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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문들을 찍어 보았다+_+ #예쁨주의
이왕 온 김에 반가워해 주시는 분들도 (아주 조금) 계시니까 저도 반가운 마음에 더 올려 봅니다 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예쁜 창문 모음 시리즈 올렸던 거 기억하는 분 호옥시 계신지 모르겠지만 그 때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셨던 기억이 나서 오랜만에 문 시리즈를 가져와 봤어영! 요런 느낌으루다가 아니면 요런거! 그 때는 이런걸 올렸더랬져 다시 봐도 예쁘구만 오늘은 위에서 본 사진들과 같이 Bella Foxwell라는 사진 작가가 찍은 런던의 현관문 사진들을 보여 드릴 예정이에여 +_+ 우리나라와는 일반적인 주거 형식이 다른지라 집주인의 취향껏 꾸며진 현관문들 함께 보실까여? 아니 이건 마치 동화 속... 예쁘다...+_+ 여기까지만 봐도 컨셉이 보이는게, 작가의 의도는 웨스 엔더슨의 영화 속에 나오는 것 같은 문들을 찍었다고 해여. 잠시 웨스엔더슨이 누군지 알려 드리자면 ㅋㅋㅋㅋ 요런 분 ㅋㅋㅋ 한국에서도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과 문라이즈킹덤으로 유명하시져 동화적인 색감으로 유명하신 분+_+ 계속 보실까여? 영화 배경 같은 문들을! 너무 많나 싶어서 좀 빼긴 했는데 그래도 많아서 뭘 더 빼지 고민하다가 다 예뻐서 그냥 에라 몰라 넣어 부렸어요 ㅋㅋㅋㅋㅋㅋ 더 많은 예쁜 문들이 보고 싶으시다면 이 사진 작가분의 인스타그램으로 가보시길! 여기입니당 +_+ 그럼 오늘도 눈요기거리 드리기를 완료했으니 진짜 이만... 언젠가 (어쩌면 곧) 또 올게여!
가장 인기있는 홉(HOP)에 대해서 알아보자
안녕하세요. 오늘은 맥주를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홉(HOP)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까 합니다. 홉은 맥주 재료로 사용되며, 정말 다양한 용도로 활용됩니다. 하지만, 홉이 맥주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확히 어떤 홉이 인기있고 가장 많이 사용되는지 궁금하실텐데요. 이번 기회를 통해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2020년에 공개한 홉 생산 랭킹은 보면, 캐스케이드(CASCADE) 홉, 센테니얼(CENTENNIAL) 홉이 가장 많이 사용되어 왔는데요. 물론, 현재 트랜드를 선도하고 있는 시트라(CITRA), 모자익(MOSAIC)도 높은 순위권을 차지했습니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현재 단순히 대기업 뿐만 아니라 소규모 양조장이 사용하는 홉의 트랜드가 세계 홉 시장에 큰 영항을 키치고 있다는 점인데요. 특히, 대기업, 소규모 양조장 가리지 않고 가장 많이 사용되는 캐스케이드(CASCADE) 홉은 전체 홉 생산량의 10%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2012년에는 30%를 차지한 것에 비해서는 분명 하락한 수치이며 이는 현재 사용되는 홉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불과 5년 전만 해도, 큰 입지를 갖지 않았던 Cashmere、Comet、Strata、Idaho 7, Sabro 등 홉이 큰 폭으로 상승했습니다. 이 외에도, 홉 사용 방식에도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단순히 '신선한' 홉을 사용했다면 현재는 Cryo Hops(냉동 신선 홉), Incognito Hops(이산화톤소 분쇄 보관 홉) 등 다양한 형태의 홉 사용량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는 양조 기술이 발전하면서, 홉의 디테일부분까지 세분화되어 홉의 형태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마냥 홉을 많이 넣은 맥주가 맛있을까? 당연히 아닙니다! ㅎㅎ 이는 어디까지나 어떤 맥주 스타일을 만들고 어떤 캐릭터를 사용할지에 따라 결정되는데요. 전체적으로는 홉 투하량은 감소세에 있어 마냥 홉을 많이 넣은 맥주가 맛있다는 말은 꼭 맞는 말이 아닌거 같습니다. 홉 생산량 TOP 10: 1. CASCADE 2. CENTENIAL 3. CITRA 4. MOSAIC 5. SIMCOE 6. CHINOOK 7. EL DORADO 8. AMARILLO 9. CRYSTAL 10. MAGNUM 현재는 한국 소규모 양조장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홉들이 TOP 10을 차지했는데요. 개인적으로 홉의 캐릭터를 잘 파악하고 싶다면, 신선함을 많이 강조하는 맥주를 드셔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양조장이나 관련 업장에서도 해당 스타일은 최대한 신선한 상태로 보관하기 때문인데요. 스타일 명으로는 NEIPA, IPA, 클래식 SAISON, 클래식 PALE ALE 스타일을 한번 드셔보시길 바랍니다. 혹은 내가 특정 홉의 맛을 알고 싶다하시면, 보틀샵이나 텝룸에 방문에 문의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조 기술이 발전하면서 올해도 정말 많은 신규 홉이 출시되었는데요.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홉을 만날 수 있을지 큰 기대가 됩니다 :)
현재 홍콩을 바라본 한 대학생의 외침
길기는 하지만 너무 명문이라 생각되어서 모두 가져옵니다 마땅히 시간이 나지 않는 분들은 클립해서 나중에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연대숲 #66147번째 외침: 콘스탄티노폴리스 1453, 광주 1980, 그리고 홍콩 2019. 인간은 현명하다. 그래서 가망이 있는 싸움인지 아닌지를 쉽게 안다. 인간은 어리석다. 그래서 가망이 없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죽으러 나간다. 인간은 고결하다. 그래서 가망이 없는 싸움에서 결국 승리한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한때 지중해를 빙 둘러쌌던 보편제국 로마의 마지막 조각, 그리스 끝자락의 ‘그리스도를 믿는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는 이제 십만 명이 넘는 투르크의 포위군과 거대한 대포에 둘러싸였다. 이에 맞선 방어군은 7000명 미만. 