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가 큰 영향력 갖는 동아시아 3개국인 한국,
중국,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인물 꼽으라면 중국은
관우, 일본은 조운, 한국은 바로 "제갈량"이다.
(예로부터 문을 숭상한 전통기조 탓인지...)
이 칼럼의 첫 포문도 그래서 제갈량으로 준비했다..
여러분이 읽었던 삼국지에는 잘 나오지 않은 소제들
위주로 갈테니 다들 Focus!
고향은 서주 낭야현.(지금의 장쑤성 쉬저우)
조조가 부친 잃은 빡침으로 서주 제노사이드 자행 시
부친 제갈규가 형주로 거처 옮길 때 함께 이주.
부친 사후 숙부 제갈현 슬하에서 자란다.
3남2녀 중 넷째였고 당시 기준으로 신장이 무려
189cm가량으로 전란과 기근 탓에 성인남성의
평균신장이 140cm중후반이던 3세기 중국 기준
가히 거인이나 진배없던 장신에 용모도 잘 생겼단
기록이 남아있고 마른 체형이였다고 한다.
당시의 선비들의 주류 학업스타일은 토시 하나까지
달달달 외우던 방식이였는데, 제갈량은 그런 암기
위주가 아닌 요약정리 방식으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후한 마지막 천자인 헌제와 동갑인데다
사망한 해도 같았다.

그 유명한 유비와의 "삼고초려"는 나관중의 각색이
들어가긴 했으나, 실제로 사료에도 유비가 세 번
찾아간 끝에 제갈량을 만났다고 남아있다.
연의에서처럼 제갈량이 유비를 피한건 아니였고
정말 서로 타이밍이 안맞았으며, 휴대폰도 없던 시절
이다보니 당시로서는 어찌보면 다짜고짜 찾아가서
마침 딱 만나는것도 쉽진 않았기에 그랬던듯 싶다.
그는 딱히 유비를 따를 마음은 없었으나, 임관하여
모실 마땅한 군주가 없던데다 당시 절친이던 서서의
권유도 있고 해서 유비를 모신다.
대기업 서류전형에서 컷트되던 유망주가 입사제의
하는 중소기업 들어간 꼴.
연의내용과 달리 모친이 인질 잡혀 서서가 조조에게
가기 전까지 한 동안 제갈량과 서서는 유비 휘하에
있었고 방통과도 인척 관계였는데, 제갈량의 누나 중
한 명이 방통의 숙부의 아내.. 즉 숙모였다.

유비에게 임관 후부터 관우, 장비 형제의 그에 대한
텃새는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였다.
장비는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재사를 공경하는 편이라
제갈량이 일정 수준 능력을 보인 후로는 그닥 태클이
없었으나, 유비 다음은 자신이라 자부하던 관우의
견제와 경계는 제갈량으로서도 관우 사망시까지 참
벅찬 일이였다.
상명하복이 투철한 전형적인 군인이라 제갈량의 지시도 잘 이행하여 케미가 잘 맞은 덕에 제갈량이
가장 의지하던 무관은 "조운"이였다.
"마량"과도 코드가 맞았는지, 사석에서는 호형호제
하던 사이였다고 한다.

