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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 사인회에서 진상이 되지 않는 방법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갔다 와서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는 곳이 있다. 바로 팬 사인회다.
팬 사인회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를 가장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현실감 없이 화면 속에서만 보던 대상이 내 눈 앞에 살아 숨 쉬고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앉아 있다. 이건 시간을 멈춰버리고 싶은 인생의 역대급 순간이다.
그들은 내게 다정하게 웃어주고 친근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운이 좋다면 악수를 하거나 하이파이브를 할 수도 있다. 연예인을 내 분신처럼 열렬하게 좋아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당장에라도 건물 한 동을 맨손으로 뽑아버리고 싶을 만큼 설레고 떨리는 이 감정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팬 사인회는 팬에게는 물론 스타에게도 각별한 시간이다. 나를 좋아하는 수많은 팬들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며, 체면 불구하고 온 몸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팬들의 모습에 벅찬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모두에게 행복한 추억이 되어야 할 이 이벤트가 요즘엔 기획사 관계자들로부터 시한폭탄 취급을 받고 있다. 왜일까?

# “만지지 마세요”라고는 할 수 없는 이유

팬 사인회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슬픈 온도 차가 있다. 팬으로서 좋아하는 연예인 앞에 선 입장에서 그는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지만,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 노출되는 연예인들 입장에서는 팬이란 이름으로 자신 앞에 선 이가 낯선 상대라는 점이다.
그래서 팬들은 내겐 너무 가까운 존재인 스타에게 반가움을 표하고 싶고 만져보고도 싶지만, 연예인 입장에서는 낯선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만지는 상황이 당황스러울 수 있다. 아무리 그게 팬이라도 말이다.
그래서 가벼운 스킨십 이상으로 얼굴을 만지거나, 꼬집거나, 불쾌감을 줄 수 있는 행동에도 양 쪽의 입장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팬으로서는 단순히 좋아서 한 친근함의 표시였대도, 받는 연예인은 부담스럽고 거북한 정도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팬들에게 감사함을 표시하는 자리고, 악수를 하거나 하이파이브를 하는 등의 스킨십에 대해서는 다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해요. 그런데 그런 타이밍이 아닐 때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스킨십에 깜짝 놀랄 때가 많죠. 누군가를 막 만진다는 게 친구들 사이에서도 예의 있는 행동은 아니잖아요.” (기획사 관계자 A)
문제는 유쾌하게 악수, 하이파이브, 손깍지를 요청하고 조심스럽게 포옹까지 해주던 사인회 현장에서 점점 무리한 요구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직접 얼굴을 만지게 해달라든지 볼을 꼬집게 해달라는 식이다. 더한 것들도 물론 있다.
연차가 꽤 있는 몇몇 남자 아이돌 멤버들이 오랜 팬들과의 신뢰가 있어 공연장이나 사인회장에서 얼굴을 내어준 일이 종종 있었는데, 팬들 역시 이들의 호의에 아기 다루듯 조심스레 얼굴을 쓰다듬으며 서로에 대한 애정을 돈독히 쌓아가는 사례로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점점 팬들에게 얼굴을 내주는 것이 신뢰의 상징이 됐는가는 알 수 없지만, 최근 들어 스타를 향한 팬들의 스킨십 요구가 과해지고 있다는 반응이다. 얼마 전에는 사인회에서 얼굴을 꼬집히는 걸그룹 멤버의 영상이 퍼지기도 했다.
“걸그룹의 경우엔 그런 식으로 멤버들을 직접 만지고 싶어 하는 팬들이 굉장히 많아요. 저희는 제제를 하고 사전에 말씀을 드리는데도 지켜주지 않으시죠. 신경 쓰고 있지만 전부를 막기는 어려워요. 여자애들 볼을 터치한다거나 얼굴을 꼬집는 건 사실 좀 위험하잖아요. 무방비 상태에서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고요. 걱정이 많이 되죠.” (기획사 관계자 B)
이런 상황에서 연예인들은 결코 싫다는 내색을 할 수 없다. 사방에는 자신만을 주시하고 있는 고화질 카메라들이 빨간 불을 켜고 자신의 표정을 녹화 중인데다가, 촬영이 아니더라도 나를 좋아하는 팬이라는 사람이 만지는 것에 대해 싫은 내색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극한 직업이라는 말도 있더라고요. 예쁘게 화장도 하고 왔는데 얼굴을 만지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연달아서 팬들이 들어오니 계속 웃으면서 인사하고 보내드리는 방법 밖에 없어요. 돌아섰는데 싫은 표정을 했다가 찍히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요.” (기획사 관계자 C)
물론 팬 입장에서도 작정하고 만지려는 게 아닐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더 만지고 싶고 오래 보고 싶은 건 당연한 마음일 수 있다. 누구보다 그 스타를 아끼고 애지중지하는 게 팬들이니 악의도 없을 것이다. 담당자들, 스타들도 그 점을 믿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거절할 수 없는 거다.
“팬으로서도 사람인지라 순간의 실수로 무례가 되는 걸 수도 있잖아요. 워낙 좋아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만져보고 싶고, 안아보고 싶을 수 있어요. 그 부분에 대해서 너무 채찍질 한다기보다는 서로 신경 써서 조심해줬으면 하는 거죠.” (기획사 관계자 B)

