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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자 : 랭킹월드 Ranking World
출처 : 위키백과
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18일[2] (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 ~ 1598년 12월 16일 (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덕수(徳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한성 출신이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무과(武科)에 급제[3] 하여 그 관직이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발포진 수군만호, 조산보 만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을지문덕(乙支文德, ? ~ ?)은 고구려 영양왕(재위: 590년 ~ 618년) 때의 장군이다. 수나라의 제2차 침입을 물리친 장수로 유명하다. 612년 수 양제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요동성에서 지지부진하자 별동대 30만 5천 명을 뽑아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직공하였다. 별동대는 평양 근처까지 진격하기는 했지만 모두 을지문덕의 유인작전이었고, 극도의 피곤과 군량 부족으로 인해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별동대가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에서 강을 건널 때 습격하여 궤멸시켰다.
양만춘(梁萬春, ? ~ ?) 중국측 사서에는 당태종이 안시성 전투를 앞두고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통하여 영류왕과 신하들을 모조리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을 때, 안시성 성주는 연개소문의 반정에 반대하며 복종하지 않았다"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645년 당 태종이 15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해왔다. 그러나 안시성에서는 군관민 일체로 협동하여 당나라 군대와의 3개월에 걸쳐 하루 평균 5~6회의 포위 공격을 막아내며 농성하였고 당군의 공격을 막아 내었다.
당 태종이 안시성주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는 야설도 있다. 또한 당나라 측 사서에는 당태종이 끝까지 안시성 방어를 성공한 안시성 성주에게 비단 백필을 하사하였고 이에 안시성 성주가 절하여 하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격렬한 전투를 치루었고 긴급히 퇴각하던 당나라의 당시 사정을 볼 때 당나라 측 사서의 과장된 기록으로 추측된다.
이후의 행적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권율(權慄, 1537년 ~ 1599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안동[1],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영의정 권철의 막내 아들이자 이항복의 장인이다. 임진왜란의 조선군 장수로, 왜란 당시 조선군 총사령관인 도원수로서 왜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데 기여했으며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을 이끈 장군으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사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김시민(金時敏, 1554년 ~ 1592년 11월 21일(음력 10월 18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구)안동,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고려 때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13대손이자 지평(持平) 김충갑(金忠甲)의 셋째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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