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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NO. 차별과 순응을 거부한 로사 파크스[마틴 루터 킹의 흑인인권운동의 동반자]

미국에서 노예해방선언이 있은지 100여년 지났어도 미국사회는 여전히 흑인차별이 심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차별이 있습니다. 그러데 지금은 정서적인 차별이라면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법적으로 차별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견고해 보였던 차별의 벽에 금이 가는, 미국 흑인인권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 1955년 12월 1일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달리던 2857번 버스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날 몽고메리 시내의 한 백화점에서 재봉사로 일하던 당시 42세의 로사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퇴근길에 2857번 버스를 탔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버스뿐 아니라 식당에서 흑인지정석이 있었는데 이 2875번 버스에는 지정석이 없었고, 자리도 많이 비어 있어서 파크스 여사는 중간에 가서 앉았습니다. 그런데 버스에 백인승객들이 올라타자 기사가 ‘니그로는 뒤쪽으로 옮겨가’라고 소리를 칩니다.
로사 파크스는 거부했습니다. 기사와 같이 소리치고, 욕하고, 화를 내면서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자리를 피하지 않고 앉아있는 걸로 거부합니다. 결국 파크스 여사는 몽고메리 시 교통법규위원반죄로 체포돼 다음 월요일에 법원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남북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링컨이 노예 해방령을 선포한 것이 1863년 1월 1일입니다. 1865년에는 제13차 헌번개정을 통해 노예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1868년에는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흑인들에게 시민권이 제공됩니다. 1870년에는 투표권이 부여되고, 1875년에는 공민권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면서 피부색에 상관없이 모든 시민이 공동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민권이란 국민이 국가 또는 공공단체의 업무에 참여할 권리를 말한다.)
사회가 이렇게 변화하자 흑인들이 사회진출이 갑자기 증가했습니다. 그러니까 남부 백인사회가 긴장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진보의 분위기가 다시 퇴행하게 되는데 남부에서는 소작인 제도를 도입하여 노예제와 비슷하게 이용되었고 KKK와 같은 백인무장조직에 의한 흑인테러가 일어났습니다. 인두세를 이용해 세금을 내지 않으면 투표를 제한했고, 문맹자들에게도 투표권을 제한하여 흑인들의 투표권을 박탈했습니다.
결정적으로 1896년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에서 ‘분리하지만 평등하게’ 대우한다는 원칙이 결정되면서 흑백차별이 더욱 공고하게 되었습니다. 분리가 차별인데, 마치 그러지 않은 것처럼 평등하게라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이후 남부의 거의 모든 주에서는 흑인을 분리하는 엄격한 법이 통과되어 학교, 도서관, 병원, 공원, 교회, 대중교통 수단 등 거의 모든 공공시설을 흑인을 이용할 수 없거나 별도로 이용해야 하는 차별이 생겼습니다.
로사 파크스에게 니그로는 뒤로 가라고 소리 친 것은 ‘분리하지만 평등하게’라는 원칙에 입각해 만들어진 인종분리원칙입니다. 앨라배마는 미국 남부이고, 버스 뒤편에 흑인좌석이 따로 있었으면 로사는 말없이 그쪽으로 갔을 겁니다. 그런데 이 버스에는 흑인 공간이 없었습니다. 없는데 임의로 분리하는 것은 ‘분리하지만 평등하게’ 원칙과 어긋납니다.
다음 날 월요일에 로사 파크스는 법원에 가야했고, 주말에 몽고메리 시 흑인들이 이 소식을 듣거 항거하기 위해 모임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모임에서 파크스 부인이 다니던 덱스터애비뉴 침례교회의 26세 흑인목사를 이 문제 해결을 위한 지도자로 선출합니다. 바로 마틴 루터 킹입니다.
