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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의 진실을 추적하는 방법, 본론 1

조선사의 진실을 추적하는 방법, 본론 1 고종의 아관파천을 면밀히 조사하기 위해 새로운 책을 구입했다. 당시의 기록을 중심으로 진실을 찾아나가야만 그 명확한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전에 진실을 추적하는 방법이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조선이 대륙과 한반도를 포괄한 거대한 나라였고, 서세동점 근대사의 격동기에 한반도로 밀려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국민들에게는, 내가 말하는 역사가 지어낸 소설이거나 황당한 망상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명백한 역사를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사료와 기록이 검증되어야 하고, 이미 그러한 과정은 다른 여러 학자와 책들로 증명되었음에도, 한반도로 맞춰진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역사, 식민교육에 의한 식민사관으로 인해 조금 더 명확하고 설득력있는 논리와 주장이 반복되어야 한다. 그 안에서 진실을 추적하는 방법도 쓸모가 있고 의미가 있다. 명백한 기록 한 가지를 먼저 살펴보자. 다음은 정약용이 『경세유표』에서 ‘군현분예’를 기록한 첫 대목이다. 군현분예(郡縣分隸) 경기(경기)를 봉천성(봉천성)이라 하고, 다음 남쪽은 사천성(사천성), 그 다음 남쪽은 완남성(완남성), 또 남쪽은 무남성(무남성)이라 한다. 동남쪽은 영남성(영남성)이라 하고, 그 서쪽은 황서성(황서성)이라 한다. 서울에서 동쪽은 열동성(열동성), 서울에서 서쪽은 송해성(송해성)이라 하고, 또 서쪽은 패서성(패서성), 또 서쪽은 청서성(청서성)이라 한다. 서울에서 북쪽은 현도성(현도성), 또 북쪽은 만하성(만하성)이라 하여 총 12성으로 한다. 경기는 경계를 예전대로 분할하는데, 오직 낭천(낭천)·금성(금성)·금화(금화)·철원(철원)·평강(평강)·이천(이천)·안협(안협) 등 열수(열수:한강) 서쪽 대수(대수) 동쪽에 있는 세 고을은 열동성에 붙인다. 또 송경(송경)으로 황해 포정사(포정사)를 삼고, 장단(장단)·마전(마전)·풍덕(풍덕) 등 세 고을을 송경에 붙여서 대수를 경계로 한다. 생각건대, 들(野)에 획을 그어서 주(州)로 나눈는 데는 유명한 산과 큰 냇물을 한계로 해야 한다. 내가 보니, 열수의 근원 중 하나는 오대산(오대산)에선 나오고, 하나는 금강산(금강산)에서 나와 용진(용진) 하류에서 합류한다. 무릇 두 가닥 물의 동쪽에 있는 것을 열동성에 붙이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며, 열수 서쪽에 있는 것을 경기에 붙여서 근본되는 곳을 두텁게 함도 또한 마땅하다. 송경 유수(송경유수)는 한가롭게 하는 일이 없고, 황해 포정사는 궁벽지게 바다 한모퉁이에 있어, 무릇 징발하는 명령이 있어도 멀리 돌아서 가므로 매우 불편하다. 송경 유수에게 황해감사를 겸하게 하고, 도계(도계) 첫머리에 앉아서 평양이나 전주같이 한다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면 장단 등 세 고을을 황해에 예속시켜서 임진을 경계로 함이 또한 마땅하다. 살피건대, 경기와 사천성 사이에는 비록 유명한 산이나 큰 냇물이 한계가 된 곳은 없으나, 죽산(죽산) 남쪽에 있는 미수(미수 : 속명은 天迷川이다)는 동쪽으로 흘러서 열수(? 남쪽에 있다)에 들어가며, 안성 남쪽에는 사수(사수 : 하류가 素沙河이다)가 있어 서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며, 그대로 큰 나루가 되어 남북을 가로질러서 두 성의 경계(즉 해협)가 되었으니, 경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사천성이란 지금의 충청도인데, 그 강역(강역)은 모두 예전대로이나, 오직 제천 한 고을을 열동성에다 고쳐 붙였다. 생각건대, 지금의 금강(금강)을 옛 사기(사기)에 사비하(사비하)라 한 까닭으로 성 명칭을 사천성이라 했다. 이 성은 도성에 아주 가까운 울타리이므로 웅대했으면 하는 생각에서 깎거나 가르지 않았다. 완남성·무남성은 지금의 전라도다. 이 도(도)의 동쪽에는 잔수(잔수)가 있고 복판에는 노령(노령)이 가로뻗쳐서 남북 한계와 똑같다. 이번에 잔수 이동 노령 이북은 완남성에 붙이고 잔수 이서 노령 이남을 잘라서 무남성으로 만들었다. 잔수 동쪽에 있는 것은 구례·남원·운봉·임실이고, 노령 북쪽에 있는 것은 순창·정읍·고창·무창인데, 여기부터 북쪽은 모두 완남성에 붙였다. 잔수 서쪽에 있는 것은 곡성·옥과이고, 노령 남쪽에 있는 것은 담양·장성·영광인데, 여기부터 이남은 모두 무남성에 붙였다. 생각건대, 중국같이 큰 나라도 13성에 불과한데, 우리나라를 18도로 가른 것은 또한 지나친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예부터 내려오면서 법제가 분명하지 못하고, 기강이 확립되지 않았다. 하물며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이 잘못되어서 인재가 흥기(흥기)하지 않는데 한 방면의 임무를 부탁하니, 그 직에 능히 맞게 하는 자가 드물다. 서도(서도)와 북도(북도)는 지역이 넓고 아득한데, 감사(감사)가 경계 첫 고을에 앉아서 멀리 수천 리 지역을 통제한다. 그래서 명령이 빠를 수 없고, 간악함을 살필 수 없으니 갈라서 두 성으로 함이 마땅하다. 호남과 영남은 백성이 번성하고, 정무(정무)가 번거로우니 능통한 재질(재질)과 큰 기국(기국)이 아니면 다스릴 수가 없다. 나는 남쪽 지방에 15년이나 있었다. 그러나 능히 그 직무를 다하고 백성의 뜻을 크게 두려워한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각각 갈라서 두 성씩으로 함이 마땅하다. 하물며 고려제도는 호남에 남북 두 도가 있었고, 영남에도 두 도가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목릉(목릉) 때에 영남을 좌우 두 도로 갈라서 왜구를 방어했다. 양남(양남)을 갈라서 네 성으로 만든 것은 예전에도 그런 법이 있었으며, 내가 처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남성의 포정사(포정사)는 광주에 있음이 마땅하며 광주는 옛날 무주이다. 영남성 · 황서성이란 지금의 경상도이다. 이 도에 황수(황수 : 낙동강)가 있어, 남쪽으로 흐르는데, 물의 근원 가운데 하나는 태백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소백산에서 나온다. 소백산을 따라 내려오면서, 황수 동쪽에 있는 것을 영남성으로 하고 황수 서편에 있는 것을 황서성이라 했다. 순흥 · 풍기 · 영천 · 안동 · 비안 · 군위 · 인동 · 현풍 · 창녕 · 영산에서 아래로 동래까지는 모두 이 물의 동쪽에 있는데 여기부터 동쪽은 옛적 진한국(진한국)이었다. 예천 · 용궁 · 함창 · 상주 · 선산 · 성주 · 고령 · 초계 · 의령 · 함안 · 칠원 · 창원에서 아래로 김해까지는 모두 이 물의 서쪽에 있는데, 여기부터 서쪽이 옛날 변진국(변진국)이다. 생각건대, 우리나라 중세에 영남 우도(우도)의 감사가 진주에 좌정(좌정)했던 것은, 왜적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진주는 남쪽 바다에 가까워서, 북쪽으로 용궁 · 예천과는 길이 너무 멀고, 상주는 또 북쪽에 치우쳐 있다. 나의 생각에는 황서성 포정사는 성주에 두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이 고을은 북쪽에 금오산성(금오산성)을 두고 서쪽으로는 추풍령이 목이 되어서, 관방(관방)이 될 만한 요충지대이다. 그러므로 진주는 그대로 병영으로 만들고, 성주에다 감영(감영)을 건설하면 관할하기가 편리할 것이다. 살피건대, 성주에서 대구까지는 하룻길이 못 되니, 만약 남쪽 도적이 와서 침범하면 두 성 신하가 편지를 띄워서 일을 의논하여, 수레바퀴가 서로 의지하는 형세가 될 것이니 또한 애각(애각)처럼 서로 동떨어진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열동성(열동성)이란 지금의 강원도이다. 그 강역(강역)은 예전대로 하되 오직 낭천(낭천) · 금성(금성) · 등 열수(열수) 서쪽 고을은 경기에 옮겨 붙이고(위에 이미 기록했다). 경기의 양근 · 지평 두 고을과 충청도의 제천 한 고을을 본성(본성)에 옮겨다 붙인 것(위에 이미 기록했음)이 조금 다르게 되었다. 생각건대, 이 성의 영동 쪽 아홉 고을(북쪽의 歙谷에서 남쪽의 平海까지)은 본래 현도(현도)의 남부이다. 그후 금와(금와)의 아버지, 해부루(해부루)가 예(예) 지역에서 동쪽의 가섭원(가섭원)으로 옮겨왔는데, 가섭원은 하서량(하서량)이고, 하서량은 지금의 강릉이다. 이후부터 영동 아홉고을이 예맥(예맥)이라는 명칭으로 잘못 불렸으나 실상 예맥은 본래 요동(요동)에 있었고, 이 지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큰 산이 서쪽을 막았고, 동해(동해)가 동쪽에 닿았는데 감사는 원주(원주)에 앉았으니, 멀리까지 통제하기란 실상 어렵다. 나의 생각에는 강릉부사(강릉부사)도 또한 안찰사(안찰사)라는 직명을 겸해서, 영동 아홉 고을의 작은 일은 강릉에 영솔(영솔)되고, 오직 큰 일만을 감사에게 관유(관유)하도록 함이 또한 알맞을까 한다. 송해성(송해성)이란 지금의 황해도이다. 해주(해주)는 궁벽지게 한 모퉁이에 있고, 송경은 다만 성 하나만 관할한다. 위치가 궁벽지면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송경은 다만 성 하나만 관할한다. 위치가 궁벽지면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관할이 작으면 권세가 적고 약하다. 그리하여 서도(서도)의 울타리로서는 두 곳을 다 믿을 수 없으니 송경을 황해 감영으로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장단(장단) 등 세 고을은 저절로 따라가는 것이 마땅하며, 북도(북도)에 있는 중화(중화) · 상원(상원) 두 고을도 본래 패수(패수) 남쪽에 있는 것이므로 이번에 본성에다 옮겨붙였다. 살피건대, 원제에 양남(양남)과 양북(양북)은 면적이 아주 큰데 복판 4도(도)는 지역이 아주 작으니, 그 안쪽은 중하게, 바깥은 경(경)하게 하며, 줄기는 억세게, 가지는 약하게 하는 뜻에 있어, 매우 합당하지 못하다. 이제 양남과 양북은 갈라서 8성으로 만들고, 중앙 4도는 그전대로 했다. 그렇게 하면 중한 데에 있으면서 경한 것을 막고, 강함으로써 약함을 제어하게 되니 진실로 형세에 도움이 있을 것이다. 패서성(패서성)과 청서성(청서성)은 지금의 평안도이다. 이 도는 중앙에 적유령(적유령 : 江界 남쪽 경계)이 있는데, 영 남쪽은 곧 청수(청수)가 나오는 곳이고, 영 북쪽은 곧 독수(독수)가 나오는 곳이다. 설한령(설한령) 산맥이 서쪽으로 나가서 적유령이 되고 또 서쪽으로 극성령(극성령 : 熙川 서북쪽에 있다)이 되었는데, 가로뻗쳐서 남북의 큰 관(관)이 되었다. 