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n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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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하기Ⅱ

9월 1일 리모델링 공사한다고 할 때, 조언해주신 분들이 공통적으로 한 말이 있다. '업체에서는 자기들 편한대로 하려고 하니, 안된다는 말에 수긍하지 말고 원하는 걸 요구해라.' 알겠다고, 내가 원하는 스타일을 머릿속에 구상해서 시작했으니 가능한한 거기에 맞춰서 공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현실은 내 생각과 달랐다. 부엌은 처음부터 끝까지 매번 변경되었다. 외벽은 어두운 회색이다.고 집 사기 전부터 정해놓았었다. 헌데 페인트 업체에서 어두운 색일 수록 탈색이 잘된다고 해서, 그럼 밝은 회색할게요, 하고 컬러칩에서 두번째로 밝은 회색을 골랐다. 마당 코너 부분에는 주물 느낌이 나는 심플하고 귀여운 펜던트 등을 달고 싶었다. 헌데 조명가게에서 외부의 펜던트 등은 관리가 어렵다고, 팔기 위해서 예쁘게 꾸미는 게 아니라 실 거주 목적이라면 추천하지 않는다고 해서, 천정에 딱 붙는 동그란 LED등을 골랐다.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포인트로 스테인드 글라스 느낌이 나는 펜던트를 생각했다. (여긴 실내다. 흐흐) 헌데 전기 사장님이 천정이 낮아서 머리에 부딪힐거라고 하셨다.(엉엉) 포기하고 마당과 같이 천정에 딱 붙는 동그란 LED 등을 달기로 했다. 그러다 정말 날 멘붕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났다.
외벽에 칠해진 페인트를 본 순간, 이게 어디가 회색이야!!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옥상 계단은 새로 칠한 방수페인트로, 녹색과 회색 중 회색을 골랐다. 그럼, 연한 회색을 골랐던 외벽도 저 계단색보다는 밝다해도 비슷한 색이어야 되는게 아닌가?? 하 사장님이 꼼꼼하신 분이고, 업체에서 공사하는 건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을 대행해주는 거지, 결국엔 내가 마무리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공사 작업에 태클 한 번 안 걸었는데, 이 날은 정말 제대로 멘붕이 왔다. 페인트 업체에서는 내가 골라준 색으로 작업했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내 눈엔 아무리 봐도 연한 회색으로는 안 보이고.. 이미 끝난 작업 뒤집자는 말까지는 못하겠고... ㅜㅁㅜ
9월 2일 욕실 악세사리 고르러 갔다. 내 요구에 따라 욕실의 모든 수납장, 선반, 심지어 샤워기 걸이마저 철거된 상태. 전부 새로 해야하는 데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수납장은 포기하고, 심플한 걸이세트랑 유리선반 3개를 골랐다. 9월 3일 골라둔 욕실 악세사리 발주를 전부 취소했다. 9월 6일 공사는 잘 되어가냐고, 궁금하니 사진 좀 올려보라는 친구에게 푸념. "요즘 의욕없어서 사진도 안찍는다." " 욕실 액세서리는 골랐다가 다 엎었다. 수납장도 없고, 거울이랑 수건걸이, 휴지걸이만 달 거임." "외벽은 짙은 회색 칠하려고 했는데 짙은 색은 탈색이 잘된대서 연한 회색 골랐음. 근데 오늘 가보니 회색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음.ㅜ.ㅜ" "생각한 거, 계획한 거는 현실과 안 맞대서 계속 바꿔야하고, 바꾼 결과도 뭔가 내 생각과는 다르고... 반쯤 포기 모드임.."
9월 8일 실의(?)에 빠진 나를 회생시킨 일이 일어났다. 퇴근 후에 오늘은 무슨 작업이 어느 만큼 되었나, 확인하는 게 일과였는데 이 날 가니 도배작업이 완료되어 있었다. 부모님 방과 여동생 방은 각자 고르고, 내 방과 공용 공간은 내가 골랐는데, 내 생각보다 훨씬 예쁘게 된 것. 밝은 아이보리 색 바탕의 세로 선들이, 밝으면서도 긴장감을 유지해서 전체적으로 화사하고 깔끔한 공간이 되었다. 아름다운 벽지의 자태에, 페인트로 인해 어두움으로 물들어 있던 내 마음이 단번에 밝아졌다.(그리고 이 때쯤엔 페인트는 완전 포기해서, 어디에 뭘 바르든지 신경쓰지 않았다.)
