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ter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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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엘이 말하는 한국 떼창

일본 의문의 1패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북한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는게 의외네요..
같은 한국인인데 한쪽은 신나게 즐기고,
한쪽은 억압받고 있다는게 노엘 마음에 걸렸나봐요
노엘의 Wonderwall이 된것 같아 기쁘네요♥
흥의 나라 대한민국에 또 오세요!!!!!!!!!!!!!!!!
재킷에 볼펜 안 그을게요ㅠㅠ
관심좀 주세요..
귀찮으실까봐 댓글 달아달라고 못하는데
클립과 하트 정말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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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까면 한국인들이 좋아한단걸 어찌 눈치첸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ggupTOP
한국사람들의 흥을 보고 억압된 북한사람들 까지 생각하다니.. 멋지네요ㅠㅠ
일본이 보수적이구나 몰랐지 그냥 볼수록쓰레기구국가인줄 알았지
저분 입장에선 일본보단 한국시장이 큰가보지요? 그렇다면 본받을만한 사업가..
한국이 아무리 커봐야 일본한테 쨉이 안돼요..... 일본은 아시아 최대의 음반시장인 반면 한국은 세계 최대의 불법다운로드 천국인데....
저형 존나멋있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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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리나 졸리의 인생을 바꾼 장남 매덕스 졸리-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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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도시 Best 10ㅣ귀가 즐거워지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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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플레이(Coldplay) 필수정보와 추천곡
| 콜드플레이의 음악은 1~3집과 그 이후로 나뉜다? 초기 콜드플레이의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3집까지 콜드플레이의 색깔은 잔잔한 피아노 사운드와 보컬의 우울한 목소리와 가성으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1집의 Yellow, Trouble, 2집의 In My Place, The Scientist, Clocks. 3집의 Fix You 등이 대표적이죠. 하지만 4집 Viva la Vida or Death and All His Friends를 발매하며 음악적으로 큰 변화를 보여줍니다. 음악적 변화는 아티스트가 지속해서 성장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기도 하지만, 기존 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기도 하고, 기존의 확고한 자신의 스타일이라는 무기를 버리는 양날의 칼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4집 Viva la Vida가 발매되었을 때 실망한 콜드플레이의 팬들도 다소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고, 아티스트로서도 확고한 위치를 세울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콜드플레이 1~7집> 4집부터 시작된 콜드플레이의 음악적인 변화는 그 이후로도 지속되었습니다. 4집에서는 아름다운 피아노 반주에 가성의 멜로디 더하는 스타일을 버리고 밴드 악기의 비중이 크게 줄인 것부터 시작해, 6집에서는 Sky Full Of Stars에서 Avicii와함께 락음악과 하우스 음악을 결합하는 모습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최근의 Something Just Like This라는 곡을 The Chainsmokers와의 콜라보한 것 역시 그 연장선으로 보입니다. 또한, 7집에서는 Hymm For The Weekend 비욘세와 함께 작업하며 힙합 비트를 사용하는 모습도 보여주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여 콜드플레이의 음악적 변화를 요약하자면 브리티시 락의 정석에서 시작해 엠비언트와 오케스트라를 더했다가, 최근에는 EDM과의 경계를 허물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 U2, Travis, Radiohead의 아류 밴드? <콜드플레이와 U2. 콜드플레이는 초기에 U2와 많은 비교를 당했고, 실제로 크리스마틴은 U2의 보컬 보노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콜드플레이가 성공하고 자신만의 위치를 확고히 하면서 U2와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콜드플레이 초기에는 U2, Travis, Radiohead의 아류 밴드라고 평단으로부터 평가, 혹은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라디오헤드와 유투의 아류로 비교당하는 것은 브리티시 락, 혹은 브릿팝을 하는 후발주자에게는 숙명 같은 태그일지도 모릅니다. 