지금은 적유령 남쪽 청수 동쪽에 있는 것은 패서성에 붙이고, 적유령 북쪽 청수 서쪽에 있는 것은 잘라서 청서성으로 만들려 한다. 덕천 · 개천에서 안주까지는 청수 동편에 있는데 이 동쪽은 패서성 소관이다. 그러고 희천 · 영변에서 박천까지는 청수 서쪽에 있고, 강계 · 위원은 적유령 북쪽에 있는데 이 서쪽은 청서성 소관이다. 생각건대, 평안 한 도가 본래 청남(청남) · 청북(청북)으로 갈라져 있는데, 두 성으로 가른다는 것은 내가 처음 말한 것이 아니다. 만약 두 성을 설치한다면 청서성 포정사는 영변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 영변은 옛 병영인데 이괄(이괄)이 이곳을 점거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후에 병영을 안주로 옮겼으나 국론은 늘 영변이 안주보다 낫다 한다. 생각건대, 폐4군(폐사군)이란 무창 · 여연 · 우예 · 자성이다. 네 고을의 지역이 거의 천 리가 넘어서 지금 황해도와 비교하여도 곱절이 넘는다. 비록 고을 관아는 없으나 또한 인민은 섞여서 살고 있다. 네 고을을 회복하지 않을 수가 없으나 남쪽으로 평양과의 거리가 거의 몇천 리여서, 감사가 멀리까지 통제할 수가 없다. 나의 생각에는 강계부사도 또한 안무사라는 직명을 겸해서, 네 고을 수령에게 작은 일은 모두 강계에서 결재를 받고, 오직 큰 일만 감사에게 관유해서 강릉 예와 같이 함이 진실로 마땅할 것이다. 다만 강릉이 관할하는 아홉 고을은 포정사에서 고과(고과)함이 마땅하나 강계가 관할하는 폐4군은 고과하는 것마저 강주대사(강주대사)에게 하도록 하여 제주목사(제주목사)가 정의(정의)·대정(대정) 두 고을을 고과함과 같이 함이 가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청렴한가 탐묵(탐묵)한가와 부지런한가 게으른가는 멀리 있으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폐4군의(폐사군의)를 지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적었다. “그윽이 압록강의 형세를 보건대, 4군 이서(이서)로부터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고을이 된 것이 위원(위원)·초산(초산) 등 일곱 고을이고, 4군 이동(이동)으로부터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고을이 된 것이 삼수와 갑산이다. 압록강 물은 남에서 북으로 여연에 이르고, 또 꺾여서 남쪽으로 흐른다. 지금 북쪽으로는 매우 불거져나간 지역으로서, 대략 지대가 같은 곳을 논한다면 위원·값나은 시위(弦)가 되고, 4군은 활이 된다. 강역(강역)을 분별하는 데에는 활로 다툼이 마땅하고, 울타리를 가리는 데에는 활로 굳게 함이 마땅한데, 지금 폐지하고 돌아보지도 않음이 가하겠는가? 솔연(솔연)이라는 뱀은 머리쪽을 치면 꼬리로 달려들고, 꼬리쪽을 치면 머리로 달려들며, 중간을 치면 머리와 꼬리로 함께 달려드는데, 이것이 병가(병가)의 대세이기도 하다. 지금 솔연의 머리는 갑산에 있고, 꼬리는 위원에 닿았는데, 그 허리와 배는 모두 썩어버렸다. 그런데 오히려 머리와 꼬리로써 구원할 수가 있겠는가? 군사가 이기고 지는 것과 살아 남고 죽어 없어지는 것은 형세에 달렸을 뿐이다. 산전(산전)하는 자는 높은 영(영)을 먼저 차지하면 이기고, 수전(수전)하는 자는 먼저 상류(상류)를 차지하면 이기는 것도 형세이다. 강인(강인) 수천 명이 4군 지역을 차지하여 북쪽으로 갈파(갈파) 길을 끊고, 서쪽으로 건주(건주) 곡식을 통하면서, 남쪽을 향해 우리를 호령한다면 일곱 고을 정수(정수)와 성벽은 장차 흙이 무너지듯, 기와가 부스러지듯 하여, 패수 이북 지역은 다시 조선의 소유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걱정하지 않고, 4군을 폐지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막는 것이 있기 전에 넘어옴은 해됨이 없거니와, 막았는데도 넘어오는 것은 어지럽게 되는 근본이다. 『시경』(시경)에 ‘버들을 꺾어서 채마밭에 울타리를 치니, 미친 지아비도 조심을 한다’라고 하는 것은, 막은 것은 넘지 못함을 이른 것이다. 압록강은 큰 방수(방수)인데 지금 까닭없이 허물어서, 북방의 간사한 백성들이 은밀히 산림 중에 살면서 그 처자를 끌고 와서 소굴을 만들고, 날마다 금·은·동·철을 캐서 두드리고, 주조하여 재물을 만들고, 아이만한 인삼과 초서피(초서피)로써 스스로 살찌우며, 활, 살, 창, 작은 창, 화기(화기) 따위를 갖추어서 스스로 호위하고 있는데도 그 지역을 지키는 신하는 숨기고 보고하지 않으며 묘당(묘당)에서는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난리는 이미 일어났는데 방어(방어)는 어디에 있는가? 옛적에 우리 세종(세종)과 세조(세조)께서 장수에게 명하고 군사를 출동시켜서 6진(진)을 경영할 적에, 온 나라의 힘을 다하여 성공한 다음에 그만둔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두만강을 방수(방수)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방수할 곳이 남에게 있어도 오히려 도모했는데, 방수할 곳이 나에게 있건만 어찌해서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것인가? 나는 그런 이유로 폐4군은 복구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장수(장수 : 장진강)의 일대는 곧 우리 내지(내지)이고 방수할 곳이 아니다. 그런데 남쪽으로 장진에서 북쪽으로 갈파(갈파)까지 물을 따라 내려가면서 보(보)를 설치한 것이 7~8군데나 되어, 목(목)과 등(등)이 서로 바라보이며 딱다기(刁斗) 소리가 서로 들림은 이 무슨 까닭인가? 대개 장수 서쪽은 곧 폐4군 지역으로서, 고을 관아는 이미 철폐했으나 난민이 섞여 살고 있으니 조정에서는 4군을 이역같이 여겼으므로 장수도 변경같이 여겨서 이렇게 설비했던 것이다. 그 뜻이 이러했기 때문에 녹수(녹수)를 따라, 동쪽으로는 갈파에서, 서쪽으로는 만포(만포)까지 600여 리를 그냥 휑하게 비워 방수하는 곳이 없고, 군사 하나도 머물러 두지 않았다. 또 만포에서 남쪽으로 독수(독수 : 독어강)를 따라 내려가면서 또 7~8군데 보를 설치하여 장수와 같게 했으니 대개 독수 동쪽도 또한 폐4군 경계인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정에서는 참으로 폐4군 지역을 버려서 이역으로 만든 것이 분명하다. 대저 녹수는 하늘이 만든 우리나라의 해자(塹)인데 하늘이 만들어준 해자를 버림은 매우 상서롭지 못하다. 가경(가경) 17년(1812)에 가산(가산) 역적 홍경래(홍경래)가 반역을 도모하다가 죽임을 받았는데, 그 격서(격서)에 문든 폐4군이 응원한다는 말로 허튼 공갈을 했다. 그렇다면 서쪽 토인(토인)들이 폐4군을 조만간 사단을 일으킬 곳으로 여기는 것이 명백하다. 장수 연변과 독수 연변에 설치된 수보(수보)가 거의 20곳이나 된다. 지금 이 여러 보를 걷어다가 녹수 연변에 벌여 세워서, 갈파·만포 사이의 비어 있는 지역을 방색(방색)한다면 힘을 더 들이지 않고 재물을 더 허비하지 않아도, 녹수는 천연의 해자로서 기능이 완전해질 것이다. 보를 설치하는 방법은 한꺼번에 크게 일으키면 참으로 좋겠으나 그렇지 못하면 금년에는 갈파 서쪽 30리 지점과 만포 동쪽 30리 지점에 보 하나씩을 세우고, 다음해에 또 새 보의 서쪽 30리 지점과 동쪽 30리 지점에 보 하나씩을 세우고, 또 명년에 30리 지점에 세운다면 형세는 주머니 주둥이를 졸라매듯 하고, 공(공)은 무너진 곳을 막는 것 같아서 10년을 넘지 않아 북쪽 변경에 보장(보장)이 완성될 것이다. 보장이 완성되고 나면 고을 관아를 설치하지 못할 곳이 있겠는가? 지금 남쪽에는 백성은 많고 땅은 좁아서, 한 농부가 경작할 만한 땅은 값이 수만이나 되니 이들을 이사시켜서 그 지역에 채우면 즐거워하지 않을 자가 없을 터인데 국정(국정)을 잡은 자가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 것인가? 패수(패수) 남쪽에 있는 중화(중화)·상원(상원) 두 고을을 이제 예에 따라 송해성(송해성)에 옮겨 붙이려고 한다(이미 위에 기록했다). 생각건대, 당시에 이 두 고을을 평안도에다 붙인 것은 평양이 바로 패수가에 있어, 배를 저어 잠깐 만에 갈 수 있는데 문득 다른 도(도)에 속해 있기 때문에 평양에다 임시로 붙였던 것이다. 그러나 들에 획을 그어서 고을을 가르는 것은 자연 지형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중국 금릉(금릉)이 바로 양자강에 임했으나 강 북쪽 고을을 강 남쪽에다 붙였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그런데 역(역)을 설치해서 급변을 경계하면서 변경 보고가 왕래할 때에, 서로 돕지 않을 수 없다. 두고 온 토지와 인민에 대한 온갖 일은 다 중경(중경)에서 영솔(영솔)하고 오직 변보(변보)에 대한 한 가지 일만은 평양의 절제(절제)를 아울러 받게 하여도 아마 폐단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강역(강역)의 한계만은 이동할 수 없는 것이다. 현도성과 만하성(만하성)이란 지금의 함경도이다. 이 도는 한복판에 마천령(마천령)이 있는데, 영(영)의 큰 등마루가 바로 장백산(장백산) 큰 줄기에 닿아 있으므로 영 이남을 남도(남도)라 하고, 영 이북을 북도라 했다. 이제 이것을 따라 나누어 두 성으로 만들었다. 남성(남성)은 단천(단천)에서 그치고 북성(북성)은 길주(길주)에서 시작한다. 여기부터 북쪽으로 큰등성이의 서쪽에 있는 것은 현도성에 붙이고 동쪽에 있는 것은 만하성에 붙인다. 지금 북도 절도사(절도사)는 기후가 화창하면 경성(경성)에 들어가고 바람이 사나우면 종성 행영(종성행영:會寧 동쪽에 있다)에 나와서 있는데 이제는 경성을 포정사로 만들고, 종성 행영은 그대로 행영으로 만들어두는 것이 참으로 알맞겠다. 생각건대, 만하성 6진(진)은 본래 북옥저(북옥저) 지역이었는데 오랜 세월 동안 말갈(말갈)이 점거(점거)해 있었다. 발해(발해)가 번성할 때에는 그 지역을 동경 용원부(동경용원부)로 삼았고, 또는 책성부(책성부)라 하여 경(경)·염(염)·목(목)·하(하) 네 고을을 영솔했다. 당(당)나라 정원(정원) 2년(신라 원성왕 2년, 786)에 발해 문왕(문왕) 흠무(흠무)가 상경(상경)에서 동남쪽으로 도읍을 옮겨 동경(동경:『與地勝覽』에는 남경으로 되어 있다)에다 정했는데 동경이란 지금의 행영(행영)이 혹 그 지역인가 한다. 그 후 발해가 망하자 그 지역을 야인(야인)이 몽땅 차지해서 자주 변경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세종과 세조가 이를 정벌·경략하고 겨우 경리(경리)하여 만하 이남이 드디어 우리 판도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기후가 아주 다르며, 지방 풍속이 우둔하여 이시애(이시애)와 이징옥(이징옥) 등이 한번 깃발을 휘두르며 난리를 일으키자, 백성이 쓸리듯 좇았다. 그 후에도 왜장(왜장) 청정(청정)이 북관(북관)에 침입하니 난민 국경인(국경인) 등 이 시기를 틈타 화동(화동)해서, 번신(번신)과 수신(수신)을 다투어 죽이고 적에게 투항했다. 