로 향하여 갔는데 7월1일 조선연안에서 상륙할 때, 우리의 보트가 부서졌다. 해안에는 원주민들(조선인)이 있었으며 그들은 우리를 잘 대우했고 의복과 음식을 후하게 주었다. (선원 '번스'의 증언) 우리는 위도 약 40도 동해 조선 해안 근처에서 6월26일 밤 12시에 포경선 투 브라더즈를 떠났다. 우리는 배에서 보트 한 척을 훔쳐 타고 6일 동안 남쪽으로 갔다. 그때 광풍(狂風)이 불어서 그날 밤 우리는 육지에서 떨어진 곳에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 상륙했는데 상륙 도중에 보트가 부서졌다. 우리를 발견한 원주민들은 우리를 잘 보살펴 주었다.. 조선인들은 우리를 인간답게 대우하였다. 하멜 같은 경우는 사실 운이 무척 나쁜 케이스 였고 당시 조선은 청에 대한 전쟁을 준비 중이었기에, 이들을 중국으로 놓아줄 수 없었음. - 이들이 조선이 전쟁 준비 중이라는 것을 발설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  하지만 본래 조선은 표류자는 후하게 대접해서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전통이었음 (柔遠之義 : 멀리서 온 손님을 잘 대접하다) 조선은 이후(10년 뒤, 1865년)에 표류한 미국인들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줌  출처 : 쭉빵카페 모야^^ 조선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아휴 우리 조상님들 따뜻한 것 좀 보소~~~ 저 외국인들 인생은 엄청 파란만장하네ㅇㅇ 나였음 죽는 그 날까지 내가 말여... 그 시절 배에서 탈출해서 동양의 작은 나라에.... 구구절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