교황청과 베네치아가 보내 준 극소수의 병력과 한 줌의 의용군을 제외하면, 서유럽의 수많은 나라 중 단 하나도 도시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살고 싶으면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야 했다. 50여일의 처절한 공방전 후 다가온 투르크군의 총공격 전날 밤, 그리스 혈통의 마지막 로마인들은 살기 위해 성문을 열고 메카를 향해 절하는 대신 하기아 소피아의 그리스도 모자이크 아래에서 밤새 기도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음을 그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다음 날 도시는 함락되었고 시민들은 자신들의 자유와 동방 정교회 신앙을 위해 가망 없는 싸움에서 싸우다 죽었다. 그렇게 이천년의 로마가 끝났다. 1980년, 광주. 도시는 계엄군의 탱크와 장갑차에 둘러싸였다. 학생들과 평범한 아저씨 아줌마들로 구성되었던 시민군의 무장은 경찰서 무기고에서 얻은 소총 수준. 도시의 모든 통신시설은 차단되었고, 당시 평시작전권까지 가지고 있던 주한미군은 계엄군의 병력이동을 알면서도 저지하지 않았다. 그 어떤 서방 선진국들도 적극적으로 개도국 한국의 한 지방도시에 대한 군사작전에 개입하지 않았고, 도시 밖에는 빨갱이들과 북괴의 특수부대가 도시를 점령했다는 거짓 뉴스가 살포된다. 이런 사황에서 계엄군과 맞서면 죽을 것이란 것은 시민군 모두가 알고 있었다. 특히 군필자들은 더 확실히 다가오는 죽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탱크의 궤도 소리가 들려오던 전남도청의 마지막 밤, 시민군들은 도망치는 대신 애국가를 불렀다. 민간인들이 공수부대를 당해낼 수 있을 턱이 없었으므로, 광주시민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가망 없는 싸움에서 공화국 대한민국의 주권자로서 저항권을 행사하다 죽었다. 그렇게 1980년 서울의 봄은 광주의 피바다로 끝이 났다. 2019년, 홍콩. 손바닥만한 도시는 인민해방군 특수부대에게 둘러싸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광주와는 달리, 이번에는 도시 밖의 사람들도 스마트폰으로 도시의 소식을 듣는다. 한 남자 대학생이 건물에서 떨어져 죽었으며 열여섯 살 소녀가 경찰들에게 강간당했고 한 여자 중학생은 바다에서 알몸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2019년’에 들려온다. 시위대는 진압군에게 양궁으로 화살을 쏘고, 진압군은 시위대에게 총으로 실탄을 쏜다. 10대와 20대가 주축을 이루는 시위대는 이제 각 대학의 캠퍼스에 갇혔고, 마오쩌둥 꿈나무 시진핑은 전 세계에 강경진압도 불사하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영중공동선언과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정으로 보장되는 “주권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치권은 홍콩특별행정구가 각각 행사한다”는 일국양제의 약속은 시진핑의 말 한마디에 휴지조각이 되었다. 보아하니 지난 학기 국제법 교과서에 쓰인 문장은 실로 참되다. “국제법은 법이 아니다.” 이처럼 베이징의 결단은 명징하다. 홍콩에서 밀린다면, 타이완에서, 티베트에서, 신장위구르에서, 광시좡족 자치구에서 똑같이 밀릴 것이고 그 순간 중화인민공화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 것이다. 시진핑에게는 1989년 천안문을 소규모로 재현하는 한이 있더라도, 국제사회의 전방위적 제재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홍콩 시위를 진압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는 탱크를 구룡반도로 돌진시킬 정도로 멍청한 자가 아니므로, 유혈사태를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시위를 분쇄하려 하겠지만. 중국 본토를 제외한 전 세계가 홍콩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지만, 나설 수 있는 그 누구도 감히 나서지 않는다. 워싱턴의 천자는 민주당의 탄핵 카드와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빨간불이 켜진 재선 상황에서 중국과 국력을 기울여야 할 정도의 극단적인 갈등을 빚을 여력이 없다. 중영공동선언에 의해 홍콩의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 개입할 의무가 있는 영국 총리는 브렉시트 문제에 발목이 잡혀 있다. 외무장관 시절 보여주던 보리스의 현란한 막말실력은 감히 베이징을 향하지 않는다. 유럽과 이혼중인 이빨 빠진 사자 대영제국은 이제 자신의 손을 떠난 도시 하나 때문에 굴기하는 중국과 맞설 의지도 힘도 없다. 모스크바의 차르는 그의 신민들이 홍콩을 따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가 홍콩을 위해 힘을 써 줄 이유 같은 건 없다. 예배당과 성당에 경찰이 난입하여 시위대를 끌어내는 상황 속에서, 즉위 이래 평화를 위해 싸워온 로마의 프란치스코도 이번에는 중국을 소리높여 강하게 비난하지 못한다. 수십 년의 갈등 끝에 중국과 바티칸의 주교서임권 정교협약 물밑협상이 막바지에 다다라 있는 상황에서, 그 어떤 전임자들보다 미디어와 도덕성이라는 소프트파워를 잘 다뤄온 교황이 적극적으로 홍콩 편을 든다면, 안 그래도 그리스도교를 체제의 위험분자로 인식해 탄압하는 중국 정부에 의해 본토의 수천만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들은 지금보다 더한 극도의 박해에 직면할 테니까 말이다. 1980년 광주를 두 눈으로 지켜본 ‘인권변호사’ 출신 대한민국의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2016년 사드배치로 인한 경제보복의 기억이 생생한 상황에서, 한국에게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도시 홍콩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거대한 중국과 맞서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자살행위일 테니까. 그를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홍콩에 대한 그의 침묵을 도덕적 이유가 아니라 현실정치적 이유로 욕하기는 어렵다. 여당도 제 1 야당도 제 2 야당도 이 지점에 있어서는 꿀 먹은 벙어리일 수밖에. 이렇게 전 세계가 보고 있지만, 홍콩의 시위대를 위해 중국과 맞서 줄 세력은 없다. 시진핑은 시위대를 탱크로 밀어버리지는 못하겠지만 이미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실탄사격 개시 명령을 내려놓았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슬프고 두렵고 안타깝지만 시위대는 아마 이 싸움에서 이기기 힘들 것이다. 