촉빠에 제갈량빠던 나관중에 의해 가장 주인공버프
크게 받은 인물 중 하나인 제갈량이였기에 소설 속
모습은 거의 닥터 스트레인지에 가깝게 묘사되나
그도 사람인지라 완벽의 면모만 있던건 아니고...ㅋ
분명 단점도 있었고 매사에 뛰어난건 아니였다.
우리에게 그는 탁월한 전략가의 이미지가 강한데,
실제로 전장에서의 전략과 전술, 병법에 능했던건
맞으나 당시 그 분야의 최강자는 사실 아니였다.
당대의 평가 등과 커리어들을 볼 때,
그는 전략가보다는 오히려 정치가로서의 실적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업적도 그쪽이 훨씬 많았다.
전체적 판세를 파악하는 전략적 면모는 오히려
주유, 조조가 앞섰고..
전투에서의 전술적 재량은 방통, 법정에 뒤졌으며..
후방보급에서는 순욱도 결코 제갈량 못지 않았고
심리전에 있어서는 가후나 정욱이 더 나았고
방어전술은 사마의가 우위였다는 평가가 지배적.
특히 중국에서의 책략,전략가로서의 자질을 따질 때
큰 척도로 삼는 것은 기책..
쉽게 말해 창의적이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임기응변
더 쉽게 풀어 전술적 "에드립"여부였는데,
제갈량은 앞서 말한 책사들에 비해 이 부분이 특히 좀
빠지는 편이였다.
(중국 역사상 이 분야의 갑은 바로 "한신")
역사기록에서나, 소설에서나 제갈량 전술의
주요패턴은 지형 및 기후 등의 사전정보 철저 숙지를
베이스로 한 정석 응용이였던 범생 스타일.
그의 임기응변 부족론에는 반론도 있었는데,
사실 유비를 처음 섬기는 순간부터 오장원에서 숨
거둘 때까지 그는 남만정벌같은 일부를 제하면
대부분 조조~위를 상대하며 늘 열악한 자원과
인력으로 압도적인 적을 맞이했고....
그가 이끄는 것은 유비세력 & 촉의 거의 전부였기에,
성공하면 대박이지만 실패시의 리스크가 큰 기책을
선뜻 쓰기는 무리였다는 반론이 그것.

정치적인 치적은 소설에는 잘 안나오는데,
그는 촉의 경제발전 및 과학기술 개발과 심지어
사법제도 개편 및 군의 현대화 등 여러 분야의
내정에서 눈부신 업적들을 이뤄냈다.
당시 서천지방의 대표적 특산물은 "비단"이였는데
이 비단의 생산량과 퀄리티를 높이고자 다양한
개량을 시도했고, 이 비단사업의 대성공 덕에 촉한의
비단재벌들은 중원의 어지간한 부호들 싸닥션을
날릴 수준의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농지개간과 경작법도 많이 손봤고 천연가스 시추에
성공했으며, 내륙이라 소금이 금값이던 그때에
암염이라는 바위에서 소금을 추출하는 방법도 개발,
놀라운 건 당시로는 의심만 받아도 목이 날아가고
삼족 멸하는건 우습던 위나 오와 달리 전문 수사관
시스템을 도입하여 증거와 증인심문 등 통한 체계적
수사시스템을 구축했던 것도 제갈량이였다.

"인간" 제갈량은 친절하고 예의바른 성격이였고,
상당히 도덕적이였으며 청렴했음은 물론, 매사에
꼼꼼을 넘어 깐깐한 완벽주의자로 자신이 직접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심 못 하는 스타일로서...
지금으로치면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비서실장,
외교부장관, 행정부장관, 산업경제부장관, 감사원장,
국정원장, 경찰청장, 대법원장, 검찰총장을 합친
것보다 많고 다양한 업무들을 일일히 서류 뒤적이며
직접 처리했다.
이런 사람이 부하라면 더할 나위 없지만 직위가
황제 바로 아래인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승상이였기에
이런 사람이 상관이면 아랫것들 여럿 죽어나가는거
일도 아니였다...
제갈량 본인도 끝내 과로사했지만,
위, 촉, 오 통틀어 촉의 고위관료 과로사 비율이 가장
높은건 결코 우연이 아니였다.
참고로 그는 유비 사후 그냥 승상이 아닌, 황태자와
동급에 왕보다 높은 "상국"의 지위였으며,
그의 사후 승상직 자체가 영구 결석 처리되어...
촉한 역사상 유일한 승상이였다.
어벙띠리하기 그지 없던 유선도, 부친 유비의
유조도 있었고 제갈량의 영향력과 충심이 워낙에
굉장했던터라 제갈량을 부친처럼 대했고
꼬박꼬박 경어를 썼으며 제갈량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 및 토를 달지 않았다고 한다.
거의 입헌군주제 수준이였으며, 오너는 따로 있으나
전반적 경영은 제갈량이 일임하는 전문 경연인체제의
C.E.O.나 다름 없었다.