1955년은 마틴 루터 킹이 보스턴대학에서 조직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해입니다. 사회적으로 차별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마틴 루터 킹은 본인이 가진 역량을 가지고 충분히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알다시피 마틴 루터 킹 하면 흑인인권운동의 선구자 아닙니까? 그가 이런 인물이 되게 된 계기가 바로 로사 파크스가 버스에서 자리를 지킨 사건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대표로 선출된 마틴 루터 킹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와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운동을 근간으로 흑인민권운동을 조직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비폭력이라고 하면 굉장히 수동적인 저항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폭력만 사용하지 않을 뿐 절대 수도적인 저항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때 그 유명한 몽고메리 시 버스 보이콧 운동이 시작됩니다. 적극적으로 버스를 거부하는 운동입니다. 당시 시내버스 고객의 60% 흑인이었는데 흑인 4만여 명이 정말로 버스 탑승을 거부하고 걸어 출퇴근을 하거나 서로 카풀을 했습니다. 흑인 택시는 버스요금만 받고 운행하기도 했습니다. 킹 목사는 수천 명의 군중들에게 “보이콧을 계속해달라”고 적극적으로 연설했고 이 보이콧은 381일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이 381일 동안 어떤 일이 있었겠습니까? 킹은 보이콧을 공모한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이게 왜 범죄가 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보험회사들은 버스를 이용하지 않을 목적으로 사용되는 자동차 보험을 취소하는 말도 안되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kkk의 노골적인 위협도 있었고, 실제로 흑인들의 집과 교회에 방화가 저질러 지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킹을 포함해 보이콧 지도자들의 집에 폭탄이 날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고메리시 흑인들은 일치단결하여 보이콧을 지속했고, 1956년 11월 13일 얼 위런 대법원장이 이끄는 연방대법원은 ‘버스 안 인종분리 규정’이 위헌이라며 파크스의 손을 들어주면서 흑백분리 지정석제도를 폐지할 것은 몽고메리 시에 권고했습니다.
이후에도 18일간 보이곳이 계속되다가 1956년 12월 21일부터 다시 버스를 이요했습니다. 보이콧 운동을 시작한지 381일이 지났습니다.
물론 로사 파크스의 용기있는 거부, 시민불복종으로 얻어낸 이 승리가 이후 흑인들의 삶을 하루 아침에 더 나은 삶으로 바꿔주진 못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로사 파크스는 회사에서 해고되었고, 이후에도 온갖 살해 협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1957년에 남편과 함께 미국 북부인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로 이사했습니다.
그러나 로사 파크스의 저항에서 시작된 버스 보이콧 운동, 그리고 승리의 경험, 그 열매들이 1960년 2월에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즈버러에서 ‘연좌운동’으로 이어집니다. 네 명의 흑인 대학생이 백인 전용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한 것입니다. 물론 거절당합니다. 그러자 자리를 떠나지 않고 평화적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았습니다. 그 다음 날엔 23명의 흑인, 그 다음날엔 66명, 100명 일주일째 되는 날에 1000여명의 흑인이 연좌운동에 참여했고, 2주일 후에는 남부 5개주 15개 도시로 연좌운동이 번져 나갔습니다. 이건 단순히 운동이 번진게 아닙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 거부하고, 거절할 수 있는 용기, 잠간의 위협을 모면하기 위해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이며 스스로에게 비굴한게 아니라 고개를 들고 당당히 요구하고 거절할 용기가 퍼저나간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가 더 진보적으로 나아가면서 존 F. 케네디도, 마틴 루터 킹도 암살당하는 시대에 대한 저항도 있었지만 미국은 이후 퇴행하지 않고 진보해 나갔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40대의 한 평범한 여성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에 근거하여 잘못된 요구에 용기있게 항거하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나가서 칼을 들고 싸운 항거가 아니라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불의한 요구에 불응한 것. 그것이 지금의 흑인인권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미국에서 흑인인권운동을 말하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로사 파크스 여사를 이야기 합니다. 로사 파크스 여사는 이후 1988년까지 민주당 의원 보좌권으로 일했고, 1996년에는 빌 클린턴으로부터 자유훈장을 받았습니다.