며칠 안으로 홍콩 각 대학의 마지막 저항은 진압되고, 추가적인 사망자가 나올 것이며, 중국은 언제나 그랬듯이 적당히 유화적인 조치와 시위대 사면이라는 당근을 통해 세계에 변명하리라. 아마 홍콩에서 지금 시위하는 10대 소녀 소년들과 20대 남녀 대학생들도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거대한 괴물 중화인민공화국을, 자신들이 ‘지금’이길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민주주의를 공기처럼 누리는 우리도 그들만큼 잘 알고 있다. 홍콩의 우리 또래, 우리 동생 또래들이 왜 가망이 없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서고 캠퍼스에서 농성하는지를. 그렇다면, 홍콩의 시위는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일까? ‘고결한 희생’ 일 뿐일까? 결국 홍콩의 민주주의는 인민해방군의 군화발에 무너질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스탄불로 바뀌어, 영원히 터키의 수중에 남았다. 하지만 함락으로부터 40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후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기억하는 그리스의 동방 정교회 신도들은 ‘자유가 아닌 죽음을!’을 외치며 가슴에 도시의 회복을 품고 독립운동을 벌여 투르크와 싸웠다. 이번에는 바이런을 필두로 유럽의 열강들이 달려왔고, 그리스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되찾지 못했으나 자유는 되찾았다. 아직도 그리스에서는 이스탄불을 콘스탄티노폴리라고 부르며, 동방 정교회의 세계총대주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라고 불린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그렇게 이름 그대로 그리스인들에게 영원히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의 도시, 그들의 마음 속 도시로 남았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학살극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1980년을 잊지 않았다. 그 후 7년 동안, 수많은 대학생들은 독재정권과 지속적으로 가망 없어 보이는 싸움을 했다. 대공분실에서 코로 설렁탕을 마셔야 했고, 최루탄 연기를 마셔야 했으며, 고문으로 장애를 얻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1980년 광주에서의 싸움은 전남도청의 피바다로 끝난 것이 아니라 1987년 백양로의 이한열의 피로 끝났다. 그 피로써 공화국은 다시 민주주의와 자유를 얻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광주는 빛고을이라는 이름 그대로, 우리에게 자유의 빛을 다시 밝혀 주었다. 7. 나는 하느님을 믿는 만큼이나 기적을 믿는다. 그래서 홍콩 시위대가 승리하기를, 더 이상 홍콩의 누구도 피를 흘리지 않기를, 중화인민공화국이 무력진압 대신 타협과 협상을 선택하기를,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정말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2019년의 홍콩 시위가 진압당한다고 할지라도, 소녀들과 소년들, 남녀 대학생들이 인민해방군의 군화에 짓밟히고 체포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끝은 아닐 것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그랬고 광주가 그랬듯이, 그것이 홍콩의 끝은 아닐 것이다. 만약 중국이 홍콩을 짓밟는다면, 온 세상이 ‘중화인민공화국’이 빛나는 중화문명의 계승자도, 인민을 위한 나라도, 공동선을 추구하는 공화국도 아닌 시황제의 진나라의 21세기 복제판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고, 중국 대륙에서 중국 공산당에 의심을 품는 모두의 마음 속에 홍콩이 흘린 피와 눈물이 영원이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기억했고, 한국인들이 광주를 기억했듯. 그리고 그 기억이 결국 절망적인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음을 우리는 보았다. 그렇게 2019년의 홍콩에서 벌어지는 이 절망적인 싸움을 통해, 온 세상은 ‘빛나는 중화 문명’의 계승자들이 바다를 등지고 자유와 민주를 위해 싸울 때 얼마나 고결한 향기를 뿜는지를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진핑이 아니라 마오쩌둥이 살아돌아와도, 폭력과 살육의 악취로 그 향기를 가리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홍콩 사람들도 결국 가망 없는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다. 8. 홍콩은 향항, 향기로운 항구라는 뜻이다. ------------------------------------------------------------------------------ 中华人民共和国宪法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第三十三条  ....... 国家尊重和保障人权 제33조 ........국가는 인권을 존중시하고 보장한다. 第三十五条 中华人民共和国公民有言论、出版、集会、结社、游行、示威的自由。 제35조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은 언론, 출판, 집합, 결사, 행진, 시위의 자유를 가진다. 第三十七条 中华人民共和国公民的人身自由不受侵犯。任何公民,非经人民检察院批准或者决定或者人民法院决定,并由公安机关执行,不受逮捕。禁止非法拘禁和以其他方法非法剥夺或者限制公民的人身自由,禁止非法搜查公民的身体。 제37조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의 인신의 자유는 침해받지 아니한다. 어떠한 공민도 인민검찰원의 승인이나 결정 또는 인민법원의 결정을 거친 후 공안기관의 집행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되지 아니한다. 불법구금 및 기타 방법으로 공민의 인신자유를 불법으로 박탈 또는 제한하는 것을 금지하며 공민의 신체를 불법으로 수색하는 것을 금지한다. 第三十八条 中华人民共和国公民的人格尊严不受侵犯。禁止用任何方法对公民进行侮辱、诽谤和诬告陷害。 제38조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은 인격의 존엄성을 침해받지 아니한다.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공민에 대하여 모욕, 비방 및 무고, 모함하는 것을 금지한다.