콜드플레이는 1998년에 결성되었고, 2000년에 첫 앨범을 발매하였는데, 브릿팝이 락음악계의 주류였던 90년대 초반을 지나고 그 위상이 매우 약해지던 시기인 만큼 너무나 커다란 밴드로 자리 잡은 라디오헤드나 유투, 트래비스등의 후속 주자로서 보이기 쉬웠을 것입니다. 실제로도 위의 밴드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크리스 마틴은 U2의 보노처럼 되고싶다고 언급하기도 했고, 한편, 또 다른 영국 밴드 버브(The Verve)역시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는데, 크리스 마틴은 The Verve의 The Bitter Sweet Symphony를 자신이 썼다면 이라는 워딩을 남기기도 했고, 함께 Bitter Sweet Symphony를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콜드플레이뿐만 아니라 킨(Keane), 뮤즈(Muse) 등과 같은 영국 출신의 밴드들 또한 데뷔 초기에 이 같은 평가가 마찬가지로 붙었던 것도 사실입니다.(크리스 마틴은 한 키보드 연주자에게 매료되어서 함께 밴드를 하자고 했지만, 그는 이미 준비하고 있는 밴드가 있다며 거절했습니다. 바로 그 키보드 연주자가 킨(Keane)의 팀 라이즈 옥슬리) 하지만 콜드플레이는 지속해서 앨범을 발매하는 과정에서 변화를 거쳐 가며 자신만의 색깔을 확보해 나가고, 음악적으로도 크게 성공함으로써 앞의 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밴드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콜드플레이와 유사한 밴드들> | 크리스 마틴과 기네스 펠트로 <크리스 마틴과 기네스 펠트로> 콜드플레이는 보컬인 크리스 마틴과 기네스 펠트로 부부로 유명하기도 했습니다. 종종 스타 부부로서 비욘세와 제이지 부부와 비교되기도 합니다. 콜드플레이가 2집 활동을 하며 투어를 돌던 도중 기네스 펠트로가 콘서트를 관람하러 왔는데, 이때 백스테이지로 기네스 펠트로를 초대한 계기로 친해졌고, 이듬해인 2003년 임신 소식과 함께 결혼 발표를 하며 스타 부부가 탄생했습니다. 현재는 10년간의 결혼생활을 끝낸 뒤 이혼한 상태입니다. 콜드플레이의 이해하는데 기네스 펠트로가 중요한 이유는 크리스 마틴이 작곡한 곡들 중 아내였던 기네스 펠트로와 자녀들을 소재로 한 곡들이 다수 있기 때문입니다. Fix you의 경우는 부친상으로 힘들어하는 기네스 펠트로를 위로하기 위해 아버지 유품 중에 있던 오르간을 사용해 만든 곡이며(링크:카드뉴스 - 아내 기네스 펠트로를 위로하기위한 크리스 마틴의 선물 Coldplay – Fix You), Speed Of Sound는 딸인 애플 마틴이 태어났을 때 아빠가 된다는 경외감으로 인해 만들어진 곡입니다. Magic에서는 이혼한 이후의 심경이 드러나 있기도 하고 2015년에는 Everglow라는 곡에 기네스 펠트로가 코러스 보컬로 참여함으로써 여전히 좋은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 콜드플레이의 명곡, 대표곡 last.fm과 apple music의 스트리밍, 다운로드 순위를 참조해 그중 한국인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곡들을 선정했고, 내한공연을 앞두고 있는 만큼 셋리스트에 포함된 곡 위주로 콜드플레이의 너무나 많은 히트곡 중 추천곡 8곡만을 선정하였습니다. 1. Clocks 2집 A Rush of Blood to the Head에 수록된 초창기 콜드플레이의 대표곡. 콜드플레이 특유의 몽롱한 피아노 사운드의 메인 리프와 함께 몽환적인 사운드가 일품이다. 2004년 그래미에서 올해의 레코드를 받기도 했다. 2. Viva la Vida 4집 Viva la Vida or Death and All His Friends에 수록됨. 기존의 음악적 스타일을 크게 바꾼 모습을 보여주었다. 4집 때부터 참여한 프로듀서 브라이언 이노의 영향으로 엠비언트적인 요소가 도입되고, 밴드적 사운드보다 스트링과 오케스트라가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보다 웅장하고 밝아진 사운드를 들려준다. 기존의 팬들이 기대했던 서정적인 사운드는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이 같은 변화는 큰 성공을 거두고 그해 그래미 3관왕을 차지하게 해주었다. 3. The Scientist 2집 A Rush of Blood to the Head에 수록된 곡으로 피아노 반주, 어쿠스틱한 기타 사운드를 바탕으로 우울한 보컬 사운드로 곡을 진행하는 초기 콜드플레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초기 콜드플레이의 앨범에서 자주 보여주던 크리스 마틴의 가성이 특히 인상적이다. 4. Yellow 처음 콜드프레이를 세상에 알린 곡. 1집 Parachutes에 수록되었으며 14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초창기 콜드플레이의 다른 히트곡들과는 다르게 피아노 사운드 없이 디스토션된 기타사운드와 정직한 리듬을 바탕으로 전형적인 브리티시 락 사운드를 들려준다. 5. Fix You 3집 X&Y에 수록된 곡. 아내였던 기네스 펠트로가 부친상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아버지의 방을 정리하며 유품으로 남아있던 건반을 이용해 아내를 위로하는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링크:카드뉴스 - 아내 기네스 펠트로를 위로하기위한 크리스 마틴의 선물 Coldplay – Fix You 6. Hymm For The Weekend 7집 A Head Full of Dreams에 수록된 곡. 