다행스럽게도 정문부(정문부)의 힘을 입어서 평정할 수 있었으나 바람이 불면 풀이 따라서 움직이는 것 같아서, 가장 걱정되는 곳이 이 지역이다. 게다가 지역이 아주 멀고 소식(소식)이 서로 전달되지 않아 그 지역을 지키는 신하가 제 뜻대로 탐학(탐학)해도 조정에서 듣지 못하고, 감사도 살피지 못하여 한 지역 생민(생민)이 마침내 호소할 곳조차 없는 불쌍한 백성이 될 것이니, 무휼(무휼)하고 위안(위안)하는 방법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는 만하성 순찰사(순찰사) 자리는 반드시 경악(경악)에 가까이 모시던 신하로서, 행실을 힘써 닦은 청렴한 사람을 뽑아 보내서, 백성을 회유하고 오게 하는(내상) 방법을 다하게 함을 그만둘 수 없다. 경세유표에서 군현분예를 설명하는 앞의 부분은 전부 조선의 지리를 설명하고 있다. 뒤에서는 각 성별로 더욱 상세한 설명이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어찌 조선의 본래 지리가 아니겠는가. 이해의 편의를 위해 지금의 지리에 맞춰 설명하자면, 먼저 세계지도가 필요하다. 먼저 12성과 후의 이름을 다시 정리해보자. 봉천성이 경기로 도가 아니다. 서울과 그 근방을 이르는 것이다. 사천성이 충청도, 완남성·무남성은 전라도이다. 영남성·황서성은 경상도, 열동성은 강원도, 송해성은 황해도, 패서성과 청서성은 평안도, 현도성과 만하성은 함경도이다. 지도를 보자. 조선의 서울은 현 중국의 산시성의 성도 시안 시다. 장안이라고도 한다. 그 둘레가 경기다. 사천성은 현 쓰촨성, 충칭은 충청을 말한다. 경기의 아래다. 완남성과 무남성은 다시 그 아래다. 중국의 동남부가 전라도다. 광주는 현 광저우다. 그 오른편으로 황서성과 영남성이 경상도다. 경주는 현 허난성의 낙양(뤄양)이며, 부산은 현 상해(상하이)다. 그 위로 열동성, 강원도다. 산둥반도와 그 위다. 서울에서 북쪽은 현도성 또 북쪽은 만하성으로 함경도다. 몽고와의 경계가 되는 북방이다. 서울에서 서쪽은 송해성(황해도), 또 서쪽은 패서성, 또 서쪽은 청서성이라 했으니 평안도다. 현 감숙성, 청해성, 신장성으로 뻗는다.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18도로 나뉜 군현을 12성으로 재편하기를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성을 기준으로 집필되어 있다. 봉천성, 완남성, 무남성, 영남성, 황서성, 열동성, 송해성, 패서성, 청서성, 현도성, 만하성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그 뒤의 군현분등을 보면 정확한 지명과 지리를 파악할 수 있다. 군현분예 설명의 끝은 총수에 대한 기록이다. 12성(省) 주·군·현의 총수(가경 병자년, 곧 순조 16년, 1816년 8월 23일에 시험삼아 기록했다.) 봉천성(봉천성) 38읍(4주, 10군, 22현. 또 沁州 1주, 1군) 사천성(사천성) 42읍(4주, 10군, 28현) 완남성(완남성) 27읍(3주, 6군, 18현) 무남성(무남성) 27읍(3주, 6군, 18현) 제주(제주) 3읍(1주, 2현) 영남성(영남성) 30읍(3주, 9군, 18현) 황서성(황서성) 30읍(3주, 9군, 18현) 열동성(열동성) 21읍(3주, 6군, 12현) 송해성(송해성) 27읍(1경, 2주, 12군, 12현) 패서성(패서성) 20읍(1경, 1주, 6군, 12현) 청서성(청서성) 19읍(3주, 14군, 2현) 폐 4 군 4읍(4군) 현도성(현도성) 16읍(2주, 4군, 10현) 만하성(만하성) 10읍(2주, 8군) 이상 공 314읍이다. 본래는 346읍인데, 줄인 것이 43읍이고(풍덕·교하·목천·석성·비인·신창·덕산·해미·평택·영동·회인·전의·진잠·함열·구례·자인·하양·순흥·진보·비안·영덕·청하·연일·안의·칠원·곤양·진해·흡곡·송화·옹진·증산), 증설한 것이 11읍이다(압해·금오·검주·화령·인성·계산·후주·폐4군). 군현분예의 앞부분을 길게 인용한 이유는, 이 글을 처음 본 사람에게는 이것이 조선의 지리를 제대로 설명하는 첫 번째 글이 될 것이고, 이것이 조선의 실제 지리를 증명하는 진실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 글 뒤로는 각 도별로 다시 상세한 지리와 개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이어진다. 한반도로 편재된 8도는 조선의 기록에 맞춰질 수 없다. 8도가 팔방으로 뻗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로로 맞춰질 수가 있겠는가. 범죄의 수사 범인을 잡는 형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범인은 거짓말을 한다. 형사는 거짓을 밝혀내야 한다. 알리바이와 사건정황을 추적하여 진위여부를 따지는 것이다. 역사의 연구도 똑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태초의 조선부터 근대의 조선까지를 전부다 한반도에 우겨넣은 상황이라 이러한 수사적 관점은 더욱 더 중요하다. 조선의 역사가 한반도로 편재된 시점이 언제부터일까? 앞서 글에서 밝혔듯이 고종이 아관파천을 한 시점 이후다. 그리고 일제가 한반도를 지배한 이후부터 조선사편수회가 결성되어 역사를 축소조작하기 시작했다. 명백한 진실은 조선이 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많은 책과 학자들이 조선의 지리를 증명하고 고증했지만, 여전히 대중적인 관심이 없다. 조금 더 확실한 답을 찾다가 정약용의 경세유표의 중대하고 엄중한 가치를 깨닫게 된 것이다. 경세유표 한 권을 두고, 조선의 지리를 두고 난상토론이든 공개검증이든 일대논쟁을 벌어야 할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그것은 그것대로 중요하지만, 역사를 검증하는 연구에서는 절대적 기준과 기록, 사실을 두고 진실을 연결해나가야 한다. 먼저, 정약용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경세유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경세유표를 조작했는지 아닌지부터 생각해보자. 당연한 결과이지만, 정약용이나 경세유표는 위조도 가짜도 아니다. 한번 더 검증하려면, 가정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만일 일제가 경세유표를 조작했다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일제가 경세유표로 조선의 지리를 한반도에서 설명할 수 없는데 조작했을까? 왜? 당연히 아니다. 이로써 기본적인 검증이 끝나면, 다시 두 가지 논리를 두고 그 다음의 사실을 확인해 나가야 한다. 조선이 대륙에 있었다 vs 우리가 한반도에 있다 이것이 무슨 흑백논리냐면, 과거사의 진실과 현대사의 진실을 두고 그 사이의 진실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또 다시 검증을 하려면 몇 가지의 사실들을 부정해나가면 된다. 조선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가 아니다, 우리는 조선의 후예가 아니다, 일제는 없는 역사를 지어서 식민교육을 했다 등의 가정을 해놓고, 다시 기존의 사실들과 검증을 해나가면 된다. 만일, 우리가 조선의 후손이 아니라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사료는 무엇일까? 팔만대장경,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사료는 가짜인가? 그것은 누가 만든 것인가? 이러한 검증의 과정을 거치면 명백한 논리와 사실들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후에 다른 분야와 고대사를 검증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역사연구의 심도가 깊어지고 사실과 논리에 대한 관점이 심화되는 것이다. 허나, 우선은 고종이 어떻게 한반도로 오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더 세밀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대륙에서 한반도로 넘어온 역사의 과정은 면밀히 밝히지 않으면 끊임없이 의문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 속에 조선의 국운이 쇠하는 패망과 망국의 역사도 포함되어 있다. 아관파천, 러시아 공사관은 어디인가 다음 기록은 Isabella B. Bishop 여사가 조선을 여행하고 남긴 기록의 일부이다. 신복룡이 역주한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발췌했다. 어떤 아버지는 두 아들이 머리를 자르자 비탄과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머리가 잘린 사람들은 시골 사람들로부터 폭력을 받을 것이 두려워 감히 서울을 떠나지 못했다. 서울에서 50마일 떨어진 춘천에서는 관찰사가 단발령을 집행하려 하자 군중들이 일어나 그를 죽이고 춘천과 인근 마을을 접수했다. 가위를 가진 경찰이 단발령을 집행하기 위해 사대문을 지키고 있었다. 서울에 올라왔다가 머리가 잘린 농부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1896년 1월 중순에 물가는 심각하게 올랐으며 서울에서 소요가 예상되었다. 그 무렵에 ‘시골의 풍속을 손상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법령이 발표되었다.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1896년 2월 11일, ‘조선의 왕이 궁전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다’는 놀라운 전문이 발송되었다. 그날 아침 왕과 세자는 희미한 새벽에 궁녀가 사용하는 가마를 타고 경복궁을 떠나 보초병의 의심을 받지 않고 문을 통과해서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했다. 그후 1년 동안 머물게 된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왕은 얼굴이 창백한 채 몹시 떨고 있었다. 탈출을 준비했던 궁녀들은 그들이 받은 지시를 잘 지켰다. 몇 주 동안 가마를 타고 아침저녁으로 대궐문을 출입함으로써 그들은 주위의 이목을 피하게 되었다. 왕은 밤에 많은 일을 하고 새벽에 잠들기 때문에 그를 감금하고 있는 야경꾼과 같은 각료들도 왕이 잠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소재가 확인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새로운 내각의 조각이 시작되었고 고관들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소환되었다. 신변이 안전하게 된 국왕은 오랫동안 상실되었던 왕권을 다시 찾았다. 그때로부터 왕권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한지 몇 시간 만에 결코 훼손될 수 없는 동양의 풍속에 관한 두 개의 포고문이 서대문에 걸렸는데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칙령 아, 슬프도다! 