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차 말했듯... 픽션(허구)이 가미된 "소설"인
삼국지연의는 여러 인물들을 영웅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반면 그네들의 영웅화 ~ 신격화를 위해
숱한 이들을 엿 먹이기도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오늘도 역사범죄자 나관중에 의해 너프 당한
또 한 명의 피해자, "장합"에 대해 다뤄 보기로..!

장합은 삼국지정사, 위의 역사록인 위지, 후한의
역사록인 후한서, 본인의 열전인 위서의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에도 생년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사망 당시의 연령을 알 수는 없지만
원소에게서 조조 휘하로 들어갈 당시 대략...
40대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저 '장악우장서전'은 조조가 자신이
공을 이루는데 그 기여가 으뜸이라며 추켜세운
다섯 장수인,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을 묶어
편찬된 열전이다.
저 다섯을 일컬어 당시에 "오자양장(五子良将)"이라
불렀고, 촉한의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과 살짝
비슷한 뉘앙스인데, 오호대장군이란 별칭은 그 때는
없었고 후대 사람들이 붙인데 비해 저 오자양장은
당시 사람들이 붙인 것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 오호대장군같은 저 시절의
'드림팀' 또는 '어벤져스' 느낌의 패키징은 위의
다섯 장수가 원조다.
고향은 당시로는 기주의 하간군 막현(오늘날 중국
허베이성 중남부 인근)이라는 그때 치고도 꽤나 궁한
시골 작은 마을 출신이였다.
참고로 진짜 중국이 겁나 드넓긴 드넓은게...
삼국지 게임 내의 맵에서 기주는 작은 주로 나오나,
조운의 고향인 기주 상산군과 장합의 고향인
기주 하간군의 거리는 무려 166km고, 이 거리는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거리보다 멀다..ㅎㄷㄷ
만화, 게임, 책, 기타 여러 미디어물들을 봐도
다른 네임드급 인물들과는 달리, 외형 이미지가
일관적이지 못한 편인데... 이는 사료 어디에도
장합의 외모 묘사가 일언반구도 없고 그를 그린
그림조차 몇 없는데다, 그것들 마저 묘사가 모두
중구난방이다보니 도무지 이미지 통일이 안된 것.
다만, 장합의 리즈시절이 펼쳐지는 것이 조조에게
투항 이후인데 그 당시의 추정 연령이 위의 언급처럼
40대로 보고, 조조세력 합류 후부터도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을 활약하다 전장에서 전사한만큼,
사실상 각종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젊은'느낌의
장수로 표현하는 것은 어색한 감이 없지 않다.

장합은 조조 휘하 장수들 중 가장 많은 전장에
참전했고, 위의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전공이 많은
장수였으며, 주/부장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여러
숱한 전투에서 닳고 닳은 백전노장이였다.
그러다보니 큰 전장의 주요한 임무는 물론,
작은 전장의 자잘한 임무까지 가림없이 두루 맡았고
야구로 치면 4~5선발과 롱릴리프, 경우에 따라
급하면 불펜으로까지 던지면서 하루 걸러 등판하며
혹사 당하는 노예투수 비슷한 포지션의 장수였다.
그 깐깐한 조조가, 또 당시 휘하에 숱한 명장, 용장,
맹장들이 수두룩 빽빽 채이고 밟히고 널렸던 위에서
저토록이나 빈번히 굴렸다는건 그만큼 능력 있기에
믿고 쓸만큼 훌륭한 장수였다는 증거다.
심지어 백발노인 되어 집에서 손주들 재롱이나 보고
탑골공원가서 장기두며 야쿠르트나 얻어 마실 나이에
전장에서 한창 싸우다 전사하니...
죽어 눈감는 그 순간까지 위의 군밀레에 갈려나간
군돌이였다.

삼국지연의나, 연의를 바탕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각종 미디어물들을 보면 장합은 그냥 본인의
무예와 전장에서 구르며 익힌 짬밥으로 밀어붙이는
단순한 장수로 그려지나...
위에서 언급하듯, 저렇게 숱한 전장을 누볐고 또
깐깐깐돌 조조에게 신임받으며 주장으로도 쓰인만큼
사실 전략적 대국안도 상당히 뛰어난 "지략을 갖춘"
장수였다.
본래 기주의 군소 군주인 한복 휘하에 있다가
한복이 패망하자 원소의 세력에 속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전장의 시국을 살핀 후 원소나 원소의
책사들에게 여러 전략들을 입안 했으나 거의 다
씹혔다....
원소는 사람 자체가 선입견, 편견 이런 게 가득한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데다 또 고집은 있는 전형적
꼰대인 우리 회사 김대현 이사님같은 스타일이라
그저 야전에서 뒹구는 장수인 장합의 계책을 귀 담아
들어주질 않았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 정상에
올라 야호를 외치는 전형적 예였던 당시 원소의
책사들 역시, 지들끼리도 서로 내가 옳네, 내가 맞네
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장합까지 거기 껴서 자기
의견을 제출하니 고스란히 즈려밟아 무시했다.
이렇듯, 자기 아이디어와 의견이 매번 밟히던 끝에,
원소 VS 조조의 관도대전에서도 자기가 낸 계책이
원소의 책사 중 한 명인 곽도에게 씹혔고...
그 전투에서 결국 패하며 장합이 옳았음이 드러나자
곽도가 원소에게 장합을 모함하였으며, 이에 겁 먹은
장합은 결국 원소군 내에서 베프면서 역시 원소의
아쉬운 대우에 불만가득하던 '고람'과 함께 원소군의
망루에 불을 지르고 투항한다.
역사기록에는 이 "방화 후 이적"이 관도대전에서
원소의 패배 전인지, 후인지가 안나와 있으나
어쨌건 장합과 고람이 불 싸지른 망루는 당시로는
적군의 동태를 살피는 '레이더'역할을 하는 중요한
군사시설이였기에 이를 없앤 것 자체는 어쨌건
원소군에게 치명적이긴 했다.