힙합적인 비트가 인상적이며, 비욘세가 함께 참여했다. 7. A Sky Full Of Stars 6집 Ghost Stories에 수록된 곡. 스웨덴 EDM 아티스트 Avicii와 함께 작업하며 하우스 사운드를 결합하며 스펙트럼을 넓히는 모습을 보인다. Verve의 Bitter Sweet Symphony를 오마주 한 것으로 생각되는 뮤직비디오(링크)도 인상적이다. Verve의 원래 뮤직비디오(링크)가 우울하고 퇴폐적인 느낌을 밝은 버전으로 바꾼 것 같다 8. Paradise 5집 Mylo Xyloto에 수록된 곡. 신디사이저를 활용한 엠비언트적 사운드가 더욱 강화된 모습이나 스트링의 활용, EDM을 연상시키는 베이스라인 등이 4집 Viva la Vida의 연장선으로 보이기도 하며, 드럼과 기타 등 기존의 밴드 사운드를 좀 더 조화시키는 모습도 보인다. "para-para-paradise"라는 가사의 코러스 부분은 웅장한 사운드 부분은 5집에서 시도하고자 하는 사운드가 가장 잘 나타나는 부분으로 생각되며, 공연시 주된 떼창 포인트이기도 하다 --------------------------------------------------------------------------------------------------------------------------------- 스쿨오브락 홈페이지 : schoolofrock.co.kr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schoolofrocklml/
노엘 갤러거의 4가지 ‘기업가정신’
스타트업 관람가 45. <슈퍼소닉> 언젠가 누군가 존경하는 위인을 물었을 때 정색하고 “노엘 갤러거”라고 답한 적이 있습니다. 중2병 앓던 시절이 아닌 성인 아재로서 한 말이었습니다. 저는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가 박지성이나 오프라 윈프리 혹은 버락 오바마처럼 존경하는 인물이라는 질문의 답으로 응당 나올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엘 갤러거는 알고 보면 세상 그 어느 뮤지션보다도 프로페셔널한 사람입니다. 오아시스의 전기영화 <슈퍼소닉>은 그래서 좋았습니다. 노엘의 프로페셔널리즘을 진지하게 다뤄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오아시스가 지하 골방에서 시작해 최다 관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96년 넵워스 공연장에 서기까지의 일대기를 비춥니다. 맷 화이트크로스 감독은 오아시스에 관한 거의 모든 자료를 모았습니다. 그 푸티지 위에 오아시스 멤버들, 가족, 음반관계자를 인터뷰한 목소리를 입혀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프로페셔널 노엘’ 1. 철저한 프로 정신과 좋은 결과물에 대한 집착 오아시스를 오아시스로 만든 건 결국 음악입니다. 짤방으로 돌아다니는 것처럼 오아시스는 그저 아무 독설이나 내뱉고 되는대로 치고박기 좋아하는 망나니가 아닙니다(헉.. 아니 사실 이것도 맞습니다). 구설수 뒤엔 ‘비틀즈 이후 최고의 밴드’라는 수식어 앞에 부끄럽지 않을 실력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오아시스의 거의 모든 곡을 쓴 노엘은 그 중심에 있습니다. 노엘은 냉철한 프로 그 자체였습니다. 사업을 했어도 대성했을 사람입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른바 ‘락스타들’은 존나 불평을 해대곤 하죠. ‘오 제발 X발 탄자니아에서 존나 15시간 비행하고 왔으니 건드리지 말라’면서 말이죠. 우린 누군가의 꿈을 살고 있어요. 바에서 기타를 치는 애들도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뭐 지역 밴드들, 꼬맹이들이 우리가 하는 일을 하길 존나 꿈꾸고 있다고요. 이건 누군가의 꿈이라는 겁니다. 근데 어떻게 감히 락스타가 스트레스 받는다고 불평을 한단 말입니까. ‘X발 투어하느라 지쳐 나자빠지겠네’하면서 말이에요. X까! 그럴 거면 X발 하지 마.” 노엘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 자신이 음악에 관해선 결코 적당히 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남을 곡을 쓰고자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원하는 음악을 하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감사히 여겼습니다. 기타를 한번 잡으면 밤새도록 연습했고, 다른 멤버들이 술 마시고 놀 때도 혼자 스튜디오에 남아 곡을 썼습니다. 동생 리암과 크게 싸운 일화들을 자세히 보면 사건 발단은 모두 리암이 프로답지 못한 모습을 보였을 때였습니다. 노엘은 겉멋 든 ‘락스타들’을 못견뎌했고, 리암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 못 참고 주먹을 갈기거나 떠나버렸습니다. “형제들끼리 맨날 싸운다”는 기사들이 말하지 않는 배경엔 늘 노엘의 지독한 프로페셔널리즘이 있었습니다. 싸워서 경찰에 연행되거나, 공연이 무산되거나, 결국 해체를 하게 된 이유는 대부분 그걸 건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로페셔널 노엘’ 2.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오직 실력으로 승부하는 태도 “퇴물들은 신예들에게 상 줄 자격 자체가 없어.” 노엘의 브릿어워드 3관왕 수상소감입니다. 영화에서 이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브릿어워드가 뭐가 중요한데? 