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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불교와 해방신학 그리고 현 정국… 전직 조선일보 기자로 살아가기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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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돼 있다고 말한다. 또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진리를 종합할 때 실상이 드러난다고도 한다. ▲‘사회참여’를 주창하는 해방신학은 이와 다른 시각을 갖는다. 빈곤한 사람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교리를 해석함으로써, 해방신학은 정의와 불의를 분명히 나누고 불의가 정의를 이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상대를 품을 수 있는 자는 자신을 ‘성찰’한 자다. 성찰은 상처로부터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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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자직 퇴직 후에 논술 강사, 토론 코치로 활약했다. 정보를 전달하고 ‘주장’하고 ‘대화’하는 방법을 익혔으니 나는 스스로 ‘소통 전문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내 주변인들과의 소통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마누라와 허구한 날 싸웠고, 토론 사업을 함께 한 동업자들과도 불화를 겪었다. 소통의 기본인 ‘정서의 소통’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논리의 소통’인 토론은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애초에 불가능하다.
인간관계에서 궁지로 몰렸던 나는 불교계와 인연을 맺게 됐고 이것이 내게 구원이 됐다. 나는 조계종 화쟁위원장 도법 스님 주변에서 불교를 공부하면서 마음 다스리는 법을 배웠고 인간관계에 나름 자신을 갖게 됐다.
진실은 종합할 때 드러난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돼 있다고 말한다. 또한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진리를 종합할 때 실상이 드러난다고도 한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예화에서 장님들은 코끼리가 바람벽 같다, 기둥 같다, 뱀 같다고 저마다 말하지만 이 말들은 모두 진리이면서 진리가 아니다. 코끼리의 실상은 이들 언술들을 모두 종합할 때 드러나는 것이다. 이처럼 ‘종합’으로부터 진리가 드러난다는 것이 신라시대 고승 원효의 ‘화쟁(和諍)’ 사상이다.
불교 세계관에서, 화쟁 사상에서 ‘정의’는 무엇인가? 통상 ‘정의’는 대립하는 A와 B 사이에서 이야기된다. 이런 세계관에서는 “A와 B 중에서 어느 쪽이 옳으냐”를 물으며 “A가 옳으면 B는 틀리다”, “B가 옳으면 A는 틀리다”라는 식의 논리가 적용된다.
그러나 만약 A와 B가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라면 이런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A가 옳으면 B도 옳고, A가 틀리면 B도 틀리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왜냐하면 A는 곧 B이고 B는 곧 A이기 때문이다.
이는 양시론이나 양비론이 아니다. 양시론이나 양비론은 A와 B가 서로 분리 독립돼 있음을 전제하지만, 불교적 세계관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돼 있음을 전제한다. 무위당 장일순의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음을”이라는 영탄(永嘆)도 이런 진리를 노래한다.
“나는 너이고 너는 나다”
이것은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일까?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지 “네가 나”라는 건 무슨 말인가? 그러나 이는 ‘참여불교’의 창시자로 평가되는 틱낫한 스님의 시에서 감동적으로 드러나 있다.
베트남의 승려이자 시인이며 인권운동가인 틱낫한 스님은 ‘부디 나를 참 이름으로 불러다오’라는 그의 시에서 ‘나는 작은 배로 조국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가 해적한테 겁탈당하고/ 푸른 바다에 몸을 던진/ 열두 살 소녀다’라며 1970년대에 공산 베트남을 탈출한 ‘보트 피플’의 슬픈 운명을 노래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구절에 ‘그리고 나는 바로 그 해적이다/ 볼 줄도 모르고 사랑할 줄도 모르는/ 굳어진 가슴의 해적이다’라고 노래했다.