지금까지만 보면 퍼펙트같은 제갈량의 단점은
사람 보는 "안목"이 그닥이였다는거다...
촉에서 사람 잘 보는 분야의 최고수는 "유비"였는데,
이에 반해 제갈량은 그 뛰어난 여러 분야에도 불구..
사람 보는 안목은 별로였다.
그가 발탁한 이들의 대표적인 케이스를 보자면..
장완 - 결과적으로 훌륭했으나 대체로 직무태만인
스타일로서 제갈량이 뒤봐주지 않았다면
유비에게 밉보인 그로서는 진즉 Fired...
마속 - "읍참마속"이란 고사를 만들어 낸 대표적인
실패작으로서 전투경험 전무에 글로 전투
배우고 나대다 끝내.....-_-;;
이엄 - 제갈량이 평하길, "육손에 견줄만 하다!"라고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육손 근처도 못 감.
양의 - 업무능력에 대해 제갈량이 치켜세웠으나
인성 쓰레기에, 제갈량 사후 위연과의 불화로
위연의 사망을 초래.
위연 - 제갈량이 발탁하진 않았으나, 유비는 잘만
활용한 최고의 맹장이건만 제갈량은 내내
겐세이만 줬고 결국 위연과 양의의 불화의
단초를 제공하는 계기를 줌.
강유 - 능력과 인성은 좋았으나, 근자감에 휩싸여
끝없는 북벌시도로 촉한을 멸망으로 가는
특급열차에 태운 일등공신.
마량 & 비위 - 능력 자체는 대단들 했으나 단명.

오에서 마지막에 대장군 직위까지 오른 친형,
"제갈근"과는 서로 모시는 주인이 달랐고 둘 다
각자의 소속집단의 중역이였기에 볼 일이 거의
없어 주로 편지를 주고 받았고 막상 만나도
비즈니스적인 이야기만 했다고 한다.
마흔 후반대에 들어 유일무이한 자식(제갈첨)을
하나 얻었고 꽤나 예뻐했는지, 제갈근에게 어린 첨의
자랑으로 가득 채운 편지를 보낸 기록이 있다.
위, 촉, 오는 모두 이민족(그들 기준 오랑캐) 문제가
난제였는데 무력으로 굴복 시키거나 축출 일변도였던
위나 오에 비해 제갈량의 남만정벌은 비록 무력으로
제압은 했으나 이후 먼저 교섭 시도 후, 이민족들로
하여금 지금으로보면 "자치구"개념의 자율통치권을
인정하여 삼국 중 가장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대이민족 대응법을 보여줬다.
고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맵고 짠 음식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편식이 좀 있었던거 같다.
그리고 식사도 정해진 때에, 정해진 장소에서
먹기 보다 대강대강 챙겨서 이런저런 일들을 보며
아무곳에서나 먹었다고 한다.(가정교육이...ㅋ)
이건 정확한 건 아니지만, 무릎이나 고관절 쪽이
좋지 않아서 장년 이후 휠체어 비슷한 작은 의자형
수레를 타고 다녔다는 설이 있다.
적벽대전 앞두고 오에 가서 그곳의 재사들의
다구리를 말발로 역관광 시킨 이야기는 허구다.
짚단을 실은 배를 타고 노숙과 함께 조조군 진영으로
가서 화살 10만 개를 슈킹해온 일화도 허구다.
과로사는 분명해 보이지만, 정확한 사인으로는
"폐결핵"설과 "위암"설이 팽팽하다.
워낙 불규칙한 식습관과 수면부족 및 극도의
스트레스, 과로 등 암 발병에는 최적이긴 했다.

첫 칼럼인데, 두서도 없거니와 일단 너무 양 많고
내가 봐도 지루하다....
그래도 뭐 읽을 사람들은 읽겠지 T-T
피드백 괜찮으면 앞으로도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해 위와 같은 방식으로 대중적이지 않은 스토리
위주로 갈 예정.
삼국지 관련 궁금증에 대한 질문이나 다뤄줬으면
하는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신청도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