삼국 정립 이후에는 주로 대촉전선에 투입되었고
이유는 조조가 양쯔강을 끼고 있던데다 북진의사가
거의 없는 손권에 비해, 명목상 "한실부흥" 내세워
줄기차게 자신들에 덤벼 오는 유비세력을 훨씬 더
위협적으로 여겼기 때문.
그때 손권과 대립하는 동부전선은 장료와 악진으로
묶어 두고 가용 가능한 네임드 장수들은 대부분
대촉전선에 투입되던 시기였다.
장합은 유비도, 유비 사후의 제갈량도 상당히
껄끄러워 하던 장수였다.
대촉전선의 총사령관 역할을 하던 하후연과 조홍보다
장합의 위치는 아래였으나 이는 위에서의 커리어,
또 하후, 조 두 장수는 조조와의 친인척 관계인지라
그럴 뿐... 장수로서의 자질은 저 둘을 뛰어넘던
장합이였으며 그래서인지 조홍과 하후연은 장합을
꽤나 견제했다.
아무리 자신들의 커리어가 앞서고 조조와 혈족이긴
하다지만 철저히 능력 위주로 사람을 쓰던 조조는
언제던 장합이 더 유능하다 드러나면 속절없이
자기들보다 장합이 더 상전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이를 막아낸 위방어군의
총사령관은 연의와 달리 사마의가 아닌 장합이였고,
4차 북벌 때, 목문도에서 유인책 쓰며 거짓 후퇴하는
촉군을 사마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뒤쫓자며
바득바득 우기고 쫓아가다 기어이 전사하는 연의와
역시 또 달리... 당시 제갈량의 흉계가 의심된다며
추격을 만류하던건 오히려 장합이요, 이에 대해
군령까지 내세워 제갈량을 추격할 것을 밀어붙여
장합을 사지로 내몬게 사마의였다.
이에 대해서도 또 제기되는 설이....
당시 장합과 사마의는 위의 대촉전선에서 은연중에
경쟁관계였었다.
쟁쟁한 커리어의 백전노장 장합, 그리고 위 군부
신진세력의 주축이던 사마의는 서로 견제하던
관계였으며 당시 직급상 사마의가 높았지만
그렇다해도 사마의에게 장합은 결코 직위로 쉽게
누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였고....
그런 장합을 이이제이 방식으로 간접 제거 하고자
제갈량의 계책을 눈치채고도 등 떠밀었다는 설이다.
연의에서의 묘사처럼 빗발치는 화살에 벌집이 되어
바로 죽기보다 화살을 여기저기 맞고 후퇴하던 중
과다출혈에 의한 쇼크사였다.
기록에는 허벅지에 맞은 화살로 인한 과다출혈이
결정적 사인이라 나와 있다.
참고로 허벅지는 대동맥을 비롯 여러 혈관 뭉치들이
지나는 곳이라 흉기에 잘못 찔리면 지혈도 힘들만큼
과다출혈이 발생하여, 옛날 야쿠자나 조폭들도 서로
칼부림 당시 오히려 방어하기 좋아 찌르기 여의치
않은 복부나 흉부보다 허벅지를 많이 노렸다고 한다.

동물을 좋아했는지, 직접 먹이를 주며 키우던 개가
있었다는 설이 있고 자신이 타던 말이 힘들까봐
행군하는 경우에는 중간중간 말에서 내려 걷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사료기록은 아니다.)
원소 휘하에서는 고람과만 거의 이야기를 나눴으나
조조에게 투항 후 각기 다른 부대에 배치되며 연이
끊어진 듯...
여러 장수들과 열전이 묶음으로 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신상과 일상에 대한 기록이 그닥 없다.
쉽게 말해 위의 장수로서의 공적인 기록은 좀 있지만
인간 장합으로서의 사적인 기록이 많지 않다..

장합이 커리어나 능력에 비해 그닥 인기 많은 인물은
아니다보니 왠지 이번편은 반응이 별로일거 같은 좀
불길한 예감이... T-T
그래도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 드린다는 ;;;