스님은 겁탈당한 열두 살 피해 소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동시에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을 저지른 해적과도 동일시한다. 이것은 해적에 대한 근원적 ‘용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소말리아 해적의 진술
우리에게도 ‘해적의 추억’이 있다. 소말리아의 해적들은 우리 배를 납치해서 선원들의 몸값을 요구했다. 우리는 이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인간을 목적으로 대해야 하며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고 한 칸트의 도덕률을 정면으로 어기고 우리의 가족들을 한낱 돈을 위한 수단으로 대한 그들을 우리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와 동일시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단편적인 도덕률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해적들을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해적들의 실상을 알고 나면 달라질 수도 있다. 해적들은 납치된 삼호주얼리호 석해균 선장의 기지와 우리 군의 작전으로 붙잡혀 우리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감옥에 갇힌 그들 중 한 명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교도소는 참으로 훌륭하다. 깨끗하고, 안락하며, 음식도 맛있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범죄자들을 가두는 교도소에 갇혔으면서 오히려 고향의 가족들을 애달파하는 이 말을 들으면 그들의 처지가 공감되면서 용서할 마음도 생길 수 있다.
우리는 분명 그들과 연결돼 있다. 소말리아 해적들을 범죄로 내몬 것은 소말리아의 지독한 가난이었다. 장 지글러가 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보면 ‘무정부 상태’이고 ‘극빈 상태’인 소말리아의 정치, 경제 상황이 국제정치, 경제와 긴밀히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G20의 일원으로서 세계 경제체제 운영의 일부를 맡고 있는 대한민국에도 소말리아의 해적을 낳은 책임 중 일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틱낫한 스님의 시를 이렇게 이해한다.
정의와 불의를 구별하는 해방신학
기독교에서 ‘사회참여’를 주창하는 해방신학은 이와 다른 시각을 갖는다. 빈곤한 사람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교리를 해석함으로써 교회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불평등과 부조리로부터 이들을 해방시키는 사회참여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해방신학은 정의와 불의를 분명히 나누고 불의가 정의를 이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약자가 강자가 되면 현실이 바뀌는 것일까? 강자가 된 그 약자가, 약자가 된 그 강자를 핍박하는 사회가 된다면 이것은 정의로운 사회일까? 또한 약자가 된 강자는 반발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까? 약자를 해방시키는 것이 정의라면 이건 불가능하지 않은가?
만약 강자와 약자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회라면, 양측은 서로를 품어야 한다. 사람들은 강자가 약자를 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상대를 품을 수 있는 자는 자신을 ‘성찰’한 자다. 성찰은 상처로부터 생긴다. 상처를 품은 자는 더 성숙한 자이고, 상대를 품을 가능성을 갖고 있는 자다.
자신을 성찰한 자가 상대를 품을 수 있어
흑백차별을 받았지만 백인들을 포용한 남아공의 만델라, 흑인이면서 ‘미움’을 품지 않고 대통령에 오른 미국의 오바마 같은 사람들이 바로 강자를 품은 약자다.
우리 사회가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강자와 약자의 위치가 바뀌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성찰’의 기운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전과는 다른 시민이 되어야 한다. 내가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페북에 올린 것은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애초부터 박근혜는 ‘얼굴 마담’이었다. 박근혜의 일탈을 막지 못한 청와대, 새누리, 정치권의 순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박근혜에게 대선에서 진 문재인이나 민주당도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대통령 후보밖에 내지 못한 시민 모두에게도 책임 있다. 2년 전 ‘이재만 비서관이 밤에 자주 서류 싸들고 외출하지 않았느냐’고 국회에서 의혹을 제기한 박영선 의원도 칭찬만 받기는 어렵다. 조중한(조선 중앙 한겨레)이 그나마 나라를 살리는 것 같다.”
이 글은 페친들로부터 맹공을 받았다. “여기에 ‘조선’이 들어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순실 사태 해결의 물꼬가 터진 중요한 계기 중 하나는 최순실이 청와대 행정관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동영상이었다. TV조선이 보도한 이 영상으로 해서 많은 국민들이 최순실 비리의 핵심을 분명하게 알게 됐다. 그럼에도 세 언론 중에 ‘조선’만이 유독 좌파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조선일보는 악’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비리를 짚어내 처벌해야 할 시점에 ‘시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는 ‘물타기’ 발언이 옳은가”, “꼭 지금 이런 발언을 해서 전선을 흐리는 것이 옳은가” 하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가 분노의 감정으로 “박근혜 하야”를 외치는 상황이라면 “분노를 내려놓고 성찰하자”라는 발언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무술(武術)인들도 승부에서 이기려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김왕근 (전 조선일보 기자<수습 24기> • ‘붓다로살자’ 편집장) <⑦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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