우주선이 발사 1분 30초만에 폭발했고, 폭발할 것을 이미 알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1986년 1월 28일 우주 왕복선이 발사될 준비를 함 이 우주선에는 7명의 사람의 타고 있음 사령관 딕 스코비 핼리혜성을 관측하기 위해 탄 혜성 연구 전문가 론 맥네어 비행기술자 주디 레스닉 추적 데이터 및 중계 위성 전문가 엘리슨 오니즈카 탑재체 전문가 그레그 자비스 조종사 마이크 스미스 그리고 나사가 최초로 우주임무를 맡기기 위해 뽑은 일반인. 교사 크리스타 매콜리프 나사가 크리스타를 뽑았을때 사람들은  우주비행사같이 특별히 선택받은 두뇌와 신체조건을 가진 사람이 아닌 우리랑 같은 일반인이 우주에 간다는점에 열광했음 출발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전국의 학교에서도 크리스타가 출발하는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봄 출발후 엔진도 정상적이고 모든것은 순조로워 보였음 그런데.. 그 순간 우주선이 약 1분 30초만에 폭발함. 가족들은 오열함 사람들은 나사가 금방 이 불운한 사고 원인을 찾아내서 발표할것이라 생각함 나사에는 방대한 데이터가 쌓여있으니까 이 불운한 사고의 원인을 금방 추정해내서 사람들에게 발표할것이라고 그런데 이 사건은 불운한 사건이 아니라  이미 출발 전부터 폭발할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챌린저 : 마지막 비행 (challenger : the final flight) 출처 혹시 보신분들 스포금지 !!
명왕성은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1855년 미국 보스턴 명문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로웰은 1876년 하버드대를 졸업했지만 그의 남동생인 애보트 로웰은 하버드 역사상 최장수인 24년간 하버드대 총장을 지낸 수재 교육학자였으며, 여동생인 에이미 로웰은 향후 퓰리처상을 수상합니다. 잘사는 집의 큰아들로서 한량 신세이던 로웰은 무역을 하면서 세상을 떠돌았는데, 특히 동양 문화에 심취해 일본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일본 및 동양 문화에 대한 각종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1883년 일본 주재 미국대사로부터 조선에서 미국으로 가는 사절단이 일본에 도착했는데 통역을 하면 어떻겠냐라는 제안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는29세 나이에 조선 최초의 미국 사절단 ‘보빙사’의 공식 수행원이 됩니다. 조선의 외국인 홍보대사 공식임무를 마치고 이후 《조용한 아침의 나라》(미국인이 쓴 최초의 우리나라 소개서)등 여러 조선 관련 책을 펴내는 등 동양에서 10년을 더 머물다 1894년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는 천체 관측 천문학자로 대변신을 하게 됩니다. 호기심이 많은 로웰은 미국에서 천문대를 세웠습니다. 개인 재산을 털어 미국 애리조나에 건설한 로웰 천문대는 당시로선 세계 최대급 천문대였습니다. 과거 눈으로만 관측하던 시기에는 태양계 행성이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등 6개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 망원경의 발달로 1781년 천왕성을 찾았는데 이 행성의 궤도가 정상적이지 않자 그 너머에 다른 행성이 있을 것이라 여겨 더 찾아본 결과 해왕성까지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해왕성 역시 그 궤도가 계산에 맞지 않자 그 너머에 또 다른 행성이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로웰은 그 미지의 행성을 ‘플래닛 엑스(Planet X)’라고 칭하면서 1915년 이 미지의 행성에 대한 궤도 계산 등의 연구 결과를 정리해 발표했고, 같은 해 우연히 명왕성을 사진에 담았지만 당시엔 인지하지 못한 채 1916년 사망합니다. 로웰은 살아생전 천문학자의 길을 걷고 싶지만 돈이 없어 좌절하던 젊은 학자들을 자기 천문대에서 근무하게 하면서 후원했습니다. 그들이 그의 의지를 받들어 로웰 사망 후에도 ‘플래닛 엑스’의 탐색 작업을 계속해 결국 14년 뒤인 1930년, 당시 24세 앳된 청년 클라이드 톰보가 사진 판독 작업 끝에 드디어 명왕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동안 천왕성과 해왕성 발견의 영광을 다 유럽인에게 내주었던 미국은 사상 최초로 미국인이 행성을 발견한 데 대해 흥분하게 됩니다. 발견자로서 새로운 행성의 이름을 정할 권리를 가진 로웰 천문대는, 이 행성의 명칭을 ‘명왕성(플루토Pluto, 죽음의 신)’이라 결정합니다. 행성마다 고대 그리스의 신 이름을 붙이던 관례를 따라 ‘천왕성(유라누스Uranus, 하늘의 신)’, ‘해왕성(넵튠Neptune, 바다의 신)’에 이어 붙인 새 행성에 왜 하필 으스스한 죽음의 신인 플루토를 붙였느냐는 질문에 톰보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늘날, 우리를 있게 해주신 퍼시벌(P) 로웰(L) 선생님의 첫 글자로 구성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알아두면 쓸데 있는 유쾌한 상식사전> -과학 경제 편-