2005년 10월 24일 오늘 디트로이트에서 92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그녀의 유해는 여성으로 처음, 정부 관료가 아닌 사람으로 처음으로 의회의사당 중앙홀에 안치되었습니다. 미국이 건국된 이래 이곳에는 미국의 위대한 인물들이 안치되는 것이 관행이고 로사파크 이전까지 겨우 30명 만이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은 11월 2일 7시간 동안 거의 국민장 수준으로 진행되었고, 그 보수적인 조지 W, 부시까지도 이날 국내외 모든 관공서에 조기를 달라고 명령했습니다.
로사 파크스는 이렇게 까지 생가하지도 않았고, 의도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녀의 용기는 단순히 흑인인권만이 아닌 인간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권리를 우리에게 일깨워준 용기입니다. 그러기에 로사 파크스는 충분히 추모할 가치가 있는 인물입니다. 로사 파크스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백인 운전기사가 우리에게 다가와 손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명령했을 때, 나는 어떤 확고한 결단이 겨울밤의 이불처럼 내 몸을 덮어주는 것을 느꼈다. 나는 단 한번이라도 내가 인간으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어떤 권리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때 내가 원했던 것은 자유였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자유롭기를 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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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면 이제 멈춰요.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 대상이 가족이 될수도 있고 믿었던 친구가 될수도 있고 모든 것을 믿고 따랐던 스승일수도 있다. 그동안 당했던 치욕을 떠올리면 화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 그런데 그나 그녀는 벌을 받지 않고 여전히 내 주변에서 아무렇지 않은듯 살아간다면 하루하루가 지옥밭에 뒹구는 기분일 것이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안했는데 내가 왜 고통받아야 하나요? 나도 당한만큼 되돌려줄테야 그렇지 않으면 더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어요. 이미 저는 그 나쁜놈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어요. 나의 믿음을 나의 돈을 나의 명예를 나의 꿈을... 저녁마다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될 것이다. 실제로 그 분을 이기지 못하고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괴물과 싸우기 위해서 괴물이 되어버린.. 악마와 싸우기 위해서 악마가 되어버린.. 어느 누구라도 이 피해자에게 손가락질을 못할 것이다. 10년이상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다가 도저히 못참고.. 어릴때 성폭행 당했던 고통을 못 견디고... 수십년동안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내 전 재산을 갖고 도망을 간 친구를 찾아가서... 심리적으로는 정상참작이 된다. 오죽했으면...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 착한 사람이 그런 끔찍한 행동을 했을까? 그런데 당신은 돌아갈수가 없다. 이미 당신의 손에 너무나도 많은 피를 묻혔기 때문에... 그렇게 악연은 새로운 악연을 만들어간다. 그래서 삶이라는 것은 단순한듯 보이지만 미세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있는 복잡한 미로와 같다. 나에게도 이런 상황들이 2번정도 있었던것 같다. 그 순간의 분을 이기지 못했더라면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여유를 부리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참다가 가슴속에 병이 든것은 사실이다. 눓어버린 냄비를 딲듯이 눈물과 함께 겨우 벗겨냈다. 엄청난 고통과 좌절감과 슬픔의 연속이였다. 