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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도쿄

도쿄의 전철 안. 미처 말 걸 틈도 없이 사요나라, 사라지는 차창 밖 풍경들을 무기력하게 흘려 보냈다. 전철의 시간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일직선 하게 흐른다. 서울에서라고 안 그랬겠냐만은 돌아갈 타임의 데드라인이 정해진 여행 중에는 사소한 시간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진지하게 바라보게 된다. 열차표를 끊고 자리에 앉는 방식까지, 알고 있던 상식이 안 먹히는 서울 옆, 서울과 비슷한 듯 다른 세상. 비행기를 타고 하네다 공항에서 내려 시내로 진입하는 전철을 탄 것이 아니라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그대로 ‘도쿄역’까지 직행하는 전철을 탄 것처럼 내가 알고 있던 세상과는 크게 다르지 않은 도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철 안은 모르는 얼굴로 가득했다. 서울 전철 안의 가득한, ‘모르는 사람들’과는 또 다른 의미의 모르는 사람들. 태어나 처음 만나는 일본 사람들이 기다란 전철 의자에 줄지어 앉아 있었다. 이들에 비하면 서울의 모르는 사람들은 진짜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들 조금씩은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 모두가 갸루족이거나 코스프레 중인 건 아니었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본 듯한 평범한 동네 주민들이 엇비슷하고 조화로운 풍경으로 앉아 있었다. 모두 제각각으로 다르게 생겼으나 신기하게도 같은 색깔의 계열로 그라데이션을 넣은 듯, 한 무리라는 인상을 주는 사람들. 뿔테 안경 너머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여자애의 종아리에는 반 타이즈가 감겨 있다. 옆에 앉은 할머니는 안쓰러울 정도로 작은 체구로 시장바구니를 꼭 쥐고 있고 또 다른 청년은 삐죽삐죽하게 자른 머리에 검은 양복을 걸쳤다. (정장이라는 컨셉이 주는 격식보다는 하루하루를 견디는 일상의 땀내가 옷에 배어 닳아버린 유니폼이라는 인상을 주는.)

서울에서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다들 피곤한 기색이라는 점이 그들에게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 일을 많이 하면 피로를 느끼는, 나와 같은 성정의 인간들과 함께 오후 끝자락의 졸음이 고여 있는 전철을 타고 있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 바짝 조여 왔던 긴장감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떠나기 전의 우려와 걱정이 우스워질 정도로 서민적인 풍경. 그 어디에도 희롱을 걸거나 폭력을 행사 할만한 시민은 보이지 않는다.

마음에 품고 있던 은장도의 귓불이 빨개지도록 민망해져 버렸지만 완전해제하기에는 아직 좀 이른 것 같아 조금 더 품고 있기로 했다. 연고 하나, 친구 하나 없는 이 나라에서 내 처지는 약자와 강자의 양 사이드를 오고 간다. 가이드북 하나에 모든 걸 의지하는 도쿄의 까막눈이라는 점에서는 비루한 처지이지만 누군가의 지쳐 빠진 퇴근길을 관찰하며 유희하는 사치스러운 여행객이라는 이중신분을 오가며 의기소침해졌다가 우쭐해졌다가를 골고루 반복했다.

지금의 상황을 만화로 그린다면 머리 위로 떠오른 말풍선에 히라가나와 가타카나가 세로줄로 삽입될 테고 내 말풍선만은 가로줄의 한글로 가득할 것이다. 나만 다르다는 소외감과 홀로 특별하다는 희열감이 묘하게 섞인 심리상태는 여행자들에게 주입되는 독특한 환각 증세처럼 달콤하게 마음을 파고들었다. 조국에서 누리지 못한 새로운 신분을 부여 받은 것이다. '방랑자'라는. 이 새로운 신분증에 자꾸 마음이 들뜨는 것은 딱 오일 간 주어진 신분세탁이기 때문. 지친 사람들 틈에서 홀로 자유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흥분한 나는 처음 지하철을 탄 아기처럼 창밖의 풍경을 보고 또 봤다.

“공간도 시간과 마찬가지로 망각을 낳는다. 공간은 인간을 여러 관계로부터 해방시키며, 인간을 원래 그대로의 자유로운 상태로 옮겨 놓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 공간은 고루한 사람이나 속물조차도 순식간에 방랑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시간은 망각의 강이라고 하지만, 여행 중의 공기도 그러한 음료수인 셈이다.”
- 토마스 만의 <마의 산> 중-

두리번두리번, 호기심과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여행자의 시선은 그 나라를 알아가는 일이면서 동시에 나를 알아가는 성찰로 귀결되고는 한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를 비교하며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여행은 그곳이 어디든 이상한 거울나라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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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쓰시네요! 사진이 없는데도 흡입력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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