한국인은 이해하기 힘든 인도와 영국의 관계.jpg
인도 캘커타에 있는 빅토리아 박물관 여기서 빅토리아란 이름은  '대영제국에 해질 날은 없다'  '패배의 가능성에 대해 관심없다. 영국에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유명한 말을 한 홍차 좋아하는 혐성국의 그 여왕을 뜻함 인도제국 시절에 이 건물이 건립될 땐  빅토리아 여왕을 기념하기 위해 빅토리아 기념관으로 지어졌지만 인도가 독립한 이후에는  공화정인 인도에서 빅토리아 여왕은 이제 자기들 여왕이 아니므로  빅토리아란 이름은 유지시키되 빅토리아 여왕을 기념하는 게 아니라  영국령 인도제국을 기념하는 빅토리아 박물관으로 용도가 살짝 변함  (그게 그거인거 같긴한데) 참고로 인도 정부가 운영중임 이걸 단순히 한일 관계에 대입하면 한국 정부가 인천? 대구? 급 대도시에  일제를 기념하는 히로히토 박물관을 운영하는 총꽁깽 상황이됨 여기서 인도와 영국의 관계를 단순히 한일관계에 매칭시키면 안된다는 걸 알 수 있음  쟤네들 둘은 그냥 존나 복잡한 애증의 관계라.. 한국사람들은 인도를 보통 한국 , 프랑스 , 이집트 이런 개념으로 생각하니까  영국과 인도 관계를 보고 머리가 띵해지는 데 인도는 한국 , 프랑스 , 이집트 같은 개념으로보면 안됨 인도를 동아시아 , 서유럽 , 중동 이런 개념봐야함 이렇게 보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인도과 영국 관계의 특수성이 어느정도 이해될거임 참고로 인도에서는 식민지 시기인 영국령 인도제국시기를 British Raj 라고 부름  직역하면 영국인 왕조 일제강점기(일본에 강제로 점령당한 시기)랑 뉘앙스부터가 확 다른 것도 인도영국 관계의 특수성을 어느정도 보여줌 사실 British Raj란 말도 무굴제국을 보면 딱히 틀린 표현이 아닌 것이 무굴제국이나 인도제국이나 외부에서온 이민족 이교도 왕조인건 같음 차이점은 무굴은 인도아대륙 통일 근처까지 갔지만  이슬람 강요로 통일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유지에도 실패 이교도 학살이라는 무굴의 미친 짓으로 인해  저항세력(대표적으로 마라타국)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로 대응하면서 인도아대륙은 그 이후 종교로 인해 배틀로얄처럼 되버림 반면에 영국은 인도아대륙을 최초로 통일하고 유지함 영국이 인도를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로  보통 당시 영국이 존나 쌨던 것을 떠올리는 데 이것도 맞지만 인도아대륙 통일과 유지는 단순히 쌔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님  인도 아대륙이 워낙 넓고 또 인구가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인도 통일을 하더라도 이 통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로 코르테스처럼 현지 지지세력이 필요함 현지 지지세력이 없다면 전투에서는 이길 수 있어도 전쟁에서는 결코 이길 수 없음 무굴제국이 종교 학살을 시작하고 이에 저항세력들이 각지에서 일어나 무굴은 전성기 몇십년도 유지못하고 이름만 남은 빈깡통이 됨 이렇게 무굴제국이 힘이 꺾인 이후  인도 아대륙은 종교 배틀로얄 상황이 수백년간 지속된 난세였고  이 난세에 영국이 개입하면서 내세운 양 날개가 있는 데 왼쪽 날개는 종교의 자유 보장이였음 그리고 그 종교의 자유 보장은 수백년의 배틀로얄로 인해 당시 인도 아대륙 세계에선 실현불가능한 꿈이 였고 이 꿈을 가능하게 하는 영국의 군사력이 오른쪽 날개였음 종교의 자유 보장과 군사력이라는 양 날개 덕분에 엄청난 현지 토작세력들이 영국 아래에 모이게 되고 이들의 지원이 있어서 영국은 인도아대륙을 통일할 수 있었음 (인도아대륙이 워낙 넓다보니 메이저인 이슬람 힌두교 모두 지역별로 세력이 따로 노는 ㄹㅇ난세) 전투민족인 인도 아대륙의 시크교도들은 영국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준다며 항복을 요구했을 때 종교의 자유 보장(?)