짐의 부덕함과 무능으로 인하여 악이 횡행하고 현명함이 사라졌다. 최근 10년 동안 어느 하루도 영일(寧日)이 없었다. 어떤 것은 짐이 식구처럼 생각했던 무리에 의해 일어났고, 어떤 것은 짐에 의해 생겨났다. 우리의 500년 왕조는 종종 위험에 빠졌으며 우리 몇 100만 백성들은 점차로 곤궁하게 되었다. 이런 것들은 짐으로 하여금 치욕으로 얼굴을 붉게 하고 땀을 흘리게 만들었다. 이러한 어려움은 짐의 편파적인 처사와 자신의 의지로 빚어진 것이며 결과적으로 악한 근성을 불러일으키고 그 실수는 재앙을 불러왔다. 다행하게도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백성들이 이러한 악을 제거하기 위해 정의로운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쓰라린 경험은 국가를 일으킬 수 있으며, 폭풍이 지나간 후에 고요함이 찾아온다는 희망을 주었다. 이는 긴 압제를 겪은 후에야 인간은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원리에 부합되며 하늘은 패배 후에 성공을 가져다 준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주었다. 우리는 관대하려고 노력하겠지만 1894년 7월과 1895년 10월의 사건에 관계된 반역의 우두머리에게는 그 어떤 용서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극형을 내려 천인공노할 죄상을 씻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관리나 군인이나 백성이나 노동자들은 그들의 죄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모두 용서하며 자유를 누리게 하리라. 그대들의 마음을 바꾸고, 안심하라. 그리고 지난날과 똑같이 공사(公私)의 생업으로 돌아갈지어다. 단발령에 대해 짐이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그렇게 시급한 문제인가? 반역자들은 힘과 강압으로 단발령을 일으켰다. 이러한 조치는 짐의 뜻이 결단코 아님을 모두가 잘 알 것이며, 전국의 유생들이 정의로운 분노로 봉기하고 지금처럼 거짓된 소문이 풍미하여 끝내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정규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인명을 살상하게 하였으나 이는 짐의 뜻이 아니로다. 반역자들은 그들의 온갖 독성(毒性)을 내뿜었다. 손가락과 머리카락으로써도 그들의 죄를 모두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군인들은 짐의 자식들이며 소요를 일으킨 사람들도 짐의 자식들이다. 열 손가락을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 오랜 싸움은 통신과 교통을 방해했고 피를 흘려 시체가 쌓이도록 했다. 아! 슬프다. 이런 싸움이 계속된다면 백성들은 모두 죽을 것이며 그 결과는 짐을 눈물짓게 하고 가슴을 저리게 할 것이다. 짐은 바라노니 명령을 받은 즉시 모든 군대는 서울로 돌아오고 모든 폭도들은 각기의 생업으로 돌아가라. 단발령에 관해 말하건대 누구도 의관에 관하여 강요를 받지 않을 것이니, 그대들이 그대들의 뜻대로 하라. 정부는 지금 백성을 괴롭히는 악을 시정할 것이다. 이는 짐이 명예를 걸고 하는 말이니 모든 백성들은 양지하라. 왕명에 의해 내부 대신 겸 총리 대신 박정양(朴定陽) 건양(建陽) 1년 2월 11일 병사에게 보내는 칙령 짐의 불운으로 인해 반역자들은 해마다 문제를 일으켰다. 지금 짐은 또 다른 음모의 증거를 가지고 있기에 짐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왔다. 다른 나라의 공사 관원들은 모두 여기에 소집했다. 병사여! 와서 우리를 보호하라. 그대들은 짐의 자식이다. 과거의 충돌은 반역자들에 의해 일어난 일이며 그대들은 모두 용서받을 것이며 어떤 책임도 묻지 않는다. 그대들의 임무를 수행하고 안심하라. 그대들이 반역자 조희연, 우범선, 이두황, 이범래, 이진호, 권형진 등을 만나면 즉시 머리를 잘라 가지고 오라. 그대들은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짐을 경호하라. 건양 원년 2월 11일 국왕 이 칙령에 뒤이어 같은 날 수천 명의 사람들이 단발령 철회를 알리는 칙령을 읽고 있는 동안 거리에서는 대신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몇몇 대신들과 함께 자리를 지키던 총리 대신과 농상공부 대신이 타살되었다. 격분한 폭도들은 총리 대신이 단발령의 작성자라고 생각한 나머지 창으로써 잔인하게 시체를 모독하고 사체를 토막내는 야만성을 보였다. 다른 대신들은 일본 군대에 의해 구조되었으며 그 밖의 역신들은 달아났다. 새로운 내각이 출범하자 재감자는 죄가 있든 없든 모두 석방되었으며 일본인을 보호하라고 국왕이 엄하게 명령을 했지만 이미 격노한 군중들에 의해 한 명이 희생되었다. 밤이 오기 전에 이전의 6개월 동안의 많은 일들이 원상태로 돌아갔다. 그리고 상투는 승리를 거두었다. 왕비와 폭도들의 야만적인 압제로부터 자유로워진 국왕이 어떻게 그의 자유를 행사했는가의 문제는 여기에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한 이후에 국왕이 러시아 공사의 손에 들어간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1년이 지나가기 전에 웨베르(K. I. Waeber) 공사가 왕에게 선악을 구분하여 직언해 주기를 기대했다. 어떤 이유로 그가 왕으로 하여금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할 수 있었는지는 오늘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80명의 러시아 해병대가 그 건물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창 밑의 작은 테라스에 포문이 조금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곳이 왕의 거처임을 가르쳐 주었다. 그에게는 많은 측근자들이 있었다. 몇 개월 동안 내각은 무도장에서 회의를 가졌으며, 테라스와 왕의 침소의 주변에는 항상 대소 신료와 내시 그리고 궁녀가 시립하고 있었다. 왕의 탈출을 도왔던 엄(嚴)상궁과 박상궁은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왕의 신변을 보호하고 잔치를 벌이기 위해 즉시 왕궁의 건축을 시공했다(그는 1897년 봄에 그곳으로 이주했다). 영국과 미국 공사관에 인접한 유럽인 조계에 죽은 민비의 사당을 짓고 손가락 하나 정도의 왕비의 유해를 거두어 지관이 길일로 정한 날에 왕비의 사당으로 옮겼다. 이 행사에 80명의 러시아 군이 왕의 천막 가까이에 배치되었으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외국 사절들이 모여 있었다. 일본 공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다섯 명의 왕의 조상의 두루마리 초상은 금으로 세공한 긴 직사각형 가마에 실려 오랜 왕궁 풍습대로 관료들을 앞세우고 왕의 텐트 앞을 지나가자 왕이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러시아 경호원들은 받들어 총을 했다. 이것은 예식의 서막이었다. 그 다음에 삼베옷을 입은 700여 명이 살해된 왕비의 조각난 유해를 실은 거대한 영구차를 끌고 경복궁을 나서자 조정 신하들이 앞뒤를 따랐고 조선 군대가 영구차를 호위했다. 왕과 세자는 새로 지은 경운궁 문에서 행렬을 맞이했다. 사당 밖의 긴 제단의 끝에 운구된 상여는 사람의 손이 닿으면 안 되기 때문에 천으로 옮겨 사당 안에 모셔 하얀 비단의 닫집 밑에 안치했다. 1년 이상 슬픔에 잠긴 남편과 아들은 풍습대로 의식을 올리며 제물을 받치게 된다. 거리의 많은 군중은 질서 있게 조용했다. 의식은 그림과 같은 모습으로 보나 예법으로 볼 때 매우 장관이었다. 구종들이 관리들을 부축하며 말에 태우고 조랑말을 따라가며 그 대신들이 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모습은 이미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던 의식의 재현이었다. 1896년 7월에 세관장인 브라운(J. McLeavy Brown, LL.. D) 박사는 왕의 명령으로 탁지부의 모든 지출에 관한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받아 재정상의 복잡한 부패를 감시했으며, 권력 남용을 개혁했노라고 단호하게 선언함으로써 매우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다. 9월에는 14명으로 구성된 군국기무처가 일본의 후원으로 다시 내각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어느 정도 역사의 퇴행이었다. 일본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시대에 일본인들이 시도했던 내정 개혁안이 폐기되었다. 동학을 대신하여 의병이 봉기함으로써 나라는 다시 불안해졌다. 궁내부와 왕의 측근들은 또 다시 가장 추악한 방법으로 매괸매직을 시작했다. 누구도 견제하지 않는 이 악습은 가장 악랄한 관습이었다. 방대한 벼슬자리를 움켜쥐고 있는 왕은 공금을 사사롭게 유용했으며, 자신의 신변이 안전하고 이제는 일본의 간섭도 없게 되자 자기 왕조의 지난날의 폐습으로 복귀했다. 그의 권위에 대한 견제 기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대 군주로 군림했다. 이제 그의 말이 곧 법이었으며, 그의 뜻은 절대적이었다. 자의와 타의에 의해서 조선에서의 일본의 모습은 사라졌다. 일본이 조선에서 몰락하고 그 대신에 러시아가 등장했지만 그러한 변화로 인하여 조선이 어떻게 유리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출처: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I.B. 비숍 지음, 신복령 역주, 집문당, 351~356면. 추후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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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따뜻한 등킨도나쓰의 세계
