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tory
2 years ago5,000+ Views

●재산이 없어도 줄 수 있는 7가지●

안녕하세요.
부산연금형부동산연구소 안소장입니다.
오늘은 늦가을비(?)가 촉촉히 내렸습니다.
마음에 양식을 준 것처럼 따뜻하네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자연은 위대합니다.
우리는 무언가 가지기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좋기 마련이죠.
언제부턴가 베푸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10여년 전부터 유니세프에 매달 2만원씩 기부하고 있습니다.
한번씩 통장에서 빠져 나간 돈을 확인할 때 행복해집니다.
만약 부자든 빈자든 관계없이 마음만으로도 줄 수 있다면
모두가 그것을 실천한다면 이 사회가 더욱 행복해지겠지요.
언젠가 부처님과 관련된 일화를 접하게 되었는데요.
저절로 미소가 번지며 잔잔해진 적이 있습니다.
무재칠시(無財七施):가진 것이 없어도 줄 수 있는 일곱 가지
하루는 어떤 사람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습니다.
"저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으니 이 무슨 이유입니까?"
"그것은 네가 남에게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저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빈털터리입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느리라.
아무리 재산이 없더라도 줄 수 있는 일곱 가지는 누구나 다 있는 것이다."
▣첫째, 화안시(和顔施)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띠고 부드럽고 정다운 얼굴로 남을 대하는 것이요.
▣둘째, 언시(言施)
마을을 다하여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이요.
사랑의 말, 칭찬의 말, 위로의 말, 격려의 말, 부드러운 말 등이다.
▣셋째, 심시(心施)
따뜻하고 어진 마음으로 남을 대하는 것은 마음을 주는 것이다.
▣넷째, 안시(眼施)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눈으로 베푸는 것이요.
▣다섯째, 신시(身施)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몸으로 때우는 것으로
남의 짐을 들어준다거나 일을 돕는 것이요.
▣여섯째, 좌시(座施)
때와 장소에 맞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으로
불편한 사람에게 자리를 보시하는 것이요.
▣일곱째, 찰시(察施)
굳이 묻지 않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알아서 도와주는 것이다.
네가 이 일곱 가지를 행하여 습관이 붙으면 너에게 행운이 따르리라.
하루에 수없이 많은 보시를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습니다.
오늘 나는 얼마나 많이 베풀었는지 돌아봅니다.
0 comments
Suggested
Recent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펌) 90년대생은 과잉설비와 같다.
출처 : 90년생이 온다 1. 당시 80년대 3저호황과 88올림픽 이후 한국 경제는 유래없는 호황을 맞았다   2. 또한 87년 6.29 선언 이후,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치, 경제 모두 황금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3. 이때부터 저출산 고령화라는 것을 정책입안자 분들이 일본을 통해 인식하였고, 인구감소 정책을 용도 폐기하였다.   4. 때마침 베이비붐세대 끝자락~386세대 초반 세대가 결혼 적령기에 들어섰다.   5. 그리고 사람들은, 마치 기업이 호황에 따른 기대감에 설비투자를 증설하듯, 애를 많이 낳을만한 여건이 되자, 결혼과 출산을 하였다..   6. 하지만, 이는 현금흐름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잡은 기업이 흔히 하는 실수와 마찬가지였고, 그렇게 91년~96년까지의 매년 70만명대의 아이들은 과잉 설비마냥 그렇게 태어났다.   7. 그리고 1997년, IMF가 터졌다.   8. 단기성 악재일지언정, 이제까지의 현금흐름 예측이 틀렸다는것이 입증되었다.   9. 당장 급한 불을 끄고 후유증을 치료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누구도 이 과잉 설비들이 20년 후에 어떤 고통을 겪을지 상상하지 못했다.   10. 안타깝게도 기업의 과잉설비는 매각이 되지만, 인간은 그렇지가 못하다.   11. 때문에 과잉설비인 90년대생이 공급하는 노동력, 노력이라는 생산물의 가치는 공급과다로 인해 덤핑 수준의 가격이 되었고, 투입 대비 산출의 값은 점점 낮아졌다.   12. 이는 일본의 신인류 세대가 겪었던 트랙을 좀 더 빠르고 밀도있게 겪는 모습이다.   13. 다시 IMF로 돌아가보자. 97년 이후로 출생아수는 급격히 줄어들어, 5년만에 61만명에서 49만명으로 떨어졌고, 그 이후로도 꾸준히 감소 추세에 있다.   14. 이들은 일본으로 치자면 사토리 세대이다. 그들은 신인류 세대의 고통을 바로 뒤에서 보았고, 그로 인해 기존의 과다한 공급과잉의 폐혜로 인한 자신의 QOL하락을 두려워한다. 마찬가지로 과잉 설비인 N포세대의 고통을 보고 자란, 90년대 후반~2000년대생들은 기존의 가치관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있다.   15. 가령, 학벌에 대한 미련이 훨씬 적어진 것이 그 실례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공무원으로 몰리는 등, 점점 실용성이 극대화된 선택을 하고 있다.   16. 이는 전형적인 불황기 후반의 소비자의 상품 선택 모습과 일치한다.   17. 인구 구조가 급격하게 변한 것으로 보았을 때, 사토리세대에 해당하는 90년대 후반~2000년대 출생자들은 설비 과소 상태이므로 지금의 일본이 그러하듯 취업시에 상당한 어드벤티지를 누릴 것이다.   18. 아마 그 시점은 짧게는 5년후, 길게는 10년 후가 될 전망이다.   19. 