은 말도안되는 소리고 당연히 이슬람이나 힌두교애들처럼 이교도인 영국이 자기들을 학살할꺼라 생각해서 3차에 걸쳐서 필사적인 전쟁을 벌였는 데 결국 패배하고 절망에 빠짐 근데 시크교도들의 필사적인 저항에 개고생한  영국이 오히려 얘네들 건드리면 안되겠다하면서 (영국이 시크전쟁때 동원한 영국군이 무려 8만명임 참고로 아편전쟁때 동원한 영국군은 1만 조금 넘음) 얘네들한테 자치권도 주고 영국 여왕에게 충성만하면 종교 자유보장 시크교 믿어도 되고 자기들이 젖먹던 힘까지 짜내서 저항해도  도저히 이길 수 없었던 그 강력한 영국군이 여왕에게 충성을 바치면 시크교를 보호해주니 시크교도들은 바로 엄청난 친영파가 되버림 캐나다의 국방장관 '사잔'  시크교도이다 영국군에 복무중인 시크교도들 영국 런던 경시청 소속 시크교도 수백년동안 시크교도란 이유 하나만으로 이슬람과 힌두교에게 학살만 당해왔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렇게 영국바라기가 된 게 이상하진않음 지금도 시크교도들은 영연방 곳곳에서 군경으로 복무하고 있음 세포이 항쟁도 원래 세포이 반란이라고 불렀다가 이러면 독립군도 반란? 이냐 해서 항쟁으로 명칭을 바꾼건데 이것도 좀 애매함 아니 이건 독립군에 대한 모욕임 당시 인도아대륙은 지역에 따라 힌두교 이슬람도 어떤동네에선 시크교도와 다를게 없을 정도인 배틀로얄 상태였고 이런 배틀로얄 상태를 영국이 그 아래에 모인 현지 세력들의 도움을 받아서 종교는 자유고 종교가지고 죽이고 학살하는 걸 힘으로 억지로 못하게 막아왔는 데 억지로 못하게 막아오다가 결국 터진게 세포이 항쟁이거든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것도  영국군이 아니라 사실상 현지 친영 세포이임 얘네들한테는 저게 좋은게 아니였으니까 세포이들은 영국에 고용된(정확히는 동인도회사) 용병들을 말하는 데 그 중 벵골 세포이들이 들고 일어난 게 바로 세포이 반란 혹은 세포이 폭동임 한국에서는 이걸 단지 영국에 저항해서 들고 일어났다는 이유로 반란이나 폭동이 아닌 항쟁으로 표현하면서 저 세포이 반란을 독립운동으로 치켜세움 근데 영국이 인도를 점령할 때 동원한 병력은 대부분 세포이들임 (3차 시크 전쟁말고는 영국은 인도에 대규모 '영국'병력을 투입한 적이 없음) 그런만큼 세포이들도 엄청 다양함 크게 벵골 세포이 , 콜카타 세포이 , 뭄바이 세포이 , 첸나이 세포이가 있고 이 중 벵골 세포이가 들고 일어난 게 세포이 반란임 그리고 이 세포이 반란은 영국이 아닌 콜카타 세포이를 중심으로 뭄바이 세포이 첸나이 세포이가 모두 개입해서 제압함 왜 콜카타 세포이랑 뭄바이 세포 그리고 첸나이 세포이가 세포이 반란을 진압했을 까? 이유는 간단함 벵골 세포이 중 이슬람 교도들(대략 8할)은 자신들을 고용한 동인도회사가 하찮은 힌두교도들이랑 동일한 월급 동일한 대우를 한다고 빡쳐서 들고 일어남 벵골 세포이 중 힌두교도들도 비슷함 벵골 세포이 중 힌두교도들은 대부분 상위 카스트였는 데 이 들 역시 동인도회사가 자신들을 하찮은 하위 카스트들이랑 동일한 월급 동일한 대우를 한다고 들고 일어남 근데 주력 4대 세포이중 나머지 3개 세포이 콜카타 세포이 , 뭄바이 세포이 , 첸나이 세포이는 대부분 하위 카스트인 힌두교도들이였으니........ 당연히 나머지 3개 세포이들은 벵골 세포이랑 싸우게 되고  압도적인 숫자 차이에 벵골 세포이의 반란은 영국군이 투입되기도 전에 그냥 세포이선에서 진압되어버림 거기다 벵골 세포이의 대부분은 이슬람이고 이슬람 세포이는 대부분 돈 때문에 세포이가 된 반면에 힌두교 세포이 , 특히 하위 카스트 세포이들에게 영국은 천년 가까운 세월동안 지속된 가즈니 왕조, 델리술탄 왕조 그리고 무굴왕조에서 정점을 찍었던 이슬람의 힌두교인 학살을 더 이상 못하게 막아준 존재였거든 얘네들은 단순 돈 벌려고 세포이가 된 게 아님 시크교도 다음으로 영국에 진심으로 충성했던 애들임 단순 돈 벌려고 세포이가 된 소수의 벵골 세포이  vs 충성심으로 세포이가 된 다수의 나머지 3대 세포이 둘의 싸움은 당연히 후자가 압도적일 수 밖에 없었지 세포이 반란을 무슨 독립군의 독립운동 취급하는 건 진짜 독립군과 독립운동에 대한 모독임 (벵골 세포이가 명분을 위해 독립을 내세운 건 맞지만 않이 힌두교애들한테 저 독립 명분이 통하겠냐고 수백년 동안 이슬람이랑 배틀로얄을 경험한 애들한테... 또 영국이 카스트를 강화했다 뭐 이런 소리가 요즘 돌아다니던데 그건 그냥 헛소리임 카스트는 원래부터 그모양 그꼴이였음 인도아대륙에 유입되는 새로운 종교들이 공통적으로 '카스트가 없다' 라는 걸 내세운 게 괜히 그런게 아님 불교 이슬람교 시크교 전부 인도아대륙에 선교할 때 카스트가 없다는 점을 내세움) 물론  영국이 종교로 막 학살하는 걸 막은 이유가 착해서는 아님 영국의 이익을 위해서 영국은 종교로 인한 학살을 힘과 위압으로 막음 영국은 해군은 최강이고 돈은 많아서 육군 역시 매우 정예였음 (화약을 인공으로 만들기 전 까지 화약은 매우 비싸서  18~19세기 초까지만해도 총기 + 총알 300발 세트의 값이 현재로 치면 6 ~ 15억원일정도로 비쌌고 특히 총알이 비싸기 때문에 실탄 훈련은 돈이 많아야 할 수 있었음 영국 육군 '레드코드' 가 존나 쌨던 이유는 그냥 영국이 돈이 많아서 가장 많은 실탄 훈련을 할 수 있었기 때문 영국 해군이 존나 쌨던 이유도 마찬가지로 영국이 돈이 많아서 훈련 때 실제로 포를 많이 쏠 수 있어서임 문젠 영국의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거임 당장 나폴레옹 때 까지만해도 영국의 인구는 '숙적' 프랑스 인구의 3분의 1 수준이였음 (대신 