도넛하면 보통 미국을 떠올릴 텐데 실제로도 미국은 도넛을 존나 좋아하는 나라다 오죽하면 국가 도넛의 날National Doughnut Day까지 있을 정도임. 보통 6월 첫째주 금요일이다. 이날이 되면 등킨도나쓰를 비롯해서 미스터 도넛이나 크리스피 도넛 같은 전미 도넛 가게가 무료로 도넛을 푸는 부러운 날이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좀 웃기지 않냐 어쩌다 국가 도넛의 날 같은게 생겼을까 그게 뜬금없이 전쟁이랑 관련있음 1차머전 시기의 일이다 좃같지 않은 전쟁이 어딨겠냐만 1차머전은 진짜 개좃같은 전쟁이었는데 1차머전을 가장 괴롭게 만든 두 가지 중 하나는 참호였고 하나는 먹을 것이었음 진짜 전세계가 이 좃같은 전쟁 때문에 기아에 시달렸는데 영국에서는 사람 먹을 음식도 없다고 100만이 넘는 애완동물을 모조리 살처분한 적도 있었다. 저번에도 언급했지만 독일은 말할 것도 없고 그야말로 다리 달렸으면 책상도 끓여먹던 시절이다 배고픔이랑은 거리가 멀어보이는 갓메리카도 예외는 아니었음 좀 배부른 소리지만 딴 나라 군인들이 배가 고파 뒤질 지경이었다면 양키 병사들은 맛이 없어서 뒤질 지경이었다 본진이 바다 건너편에 있으니 먹을 수 있는 거라곤 바다 건너온 통조림 밖에 없는데 통조림은 보통 맛이 없단 말이야 순무에 순무 발라 처먹던 독일 얘들이 본다면 배가 불러 터졌다고 쌍욕을 퍼붓겠지만 미군 나름대로는 심각한 문제였다 먹는 즐거움마저 강탈당한 군바리들의 사기가 좋을 리가 없지 그리고 그중에서도 미군이 가장 먹고 싶어하던 음식이 바로 등킨드나쓰였음 안 먹던 놈들이면 몰라도 먹던 놈들이면 그 괴로움을 참기 어렵다. 도나쓰... 존나게 맛있고 둥그런 설탕 듬뿍 도나쓰... 돈 존나 많은 양키들인데 그냥 주면 안 됨? 싶겠지만 도넛이란게 전쟁터에선 만들기 힘든 물건이잖아 튀김기랑 오븐도 있어야되고 그 구하기 힘든 설탕도 필요하고 뭣보다 양키 윗대가리들은 병사들이 밥만 먹으면 됐지 과자까지 챙겨먹일 생각이 전혀 없었음  부식 대우 개씹인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드나쓰 금단 현상을 일으킨 양키들이 허우적대는 모습을 안타깝게 본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구세군 대장이었던 '에반젤린 부스'였음 구세군 대장이었던 에반젤린 부스는 전선을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양키들을 돌봤는데 이 과정에서 드나쓰 타령을 하던 장병들의 하소연을 듣게 된다 헤드샷맞고 머리통이 도넛이 되기 전에 도넛을 먹고 시퍼요 훌쩍거리는 부상병들의 신음소리를 들은 에반젤린 부스는 그날도 달려가서 양키 윗대가리들한테 딜을 건다 얘들 도넛 먹여도 됨? 당연하지만 전폭적인 지원 따위는 없었다 니가 알아서 해 수준의 데면데면한 허가만 얻어낸 에반젤린은 자원봉사자들 모집했는데 그 당시 기준으로 봐도 참 어메이징한 조건이었다 * 무급으로 도넛 만들 사람 구함 * 근무지는 최전방 * 독가스로 뒤질 수도 있으니까 방독마스크 들고 올 것 * 총맞아 뒤질 수도 있으니까 권총 챙겨 올 것 * 폭탄 맞아 뒤질 수도 있으니까 헬멧도 쓰고 올 것 근데 놀랍게도 이런 헬조건에도 불구하고 11명이나 되는 자원봉사자들이 몰려왔는데, 더 놀라운건 전부 젊은 여성들이었다 그 중에 제일 어린 사람은 스텔라 영이라는 꼴랑 16살짜리 소녀였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유명한 야전취사부대 '도넛걸'들이다 스텔라 영 이렇게 리볼버로 무장하고 헬멧 쓰고 밀가루 봉지를 등쳐맨 도넛걸들은 바로 최전선으로 달려간다 최전선으로 달려간 이유도 존나 상여자스러웠는데 후방에서 만들어서 식어빠진 도넛을 먹여봤자 통조림이랑 뭐가 다르냐는 것이었다 참호 속에 처박혀서 벌벌 떠는 양키들에게 방금 구운 도넛을 먹여주기 위해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최전방 참호로 간 거임 프랑스 전선의 최전방에서 반쯤 무너진 오두막을 발견한 도넛걸들은 여기를 '에반젤린 부스 헛'이라 이름 붙이고 처음으로 도넛을 만들기 시작했다 양키 윗대가리들의 원조가 거의 없는 자원봉사자 부대인지라 제대로 된 요리도구도 하나도 없었음 첫날에는 제일 기초적인 밀대랑 냄비조차도 없었다 그래서 주변에서 주워온 걸로 반죽을 만들어서 튀겼는데, 밀대로는 포탄 탄피랑 빈 우유병을 써서 반죽을 밀었고 냄비 대신 쓰고 있던 헬멧을 벗어서 기름을 튀겼음 워낙 열악한 환경이라 한 번에 만들 수 있는 도넛이 겨우 7개 밖에 안 됐지만 근데도 하루종일 잠도 안 자고 도넛을 만든 결과 첫날에만 중대 하나를 먹이고도 남을 도넛을 만들어냈음 머나먼 엘랑스 땅까지 와서 개고생하던 양키들에겐 축복이 따로 없었다 에반젤린 부스 헛으로 구름처럼 양키들이 몰려들었음 이렇게 도넛걸들의 전설적인 활약이 시작되는데 폭탄으로 부엌이 날아가도 총알이 쏟아져도 최전선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따끈한 도넛을 만들어냈다 첫날에는 150개의 도넛으로 시작하더니 이틀째부턴 300개를 넘어섰고 어느샌가 자원봉사자들이 점점 더 늘면서 하루에 2500개의 도넛을 만들어내면서 전 전선에 도넛을 배달하기 시작함 양키들은 최전방에서도 등킨드나쓰를 만들어먹는다는 소문이 퍼지니까 양키들이야 당연히 신나고 순무에 순무 발라 처먹던 독일인들은 비참해지는 쏠쏠한 효과도 누렸음 이걸 극대화하기 위해서 양키 윗대가리들은 도넛걸들을 프로파간다 용도로도 써먹었음 1차머전 당시의 양키 신병을 '도넛보이'라고 불렀을 정돈데 당연히 전쟁 나감=도넛 먹음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도넛걸들의 활약이 유명했기 때문임 아무튼 처음에는 16살 여중생과 11명의 소녀들로 시작했던 도넛걸들은 전쟁 말이 되자 250명이 넘든 대부대로 커졌고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쉬지않고 도넛을 생산했음 이들의 헌신을 기리기 위해 미국에선 딴 나라에서 보면 웃기게 보이는 국가 도넛의 날을 만들게 된 것임 이 때만든 드나쓰는 대충 이런 형태였다고 한다 갓메리카답게 설탕 듬뿍 들어간 거 보소 [출처 - 디시인사이드 고질라맛스키틀즈]
[펌] 단무지의 유래와 색에 관한 이야기
단무지의 유래에 대한 설은 매우 여러가지이다. 심지어 한국의 승려인 택암이 전파했다고도 알려져있는데 뭐 이건 같은 승려인 신미대사가 한글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동급인 내용이고 전국시대 당시 일본의 타쿠앙 소호라는 승려가 만든 타쿠앙즈케라는 선식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타쿠앙은 절에서 장기간 동안 보관할 수 있는 간단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 쌀겨와 소금으로 무를 절이고 버무린 뒤 항아리 담아 익히는 방법을 개발하게 된다. 이후 타쿠앙이 있던 동해사라는 사찰에 당시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방문하게 되어 대접을 해야하는데 산해진미에 익숙한 이에미츠를 위한 고기 같은게 절에 있을리가 없고 그냥 이 무절임에다 밥을 내어주게 됐다. 의외로 담백한 맛에 이에미츠가 반하게 됐고 이에미츠는 이 반찬의 이름을 물었지만 아무 이름도 없는 무절임이라는 말에 개발자인 타쿠앙의 이름을 붙혀 타쿠앙즈케 즉 타쿠앙절임 이라고 이름을 지어주게된다. 이 간단해보이는 무절임이 긴박한 전장터에서 밥을 제때 챙길 수 없는 병사들에게 쓸모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이에미츠는 이후 출병하는 병졸들에게도 통으로 허리춤에 차게한 채 전쟁을 하도록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 ‘타쿠앙’은 오랜 시간동안 일본의 대표적인 야채절임으로 전해져 왔고 쌀겨로 수개월간 숙성시키는 방식으로 인해 제작 비용이 높은 고-오급 반찬으로써 막부의 장군이나 호위무사들의 밥상에서나 볼수 있는 음식이 됐다. 그런데 원조인 타쿠앙의 색깔은 지금 우리가 먹는 단무지처럼 노란게 아니라 뒤죽박죽이었다. 앞서 말한 쌀겨로 숙성시키는 과정에서 숙성기간에 따라 무가 노랗거나 회색 또는 갈색으로 변색되는데 만드는 사람마다 색이 달라서 이게 무슨 절임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결국 타쿠앙을 만드는 사람들은 색을 통일하기 위해 치자나무 열매를 우린 물 또는 울금을 첨가해서 노랗게 만들게 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 타쿠앙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면서부터 아예 황색 색소를 이용하는 케이스가 정착해 우리가 아는 단무지 색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엔 언제부터 단무지가 나온 것일까? 일제강점기 때 명월관이라는 식당이 처음 문을 열게되는데 이 명월관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 외식문화가 성행하게 됐다. 근데 당시엔 돈있는 사람들만 이런 고급식당에서 외식을 즐길 수 있었는데 주 고객이 누구일까? 바로 일본인이었다. 이 일본인들을 대접 하기 위해 고오급 반찬인 타쿠앙를 내오게 되었고 이것이 우리나라에 정착하게 된것이다. 중국집에서 단무지를 반찬으로 내게 된 것도 역시 일제 강점기 동안 인천에서 문을 열기 시작한 산동성 출신 중국인들의 요리집이 외식열풍으로 인해 전국으로 퍼져나가며 마찬가지로 주 고객인 일본인 들의 입맛을 고려하여 내오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도 타쿠앙 이나 다꽝으로 불리던 이 고급반찬은 시대가 흐르고 급성장한 한국의 경제 상황에 맞춰 만만하고 친숙한 식재료가 됐고. 부르는 이름이 타쿠앙에서 단무지라고 변하게 되어 가장 성공적으로 일본의 잔재를 털어낸 단어가 됐다. 이렇게 한 중 일의 근대역사의 흐름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단무지는 어엿한 한국의 대표반찬이 되어 우리의 밥상을 지키고 있다.
[펌] 냉혹한 영국 수탈의 세계