돌이켜보면 억울하고 속상하긴 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내가 그 당시 좀더 지혜로웠더라면.. 내가 그 당시 좀더 이성적이였더라면.. 내가 그 당시 좀더 용기가 있었더라면.. 내가 복수를 한다한들 작은 마음의 위로를 받겠지만 그 복수에 대한 대가는 모두 나의 몫이다. 쓰레기와 같은 그 사람이 내 소중한 삶을 걸 정도인지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쓰레기는 내가 버리지 않아도 결국 자기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물론 바보처럼 당하면 절대로 안된다. 적법한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경고와 함께 벌을 받을수 있도록 끝을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호구처럼 계속 당할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이나 경찰의 도움을 받을수가 있다. 그런 모든 노력을 했는데도 내 힘으로 어찌하지 못할 경우나 결국 내 손으로 피를 묻혀야 하거나 내 삶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할만큼 다 했어요." " 이제 칼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렇지 않으면 복수의 칼날이 어느순간 피해자인 나를 향하게 된다. 실제로 피해자들이 이렇게 자신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너무나도 화가 나는 일이고 슬픈 일이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 나도 앞뒤 꽉 막힐때 순간 그런 마음이 든적이 있었다. 그 칼을 나에게 꽂지 않기도 했다. 그럴바에는 칼을 갈아서 두번다시 멍청하게 당하지 않도록 힘을 기르기로 다짐했다. 어리석은 나의 잘못도 있었기에 많은 공부를 했다. 사람을 너무 순수하게 믿었기에 사람의 심리에 대해서 깊이 공부를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나서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사람이 이해되거나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두번다시 그런 사람과의 인연을 갖지 않을수 있는 작은 지혜를 얻게 되었다. 그 사람 덕분에 오랜 시간 고통속에 살았지만 그 사람 덕분에 내 자신만을 믿으며 살아왔다. 오히려 그런 과정이 나에게 삶의 큰 동기부여가 된 셈이다. 그러면서 한가지를 배우게 되었다. 나 역시도 알게 모르게 그런 가해자가 되어서 살아갈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내 말과 행동을 조심하려고 노력을 한다. 모든 가해자는 피해자의 고통을 전혀 모르고 살아간다. 피해자는 가슴속에 폭탄을 묻고 살아간다. 안전핀을 뽑는 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복수도 좋고 당한만큼 되돌려주는 것도 좋다. 다만 내 삶을 파괴시키는 상황이 온다면 무조건 멈춰라. 바로 내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나쁜 놈은 굳이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더라도 어느순간 그 악행의 열매가 무르익게 되는 순간이 온다. 선한 사람은 당장 복이 오지 않더라도 어느순간 선행의 열매가 무르익데 되는 순간이 온다. 우리 사람들의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런 빈 틈이 생겼을때는 자연의 법칙에 따르게 된다. 다만 악행의 열매가 무르익는데 시간이 걸린다. 다만 선행의 열매가 무르익는데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차분하게 잠시 기다릴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렇게 풀리지 않을것 같은 실타래도 알아서 저절로 풀리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자기자신을 최고의 의지처로 삼고 열심히 행복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영국 행복명상센터
사막의 신비한 사실들 2부