정부 재정은 영국이 프랑스의 3~5배 , 나폴레옹 전쟁땐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영국 정부의 재정 규모가 프랑스 정부의 재정의 7배까지 오름) 병력의 정예화로 전투는 영국이 쉽게 이길 수 있지만 인력빨인 '유지'는 인구가 적은 영국에게 큰 부담이였음 그래서 항상 영국은 현지 세력의 도움을 받아야했음 이야기가 좀 샛는 데 영국은 인도아대륙에서 종교의 자유 보장이라는 선전으로  인도 현지세력을 모았고 이 현지세력을 동원해서 인도아대륙을 통일함 영국이 필사적으로 종교의 무력충돌을 막은 이유눈 영국은 종교의 자유란 선전으로 인도아대륙을 통일한 만큼 만약 종교끼리 무력충돌이 발생한다면 무조건 개입해야하는 입장이였음 문젠 개입하면 돈이 존나 들어간다는 거 그래서 영국이 선택한 건 겁박임 강력한 영국군의 위력을 인도아대륙의 번왕국들에게 보여주고 종교로 인한 학살을 한다면 영국군이 출동해서 가해자를 응징하겠다는 경고를 존나 하는 거지 그리고 실제로 이 경고를 무시하고 이교도를 죽인 번국 본보기로 공격해서 박살내니 본보기들이 영국군에 박살난 이후로는 종교 학살이 많이 줄어들게 됨 신인도통치법 이후 신인도제국(1934~1947) 신인도통치법으로 형성된 신인도제국으로 인도제국은 사실상 자치령이 됨 근데 여기서 신인도통치법은 인도 독립 대신 나온 거임 1차대전때 영국은 인도제국의 협력을 받고 그 대가로 인도의 독립을 약속했음 그리고 인도제국의 협력은 (당연히) 1머전 영국에 큰 도움이 됨 어느정도로 도움이 됐냐면 프랑스 군사박물관 자료를 보면 1머전 영국군 병력이 890만으로 나옴 하지만 영국 자료를 보면 1머전 영국군 병력이 380~460만명으로 프랑스 자료와 많은 차이가 나는 데 이건 기준이 달라서 그럼 프랑스 자료의 영국군 수는 대영제국 기준이고 영국 자료의 영국군 수는 그레이트브리튼 기준 이 차이임 대영제국군은 자치령과 식민지군을 포함하니까 ㅇㅇ 1머전에 참전한 인도제국군은 대략 250만일정도로  영국에게 큰 도움이 됨 (인도제국의 인구가 많아서 인도군을 포함한 인도인 인력을 600만 가까이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있지만 동원 비율조차도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들에 비하면 많이 높았음 2.3%를 동원했으니 그냥 중앙집권이 약한 국가정도의 인력 동원율을 보여줌 저 2.3%도 친영 번국이 주로 제공한 인력이니 실제 동원율은 더 높다는 거 참고로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0.2% 만 동원할 수 있었음 인도-영국보다 베트남-프랑스의 문화적 차이가 더 심했긴 했지만  그래도 12배 가까운 인력 동원율 차이는 그만큼 식민지 정책에서 영국이 머리를 잘썼고 프랑스는 머리를 못썻다라는 걸 증명) 아무튼 전쟁은 끝났고  영국은 승전했지만 피해가 너무 커서 피로스의 승리가 되버리지 이제 약속대로 인도를 독립 시켜야되는 데 처칠의 유명한 말 있자너ㅋㅋ '인도없는 영국은 대영제국이 아니다!' 당연히 독립시키기 싫지 그래서 절충해서 한 게 사실상의 자치령화인 신인도통치법임 이 법안에 따른 신인도제국은 자치권을 가진 약 500개가 넘는 번국들이 연합한 제국이였음 500개의 최상위 번국 아래에 또 자치 번국이 여러개 있어서  실제로는 자치권을 지닌 수천개 번국의 연합  당시 인도제국 인구가 약 4억 이였는 데 신인도제국으로 싹 자치화되서 영국인 행정인력이 900명 이하로 줄어듬 (프랑스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투입한 행정인력이 7000명 약간 안됨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인구는 약 2000만) 근데 여기서 또 한가지 알아야할게 있음 1머전으로 영국은 엄청난 국력을 소비했고 또 대공황이 오면서 경제와 군대가 박살남 (2머전때 체코 팔아먹은것도 박살난 군대 재건할 시간 벌 용도 였음  예상보다 번 시간이 너무 적다는 게 문제였지) 근데 영국은 인도의 독립 약속을 어겼고 이럼  당연히 인도 현지의 엄청난 반발이 있겠지? 근데 경제랑 군대가 ㅂㅅ된 영국이 어떻게 이렇게 스무스하게  신인도통치법이란 자치령화로 때울 수 있었을 까? 왜냐면 독립 반대 지지가 더 컸거든 당장 인도아대륙이 배틀로얄 상태에서 벗어난지 1세기도 안지난 시점이여서 영국이 인도에서 손을 떼면 예전처럼 주위에 있는 거대 힌두교 . 