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의 연휴다. 지난달에 추석 연휴가 있긴 했지만 알다시피 연휴는 늘 오랜만이다. 비슷하게는 언제 하든 퇴근은 늦은 것이고, 물가는 늘 비싸며, 내 월급은 항상 적다. 아무튼 조금 더 퍼질러지게 자도 좋은 날이 건만 나의 알람은 평소와 다름없이 6시 반에 울렸다. 새로 산 폰(아! 나 블랙베리 샀다!!)이라 집어던져버릴 수도 없었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래. 이쁘면 다 참아진다.

아무튼 본의 아니게 평소와 같이 일어나는 바람에 평소와 다름없는 일들로 아침을 열었다. 커피를 마셨고, 줄넘기를 했고, 돌아와 샤워를 했으며, 아침을 먹었다. 어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남는다. 내일까지 놀아야 하는데 아직 첫째 날 아침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읽어야 할 것이 많았지만 간만에 영화를 봐야겠다 생각했다. 지난주에 밀정을 보긴 했는데.. 영화도 휴일이랑 비슷하다. 늘 간만이다.

영화 시작 전까지는 한 시간이 남았다. 나는 조금 분주하게 움직였다. 신경 써서 옷을 고르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머리를 왁스로 매만지며 가방엔 노트북, 잡지, 책 등.. 나름의 생존 키트를 챙겼다. 흠.. 시간이 촉박했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갈 길은 아직도 먼데 시간은 오늘따라 빠르게 흐른다. 결국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는데 나중에라도 미친 듯이 뛴 덕분에 첫 번째 대사를 시작하기 전에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땀이 줄줄 났다. 이럴 땐 에어리즘이고 자시고 소용이 없다.

이럴 땐 편히 시트에 기대어 누울 수가 없다. 다행히 에어컨이 가동 중이라 땀도, 옷도 빨리 마를 것 같았다.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나는 굉장히 영화에 몰입하고 있습니다'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뒤에서 갑자기 똑똑... 어머나.. 발그레.. 내게도 이런 일이?? 간만에 심장 좀 바빠지려나 기대하며 뒤로 몸을 뉘여 귀를 기울였더니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이랑 같이 왔는데 이제 9살이라.. 내가 그렇게 앞으로 구부리고 있으면 스크린이 안 보인단다.. 미안하지만 뒤로 기대어 주면 안 되겠냐고 말씀하시는 거였다. 영화 보는 자세야 엄연한 나의 권리라고 생각했지만.. 워낙 정중히 부탁하시는 터라 군말 없이 등과 등받이 사이에 채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끼운 채로 몸을 밀착시켰다. 하지만 중간중간 밀려오는 찝찝함에 몸을 살짝살짝 앞으로 기울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진짜인지 기분 탓인지 모를 땀 냄새가 슬며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물론.. 내 오른쪽의 커플에겐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지금은 근처 카페에 앉아 이렇게 넋두리를 쏟아내고 있다. 내리는 비가 아까워 술이라도 조촐하게 한잔해야겠다 생각하며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그 와중 친구 커플이 재결합했다는 비보를 맞이하기도 했으나 좌절할 순 없다. 계속했다. 놀라웠다. 믿기지가 않았다. 약속.. 약속.. 약속... 다들 약속이 있다. 나만 빼고 전부다. 지금 있는 카페에도 혼자 나와 앉아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SNS를 보면 심심하다는 말이 그렇게나 많은데.. 약속이라곤 하나도 없게 생긴 평범하디 평범한 내 친구들은 전부 약속이 있단다. 어쩌면 내가 속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약속은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이 글을 쓰다 보니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저녁 무렵이 되어간다. 밥 먹으러 집에라도 가고 싶은데 비는 계속해서 나를 가둬둔다. 누가 나 좀 꺼내주세요... 우산 너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