사실 지구는 사막행성입니다 지구는 푸른 바다의 행성이라고들 하지만 사실 지구 육지중 1/3은 사막입니다. 그리고 사막화는 계속 진행중입니다. 아타카마 사막은 4000만년동안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산에서 만년설이 녹아 내려온 물로 의외로 아타카마 사막에 거주하는 주민은 100만명 이상입니다. 그중 일부는 미약하게나마 관개농업으로 농작물을 재배하고 또 다른 일부는 라마와 알파카를 기르며 살고 있습니다. 또한 몇십년만에 한번씩 폭우가 내리면 마른 땅속에서 숨어있던 꽃들이 일제히 만개하여 장관을 연출합니다. 아타카마 사막에는 세계최대의 인간 그림이 있습니다 높은 언덕에 비스듬하게 그려진 이 괴상한 인간은 머리에 뿔이 달렸으며 눈코입이 사각형입니다. 고대 사막에 거주했던 현지인들이 직선과 직각을 이용하여 그린 그림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북동쪽에는 사막과 싸우는 녹색장성이 존재합니다 이 장성은 벽돌대신 덤불과 작은 나무로 이루어져있으며 성공적으로 고비사막의 진격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향후 베이징 외곽에서부터 내몽골지역까지 이 녹색장성을 총 4,500km까지 늘릴 예정입니다. 피스코계곡의 구멍 페루에서 너무 유명한 나즈카 그림들 바로 옆에 훨씬 덜 알려져있지만 신비한 미스테리가 존재합니다. 피스코 계곡에는 약 7천개의 구멍이 있습니다. 단순히 흙을 파서 만든 구멍이 아니라 단단한 암벽을 쪼아서 만든 돌 구멍들입니다. 큰 구멍은 깊이가 2미터 가량되며 초반에는 곡식을 저장하는 저장소나 시신의 무덤으로 추정되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곡물이나 시신 부장품이 전혀 없었기에 곡물 저장소/집단무덤 가설은 가능성이 희박해보입니다. 이곳에는 1.5km에 걸쳐서 약 6900여개의 구멍이 20m넓이로 나열되어있습니다. 일부는 자로 잰듯 일렬로 정렬했지만 나머지는 규칙이 없어 보입니다. 현지인들도 이 구멍의 정체를 전혀 모르는 가운데 과학자들은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이러한 노동집약적인 작업을 해낸것인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위성사진을 통해 동쪽에 고대 도시의 유적을 발견하면서 서서히 미스테리의 실마리가 풀리고 있습니다. 또한 이 구멍들의 행렬 끝부분에는 작업이 폭발과 같은 이유로 급작스럽게 종료된 흔적도 발견되었습니다. 동쪽 고대 도시의 유적과 이상한 폭발의 흔적이라는 단서만 남긴채 피스코 계곡의 구멍을 판 고대 민족은 인류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진것입니다. 가장 오래된 사막의 천문대 사하라 사막에는 영국의 유명한 스톤헨지보다 1천년은 더 오래된 고대 유적이 존재합니다. 납타 플라야로 불리우는 이 유적의 형태는 원형으로 빙 둘러선 선돌로 이루어져있는 무덤이며 각각의 돌의 무게는 1~2톤을 넘으며 일부는 약 2.7미터로 높다고 합니다. 이 석기시대 유적의 연대는 약 6,000~6,500년까지 거슬러올라가며 지금까지 발견된 천문관측 관련 거대구조물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더 놀라운 점은 이 고대 유적의 구조와 기능을 살펴볼때 당대의 온갖 최신기술이 축적된 고도로 발달된 건축물이었으며 이 건물의 목적은 하지와 우기를 측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건축물은 일부러 호숫가에 세워졌는데 강수량이 많은 여름과 가을에는 일부가 불어난 호수에 잠겼습니다. 근처에서는 가축의 흔적과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이 발견되었지만 인간의 시체를 매장한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납타 플라야라는 고대 유적은 고대 이집트인보다 더 오래전에 더 뛰어난 기술을 가진 정체불명의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일부 과학자들은 심지어 위대한 이집트 문명이 고대유적을 세운 정체불명의 문명으로부터 당대 첨단 기술 몇가지를 전수받았다는 가설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대의 거미바위 이집트 서부 사막 룩소라는 도시외곽에서 175km를 더 가면 얉은 와디(우기에만 물이 흐르는 얉은 강바닥)근처의 카르가 오아시스라는 곳 근처에 2조각으로 쪼개진 바위가 존재합니다. 사막에 지천으로 널린게 바위라지만 고고학자들에게 이 바위는 매우 특별한 존재입니다. 유일하게 거미가 그려진 바위이거든요. 이 바위에는 거미줄과 거미들 심지어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들까지 자세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이 바위에 언제 거미그림이 새겨졌는지 연대를 정확하게 측정하기란 힘들어보입니다. 