꺼지라 그래. 그딴 요란한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어. 그쪽의 높은 양반이 그러는 거야. ‘자네들 경력을 망칠 수도 있는 행동이었네’라고. X까지 말라 그래. 내가 망쳤으면 망쳤지 남이 할 순 없어.” 노엘은 세상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습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어떤 평론가는 “핀란드인은 자기 전에 자일리톨을 씹지만, 갤러거 형제는 자기 전에 요즘 잘 나가는 밴드를 씹는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사실 아무나 까는 모두까기인형은 아니었습니다. 실력보다 겉치레에 더 신경 쓰는(물론 자신의 기준에서) ‘락스타들’과 거들먹거리는 권력자들을 주로 깠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적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아무에게도 굽신대지 않았습니다. “밴드는 결국 음반으로 평가받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꼬우면 실력으로 이겨보던가’라고 도발 했지만, 그들의 적은 아무도 실력으로 오아시스를 못 이겼습니다. ‘프로페셔널 노엘’ 3. 주어진 자원을 활용할 줄 아는 전략가 막말을 일삼고 싸움을 피하지 않는 건 성격이나 락 스피릿이기도 했지만 비즈니스이기도 했습니다. 노엘은 이걸 인정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기자나 평론가들이 뭐라 써갈기든 상관없어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신경 안 써요. 그저 1면에 실리기만 하면 돼요. 대신 무조건 1면에 실려야 돼요. 1면에, 우리 이름이 들어간 제목으로. 그게 중요해요.” 노엘은 자신들에게 그 어떤 아군도, 아군을 만들 생각 자체도 없는 홀홀단신이라는 걸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구설수와 싸움을 피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걸 마케팅으로 활용했습니다. ‘어떻든 간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한 명이라도 음악을 더 듣게 된다’는 생각이었죠. 이건 사람들 시선 같은 건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았고, 음악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그에게 가장 적합한 마케팅 전략이었습니다. 외적인 부분만이 아니었습니다. 내적인 면에서도 노엘은 주어진 자원을 극도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가 휘두른 주먹을 맞고 길거리에서 기절하기도 했을 정도로 심한 가정폭력에 시달렸습니다. 말을 더듬게 된 건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입니다. 누군가 그 얘기를 묻자 노엘은 이렇게 답합니다. 그래 다 맞아.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지? 하지만 그런 것들은 절대 내 음악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어. 난 우리 집이 특별히 나쁜 환경이었다고 생각 안 해. 그 시기 노동자집안의 아버지들은 실업자가 돼서 술 먹고 애들 패는 일이 흔했어. 내 음악은 항상 긍정적이었어. 난 “X같은 내 어린시절에 대해 노래로 써야지” 생각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어.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음악을 듣고 싶겠어? 그딴 걸 안고 살면 안 돼. 어린 시절에 죽도록 맞으며 자랐어, 그래서 뭐 어쩌라고? 지나간 건 지나간 거야. 그런 것들이 니 인생에 영향을 끼치게 허락하지 말라고.” ‘프로패셔널 노엘’ 4. 관객의 귀함을 알고 있음 냅워스 공연이 열리던 날. 오아시스를 보려고 모인 사람은 25만 명이 넘었습니다. 예매를 시도한 사람은 약 260만 명이었습니다. 참고로 25만은 세종시 전체 인구가 다 모인 것보다 큰 숫자입니다. 예매 사이트에 접속한 사람은 대구광역시(약 250만) 인구보다 더 많습니다. 노엘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지. 맞아. 그날 모인 사람들이 역사를 만든 거야. 근데 솔직히 말하면 우린 존X 아무것도 한 게 없어. 역사는 그 사람들이 쓴 거야. 그날 모인 25만 명과 티켓을 살려고 접속한 260만 명이 만든 거지. 그 사람들이 없었다고 생각해봐. 아무도 우리 음악을 안 들어주고, 공연을 해도 아무도 안 온다고 생각해보라고. 그럼 우린 아무 것도 아니야. 진정한 락커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노엘은 멋집니다. 노엘의 이 네 가지 장점은 스타트업이 필요한 그것과도 일치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프로 정신과 꾸준한 노력, 굽신대지 않고 실력으로 승부하기. 주어진 자원 활용하기, 고객의 소중함을 알기. 오아시스가 초음속(Super Sonic)으로 성장해 샴페인색 초신성(Champagne Supernova)처럼 찬란히 빛날 수 있던 배경엔 리더인 노엘의 이 4가지 ‘기업가정신’이 있었습니다. 원문보기: 스타트업 미디어 비석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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