이슬람 세력들에게 다시 예전처럼 학살당할거라고 생각한 많은 번국들이 인도제국의 독립을 절대반대하고 이런 독립 반대 번국들의 세력이 독립파 번국들의 수와 세력을 크게 앞서니 영국은 이들의 지지 덕택에  독립 대신에 신인도통치법으로 퉁치고 대영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음 물론 이것도 시간벌기에 불과 1머전으로 영국이 잃은 국력이 너무커서  대영제국 해체는 필연이였음 이미 1920년대 후반쯤에 영국내에서 대영제국 유지는 불가능하니 이제 제국 해체를 준비해야한다는 소리가 나왔고  그래서 만들어진게 '영연방' 임 2머전 직후에는 그 시간 벌기도 더이상 불가능해서 그 고집쟁이 처칠조차 제국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걸 받아들이게 됨 특히 2머전도 영국은 인도제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음 (2머전 때 외상으로 인도제국한테 구입한 거 대금을 2000년대 와서야 다 갚음) 첨엔 간디 네루와 협의해서  인도제국을 통채로 독립시킬려했는데 인도제국을 독립시킨다는 거 자체가 대영제국이 늙었다는 사실의 방증이였고 이는 영국이 그동안 '대영제국'이라는 힘과 그 이름에서 오는 위압으로 눌러온 인도아대륙의 종교 분쟁을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됐단걸 의미해서  다시 유혈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하자 결국 영국은 파키스탄을 인도와 따로 독립시키고 인도 파키 분쟁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됨 영국이 혐성부려서 파키스탄과 인도를 분단시킨게 아님 영국은 원래 인도제국 통째로 독립시키는 걸 원했음 근데 그러다 하이데라바드 전쟁을 보고 분리안시키면  또 하이데라바드 전쟁 꼴 날테니까 분리 시킨 거 애초에 인도와 파키스탄한테 분단되었다는 표현이 맞는지 부터가 개인적으로 의문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단된 상태라면 문화적 , 역사적 동질성/의식을 따졌을 때 스페인과 포르투갈도 분단된 상태고  잉글랜드와 프랑스도 분단된 상태고 유럽은 나라가 수십개로 분단된 상태라고 말해야 맞게됨 (실제로 인도아대륙내 민족간 문화적 거리는 유럽연합 각 국보다도 더 멈) 앞서 말했듯이 인도를 한국과 같은 개념으로 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한 거임 인도는 유럽과 같은 지역 개념으로 봐야됨 영국의 죄는 인도와 파키스탄을 분단시킨게 아니라 서로 각자 다 다른 수십개의 나라를 인도라는 연방 형태로 통일 시켜버렸다는 거임 (보통 민주주의는 1인당 경제력이 어느정도 뒷받침 되어야 유지가 되는 데 인도는 특이하게 1인당 경제력이 매우 낮은 걸 감안하면 민주주의가 상대적으로 정말 잘 발달된 곳임 그 이유는 수십개 나라가 현재는 지방정부란 이름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권한이 클수가 없음 다른 의견들을 어느정도는 들어줘야 중앙정부가 유지됨 중앙정부가 지방정부를 다 찍어누를려고한다면 원래 서로 싸우는 지방정부들이 위아더월드! 를 외치고 단합해서 중앙정부에 대항하기 때문에 최악의 악수가 되버림 사실상 현재 인도는 단일 국가보단 EU에 가까운 형태임 (인도 중앙정부가 EU고 인도 지방정부가 EU 회원국) 아무튼 뭐 결과적으로 프랑스를 보면 알겠지만  영국 입장에선 대영제국에서 영연방으로  익절 기가 막히게 함 지금도 인도에는 친영파와 반영파가 있는 데 힌두교도들이 주로 친영 일부 반영이고 이슬람교도들이 주로 반영 일부 친영이라 전반적으론 친영적인 국가임 (일반적으로 힌두교도들은 오히려 인도제국을 긍정하고 무굴제국을 존나 싫어하고 이슬람교도들은 당연히 무굴제국을 존나 좋아하고 힌두교를 못죽이게 막은 인도제국을 싫어함) 그 예전에 덩케르크 개봉당시  인도인이 '덩케르크에 왜 인도군은 안나와?'  라고 묻는 기사가 있었는 데 이런 인도인들이 보통 친영임 이들은 인도제국을 식민지가 아니라  그냥 단순히 영국과 물적 동군연합인 이민족 왕조로 보거든 반대로 인도 이슬람 교도들은 주로 반영인게 영국이 되도 않는 민주주의(?)를 억지로 주입시키면서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슬람을 못살게 굴었다라고 봄  인도 인구가 14억이나 되다보니 그 상대적으로 소수인 반영이 절대적인 수로는 꽤 많음 일단 소수인 이슬람만 인도에서 2억이 넘음  인도는 세계에서 이슬람 교도가 2번째로 많은 국가임 인도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이자 국부들인 간디는 영국을 좋은 친구라 했고 인도 초대 수상 네루는 자신을 인도를 통치하는 마지막 대영제국인이라 칭했는 데 이는 '인도' 라는 정체성이 '인도제국' 시절에 만들어져서 어쩔 수 가 없는 면이 있음 인도제국전까지 지금의 인도라는 개념은 없었고 영국이 만든 인도제국으로부터 지금의 인도라는 하나의 개념이 된 거니까 한국 역사가 진짜 매우 특이함 한국처럼 민족의식이 일찍 형성된 게 세계적으로 매우 드뭄 심지어 한국은 언어적 문화적으로 매우 가까운 친척민족도 없는 상태다보니 한국사람들이 세계사를 이해하기가 상대적으로 힘듬 더군다나 인도아대륙 역사나 루스 역사는 한국에서도 매우 비주류라서  한국 사람들한텐 제일 이해하기 힘든 세계사인 거 같음 아무튼 영국은 개새끼 맞ㅇㄷㅁ 다시 말하지만 영국은 개새끼 맞습니다 근데 영국 인도 관계를 단순히 우리들의 일반적인 눈으로 보면 안된다는 글을 쓰고 싶었음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