현 정부의 기조를 봤을때, N포세대의 일자리 대책은 처참하기 이를데 없다.   20. 정부는 이제까지 일본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최소하하되, 기본적인 경제사회문화 정책은 따라가는 전략을 취했다. 따라서 추정컨데, N포세대는 버리는 패로 쓰고, 2000년대생들의 취업 해빙기를 앞당기려 할 것이다.   21. 최저임금 인상 및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역시 같은 이치이다. 노동시장에서의 비정규직을 없에서 향후 5년후 취업의 질을 높이고, 최저임금 인상은 버려진 N포세대에게 신인류 세대가 그러하듯이 별볼일없는 직장에서 죽지 않고 근근히 살아갈 돈을 주게 함이 목적이다.   22.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과잉설비에서 나온 노동력과 노력이라는 생산물의 가치는 덤핑 가격 수준으로 처참하기 때문이다.   23. 이 채산성 없는 석탄광산같은 세대   24. 90년대생, N포세대, 그래 우리는, 낳음당한 세대이고, 버림받은 세대이자   25. 과잉 설비같은 세대이다.  (출처 : 디시인사이드)
[펌][역사툰]백정의 사위가 된 이장곤 이야기.jpg
조선 시대에는 천인은 아니었지만 천인 취급을 받았던 이들이 있었다.  조례(皂隷)⋅나장(羅將)⋅일수(日守)⋅조졸(漕卒)⋅봉수군⋅역졸(驛卒) 등 이른바 ‘신량역천(身良役賤)’층이 그들이다. 이들은 신분상으로는 양인이었지만 하는 일이 천하다고 하여 천인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보다 더 천하게 여겨진 부류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백정(白丁)이다. 백정은 본래 고려 시대의 여진족 출신 재인(才人)과 화척(禾尺)을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대에 하나로 합쳐서 부른 이름이다. 고려 시대의 재인과 화척은 유목 생활을 하던 여진족의 후예로 천인 취급을 받았다.  세종대왕께서는 이들을 사회 구성원으로 통합하기 위해 천하게 불리던 재인이나 화척 대신에 고려 시대의 일반 백성을 뜻하는 백정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아울러 백정들에게 호적을 만들어 주고 평민과 섞여 살게 하는 등의 조치도 취하였다. 이렇게 하여 백정은 호적을 갖게 되었고 신분상으로는 양인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조치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그들을 ‘신백정(新白丁)’이라 부르며 계속 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반이나 관료들은 노비처럼 멋대로 부리기까지 하였다. 한편 화척의 후예인 백정들은 재인들과는 달리 마을에 거주하며 도살이나 유기(柳器) 제조 등에 종사하였다. 유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유기의 우리말인 ‘고리’를 붙여 ‘고리백정(古里白丁)’이라고도 불렀다.  이들 백정은 다른 마을 사람들로부터 심한 멸시를 받았다.  1809년(순조 9) 개성부의 한 백정이 혼인을 하면서 관복(冠服)을 입고 일산(日傘)을 받쳤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관복을 빌려 준 사람을 난타하고 백정의 집을 부순 후 개성부에 호소한 사건은 백정들의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잘 보여 준다.  마을 사람들은 심지어 관청에서 그 죄를 엄히 다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개성부 건물에 돌을 던지며 소란을 피우기까지 하였다. 성대중의 아들 성해응(成海應, 1760~1839)에 따르면 백정 가운데 고리백정이 소를 잡는 백정보다 더 천시받았고 그 때문에 주현에서 사형시킬 죄수가 있으면 그들에게 형 집행을 맡기기도 하였다고 한다.(『연경재집』 권59, 「楊禾尺」) 자료에 나오는 백정이 고리백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부당한 처사에 맞섰던 데서 백정들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백정들의 그러한 모습은 다음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한 자는 백정이다. 그렇지만 가장 두려워할 만한 자도 백정이니, 그들이 가장 천하기 때문이다. 문경의 공고(工庫)에 소속된 종이 백정을 구타하였는데, 백정이 죽자 재판을 하여 그를 사형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관아에서 종의 편을 들까 염려한 나머지 온 군내의 백정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칼날을 세우고 몰려와서는 마치 자신들의 원수를 갚듯이 하여, 기어이 직접 그의 사지를 갈가리 찢어 버리겠다고 관문에서 시끄럽게 굴었다. 이에 관아에서 간곡히 타이르니 그제야 돌아갔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청성잡기(靑城雜記)』 지방 관아에 소속된 종이 백정이 구타를 당해 죽이는 일이 발생하자 백정들이 억울하게 죽은 동료를 위해 집단행동까지 불사했던 것이다. 관노비에게 맞아 죽을 만큼 백정의 처지는 열악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출하고 있었다.  백정들의 의식이 변화했다고 해서 당장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있었기에 결국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자유의 신분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사회적 차별은 여전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사회적 차별에 저항하는 운동을 벌여 나가야 했다. 조선 시대에 백정은 가장 긴 고난의 길을 걸었던 부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전체 출처] 디시인사이드 카툰-연재 갤러리 [역사툰] 백정의 사위가 된 이장곤 이야기.jpg
5
Comment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