9월 9일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간다. 진짜다. 이 날은 조명작업을 했었던 듯, 등이 달려 있었다. 세트로 맞춘 방등과 거실등, 욕실등은 깔끔했고, 중앙등 없이 주백색의 간접등을 단 서재도 마음에 들었다. 다락 때문에 천정이 낮아서 레일등 설치하기 어려웠는데도, 요즘 추세에 따른다고 전기 사장님이 애써주신 부엌의 레일등도 괜찮았다. 근데, 문제는 포인트로 골랐던 현관과 세탁실 앞의 펜던트 등. 펜던트 센서등은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가게 물건들 중에 몇번이 나 살펴보고 직접 고른 펜던트등은,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었는데, 설치된 걸 보니 그 어색함을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아.. 이래서 인테리어의 완성을 조명이라고 하는구나.. 어쩜 이렇게 공간과 조명이 따로 노는지.. 그 괴리감에 안절부절 못하던 나는, 곧장 조명가게로 갔으나 이미 가게 문을 닫은 뒤였다.(7시 밖에 안됐는데!!) 결국 펜던트등은 반품하고, 인터넷에서 구매해서 달았다. 부산에 갔을 때 조명가게 들른 나는, 한가지를 새로 알게 되었다. 펜던트 센서등이 잘 나오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펜던트에 센서를 연결해서 달면 된다는 것.(인터넷에서는 이미 많은 금손들께서 직접 시연하고 계셨다.) 조명을 고르러 갔을 때 내게 실용적인 조언을 해주던 직원은, 이 말을 쏙 뺐던 것. 본인도 몰랐던지, 조명 사장님을 귀찮게 하는 게 싫었던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9월 11일 자잘하게 남아있던 나머지 공사들 - 세탁실 앞 페인트 칠, 부엌의 한쪽 벽 재도배 등등이 이날 마무리 되었다. 펜던트 등 교체 작업과, 대문 센서등과 인터폰의 마찰 문제 등은 추석 연휴 뒤에 해주시기로 했다. 9월 12일 도시가스 연결. 보일러를 켰다. 하사장님이 몇 시간 뒤에 와서 장판 실리콘 작업을 하고 보일러를 끄겠다고 하셨다. 어차피 연휴 뒤에 다시 뵐거라서 대문 열쇠를 돌려받지 않았다. 감사하다고, 연휴 잘 보내시라고 인사했다. 엄청 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리모델링 공사가 끝났다.(일단은)
9월 17일 추석 연휴인 토요일. 비가 많이 와서 어디 나가기도 그렇고 해서 공사 끝난 빈 집에 왔다. 이제 가구를 사야하니까.(후훗. 끝이 없다) 어느 방에 무슨 가구를 넣을지 생각해보고 방 사이즈도 재보려고. 부엌에서 이 좁아터진 곳을 어떻게해야하나,하고 있을 때 대문이 열리면서 검은 우산이 슥 들어왔다. 속으로 깜짝 놀랐다.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상대도 인기척이 있어서 놀랐던듯 하다. 건네는 목소리가 하사장님이다. 공사도 끝났는데 무슨 일로 오셨나, 했더니 연휴 기간에 비가 많이 와서 혹시 문제가 생겼을까 와보셨단다. 공사 기간 중에도 휴무인 일요일에(교회 다니시는 분인데) 집에서 종종 부딪히곤 했더랬다. 이 분의 이런 세심함이 - 오늘 같은 날은 좀 무섭기도 했지만 - 믿음을 주기도 했다.
어떻게 하고 싶다고, 큰 그림은 다 그려두고 시작한 공사였다. 짙은 회색의 외벽, 밝은 색의 내부, 우드 계열의 가구. 인테리어의 포인트로 삼은 건 보자기. 허나 내가 하고 싶은 건 이상이고, 업체에서 작업하는 건 현실. 그리고 내겐 이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지식이 거의 없어서,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부재를 실감했다. 아니,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직업의 필요성을 실감했다고 해야할까. 그건 그냥 공간을 꾸며주는 일이 아니라, 이상의 현실 구현을 도와주는 직업이라고 느꼈다. 가구를 들이고, 이사를 하고, 패브릭까지 거의 다 한 지금에 와서 봐도, 원래 내가 그린 그림의 반도 투영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완성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보다는 여기까지 애썼다는 뿌듯함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다음 이사는, 아무리 빨라도 10년 뒤에나 있었으면 좋겠다. (진짜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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