이집트학 학자들은 가깝게는 기원전 4천년에서 멀게는 무려 선사시대보다 더 오래될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아직 고대 이집트 문명조차 없었을 너무 먼 고대의 이야기지요. 도대체 어떤 고대의 예술가가 애니미즘 역사에서 한번도 선택되지 않은 '거미'를 소재로 예술작품을 남겼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인류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최소한 인류 역사상 거미를 소재로 한 고대 문명의 예술작품은 이 바위가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고대의 유리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였던 투탕카멘 1세의 무덤에서 나온 딱정벌레 보석은 사실 가장 오래된 이집트 문명보다도 더 오래된 고대의 유물입니다. 이 오래된 미스테리를 풀고자 과학자들은 사하라 사막을 발굴했고 모래속에서 오래된 유리조각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집트 유리 결정과 비슷한 것은 1945년 최초의 핵실험이 진행된 뉴 멕시코의 사막에서 발견되는 유리질입니다. 핵폭발로 형성되는 유리는 얇은 유리 형태지만 사막에서 발견된 이집트 유리는 좀 더 크고 덩어리진 형태입니다. 유리의 형태로 볼때 이 유리를 형성한 사건이 무엇이건 간에 이 유리가 형성될 당시의 온도는 핵폭발보다 훨씬 더 뜨거웠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이집트 유리가 형성된 원인으로는 유성 낙하로 인한 지면충돌 또는 소행성이 대기권마찰로 인한 공중폭발 정도로 추정됩니다. 소행성 충돌할때 발생하는 대형 크레이터같은 증거는 없기때문에 과학자들은 소행성 공중폭발을 시뮬레이팅해봤습니다. 결과는 놀라웠는데요. 슈메이커 레비 타입의 소행성이 지구 대기권에서 폭발했을 경우 그 화염이 지구표면에 낙하하고 그 온도는 용광로와 동일한 1만8천도이며 이러한 고열로 사막의 모래를 녹여서 유리질로 만든다고 합니다. 또한 지르콘 함량에 따라 유리질의 생성당시 온도를 추정해볼 수 가 있는데 이집트 유리보석에 함유된 지르콘 비율로 보면 소행성 공중폭발 가설은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이 세워지기 훨씬 전에 소행성이 폭발하여 모래가 녹아 다량의 유리보석이 만들어졌고 누군가가 이 반짝이는 유리보석을 줏어서 간직하다가 이집트 왕가에 전해져 딱정벌레 보석으로 세공된 것이죠. [출처] 오늘의 유머
카메라에 담긴 '규모 6.0 지진'을 미리 감지한 고양이들
대만 타이베이에 사는 페이 유궈 씨는 아파트 거실에 홈 카메라를 설치해 반려묘들의 일상을 기록하는 게 취미입니다. 말 그대로 고양이들이 서로 장난치거나 낮잠을 자는 등의 평범한 하루를 촬영하기 위함이었죠. 그러나 8월 8일, 목요일 새벽 5시 28분, 평범한 일상과는 다른 특별한 장면이 카메라에 담겼습니다.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5마리의 고양이들. 화면 오른쪽에 있는 고양이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눈을 번쩍 뜹니다. 곧이어 나머지 고양이들도 동시에 눈을 뜨고. 잠시 후, 집안의 선풍기를 비롯한 소품들과 고양이들의 머리가 좌우로 격하게 흔들립니다. 규모 6.0의 지진입니다! 다행히 영상 속 고양이들은 모두 새벽에 자다 깼음에도 지진에 침착하게 대응했으며, 다친 고양이는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놀라운 건 바로 지진을 한참 전에 미리 예측하는 능력인데요. 동물이 지진을 예측할 수 있다는 주장은 수 세기 전부터 나왔습니다. 실제로 대만에서는 1년 전 반려견이 지진을 미리 예측하여 보호자를 구한 사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명한 영상 자료에도 불구하고, 동물이 지진을 예측한다는 과학적인 증거는 아직까지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동물에 의존해 지진을 대비하기보다는 지진계를 믿는 게 더욱 정확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지만, 일각에선 일반 가정에서는 '지진을 정밀하게 예측할 수 있는 지진계'를 구하기가 쉽지 않은 만큼, 반려동물을 유심히 지켜보는 것도 지진을 대비하는 방법이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꼬리스토리가 들려주는 동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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