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르메스에서 진행한 전시를 빙글러 여러분께 소개하기 시작한 것도 벌써 2년.
그동안 여러분과 함께 뛰어난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참 많이 만났지만, 이번 'Wanerland - 파리지앵의 산책'전은 그 중에서도 '역대급'이라고 할만큼 놀랍고 신선했습니다.

현대 미술계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바로 그 런던 사치 갤러리에서 열렸던 Wanderland전이 파리, 두바이 다음으로 선택한 곳은 바로 서울 한남동의 디뮤지엄.
늘 차분한 한남동이지만 이날 전시장 앞은 잔뜩 기대한 얼굴을 한 인파들로 북적였습니다.

본격적인 '파리지앵의 산책'을 시작하기에 앞서 모든 관람객들은 예외 없이 이 지팡이를 건네받게 됩니다.
19세기 유럽을 그린 영화 속에서 지팡이를 들고 산책을 하는 신사는 아마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이미지일 것입니다.
실제로 그 시절 신사에게 지팡이는 외출할 때 반드시 가지고 다녀야 할 필수품이었습니다. 간편하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호신용 무기이자 가장 멋진 패션 소품이기도 하니까요.

이번 전시의 주제이기도 한 '플라뇌르(flaneur, 산책하는 사람)'에게 지팡이는 이처럼 산책이라는 작은 모험을 함께 해주는 가장 든든한 벗인 셈이었습니다.
지팡이를 손에 단단하게 쥐어보고, 바닥을 톡톡 치며 걸어봅니다.
벌써 일상에서의 내 역할 대신 몽상을 즐기는 '플라뇌르'라는 새로운 역할에 완벽하게 적응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에르메스에서 준비한 이 마법 같은 공간, Wanderland에서 지팡이에게는 또 다른 역할도 있습니다.
지팡이 윗부분에 달린 돋보기를 통해 스크린을 보시면 이렇게 세계의 비밀스러운 이면을 보여주기도 하거든요.

지팡이를 골랐으니 이제 옷을 고를 차례입니다.
19세기의 플라뇌르라면 산책을 갈 때도 아무거나 입을 순 없습니다.
멋스러우면서도 나의 개성을 보여주는 옷을 입어야 산책길이 더욱 즐거워지는 법이죠.

전시관 안에는 남녀의 드레스 룸이 양쪽으로 디스플레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아이템들을 찬찬히 뜯어보며 물건의 소유자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던 찰나.
옆에 있던 관람객이 깜짝 놀라 작은 비명을 지릅니다 "저거 봤어?"
보셨나요?
말조각상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모습을?
Wanderland전에는 이렇게 사소하지만 일상을 마법으로 바꿔버리는 디테일들이 잔뜩 있답니다.
'다음 코스로 빨리!'라며 바쁘게 지나치지 말고 모든 전시물 여유롭게 살펴봐야 제대로 즐길 수 있죠.

이제 19세기 파리의 아케이드로 떠나볼까요?

최신 패션과 유행, 나아가 예술까지 즐길 수 있는 아케이드는
그 시절 파리지앵들에게는 최고의 산책 코스였습니다.

실내에서도 쇼핑을 즐길 수 있게 만들어진 아케이드는
19세기 자본주의의 집약체와 같은 공간이지만
당신이 플라뇌르라면 아름다운 것을 즐기기 위해 반드시 돈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이렇게 눈으로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이제 어둑한 파리의 골목을 지나갑니다. 물론 이 골목 역시 매혹과 낭만으로 가득 차 있죠.
푸른 하늘이 담긴 이 빗물 웅덩이는 디스플레이 기술의 산물입니다.
예술과 기술이 만났을 때 얼마나 놀라운 환상을 창조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죠.

이제 카페에 도착했습니다.
술과 음악, 그리고 사교를 찾는 파리지앵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산책 코스는 없겠죠.
바텐더가 음료를 권하지만 사양하고 계속 걷기 시작하다 보면...

파리의 지하철 풍경을 만나게 됩니다.
Wanderladn전에는 각 나라의 아티스트에게 전시관 하나를 할애해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통이 있는데요. 이번 한국 전시에서는 제이플로우가 그 영광을 차지했습니다.

이제 조용한 파리의 저택을 창문 너머로 바라봅니다.
이 곳에는 어떤 마법이 숨어있을까요?
마치 유령에 들린 듯, 램프는 빙글거리고 마네킹에 걸린 망토는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식탁 위에 놓인 찻주전자도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어찌나 유려하게 만들어졌는지 기계장치임을 알면서도 '이건 마법이야!'라고 믿고 싶어질 정도.
빛으로 재현해낸 파리의 가장 상징적인 기념물, 에투알 개선문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 놀랍도록 유쾌한 산책도 끝났습니다.
손에 쥐었던 지팡이를 다시 돌려놓고, 전시관 밖으로 나가려니 약간 서글픈 기분마저 듭니다.
하지만 이 산책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수집품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플라뇌르 정신'
돋보기가 달린 지팡이가 없어도
느긋하고 열린 마음으로 도시를 바라볼 준비만 되어있다면
언제 어디에서라도 에르메스의 마법을 다시 느낄 수 있겠죠.
마법 같은 산책을 떠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