감자대기근 1800년대의 아일랜드는 영국새끼들한테 존나게 수탈당하고 있었는데 그 수탈의 잔학함이 조선 삥뜯는 일본조차도 ㅈ밥으로 보이게 만들 정도로 악랄했다 얼마나 악랄하게 아일랜드를 뜯어먹었냐면 아일랜드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게 감자밖에 없을 정도였다 감자 빼고 나머지는 전부 영국에게 뜯겼다 문제는 이 시점에 감자만 골라조지는 악랄한 전염병인 감자마름병이 터지기 시작했다는건데, 감자 밖에 없는 나라에 감자를 못 먹게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냐 사람이 과장 하나 없이 수백만 단위로 굶어뒤지기 시작했다. 영국은 어떻게 했냐고? 하지메마시떼 아일란도 하지메마시뗴는 ㅆㅂ 굶어뒤져가는데 우리 좀 도와줘  그동안 우리한테 존나 식량 뜯어갔잖아 이젠 니들이 우리한테 퍼줄 시간 아님? 님 빨갱이임? 갑자기 뭔 빨갱이드립이야 아직 공산주의 만들어지지도 않았음 아니 자유시장의 법칙에 따르면 우리가 니들을 먹여살릴 이유가 전혀 없잖음 ㅋㅋㅋ 정부는 시장에 개입하지 않아야 자본주의가 잘 굴러가는데 니들은 보이지 않는 손 모름? 보이지않는건 니 양심이겠지 징징대는 개소리 잘 들었고연 굶어뒤지지 않으려는 노력이 부족하네여 근데 식량 언제 팔 거임?  뭔 미친 개소리야 우리 먹을 식량도 없는데 뭘 팔라는 소리야 니네 땅 주인이 판다는데? 아참 니네 땅 주인이 나였지  영국 미친놈들은 진짜 개새끼였다. 영국은 아일랜드를 그렇게 삥뜯었던 주제에 굶주리는 아일랜드에 식량을 공급하는 것을 거부한다. 왜냐면 이 당시 영국의 집권당이 자유당이었는데 이 새끼들은 자본주의 돼지들이라 자유방임주의가 모든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진짜 거지같은게 아일랜드 땅들은 대부분 영국이 가지고 있었다. 자유방임주의의 원칙에 따라 아일랜드 삥뜯기는 평소처럼 계속되었다. 아일랜드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 영국인 지주들은 길에서 아일랜드 사람이 죽든 말든 식량을 팔아댔고 영국은 또 그걸 좋다고 사갔다. 전 아일랜드의 밭에서 굶주린 농부들이 뒤져가는 동안 영국배들은 부지런히 아일랜드에서 나온 식량을 본국으로 실어나르고 있었다. 이게 역사에서도 유명한 아일랜드 대기근이다 사실상 영국이 수백만 명을 굶겨죽인 사건 때문에 지금도 아일랜드 사람들은 영국을 찢어죽일 정도로 증오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반영 감정에 비하면 한국의 반일 감정은 우정처럼 보일 정도다. 보어전쟁 보어인이라는 사람들이 있다. 기원이 워낙 복잡한데 간단하게 땡치자면 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사람들이다. 이 보어인들은 처음엔 비교적 평화롭게 잘먹고 잘살고 있었는데, 문제가 터졌다. 얘네 땅에서 금이랑 다이아몬드가 펑펑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왜 문제냐고? 하지메마시떼 보어상~ 영국새끼들이 그걸 알았거든. 이웃집에 좋은 물건이 있으면 정중하게 대문부수고 들어가서 신사적으로 집주인을 때려죽인 다음 품위있게 집으로 가져오는 그 새끼들 말이다. 물론 당연히 보어인들은 영국이 힘들게 세운 나라를 날름 처먹으려는 걸 눈뜨고 보지 않았다. 하지메마시떼는 ㅈㄹ ㅈ이나 까샘 보어인들은 무시무시한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막강한 전투력으로 영국군을 개박살내는데, 보어인들의 저격실력이 엄청나게 무서웠던 나머지 아직도 명사수의 대명사로 보어인들을 뽑을 때가 있다 아무튼 영국은 대차게 박살이 났다. 보어인들은 민간인들의 도움으로 신출귀몰하면서 영국군의 뚝배기를 까기 시작했고, 영국새끼들은 참 영국스런 해답을 내놓는다. 자꾸 그렇게 비겁하게 민간인들 뒤에 숨을 거임? 정정당당모름? 지구 역사에서 가장 쓰레기같은 놈들한테 듣고 싶은 소린 아닌데 ㅆㅂ 한 마디도 지질 않네. 생각해보니 민간인이 문제임. 민간인만 없으면 게릴라도 못하는데  뭐 민간인을 다 없애기라도 하게? 오또케 알았음? 영국식 정정당당함이란 이런 것이다. 게릴라전으로 골치가 터지니까 영국새끼들은 진짜로 민간인을 없애버리기로 한다. 어떻게 없애버렸냐고? 나치보다 150년 빨리 아우슈비츠를 만들어서 없앴다. 농담 아니고 진짜임. 세계최초의 인종 절멸 수용소는 나치가 아니라 영국이 만들었다. 보어인들은 단지 보어인이라는 이유로 총을 들고 있지 않아도 수용소로 끌려갔다. 수용소 안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영국제 총알 뿐이었다. 수만명의 보어인들이 선 채로 굶어뒤졌고 대부분이 아이들이었다. 이렇게 또 영국은 수만 명의 보어인들을 굶겨죽이면서 보어전쟁에서 추하게 승리를 거둔다. 뱅골 대기근 이번에는 2차대전 중의 일이다. 아직 인도가 영국 식민지였던 시절의 이야기다. 일본의 대공세로 인도에는 사방에서 난민이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먹을 입들은 존나게 늘어나고 있는데 식량생산지역은 일본놈들이 다 처먹고 있었다. 필요량은 늘어나는데 공급량이 줄면 어떻게 된다? 굶는 사람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인도 그 넓은 땅에서 식량도 제대로 생산 못하냐는 의문이 들텐데 하필 이 시기에 자연재해가 존나 터지면서 농사가 흉년이 났다. 인도는 고심끝에 지금까지 신나게 자기를 삥뜯어왔던 영국에게 헬프를 치기로 한다. 그동안 삥뜯어왔으니까 이번엔 자기들이 좀 도움을 받아도 되지 않겠냐는 논리였는데 아무리 영국이 씨발새끼들이라도 사람이 굶어뒤져가면 돕지 않을까싶었던... 아. 결말은 뭐 말 안 해도 알 거라 생각한다. 영국아 우리 굶어뒤질 거 같은데 제발 좀 도와줘 아 진짜 내가 돕고 싶은데 내가 정말 진심으로 성심성의껏 돕고싶긴 한데 일본놈들이 너무 무서워 안 되겠음 ㅈㅅ 개소리야 ㅆㅂ아 일본군이랑 우리 굶어뒤지는게 뭔 상관인데 사실 지금 우리 먹을 식량도 없는데 인도인 니들까지 먹일 식량이 없다고 직접적으로 말해버리면 니가 상처입을 거 같았어 미친놈 인도로의 식량 지원을 거부한게 누구냐면 바로 그 자랑스러운 영국의 전쟁영웅 처칠 새끼 되시겠다. 참 영국적인 영웅이긴 하네. 아무튼 인도는 평소에 대영제국의 막대한 부를 지탱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수탈당했지만 정작 본인들이 굶주릴 때는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하면서 수백만명이 또 굶어죽게 된다. 이쯤되면 영국 새끼들이야 말로 기근의 기사가 아닐까 싶다. [출처 - 디시인사이드 고질라맛스키틀즈]
[펌] 냉혹한 세종대왕의 수박썰
세종이 즉위하고 5년차 찍었을 시절의 이야기 고기 먹고싶다 세종님 존나 큰일 났음 고기도둑이라도 들어왔음? 아니 고기는 아니고 수박도둑임 내시 새끼가 수박 한 통 훔치다가 들켰음 내가 들키다니 세종 5년 한문직이라는 이름의 내시가 궁궐에서 수박 한 통을 훔쳐먹다가 들킨 사건이 터진 것이다 허허 씨발 그래도 고기는 아니네 고기도둑이었으면 모가지 날렸을 건데 수박이라 내가 봐줌 아싸 대신 병신을 만들어주마 참고로 사극 등에서 존나 만만하게 나와서 그렇지 곤장은 보통 10대만 맞아도 곤죽되기 십상인 하드코어한 형벌이라 한 번에 30대 이상 못 때리는게 원칙이다 근데 이 수박도둑은 무려 곤장 100대를 선고받는다 그냥 맞다 뒤지라는 소릴 한 거다 그런데 세종의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백병원은 어디요 백병원 몸에 해로우니 푹 쉬세요 귀양지에서 100대 풀스윙을 견디고 간신히 살아남았더니 이번에는 귀양지 중에서도 존나 불지옥으로 유명한 영해로 귀양까지 보내버렸다 수박 한 통에 꼬추까지 포기해가며 들어온 궁궐 라이프가 완전히 끝장난 것이다 근데 솔직히 세종이 개빡칠만한 것도 한게, 일단 먹는 거 좋아하는 대왕인걸 둘째치고 일단 궁궐 물품 절도죄인데다가 뭣보다 수박이 엄청난 존재였다 조선시대 수박은 사치품 중의 사치품이었는데 수박 한 통이 쌀 다섯말, 즉 쌀 반 가마니였다 뭔소리냐면 수박 하나면 쌀 40kg이고 오늘날 돈으로 10만원이 훨씬 넘는단 소리다. 요즘도 10만원짜리 과일 하면 손 떨려서 못 먹는데 조선시대다. 임금 아니면 맘대로 못먹는다. 세종이 개빡칠만하다 불행히도 세종의 수박을 건드렸다 개작살난건 이 한 명이 아니었다. 7년이 지난 뒤인 세종 12년의 이야기다. 고기 먹고싶다 세종님 또 존나 큰일 났음 고기는 아니지? 또 수박임 휴 다행 내가 또 들키다니 이번에도 범인은 내시였다. 소근동이라는 이름의 내시는 궁궐 창고를 관리하는 작자였는데, 7년 전에 있었던 선배의 소문을 듣지 못한 것인지 또 세종의 수박을 건드린 것이다. 전례가 있어서 그런지 세종이 판결을 내리기도 전에 형조가 칼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세종님 이 새끼 대갈통은 깍둑썰기로 드릴까요 채썰기로 드릴까요 아니 수박 한 통 훔쳤다고 왜 대가리를 짜른다고 지랄임 처음 한 새끼보다 알고도 저지른 두 번째 새끼가 더 질 나빠 그리고 물건 관리하라는 새끼가 물건 훔치는 것도 존나 괘씸해 그런데 7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좀 유해진 것인지 왠일로 세종이 범인을 변호하고 나선다 야 암만 그래도 머갈통 짜르는건 좀 아니다야 불쌍하지도 않니 아니 7년 전에는 수박 도둑 새끼 궁댕이를 아주 뭉개놨더만 왜 이제와서 그래도 머갈통 짜르는 건 좀 그래 연산군 새끼도 아니고 꼭 궁궐에서 피를 봐야하니 내 집에선 육즙말고 다른 고기즙은 보기싫어 그럼 모가지짜르는 거에서 좀 딜해서 죽도록 줘패고 인증마크 찍는 걸로 합의하죠? 줘패는 건 그렇다치고 인증마크는 뭐임 (이마빡에 도둑이라고 타투를 알차게 찍어주겠단 뜻) 불알도 포기했는데 사회 이미지도 포기하게 생긴 소근동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때 세종이 또 끼어든다. 야 잠깐만 얘들아 이것 좀 봐 이 등신새끼 훔친 수박 좀 봐라 이거 푹 썩어서 냄새나는데? 이건 수박도 아니야 걍 음식물쓰레기지 수박 훔친 거면 어쩔 수 없는데 등신같이 음식물 쓰레기 훔치다 걸린걸로 타투 찍는건 좀 그렇지않냐? 기록을 면밀하게 살피는 일중독 세종답게 수박이 썩어있었다는 정보까지 놓치지 않은 것이다. 세종은 이걸 근거로 면상타투형은 면해주라고 명한 것이다. 엌ㅋㅋㅋㅋㅋ역시 세종대왕ㅋㅋㅋㅋㅋㅋ엌ㅋㅋㅋㅋㅋㅋ 근데 물론 빠따는 때릴 거임 80대면 엉덩이가 곤죽까지는 안 가고 팥죽 정도만 될 거다 그렇게 소근동은 곤장 80대를 처맞고 병신이 되는 선에서 간신히 끝났다 그래도 고기였으면 능지처참이었을 거임 수박이면 어쩔 수 없지 [출처 : 디시인사이드 고질라맛스키틀즈]
[펌] 냉혹한 일본 채식주의의 역사 썰.txt
요즘 트위터 비건들 공통점이 있는데 공감능력 없냐고 하는 주제에 본인들이 공감능력이 개바닥났단 것이다 동물 고통이 안 느껴지냐면서 고기 처먹지 말라고 지랄질을 하는데 왜 고기를 안 처먹었을 때의 고통을 이해해주지 못하는지 의문이다 근데 지금이야 비건들이 트위터에서 지들끼리만 저러니 다행이지만 비건들이 실제 권력을 잡아버리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냐 국가에서 고기를 통제한다고 생각해봐 나 같으면 차라리 딸딸이를 포기하지 고기는 포기 못한다 그리 먼 곳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다. 바로 옆 나라 일본에서 생긴 일이다. 일본놈들은 윗대가리 비건들이 맘대로 내린 명령 때문에 강제로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했다. 몇년 동안이나 그랬을까? 무려 1200년이다! 1675년도 아니고 675년의 일이다 당시 일본의 킹 오브 킹이었던 텐무텐노라는 비건이 있었다. 이 새끼는 그야말로 트위터 비건의 전형적인 예시였다. 내로남불이 개쩔었단 소리다. 텐무텐노는 즉위할 때부터 미친놈이었는데 딴 사람도 아니고 자기 조카 통수를 후려쳐서 덴노에 올라간 개새끼다. 불쌍한 조카는 어떻게 됐냐고? 억지로 할복시켜서 죽여버렸다. 뭐 여기까지야 개새끼긴 해도 옛날 정치인들이 다 하던 일이었으니 봐줄만한 일이긴하지만 그 다음이 가관이었다 흑흑 너무 슬퍼 조카는 니가 죽여놓고 이제와서 왜 우냐 처음부터 죽이질 말든가 아니 조카는 조까고ㅋㅋ;; 내가 슬픈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럼 니들 저기 소 보이지? 흑흑 음머 흑흑 저 소를 봐 눈물을 흘리고 있잖아 아마 농사일이 너무 힘들거나 바람막이가 너무 비싸서 그런가봐 근데 너희 농민 새끼들아 니들은 소의 눈물이 안 보여? 공감능력 없어? 어떻게 저렇게 힘들게 일하는 소를 잡아먹기까지 할 수 있어?? 그게 다 육식 때문 아닐까? 단백질을 너무 많이 섭취해서 공감능력이 휘발된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너희들도 동물의 감정을 존중하는 비건이 되면 어떨까? 