#옛날 팬사인회와 요즘 팬사인회

이렇게 요즘의 팬사인회 분위기가 점점 더 과감해지고 있는 이유로는 팬사인회 문화가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첫 번째는 팬사인회에 필요한 비용과 노력이 더 커졌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선착순 XXX명에게 사인을 해준다는 공고가 뜨면 밤을 새서라도 줄을 서는 경우가 있었는데, 요즘 줄을 서서 사인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배우들이 브랜드 광고모델로서 팬사인회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팬사인회가 아이돌 멤버들을 대상으로 열리는데, 이 팬사인회에서는 사전에 당첨된 사람만이 사인을 받을 수 있다. 그 당첨 조건은 추첨이고, 추첨을 할 수 있는 응모권은 그 가수의 음반에 들어있다. 음반 구매에는 물론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인기가 많은 가수일수록 많은 수의 응모권을 넣어야 당첨 확률이 높아지는데, 그러기 위해 팬들은 더, 더, 더 많은 음반을 구입한다. 이렇게 구입된 수십에서 수백 장의 음반의 처리 방법은 논외로 하고, 여차저차 당첨권을 거머쥐어 팬사인회에 오게 된 팬들은 굉장히 큰 비용과 시간, 노력을 들여서 몇 십 초 남짓한 시간을 얻게 된 셈이다. 그래서 이들은 어렵게 간만큼 수고로움이 헛되지 않은 좋은 추억을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도 크다.
“솔직히 사인회를 100명에서 150명 하는데 당첨이 쉽지 않아요. 앨범을 엄청 많이 산 팬들이 오니까 보상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없진 않을 거라고 봐요. 이렇게까지 해서 왔는데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고, 악수도 하고 싶고 손깍지도 끼고 싶은 거죠. 그 욕심이 점점 과해지면 문제가 되는 거고요.” (기획사 관계자 A)
두 번째는 사인회에 시간제한 대신 인원 제한이 생겼고, 연예인과 팬들이 더 친밀하게 소통하는 분위기가 된 덕이다. 줄을 서던 시대에는 정해진 시간 안에 최대한 빨리 사인을 해서 더 많은 팬들을 만나는 게 미덕이었다면, 요즘은 정해진 인원의 팬들 개개인에게 가능한 정성들여 멘트를 적어주고 폭풍 팬서비스를 펼치는 추세다.
그래서 팬들은 점점 스타들과 팬 사인회를 이용한 나름의 놀이를 한다. 포스트잇에 장난스러운 질문을 던져 답변을 받거나, 장난감 반지를 끼워주며 프러포즈를 하고, 귀여운 머리띠와 목걸이를 걸어주며 즐긴다. 아이돌들은 양 손가락에 반지를 주렁주렁 끼고, 머리에 온갖 귀여운 인형이나 머리띠를 착용 한다. 기다리는 팬들은 이 모습을 촬영하며 즐거워한다. 서로가 유쾌해지는 하나의 문화인 셈이다.
“모자나 왕관, 머리띠나 장난감 반지 끼워주고 이런 거 너무 귀엽잖아요. 당사자들도 즐거워하고요. 저희도 팬 분들이 걸어주고 붙여주고 하는 것에는 제지하지 않아요. 손을 잡고, 깍지를 끼고 그 정도는 굉장히 훈훈하고 좋죠.” (기획사 관계자 B)
이렇게 더 가깝게 소통하는 스타일로 진화해가고 있는 사인회 문화였으나, 그 욕심이 살짝 과해진 요즘이 바로 우려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 믿을 건 팬들 뿐