니 새끼는 공감능력을 우리한테는 왜 발휘를 안 하는데 그 힘든 농삿일을 고기도 안 처먹고 어떻게 하냐 미친 새끼야 고기 처먹으면 니들도 고기로 만들어버릴 거야ㅠㅠㅠㅠㅠㅠㅠㅠ 정말 미친 내로남불이 아닐 수 없다 조카한테 사시미 쑤셔넣은 놈이 살생은 나쁘다고 고기를 처먹지 말라니 근데 문제는 이 비건이 일본 역사상 최고의 권력을 가진 비건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내로남불 비건 새끼가 친 지랄질은 일본에 1000년이 넘는 육식금지시대를 만들어내고 만다. 소, 닭, 돼지, 개, 원숭이, 말을 먹는 놈은 그날로 인생 종치는 거다. 이게 육식금지령도 아니고 살생금지령이라서 사냥도 마음대로 못했다. 뒤에 3개는 그렇다치고 소랑 닭이랑 돼지를 못 먹는다니 개같은 것도 정도가 있다. 처먹으면 어떻게 되냐고? 굶어죽으라고 바위밖에 없는 섬으로 귀양을 보낸다. 사실 말은 군사용도니까 못 처먹고 소는 농사지어야하니까 못 처먹으니 이 두 개 정도면 옛날 이라는 거 감안하면 설득력이 있는데 돼지랑 닭을 못 처먹는건 그냥 개같은 비건 심보다. 돼지랑 닭은 까마득한 고대시대부터 인간들한테 풍부한 영양분을 제공해주는 필수가축이었는데 이걸 억지로 단절해버린 거다. 당연히 영양상태가 바닥날 수 밖에 없지 당시 일본이 왜 왜소할 왜자 써서 왜놈이라고 불렸겠음? 영양보급이 박살나서 키가 크고 싶어도 못 컸던 거다. 어딜가나 윗대가리가 지랄하면 아랫놈들만 고생을 한다. 이리하여 세계역사에서도 기형적인 일본의 식사문화가 시작되는데, 고기를 못 처먹으니 도축문화가 실전되어버려서 막상 동물이 죽어있어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모를 지경이 되고 말았다 혹시 예전에 유행하던 엘프들 나오는 이세계 요리만화 기억하냐 그게 진짜로 일어나버린 거다 일본은 세상에서 가장 개같은 밥만 처먹는 이세계인들의 세계가 되고 만 것이다 ([맛없는 밥 엘프와 유목생활]이라는 만화. 주인공이 미개한 식문화를 가진 엘프들에게 음식을 전파해준다는 내용인데 유목민이 치즈도 못 만드는 등 인류학적으로도 너무 말이 안되는 전개 탓에 작가의 무식이 매번 비판받는 작품.) 이 이세계물을 처음으로 체험한건 다름 아닌 조선 사람들이었다 국사 정도는 들었을 테니 일본에 정기적으로 놀러가던 조선의 통신사란걸 기억할 것이다 다들 알겠지만 조선은 아시아, 아니 세계를 통틀어서도 유난히 밥을 많이 먹는 파오후들의 나라였다. 당연히 고기도 자주 먹지는 못했지만 개 좋아했다. 이런 사람들이 강제비건화된 일본에 놀러갔으니 그야말로 이세계물을 찍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아아 이것은 [배고프다]라는 것이다. 밥을 내놓으란 뜻이지 오옷! 근데 배고픈게 뭔진 나도 알아 ㅄ아 맨날 그렇거든 아무튼 처먹으샘 뭐임 이건? ㅅㅂ 니들 우리 싫어하냐? 이게 뭔 밥이야 살무사 양식장이지 밑에서 뱀 나오겠다 개새끼들아 고기 없어? 먼 곳에서 온 사람들한테 이따구로 개같이 굴기임? [고기]...? [고기]란 것이 너희 세계에 있는 건가? 그렇다 지금부터 이세계 전개가 시작되기 시작한다 하아니 진짜 미친놈들인가 저기 닭도 있잖아 니들 닭 안 먹음? 안 먹을 건데 치킨 왜 키움? 닭...? 아아 저건 [시계]라는 거다 아침 시간을 알려주는 거지 너희들의 세계에선 [시계]를 먹는 건가...? 그렇다. 일본에게 닭은 먹는 용도가 아니라 자명종이었다! 하 ㅅㅂ 닭은 됐고 그럼 저기 있는 소나 한 마리 잡아서 구워와 님 어디 아픔? ? 아픈건 니들 미각 아님? 아니 소는 아플 때 먹는 거잖아 아프니까 약 찾는 거 아니냐고 아니 소를 왜 아플 때 처먹어 니들 농사 짓다 뒤진 소 안 먹었어? 스테이크 모름? [스테이크]...? 우린 소 뒤지면 그냥 태우는데 아 기름 많이 나와서 촛불 켤 때 개꿀임 ㅋㅋㅋ 이거 진짜 아픈 놈들이네 심지어 소가 그냥 죽어도 아무도 안 먹었다. 애초에 먹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소가 뒤지면 일본 사람들은 배고파서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한점 떼어먹을 생각은 못하고 그대로 태워서 기름만 가져다가 썼다. 고기 타고 남아있는 뼈도 고아먹긴 커녕 땅바닥에 그대로 묻어버렸다. 소를 아예 전혀 안 처먹은건 아니고 약재로 쓰긴 했는데, 이게 말 그대로 약이라서 맛 같은 거엔 1도 신경을 안 썼다. 그냥 고기 가루내서 뭉친 미트볼을 약이랍시고 팔았던 거다. 이 약을 얻는 과정도 가관인데 고기를 안 처먹으니 소를 어떻게 죽여야 할 지도 몰라서 도축기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약이 필요하면 소를 낭떠러지에 세워놓고 떨어뜨려 죽인 다음에 살점을 주먹만큼만 때어가는 식으로 비효율의 극치였다. 그만하자. 돼지는 있지? 삼겹살 정도로 타협하자 우리 돼지 안 키우는데 니들은 대체 왜 사냐? 소도 안 처먹고 닭은 시계로 쓰는데 돼지는 기르겠냐. 당연히 돼지고기 같은 것도 꿈도 못꿨다. 아 근데 돼지 먹을 방법은 있음 오 뭔데 멧돼지 산 채로 잡아옴 우리 어떻게 죽이는지 모르니 죽이는건 니들이 알아서 하샘 아니 미친놈아 어어억 하도 고기 내놓으라고 땡깡을 부리니 일본은 통신사들한테 멧돼지를 생포해서 가져다준다. 솔직히 이건 엿먹어보라는 의도도 좀 있는 거 같다. 아무튼 조선 통신사들은 이런 기괴한 식습관이 하도 기억에 남았는지 이 새끼들 처먹는거 존나 이상하다고 기록을 존나 남겼다.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이세계 기행이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 사람들도 뇌가 있고 혀가 있는데 천년 동안이나 강제 비건질을 철저하게 지킨 것은 아니었다 고기를 원하는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시절부터 내려온 인류의 본능인데 그걸 어떻게 뿌리뽑냐 일본 서민들은 어떻게든 비건 파시스트들의 눈을 피해 고기를 처먹기 위해 온갖 꼼수를 다 부렸다. 그중 대표적인게 위에도 나온 멧돼지다. 집에서 대놓고 돼지를 기를 수는 없으니 산에 올라가서 몬스터 헌팅을 해서 멧돼지를 얻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멧돼지를 '산고래'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바다고기는 금지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흙수저 새끼들이 고기 처먹고 ㅈㄹ이냐 뒤질래? 아니 이거 고래고긴데 이게 뭔 고래고기야 누구 눈깔을 ㅄ으로 암? 님 고기 종류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음? 님 혹시? 일본 흙수저들이 이렇게 몰래몰래 고기를 먹는걸 '야쿠세키야'라 불렀다. 해석하면 약식이란 뜻이다. 즉 병 걸려서 약 처먹는다고 핑계대곤 마약거래하는 것마냥 어두운 곳에 숨어서 고기를 먹었던 것이다. 야쿠세키야를 하는 가게에는 주로 고래그림을 그려넣었는데,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단속 나왔을 때 걸리면 고래라고 구라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렇게 야쿠세키야에서 밀매한 고기들은 소, 돼지 같은 맛좋은 정석 고기가 아니라 여우, 늑대, 곰 등의 육식동물이나 산양이나 물소 같은 생소한 동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요리법도 모르니 닥치고 굽거나 삶아버리는게 전부였는데 그걸 또 맛있다고 숨어서 먹어대니 참 불쌍하고 안타깝다. 이련 연유로 생선요리는 엄청 발전한 주제에 일본 고기 요리는 개박살이다. 뭐 천년만년 비건으로 살 순 없다. 텐무텐노가 비건 지랄을 친지 1200년이 지난 후 일본에서도 더 이상 비건질 못해먹겠다는 아우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사쓰마' 같은 밀매랑 깡패짓으로 유명한 동네에선 공공연하게 돼지고기를 처먹기도 했고 그러던 와중에 사건이 하나 제대로 터진다 배틀크루저 오뻐레이셔널 1800년대 초기까지 일본은 흥선대원군 시절 조선마냥 쇄국정치를 하면서 여전히 풀만 뜯어처먹는 중이었다 그런데 서양인들이 배틀크루저를 끌고 일본에 처들어와서 대포를 쏴갈기면서 개항하라고 지랄을 한 것이다 난생 처음보는 시꺼먼 배틀크루저에서 존나 큰 대포를 빵빵 쏴갈기면서 야마토포의 위용을 보여주자 일본 친구들은 개쫄아버린 나머지 바닥을 뒹굴면서 항복항복을 외쳤다. 이게 그 유명한 '흑선사건'이다. 배틀크루저의 위용을 보고 우린 진짜 아무것도 아닌 개ㅈ밥이었구나 이러면서 테크차이를 실감하게 된 일본은 적극적으로 서양인을 모방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메이지 유신이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은 그동안 개같이 굴었던 비건 파쇼들까지 개박살낸다. 가장 먼저 비건 파쇼들의 싸대기를 후려치고 삼겹살을 굽기 시작한 건 다름아닌 메이지 덴노였다 왜 우린 양키들한테 발렸을까 헤어스타일이 ㅄ같아서? 스크롤 늘리는덴 도움이 됨 아니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겠냐 양키들 앞에만 가면 우리 키가 땅딸만한게 실감되서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거야 우린 왤케 키가 작냐 진짜 진짜 이유 모름? 진짜? 알았어 ㅅㅂ 이제부터 고기 처먹자 1872년 1200년을 이어왔던 육식금지령이 드디어 취소된다. 일본이 고기를 제대로 먹기 시작한게 150년도 안 됐단 거지. 근데 1000년이 넘도록 채식주의자들한테 조교당하다보니 처음에 일본 사람들은 고기를 억지로 먹이는거에 존나 거부감을 느꼈다. 심지어 밀교에 심취한 비건들이 고기 먹지 말라며 황궁에 처들어가는 황당한 일까지 생겼다. 비건파쇼들이 지랄을 하건 말건 일본 윗대가리들은 이전까지와 180도 태세를 바꿔서 국민들한테 고기를 먹이려 안달을 내기 시작했다. 오죽 열성이었으면 그 당시 쇼군 별명이 '돈이치상', 즉 돼지씨였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이 만나는 사람마다 돼지고기를 츄라이하고 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효과는 그다지 좋질 않았다 아니 먹으라고 하니까 또 지랄이네 도대체 왜들 그럼 먹는 방법도 모르고 익숙하지도 않은거 어떡함;; 아니 그동안 고기 몰래 존나 처먹은거 나도 다 안다 것도 돈 있는 새끼들이나 그랬거든 익숙하지않고 나발이고 일단 그놈의 돈이 문제였다. 애들 덩치 키운다고 육식을 장려하면 뭐하냐 서민들은 돈이 없는데...고기는 예나 지금이나 비싼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기 안 먹던 놈들한테 익숙함을 주거나 적은 고기로 양 많은 음식들이 발명되게 되는데 고기의 비린내를 일본에 익숙한 된장으로 가리고 값도 싼 '규나베'나(당시 서양 스테이크의 5분의 1 정도의 가격) 우리 지갑처럼 얇아터진 고기에 튀김을 두껍게 둘러 양을 늘린 '돈까스'가 탄생하게 된다 행-복 뭐 그렇게 비건 파쇼들의 천년이 넘게 이어진 지랄은 끝나게 된다. [출처-디시인사이드 고질라맛스키틀즈] 진짜 역대급 분량에 역대급 욕설... 필터링을 거치긴했으나 여전히 욕이 많읍디다...
[스압] 전쟁 덕에 대박난 음식 몇 가지
스팸 요즘 한국에서야 스팸을 공짜로 뿌린다면 유토피아가 됐다며 좋아하겠지만 공짜 스팸이라고 꼭 좋지만은 않았다. 2차대전을 보면 특히 그렇다. 1940년 영국의 식량사정은 개박살난 상태였는데 왜냐면 나치새끼들이 잠수함을 때려박아서 온 바다에서 분탕질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량 상당수를 해외에 의존하는 영국에게는 심각한 문제였다 당시 영국이 얼마나 굶고 살았냐면 배급표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영국 성인 남자가 받을 수 있는 식량은 고기 550g과 달걀 반 개가 전부였다 고기 550g이면 삼겹살 3인분 정도 된다. 충분히 많지 않냐는 생각이 들 텐데 이걸로 1주일 버티라고 하면 생각이 좀 달라질걸 하루에 고기 0.5인분 이하니까 그런데 갓조국 미국이 전쟁에 참가하고 동맹국한테 식량을 무자비하게 뿌리기 시작하면서 식량의 양적인 상황은 많이 나아지기 시작한다 갓조국이 뿌린 음식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스팸이었는데 말 그대로 수억 개씩 뿌려댄 덕분에 영국 사람들은 처음 몇 달 정도는 환호했다 물론 아침에 스팸 수프먹고 점식으로 스팸 바베큐먹고 저녁으로 스팸 스튜 먹는 걸 6달 정도 반복한 뒤에는 앵간히 인성 좋아도 욕을 참기 힘들 것이다 근데 스팸 안 먹으면 다른 선택지가 별로 없거든 굶어 뒤지는건 별로 유쾌한 선택지가 아니다보니 다들 꾸역꾸역 스팸을 먹게되고 결국 스팸은 공전의 대박을 치는 초히트상품이 된다 영국인들은 조금이라도 스팸을 덜 물리게 먹어보려고 온갖 음식을 개발했는데 그래봤자 유전자 단위로 요리재능에 파멸을 선고받은 영국인들인지라 결과물은 신통치않다 당장 저 유명한 스팸튀김부터 시작해서 스팸 팬케이크라든지 딸기잼에 찍어먹는 스팸도넛이라던지 파멸적인 음식들이 탄생하게 된다 이런걸 먹고도 전쟁에서 싸운 영국군들에게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다 스팸메일이란 표현의 유래가 되었을 정도로 스팸 이미지가 개똥일만도 하다 스팸 비싸서 명절 선물로 교환하는 한국은 서양권에서 보면 상당히 특이한 이미지겠지 딱히 영국에만 스팸이 뿌려진 것은 아닌고로 다른 장소에서도 남아도는 스팸을 이용한 요리가 발달하는데, 하와이에서 발달한 스팸 무스비처럼 그럴싸한 요리도 있다. 왜 뜬금없이 하와이에서 일본음식에 들어가는 무스비와 스팸이 퓨전합체를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하와이 음식임 넓게 보면 부대찌개도 이 부류에 들어간다 물론 개중에는 영국만큼이나 끔찍한 피조물이 탄생하기도 하는데 홍콩의 스팸 라멘이 그것이다 누가 영국식민지 아니랄까봐 진짜 굉장한 비쥬얼이다 장어 스팸과 마찬가지로 국내에선 비싼데 영국에선 개싸구려 이미지인 케이스다 원래 영국에서 장어 하면 가난뱅이 새끼들이나 먹는 생존식품이라는 이미지였다 고슴도치 고기나 비둘기 구이쯤 되는 이미지였던거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영국은 제일 먼저 산업혁명을 일으킨 나라라는데서 장어 이미지가 박살난다 장어가 우리는 노예가 되지 않는다며 러다이트 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은 아니고, 산업혁명으로 우후죽순 세워진 공장들에서 나온 폐수가 다 어디로 갔을 거 같음? 템스강으로 전부 흘러갔다. 곧 템스강은 참피 수영장만도 못한 끔찍한 꼬라지로 바뀌었고 템스강에 살던 물고기 새끼들은 전부 용궁으로 사출당했다 장어만 빼고. 장어는 그 지랄이 난 템스강에서도 오히려 활개치면서 활발히 번식했다 다들 알다시피 장어는 진짜 엄청나게 생명력이 강한 생선인데 이 놈이 정력에 좋다는 소문도 그 생명력에서 비롯된거다. 대갈통 잘라서 냄비에 넣고 끓여도 도무지 뒤지질 않는 존나 킹기도라같은 놈이다. 장어가 안 뒤지면 좋은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생각해봐라 폐수 오염물질 둥둥 떠다니는 곳에서 살아가는 생선 건져먹을 생각이 드냐 당연히 멀쩡한 사람이면 안 건드리지. 내일 설사로 뒤지더라도 오늘 고기맛은 봐야겠다는 흙수저들이나 건져먹는게 장어였다 근데 2차대전이 터졌다. 그리고 잔혹한 소금돼지시체뭉침 스팸이 식탁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인들은 절규하며 강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빈민들이나 먹던 장어는 전영국인이 즐기는 대중식품으로 격상하게 된다 아 차라리 격상하지 않는게 좋지 않았을까 쓰레기물에서 살아서 그렇지 비쥬얼도 그야말로 쓰레기 그 자체다 어떻게 소스까지 초록색이지 색깔이 참피색인 이유는 전쟁 중에도 그나마 쉽게 구할 수 있는 파슬리로 소스를 만들어서 그런데 암만 봐도 참피 갈아서 만든 것처럼 생겼다 장어를 그냥 굽고 젤리 될 때까지 만든 장어 젤리와 장어 토막친 것과 파이에 초록 소스를 끼얹어 내는 파이 앤 매시는 스팸을 제외하면 거의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육류였기 때문에 또 대박을 친다 다만 이런 튀김+국물 조합은 재료의 품질을 숨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해서 썩어가는 장어로 만든 파이 앤 매시 떄문에 벌어지는 수많은 식중독은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이었다 팝콘 영화관 하면 팝콘을 빼놓을 수 없다 X스맨 X크 X닉스 같은 X같은 영화를 보면 내 손 안에 팝콘이 들려있다는게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진 그레이가 개소리 떠는 걸 보느니 입안에서 팝콘 부서지는 소리 감상하는게 몇 배는 더 박진감 넘친다 그런데 의외로 팝콘=영화관 이미지가 잡힌것도 2차대전 때의 일이다 2차 대전에도 미국 영화 산업은 존나게 활발했는데, 이 당시에는 오히려 영화관에 팝콘 들고가는게 금지였다 왜 금지인지 이유가 안 떠오르면 최근 영화관 갔다가 영화 끝났을 때 영화관 바닥의 참상을 생각해보자 바닥에 끝없이 널려있는 팝콘쪼가리를 영화관 주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욕지거리가 터질 것이다 그래서 2차머전까지 영화관에서 인기있는 식품은 달달한 초콜릿이나 사탕 계통의 음식이었고 팝콘은 길거리에서 가끔 사먹는 싸구려 음식 정도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2차머전이 터지고 나서 이 잘나가던 영화관 초콜릿이 전멸해버리는데, 왜냐면 초콜릿 생산량이 전부 군바리들에게로 몰렸기 때문이다 다들 알다시피 전쟁터에서 단 거 만큼 절박한게 없다 아무리 갓조국이라도 군인한테 설탕 몰빵해주면서 민간에까지 뿌릴 여유는 없었기 때문에 곧 미국 전역은 당분 부족에 시달리게 되는데 영화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 보면서 혓바닥이 심심하신 관객들을 위해서 등장한 것이 싸구려 식품의 대명사 팝콘이었다 팝콘은 원가가 진짜 싸도 너무 싸서 전쟁 중의 박살난 경제 상황 중에서도 충분히 저가로 공급될 수 있었다 결국 팝콘이 영화관 식품의 대명사가 될 때까지는 채 5년도 걸리지 않았다 근데 분명 싸서 경쟁력 가졌던 새끼들인데 요즘 가격은 왤케 창렬인지 모르겠다 X발 옥수수 덩어리에 꿀 존나 얇게 처발랐더니 국밥 두 그릇 가격이 나오네 개새끼들 결론은 영화관에 국밥을 들고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 - 개드립] 놀랍게도 심한 욕은 필터링한 상태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구 미니어처로 살펴보는 문명
NASA의 자료를 바탕으로 Anton Balazh라는 그래픽 아티스트가 만들어낸 형상들이다. 기존 지형도들이 수직적인 높이가 부족해 지형을 알아보기가 힘들어 해발 고도를 몇 배 더 높여서 지형을 체감시켜주는 지도다. 남미 칠레의 척박한 환경을 나타내는 안데스 산맥이 남미 서해안선을 따라 높이 솟아있다. 세계 3대 옥토라고 불릴 정도로 크나큰 농업, 목축 생산을 보여주는 아르헨티나의 팜파스 지대가 펼쳐져 있다. 미국 서부와 멕시코 상부. 왼쪽 산지들 사이에 움푹 들어간 산지가 바로 캘리포니아주다. 그 아래 작은 섬들 네다섯 개와 면해있는 곳이 로스앤젤레스. 북쪽에서 내려오는 산맥이 로키 산맥이고, 가운데 떨어져 있는 산지들이 유명한 옐로우스톤이다. 알래스카의 모습. 아래로 길게 이어진 열도가 바로 알류산 열도. 미국이 애치슨 라인을 설정할 때 알류산으로부터 기준을 잡았고,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는 결과를 낳았다.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의 북유럽 지역. 스칸디나비아 산맥의 척박한 지형과 추운 기후를 통해 바이킹들이 왜 배를 타고 약탈하러 다녔는지 알 수 있다. 프랑스의 국력의 원천이 된 프랑스의 드넓은 평야 지대가 눈에 띄고 '피레네 이남은 아프리카'라는 말을 나폴레옹이 남기게 한 범인인 피레네 산맥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실제로 스페인은 유럽 중앙에 얽힌 역사보다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과 싸우는 역사가 더 길었다. 아래쪽에는 아프리카의 아틀라스 산맥과 스페인 남부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어지다 끊긴듯이 떨어져 있다. 실제로 저곳은 지중해의 출구 역할을 하는 중요한 요충지이기 때문에, 영국이 점령한 뒤 내어주지 않고 있다. 이탈리아 경제의 중심이 왜 북부인지 알 수 있는 사진. 이탈리아의 아펜니노 산맥이 급격하게 우회하며 알프스 산맥과 이어져 있고,  그 사이의 평지에 밀라노나 베네치아 같은 대도시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다. 오른쪽 상단에 물음표 모양으로 분지를 만들고 있는 산맥은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1차대전, 2차대전을 통해 헝가리의 영토는 줄어들었지만 과거 카르파티아 산맥이 감싸고 있는 저 평원은 온전히 모두 헝가리 왕국의 땅이었다. 소아시아라고 불리기도 하는 유럽 역사에 중요한 장소, 아나톨리아 반도다. 옹기종기 섬들이 모여있는 바다가 에게해이고 그 기준으로 왼쪽이 현재의 그리스이고, 오른쪽의 아나톨리아 반도가 현재의 터키다. 사진에서 보이듯이 그리스와 아나톨리아는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요충지였고 그렇기 때문에 비잔티움(동로마), 셀주크 튀르크, 오스만 제국 등 수만은 대제국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아나톨리아와 그리스가 이어지는 부분에 있는 도시가 바로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이다. 오른쪽의 사막지대가 기독교의 발상지인 레반트 지역이다. 가운데 아래쪽에는 가장 오래된 문명인 이집트 문명을 키운 원동력. 비옥한 나일강 삼각주가 보인다. 아래쪽 페르시아만을 기준으로 아래쪽은 사우디 아라비아, 위쪽은 이란이다. 이란고원은 과거 페르시아 제국이 융성했던 지역으로 대부분의 땅이 고원지형이다. 아나톨리아/이집트/메소포타미아/이란 등 페르시아는 다양한 문명을 정복하며 최초의 세계제국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한 이란 고원의 위쪽에는 세계 최대의 호수 카스피해가 있다. 카스피해 왼쪽의 직선 산맥은 캅카스 산맥으로 러시아와 서아시아를 구분하는 장벽이 된다. UFC 파이터 하빕의 고향도 캅카스이고,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도 캅카스 출신이다. 인도다. 인도 남부의 넓은 고원은 데칸고원이다. 데칸 고원 위로 펼쳐진 넓디 넓은 평야는 힌두스탄 평원으로, 현재에도 대도시들의 다수가 저기에 있고 과거 인도의 대제국들도 저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힌두스탄 위쪽의 장막처럼 펼쳐진 산맥이 바로 난공불락의 히말라야 산맥이고 그 너머로 펼쳐진 높은 고원은 바로 티베트 고원이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중국와 인도라는 바로 옆에 위치한 거대한 문화권이 섞이지 않고 유지될 수 있게 해주었다. 아래쪽에 테즈메니아 섬이 있고, 그위로 호주 본토에는 동해안을 따라 산지가 펼쳐져 있는데 그 산지를 따라 브리즈번, 맬버른, 캔버라, 시드니 등 호주의 대도시들이 죽 이어진다. 호주의 드넓은 대천정 분지와 사막이 보인다. 실제로 호주 인구인 2400만 명 중 98%가 동서 해안의 대도시에 거주하고, 드넓은 사막에는 단 2%만이 산다. 뉴질랜드다. 남섬의 척박한 산지와 빙하지형이 보인다. 만년설로 뒤덮힌 산지가 서던 알프스 산맥이다. 인도와 중국의 사이에 위치한 인도차이나 반도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미얀마 등 우리가 아는 동남아다. 동쪽 해안선을 따라 쭉뻗은 산맥은 베트남과 라오스를 구분해주는 안남 산맥이고, 서쪽에는 미얀마의 지붕 아라칸 산맥이 뻗어있다. 중국이다. 오른쪽 위의 드넓은 평야가 바로 중원. 수천년 동안 사람들이 살면서 전쟁과 농사 등으로 지력을 다써버리고 기후 변화 등으로 황하강의 농업 생산량은 현재 매우 낙후된 상태지만 당시 황하강 유역의 중원은 고대 중국에서 물량을 사기급으로 뽑아내던 지역이다. 한국과 일본은 대다수가 산지인데, 일본은 도쿄지역에 칸토평야를 가지고 있다. 왼쪽 저멀리 위쪽에 보이는 사막이 황사의 근원지인 고비사막이다. 한반도 위쪽에는 만주벌판이 자리잡고 있는데, 러시아 연해주와 맞닿아 있는 오른쪽의 분지는 삼강평원으로, 오늘날 동북삼성의 최고 곡창지대이다. 출처 에펨코리아 이런거 보면 지형이 국력을 만드는게 사실인 것 같다 과거에 두발로 쳐들어가서 전쟁하던 시대에는 결국 지형, 기후가 승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으니까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은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