이런 상황에서 팬들에게 직접 제지를 가할 수 있는 건 경호원들뿐이다. 그런데 이들이 특별한 감수성이 있는 팬과 연예인의 온도 차 밖에 있는 입장이다 보니 과잉 대응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몇몇의 욕심 때문에 모든 팬들이 잠재적 위해자 취급을 받고, 서로가 좋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씁쓸한 기억이 남게 되는 거다.
물론 경각심은 필요하다. 일본에서 팬에게 테러를 당한 아이돌의 끔찍한 사례가 우리나라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고 일일이 ‘만지지 마세요’, ‘옷깃 잡지 마세요’ 같은 금지 조항을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터치가 안 된다는 룰 자체를 세워버리기엔 팬과 연예인이 특별한 감정을 나누는 관계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기획사 입장에서는 지금 이 시한폭탄 같은 상황에서 팬 사인회를 없앨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연예인에게 갑옷을 입혀서 내보낼 수도 없는 일이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건 연예인도, 경호원도 아닌 팬들의 자체적인 자정 작용 뿐이라고 한다. 대책을 세운다고 해봤자 면 대 면으로 앉아있는 팬과 연예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순간적인 사고를 막는 데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팬들 사이에서도 여론이 있어요. 모두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과한 행동을 하는 팬은 팬덤 내에서 엄하게 비난을 받죠. 팬들끼리 암묵적으로 합의한 룰 안에서 서로 예의를 지켜준다면 너무 감사한 일이에요. 지금은 팬 분들이 그 룰을 잘 지켜주고 계신데, 만약 한 분이라도 본인의 만족감을 위해 그걸 깬다면 팬사인회를 진행하기란 사실상 어려워지지 않을까 싶어요.” (기획사 관계자 C)
내가 사랑하는 연예인의 기억에 어떤 존재로 새겨진다는 건 분명 멋지고 특별한 일이지만, 그리 유쾌하지 않은 기억으로 남는 것이 훗날에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진 않는다는 점을 인지해야한다.
“사실 나중에 끝나고 따로 (그런 불쾌한 요구에 대해서) ‘너무 싫었어요’라고 표현하는 친구는 없어요. 아무래도 팬들이니까요. 그렇지만 말을 하지 않아도 당황한 게 느껴지잖아요. 솔직히 팬들을 만나는 건 너무 좋은데 과격한 행동이나 부담스러운 신체적 접촉은 피해줬으면 좋겠다고들 생각 하더라고요.” (기획사 관계자 A)
연예인과 팬은 무엇으로 정의하기 애매한 특수 관계다. 그는 나를 모르지만 사랑하는 게 분명하고, 나와 직접적인 교류가 없다지만 늘 함께이기도 하다. 가족을 제외하고 아무런 대가와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서로에게 특별하다고 해서 연예인이 우리의 소유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연예인이라서 당연하게 팬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어져야 하는 것처럼, 그의 팬이라고 해서 당연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 행동을 그들도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감수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곰곰이 생각해볼 때다. 내가 내는 것이 용기인지 욕심인지, 그 행동이 서로에게 좋은 추억이 될지, 눈살 찌푸려지는 진상으로 회자될지 말이다.
*사진은 팬사인회 예시일 뿐 해당 인물은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사진 = 뉴스에이드 DB
강효진기자 bestest@news-a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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